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開土大王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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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大王陵碑
廣開土大王陵碑
廣開土大王陵碑의 拓本
廣開土大王陵碑 複製品

廣開土大王陵碑 (廣開土大王陵碑)는 現在 中華人民共和國 지린省 지안시 (集安市) 太王眞(太王鎭, 中國語 簡體字 : 太王? )에 있는 高句麗 第19代 廣開土大王 의 陵碑이다. 中國 , 日本 에서는 好太王費 (好太王碑)라 부른다.

開設 [ 編輯 ]

414年 廣開土大王 의 아들 장수왕 이 세웠으며, 凝灰巖 (凝灰岩) 材質로 높이가 約 6.39m, 麵의 너비는 1.38~2.00m이고, 側面은 1.35~1.46m지만 고르지 않다. 臺石은 3.35×2.7m이다.네 面에 걸쳐 1,775者가 花崗巖에 隸書로 새겨져 있다. [1] 그 가운데 150餘 者는 判讀이 어렵다. 內容은 大體로 高句麗의 歷史와 廣開土大王의 業績이 주된 內容이며, 高句麗史 硏究에서 重要한 史料(史料)가 된다. 또한 傳한(前漢) 예서(?書)의 西風으로 記錄되어 있어 金石文 硏究의 좋은 資料가 된다.

이 碑石은 朝鮮 後期까지 金나라 皇帝의 비(碑)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封禁制度 1880年代 에 解除된 뒤에야 비로소 發見되었고, 1888年 에 日本人 學者 要코이 다다나오 가 雙謳歌묵本(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碑文의 內容을 公開함으로써 世上에 알려졌다.

內容 [ 編輯 ]

碑石이 發見된 消息이 알려지자 여러 書藝家나 금석학자들이 拓本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보다 精巧한 拓本 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碑石 表面의 이끼를 除去하는 過程에서 飛綿의 一部가 毁損되었고, 또한 石灰를 발라 飛綿을 損傷시킴으로써 以後 硏究에 論難을 일으켰다. 特히 廣開土大王陵碑의 神妙年條 는 아직도 큰 論難거리가 되고 있다.

碑石은 大體로 세 部分으로 나뉜다. 高句麗의 建國부터 廣開土大王까지의 歷史를 다룬 첫째 部分은 墓碑 第1面 1行에서 6行까지이다. 廣開土大王의 征服 戰爭을 記述한 둘째 部分은 第1面 7行부터 3面 8行까지이다. 陵碑의 建立 및 守墓人에 關한 마지막 部分은 第3面 8行부터 第4面 9行까지이다.

建國 歷史와 廣開土大王의 生涯 [ 編輯 ]

아! 옛날 時調 추모왕 이 나라를 세우셨다. 王은 북부여 에서 나셨으며, 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 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世上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名(命)에 길을 떠나 南쪽으로 내려가다가 扶餘 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王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連結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卽時 갈대가 連結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江을 건너 沸流 홀본 西쪽 山 위에 城을 쌓고 都邑을 세우셨다. (王은) 王位에 樂이 없자 (하늘로) 使臣을 보내시니, 黃龍이 내려와 王을 맞이하였다. 王은 홀본 東쪽 언덕에서 龍의 머리에 서서 昇天하셨다. 世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油類王 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臺酒類王( 대무신왕 )은 王業을 繼承하여 단단히 하셨다.

  • 原文: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 鄒牟王. 爲我連?浮龜." 應聲?爲連?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17世孫에 이르러 국江上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열여덟 살(391年)에 王位에 올라 稱號를 永樂大王(永樂大王)이라 하셨다. (王의) 恩澤은 하늘까지 적시고 慰撫(威武)는 온 世上에 떨치셨다. (왕이) □□를 쓸어 없애니 百姓이 그 生業을 平安히 하였다. 나라가 富强하고 百姓이 潤澤하며 五穀이 豐盛하게 익었다. 하늘이 (우리 百姓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 서른아홉 살(412年)에 世上을 버리고 떠나셨다. 甲寅年(414年) 9月 29日 乙酉(乙酉)일에 山陵(山陵)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勳績을 記錄해 後世에 알리고자 한다. 그 記錄은 다음과 같다.

  • 原文: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征服戰爭 部分 [ 編輯 ]

395年 記事 : 零落 5年, 때는 乙未 年이었다. 王은 悖戾 (稗麗)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軍隊를 引率하고 討伐하였다. 釜山(富山), 釜山(負山)을 지나 鹽水 (鹽水)의 上流에 이르러 3個 部落, 6~700個 영(營)을 擊破하고, 鹵獲한 소와 말, 羊떼의 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王이 行次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東으로 □性(□城), 역성, 北風(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國境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 原文: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백잔( 百濟 [2] ), 新羅 는 過去 俗民으로 朝貢을 해왔었다. 이 文章 바로 다음의 解釋은 論難이 있다. 論難 部分 을 볼 것.

  • 原文: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396年 記事 : 零落 6年 病身 年에 王이 몸소 水軍을 이끌고 殘菊(百濟)을 討伐하였다. (우리) 軍은 영팔性, 丘某老成, 角帽老成, 간저理性, □□性, 各미성, 모로性, 미사性, □社造成, 아單性, 고리성, □理性, 잡眞性, 오리性, 舊母性, 高모야羅城, 穴□□□□性, □이野羅城, 轉成, 어리性, □□性, 두魯省, 비□□理性, 미추성, 野梨性, 泰山漢城, 小苛性, 돈發聲, □□□性, 壘罵聲, 山羅城, 나單性, 歲星, 모루性, 우루성, 所懷性, 連累性, 석지리性, 暗門□性, 稔性, □□□□□□□理性, 取秋成, □發聲, 고某루省, 尹魯省, 官奴性, 三養性, 增□性, □□魯省, 구천성 等을 攻取(攻取)하고, 그 都城( 慰禮城 )에 [다다랐다]. 백잔은 의(義)에 服從치 않고 敢히 戰鬪에 나섰다. 王이 매우 怒하여 阿利水( 漢江 )를 건너 軍士를 보내 城을 攻擊하였고, (백잔軍이) 巢窟로 도망쳐 城을 包圍하였다. 이에 백잔주( 아신왕 )가 困乏(困逼)해져 男女 生口(砲로) 1千 明과 細胞(細布) 1千 疋을 바쳐 降伏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永遠토록 老客(臣下)이 되겠습니다."라고 盟誓하였다. 太王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容恕하고 뒤에 順從한 精誠은 기특히 여겼다. 이때 58個 性, 7百個 寸을 얻었고, 百盞注意 동생과 代身 10人을 데리고 都城으로 改善했다.

  • 原文: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398年 記事 : 零落 8年 武術 년, 한 部隊의 軍士를 보내 食神( 肅愼 ) 吐曲을 巡察하도록 했다. 이때 막□羅城(莫□羅城), 街태라曲의 男女 3百餘 名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食神은) 朝貢하고 內部의 일을 여쭈었다. [3]

  • 原文: 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3]

399年 記事 : 零落 9年 己亥 年, 백잔이 盟誓를 어기고 와 化通하였다. (이에) 왕이 平壤으로 내려가 巡視하였다. 그러자 新羅가 使臣을 보내 王께 아뢰기를 "倭人이 新羅의 國境에 들어차 聖地(城池) [4] 를 부수고 老客(臣下, 卽 新羅 奈勿王 )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王께 歸依해 救援을 請합니다."라고 하였다. 太王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忠誠心을 갸륵히 여겨, 新羅 使臣을 보내면서 計策을 (알려주어) 돌아가 告하게 하였다.

  • 原文: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400年 記事 : 零落 10年 경자 年, (왕이) 步兵과 騎兵 5萬을 보내 新羅 를 救援하게 했다. 男居城(男居城)부터 新羅性( 慶州 )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倭兵 이 가득하였다. 官軍이 到着하자 倭敵 이 退却하여 그 뒤를 遲滯없이 쫓아 任那加羅 鍾鉢性 에 이르니 性이 곧 降伏하였다. (이에) 新羅人을 配置하여 지키게 하였다. [5] (官軍이) 신라성, □性을 [차지하고] 倭寇가 크게 무너지니 性(城)… ▨▨▨ 以下 71字 大部分은 글字 毁滅 때문에 알 수 없음. 大體로 高句麗가 新羅와 任那加羅 地域에서 왜(倭)와 百濟의 第(諸) 聯合勢力을 무너뜨리고 新羅를 救援한 戰爭 成果의 具體的인 內容이 記錄되었을 것으로 推定됨. ▨▨▨ 新羅人을 配置하여 지키게 하였다. [5] 過去 新羅의 매금( 尼斯今 )은 直接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 [3] [6] 국江上광개토頃好太王에 이르러 新羅 매금이 [直接 와서 여쭈고] 朝貢하였다.

  • 原文: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5]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 [5] 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5]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3] [6]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404年 記事 : 零落 14年 甲辰 年, 그럼에도 가 法度를 어기고 大房 (帶方, 黃海道 ) 沿岸을 侵入하였다. (왜는) [백잔軍과 聯合하여] 石城(石城)을 [攻擊하고] 沿線(連船)을 [動員하였다]. 王이 몸소 軍士를 이끌고 나가 平壤을 거쳐 □□에서 先鋒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王의 軍隊가 敵의 길을 끊고 막아 左右에서 攻擊하니 倭寇가 潰滅되었고, 慘殺한 것이 無數히 많았다.

  • 原文: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407年 記事 : 零落 17年 정미 年, 王은 步兵과 騎兵 5萬을 出兵시켰다. □□□□□□□□ 王의 軍隊는 四方 包圍作戰을 펴서 모조리 殺傷하여 粉碎하였다. 鹵獲한 甲옷(鎧鉀)李 1萬餘 벌이며, 그 밖에 軍需物資는 그 數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社構成, 루省, □主星(□住城), □性, □□□□□□性을 擊破하였다.

  • 原文: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410年 記事 : 零落 20年 庚戌 年, 東扶餘 는 옛날 추모왕 의 俗民이었는데, 中途에 배반하여 朝貢을 하지 않았다. 王이 몸소 軍隊를 이끌고 討伐에 나섰다. (우리) 軍이 女性(餘城, 東扶餘의 都城)에 이르자, 東扶餘는 나라 全體가 두려워하며 [降伏하였다]. 王의 恩德이 (東扶餘) 全體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王의 敎化를 思慕하여 官軍을 따라 온 者는 美구루鴨爐, 他社壘鴨爐, 塾舍사압로, □□□鴨爐였다. 大體로 헤아려 보니 公派(攻破)韓 性(城)李 64個, 寸(村)李 1千400個였다. [7]

  • 原文: ?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墓지기에 關한 規定 [ 編輯 ]

墓지기 年號(烟戶) 數는 매구餘(賣勾余)의 百姓 가운데서 국연(國烟)李 2輯 間然(看烟)李 3輯, 東海高(東海賈)에서는 국연 3輯 間然 5輯, 豚腥(敦城) 百姓 가운데서는 4輯 모두가 間然, 우성(于城)에서는 間然 1輯, 非理性(碑利城)에서는 국연 2輯, 平壤城(平穰城) 百姓 가운데서는 국연 1輯 間然 10輯, △年(△連)에서는 間然 2輯, △星(△城)에서는 間然 2輯, 안부련(安夫連)에서는 肝連이 22輯, 個曲(改谷)에서는 間然 3輯, 神聖(新城)에서는 間然 3輯, 南蘇城(南蘇城)에서는 국연 1집이다. [8]

새로 들어온 한(韓)과 예(穢) 가운데는 社守城(沙水城)에서는 국연 1輯 間然 1輯, 모루性(牟婁城)에서는 間然 2輯,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에서는 間然 5輯, 舊募客두(勾牟客頭)에서는 間然 2輯, 구저韓(求底韓)에서는 間然 1輯, 社造成(舍組城)의 한(韓)과 예(穢) 가운데서는 국연 3輯, 間然 21輯, 高모야羅城(古模耶羅城)에서는 間然 1輯, 幕高聲(莫古城)에서는 국연 1輯 間然 3輯, 客縣한(客賢韓)에서는 間然 1輯, 아單性(阿旦城)과 잡眞性(雜珍城)에서는 合해서 間然 10輯, 罷駑性(巴奴城)의 한(韓) 가운데서는 間然 9輯, 丘某老成(臼模盧城)에서는 間然 4輯, 角帽老成(各模盧城)에서는 間然 2輯, 모수성(牟水城)에서는 間然 3輯, 간저理性(幹저利城)에서는 국연 2輯 間然 3輯, 미추성(彌鄒城)에서는 구연 1輯 間然 11輯, 野梨性(也利城)에서는 間然 3輯, 두魯省(豆奴城)에서는 국연 1輯 間然 2輯, 오리性(奧利城)에서는 국연 2輯 間然 8輯, 暮秋性(模鄒城)에서는 국연 2輯 間然 5집이다.

百濟 南쪽에 사는 한(韓) 가운데서는 국연 1輯 間然 5輯, 대산漢城(大山韓城)에서는 間然 6輯, 聾眛性(農賣城)에서는 국연 1輯 間然 7輯, 尹魯省(閏奴城)에서는 국연 1輯, 間然 22輯, 고某루省(古牟婁城)에서는 국연 2輯 間然 8輯, 轉成(前城)에서는 국연 1輯 間然 8輯, 미성(味城)에서는 間然 6輯, 取自省(就咨城)에서는 間然 5輯, 三養性(三穰城)에서는 間然 24輯, 山羅城(散那城)에서는 국연 1輯, 나單性(那旦城)에서는 間然 1輯, 舊母性(勾牟城)에서는 間然 1輯, 어리性(於利城)에서는 間然 8輯, 非理性(比利城)에서는 間然 3輯, 歲星(細城)에서는 間然 3집이다.

국江上광개토警護太王이 살아계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宣祖 王들께서는 遠近 地方에 사는 區民(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고 淸掃를 하게 하였다. 나는 區民(舊民)들이 漸次 고달퍼져 劣惡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때문에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을 지킬 者들은 내 스스로 돌아다니며 直接 데리고 온 한(韓)族이나 예(穢)족 들에게 守護·淸掃하는 일을 맡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한족과 濊族 220집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殊妙)法則을 모를까 念慮되어 다시 舊民(舊民) 110집을 데려와 새로 온 사람들과 합치니 墓지기 湖水가 국연(國烟)30輯, 間然(看烟) 300輯이 되어 모두 330輯이 되었다.

윗代 宣祖와 先王(先王)以來 墓에 碑石을 갖추지 못하여 墓지기 年號들이 錯誤를 일으켰다. 국江上광개토警護太王은 宣祖와 先王의 무덤에 모두 碑石을 세우고 그 年號(烟戶)를 새겨 錯誤가 없도록 하셨다. 또 墓지기 制度를 制定하여 앞으로는 墓지기를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셨다. 아무리 富裕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고, 法令을 어기는 者 가운데서 파는 者는 罰주고 사는 者는 法을 만들어 그 自身이 墓지기가 되도록 하였다.

神妙年條 論難 [ 編輯 ]

神妙年條 論難은 零落 6年(396年) 記事 바로 앞에 실린 다음의 記錄에서 始作된 論難이다. 이 部分의 內容은 新卯年( 391年 )에 일어난 具體的 事件을 적은 記事라기보다는 零落 6年( 396年 )부터 14年( 404年 )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南進政策의 名分과 成果를 集約 記述한 集約聞으로 推定되고 있다.

原文: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 [9] 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日本人 學者들은 碑文의 內容이 알려진 1888年 以後 이 記事를 4世紀 後半 진구 皇后 (身貢皇后)의 韓半島 南部地域 征伐을 證明하는 證據라고 主張하고, 이는 任那日本府說 로 이어졌다.

이에 對해 漢學者이자 歷史學者인 정인보 및 박시형, 이기백 等은 '度海波(渡海破)'의 主語를 高句麗 로 보아 "倭가 神妙年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擊破하였다. 백잔은 [왜와 聯合하여] 新羅를 臣民으로 삼으려 했다."로 解釋하였다.

1970年代 在日 韓國人 史學者 이진희 는 비의 文字가 石灰 道袍로 造作되었다는 主張을 하여 큰 波紋을 일으켰다. 이형구 는 碑石 自體를 檢討한 바, '倭'라는 글字는 '後'를 造作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字는 '不貢因破'를 造作한 것으로 主張하여, 碑文을 "神妙年 以來 (百濟와 新羅가) 朝貢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新羅를 치고 臣民으로 삼았다."라고 解釋했다. 金炳冀는 鉏禮學의 視角에서 '渡海破(度海波)' 部分이 正常 碑文과 다르며, 劃의 部分을 따졌을 때, 元來 글字는 '入貢于(입공우)'라고 主張했고, [10] 中國의 警鐵畫(耿鐵華)는 '來渡海破'의 海에서, 部數인 三水邊(?)李 從船 밖의 部分에 位置 있음을 통해 海가 아니라 '每'라고 主張했다. [11]

2020年에는 旣存 主張들의 問題點을 批判하고 새로운 解釋을 提示한 硏究 [12] 가 나왔다. 이 論文에 따라 위 文章을 解釋하면 '백잔(=百濟)와 新羅는 예부터 俗民으로 繼續 朝貢했다. 그런데 倭가 神妙年에 (바다를 넘어) ▨破로 건너오자 백잔(=百濟)은 (왜와 連結[또는 利用]해서) [新]라를 (쳐서) 臣民으로 삼았다[또는 삼으려고 했다].' [13] 가 된다.

福제비 [ 編輯 ]

大韓民國 京畿道 九里市 敎文2棟 에 原本의 크기와 內容을 그대로 具現해놓은 九里 廣開土大王碑 가 있다.

關聯 作品 [ 編輯 ]

  • 日本의 漫畫家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作品 《하늘의 血脈》(天の血脈)은 高句麗 廣開土大王陵碑를 둘러싼 日本軍 參謀本部의 陰謀가 作中 主要 줄거리가 되고 있다.

같이 읽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金石文 綜合映像情報시스템 : 以下 解釋文은 노태돈 의 解釋을, 原文은 노태돈과 미즈다니 데지로(水谷悌二郞)의 判讀門을 參考하였다.
  2. 백잔은 百濟 高句麗 가 卑下해 부른 말로, 371年 에 廣開土大王의 祖父 고국원왕 이 百濟 近肖古王 平壤城 攻擊으로 死亡했기 때문에 當時 高句麗는 백제에 對한 怨恨이 컸다.
  3. 朝貢論事에서 '論事'는 함께 事情을 討論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內政과 軍事에 關한 일을 여쭈다(말씀을 올리어 듣다)는 意味로서 朝貢淸明(朝貢聽命)의 뜻으로 보는 見解가 있다.
  4. 聖地(城池): 敵의 接近을 막기 위하여 性의 둘레에 깊게 파 놓은 못( 垓子 )
  5. 安羅人戍兵의 解釋에는 두가지 見解가 있다. 1. '安羅( 阿羅伽倻 )인 水兵(戍兵)'이라는 名士로 보는 見解 2. '羅人'을 '新羅人'으로, '安'을 '安置하다'라는 凍死로 보아 '新羅人을 配置하여 지키게(戍兵) 하였다'고 풀이하는 見解
  6. 399年 記事 中 "歸王請命"
  7. 이 64星 1,400寸을 광개토大王 一帶에 걸쳐 攻破한 成村의 合計라는 見解를 多數의 硏究者가 取하고 있으나, 東扶餘 征伐의 前科(戰果)만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見解(朴時亨, 孔錫龜)도 있다.
  8. 以下 廣開土大王陵碑 說明과 原文 解釋 Archived 2007年 11月 28日 - 웨이백 머신 等 參照
  9. 從來는 이를 海로 判讀했으나 東北亞歷史財團 엮음, 《惠政 所藏本 廣開土王碑 原石拓本》, 東北亞歷史財團, 2014年, 63面에 따르면 이는 判讀할 수 없는 글字다.
  10. 그의 主張은 金炳基, 《사라진 碑文을 찾아서》, 學古齋, 2020年 參照.
  11. 이도학, 《살아있는 百濟史》, 휴머니스트, 2003年, '廣開土王陵碑門에 보이는 戰爭記事 속의 百濟', 379面 末尾~ 380面 初葉.
  12. 최연식, 〈永樂 6年 高句麗의 백제 侵攻 原因에 對한 檢討 - 〈廣開土王碑〉 辛卯年 技士의 再解釋을 中心으로 -〉, 《木簡과 文字》 24, 韓國木簡學會, 2020年 6月.
  13. 최연식, 앞의 글, 268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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