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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永遠한 在野人士’ 장기표 “文, 1984年 민통련 參與 拒絶”|新東亞

[인터뷰] ‘永遠한 在野人士’ 장기표 “文, 1984年 민통련 參與 拒絶”

“文政權 勞組·北韓·運動圈 콤플렉스”

  • 배수강 記者

    bsk@donga.com

    入力 2019-06-2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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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親日·反獨裁 프레이밍 戰略

    • 文政權 民主化運動 ‘專賣特許’ 냈나

    • 僞善의 極致는 文 周邊 ‘江南左派’들

    • 國民 葛藤·對立 助長해선 안 돼

    • 韓國黨 아닌 새 牽制勢力 나타나야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장기표’라는 이름 앞에는 ‘永遠한 재야(在野) 人事’가 修飾語처럼 따라붙는다. 50餘 年 民主化運動을 하면서 다섯 次例 投獄돼 9年間 獄살이를 했고, 12年을 手配者로 逃亡 다녔다. ‘民主化 透寫’ 經歷으로 치면 高官大爵을 하고도 남지만, 그는 旣成 政治權과는 距離를 뒀다. 勿論 自身의 ‘固執’ 때문에 苦難의 길을 自招한 側面도 있다. 

    그런 그가 每週 土曜日 午後 5時가 되면 서울 光化門 元標公園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고 있다. 過去처럼 獨裁 打倒를 외치는 게 아니다. 運動圈 大先輩이면서도 運動圈 人士들이 大擧 布陣한 文在寅 政權을 批判한다. 1977年 청계被服勞組(전태일 焚身 事件을 契機로 만들어진 當時 勞動運動의 中心) 事件으로 拘束되면서도 그가 지키려고 했던 勞動組合을 狙擊한다. 6月 10日 午前 서울 忠正路 ‘신동아’ 인터뷰룸에서 장기표 新文明政策硏究院 代表와 마주 앉았다. 다음은 一問一答. 

    -最近 代案的 政治結社體 ‘國民의 소리’를 만들었는데. 

    “내 나이가 올해 75歲(그는 1945年生이다)다. 젊을 때도 내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나이 들어서 뭘 하겠나. 그럼에도 ‘大韓民國이 잘되게 役割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난 4月에 민계식 前 현대重工業 會長과 ‘國民의소리’를 出帆시켰다. 熱心히 活動하고 있다(웃음).”

    文明 轉換期와 民主市場注意

    -大韓民國을 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날 世界的 大變化는 文明이 轉換하는 거다. 새로운 情報文明時代가 到來했고, 只今까지 通用되던 思想, 理念, 政策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大量 失業과 所得兩極化, 環境破壞, 人間性 喪失 等으로 社會는 崩壞하고 人生은 破綻 난다. 이에 對한 處方으로서 나는 民主市場注意, 綠色社會民主主義를 主張하고 있고, 社會民主主義에 生態主義를 더한 새로운 進步 理念을 定立했다. 이를 具現하기 위해 (新文明政策)硏究員을 세우고 그 이름으로 講演과 執筆도 하고 있다. ‘國民의소리’를 만들어 光化門에서 國民과 對話하면서 유튜브 放送도 하고 있다.” 

    -1989年 민중당을 創黨했고, 改革新黨과 민주국민당 等에도 參與했는데. 

    “새로운 進步 理念의 政黨을 만들기 위해 努力했지만 繼續 失敗했다. 制度 政治權에 들어가 國會議員, 大統領 選擧에 나가고 現實 政治를 하려고 했지만 新生 政黨으로는 어려웠다.” 

    -金永三(YS) 金大中(DJ), 李明博(MB) 前 大統領의 迎入 提案도 있었는데. 旣存 政黨에 들어갔으면…. 

    “率直히 말하면 宏壯히 많았다. 特히 DJ 先生은 나와 함께 (政治를) 하려고 내게 功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나의 뜻을 100% 펼치지 못한다면 于先 큰 意味가 없었고, 旣存 政黨政治는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은 많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 社會가 直面한 問題를 旣存 政黨으로는 克服할 수 없다고 봤다. 보람과 기쁨을 누리면서 國民을 幸福하게 하는 政黨 建設을 위해 努力했지만, 나의 能力 不足으로 이뤄내지 못했다.” 

    -每週 土曜日 마이크를 잡고 ‘國民과의 對話’를 하는 理由는 뭔가. 

    “國家 運營이 根本的으로 잘못됐고, 나라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確認되고 있기 때문이다. 民心은 勿論 生活 現場, 甚至於 統計廳 資料에서도 確認되고 있는데 이 政府는 ‘뭘 잘못했느냐’는 式이다. 그게 眞짜 큰 問題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지 않나. 잘못된 걸 알았으면 잘하기 위해 方法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된 게 確認됐는데도 認定을 안 하고 繼續 固執을 피운다. 朴槿惠 政權 때에는 疏通을 안 한다고 非難하더니, 정작 自身들은 疏通을 더 안 한다. 言論과 國民의 批判을, 指摘을, 要求를 受容하지 않으니 나라도 나설 수밖에.”

    民主化運動에 ‘거품’ 무는 사람

    -무엇이 잘못됐다고 보나. 

    “人士와 經濟 問題 等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例로, 現 政府 들어 ‘人事 慘事’라는 말이 나올 程度로 長官級 候補者 9名이 落馬했는데도 文在寅 大統領은 (지난해 10月 兪銀惠 敎育部長官 任命狀 授與式 後) ‘人事聽聞會 때 많이 시달린 분들이 오히려 일을 더 잘한다는 傳說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人事 失敗에 對한 遺憾 表明은 없이 國會를 嘲弄하는 듯한 發言이다. 最近 3·1節 記念辭에서는 뜬금없이 ‘빨갱이’를 얘기하더니, 5·18 記念辭에서는 ‘獨裁者의 後裔’를, 顯忠日 追念辭에서는 6·25 戰死者 遺族이 있는 자리에서 (6·25戰爭 功勞로 김일성의 勳章을 받은) 金元鳳을 擧論한다. 國民 統合보다는 葛藤을 부추기려는 政治的 目的 아닌가.” 

    文 大統領은 지난 3·1節 記念辭에서 “‘빨갱이’는 日帝가 모든 獨立運動家를 낙인찍는 말이었고, 只今도 政治的 競爭 勢力을 誹謗하고 攻擊하는 道具로 使用되고 있다”고 했다. 또 5·18民主化運動 記念辭에선 “獨裁者의 後裔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가 없다”고 했고, 顯忠日 追念辭에선 “약산 金元鳳 先生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編入돼 마침내 民族의 獨立運動 力量을 集結했다”며 “光復軍 隊員들은 光復 後 大韓民國 國軍 創設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韓美同盟의 土臺가 됐다”고 말했다.

    辯護士 文在寅과의 만남

    -‘政治的 目的’이라면 陳永 葛藤을 부추겨 自身의 支持 勢力을 모은다는 뜻인가. 

    “그렇다. 文 大統領과 周邊 運動圈 人士들은 民主化運動 經驗을 내세워 自身들은 正義롭고, 對蹠點에 있는 自由韓國黨은 ‘獨裁者의 後裔’라고 하는, 一種의 프레임을 짠다. 政治的으로 相對를 親日 勢力, 獨裁 擁護 勢力으로 規定하는 거다. 各種 過去事委員會를 만들어 前 政權의 恥部를 밝히는 것으로 政權의 正當性을 보이려는 것도 集團利己主義를 活用하려는 利己心이다. 프레임을 짜서 나라가 잘되면 좋은데, 이렇게 되면 나라는 亡하고 被害는 國民이 본다. 國民 統合에 나서야 할 執權 勢力이 政治的, 政略的 理由로 國民 間 葛藤과 對立을 助長해선 안 된다.” 

    -文 大統領도 大學 時節 學生運動을 하다가 强制徵集을 當했고, 靑瓦臺와 與圈 核心 人士 相當數가 民主化運動을 한 건 事實 아닌가.  

    “그 部分은 나도 認定한다. 예전에는 데모하기도 어려웠는데, 文 大統領이 (경희대) 在學 時節에 ‘데모’한 데 對해선 높이 評價해왔다. 그런데 文 大統領과 靑瓦臺 周邊 運動圈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程度로 透徹하게 民主化運動을 했는가. 日帝强占期에 獨立運動을 했나 안 했나, 全斗煥 政權 때 反獨裁 運動을 했나 안 했나 하면서 ‘거품’을 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運動’한 사람은 드물다. 나 같은 사람도 民主化運動을 많이 했나 적게 했나, 그런 말은 안 한다. 그런데 文 大統領과 周邊 사람들은 마치 民主化運動을 ‘專賣特許’ 낸 것처럼 말하고, 言論은 그렇게 報道를 한다. 이는 宏壯히 어리석고, 爲先(僞善)的이다.”

    “關與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1988년 12월 21일 장기표 대표(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시국사범들과 함께 공주교도소를 출소하면서 ‘5공비리 청산’을 외치고 있다. [동아DB]

    1988年 12月 21日 장기표 代表(앞줄 왼쪽에서 네番째)가 時局事犯들과 함께 公州矯導所를 出所하면서 ‘5共非理 淸算’을 외치고 있다. [東亞DB]

    그는 테이블에 놓인 原豆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쳤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民主化 精神이 그렇게 透徹하다면 彈壓이 가장 甚했던 全斗煥 政權 때에는 왜 辯護士만 했는가 묻고 싶다. 1984年 公害問題硏究所 創立 初期, 나는 ‘민통련(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을 組織하기 위해 當時 釜山에 가서 ‘辯護士 文在寅’을 만났다. 後輩들이 民主化運動을 한 사람이라고 紹介해서 만났는데, ‘같이 하자’고 하니까 ‘이런 일에는 全혀 關與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말도 그러했고, 表情도 그랬고, 以後 後輩들에게 들어봐도 그랬다.” 

    그가 말한 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은 1985年 3月 29日에 結成된 社會運動團體로, 1980年代 民主化運動에서 求心點 役割을 했다. 常任議長은 문익환 牧師가, 顧問으로 咸錫憲, 김재준, 지학순 主敎 等이 委囑됐다. 신민당의 直選制 改憲運動과 連帶해 大衆運動을 展開했고, 1987年 5月 政治權과 民主化運動 勢力을 網羅한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를 結成하는 데 主導的 役割을 했다.

    -以後 文 大統領과 再會하지는 않았나. 

    “다시 안 만났다. 現 政府나 與圈의 運動圈 人士 中에도 1980年代 民主化運動 彈壓이 거세지자 나서지 않은 사람이 많다. 나는 文 大統領과 執權 勢力이 民主化運動을 제대로 안 해서 탓하는 게 아니다. 나처럼 모두 데모하고 다녔으면 나라 거덜 났을 거다. 農事를 짓는 사람이나 東大門 布木店 主人이 꼭 데모를 해야 할 理由도 없다. 그러니 各自 自身이 맡은 일을 默默히 해낸 國民 모두가 民主化運動을 한 거다. 내 생각에는 文 大統領과 靑瓦臺 核心 人士들이 民主化運動에 對한 一種의 콤플렉스가 있는 거 같다.” 

    -콤플렉스라면…. 

    “나는 運動圈 情緖를 잘 알고 있다. 文 大統領과 曺國 民政首席, 임종석 前 大統領祕書室長 等도 民主化運動을 하긴 했는데 제대로 못 했다. 그러니 民主化運動을 한 强性 運動圈 人士의 主張에 影響을 받고 따라가게 된다. 오히려 ‘그래, 나는 民主化運動을 熱心히 안 했다’고 認定하면 堂堂해지는데, 그걸 못 한다. 僞善의 極致는 ‘江南左派’들이다.” 

    -進步的 理念, 或은 프롤레타리아的 思考를 지닌 富裕層을 말하는가. 

    “그렇다. 曺國 民政首席이나 張夏成 駐中大使(前 大統領祕書室 政策室長) 等 現 政府 人士 中에서도 數十億 富者가 많다. 이들은 아주 富者이면서 民主化運動의 後裔인 量, ‘없는 사람’ 行世를 한다.” 

    政府公職者倫理委員會가 3月 28日 公開한 公職者 財産變動事項 申告內譯에 따르면, 文 大統領과 靑瓦臺 祕書官級 以上 參謀陣 47名 等 靑瓦臺 高位公職者의 平均 財産은 14億9400萬 원이었다. 文 大統領 財産은 20億1600萬 원, 曺國 民政首席은 54億7645萬 원이었다. 張 大使의 지난해 財産은 104億餘 원이었다.

    “勞動運動 하는 사람들 謙遜해야”

    -最近 民主勞總(全國民主勞動組合總聯盟)을 强하게 批判한다. 勞動運動 系譜로 보면 ‘先輩’ 아닌가. 

    “民主勞總은 1990年代 中盤까지는 全體的으로 勞動者 權益을 確保하는 데 相當한 役割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旣得權 强性 勞組의 弊端이 나타나고 있다. 于先 大企業 勞組 組合員의 平均 年俸은 1億 원 前後다. 大體로 旣得權層인데 손톱만큼도 讓步를 안 한다. 自己들 때문에 非正規職과 靑年失業이 量産되고, 下都給 企業의 低賃金化가 固着되는데도 예수나 孔子라도 되는 것처럼 ‘非正規職 差別 撤廢하라’ ‘靑年失業 解消하라’고 한다. 이程度면 破廉恥한 거다. 우리나라 勞動運動을 하는 사람들은 謙遜해야 한다. 그들은 (1987年) ‘7,8,9月 勞動者 大鬪爭’이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데, 眞짜 勞動者들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勞動者 大鬪爭이라는 게 1987年 6·29 宣言을 통해 ‘降伏宣言’을 받아낸 以後 大企業 中心으로 勞組를 結成해 鬪爭한 거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마치 民主化와 進步의 中心 勢力인 양 설쳐댄다. 나아가 民主勞總 사람들은 韓國勞總(韓國勞動組合總聯盟)李 軍事獨裁 時節에 御用(御用)勞組 活動을 많이 했다고 攻擊한다. 비록 ‘御用’이라고 해도, 그 森嚴한 時節에 勞動運動을 한 그 自體는 只今과 달리 宏壯히 危險했고 思想的으로도 不穩視됐다. 그걸 견뎌내면서 勞動運動을 한 거다. 韓國勞總이 어렵게 勞動運動할 때 勞組 活動 안 하던 사람들이 民主化 以後 (좀 했다고) 마치 큰 鬪爭을 한 것처럼 말하면 안 된다. 요즘은 警察과 民主勞總 組合員이 衝突해 負傷者가 생기면 警察이 處罰받는 時代가 됐다. 警察이 罷業이라도 해야 할 狀況이다. 그런데 이 政權은 손을 못 댄다. 오히려 발목이 잡혀 國政 運營을 제대로 못 한다.”

    “氣가 찬 일 아닌가”

    -왜 그렇다고 보나. 

    “지난해 8月 (大統領 直屬 勞使政(勞使政) 對話 機構인) 經濟社會勞動委員會(經社勞委)가 出帆했다. 그런데 民主勞總은 內部 强勁派의 反對로 參與가 霧散됐고, 올해 1月 文 大統領이 김명환 民主勞總 委員長을 靑瓦臺로 招請해 說得했지만 效果는 없었다. 週52時間制 施行으로 企業들이 어려움을 呼訴하고, 이미 지난해 11月 文 大統領과 與野 5黨 院內代表가 彈力勤勞制를 延長하기로 했는데도 文 大統領 要請으로 민주노총의 (經社勞委) 參與를 기다렸다. 彈力勤勞制 單位期間을 6個月로 늘리는 데 合意하고, 3月에 大統領이 參席한 가운데 會議를 열어 合意案을 議決하려고 했지만 이番에는 非正規職·靑年·女性을 代表하는 經社勞委 (本委員會) 委員 3名이 會議에 不參해 議決이 霧散됐다. 그렇게 해놓고 4月 初 민주노총은 國會 앞에서 彈力勤勞制 擴大 反對 集會를 열고 國會 담牆을 부쉈다. 氣가 찬 일 아닌가.” 

    張 代表가 말한 彈力勤勞制는 일감이 많을 때 法定 勤勞時間을 넘겨 일하는 代身 일감이 적을 때는 勤勞時間을 줄여 單位 期間(最長 3個月) 內 平均 週當 勤勞時間을 52時間으로 管理하는 制度다. 4月 3日 國會 環境勞動委員會가 彈力勤勞制 擴大를 위한 勤勞基準法 改正案(單位 期間 6個月로 擴大)을 審査하기로 하자 民主勞總 組合員들은 國會 담牆을 허물고 國會 進入을 試圖했다.

    “北韓에 對한 過度한 低姿勢”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民主勞總은 촛불集會 主導 勢力인 만큼 現 政府가 民主勞總에 負債意識이 있기 때문일까. 

    “촛불集會는 大統領도 잘못하면 쫓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韓國 民主主義의 偉大한 業績이다. 文在寅 大統領 만들려고 한 게 아니다. 촛불集會는 國民이 나선 것이지, 민주노총이 役割을 했더라도 過度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볼 때 文 大統領과 執權 勢力이 민주노총을 擁護하는 것도 運動圈이 가진 一種의 ‘勞動者 콤플렉스’가 作用했기 때문이다. 所謂 進步陣營 知識人들이나 在野는 勞動者를 重視하는 ML(마르크스-레닌) 注意를 批判할 自信이 없다. 反面 企業이나 經營者를 攻擊하면 相對的으로 票가 모인다. 富者를 攻擊해주니까. 걱정이다.” 

    -對北 低姿勢 論難은 어떻게 보나. 

    “文在寅 政府는 北韓이 彈道미사일을 연달아 쏘아도 ‘確認 中’이라고 한다. 北韓 김정은이 ‘오지랖 넓은 仲裁者, 促進者 行世하지 말라’(4월 12日 最高人民會議 發言)고 해도 (北韓에) 우리 政府는 ‘쌀을 주겠다’고 한다. 政府는 ‘人道的 支援’이라고 하지만 北韓에 對해 過度한 低姿勢를 보이니, 國民은 ‘北韓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고 하나’ 하고 걱정한다. 乖離가 있다. 運動圈 人士들은 大體로 親北韓的 性向을 보인다. 北韓의 實情을 잘 아는 사람들도 北韓에 對해선 無批判的이고, 甚至於 盲從하는 傾向性을 띤다. 

    왜냐면 南北 分斷 過程에서 北韓은 民族的 正統性을 維持한 自主的인 政府이고, 南韓은 美國과 外勢 依存 政府로 보기 때문이다. 北韓이나 社會主義 國家는 獨裁나 閉鎖主義, 社會主義 經濟政策 때문에 못사는 게 아니라 世界 最强國 美國에 對抗하기 위해 國防費에 많은 돈을 쓰니까 못산다고 생각한다. 나는 1980年代 中盤부터 이러한 傾向性을 ‘北韓 콤플렉스에 사로잡혔다’고 規定했다.” 

    -極右 人士들 中에는 現 政府의 核心을 共産主義者, 主思派로 規定하는 사람들도 있다. 

    “太極旗 集會에 나가보면 이른바 保守的 知識人들이 무턱대고 現 政權 人士를 ‘빨갱이’ ‘間諜’ ‘主思派’라고 攻擊한다. 이건 事實도 아니고, 現 政權 人士들이 北韓의 指令을 받거나 共産主義 思想이 透徹한 것도 아니다. 그런 文 政權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主思派’라고 攻擊하는 代身 僞善的인 內容을 暴露하고 批判하는 게 옳다.” 

    -政權 牽制 役割은 野黨 몫 아닌가. 

    “文在寅 政府가 이렇게 實情(失政)을 해도 韓國黨 支持率은 오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野圈은 團結이 核心인데, 바른未來黨이나 親朴 勢力과 統合이 안 된다. 올 9月頃 朴槿惠 前 大統領 釋放 可能性도 있고, 그에 맞춰 ‘親朴黨’이 생길 수도 있다. 政權 牽制를 하려면 總選에서 野黨 議員을 많이 당선시켜야 하는데 國民의 信賴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個人的으로는 國民에게 希望을 줄 수 있는 새로운 政治 勢力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앞서 말했지만, 文明史的 大轉換期는 새로운 政治勢力이 나와 對政府 鬪爭을 主導해야 한다. 現在 野黨에 맡겨선 文 政權을 克服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도 每週 土曜日 光化門에서 直接 國民과 疏通하며 演說을 한다.” 

    -最近 5·18光州民主化運動 補償과 關聯해 沈在哲 韓國黨 議員과 이해찬 민주당 代表의 補償金 論難이 있었다. 5·18 補償子 名單 公開 要求도 이어지고 있다.
     
    “民主化運動을 해서 報償을 받든 안 받든 그건 當事者들의 判斷이다. 난 안 받았지만 남들이 받는 걸 그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김대중 政府 時節 敎育部 長官이 된 人士가 1980年代 解職敎授 60餘 名을 光州民主化補償法에 따라 1億3000萬 원씩 補償을 했다. 그런데 이들 解職敎授들은 金永三 政府 時節 復職해 밀린 月給 1億~3億 원씩을 다 받았다. 그리고 民主化運動으로 解職됐다고 해서 長官도 되고 國會議員, 大學 總長도 됐다. 누릴 건 다 누렸다. 이 中에 5·18 關聯者는 2, 3名뿐이었다. 國民의 稅金을 이렇게 나눠 먹어선 안 된다.”

    “누릴 건 다 누려놓고…”

    -當時에는 왜 批判이 없었나. 

    “內容을 알았던 사람들도 社會 雰圍氣上 批判을 못 했다. 그런데 이런 行爲들이 民主化運動 勢力을 우스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서 내가 이를 批判하는 글을 하이텔, 千里眼 같은 PC 通信에 올렸더니 이것이 日刊紙에 報道됐다. 當時 光州民主化運動 關聯 補償을 받으려면, 死亡하거나 行方不明된 사람의 遺族과 傷害者만 報償받을 수 있었다. 光州에 가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懲役 살았다고 報償받는 게 아니다. 그리고 隣友保證(隣友保證·事實 與否를 確認해줄 수 있는 周邊 사람들이 保證을 서주는 것)으로 補償自家 자꾸 늘어난 것도 問題다. 이 問題는 民主 勢力에게도 責任이 있다고 본다. 다만 名單을 公開하라는 사람 中에는 5·18 民主化運動 自體를 相當히 否定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옳지 않다.” 

    -張 代表는 왜 補償金을 申請하지 않았나. 


    “5·18 當時 나는 김대중 前 大統領이 中心이 된 國民聯合(民主主義와 民族 統一을 위한 國民聯合) 組織局長이었다. 示威를 組織하고 背後 操縱을 했다. 이른바 ‘김대중 內亂陰謀事件’으로 3年 半假量 逃亡을 다녔다. 以後 김영삼 政府에서 特別法이 制定돼 當時 內亂陰謀事件 關聯者들은 모두 5·18 有功者가 됐지만 나는 申請하지 않았다. 當時 大學生들은 오늘과 달리 若干은 知識人으로 불렸고, 나는 知識人으로서 民主化運動을 한 거면 充分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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