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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杭魯 生涯

李杭魯 生涯

碧溪에서 태어나다

화서 李杭魯 先生은 1792年(正祖 16)에 양근群(現 楊平郡) 벽계리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벽진(碧珍), 字는 異術(而述), 號는 화서(華西), 元來 이름은 光路(光老)였으나 哲宗 아버지 電界大院君(全溪大院君)과의 嫌名(嫌名)때문에 航路(恒老)로 改名하였다. 화서라는 號는 벽계리가 청화산(靑華山) 西쪽에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다.
李杭魯 先生 寫眞

英特했던 어린시절

3歲 때 『千字文』을 배우고, 6歲 때는 『19史略』을 읽으면서 「天皇地皇辨」을 지었을 程度로 英特하였다. 9歲 때에 泄下(雪下) 남기제(南紀濟)와의 逸話를 미루어 보면 이미 主理論(主理論)의 基盤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루는 泄下 남기제가 "天地 사이에 있는 萬事는 다만 한 個의 基(氣)일 뿐이다."고 하였다. 이에 火서는 앞으로 나아가 "天地 사이의 萬事는 오직 한 個의 이(理)일 뿐이다."라고 對答하였다. 泄下 남기제가 다시 "네가 아직 알일이 아니니 天地에 가득한 것은 氣일 뿐이지 다시 무엇이있겠느냐?"고 하자 花序가 "한결같이 氣를 主張하면 慇懃히 걱정되온데 門下에 거리를 막아 사람을 치는 者가 있을까 합니다."라고 對答하였다.

李杭魯 先生 寫眞

벼슬을 버리고 學問에 精進하다

17歲(1808年, 順調 8)에는 漢城試에 凝視하였으나, 當時의 宰相이 사람을 보내어 “萬一 우리 아들과 함께 종유(從遊)하면 今年에 寡居할 수 있을 것”이라고 誘惑하자 “사자(士子)로서는 발 디딜 데가 못된다”고 過去의 不正을 慨歎하여 出仕하지 않고 學問에만 專念하였다. 21歲 때 地平에 들어가 죽촌(竹村) 이우신(李友信)을 찾아가 그 門下에 자주 드나들며 10餘年을 修學하였다. 30代에 들어서 雙磎寺, 高達寺 等 深山幽谷을 찾아가 일정한 스승없이 『사서』,『주자대전』,『송자대전』등의 文獻을 中心으로 朱子學 硏究에 沒頭하여 宋時烈을 주자(朱子) 以後의 正統으로 삼았다. 先生의 學德이 朝廷에 알려지면서 1840年(憲宗 6) 휘경원參奉, 1864年(高宗 1) 當時 權力者 조두순(趙斗淳)의 薦擧로 掌苑署別除(掌苑署別提) 等 數次例 官職에 任命되었으나 健康上의 理由로 모두 拒絶하였다.
李杭魯 先生 寫眞

衛正斥邪를 외치다

先生이 75歲 되던 1866年 丙寅洋擾가 일어나자 病中인데도 不拘하고 入闕하여 同副承旨의 資格으로 프랑스와 싸울 것을 上疏하였다.

只今 國論이 校(交)와 前(戰) 量설로 갈리어 있사옵니다. 量的(洋賊)을 攻擊하자는 것은 우리쪽 사람의 설이고, 量的과 和親하자는 것은 敵(賊)쪽 사람의 說이옵니다. 前者를 따르면 나라안에 人德의 政治를 保全할 수 있을것이지만, 後者를 따르면 人類가 禽獸의 地境에 빠질 것이옵니다.

當時 朝鮮은 異樣船의 出沒, 天主敎를 비롯한 西洋文物의 流入으로 매우 混亂하였다. 先生은 이와같은 西洋文物의 浸透가 西洋 帝國主義의 尖兵임을 꿰뚫고 이를 克服하기 위해 衛正斥邪(衛正斥邪)를 主張하였다. 衛正斥邪思想은 그의 文人 양헌수·金平默·유중교·崔益鉉·柳麟錫·홍재구 等 화서學派에 繼承되어 舊韓末 抗日義兵運動의 根幹이 되었고, 以後 박은식·金九·조병준 等 수많은 民族指導者를 排出하여 日帝에 對抗한 獨立運動에 큰 影響을 끼쳤다. 이처럼 화서 李杭魯 先生의 衛正斥邪思想은 韓國 近代 民族運動史의 뿌리로서 매우 重要한 意味를 가지고 있다.
李杭魯 先生 寫眞

興宣大院君의 實情을 批判하다

先生은 西洋과 主戰論을 主張하면서 同時에 興宣大院君이 景福宮을 重建을 위해 百姓들에게 賦役과 願納錢을 强制 徵收하는 實情을 强力하게 批判하였다.

來襲한 敵을 擊退하는 것도 重要하지만 敵을 부르게 한 原因을 糾明하여 拔本塞源하는 것이 더욱 時急합니다. 民生苦가 民心 離叛의 原因이오며 土木工事와 稅率引上, 元金强要가 民生苦의 가장 큰 原因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政府를 不信하고 怨望하는 그들에게 敵陣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싸워 줄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百姓의 背反이 外的보다 더 무서움을 아셔야 합니다.

李杭魯 先生 寫眞

儒學界의 居城이 지다

當時 서슬이 퍼랬던 興宣大院君의 政治를 正面으로 批判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以後 興宣大院君에게 排斥당해 落鄕하자 박주운·박규서 等은 上疏를 올려 “한가닥 실오라기 같은 말줄마저 끊어져버렸다.”고 恨歎하였다. 故鄕에 돌아온 先生은 1868年(高宗5)에 77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오직 卿은 亂世를 다스리고자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三代 時代의 純粹한 人物로서 밝고 슬기로우며 剛直하고 果敢하여 믓 사람을 超越하였도다. 그러나 敬意 學問은 땅과 바다같이 넓고 깊어서 그 蒙恩 이미 죽었으나 그 道는 더욱 오래 傳해질 것이다. 山에 泰山이 있는 것과 같고 北極에 北斗星이 있는 것과 같아서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찾아가 강명하高 天授하였도다. 나라가 安定하게 된 것은 京義 아름다움을 힘입은 德澤이로다.

高宗의 사제문 中에서
李杭魯 先生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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