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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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島 부근리 고인돌 (유네스코 世界遺産)

고인돌 (dolmen) 또는 支石墓 (支石墓, [1] )는 故人의 屍身을 넣은 棺을 묻는 크고 平平한 바위를 몇 個의 바위로 괴어 놓은 古代 巨石 (Megalith) 構造物을 말한다. 아시아 유럽 , 北아프리카 에 6滿開程度가 分布하며, 數字上으로 韓國 에 南·北韓을 합쳐 4萬機 程度로 가장 많다. [2] [3] 고인돌은 윗部分이 平平하며, 內部에는 房이 마련되어 있다. 세워진 連帶는 地域에 따라 差異가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紀元前 5,000年 ~ 紀元前 4,000年, 東아시아는 紀元前 2,500年 ~ 紀元前 數百 年 前後로 推定된다. 유럽의 고인돌들은 周邊에 흙이나 작은 돌로 덮어 무덤을 造成하기도 하였다.

起源과 名稱 [ 編輯 ]

고인돌은 階級 分化가 始作된 靑銅器 時代 에 主로 만들어졌으며, 主로 經濟力이 있거나 政治權力을 가진 支配層의 무덤 으로 推定되는데, 돌화살鏃 이나 間黔突 , 민무늬土器 , 靑銅 製品 等이 主要 副葬品으로 發見된다. 많은 고인돌에서 副葬品이 아예 出土되지 않거나, 있어도 매우 微微해 李次長(二次葬) 또는 洗骨葬(洗骨葬 1車路 假埋葬하여 살을 썩혀 없애고 뼈만 추려 묻는 葬禮) 用意 무덤일 可能性도 推測된다.

고인돌은 납작한 板石이나 덩이돌 밑에 돌을 괴여 地上에 드러나 있는‘괴여 있는 돌’이란 뜻이다.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由來된 것으로 推測된다. 地域에 따라 조금씩 形態의 差異가 있으나 고인돌은 一般的으로 받침돌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린 卓子 模樣이다.

고인돌은 '支石墓(支石墓)'라고도 불리는데 韓國과 日本 學界에서 主로 使用되며, 北韓에서는 ‘고인돌무덤’으로 表現된다. 이들은 같은 意味의 用語로 使用되고 있지만 嚴密히 말하면 ‘支石墓’의 名稱은 ‘고인돌(支石)’이 있는 ‘무덤(墓)’이라는 意味이다. 中國에서는 고인돌을 ‘席붕(石棚)’ 또는 ‘臺石個墓(大石蓋墓)’라고 부른다. 켈트어 (北아일랜드 言語)로는 卓子란 뜻인 ‘Dol’과 돌이란 뜻인 ‘Men’李 합쳐져 ‘돌멘(Dolmen)’이라 하고, 英語로는 ‘Table Stone’이라고 한다.

韓半島의 民間에서는 고인돌의 덮개돌 模樣이나 群集의 形態 그리고 남겨진 傳說에 따라 특별한 이름들이 붙여졌다. 方言 에서 巨石을 ’毒’이나 ‘바우’라 하는 데서 ‘毒바우’, ‘바우배機’, ‘毒배기’ 같은 이름이 나왔으며, 群集된 모습이 將棋알 같다고 해서 ‘長期바우’라고도 불렀다.

'고인돌' 이름을 論文에 맨 처음 쓴 사람은 한흥수(韓興洙, 1909∼?)다. 한흥수는 日帝强占期 때 유럽에 건너가 考古學을 專攻한 우리나라 1世代 考古學者다. 그는 도유호(都宥浩, 1905∼1982), 손진태(孫晋泰, 1900~?)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인돌을 硏究한 學者다. 孫晉泰는 民俗學者이고, 한흥수와 도유호는 유럽에서 考古學을 專攻한 專門 學者인데, 두 사람은 解放 뒤 越北해 北韓 考古學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한흥수는 1935年 〈朝鮮의 巨石文化 硏究〉 論文에서 우리나라 巨石文化를 선돌, 고인돌, 七星바위, 독무덤으로 나누어 分析한다. 그가 왜 돌무덤을 고인돌이라 했는지는 論文에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뒤 學者들은 고인돌이란 이름을 자주 쓰기 始作한다. 하지만 學者들은 如前히 日本 學者들이 쓰는 支石墓(支石墓) 이름을 더 많이 썼다. 그러다 1984年 韓國考古學硏究소가 낸 <韓國考古學改正用語集>에서 '支石墓'를 '고인돌'로 하자고 해 이 이름을 두루 쓰고 있다. [4]

現在는 ‘支石墓’가 日本式 名稱이라는 認識과 고인돌이 무덤의 機能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指摘으로 인해 ‘고인돌’이라는 名稱이 學界에서 普遍的 名稱으로 쓰이고 있다. [5]

東아시아의 고인돌 [ 編輯 ]

韓國 의 고인돌은 內部에 무덤房이 있는 境遇가 많아 支石墓 (支石墓)라고도 하며, 中國 에서는 ‘돌집’이라는 意味로 席붕 (石棚)이라 하였다. 韓國은 濟州道 鬱陵島 를 包含한 韓半島 全域에서 고인돌이 發見되며, 日本 에서는 규슈 北西部에 고인돌이 세워졌다. 인도네시아 , 印度 , 러시아 에서도 고인돌이 發見된다.

韓國의 고인돌은 琵琶形 銅劍 (琵琶形銅劍), 미송리式 土器 (美松里型土器)와 함께 古朝鮮 의 領域을 區分하는 基準으로 利用된다.

靑銅器時代 의 代表的인 무덤 樣式에 該當되며, 韓半島 滿洲 一帶에 湖南地方의 2萬여기를 비롯하여 約 4萬基의 고인돌이 있다. 이는 世界 모든 고인돌 數의 折半 假量에 該當된다. 全南 和順, 全北 高敞 및 仁川 强化의 고인돌들 이 2000年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 에 指定되었다. 이 外에도 平壤 , 韓半島 中南部에 位置한 고인돌이 세워진 連帶는 大體로 紀元前 11世紀 以後로부터 鐵器 時代 以前의 紀元前 3世紀 까지의 時期에 集中되며, 요동 地方은 그보다 앞선다.

分布 [ 編輯 ]

韓國에는 約 4萬個가 分布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世界고인돌의 折半 以上에 該當되며, 고인돌의 規模가 크고, 構造도 多樣하다. 韓半島의 고인돌은 摩天嶺 以北의 咸鏡北道 地域에서도 調査된 바가 있어, 南北韓의 모든 道(道)에 고인돌이 있다고 推定된다. 고인돌은 西海 및 南海의 沿岸地域과 큰 河川을 中心으로 分布하고 있는데 特히 全羅南道와 黃海道 地域에 가장 密集되어 있으며, 全羅南道에서는 250餘 곳에서 無慮 2滿期가 分布하고 있어 世界的으로 고인돌의 單一面積에 密集度가 가장 높다고 發表되었다. 주된 分布地는 西海地域으로 들어가는 江줄기 近處로 西海地域과 密接한 關係를 가지고 있다.

役割 [ 編輯 ]

韓半島 고인돌의 機能에 對하여 여러 가지 論難이 있었으나 1967年 忠北 堤川 황석리 고인돌에서 完全한 사람뼈가 發掘되면서 무덤을 主目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確認되었다.

그러나 고인돌이 무덤의 機能만 한 것은 아니라는 主張도 꾸준히 提起되고 있다. 고인돌이 무덤의 機能을 했다는 點에는 理論이 없지만 고인돌은 여러 情況으로 보았을 때 무덤 以外에도 祭壇이나 墓表席(墓標石)의 機能으로 만들었다는 主張도 있다.

祭壇의 機能을 主張하는 것은, 卓子式 고인돌은 어디서나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周邊보다 높은 곳에 位置하며, 받침돌 위에 큰 덮개돌을 얹어 外形的으로 雄壯함을 나타낸다는 點과 무덤房을 形成하기 어려운 받침돌의 構造 等을 들어 무덤보다는 祭壇의 機能을 했을 것이라는 主張이다.

또한,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있는 境遇에 다른 고인돌에 비하여 類달리 크거나 받침돌의 方向이 다른 고인돌이 가끔 보이는데 이는 墓域의 記念物 乃至는 墓域 造成 集團의 權威와 威容을 드러내기 위해서 築造했거나 또는 墓域을 表示하는 單純한 機能으로 推定하기도 한다.

生成과 消滅 [ 編輯 ]

韓半島 고인돌의 生成에 對해서는 韓半島에서 만들어지기 始作했다는 自生說, 또는 시베리아 滿洲 에서 내려왔다는 北方起源說이 있다.

數十톤이나 되는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動員이 必要할 것이고, 많은 사람을 動員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진 사람은 結局 支配者일 것으로 推測된다. 고인돌은 靑銅器時代의 무덤이라고 主張을 하는 것이 旣存의 論理였고, 一般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고인돌의 發掘과 硏究를 進行하면서 新石器時代부터 만들어졌다는 主張도 꾸준히 提起되고 있다. 南漢江 流域의 楊平 양수리고인돌 出土 遺物을 放射能 連帶 測定 을 한 結果 約 4,000年 前에 만들어졌다는 結果가 나온다는 點과 뗀돌도끼와 빗살무늬土器 가 고인돌에서 出土되는 事實들을 土臺로 하고 있다.

北韓에서는 連帶測定 方法에 差異는 있지만 只今부터 4,900餘 年 前의 遺物이 고인돌에서 出土된다고 主張한다.

고인돌이 사라지는 時期는 紀元 前後, 紀元前 2世紀, 紀元前 3世紀 等 여러 主張이 있으나 一般的으로 紀元前 3世紀頃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은 規模의 雄壯함으로 보아 一般사람들의 무덤이 아닌 首長層(首長層) 階級의 무덤으로 推定된다. 고인돌의 築造에는 數 百名에서 數 千名의 人力을 動員되었을 것으로 推測되며, 이러한 人力이 生産 活動에 投入되는 過程에서 많은 人員이 必要 없는 나무널무덤이나 움무덤으로 變化되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주검과 身分 [ 編輯 ]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出土된 例는 忠北 堤川 황석리, 江原 春川 中道, 大邱 達成 진천동, 慶南 진양 대평리 等의 例가 알려져 있지만 中國 吉林地域과 北韓地域에서도 사람뼈가 出土되었다는 多數의 報告가 있다. 이러한 사람뼈 出土는 고인돌 築造 當時 묻기 方法(葬法), 머리 方向(頭向), 副葬品이 놓인 位置를 통해 葬禮 風習을 살필 수 있고, 아울러 그 當時의 思想과 信仰的인 側面도 推定할 수 있는 資料가 된다.

特히, 황석리 고인돌 사람뼈는 거의 完璧한 形態로, 키는 176센티미터 程度이며 頭蓋骨 의 形態는 長頭形(長頭形)으로 오늘날의 韓國人과는 差異가 있는데 이것이 當時의 普遍的인 形態認知, 個人的인 差異인지는 確認되지 않고 있다.

무덤房의 軍集成이나 形態가 다르기 때문에,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身分은 部族長과 같은 强力한 支配者의 무덤이라는 主張이 說得力을 얻고 있으나, 支配者와 그 家族의 무덤, 血緣體 共同集團의 共同무덤, 專攻者(戰功者)의 무덤 等 여러 가지 主張이 나오고 있다.

고인돌이 築造된 社會 [ 編輯 ]

고인돌은 巨大한 바위를 멀리까지 運搬하여야 하므로, 많은 人力이 動員될 수 있는 社會였음을 알 수 있다. 이 時期의 支配層의 一部는 靑銅器 를 使用하였고, 農器具로는 新石器 時代보다 發達한 半달돌칼 等의 道具를 使用하였다. 또한, 農器具를 利用하여 벼, 보리, 兆, 콩 等發達된 方法으로 다양한 穀物을 耕作하게 되었다. 本格的인 定着生活에 들어가면서 소, 멧돼지, 사슴, 노루, 닭 等을 사냥보다는 집에서 길러서 먹는 比率이 높아졌다.

한 마을에 定着하는 사람 數가 많아지면서 住居地도 規模가 커지게 되었다. 新石器時代의 原形 움집보다는 집을 크게 짓는 데 유리한 直四角形의 움집을 많이 짓고 生活하였다. 움의 깊이도 집짓는 技術이 發達하면서 自然스럽게 낮아지게 되어 半움집이 되었다. 農耕地를 앞에 둔 山 바로 아래쪽에 마을을 形成하였다. 이에 따라 土器는 江가나 바닷가에서 主로 生活했을 때 使用했던 新石器時代의 빗살무늬土器와 같이 아랫部分이 뾰족하지 않고, 납작한 민무늬土器, 붉은간土器, 미송리式土器 等을 利用하게 된다

遺物 [ 編輯 ]

遺物을 통해 고인돌이 築造되던 時期의 生活相을 알 수 있는데, 고인돌에는 犧牲者에 對한 哀悼와 死後 世界를 위한 副葬品과 살아 있을 때의 權威에 걸맞은 副葬品이 놓였다. 하지만 고인돌에서는 그다지 많은 遺物이 發掘되지는 않는다. 特히, 卓子式 고인돌은 發掘된 遺物이 적은데 이는 地上에 무덤房이 있는 關係로 오랜 歲月이 지나는 동안 거의 없어졌기 때문으로 推測된다. 遺物은 主로 基盤式, 個夕食, 位夕食, 塔婆式, 굴夕食, 傾斜式, 墓表式 고인돌에서 發掘된다.

遺物로는 特殊 階層에서 使用된 것으로 推定되는 琵琶形銅劍, 靑銅도끼, 곱은玉, 대롱玉 等이 있다. 붉은간土器, 가지무늬土器, 나무열매나 穀物의 껍질을 벗긴 갈돌과 갈판, 穀食의 이삭을 자르는 半달돌칼, 나무를 자르거나 加工할 때 쓰는 돌도끼, 돌자귀, 돌끌 等이 發掘되기도 한다. 이 外에도 옷을 만드는 데 쓰는 가락바퀴, 고기잡이에 利用한 그물錘, 身分의 象徵物로 利用되었던 간돌劍이 發掘되었다. 또 돌화살鏃은 간돌검과 함께 發掘되는 境遇가 많은데 여러 點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特徵이다.

고인돌의 築造 [ 編輯 ]

고인돌은 다음과 같은 方法과 順序로 築造되었다고 推測된다.

  1. 場所選定 : 故人들은 平地, 丘陵, 山기슭 等에 立地하는데 主로 덮개돌을 求하기 쉬운 바위나 巖壁이 있는 山 周圍나 江가에 많다.
  2. 돌감떼기 : 巖壁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데는 바위틈이나 巖石의 결을 利用하여 人爲的인 구멍을 파고, 이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 물로 불려 떼어내는 方法을 一般的으로 利用하였다.
  3. 運搬하기 : 덮개돌이나 받침돌로 利用할 돌감을 끈, 지렛대, 통나무바퀴 等을 利用하여 運搬하였고, 한 사람이 一般的으로 100kg 程度를 움직일 수 있었다고 推測된다.
  4. 고인돌만들기(탁자식) : 받침돌 役割을 할 돌감을 판 구덩이 속에 밀어 넣은 다음 받침돌이 흔들리지 않게 작은 돌로 옆을 가득 채워 튼튼히 다진다. → 받침돌 2個를 똑같은 높이로 세운 後 받침돌이 파묻힐 만큼 흙으로 언덕을 만든다. → 언덕의 勁士를 따라 둥근 나무를 밑에 깔고 덮개돌을 끌어 올린다. → 밀고 끌어서 올린 덮개돌을 받침돌 위에 놓은 다음 받침돌까지 파묻었던 흙을 치운다. → 주검을 받침돌 사이에 넣는다. → 막음돌로 받침돌의 兩쪽을 막으면 고인돌이 完成된다.


고인돌의 判別 [ 編輯 ]

平地나 山地에는 自然石이나 一般的인 巨石 또는 怪石(塊石)이 많이 보이는데 이를 고인돌과 區分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고인돌로 判別하는 方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判別하기 쉬운 고인돌은 卓子 모습을 하고 있는 卓子式(北方式) 고인돌과 받침돌을 덮개돌 밑에 바둑板 模樣을 한 基盤食餌 있다. 고인돌 與否의 判斷이 必要한 個夕食 고인돌의 境遇, 判別하는 方法은 다음과 같다.

  1. 周邊에 石材가 없으나 바위 같은 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列을 지어 있다거나 圓을 이루고 있는 等 일정한 形態를 이루는 境遇가 많다.
  2. 덮개돌이 長方形이나 楕圓形으로 大槪 3代 2程度의 길이와 幅을 가지고 있으며, 덮개돌이 아랫部分이 흙속에 묻혀 있지 않다.
  3. 덮개돌이 自然石人 것도 있지만 大部分 다듬은 돌이기 때문에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일정한 形態로 다듬은 痕跡이 보인다.
  4. 江가나 산 끝자락의 낮은 언덕에 位置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分類 [ 編輯 ]

忠淸南道 洪城郡 에 있는 개夕食 고인돌

고인돌은 그 形態에 따라 大體로 다음과 같이 區分된다.

卓子式 고인돌
卓子式 고인돌
  • 卓子式 고인돌 - 卓子式 고인돌 또는 北方式 고인돌은 굄돌을 세우고 그 위에 鞭刑韓 돌덮개를 얹은 고인돌을 뜻하는 말이다. 主로 漢江 以北에서 發見된다. 卓子式 고인돌이 나오는 地域은 古朝鮮의 領土와 關聯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江華島 고인돌이나 高敞 고인돌 等이 있다. 다듬어진 판돌로 ㄷ字 또는 ㅁ字로 무덤房을 만들고 巨大한 板石上의 덮개돌을 얹은 形態. 漢江 以北에 主로 分布하여 北方式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最近에는 全南 地方에도 存在가 確認되어 北方式이라는 名稱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무덤房이 地上에 드러나있는 特性上, 다른 形態의 고인돌에 비해 遺物이 적은 便이다.
  • 基盤式 고인돌(바둑板式 고인돌) - 판돌, 깬돌, 自然石 等으로 쌓은 무덤房을 地下에 만들고 받침돌을 놓은 뒤, 巨大한 덮개돌을 덮은 形態. 主로 漢江 以南에 分布하여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 亦是 北쪽에서도 發見되고 있어 南方式이라는 名稱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될 것이다.
  • 個夕食 고인돌 - 地下에 무덤房을 만들고 바로 뚜껑을 덮은 形態. 뚜껑式, 臺石個墓 等으로도 불린다. 全國的으로 고르게 分布하며, 要領 地方에도 多數 分布한다.
  • 位夕食 고인돌 - 무덤房이 地上에 있고, 덮개돌이 여러 個의 板石으로 둘러싸여 있다. 濟州道 에만 있기 때문에 濟州式이라고도 한다.
  • 塔婆式 고인돌 - 무덤 房 위에 두 個의 덮개돌이 겹쳐져 있는 形態.
  • 굴夕食 고인돌 - 바위 안을 파내어 무덤房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씌운 形態. 主로 캅카스 地方에 많다.
  • 傾斜式 고인돌 - 무덤 房을 덮는 덮개돌을 두동강내어 半쪽은 무덤房 위에 그대로 걸쳐놓고 나머지 半쪽은 무덤房 壁面에 기대어 놓거나 무덤房 옆으로 밀어놓은 形態.
  • 墓表式 고인돌 - 덮개돌 아래에 中央무덤房이 있으며, 이 中央무덤房을 中心으로 그 周邊을 돌아가면서 4基의 무덤房이 '卍'字形으로 配列되어 하나의 덮개돌 아래에 모두 5基의 무덤房이 이루어진 形態.


救助 [ 編輯 ]

고인돌은 그 種類에 따라 若干씩 差異가 있으나, 大體的인 構造는 다음과 같다.

  • 덮개돌 - 가장 위에 놓인 넓고 큰 돌이다.
    • 卓子式 고인돌은 主로 판 形態로 人工的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 基盤式 및 개夕食 고인돌은 判型, 直六面體形, 求刑, 動物形 等 다양한 形態를 보이며, 특별한 加工 없이 使用되는 境遇도 많다.
  • 받침돌(굄돌) -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돌이다. 個夕食 고인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 卓子式 고인돌은 판 形態로, 받침돌 自體가 무덤房이 된다. 덮개돌을 받치면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大體로 下部(下部)는 地下에 묻혀 있다.
    • 基盤式 고인돌에서는 기둥 形態 또는 自然石으로, 여러 個의 받침돌이 巨大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下部는 땅 위에 놓여 있는 境遇가 많으며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갈이나 깬돌로 바닥을 處理하기도 한다.
  • 무덤房 - 덮개돌과 받침돌 밑에 마련된 石室이며, 遺骨이나 遺物이 發掘되는 境遇도 있다. 그러나 무덤房이 처음부터 없는 고인돌도 많다.
    • 卓子式 고인돌은 받침돌 自體가 무덤房으로 兩 側面의 壁은 덮개돌을 받치는 役割로 現在까지 남아 있지만, 前後의 壁은 單純한 마구리의 役割인 境遇가 많아 現在는 遺失된 것이 많다. 卓子式 고인돌은 마구리壁을 거쳐서 무덤房을 드나들 수 있다는 點 때문에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닌 家族이나 集團의 共同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 基盤式/個夕食/塔婆式/傾斜式/墓表式 고인돌은 地下에 깬돌이나 판돌로 무덤房을 만들며 委席式과 굴夕食은 地上의 무덤房을 받침돌과 덮개돌로 둘러싼다. 이러한 形式의 고인돌은 巨大한 덮개돌 때문에 盜掘꾼이 들어가기 어려워 卓子式에 비해서 遺骨이나 遺物이 많이 發見된다.
    • 뚜껑돌 - 무덤房을 덮는 돌이다. 基盤式 고인돌에서만 보인다. 個夕食 고인돌의 境遇, 덮개돌 自體가 뚜껑돌의 役割을 한다.
  • 墓域施設 - 一部 고인돌은 個別 고인돌 또는 고인돌軍(群) 全體에 걸쳐서 자갈이나 깬돌을 넓게 깔아 一種의 墓域(墓域)을 構成하기도 한다. 이러한 돌무지는 墓域의 表示 機能 뿐 아니라 받침돌이나 덮개돌이 무게로 인해 땅 속으로 파고들거나 옆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는 役割도 하는 것으로 推定된다.
  • 덮개돌이나 뚜껑돌에는 별자리 를 담은 '聖血(性穴)'이 새겨지기도 하였다. 聖血은 石器時代 以前부터 土俗信仰의 象徵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뚜껑돌, 선돌等에 새겨졌는데, 北斗七星 및 其他 별자리의 模樣을 찾을 수 있는 境遇도 있어 古代 韓半島의 祈福信仰이나 古代 天文學의 起源으로 推測되기도 한다.
  • 麗水 오림동 고인돌에는 巖刻畫(巖刻畵)가 그려진 고인돌이 있다. 이는 當時 사람들의 信仰을 나타내는 것으로 推測된다.

用度 [ 編輯 ]

  • 무덤 - 相當數의 고인돌이 地下에 무덤房 施設을 갖추고 있거나 下部의 흙에서 遺骨 成分이 檢出되어 무덤임이 確認되었다. 堤川 황석리 고인돌에서는 完全한 狀態의 遺骨이 發掘되기도 했다.
    • 支配者의 무덤 - 巨大한 크기의 덮개돌이 있고 靑銅器, 裝身具 等의 華麗한 껴묻거리가 發掘되는 고인돌은 支配者의 무덤으로 推測된다. 이러한 고인돌은 周邊에 돌널무덤(石棺墓) 및 널무덤(土壙墓)가 함께 發見되기도 한다. 이 境遇 무덤軍은 고인돌이 가장 높은 格으로 돌널무덤, 널무덤의 順으로 格이 낮아지는 樣相을 보인다.
    • 支配者의 家族 또는 支配 階層의 集團 무덤 - 많은 數의 고인돌이 墓域을 이루며 群集해 있는 境遇 家族 무덤 또는 集團 무덤으로 推測된다. 大體로 고인돌의 群集 樣相은 일정한 熱을 갖추고 있으며 格의 差異를 보이는 境遇도 있다. 이 境遇 家父長的인 秩序에 따라 고인돌의 位置가 決定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戰死者의 集團 무덤 - 고인돌의 무덤房에서 發見되는 武器類의 形態나 位置로 볼 때 一部 고인돌은 戰死者의 集團 무덤으로 推測된다. 부러진 간돌검이나 화살鏃이 머리와 가슴 쪽에서 發見되고 있는 點에서 戰爭의 犧牲者를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日本의 고인돌에서는 戰爭에서 犧牲된 피장자 밑에 敵의 머리를 함께 묻었던 痕跡도 發見되었다.
  • 墓表席 - 墓域을 表示하는 役割로, 群集을 이룬 고인돌 가운데 中央이나 특정한 位置에 돋보이는 크기·形態를 가진 고인돌이 이에 該當한다. 무덤房이 없으며 墓域을 象徵하는 記念物의 役割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祭壇 - 集團의 結束을 다지기 위한 一種의 象徵的인 記念物의 役割을 하는 것으로 規模가 雄壯하고 가장 돋보이는 位置에 있는 고인돌이 이에 該當한다. 亦是 무덤放은 없는 境遇가 많다.


世界文化遺産 고인돌 [ 編輯 ]

高敞 和順 强化 고인돌은 유네스코가 指定한 大韓民國의 世界文化遺産이다. 全羅北道 高敞郡·全羅南道 和順郡· 仁川廣域市 江華郡 3個 地域에 나뉘어 位置해 있는 고인돌軍(群)이다.


유럽의 고인돌 [ 編輯 ]

유럽 에서는 英國 , 아일랜드 , 프랑스 , 덴마크 , 獨逸 , 네덜란드 , 스웨덴 , 벨기에 발트海 , 北海 沿岸과 스페인 ,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 等 各國에서 고인돌이 發見되었다. 유럽의 고인돌은 紀元前 4千年 頃에 세워진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世界의 고인돌 [ 編輯 ]

다음은 世界 各地方의 고인돌(돌멘)이다.

各州 [ 編輯 ]

  1. 석붕묘; 石棚墓,
  2. 世界日報, 2008年 11月 19日 記事, 이종호 韓國科學技術硏究院
  3. 이종호 韓國科學技術硏究院 招聘硏究員의 主張으로 學者마다 數字는 조금씩 다르다. 고인돌은 純粹한 우리말이다. 자칫 漢字語로 誤解하기 쉽지만 괸돌, 고임돌이란 뜻이다. 큰 돌 아래에 작은 돌을 괴어놓은 돌 全體를 말한다. 漢字式 表現으로는 支石墓(支石墓)라고 한다. 全 世界에 分布하는 靑銅器時代 巨石文化(巨石文化, 巨大한 돌에 對한 믿음, 信仰, 表式 따위의 意圖的인 돌로 만든 形象을 말함)의 한 가지이지만 아시아와 유럽에 많이 分布한다. 現在 韓國의 境遇, 南北韓 學界에 報告된 고인돌의 數가 無慮 2萬 5,000~3萬 5,000個로 推定되고 있다. 全 世界 고인돌이 約 7萬個 程度로 報告되었으니 韓國에 約 折半이 있는 셈이다. 世界文化遺産으로 登錄된 高敞, 和順, 江華島 고인돌이 代表的이다.
  4. ' 고인돌'은 왜 '고인돌'이라 하는 걸까?” . 2018年 4月 19日 . 2018年 12月 3日에 確認함 .  
  5. 《고인돌 이야기》, 《世界遺産 强化고인돌》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이영문, 《고인돌 이야기》, 다지리, 2001
  • 이형구, 〈渤海沿岸地球 遼東半島의 고인돌 무덤 硏究〉, 1986
  • 양홍진, 〈韓國 고인돌의 天文學的 要素〉, 2007
  • 《ICOSMOS》, 國際記念物遺跡協議會, 2000.9.
  • 雨裝門,김영창 <世界遺産强化고인돌 >,2008.12 고인돌사랑會

外部 링크 [ 編輯 ]

韓國의 고인돌 [ 編輯 ]

其他 地域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