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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 뮤지엄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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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코너 平等 ? 愛國 啓蒙의 길 (1886~191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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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코너 平等 ? 愛國 啓蒙의 길 (1886~1913年)

東學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운형

呂運亨 先生은 1886年 楊平郡 신원리 墓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치마 幅으로 太陽을 안는 胎夢을 꾸었다하여 夢陽(夢陽)이라는 號를 지었다고 합니다. 呂運亨 先生은 東學(東學)에 參與했던 할아버지 여규新(呂圭信)의 아래에서 成長하였는데, 이는 呂運亨 先生이 집안의 奴婢解放을 始作으로 實踐한 平等의 理念을 배울 수 있었던 背景이 되었습니다.

新學問 習得과 基督敎 宣敎師 活動

呂運亨 先生은 배재學堂 敎師로 在職 中이던 親戚 여병현(呂炳鉉)의 影響으로 1900年 배재學堂에 入學했습니다. 以後 흥화학교와 우무학當 等으로 옮겨 新學問을 익혔습니다. 1908年부터 서울의 勝洞敎會에서 美國人 宣敎師 Charles Allen Clark 牧師 아래에서 宣敎師로 活動하였습니다. 또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運動部長을 맡아 우리나라 最初의 野球團인 황성YMCA野球團의 創立에 參與하였으며, 1912年 도쿄에서 치러진 日本 와세다 大學校 野球部와의 遠征競技에 野球團 團長으로 參加하기도 하였습니다.

故鄕에서 實踐한 愛國啓蒙運動

呂運亨 先生은 1905年부터 富?毛의 3年喪을 치르는 동안 故鄕인 楊平郡 신원리에서 愛國啓蒙運動을 이어나갑니다. 1905年乙巳勒約 締結 消息을 듣고 거리에서 朝鮮王朝 執權者들에 對한 憤怒와 啓蒙을 통한 朝鮮民衆의 自覺을 主張하는 演說을 펼칩니다. 또한 自身의 故鄕집 舍廊房에 ‘廣東學校光東學校’를 設立하고 地域 靑少年들을 對象으로 新學問과 聖經을 講演하며 知識人 育成에 앞장섰습니다.

第2코너 自由 ? 자주 獨立의 길 (1914~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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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코너 自由 ? 자주 獨立의 길 (1914~1945)

新韓靑年黨, 우리의 獨立 意志를 世界에 傳達하다

呂運亨 先生은 1919年에 開催된 파리講和會議에 獨立請願書를 提出하기 위해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的 政黨이라고 할 수 있는 新韓靑年黨을 組織했습니다. 呂運亨 先生은 金奎植 先生을 新韓靑年黨의 代表로 파리講和會議에 獨立請願書를 提出하였으며, 金奎植 先生을 支援하기 爲한 國內?외 各地로 派遣된 黨員들의 活動은 2.8獨立宣言과 3.1萬歲運動으로 이어지는 契機가 됩니다. 또한 呂運亨 先生님은 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 當時 外務部 次長으로 任命되어 活動하였습니다.

日帝의 心臟部에서 大韓의 獨立을 외치다

파리講和會議에 提出된 獨立請願書와 3.1萬歲運動의 無差別的인 鎭壓으로 인한 朝鮮 統治 問題에 直面한 日本은 懷柔策의 對象으로 呂運亨 先生을 도쿄에 招待합니다. 呂運亨 先生은 臨時政府와의 論議 끝에 獨立 當爲性을 主張하는 것을 目的으로 도쿄 房門을 決定합니다. 呂運亨 先生은 도쿄에서 日本이 베푼 好意와 數次例의 懷柔 勸誘에도 꿋꿋이 獨立의 意志와 當爲性을 主張하였으며, 1919年 11月 27日 도쿄帝國호텔에서 開催된 記者會見場에서 日本의 首腦部와 內外信 記者들이 모인 앞에서 演說을 통해 朝鮮 獨立의 當爲性을 全世界에 알리게 됩니다.

조선중앙일보, 고개 숙인 朝鮮의 英雄이여 고개를 들어라!

1936年 조선중앙일보 社長이었던 呂運亨 先生은 베를린 올림픽에 出戰하는 손기정 選手를 비롯한 朝鮮人 選手들에게 비록 日章旗를 달고 出戰하지만 등에는 韓半島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지 말고 堂堂하게 出戰할 것을 當付합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種目에서 優勝한 손기정 選手는 施賞臺에서 花環으로 日章旗를 가리고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 寫眞을 본 呂運亨 先生은 손기정 選手를 위해 日章旗를 지우고 技士를 發行하게 됩니다.

第3코너 平和 ? 民族 統一의 길 (1945~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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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코너 平和 ? 民族 統一의 길 (1945~1947)

朝鮮建國同盟과 朝鮮建國準備委員會

1944年 日帝의 敗亡을 豫見한 呂運亨 先生은 朝鮮建國同盟을 組織하여 새로운 國家의 建國을 準備합니다. 1945年 8月 15日 解放을 맞이한 時點에서 國內에서 活動하던 唯一한 國家 建國 組織인 朝鮮建國同盟은 最初의 建國 準備 團體인 朝鮮建國準備委員會로 發足되었으며 呂運亨 先生이 委員長을 맡았습니다.

建國準備委員會는 보름이 채 안된 時點에 全國에 145個의 地方委員會들을 組織할 程度로 全國의 治安과 行政을 掌握함으로써 過渡期의 混亂을 防止했습니다. 이는 朝鮮建國同盟의 事前 準備 作業이 있었기 때문이며 同時에 呂運亨 先生에 對한 民衆의 信賴와 支持가 있기에 可能했던 것입니다.

左右合作委員會와 統一政府樹立運動

1945年 12月 모스크바 3賞會議에서의 信託統治 決定이 傳해지자 政治勢力들은 이에 對한 贊反을 둘러싸고 尖銳하게 對立했습니다. 이 때 呂運亨 先生은 “우리가 統一國家를 樹立하기 위해서는 美國도 蘇聯도 妨害를 하지 않는 境遇에만 可能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親疏反美度 親美反訴度 해서는 안된다. 理念은 自主統一이 되고 난 뒤에 그 때 가서 人民에게 물어서 擇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民族的 團結을 要請했습니다. 그는 左右 合作과 南北 聯合을 통해 統一臨時政府를 樹立하고, 이 統一臨時政府가 美·蘇·英·中 4個國의 支援과 協力 下에 完全한 自主獨立國家를 建設하려 했던 것입니다.

第4코너 夢陽 呂運亨의 길 (1947.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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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코너 夢陽 呂運亨의 길 (1947. 7. 19.)

座·우와 親美·親疏로 나눠진 極端的 對決 政局 下에서 呂運亨 先生은 解放 後 2年 間 12次例의 테러에 시달렸습니다. 先生은 1947年 7月 19日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極右테러 組織員인 19歲의 한지근이 쏜 銃彈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1947年 8月 3日 근로인민당社 앞에서 進行된 葬禮式은 60萬의 群衆이 모인 가운데 最初의 人民張으로 치러졌습니다. 屍身은 포르말린으로 防腐 處理되어 鐵製로 만들어진 棺에 安置되었는데 이는 先生의 遺言에 따라 統一이 되는 날에 다시 葬禮를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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