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那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任那加羅 에서 넘어옴)

任那 (任那)는 任那加羅 (任那加羅) 或은 任那國 (任那國)이라고 불리던 古代 國家다. 任那가 어느 나라를 뜻하는지에 關해 여러 異見이 있다. 日本書紀 에 登場하여 伽倻 地域을 가리키는 名稱으로 推定하나, 이에 關해 意見이 紛紛하다.

假說 [ 編輯 ]

任那를 伽倻와 同一視하는 見解가 가장 一般的이다. 日本書紀에는 任那와 軸自國(築紫國)의 距離가 二千餘리라 하였는데 軸자국과 伽倻(金海) 地域의 거리가 大略 二千餘리라는 것이다 [1] . 廣開土大王陵碑에 나오는 '임나가라(任那加羅)' [2] 라는 表現을 根據로 任那는 곧 가라(가야)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봉림사眞景大使步月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 [3] 의 內容을 根據로 興舞大王(金庾信)을 任那王族이라 보고 金官伽倻가 곧 任那라고 判斷한다. 或은 任那를 大伽倻(陜川)로 非情하기도 한다. 任那를 伽倻와 同一視하여 韓半島 內에 位置했다고 보는 것은 任那日本府說 의 核心 論據로 使用되었다.

하지만 任那와 伽倻는 別個의 用語라는 主張도 있다. 어느 歷史書에도 任那를 가라의 別稱이라 言及되어 있지 않다는 點에서, 任那加羅의 가라 는 나라(國)를 가리키는 一般名詞일 可能性이 크다는 主張이다. 봉림사眞景大使步月능공탑비에 쓰인 심희 의 一代記에 根據한 서로 다른 解釋 [4] 도 存在한다.

또한 日本書紀의 任那 지리 說明을 根據로 任那의 位置를 對馬島로 非情하는 歷史學者들도 있다. 三國志胃薯童以前에 따르면 狗耶韓國에서 對馬島까지가 千餘里, 對馬島에서 一帶國(現 이키섬)까지가 千餘里, 그리고 一帶國에서 末路國(末盧國, 現 마츠우라(松浦))까지가 千餘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를 根據로 軸自國에서 二千餘里라면 伽倻 地域은 너무 멀다. 任那의 任이 '맡을 임'이라는 點에 着眼하여 '맡라'라는 國名을 漢字 任那로 表示했다는 推定도 있다. 日本書紀 神功王后 9年 여름 4月에는 매두라國(梅豆羅國)이 나오며 이것이 잘못 傳해져 송포(松浦)가 되었다고 한다. 梅豆羅는 日本말로 メヅラ(medzura)로 읽는데 松浦의 日本語 音이 まつら(matsura)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末路國과 現在의 송포는 北큐슈 西쪽 海岸에 位置한다.

日本書紀에서는 任那를 여러 나라를 합쳐 부르는 말로 使用하기도 하였다는 解釋도 있다. [5] . 공교롭게도 日本書紀가 任那의 滅亡을 記錄한 562年에 三國史記에서는 伽倻가 新羅를 배반하여 王이 이사부 로 하여금 討伐케 하였다고 記錄한다 [6] . 萬若 두 事件이 同一하다면 伽倻와 任那 모두 特定 地域의 國家集團을 指稱하는 말로 使用되었으리라 推測할 수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日本書紀》 숭신天皇(崇神天皇) 65年(紀元前 33年) 7月,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任那의 地理에 對한 說明인데 單純히 伽倻로 보기에는 矛盾이 있다. 軸自國에서 二千餘리 떨어져 있고 北쪽이 바다로 막혀 있으며 桂林의 南西쪽에 位置한다고 했는데 이 세가지 條件을 모두 滿足하는 地域은 韓半島에 없기 때문이다.
  2. 『廣開土大王陵碑』에 "뒤를 急히 쫓아 任那加羅(任那加羅) 鍾鉢省에 이르니 城을 곧 되찾았다.(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는 內容이 나온다.
  3. 出戰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原文: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 飜譯: 大使(大師)의 이름은 심희(審希)요, 屬性은 金氏(金氏)이니, 그 先祖는 任那(任那)의 王族이요, 풀에서 聖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이웃나라의 侵略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投降하였다. 먼 祖上(遠祖)인 興舞大王(興武大王)은 烏山(鼇山)의 精氣를 타고, 바다(?水)의 정기에 올라서, 문신의 吉兆를 잡아 宰相의 뜰에 나왔고, 武臣의 智略을 잡아 王室을 높이 扶養하였으며, 平生토록 ▨▨하여 두 적이 永遠히 安定되고 土軍(兎郡)의 사람들이 능히 세 朝廷을 받들어 멀리 津한(辰韓)의 風速을 어루만졌다.
  4. 原文: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 飜譯: 大使(大師)의 이름은 심희(審希), 屬性은 金氏(金氏)다. 그 先祖는 任那(任那)의 王族 草拔聖枝로, 每番 이웃나라 兵士들로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의 援助(遠祖) 興舞大王(興武大王)에게 投降하였다. 이 境遇 任那와 金官伽倻는 別個의 國家가 되며 심희는 金官伽倻가 아닌 任那國의 後孫이 된다.
  5. 《日本書紀》 卄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合十國. 23年(562) 봄 正月 新羅가 任那官街(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冊에는 21年에 任那가 滅亡했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任那요, 個別的으로는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으로 모두 열 나라이다.
  6. 《三國史記》 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爲異斯夫引兵臨之一時盡降. 眞興王 23年(562) 가을 9月 伽倻가 叛亂을 일으키자 王은 이사부로 하여금 討伐케 하고 斯陀含이 돕게 하였다. 斯陀含이 起兵 5千을 거느리고 먼저 前短文에 들어가 흰 氣를 세우자 性 사람들 全體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異斯夫가 兵士를 引率해 到着하니 一時에 降伏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