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生이 75歲 되던 1866年 丙寅洋擾가 일어나자 病中인데도 不拘하고 入闕하여 同副承旨의 資格으로 프랑스와 싸울 것을 上疏하였다.
只今 國論이 校(交)와 前(戰) 量설로 갈리어 있사옵니다. 量的(洋賊)을 攻擊하자는 것은 우리쪽 사람의 설이고, 量的과 和親하자는 것은 敵(賊)쪽 사람의 說이옵니다. 前者를 따르면 나라안에 人德의 政治를 保全할 수 있을것이지만, 後者를 따르면 人類가 禽獸의 地境에 빠질 것이옵니다.
當時 朝鮮은 異樣船의 出沒, 天主敎를 비롯한 西洋文物의 流入으로 매우 混亂하였다. 先生은 이와같은 西洋文物의 浸透가 西洋 帝國主義의 尖兵임을 꿰뚫고 이를 克服하기 위해 衛正斥邪(衛正斥邪)를 主張하였다. 衛正斥邪思想은 그의 文人 양헌수·金平默·유중교·崔益鉉·柳麟錫·홍재구 等 화서學派에 繼承되어 舊韓末 抗日義兵運動의 根幹이 되었고, 以後 박은식·金九·조병준 等 수많은 民族指導者를 排出하여 日帝에 對抗한 獨立運動에 큰 影響을 끼쳤다. 이처럼 화서 李杭魯 先生의 衛正斥邪思想은 韓國 近代 民族運動史의 뿌리로서 매우 重要한 意味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