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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馬圖는 왜 시베리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나 [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東亞日報

天馬圖는 왜 시베리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나 [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4月 14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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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慶熙大 史學科 敎授
《韓國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新羅의 代表的인 遺物인 天馬圖는 올해로 發掘 50周年을 맞이했다. 天馬圖는 修學旅行의 追憶과 國際的인 歷史都市인 慶州를 代表하는 遺物 以上의 意味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천마처럼 1500年 前 유라시아 大陸과 맞닿으며 巨大한 國家로 雄飛하려는 新羅의 모습을 象徵的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可히 ‘天馬圖 코드’라고 해도 될 程度의 天馬圖 안에는 수많은 祕密이 숨겨져 있다. 지난 50年間 韓國과 유라시아의 숨은 關係를 象徵하는 韓國의 代表的인 遺物로 자리매김한 天馬의 起源을 살펴보자.》



南韓에 없어 輸入한 자작나무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는 신령한 말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듯한 신비감을 준다. 시베리아 북방에서 자란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렸으며 신라 지도층은 지배권 강화를 위해 북방 지역과의 연계성을 강조했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慶州 天馬塚 障泥 天馬圖는 神靈한 말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듯한 神祕感을 준다. 시베리아 北方에서 자란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렸으며 新羅 指導層은 支配權 强化를 위해 北方 地域과의 連繫性을 强調했다. 國立文化財硏究院 提供
天馬塚의 元來 이름은 慶州 古墳 155號墳이었다. 觀光資源 開發을 위한 朴正熙 前 大統領의 指示로 選擇된 155號墳은 8個月에 걸친 調査를 통해 慶州를 代表하는 古墳 ‘天馬塚’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로 그 안에서 發見된 ‘天馬圖’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古墳의 主人公을 알면 ‘陵’이라 붙이고 모르면 ‘銃’이라 붙인다. 이렇게 主人公을 모르는 狀況에서 代表的인 遺物로 그 古墳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日帝强占期부터 생겨난 慣習이다. ‘金冠塚’ ‘金鈴塚’ ‘瑞鳳塚’ 等이 그렇다. 勿論, 이런 命名法은 新羅 王族의 權威를 否定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只今은 使用되지 않는다. 155號墳은 日帝强占期 以後로 最初로 發掘된 大型 王族 古墳이라 ‘天馬塚’이라 붙여졌지만 그 以後에 發掘된 98號墳은 그냥 ‘皇南洞의 큰 古墳’이라는 뜻의 皇南大塚으로 불리는 理由가 여기에 있다.

如何튼 무덤의 이름을 決定할 程度로 天馬圖의 느낌은 强烈하다. 神靈한 말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듯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神祕한 느낌이 든다. 天馬圖는 가로 75㎝, 세로 56㎝, 두께 0.6㎝ 크기의 자작나무 껍질을 앞뒤로 덧대어 만든 말다래(障泥)를 말한다. 말다래는 달리는 말의 발굽에 次인 진흙이 騎馬人의 다리에 튀는 것을 막기 爲한 것이다. 하지만 王族이 말을 타고 行列을 引導하면 그 兩옆을 裝飾하는 華麗한 裝飾이니 單純한 實用性을 넘어 가장 華麗한 象徵이다.

天馬圖의 첫 番째 코드는 바로 그 材料인 자작나무다. 하얀 나무껍질로 有名한 자작나무는 시베리아를 中心으로 하는 北方 유라시아의 代表的인 나무다. 筆者도 시베리아에서 發掘할 때에 자작나무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程度로 豐富하다. 그 껍질은 불이 잘 붙어서 불을 땔 때에 必須高, 또 벗겨내서 바구니 같은 生必品을 만든다. 봄에는 자작나무에서 달달한 水厄을 뽑아서 먹곤 한다.

그런데 天馬塚의 자작나무는 特別하다. 넓이 70㎝ 程度의 크고 質 좋은 자작나무 껍질을 利用한 것이다. 자작나무의 껍질은 벗기면 곧 마르기 때문에 벗기자마자 細心하게 다듬고 圖畫紙처럼 펼쳐 놓아야 한다. 여기에 天馬 같은 藝術을 그리려면 자작나무의 加工과 藝術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南韓에서는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머나먼 시베리아 北方에서 자작나무를 救해 껍질을 벗겨 加工한 것을 新羅로 輸入해야 한다. 天馬圖뿐 아니라 金冠 밑에 덧쓰는 帽子의 材料로도 자작나무가 使用되었으니, 新羅가 持續的으로 北方의 여러 地域과 交易을 해야 한다. 언제나 北方地域과 맞닿으며 나아가려 했던 新羅의 貴族들에게 자작나무는 單純한 나무 그 以上의 意味였을 것이다.

‘王을 하늘로 모셔간다’는 天馬

2000년 전 만들어진 중국 북방 내몽골 허린걸 벽화묘에 있는 기린의 모습. 한때 천마도 속 그림이 천마가 아니라 중국 신화 속 동물인 기린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실제 모습은 많이 다르다. 강인욱 교수 제공
2000年 前 만들어진 中國 北方 內몽골 허린걸 壁畫墓에 있는 麒麟의 모습. 한때 天馬圖 속 그림이 천마가 아니라 中國 神話 속 動物인 麒麟이라는 主張도 提起됐지만 實際 모습은 많이 다르다. 강인욱 敎授 提供
天馬圖의 두 番째 코드는 머리에 달린 뿔이다. 이마에 뿔이 달리고 날개가 달린 유니콘 같은 모습은 유라시아 全域에 널리 퍼진 想像의 動物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그냥 想像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事實 말 머리의 이마를 裝飾하는 風習은 말과 함께 平生을 보내는 유라시아의 騎馬民族 사이에 널리 보인다. 한때 천마가 아니라 中國 神話의 動物인 麒麟이라는 主張도 나왔다. 하지만 北方을 代表하는 자작나무로 만든 馬具에 中國 神話의 動物을 그린다는 것은 常識的으로도 잘 納得이 되지 않는다. 麒麟은 想像의 動物로 形態도 各樣各色이지만, 大體로 사슴과 비슷하다. 게다가 高句麗의 壁畫에도 뿔 달린 말을 ‘天馬’라고 쓴 것이 또렷이 남아 있다. 事實 麒麟說은 韓國에서 多少 異質的인 것이 나오면 漠然하게 中國에서 그 起源을 찾는 先入見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덤에 天馬를 함께 副葬하는 風習은 遊牧民의 오랜 傳統이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文化(紀元前 7世紀∼2世紀)에서 匈奴와 튀르크(突厥)에 이르기까지 戰士들의 무덤 옆에는 華麗하게 뿔을 裝飾한 말도 함께 副葬했다. 特히 新羅와 같은 時期에 存在했던 튀르크는 무덤을 만들면 그 안의 나무 위에 말의 가죽을 걸쳐놓았다. 무덤의 主人公을 하늘로 引導하는 役割이다.

이렇듯 騎馬文化는 유라시아 草原에서 發達해서 韓國과 中國 一帶로 널리 퍼졌고 新羅에서 華麗하게 完成되었다. 草原의 여러 文化를 崇仰하고 騎馬文化가 發達했던 當時 新羅에는 이런 말 그림뿐 아니라 只今도 수많은 騎馬人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한 말과 關聯된 風習이나 神話도 함께 내려왔을 것이다.

天馬圖의 세 番째 코드는 天馬圖 말의 발에 있다. 天馬圖의 말은 왼쪽의 앞발과 뒷발이 모두 뒤쪽을 向한다. 自然的인 걸음은 이렇게 나올 수 없다. 바로 한쪽의 앞발과 뒷발을 同時에 내딛는 側大寶(側對步)法이다. 이런 걷기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 어릴 때부터 調鍊을 해야 한다. 側大寶로 걸으면 速度는 느리지만 乘馬者는 흔들림 없이 便하게 탈 수 있다. 그래서 戰爭 中에 말 위에서 화살을 쏘거나 貴한 王族이 퍼레이드를 할 때 많이 쓰인다. 이렇게 側大寶로 달리는 모습은 遊牧民인 匈奴가 導入해 널리 퍼뜨린 遺物에 남아 있다. 그리고 匈奴의 影響을 받은 선비와 扶餘, 나아가 高句麗 壁畫에서도 보인다. 天馬圖의 말이 側大寶로 걷는 것은 決코 偶然이 아니었다. 新羅의 王을 천천히 흔들리지 않고 便하게 하늘로 모셔간다는 뜻이었다.

王權 强化 위해 北方地域 連繫 强調

알타이산맥의 베렐 고분에서 발견된 2400년 전 천마의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카자흐스탄 아스타나박물관에서 보유 중이다. 유목민들은 천마가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한다고 믿어 무덤에 함께 묻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알타이山脈의 베렐 古墳에서 發見된 2400年 前 天馬의 모습을 復元한 것으로 카자흐스탄 아스타나博物館에서 保有 中이다. 遊牧民들은 천마가 죽은 이를 하늘로 引導한다고 믿어 무덤에 함께 묻었다. 강인욱 敎授 提供
왜 新羅人들은 北方의 天馬神話와 수많은 遺物을 받아들였을까. 그 背景에는 西紀 4世紀 中盤 新羅의 狀況과 關聯이 있다. 當時 新羅는 朴-席-金 等 세 姓氏가 交代로 王을 하다가 金氏가 獨占을 하여 王權을 强化하던 때였다. 王位를 獨占한 金氏를 中心으로 한 王과 貴族들은 自身들만의 選民意識을 强化하며 北方地域과의 關聯性을 强調했다. 그리고 慶州에 草原 地域의 쿠르간을 模倣한 積石木槨墳을 만들고 다양한 意識에서 金冠이나 琉璃그릇 같은 北方地域과 關聯이 있는 것을 썼다. 쉽게 求하기 어려운 자작나무에 華麗한 藝術을 結合한 天馬圖는 이러한 新羅 王族의 選民意識의 頂點에 서 있는 것이다.

천마 같은 草原의 遺物을 묻는 風習은 200年間 比較的 짧은 時間에 存續했고 西紀 6世紀頃에 忽然히 사라졌다. 三國 統一의 過程에서 佛敎가 導入되고 새로운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華麗한 遺物을 묻는 傳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新羅는 무덤에 넣는 華麗한 留物 代身에 軍事力을 競爭的으로 增强하며 富國强兵에 힘써야 했다. 하지만 文武王은 勿論이고 다른 金氏의 여러 碑文에도 自身들을 匈奴의 後裔라고 쓴 句節이 登場한다. 三國을 統一한 直後에도 如前히 自身들의 選民意識을 北方에서 찾으며 匈奴의 後裔로 自處하곤 했기 때문이다. 三國이 統一된 以後에도 天馬의 意味는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유라시아 各地의 다양한 資料가 알려지고 保存 技術이 發達하며 天馬圖의 숨겨진 祕密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發掘된 지 50年이 지났지만 ‘天馬圖 코드’는 如前히 現在 進行形이다.

강인욱 慶熙大 史學科 敎授
#天馬圖 #자작나무 껍질 #강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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