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年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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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年 戰爭
날짜 1337 - 1453
場所
프랑스, 低地帶 國家 , 잉글랜드, 스페인 等 西유럽 一帶
結果

全體的으로 프랑스의 勝利

交戰國

百年 戰爭 ( 英語 : the Hundred Years' War , 프랑스語 : la guerre de Cent Ans )은 1337年부터 1453年까지 116年이라는 期間 동안 잉글랜드 王國 플랜태저넷 가 프랑스 王國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王位 繼承 問題를 놓고 일어난 一連의 紛爭들을 總體的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플랜태저넷 가와 발루아 가 兩側 모두 여러 同盟者들을 戰爭에 끌어들였다. 中世 유럽에서 가장 有名한 戰爭 中 하나로, 西유럽에서 가장 넓은 땅의 王位를 두고 두 王朝가 5代 117年에 걸쳐 싸운 壯大한 戰爭이다. 記事 의 最高 全盛期이자 同時에 記事階級의 衰退가 始作된 時期이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兩國 모두 戰爭으로 인해 强固한 國民正體性 이 싹트이게 됐다.

1066年,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征服 以來로 잉글랜드 國王은 프랑스 땅에 保有한 領地에 對하여 프랑스 國王의 名目上 諸侯였다. 프랑스의 歷代 國王들은 數 百年에 걸쳐 잉글랜드 國王의 領地를 빼앗아 왔으며, 百年戰爭 當時 즈음에는 잉글랜드 國王이 實效支配하던 땅은 가스코뉴 程度밖에 없었다. 프랑스 立場에서 이 땅을 吸收하여 잉글랜드 勢力을 유럽 大陸에서 完全히 逐出하려 試圖하는 것은 곧 잉글랜드의 國力을 試驗해 보는 것이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同盟國 스코틀랜드 와 戰爭 中일 때면 언제나 그 試圖를 實行으로 옮기려 했다.

잉글랜드 國王 에드워드 3歲 의 어머니는 프랑스 國王 필리프 4歲 의 딸 이사벨라 로, 에드워드 3世는 프랑스 카페 本家 의 마지막 王인 샤를 4歲 와 叔姪關係였다. 1316年 프랑스에 살리카法 이 導入되면서 女性의 王位 繼承이 禁止되었다. 1328年 샤를 4世가 죽자 女性으로서 프랑스 王位를 要求할 수 없게 된 이사벨라는 代身 自己 아들 에드워드의 王位 繼承을 主張했다. 프랑스 側에서는 이사벨라가 自身에게 애初에 주어지지 않은 王位繼承權을 그 아들에게 讓渡할 수 없다는 根據로 그 主張을 無視했다. 以後 9年間(1328年-1337年) 잉글랜드 王家는 카페 街의 傍系인 발루아 가 가 프랑스 王位를 繼承하는 것을 容認했다. 그러나 발루아 街의 初代 王 필리프 6歲 가 에드워드 3世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歲 사이의 戰爭에 介入하면서 에드워드 3世는 다시 프랑스 王位를 要求하게 되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戰爭이 始作되었다. 以後 잉글랜드는 크레시 , 푸아티에 , 아쟁쿠르 等地에서 連戰連勝하며 戰爭에서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프랑스 國王이 動員할 수 있는 國力 自體가 잉글랜드를 凌駕했기에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完全히 征服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1429年부터 反擊을 始作해 오를레앙 , 파타이 , 抛흐美늬 , 카스티용 에서 決定的 勝利들을 거두면서 戰爭은 프랑스의 優勢로 끝났고 잉글랜드 王家는 유럽 大陸의 領地 大部分을 永久히 喪失했다.

歷史學者들은 百年戰爭을 中間中間의 休戰 들에 따라 세 段階로 區分한다. 1337年-1360年은 에드워드 戰爭 , 1369年-1389年은 캐롤라인 戰爭 , 1415年-1453年은 랭커스터 戰爭 이라고 한다. 百年戰爭과 同時期에 進行된 周邊 地域의 戰爭으로는 브르타뉴 王位 繼承 戰爭 (1341年-1364年), 카스티야 內戰 (1366年-1369年), 아라곤 두 페드로의 戰爭 (1356年?1375年), 포르투갈의 1383年-1385年 危機 가 있다. 後代의 歷史學者들은 "百年戰爭"이라는 用語를 14世紀 末 15世紀 初에 일어난 이 모든 戰爭들을 包括하는 時代名으로 使用하며, 이에 따르면 百年戰爭은 유럽史에서 가장 오랫동안 持續된 軍事 紛爭이 된다.

百年戰爭은 여러 가지 要素에 歷史的 重要性을 가지고 있다. 百年戰爭 末期가 되면 常備軍이 封建君을 代身하게 되었고, 그와 同時에 戰爭에서의 貴族들의 役割도 大衆 中心의 軍隊의 人力과 無氣力으로 代替되었다. 戰爭의 始作은 어디까지나 王家들 사이의 紛爭이었지만 戰爭을 거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平民들에게 國民意識이라는 것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中企病 中心의 封建軍이 代替되면서 새로운 武器와 戰術들이 導入되었고, 特히 砲兵 이 重要해졌다. 百年戰爭은 서로마 帝國 이 亡한 以後 西유럽 世界에 常備軍 槪念의 復活을 觸發시켰다. [1] 한便 戰爭 當事國인 兩國의 事情을 보자면 于先 프랑스에서는 內戰과 疫病, 飢饉, 그리고 山積떼에 가까운 自由重大 傭兵 들의 蠢動 等으로 인해 人口가 急激히 減少했다. 잉글랜드에서는 莫大한 費用을 들인 것에 비해 戰爭의 成果가 시원치 않고 오히려 大陸 領地들을 永久히 喪失하게 되자 貴族들이 不滿을 가지게 되어 薔薇戰爭 (1455年-1487年)이라는 內戰이 벌어졌다.

原因 [ 編輯 ]

잉글랜드는 노르만 王朝 의 成立 以後 프랑스의 一部 領土를 所有하였는데 이 때문에 兩國 사이에는 紛爭이 繼續되었다. 13世紀 末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國王의 프랑스 內 領土가 프랑스 國王보다 더 많은 地境에 이르렀다. 그러나 中世 封建制度 下에서 잉글랜드 國王은 잉글랜드 王國의 君主이면서 同時에 프랑스 國王의 臣下라는 二重 地位를 갖고 있었다.

狀況이 이렇게 된 것은 中世 封建 制度의 特徵上, 結婚을 하게 되면 女子가 男子에게 自身의 封土를 結婚 持參金으로 넘겼기 때문이었다. 노르만 王朝 成立 以後 잉글랜드 國王은 亦是 애初 프랑스 國王의 封臣이었던 노르망디 公國의 領主였고, 노르만 王朝의 뒤를 이은 플랜태저넷 王家 ( 1154年 ~ 1399年 ) 亦是 本來 프랑스의 앙주 百이었다. 플랜태저넷 王朝는 잉글랜드 國王으로서 노르망디度 當然히 繼承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프랑스 內에서 잉글랜드 王의 입김은 프랑스 國王보다 더욱 셌지만, 法律上으로는 잉글랜드 國王은 프랑스 國王의 臣下였다. 이 무렵 프랑스의 카페 王朝 의 影響力은 現在의 파리시 를 中心으로 한 日-드-프랑스 地域에 局限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國王의 立場에서는 當然히 不滿이 많았다.

프랑스의 王位를 둘러싼 발루아 王家와 플랜태저넷 王家의 葛藤 [ 編輯 ]

1328年 2月 1日 프랑스 카페 王朝의 샤를 4歲 가 子女 없이 死亡한다. 샤를 4世가 죽기 前 샤를의 아내는 妊娠 中이었는데, 이를 두고 샤를은 遺言으로 萬若 自身의 태어나지 않은 子女가 아들이면 프랑스 王位를 물려주고, 딸이면 샤를과 四寸 關係( 필리프 3歲 (프랑스) 의 孫子들이었다.)인 발루아 王家 의 필리프에게 王位를 물려주라는 遺言을 남긴다. 그리고 4月 1日 샤를의 劉復 子女로 딸이 태어나자 곧바로 會議가 열리고, 샤를의 遺言에 따라 필리프 6歲 (在位: 1328年 ~ 1350年 )가 프랑스의 國王이 된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필리프의 프랑스 王位 繼承에 反旗를 든다. 當時 잉글랜드 國王의 어머니로 實權을 掌握하고 있던 이사벨라는 自身이 죽은 샤를 4歲의 누이라는 點을 들어 앞에서 言及한 필리프의 王位 繼承을 決定하는 會議에 自身이 프랑스의 王位 繼承權을 主張했고 女子가 直接 王位 繼承이 不可能하다 하더라도 萬一 그女의 아들에게 繼承시킬 수 있다면 잉글랜드 國王 에드워드 2歲 의 王妃 이사벨라(샤를 4歲의 누이)의 아들인 에드워드 3歲 (在位: 1327年 ~ 1377年 )가 王位 繼承者가 된다는 主張도 成立되었다. 이것을 핑계로 삼아 잉글랜드 國王 에드워드 3世는 프랑스 王位를 自身이 繼承해야 한다고 主張하여, 兩國 間에 深刻한 對立을 빚게 되었다. 이참에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하나의 巨大한 王國으로 統合할 欲心을 갖게 된 것이다.

필리프 6歲의 立場에서도 自身의 臣下 中에 自身을 凌駕하는 勢力이 있다는 것은 決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다른 나라의 國王이기도 했다. 잉글랜드 國王이 프랑스 國王의 臣下로서 가지고 있는 封土를 沒收하여 프랑스 國王의 威信을 높여야 할 必要性과 欲心을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 國王의 王位 繼承權 主張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領土 問題와 王位 繼承權 問題로 인한 두 王家의 葛藤은 對話로 풀 수 있는 狀況이 아니었다.

百年戰爭 前後 잉글랜드-프랑스 王家 家計도 [ 編輯 ]

필리프 3歲
프랑스 國王
在位 1270年?1285年
필리프 4歲
프랑스 國王
나바르 國王
在位 1285年?1314年
에드워드 1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272年-1307年
샤를
발루아 伯爵
1325年 몰
루이 10歲
프랑스 國王
나바르 國王
在位 1314年?1316年
필리프 5歲
프랑스 國王
나바르 國王
在位 1316年?1322年
샤를 4歲
프랑스 國王
나바르 國王
在位 1322年?1328年
이사벨라
프랑스 王女
에드워드 2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307年-1327年
필리프 6歲
프랑스 國王
在位 1328年?1350年
조안 2歲
나바르 女王
1312年 生
조안 3歲
부르고뉴 伯爵夫人
1308年 生
에드워드 3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327年-1377年
1337年
戰爭 始作
腸 2歲
프랑스 國王
在位 1350年?1364年
필리프
오를레앙 工作
샤를
에브뢰 伯爵
1332年 生
필리프
오베르뉴 伯爵
1323年 生
에드워드
黑太者

웨일스 공
곤트의 존
랭커스터 工作
샤를 5歲
프랑스 國王
在位 1364年?1380年
용담공 필리프
부르고뉴 工作
리처드 2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377年-1399年
헨리 4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399年-1413年
샤를 6歲
프랑스 國王
在位 1380年-1422年
루이 1歲
오를레앙 工作
헨리 5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413年-1422年
캐서린
프랑스 王女
샤를 7歲
프랑스 國王
在位 1422年-1462年
헨리 6歲
잉글랜드 國王
在位 1422年-1461年
1453年
戰爭 終了


經過 [ 編輯 ]

始作 [ 編輯 ]

잉글랜드를 牽制할 勢力이 必要했던 필리프 6世는 잉글랜드에 쫓겨 山岳地帶로 들어갔던 스코틀랜드 王國 에 注目했다. 當時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征服하기 위해 많은 努力을 기울이는 中이었다. 또, 필리프 6世는 에드워드 3歲의 新種誓約(아르투아 伯爵 로베르)에 트집을 잡고 잉글랜드 國王의 封土였던 아키텐令을 武力으로 占領하고 1337年 에는 아키텐令의 沒收를 宣言하였다. 또 노르망디 海岸에는 艦隊를 보내 잉글랜드를 威脅했다.

狀況이 이렇게 되자 1336年 , 에드워드 3世는 필리프 6世에게 公式的인 挑戰狀을 띄우고, 戰爭 準備에 들어갔다. 挑戰狀은 題目부터 <발루아 家門의 필리프, 自稱 프랑스 王>이라는 挑發的인 것이었다. 戰爭 準備는 自體 軍事力을 準備하는 것 말고도 外交戰도 熾烈하게 펼쳤다. 國家間 外交라기보다는 王家間 外交였는데, 神聖 로마 帝國 皇帝와 라인江 네덜란드 諸侯와 折衝을 거듭하여 <皇帝對官>의 地位와 攻守同盟의 約束을 성립시켰다. 그의 外交의 核心은 플랑드르 地方이었다.

元來 플랑드르 는 프랑스 王의 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中世를 통하여 유럽 最大의 毛織物 工業地帶로서 繁昌하여, 原料인 養母 의 最大 供給國인 잉글랜드가 이 地方을 經濟的으로 支配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戰爭 中 플랑드르는 잉글랜드 便에 섰다. 잉글랜드는 플랑드르 地方 都市들에 對해 새로운 宗主權을 主張했으며, 그들과 同盟을 맺었다. 에드워드 3世가 構築한 이른바 北方의 幻想同盟에 對해 필리프 6世는 제네바 카스티야 의 支援을 받았다.

아키텐領에 屬한 가스코뉴 亦是 유럽 最大의 葡萄酒 生産地였으므로, 프랑스 王들은 恒常 이 두 地方의 奪還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戰爭은 이 두 地方의 爭奪을 目標로 하게 되었다. 王位 繼承 問題는 늘 그렇듯이 名分에 不過했다. 이것의 백年戰爭의 첫 始作이었다.

第1期 [ 編輯 ]

百年 戰爭은 1340年 6月에 잉글랜드-플랑드르 聯合艦隊가 라인 江의 河口에 있는 브뤼주(只今의 브뤼허 ) 瑟罍이스港에 對한 프랑스 艦隊의 封鎖를 沮止하기 위해 攻擊을 始作하면서 始作되었다. 이 戰鬪에서 잉글랜드軍이 勝利하였고, 以後 도버 海峽 의 制海權은 잉글랜드가 차지하게 되었다. 116年이라는 期間 동안 프랑스만 戰爭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1345年 에드워드 3歲 는 그의 맏아들인 黑太者 에드워드 와 함께 노르망디 에 上陸하였다. 이듬해인 1346年 에 有名한 크레시 戰鬪 가 있었다. 이 戰鬪에서 잉글랜드軍은 農民들과 사냥꾼들로 構成된 步兵 臟弓 臺를 내세워 前歷이 훨씬 優勢한 프랑스 기사군을 擊破하였다. 步兵 臟弓代의 기사군 擊退는 火藥 武器 의 登場 以前에 中長期病의 沒落을 豫告한 것으로 評價되고 있다. 이 戰鬪에서 프랑스 기사군은 익숙한 戰法으로 一齊히 突擊을 試圖하였으나 진흙탕을 거치면서 騎兵의 特有한 衝擊力을 喪失한 狀態에서 臟弓代의 攻擊을 받은 것이다.

이때 잉글랜드軍이 動員한 臟弓은 그 以前에 石弓 에 비해서 훨씬 四거리 및 威力 뿐만이 아니라 演士力이 더 뛰어난 것이었다. 이 臟弓은 本來 웨일스 地方의 사냥꾼들이 使用하던 것이었으나 英國 王室은 그 威力을 알아보고 戰爭에 動員한 것이다. 反面 프랑스는 石弓病들을 配置했으나, 많은 戰鬪에서 石弓兵들은 英國 臟弓兵에게 敗北하였다.

잉글랜드軍은 크레시 戰鬪에 勝利한 그 餘勢를 몰아 칼레 時(市)로 進擊하여 이 城을 完全히 包圍하였다. 칼레 市民들은 頑剛하게 繼續 抵抗하였으나, 1347年 마침내 잉글랜드軍에게 降伏하였다( 칼레 包圍戰 ). 칼레 地球가 잉글랜드令으로 確定되면서 에드워드의 戰略은 앙주-플랜태저넷 王家의 옛 大陸 領土 全 地域의 回復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뒤 兩國에 페스트가 流行한 데다 財政事情度 惡化되어 한때 戰爭이 中斷되기도 하였으나, 1355年 黑太者는 다시 남프랑스를 侵入하였다. 1350年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世가 죽고 그 뒤를 이어 張 2世가 卽位하였으나, 1356年 黑太者는 腸 2歲 가 引率한 프랑스軍을 푸아티에 戰鬪 에서 擊破하고 腸 2歲를 捕虜로 잡았다. 이처럼 戰爭 初期에 거둔 英國軍의 一方的 勝利는, 獨立的 自營 農民을 主力으로 한 步兵의 臟弓臺 戰法이 프랑스의 封建 기사군의 戰法에 비해 優秀하였기 때문이었다.

1359年 다시 攻擊을 始作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는 和議를 請하였다. 1360年 샤르트르 近郊 브레티니 에서 프랑스 王家의 代表團과 協議하고 뒤에 칼레에서 푸아티에 戰鬪에서 捕虜가 되었던 프랑스王 腸 2歲(在位 1350年 ~ 1364年 )의 署名을 얻어 發效한 休戰 條約이 브레티니-칼레 條約 이다. 브레티니-칼레 條約은 푸아티에를 비롯하여 옛 앙주王令의 잉글랜드 王室로 歸屬을 規定한 다음 第12條에서 프랑스 王은 그 여러 領土에 對한 宗主權을 行使하지 않을 것, 잉글랜드 王은 特히 《프랑스 王冠과 王國의 이름 및 權利에 對한 請求權》을 抛棄할 것을 規定하였다. 이것은 애初부터 잉글랜드 王은 프랑스 王冠보다는 領土를 더 重要視했다는 反證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戰爭의 慘禍와 잉글랜드君의 掠奪로 農民의 疲弊가 激甚하여, 1358年 農民 叛亂인 자크리의 난 이 일어났다. 이 叛亂은 卽時 鎭壓되었지만, 프랑스 王家를 매우 甚한 窮地에 빠뜨렸다. 브레티니-칼레 條約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뒷背景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腸 2歲 는 釋放補償金으로 300萬 크라운을 支拂하는 것을 抛棄하고 런던에서 死亡했으며, 아키텐 地方 全部와 칼레 市(市) 等의 領土를 잉글랜드에게 割讓하였다. 이 當時에는 敵軍이라 하더라도 貴族들은 몸값을 받고 釋放하는 게 普通이었다. 현대에서는 全혀 想像할 수 없지만 그 當時에는 普遍化된 方式이었고, 地位와 名聲이 높을수록 몸값은 비싸게 매겨졌다.

이렇게 해서 백年戰爭의 1期는 幕을 내린다.

第2期 [ 編輯 ]

1364年 프랑스에서는 醬 2世가 죽고 샤를 5世가 卽位하였다. 그는 內政의 整備와 財政(財政)의 再建에 着手하였으며, 아키텐의 貴族들을 煽動하여 잉글랜드의 支配에 反抗하게 하였으므로, 兩國 사이가 다시 惡化되어 마침내 戰爭이 再開되었다. 1369年 黑太者의 동생인 곤트의 존 이 이끄는 잉글랜드軍이 프랑스로 侵入하였으나 프랑스軍의 奮戰으로 敗北하고, 잉글랜드 海軍 亦是 카스티야 海軍과 同盟을 맺은 프랑스 海軍에게 잇달아 敗戰하였다. 따라서 브레티니-칼레 條約에서 잉글랜드에 割讓限 領土의 大部分을 奪還하고, 1375年 부르지에서 休戰 協定을 締結하였다. 이처럼 2期 初期에는 프랑스에 유리하게 進行되었다.

그 뒤 1377年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歲 가 죽고 리처드 2歲 가 王位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도 1380年 샤를 5歲 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歲 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王이 모두 未成年(未成年)이었고, 特히 잉글랜드에서는 1381年 와트 타일러의 亂 이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 王의 支配에 對한 貴族의 反抗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戰爭은 오랫동안 中斷되었다.

德分에 앙주는 발루아 家計의 앙주 公領이 되어 브레티니-칼레 條約 締結을 主導했던 프랑스王의 代理人인 샤를(뒤에 샤를 5歲)에 이어 다시 1364年 以後에는 샤를 5歲의 동생 루이의 小幽靈이 되었다. 브르타뉴 에는 親프랑스 空家의 家計가 確立되었다. 1380年 샤를 5世가 死亡한 後 샤를 6歲(在位 1380年 ~ 1422年 ) 時代에 프랑스는 王族 諸侯에 依한 王政 後見 時代로 들어서게 되었다. 1404年 國王顧問會議의 代表 부르고뉴公 필리프의 事後, 그 아들 長과 王의 동생 오를레앙공 루이의 不和가 表面化하여 이른바 부르고뉴파 臺 아르마냐크파 對立의 局面을 맞이하였으나 샤를 5世가 確立한 王政 方式은 그 基本構造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이 維持되었다.

國際關係에서 注目해야 할 點은 부르고뉴 空家의 立場이었다. 플랑드르를 假令으로 한 公哥는 잉글랜드에 對하여 和親政策을 取하였다. 잉글랜드 王家側에서는 플랜태저넷 王朝 最後의 王 리처드 2歲 (在位 1377年 ~ 1399年 )가 프랑스에 對한 화친 方向을 摸索하였다. 프랑스 王의 딸 이사벨을 아내로 맞은 것도 그 一環이며 이를 周旋한 사람이 바로 부르고뉴 공 필리프였다. 結局 프랑스에 對한 融和政策이 反對黨派의 結成을 促進하여 1399年 리처드 2世는 廢位되었다. 리처드 2歲가 廢位된 後 랭커스터 街의 헨리 4歲 가 王位에 올라 프랑스에 對한 戰爭을 再開하였다. 프랑스에서는 種種 精神錯亂을 일으키는 샤를 6世를 代身하여 國政의 實權을 掌握하려고 한 貴族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內亂 狀態에 빠졌다. 부르고뉴파는 王室을 둘러싼 아르마냐크파를 牽制하기 위해 잉글랜드에 接近하게 된다. 戰爭 後半期에 잔 다르크 를 잉글랜드에 팔아넘긴 것도 부르고뉴파였다.

第3期 [ 編輯 ]

백年戰爭의 마지막 時期로 分類되는 3期는 1415年 에 始作되었다. 이 時期는 오를레앙 잔 다르크 로 要約될 수 있을 것이다.

1413年 헨리 4歲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國王으로 卽位한 헨리 5歲 는 프랑스의 內紛을 利用하여 부르고뉴파와 結託하고, 1415年 猛烈한 氣勢로 노르망디를 眞空, 아쟁쿠르 戰鬪 에서 壓倒的으로 優勢한 프랑스軍을 大敗시켜 北프랑스의 여러 都市를 奪取하였다. 헨리 5世는 이를 背景으로 1420年 트루아 條約 을 맺고, 스스로 샤를 6歲의 딸 카트린과 結婚함으로써 自身의 프랑스 王位 繼承權을 承認시켰다. 그러나 샤를 6歲의 아들인 王世子 샤를(샤를 7歲)과 이를 支持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이와 같은 잉글랜드側의 强要를 認定하지 않은 채 中南部 프랑스에 據點을 두고 戰爭을 繼續하였다. 1422年 잉글랜드의 헨리 5世와 프랑스의 샤를 6歲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歲 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國王을 自稱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王世子가 샤를 7歲로서 프랑스의 王位에 올랐음을 宣言하였다.

이에 잉글랜드는 1428年 샤를 7歲의 據點인 오를레앙 을 包圍하였다. 샤를 7歲 는 窮地에 몰리게 되었다. 아직 그는 正式 國王도 아니었다. 랭스 大聖堂 에서 戴冠式을 거쳐야 했으나 잉글랜드群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이다. 오를레앙은 1年餘를 버티고 있었지만, 希望은 別로 없어 보였다. 샤를 7世는 오를레앙을 救援할 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는 戰況의 不利함 때문에 兵力 動員도 쉽지 않았다. 傭兵이 週였던 이 當時에 프랑스의 不利한 戰況은 傭兵을 모으기 어렵게 하는 條件이었다.

이와 같이 不利한 戰況을 勝戰으로 轉換하게 한 것은 잔 다르크 의 出現이었다. 그女는 적은 數의 프랑스 兵士로 오를레앙의 잉글랜드君을 擊破하였으며, 그 뒤 恒常 先頭에 서서 잉글랜드君을 擊破하였다. 그러나 1430年 잔 다르크 는 부르고뉴파에게 逮捕되어 잉글랜드側으로 引渡된 끝에, 1431年 루앙에서 魔女 裁判 을 받고 魔女로 判決되어 火刑에 處해졌다. 로마 敎皇廳 銀 잔 다르크에 對한 새로운 調査 委員會를 設置해서 再調査한 結果, 1456年 7月 잔 다르크에게 火刑 判決을 내린 裁判을 廢棄하고 無效化하는 宣言을 發表함으로써 그女의 名譽 亦是 回復되었다. 그리고 全 다르크는 1909年 4月 18日에야 비로소 諡福되었고, 1920年 5月 16日 成人으로 諡聖되었다. 그리하여 全 다르크는 異端者이자 魔女라는 嫌疑를 벗고 가톨릭교회의 成人이 되었다.

1429年 에 샤를 7世는 正式으로 戴冠式을 擧行하고 適法한 프랑스 國王의 地位를 確立하였다. 따라서 샤를 6世가 英國과 맺은 트루아 條約은 效力을 喪失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戰況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數十 年間 抗爭을 繼續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度 아라스 에서 和議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內亂은 끝을 맺었다. 또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散發的인 戰鬪가 繼續되었으나, 1444年 투르에서 休戰이 成立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프랑스 內에 멘, 보르도, 칼레, 노르망디 等의 領土를 繼續 保有하고 있었다.

意義와 影響 [ 編輯 ]

封建 制度의 沒落과 中央集權化의 始作 [ 編輯 ]

프랑스는 長期間에 걸친 百年戰爭과 內亂에 依해서 封建 貴族 勢力이 極度로 弱化된 反面, 國王의 權力이 크게 伸張되었다. 샤를 7世는 자크 쿠르 를 登用하여 王室의 財政을 整備하고, 國王의 常備軍 을 强化하며 貴族勢力을 누르고 中央 集權制 를 推進해 나갔다.

잉글랜드에서는 戰爭이 끝난 뒤 이제는 王位繼承問題를 둘러싸고 30年間에 걸친 랭카스터 家門과 요크 家門間에 薔薇 戰爭 ( 1455年 ~ 1485年 )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貴族들의 生存 競爭이었다. 그러나 30年에 걸친 戰爭은 兩 家門 및 그들에게 合流한 貴族들 自身이 함께 쓰러지는 結果를 招來하여, 그만큼 貴族 勢力을 약화시키고 政略結婚을 통해 薔薇戰爭을 收拾한 헨리 7歲 에 依한 中央 執權 化의 基礎를 提供하였다. 이와 같이 百年戰爭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에서 共히 王政이 强化되고 中央集權 體制로 發展하는 契機가 되었다는 點에서 意義를 찾을 수 있다. 特히 프랑스는 西洋 封建制度가 始作된 發源地이자 가장 完成된 形態였다는 點에서 그 意義가 더욱 크다 하겠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封建 騎士의 勢力이 무너지고(이 部分은 火藥 武器의 登場도 一助를 하였다), 農奴 解放의 進展, 부르주아 階級의 擡頭, 王權의 擴大 等을 招來한 것이다.

그러나 戰爭 以後 두 나라의 中央集權化의 樣相은 各其 사뭇 달랐다. 잉글랜드는 1215年 마그나 카르타 以後 存在限 議會制度 德分에 貴族 영주와 國王의 對立 構圖에서 議會 와 國王의 對立 構圖 立憲君主國 으로 發展한 反面, 프랑스는 戰爭 渦中에 强力해진 常備軍 德分에 國王에게 모든 權力이 集中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狀況의 象徵은 三部會 다. 三扶膾도 잉글랜드의 議會처럼 戰爭 費用 徵收에 對해 汎階層의 同意를 통해 徵收할 意圖로 設立되었으나, 常備軍 體制와 王權이 强化되면서 이름만 있고 더 以上 開催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三部會가 열린 것은 17世紀였고, 루이 14歲 以後 한番도 開催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열린 것은 1789年 이었고, 프랑스 大革命 으로 이어졌다.

프랑스人과 잉글랜드人의 形成 [ 編輯 ]

한便, 잉글랜드는 프랑스 內의 領土를 喪失함으로써 그 以後 유럽 大陸에서 벌어지는 複雜한 問題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獨自的인 國民國家 를 形成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戰爭의 恐怖를 避하여 技術移民들이 플랑드르로부터 英國으로 移住함으로써, 플랑드르를 凌駕하는 毛織物 工業이 發展하게 되어 經濟的 發展의 基礎가 다듬어졌다.

프랑스 亦是 잔 다르크 로 象徵되는 프랑스 人이 이 時期에 形成되었다. 事實上 그 以前에는 "잉글랜드人"이나 "프랑스人"이라는 國民 意識 같은 것은 큰 意味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人이라는 國民感情은 이때 잉글랜드人에 對한 憎惡意識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以後에 두 나라가 손을 잡게 되는 것은 1854年 크림 戰爭 이 事實上 처음이었으며, 獨逸 帝國 이 成立된 以後 두 나라는 同盟國 사이가 되었으나 民族 感情은 남아 있었다.

百年戰爭 終戰 以後 잉글랜드, 프랑스, 플랑드르 地方 間의 이러한 關係는 第1次 世界 大戰 當時까지도 獨逸이 벨기에 를 侵攻했다는 理由로 잉글랜드가 宣戰布告를 하기 이르렀고, 벨기에가 네덜란드語 使用圈 및 프랑스語 使用權으로 나뉘게 되었다.

百年 戰爭의 主要 戰鬪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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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 編輯 ]

  1. Guilhem Pepin, Francoise Beriac-Laine, Frederic Boutoulle et Ausonius-Institut de recherche sur l'Antiquite et le Moyen Age (Pessac, Gironde), Routiers et mercenaires pendant la guerre de Cent Ans: hommage a Jonathan Sumption: actes du colloque de Berbiguieres , 13a-14a de septembro 2013, Ausonius Editions, 2016, cop. 2016 ( ISBN 9782356131492 , OCLC 944956993, rete [1] Alirita la 16an de Oktobro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