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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 韓國 言論界 큰 별의 一代記 ‘고재욱 評傳’[冊 속으로]|신동아

20世紀 韓國 言論界 큰 별의 一代記 ‘고재욱 評傳’[冊 속으로]

“韓國 現代史 混亂期에 反共·反獨裁·言論 自由 守護에 앞장선 巨人”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

    presskr@empas.com

    入力 2021-07-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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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시욱 지음, 동아일보사, 454쪽, 2만4000원

    남시욱 지음, 東亞日報社, 454쪽, 2萬4000원

    고재욱(1903~1976) 先生은 동아일보에서 一生을 보낸 言論人이다. 平生 職場인 동아일보가 履歷의 核心이지만 바깥 社會에도 重層(重層)의 經歷이 있다. 言論團體 會長, 理事長, 委員長 等으로 活動하며 社會에 參與했다. 言論이 이끄는 現代史의 소용돌이에서 ‘颱風의 눈’에 서 있던 人物이 고재욱이다. 그의 特異한 經歷에 關해 言論人 나절로(本名 禹昇圭)는 말한다.

    “심강(고재욱)의 履歷은 單 한 줄로 足하다는 것은 有名한 이야기다. ‘어느 해 어느 날 入社, 어느 해 어느 날 몰(歿)’이라 記錄하면 그것으로 할 말을 다 한다.”(‘인물론, 심강 고재욱’, 新聞과 放送, 1977)

    나절로는 동아일보 編輯局長, 論說委員, 論說室長(1956~1966)으로 在職하면서 고재욱을 至近에서 살펴봤다. 하지만 ‘20世紀 韓國 言論界의 큰 별’ 고재욱의 經歷을 이처럼 單純化해 敍述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面만 評價하는 ‘수박 겉핥기’가 되기 때문이다.

    고재욱 一生의 職場과 職業의 中心軸은 東亞日報였기에 職業人으로서의 그는 ‘동아일보의 고재욱’이라 할 수 있다. 우리 言論社는 浮沈이 甚했다. 平生을 한 新聞社에서 보낸 人物은 고재욱 以前에 찾기 어렵다. 記者로 入社해 最高經營者 地位까지 올라간 人物은 더욱 드물다. 요즘은 一線 記者로 出發해 社長까지 지내는 言論人이 적지 않지만 ‘고재욱 時代’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재욱은 1931年 동아일보에 入社했다. 日帝의 强壓으로 동아가 廢刊이라는 死刑宣告를 받았을 때 編輯局長이 바로 그다. 光復 後 復刊하면서 다시 編輯局長에 復歸해 左右翼이 尖銳하게 對立하던 혼란스러운 時期에 新聞 製作과 論調를 總括하는 主筆을 맡았다. 그 役割이 莫重했음은 說明이 必要하지 않을 것이다.



    6·25戰爭과 1950年代의 反獨裁 鬪爭, 4·19革命, 5·16軍事政變으로 이어진 現代史의 激浪 속에서, 고재욱은 우리나라에서 影響力이 가장 큰 新聞社의 編輯局長과 主筆 자리를 지켰다. 그는 現代史의 目擊者이자 證人이었다. 經歷 表面에만 기초해 그의 一生을 年代記式으로 살펴봐서는 안 되는 理由다.

    1968년 4월 17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신문재단 총회 폐회식에서 고재욱 당시 동아일보 사장(오른쪽)이 감사패를 받고 있다. [동아DB]

    1968年 4月 17日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신문재단 總會 閉會式에서 고재욱 當時 동아일보 社長(오른쪽)李 感謝牌를 받고 있다. [東亞DB]

    고재욱과 履歷이 닮은 著者

    고재욱은 동아일보 記者로 言論界에 入門해 生을 마친 1974年까지 經濟部長, 編輯局長, 主筆, 副社長, 社長, 會長, 名譽會長 等을 지냈다. 고재욱이 記者로 出發한 해에 日帝는 滿洲事變을 일으키면서 言論彈壓의 고삐를 조였다. 漸漸 統制를 强化하다 太平洋戰爭을 앞둔 1940年 8月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强制로 廢刊하고 말았다.

    고재욱이 記者로 뛴 期間은 짧다. 日本 名文 교토帝國大學에서 經濟學을 專攻한 그는 入社 2年 만에 部長, 8年 만에 編輯局長으로 昇進했다. 直接 記事를 쓴 時間이 길지 않아 言論人 經歷에 비하면 남긴 글이 적은 便이다. 하지만 新聞은 元來 여러 記者와 筆陣이 集團的·有機的으로 作業한 結果를 紙面으로 製作해 讀者에게 傳達하는 商品이다. 取材와 製作 段階에서 데스크로 부르는 部長, 局長, 主筆의 피라미드 꼴 組織이 參與하므로 編輯局과 論說室 最高 責任者는 오케스트라의 指揮者에 比喩되기도 한다. 이는 言論의 屬性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認定하는 初步的인 常識이다.

    ‘고재욱 評傳’ 著者 남시욱은 이 冊을 執筆하기에 더없이 適切한 條件과 資格을 갖춘 人物이다. 1959年 동아일보 收拾 1期로 言論界에 入門해 같은 新聞에서 編輯局長을 지내고, 文化日報 社長을 歷任한 元老 言論人이다. 고재욱과 비슷한 社內 經歷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 副會長과 會長(1989~1996)을 지낸 履歷까지 닮았다.

    남시욱의 活動 分野와 範圍는 동아일보에 限定되지 않는다. 그는 大學에서 講義하는 言論學者이면서 韓國 政治界 保守와 進步勢力, 6·25戰爭 等 무게 있는 主題의 冊을 쓴 著述家다. 이런 經歷의 言論人이자 敎授, 著述家인 남시욱이 고재욱 評傳을 썼다는 事實은 그 自體로서 대단한 무게感을 지닌다. 評傳을 執筆하고자 著者는 關聯 文獻을 涉獵하고 젊은 記者처럼 발로 뛰는 取材도 遂行했다. 고재욱의 故鄕 全南 潭陽郡 古宅을 踏査해 當時 모습이 어떻게 保存되거나 變했는지 돌아봤다. 또 親戚을 만나 證言을 듣는 等 一線 記者의 現場 取材 方式으로 冊을 썼다. 고재욱의 日本 留學 時節을 追跡해 그가 卒業한 교토大 成績表까지 入手했다. 이 같은 努力의 結實로 이 冊이 出刊된 것이다.

    經濟記者 거쳐 編輯局長으로

    1952년 6월 정부의 야당 탄압을 사설로 비판했다가 구속된 고재욱 당시 동아일보 편집인이 이승만 대통령 특명으로 석방됐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1952년 6월 5일자 기사. [동아DB]

    1952年 6月 政府의 野黨 彈壓을 社說로 批判했다가 拘束된 고재욱 當時 동아일보 編輯人이 李承晩 大統領 特命으로 釋放됐다고 報道한 東亞日報 1952年 6月 5日子 記事. [東亞DB]

    記者 初年에 고재욱은 經濟部에 所屬됐다가 部長을 맡았다. 나절로는 고재욱의 經濟部長 役割을 이렇게 評價했다.

    “往年 동아일보의 經濟部長으로 있을 때에 딱딱한 經濟面을 나긋나긋하게 만들어 讀者의 興味를 社會面의 그것처럼 돋우는 技倆을 發揮했다. 端雅한 學者風格이면서도 차고 매운 듯한 것이 고재욱 氏의 첫印象이다.”(‘신문인 白人 寸評’, 新天地, 1948)

    1945年 12月 1日 동아일보가 復刊되면서 고재욱은 編輯局長에 復歸했다. 하지만 한 달 만인 12月 31日 當時 社長 宋鎭禹가 서울 鍾路區 원서동 自宅에서 怪漢의 凶彈에 쓰러졌다. 고재욱은 1946年 4月 主筆을 맡았다가 이듬해 7月 主筆 兼 編輯局長이 됐다. 新聞의 核心的인 職責 두 個를 同時에 遂行한 것이다.

    外部 活動도 竝行했다. 그해 8月 10日 結成된 朝鮮新聞記者協會 委員長을 맡았다. 左派 系列 宣傳紙 구실을 하는 新聞이 主流를 이루던 時期다. 新聞社 襲擊, 테러, 言論人 拘束이 頻繁하던 混亂期이기도 했다. 1946年 9月부터 1947年 8月까지 1年 사이에 테러團 襲擊으로 破壞된 新聞社가 11個社에 達했다. 被襲 言論人이 55名, 檢擧된 言論人은 150餘 名에 達했다. 記者團이 美軍政 當局에 言論인 身邊保護를 여러 次例 要求했을 程度로 險惡한 時代였다.

    동아일보는 光復 以後 左右翼이 對立하던 混亂期와 1950年代에 反共-反獨裁(反獨裁) 鬪爭의 先頭에 섰다. 고재욱은 이 時期 동아일보 主筆이었다. 政治 깡牌가 暴力的으로 野黨 集會를 妨害하고, 投票函을 바꿔치기 하는 換票(換票) 方式의 不正選擧까지 이뤄지던 ‘無法天地’에 新聞은 國民의 所重한 權利를 지켜줬다. 동아일보는 고재욱이 在職한 期間 韓國 言論을 代表하던 新聞이다.

    ‘고재욱 評傳’ 著者 남시욱은 當代 동아일보의 位相과 고재욱의 活動을 살펴보며 자연스럽게 우리 現代史를 풀어나간다. 言論界 巨木의 行跡이 現代史와 어떻게 聯關되는지 糾明한 것이다.

    고재욱은 東亞日報를 이끈 두 主役 金性洙, 宋鎭禹와 어릴 때부터 因緣이 있었다. 學閥도 좋았기 때문에 入社 以後 順坦한 言論人의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實相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競爭과 緊張의 連續이었다. 受難을 甘受하지 않을 수 없는 境遇도 있었다. 고재욱의 避할 수 없는 宿命이었다.

    金九 先生이 暗殺되기 한 달餘 前인 1949年 5月 동아일보는 李承晩과 金九가 德壽宮에서 和氣靄靄하게 만나는 場面을 몽타주한 寫眞을 실었다. 고재욱은 이에 對한 責任을 지고 編輯局 顧問으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避亂 首都 釜山에서 다시 主筆 兼 編輯局長職을 맡았다. 동아일보가 試鍊과 激動을 맞을 때마다 編輯과 論說을 指揮한 그는 1961年 7月 主筆 兼 副社長이 될 때까지 編輯局長 7番, 主筆 10番이라는 記錄을 지니게 됐다.

    고재욱은 1955年 4月 18日, 이른바 ‘傀儡 誤植事件’으로 동아일보가 1個月 間 武器 停刊당했을 때 그 責任을 지고 編輯顧問으로 물러앉은 일도 있다. 當時 ‘韓美纖維協定’ 記事 題目에 ‘傀儡’라는 單語가 잘못 揷入됐다. 自由黨 政權은 그것을 빌미로 停刊 處分을 내렸다. 組版工의 單純한 失手가 낳은 事件의 불똥이 製作 責任者 고재욱에게 날아든 셈이다. 辨明의 餘地가 없는 失手였지만, 政權이 批判的인 新聞에 極端的인 行政處分을 내린 것도 맞다. 동아일보는 日帝强占期에 네 次例 停刊을 當했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도 같은 受難을 겪었다.

    軍士政變 以後 言論自由 鬪爭의 先鋒

    1976년 6월 22일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고재욱 전 동아일보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모습. [동아DB]

    1976年 6月 22日 김종필 當時 國務總理가 고재욱 前 동아일보 會長 殯所를 찾아 弔問하는 모습. [東亞DB]

    1961年 5·16軍事政變 以後 言論界는 커다란 陣痛을 겪었다. 國家再建最高會議가 言論社 日帝 整備를 斷行해 수많은 媒體가 폐간당했다. 여러 言論人이 筆禍로 拘束돼 軍事裁判에 回附되기도 했다. 4·19 以後 第2共和國 時節 言論의 自由를 無限大로 謳歌하던 時代와는 全혀 다른 環境이었다. 고재욱은 이 時期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 會長을 맡았다.

    동아일보는 1962年 7月 28日 ‘國民投票는 萬能이 아니다’라는 論說을 실었다가 主筆 고재욱과 論說委員 황산덕(黃山德)李 拘束되는 일을 맞았다. 1961年 5月 軍士政變 以後 1963年 12月의 民政 移讓까지 約 2年 半 東亞 동아일보는 7件의 筆禍 事件을 겪었다고 남시욱은 이 冊에 쓰고 있다. 모두 고재욱이 主筆이던 時節 일이다.

    著者는 고재욱의 言論自由 鬪爭 가운데 가장 빛나는 業績은 朴正熙 政權이 强行하려 한 ‘言論倫理委員會法案’을 좌절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1964年 8月 1日 공화당은 이 法案을 國會에 上程해 8月 2日 밤中에 通過시켰다. 言論界가 이 法 施行을 反對하면서 이른바 ‘言論倫理委員會法 波動’이 始作됐다. 當時 韓國新聞編輯人協會長 고재욱은 法案 撤廢 鬪爭의 中心 人物이었고, 法案 施行을 沮止하는 成果를 거뒀다.

    고재욱은 1965年까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會長으로 言論界를 代表했고, 1962年 社團法人 韓國新聞會館 創設과 同時에 理事長에 就任했다. 오늘의 프레스센터-韓國言論振興財團으로 成長한 機構의 前身이다. 그는 1965年 7月 동아일보 社長에 就任했고, 國際新聞協會(IPI) 韓國委員長職도 겸했다. 1966年에는 韓國新聞硏究所 理事長을 맡았다.

    고재욱이라는 言論界 큰 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言論과 現代史를 쉽게 理解할 수 있다. 흩어진 퍼즐을 맞추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平凡한 人間도 그가 살았던 時代 歷史의 한 部分을 차지한다. 하지만 歷史의 巨大한 흐름에서 櫓를 저었거나 操舵手 役割을 한 사람은 그가 산 時代를 더 넓은 視野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案內해 준다. 고재욱은 言論人의 使命感으로 事實을 傳達하고 批判하면서 自己 몸으로 부딪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에 對한 評傳은 意味가 깊다. 고재욱을 現代史의 脈絡에서 되살려낸 著者 남시욱의 卓越한 敍述 方法도 돋보이는 力著다.

    #고재욱 #남시욱 #동아일보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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