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民政靑
(
韓國 漢字
:
소비에트民政廳,
러시아語
:
Советская гражданская администрация
) 또는
蘇聯軍政
은
太平洋 戰爭
에서 勝利한
蘇聯軍
이
韓半島
의
三八線
北쪽을 占領하고 設置한
蘇聯
의 統治 機構다. 이름만 民政靑이지 事實上
軍政
이었다. 蘇聯은
美國
의
再朝鮮 美國 陸軍司令部 軍政廳
과 달리 北쪽에는 直接 統治는 그리 오래하지 않았다. 1946年 2月 9日에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를 出帆시켜 表面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臨時政府
구실을 하게하면서,
蘇聯軍
이 撤收할 때까지 民政廳이 이를 指揮監督下였다.
上陸 作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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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蘇聯
은 1945年 8月 8日에
日本 帝國
에 宣戰布告를 하고 곧바로 8月 9日 子正을 始作으로
滿洲國
과
웅기군
上陸을 試圖하였다.
경흥군
, 웅기군 等은 이미
8.15光復
以前부터 最初로 占領된 場所가 되었고
소비에트 聯邦
은 곧바로 8月 12日에
나진시
를 거쳐 8月 13日
淸津市
를 攻擊하였는데 이곳은 3~5日 程度 걸렸으며 蘇聯이 無慮 300名의 軍人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反面
日本 帝國
의 羅南師團 等은 500名이 죽고 2500名은 捕虜로 잡혀나갔다. 그 後,
蘇聯
은 南進을 繼續하였으며
元山
을 占領한 後, 8月 24日에는
平壤
을 占領하였다.
蘇聯
은 北韓에는 社會主義를 導入할 段階가 아니며 그 前段階라고 불리던 부르주아 民主主義를 建設하자는 目標였다.
軍政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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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蘇聯
이
滿洲 戰略攻勢作戰
을 통해
경흥군
雄基(雄基)를 거쳐
淸津市
를 攻擊하였다. 그 以後에도 繼續해서 南下하여 38線 北쪽을 完全히 占領하였다.
蘇聯
은
조만식
과 손을 내밀었지만 꼭두각시였던
金日成
을 委員長으로 맞이하여 6個月間 蘇聯軍政을 實施했다. 1946年 2月 16日부터는
北朝鮮人民委員會
가 設立되어 1948年 9月 9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樹立될 때까지 繼續되었다.
그러나 民意와 無關하게 蘇聯軍의 도움으로 人民委員長이 된
金日成
은 解放 直前 5年間 蘇聯軍에서 敎育과 訓鍊을 받은 蘇聯의 代理人에 不過하였고, 重要한 事案에 對한 決定은 繼續 蘇聯軍이 내렸다.
[1]
[2]
[3]
當時의 北韓 統治 業務는 "
스탈린
을 首班으로하는 蘇聯最高司令部 →
보로실로프
의 沿海州軍管區 司令部 → 平壤의 第25軍 → 蘇聯 民政靑 →
金日成
을 首班으로하는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의 命令 系統으로 進行되었다.
[1]
金日成
이 1946年 2月 8日 臨時人民委員長이 된 直後인 1946年 3月 5日 斷行된 北韓의 土地改革
[4]
等 重要한 事案은 蘇聯 民政廳에서 決定, 實行하였다.
[1]
[2]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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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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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處
- 參考 文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