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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허브

楊平 뮤지엄허브

年代記

年代記

家門, 出生

황순원은 1915年 3月 26日, 平壤에서 가까운 平安南道 大同郡 財經面 氷藏里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提案(齊安). 朝鮮時代 英祖 때 一名 '黃固執'으로 알려진 孝子가 있었으니, 집癌(執庵)이라는 號를 쓴 황순勝(黃順承)이라는 분이 그 사람으로 황순원의 8代 幇助가 된다. 家門을 따지는 일이 家父長制 傳統을 反省 없이 踏襲하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그 '黃固執' 집안의 氣質은 그의 祖父 황연기(黃練基), 父親 황찬영(黃贊永)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끊이질 않고 있었던바, 特히 父親은 3.1運動 때 平壤 崇德學校 敎師로 있으면서 太極旗와 獨立宣言書를 平壤 市內에 配布한 일로 獄살이를 하기도 한다. 그때 황순원의 나이 滿 4歲. 아버지가 1年 6個月 獄苦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 장찬붕(張贊朋)과 단둘이 시골집에서 孤獨하게 지냈다는 記錄이 보인다. 황순원이 맏이이고, 밑으로 아우가 둘이다.
황순원 作家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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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學校, 燒酒 ?燒酒
?

1921年 滿 6歲 때 家族 全體가 平壤으로 移徙하고, 滿 8歲 때 崇德小學校에 入學한다. 裕福한 環境에서 藝體能 敎育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小學校 時節 이미 燒酒를 마시기 始作했는데, 이는 滯症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술 얘기라면 여기서 미리 더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열두어 살 때부터 마신 燒酒를, 그는 일흔이 넘도록 마셨고, 그 뒤로 몸이 衰하여서도 他界할 때까지 每日 '마주앙'을 마셨다.
황순원 作家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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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窓時節, 첫 詩集, 拘留

1929年에는 井州에 있는 五山中學校에 入學한다. 그곳 校長 南崗 李昇薰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男子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단편 「아버지」) 하고 느꼈다는 황순원의 告白을 뒷날의 弟子들은 記憶해 냈고, 황순원이 늙어가는 모습에서 그 '아름다움'에 對해 생각하곤 했다. 五山中學校에서는 한 學期를 마치고, 다시 平壤으로 와서 숭실중學校로 前入學한다. 詩를 쓰기 始作한 것은 그 이듬해 무렵부터. 첫 發表는 1931年 7月 『東光』 을 통해서인데,「나의 꿈」이라는 詩가 그 登壇作이다. 以後 中學校 時節 거듭 詩를 發表하다가 1934年 卒業과 함께 日本 東京으로 건너가 와세다 第2高登院에 入學한다. 이해랑, 김동원 等과 함께 劇藝術 硏究團體 <동경학생예술좌>를 創立. 이 團體 名義로 27篇의 詩가 실린 첫 詩集 『放歌』 刊行. 이듬해 여름 放學 때 歸鄕했다는 朝鮮總督府의 檢閱을 避하려고 東京에서 詩集을 發刊했다는 事由로 平壤警察署에서 29日間 拘留를 산다.
황순원 作家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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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婚, 內助

1935年 1月, 平壤 숭의여고 文藝班長 出身으로 日本 나고야 金星女子專門 在學中인 東甲의 處女 양정길과 結婚. 이들 夫婦 사이에는 以後, 나중에 20世紀 後半을 代表하는 詩人으로 成長하는 맏아들 동규(東奎)를 비롯, 次男 남규, 딸 선혜, 3男 蓁艽 等이 태어나 자라게 된다. 황순원은 以北에서 살다가 越南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直系 家族間의 離散의 아픔이나 悲劇을 겪지 않은 家族 關係를 維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中에도 避할 수 없는 6.25 戰爭期 避難 時節의 가난과 그 以後의 生活苦를 몸소 부딪쳐 解決해낸 夫人의 內助가 오늘날 황순원의 이름을 그토록 뚜렷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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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番째 詩集, 骨董品

1936年 와세다 第2高等學院을 卒業하고 와세다 大學 文學部 英文科에 入學한다. 5月에 두 番째 詩集 『骨董品』을 낸다. 첫 詩集 『放歌』가 靑少年期의 浪漫的 熱情이 결氣어린 語調로 드러난 詩集이라면,『골동품』은 事物의 引上을 寸鐵殺人의 叡智로 빚어낸 짧은 詩들이 主流를 이루고 있는 詩集이다. 萬一 황순원이 小說家로서가 아니라 詩人으로 더 뻗어나갔다면 두 媤집도 여러 意味에서 더 큰 評價를 받았을 것이다.
황순원 作家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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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小說, 첫 小說集, 現在形 文章

以後 황순원은 詩人으로의 行路를 크게 진전시키지 않는다. 代身 그 詩的 履歷을 小說로 옮겨가기 始作한다. 그 첫 作品은 1937年 7月 『創作』 第3輯에 發表한 「거리의 副詞」. 이 作品은 原稿紙 30張 程度의 길이인데, 東京에서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며 사는 朝鮮人 留學生의 窮乏한 日常이 克明하게 描寫되고 있다. 이듬해 10月에 「돼지系」를 發表하고, 이 두 作品을 비롯해서 創作 年代가 確實치 않은 다른 11篇의 短篇을 함께 묶어 그로부터 3年 뒤인 1940年에 『황순원 短篇集』(나중에 이 冊을 『늪』이라는 題目으로 開版한다)을 내게 된다. 이때가 와세다 大學을 卒業하고 歸國한 지 2年 뒤다. 이 小說集에 실린 作品들의 特徵은 '現在形 文章'의 쓰임이 많고, 게다가 感覺的 描寫가 두드러진다는 點이다. 金炫은 이를 두고 "그가 短篇까지를 詩의 延長으로 본 것이 아닐까"(「안과 밖의 辨證法」)하는 推測을 하고 있다.

午後에는 終乃 비가 온다. 빗줄기가 누워 내린다.
琉璃窓 너머로 雨傘이 빗줄처럼 누워 떠다닌다.
비안개가 지붕보다 높다.
 -「거리의 副詞」

검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물결의 흰 혀끝이 모래톱을 핥는다.
꽥꽥 갈매기가 모래톱으로 밀리는 물결을 거슬러 난다.
앉아만 있는 섬은 어둠 속에 아주 멀리 물러나 앉는다.
 -「소라」

와 같은, 詩에서 쓰임직한 感覺的이면서도 主情的(主情的)으로 이어지는 描寫들을 보노라면, 그런 推測은 자연스러운 感이 있다. 이러한 特徵은 事實 그 以後의 황순원 小說 全般에 나타나는 것이기도 해서 그의 小說을 '詩的인 小說'로 評價받게 만드는 要因도 되었고, 無數한 後輩 作家들이 따르고 흉내내며 小說 文章을 배우는 對象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小說 文體에 對한 探査가 이어져 우리의 小說 文體論이 한層 深化되는 契機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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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抹殺 속의 小說 쓰기

세 番째가 되는 小說集 『기러기』를 낸 것이 1951年인데, 여기 실은 15篇 中 「별」「그늘」 두 篇을 除外하면 나머지는 모두 日帝의 한글 抹殺 政策 밑에서 創作되어 發表할 機會를 얻지 못하고 保管되던 것들이었다.
作家가 私席에서 直接 한 말에 따르면 그 즈음 李光洙에게 보낸 어떤 作品에 對해 李光洙가 그 才能을 稱讚하면서 앞으로는 日本語로 作品을 쓰라는 內容의 便紙를 보내온 바 있다고 했다.
빼앗긴 母國語로, 언제 發表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채로 혼자서 小說을 創作하고 있었던 한 고집스러운 新銳作家와, 이미 大家가 되어 民族의 앞날까지도 豫見할 만한 位置에 서 있던 香山光郞이라는 日本式 이름을 쓰는 한 老獪한 作家의 모습을 同時에 떠올려봄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時節 황순원은 自身의 그 孤獨한 創作物을 平生의 親舊 評論家 願응서(元應瑞)에게 들려주곤 한다.
두 사람의 이런 特別한 關係가 저 有名한 短篇 「소나기」(1953年作) 무렵까지로 이어져, 「소나기」의 마지막 대목을 願응서의 忠告를 받아들여 末尾 네 文章을 削除하고 發表한 것이 只今 알려진 作品이 되었다는 有名한 逸話를 남기게 된다.
願응서가 작고(1973년)한 後에 오랜 동안 황순원이 술자리마다 그를 위해 꼭 燒酒 한 盞을 따뤄 두고 있고, 그 얘기를 「마지막 盞」이라는 小說로도 썼다.
日帝의 干涉을 被害 1943年부터 故鄕 氷藏裡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解放 되고 9月에 平壤으로 돌아가지만, 곧 共産 治下에서 地主 階級으로 몰려 身邊의 威脅을 느낀 나머지 이듬해 家族들과 越南한다. 그해 9月에 서울高等學校 國語 敎師로 就任한다. 그때까지 가끔 詩도 쓰고, 走路는 短篇小雪도 써왔는데, 처음으로 長篇 構造를 가진 『별과 같이 살다』를 部分的으로 發表하게 된다. '곰녀'라는 한 女性의 肉體的 身分的 受難을 中心으로 日帝 末期에서 解放前後의 劣惡한 時代狀況을 浮刻시키고 있는 이 作品이 한 卷의 冊으로 出刊된 것은 1952年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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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 短篇集, ?6 25 避難살이

1948年에 短篇集 『목넘이마을의 個』를 낸다. 短篇 「목넘이마을의 개」의 背景인 '목넘이마을'은 作家의 外家 마을(大同郡 財經面 천서리)이라 한다. 이 作品集에는 모두 7篇의 短篇이 실려 있다. 個人的 體驗이나 土俗的인 背景 狀況, 傳來的인 說話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省略과 壓縮이 剛한 詩的인 散文型으로 印象깊은 作品 世界를 보여주고 있는 作品들이다. 6.25 戰爭 때 황순원은 弟子의 도움을 받아 京畿道 光州로 避難했고, 1.4 後退 때는 釜山으로 避難 간다. 釜山에서의 避難 生活 또한 夫人이 살림을 이끄는 가운데, 황순원은 臨時 學校의 敎師로 일하면서 김동리, 손소희, 김말봉 等 文人들과 交遊하는 한便으로 創作에 沒頭해서 앞에 말한 短篇集 『기러기』(1951.8)를 낸 外에 11篇의 短篇을 담은 短篇集 『曲藝師』를 1952年 6月에 낸다. 뒤를 이어 1953年 5月에 저 有名한 短篇 「학」과 「소나기」를 發表하고 있으니, 요즘 時節에 견주어도 決코 적지 않은 創作量이라 할 만하다.
황순원 作家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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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과 小說, 長篇小說

황순원의 이름을 短篇 作家로 머물지 않게 한 評判作 『카인의 後裔』는 1953年 9月부터 『문예』에 連載하기 始作하여 5回를 連載하고, 雜誌는 廢刊되지만 作家는 그 뒷部分을 따로 써두었다가 이듬해 겨울에 單行本으로 出刊한다. 平壤에서 地主로 살던 作家 집안이 北韓 共産主義 體制가 成立되면서 뿌리뽑힘을 겪어야 했던 實話가 바탕이 되었다고 알려진 小說이다. 그 時期의 北韓의 實相을 다루면서도 오작녀, 도섭 靈感 等 土着的 삶을 背景으로 하여 急迫하게 變化를 겪으며 살아 움직이는 人間像을 創造하여 存在의 意味와 사랑의 可能性을 묻고 있는 力作으로 評價받고 있다. 1955年에는 6.25 戰爭期의 窮乏과 그로 말미암은 人間性 解體를 다룬 『人間椄木』(原題:天使)을 一年間 連載한다. 이것이 冊으로 나온 것은 1957年의 일. 그 사이 1956年 末에 短篇集 『학』을 發刊하는데, 거기에 실린 14篇 短篇小說들이 大槪는 戰爭을 겪으면서 生命의 意味를 되새겨보는 作家의 意識이 投影된 作品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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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敎授

1957年 滿 42歲인 황순원은 4月에 慶熙大學校 國文科 助敎授로 職場을 옮긴다. 그의 慶熙大學校로의 轉職을 전후하여 김광섭, 주요섭, 김진수, 조병화 等 文人 敎授가 같은 길을 걷게 되면서, 文學的인 雰圍氣와 比較的 安定된 生活을 確保한 狀態에서 더욱 旺盛한 創作熱을 불태울 수 있게 된다. 그 해에 대한민국예술원 會員으로 選任된다. 스스로의 茶山의 創作과 그 成就를 基盤으로, 그것에 對한 社會的 禮遇가 주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文人 弟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時期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慶熙大學校에서는 特別한 補職 없는 平敎授로 23年 6個月을 奉職하고 또 末年까지 繼續 名譽敎授로 남아 後學들을 가르쳤다. 많은 弟子들이 그의 이름 뒤로 줄을 서기를 자랑스러워하는 原因이 그 가르침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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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學的 事由, 體驗과 日常

1958年에 여섯 番째 短篇集 『잃어버린 사람들』을 發刊하고, 1960年에 長篇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사상계』에 連載한 直後 出刊한다. 이 長篇은 6.25라는 同族 相殘의 悲劇 속에서 살아가는 매우 다양한 人間像을 提示하여 人間의 生存 二流를 探索하는 小說이다. 이 作品은 評論家 白鐵과의, 황순원으로서는 보기 드문 論爭을 낳기도 한다. 1962年에 『현대문학』에 連載하기 始作한 長篇 『日月』은 3年 만에, 그 무렵 창우사에서 내기 始作한 『황순원 全集』의 第 6卷으로 發刊된다. 白丁 집 身分이라 相當한 不利益을 當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人間 疏外와 救援의 問題를 다루고 있는 이 小說은 쉽게 다룰 수 없는 素材, 哲學的 깊이에 이른 主題意識, 그것을 構造化하는 뛰어난 彫琢 能力으로 빛낸 作品이다. 1964年에 40代 中盤에 이른 作家의 老鍊한 筆致가 돋보이는 短篇集 『너와 나만의 時間』이 刊行된다. 「모든 榮光은」 等 作家 自身의 實際 體驗과 日常이 담긴 作品을 통해 그의 個人私的 空間으로 들어가는 길을 살펴볼 수 있는 作品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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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科書의 小說

1968年부터 『현대문학』에 連載하기 始作한 長篇 『움직이는 性』李 發刊된 것은 1973年이다. 分量으로 치면 황순원의 作品 中에는 『일월』보다 조금 더 많은, 가장 긴 長篇이다. 우리 民族의 根源的인 '流浪民 根性'에 對해 批判的으로 穿鑿하는 가운데 人間의 眞正한 志向을 探索하는 小說로 황순원 文學의 頂點을 보인 作品으로 評價받고 있다. 1976年에 短篇集 『탈』을 發刊한다. 이 무렵에는 이미 황순원이라는 이름이 韓國을 代表하는 最高의 作家로 評價받고 있었다. 各種 敎科書에서 「소나기」「별」「학」「목넘이마을의 개」 等의 作品이 揭載되고 있어서 그 作品을 敎科書에서 接한 學生들이 그의 이름만 보고 大學을 志願하는 事例가 늘 程度가 되고, 外國語 飜譯으로 世界에 그 作品이 알려지고 있었으며, 國內의 無數한 紙面에서 그를 審査委員, 企劃委員으로 모시고 있을 때였다. 短篇 「탈」은 10張밖에 안 되는 分量의 小說로 大學의 小說 講義 때 참으로 論議하기 適切한 小說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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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와 個人의 多面體

1978年부터는 長篇 『神들의 주사위』를 『문학과지성』에 連載하기 始作하는데, 5共 直前 新軍部의 登場 때 恣行된 言論統廢合 措置로 雜誌가 登錄 取消되는 바람에 連載가 中斷되자, 이를 『문학사상』에 이어 連載하여 마침내 完成, 1982年에 全集 第10卷으로 刊行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文物의 導入으로 急激한 價値 混亂을 겪고 있는 社會 世態를 한 家族史를 中心으로 풀어헤치고 있는 小說로, 일흔 가까운 나이까지 渾身의 힘으로 밀어올린 勞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순원의 文學을 詩的 文體와 抒情的 이야기 世界로만 理解하고 있는 사람들은 事實, 그의 長篇까지를 두루 考慮하여 그 생각을 바꿀 必要가 있다. 이 點 오늘날 황순원의 小說을 典範으로 하여 創作 訓鍊을 해온 많은 作家들도 反省할 問題인데, 황순원의 長篇은 大河小說의 分量이 아닌데도 主要 登場人物이 많고 그 關係가 意外로 複雜하게 얽히면서 無數한 작은 이야기들을 이끌게 되고 나아가 그 人物, 그 이야기들이 全體的 構成으로 무르녹는 小說 世界를 보이고 있음을 눈여겨 省察해야 한다. 그의 小說은 詩가 녹아 있는가 하면, 小說이 要求하는 豐盛한 이야기 世界와 人間의 根源에 對한 形而上學的 質問을 洗練된 作法으로 너끈히 消化해내고 있는 아주 多面的인 小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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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文과 隨筆, 生存 作家의 全集

1985年에 古稀 記念집으로 낸 『말과 삶과 自由』 는 隨筆類를 쓰지 않은 황순원 文學에서는 보기 드문 散文集으로 그의 人生觀, 文學觀, 未來觀 等을 엿볼 수 있는 짧은 散文들로 채워져 있다. 固定觀念을 뒤흔들고, 헛점을 찌르는 明快한 論辯이 빛나는 이 散文들은 몇 次例 되읽어도 쉽게 읽히면서 삶의 깊이 있는 問題를 곰곰 생각하게 한다. 生存時 全集 發刊의 模範的인 事例도 황순원에게 찾을 수 있다. 이 全集 發刊은 元來 1973年부터 삼중당文庫로 有名한 삼중당에서 始作했는데, 1980年부터는 文學과知性社 판 全集이 發刊되기 始作하여 1985年까지 小說 10卷, 詩 1卷에 硏究家들에 依한 『황순원 硏究』까지 해서 모두 12卷으로 確定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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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마무리

이 뒤로 더는 小說 作品을 世上에 내놓지 않는다. 다만 間間이 詩를 發表한 일은 있다. 1992年에 發表한 「散策길에서」연작과 「죽음에 對하여」 等의 詩篇들인데, 平日에는 婦人과 散策을 하고 日曜日에는 敎會를 나가며, 몇 달에 한番 弟子들과 저녁을 드는 일 外에 바깥 나들이를 삼가는 나날의 一部分이 이 詩篇들에 나타난다. 이로써 그의 公式 作品은 詩 104篇, 短篇 104篇, 中篇 1篇, 長篇 7篇 그리고 散文集의 글로 集約된 채 마감되었다. 1995年 봄에는 『작가세계』의 特輯 作家로 集中的인 硏究 對象이 되었는데, 特히 年老하신 以後로는 極히 異例的으로 對談까지 許諾한 境遇였다. 先生의 育成을 文字化한 보기 힘든 對談機(對談者 송하춘)와, 그때까지의 綜合的인 文學的 年代記(김종회)가 여기에 揭載된다. 2000年 9月 14日 작고. 그가 他界한 後, 遺作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어쩌면 그런 貴重한 資料가 實際로 公開될 수도 있겠지만, 살아 生前에 全集을 냈고 平素에 冊으로 내기 全義 校訂本까지 모두 버리게 하는 꼼꼼함을 알면 그런 글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을 斟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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