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5歲
(Charles V,
1338年
1月 21日
뱅센
-
1380年
9月 16日
샤토 드 보테
, 現
老將쉬르마른
),
通稱
賢明王
(le Sage)는
善良王 腸 2歲
의 아들로
1364年
부터
1380年
까지
프랑스의 國王
이었다. 1328年부터 프랑스를 統治한
발루아 王朝
出身으로는 3番째 君主이기도 하다.
샤를 5歲의 治世는
百年戰爭
의 第1기가 끝난 것으로 有名하다. 샤를 5世는 아버지 腸 2世와 할아버지
필리프 6歲
가 잃은 領土를 거의 大部分 奪還하고, 王權을 復舊해 나갔으며,
크레시 戰鬪
(1346)와
푸아티에 戰鬪
(1356)의 敗北, 나바라 國王
카를로스 2歲
와의 葛藤과 유럽의 거의 前 地方을 덮친 1347-1351
黑死病
流行으로 어려운 時期를 겪고 있던 王國을 救해냈다.
매우 學識있던 샤를 5世는
프랑스 國立圖書館
의 前身인 첫 番째 王立 圖書館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49年, 그 前까지
神聖로마帝國
의 封土이던
도피네 드 비엔누아
를 買入하면서, 샤를 5世는 長子이자
繼承者
로서
度烹
稱號를 받은 첫番째 王子가 되었다.
샤를 5世는
1357年
善良王 腸 2歲가 푸아티에 戰鬪의 敗北로 英國의 捕虜가 되어 英國으로 끌려갔을 동안 (3年間), 攝政을 했다. 그러나 頑固王
루이 10歲
의 孫子로서 프랑스의 王位를 繼續 要求하던 나바라 王과, 王國에서
三部會
가 지니는 役割을 强化하고자 한
파리 商人大將
(prevot des marchands de Paris)
에티엔 마르셀
은 샤를 5歲의 權力을 認定하지 않았다.
비록 國家가 內戰에 處했으나, 샤를 5世는 王位가 발루아 家門에서 他 家門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王位를 지키는데 成功했다. 런던에서 아버지 腸 2世가 죽고 나서
1364年
프랑스 國王으로
戴冠式
을 한 샤를 5世는
法治國家
에 立脚하여, 아버지의 助言家들이 樹立한 安定的인 財政 政策을 이어나가며 王權을 復舊했다. 샤를 5歲의 治世는 금세 當時 좋은 政府의 基準이었던
性 루이
의 治世와 類似하다고 여겨졌다.
中世 末期의 行政機構 硏究가
프랑수아즈 오트랑
은 그를 稅金의 아버지라 불렀다. 最初로
度烹
의 稱號를 가진 王太子이다. 그는 學問과 藝術을 保護하고 建築을 振興하는 等 프랑스의 繁榮과 發展에 이바지한 賢明한 王으로 꼽히고 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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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身 및 家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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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王
腸 2歲
와
이트카
[1]
보헤미아 公主 사이에서 태어난 子息이다.
[2]
동생은
앙주公 루이
,
베리公 腸
,
부르고뉴公 필리프
(용담공) 等이 있다. 王妃는
피에르 1歲 드 부르봉 工作
의 딸
盞 드 부르봉 貢女
.
1350年
4月 8日
에 結婚하여
샤를 6歲
,
오를레앙 工作 루이 1歲
等 8名의 아이를 낳았다.
治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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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年 戰爭
期間中
푸아티에 戰鬪
(1356年)에서 敗北한 父王 腸 2歲가 잉글랜드의 捕虜 身世가 되었기 때문에 王太子가 그대로 攝政이 되어 어려운 國政을 맡게 되었다.
[3]
當時 프랑스는 戰爭으로 인한 疲弊가 極에 達하였고, 大貴族
샤를 드 나바르
[4]
의 回冊에 괴로워했다. 에티엔느 마르셀 指揮下의 파리 叛亂 및
자크리의 난
을 진정시키고 父王의 捕虜가 된 直後 맺었던 런던조약의 批准 및 實行을 拒否하고 잉글랜드와 새로이
브레티니 條約
(1360年)을 맺는 데 成功했다.
現在 稅金의 基礎가 된 定期的인 臨時徵稅를 實施하여
常備軍
, 官僚層을 갖추는 等 後世 프랑스의 絶對王政의 基礎를 마련했다. 또한 샤를 5世를 섬겼던 軍人, 官僚 中에서 샤를 6歲 時代의 마르무젤
[5]
이라 불리는 官僚가 나타났다.
軍士面에서는 名匠
베르트랑 뒤 게클랭
을 重用하여 잉글랜드에게 빼았긴 領土를 回復하려 努力했다. 코쉬레르 戰鬪(1364年)에서 잉글랜드의 支援을 받았던 샤를 드 나바르의 軍을 擊破했다. 이 勝利는 카를로스의 프랑스 王位要求를 斷念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프랑스의 王族 에빌백으로써 노르망디에 갖고 있던 領土를 빼앗게 되어 이곳을 잉글랜드의 橋頭堡이자 進行路로 쓰이는 것을 防止했다. 勿論 그 代價로 카를로스는 남 프랑스에 領地가 내려졌다.
또한 브레티니 條約으로 因한 休戰으로 解雇되면서 社會不安
[6]
의 原因이었던 傭兵隊를
카스티야 王國
援助로 誘導하고 이것으로 外交上의 成功을 얻게 되었다. 解雇된 傭兵들은
黑太者 에드워드
가 支配하여 治安이 安定되었던 아키텐에서 쫓겨나 아비뇽 敎皇廳 周邊에 駐屯했다. 이들 傭兵隊를 討伐하려했던 라-마르슈 伯爵의 軍隊는 敗北했다. 또 오스만 帝國에 對한 十字軍으로써 東方에 派遣된 傭兵들은 돈을 받은 뒤 神聖로마帝國에서 掠奪을 벌인 後,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한便 海上에선
瑟로이스 海戰
以來 壞滅狀態에 있던 프랑스 艦隊를 再建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兵器工場 크로-데-갈레을 부지런히 움직여 많은 艦船을 건조시켰고 또한 프랑스 第瀆職을 프랑스 大元帥와 同等한 特權을 가지는 職責으로 부활시켜, 張 드 비엔느을 그 職位에 임명했다. 드 비엔느는 그의 副官 에티엔느 뒤 무스티에와 더불어 화이트섬 및 라이, 빈體르시, 포츠머스, 헤이스팅그스, 그레部젠드 等 잉글랜드 本國의 年限地帶를 襲擊하는 것을 되풀이해 잉글랜드側을 크게 괴롭혔다. 또 카스티야 王國과 同盟을 맺는 데 成功하여 그 海軍力을 利用하는 것이 可能하게 되자, 援助를 얻어 1372年 라 로세르 海岸에서의 海戰은 프랑스側의 勝利로 끝났고, 이것으로 잉글랜드의 制海權에 對한 威信을 흔들어 놓았다.
舞踊科 騎士道를 좋아하며 頑强했던 아버지 腸 2世와 正反對로 不必要한 戰鬪를 避하고, 敵의 疲勞를 기다려 着實하게 成果 都市를 奪還하는 戰法, 適切한 妥協을 이끌어 내는 뛰어난 手腕 等 現實的인 政策으로 인해 治世말에는 브레티니 條約으로 잃었던 領土를 거의 大部分 奪還했다. 그가 칼레-바이욘느, 보르도
[7]
의 잉글랜드君을 完全히 몰아내지 않고 정전을 맺은 것도 現實的인 計算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病弱하였고 讀書를 좋아했다. 莫大한 藏書를 保有하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의
國家論
, 交付
아우구스티누스
의
神國論
等의 古典을 프랑스語로 飜譯하였다. 그外에도 톨레도 社交였던 에비라르 트레몽고잉에게 命하여 政治的 팜플렛인
果樹園正義 꿈
,
늙은 巡禮者의 꿈
等을 出版시켜, 프랑스 敎會의 獨立을 主張했다.
프랑스 王家의 文章을 變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은 百合文章(百合꽃을 無數히 흩어뿌렸던 文章)에서 百合꽃 3個를 나란히 한 文章으로 變更했다.
貨幣政策에 있어서 리支部 社交 니콜라 오렘의 學說을 따라 貨幣價値를 안정시켜 貴金屬 含油率이 높은 通貨를 發行하는 것을 繼續했다. 그의 祖父 필리프 6歲 및 그의 아버지 腸 2歲가 貨幣의 低質化로 利益을 얻은 것과는 對照的이었다. 이것이 臨時的 課稅의 恒常化에 反對되기도 했다.
그의 治世中인 1377年,
敎皇 그레고리오 11歲
에 依해 敎皇廳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西區敎會大分裂 事件이 일어났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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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
보헤미아 王國
의 王
얀
의 딸로써
神聖로마帝國
의 皇帝
카를 4歲
의 異腹누이)
- ↑
Charles V the Wise, John Bell Henneman Jr., Key Figures in Medieval Europe:An Encyclopedia, ed. Richard K. Emmerson, (Routledge, 2006), 127.
- ↑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p158
- ↑
나바라
王
카를로스 2歲
(에빌 伯爵 샤를)
- ↑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小人
- ↑
르티에 및 에코르쉬르(生必品도둑)이라 불리는 盜賊化된 傭兵이 掠奪行爲를 벌여 治安을 악화시킨 것을 말한다
- ↑
實質的으로 잉글랜드軍이 駐屯하여 占領한 세르부르는 에빌백 이었던 샤를이 갖고 있던 것이었고, 또한 브레스트度 브르타뉴공 醬의 土地였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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