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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感性’ 益善洞 옆으로 3·1運動이 흐른다|신동아

사바나 ; 이리저리

‘레트로 感性’ 益善洞 옆으로 3·1運動이 흐른다

서울 경운동 ‘天道敎 中央大敎堂’ 이야기

  • 김우정 記者

    friend@donga.com

    入力 2019-06-17 15: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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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帝强占期 改良韓屋이 ‘인싸’ 카페로

    • 낡은 空間 전유한 레스토랑?雜貨店에 2030 발길

    • 近處에 異色的 붉은 甓돌 建物 ‘中央大敎堂’

    • 一齊 속여 모은 돈, 建物 짓고 獨立運動 돕고

    • 3·1運動 同甲내기 100年 떡집도

    ‘사바나 ; 이리저리’는 東亞日報 出版局의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 ‘사바나’가 발품 팔아 連載하는 踏査記입니다. 20代 ‘歷史 덕후’ 記者가 ‘핫 플레이스’ 裏面에 담긴 歷史와 사람, 飮食 이야기를 傳합니다. SNS에는 없는 ‘핫 플레이스의 속살’을 들여다봅니다.

    歲月 따라 기와 위 더께는 켜켜이 쌓였지만 막상 門을 열고 들어가면 整頓된 室內에 맛난 飮食 냄새며 隱隱한 커피 香氣가 풍깁니다. 最近 ‘핫 플레이스’로 脚光받는 ‘益善洞 골목길’ 얘깁니다. ‘益善洞 골목길’의 流行은 ‘레트로(Retro)’ 感性에 기대는 바가 큽니다. ‘레트로(Retro)’ 感性은 ‘回想’ 或은 ‘追憶’을 뜻하는 英語 單語 ‘Retrospect’에서 따온 것이니 ‘復古主義’ 乃至는 ‘復古風’으로 理解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익선동 골목길'은 '레트로 감성'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입니다. [김우정 기자]

    '益善洞 골목길'은 '레트로 感性'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입니다. [김우정 記者]

    낡은 空間을 새롭게 전유한 레스토랑과 카페, 雜貨店 等이 續續 자리 잡은 이곳에는 오늘도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益善洞 골목길’만 ‘핫플’이 아니다

    좁은 길들이 縱橫으로 만나는 ‘益善洞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三逸대로라는 往復 6車線 길이 나옵니다. 三逸대로 附近은 조금 다른 意味에서 ‘핫 플레이스’였습니다. ‘사바나 이리저리’의 첫걸음은 三逸대로가 지나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一帶로 向합니다. 자주 지나치면서도 미처 몰랐던 都市의 숨은 記憶들. 1919年 3月 全國을 뜨겁게 달궜던 3·1運動의 記憶을 따라 걸어봅니다. 



    서울地下鐵 3號線 안국역 4番 出口. 階段을 나와 보니 제법 높은 기와담벼락이 이어집니다. 흥선大院君 李昰應이 살던 雲峴宮(私的 257號)입니다. 그가 아내인 여흥부大夫人 閔氏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 再黃, 卽 高宗이 태어나 卽位 前까지 지낸 潛邸(潛邸)氣도 합니다.

    운현궁(종로구 운니동) 정문 모습. [김우정 기자]

    雲峴宮(종로구 운니동) 正門 모습. [김우정 記者]

    이곳을 찾은 6月 12日 午後 3時頃에는 雲峴宮 앞 삼일대로 3個 車線을 막고 連坐示威가 한창입니다. 大韓按摩師協會가 視覺障礙人에 限해 按摩師 資格을 附與하는 現行 醫療法을 維持하라며 연 ‘按摩師 制度 合憲 促求 總蹶起 大會’입니다. 擴聲器 넘어 들리는 口號가 고즈넉한 옛 宮闕, 韓服 차림의 觀光客들과 鮮明한 對比를 이룹니다. 

    只今으로부터 100年 前 1919年에도 삼일대로 一帶는 3·1運動이라는 巨大한 외침을 孕胎한 곳이었습니다.

    三逸大路에 아로새겨진 3·1運動

    1919年 3月 1日 午後 2時 民族代表 33人 中 地方에 있던 4名을 除外한 29名이 獨立宣言書를 朗讀한 태화관, 같은 時刻 學生代表와 市民들이 ‘大韓獨立 萬歲’를 외친 탑골公園(私的 354號)이 모두 삼일대로 沿線에 있습니다. 

    1966年 서울市는 考試1093號를 통해 안국동로터리부터 中央劇場을 지나 忠武路2家로 이어지는 道路를 ‘三一路’로 명명했습니다. 이 一帶의 歷史性을 考慮한 것이죠. 三一路는 以後 道路 區間이 漢南大橋 北端까지 延長돼 總距離 約 4.8km인 三逸大路로 이어집니다. 

    示威隊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이어가자 어느새 雲峴宮 담벼락이 끝납니다. 只今은 德性女子臺 鍾路캠퍼스가 된 雲峴宮 洋館(洋館) 區域 맞은便으로 고개를 돌리자 콘크리트 빌딩들 사이로 異色的인 붉은 甓돌 建物이 눈에 띕니다. 天道敎 中央大敎堂(서울市 有形文化財 36號, 大敎堂)입니다. 

    “天道敎와 이곳 中央大敎堂 建物도 3·1運動과의 因緣이 깊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전경 [김우정 기자]

    天道敎 中央大敎堂(종로구 경운동) 前景 [김우정 記者]

    이동초(79) 氏가 높이 約 30m의 4層짜리 大敎堂 尖塔을 가리키며 韻을 뗍니다. 說明을 이어가는 語調와 表情에 眞摯함과 自負心이 묻어납니다. 李 氏는 大敎堂의 來歷은 勿論 三逸大路邊 경운동에 자리 잡은 지 百年이 훌쩍 넘은 天道敎 敎團의 歷史에 훤합니다. 

    그의 집안은 1910年代 祖父가 天道敎에 入敎한 後 自身까지 3代째 信者라고 합니다. 先代의 遺品을 整理하면서 나온 天道敎 關聯 資料를 보고 關心이 動했다는군요. 2000年代 初盤부터 言論社 資料室, 헌冊房 等을 돌며 蒐集한 資料를 바탕으로 2008年에는 ‘天道敎中央大敎堂 50年 이야기’라는 冊도 냈습니다. 天道敎에서 敎書編纂委員 等 幹部職을 歷任하고 敎理와 敎團 歷史를 硏究하고 있습니다.

    “獨立運動 資金 보태느라 작아진 敎堂”

    李 氏가 說明을 이어갑니다. 

    “1918年 義菴成事(天道敎에서 第 3代 敎主 孫秉熙를 이르는 말)가 中心이 된 天道敎 總會는 宿願이던 敎堂 建築을 위해 全國 敎人들에게 誠金을 걷기로 決定했습니다. 半 年 만에 8萬6000원이 모였죠. 이를 獨立運動 資金으로 疑心한 日帝가 ‘寄附行爲禁止法’ 違反을 口實로 誠金 返還을 命令했습니다. 하지만 信者들은 돈을 돌려받은 척하며 모금을 繼續했죠. 募金額의 相當部分을 獨立運動 支援에 써서 1921年 竣工된 實際 大敎堂은 元來 計劃보다 작게 지어졌습니다.” 

    이런 資金 支援은 勿論 3·1運動을 準備, 實行하는 過程에서 天道敎의 役割은 컸습니다. 民族代表 33人을 宗派別로 區分하면 各各 基督敎 16名, 天道敎 15名, 佛敎 2名입니다. 敎主 孫秉熙를 筆頭로 民族代表의 相當數를 차지하던 天道敎는 3·1運動에 全國的 組織網과 資金力을 動員했습니다. 새삼 大敎堂 近處를 둘러보니 3·1運動의 痕跡들이 여기저기 남아있네요.

    6월 12일 이동초 씨가 천도교 중앙대교당 강당에서 궁을 문양을 가리키며 설명중입니다.[김우정 기자]

    6月 12日 이동초 氏가 天道敎 中央大敎堂 講堂에서 宮을 文樣을 가리키며 說明中입니다.[김우정 記者]

    三逸大路에서 大敎堂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이곳이 ‘獨立宣言書 配付 터’임을 알리는 작은 標識石이 있습니다. 崔南善이 기초한 獨立宣言書는 1919年 2月 27日 只今의 曹溪寺 隣近에 있던 天道敎 系列 印刷所인 普成社에서 印刷됐습니다. 이를 民族代表 33人의 한 名으로 當時 普成社 社長이던 李鍾一이 自身의 집으로 保管하다 다음 날 28日부터 全國으로 배부한 것입니다.

    “宗派 떠나 國民 모두의 歷史”

    삼일대교 대로변의 ‘독립선언문배부터’ 표지석. 담장 너머 천도교 중앙대교당 첨탑이 보입니다. [김우정 기자]

    三逸大橋 大路邊의 ‘獨立宣言文배부터’ 標識石. 담牆 너머 天道敎 中央大敎堂 尖塔이 보입니다. [김우정 記者]

    李 氏와 함께 들어간 大敎堂 內部는 百年 가까이 된 建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程度로 잘 保存되어 있습니다. 總建坪 約 930㎡(280坪)의 大敎堂에서 核心的인 空間은 約 430㎡(130坪) 規模 講堂인데요. 直接 들어가 보니 지붕의 荷重을 內壁으로 支撐해 別途의 기둥이 없이 탁 트여있습니다. 正面의 斷想 壁에는 天道敎를 象徵하는 宮을 文樣이 宣明합니다. 박달나무꽃 或은 無窮花를 본떴다는 스태인드글라스며 天障의 扶助도 印象的이고요. 

    이곳에서는 只今도 每週 日曜日 午前 11時 100~150名의 信者들이 參席한 가운데 天道敎 儀式인 ‘時日蝕’이 열립니다. 

    “이곳 大敎堂은 우리 信者들에게 天道敎 하면 으레 떠오르는 마음의 故鄕과 같은 곳이에요. 하지만 大敎堂과 一帶의 歷史는 宗派를 떠나 國民 모두의 것입니다.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記者를 배웅하며 이 氏가 덧붙인 말입니다. 

    大敎堂을 나선 時間은 午後 4時 半頃. 三逸대로를 따라 낙원동 樂器商街 方向으로 150m 假量 걷자 이番에는 ‘西北學會 터’라고 적힌 標識石이 보입니다. 西北學會는 1908年 李東輝를 會長으로 안창호, 朴殷植 等 黃海道·平安道·咸鏡道 出身 獨立 運動家들이 세운 愛國啓蒙團體입니다. 三逸大路邊에서 만난 또 다른 歷史의 발자취군요.

    새빨간 아구찜

    點心밥은 벌써 消化되고 저녁 食事를 하기에는 曖昧한 時間. 歷史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虛飢가 집니다. 

    길 건너便에 ‘아구찜·海物찜’ 看板이 櫛比하네요. ‘낙원동 아구찜거리’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橫斷步道를 건너가 찬찬히 보니 隣近 職場人들의 會食 場所로 有名한 맛집들이 여럿 있습니다. 

    아직 저녁 食事 時間 前이라 閑散한 風景입니다. 드문드문 있는 손님들의 食卓 위 새빨간 양념의 아구찜이 먹음직스러워 보입니다. 끼니를 解決하기에는 너무 이른 時間이라 입맛만 다십니다. 

    한便 看板들 사이로 보이는 골목길은 삼일대로 28길입니다. 이 길 따라 宗廟 方向으로 쭉 가면 나오는 것이 바로 ‘益善洞 골목길’이죠. 日帝强占期 지어진 改良韓屋을 改造한 카페며 레스토랑 特有의 ‘레트로 感性’이 ‘인싸’들의 感性을 刺戟한다는 評인데요. 

    ‘인싸’들이 간다는 카페에라도 가볼까 싶어 발길을 돌리려던 刹那 凡常치 않은 가게가 눈에 띕니다. 看板에는 ‘낙원떡집’이라고 적혀있습니다. 店鋪 앞 壁面에는 ‘서울未來遺産’이라 적힌 東版圖 눈에 띄고요. 

    2013年부터 서울市는 公式的으로 登載된 文化財는 아니지만 保存할 價値가 있다고 여겨지는 市內 有無形 資産을 ‘서울未來遺産’으로 選定하고 있는데요.

    100年 이어온 援助 떡집

    ‘낙원떡집’은 ‘平壤冷麵’이나 ‘水原갈비’ 程度는 아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相互입니다. 하지만 이 가게는 3·1 運動과 같은 해 1919年부터 떡을 만들어 팔아온 말하자면 ‘眞짜’ 元祖집입니다.

     6월 12일 ‘낙원떡집’(종로구 인사동)을 꾸려가는 3대 사장 이광순 씨(앞)와 아들인 4대 사장 김승모 씨입니다. [사진 김우정 기자]

    6月 12日 ‘낙원떡집’(종로구 인사동)을 꾸려가는 3代 社長 이광순 氏(앞)와 아들인 4臺 社長 김승모 氏입니다. [寫眞 김우정 記者]

    “제 外曾祖할머니가 이웃에 살던 옛 水剌間 尙宮으로부터 떡 만드는 法을 傳受받으셨죠. 日帝强占期에 營業申告를 했을 理 없고, 實際로는 더 오래된 것 같습니다만 집안 어른들 말씀 따라 1919年 創業으로 보고 있어요.” 

    社長인 김승모(49) 氏의 說明입니다. 가게를 創業한 高이뻐 氏와 2代 김인동 氏, 그리고 김승모 社長의 母親 이광순(75) 氏에 이은 4代째입니다. 오랜 가게 歷史만큼 事緣도 많다는 君요. 

    “歷代 大統領 大部分이 우리 가게 손님이셨습니다. 그 外道 情?財界 人士며 有名人들 中 단골이 숱하죠. LG그룹 汝矣島洞 本社 竣工式 때는 트럭 2臺 分量, 只今 돈으로 1億 願치 떡을 納品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金 氏는 “손님이 누구든 떡에 들이는 努力과 精誠은 똑같다”고 淡淡하게 말합니다.

    쌉싸래한 맛의 ‘시그니처’

    만드는 떡 種類는 40餘 個에 達하지만 現在 ‘시그니처 메뉴’는 하루 千個 以上 팔리는 ‘쑥인절미’. 

    歲月 따라 바뀌는 입맛에 맞춰 쑥개떡과 인절미를 結合해 내놓은 떡이라는데요. 隱隱한 쑥 香氣가 입안에 氣分 좋게 퍼집니다. 濟州道 所在 農莊과 契約해 한 해 1톤씩 쑥을 供給받습니다. 찹쌀로 만든 데다 손바닥 折半만한 크기로 두툼하게 썰어놓은 德에 제법 요기가 되네요. 百年가게도 苦悶은 있습니다. 

    “元來 20곳 가깝던 隣近의 떡집들度 4곳 밖에 남지 않았어요. 우리 가게도 最近 10年 前에 비하면 賣出이 30%以上 줄었습니다. 每年 下落勢죠.” 

    먹거리가 다양해져 떡의 位相이 좁아진 것은 이미 오랜 일이랍니다. 여기에 生日이나 結婚 等 잔칫床에 떡을 푸짐하게 올려 여럿이 나누던 모습이 漸次 자취를 감춰가는 世態도 한 몫 한다는 說明입니다. 

    “장사도 장사지만 傳統 飮食이 漸次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가게를 둘러보며 金 氏가 남긴 말입니다.

    歷史는 都心 風景에 녹아들고

    6時가 넘어 떡집을 나섰지만 해가 길어져 아직 周邊은 밝습니다. 골목은 어느새 退勤한 職場人이며 저녁 마실 나온 젊은이들로 붐비기 始作하고요. 100年 前 喊聲 가득했던 三逸대로 附近, 오늘 사람들의 발걸음은 어디로 向할지 궁금해집니다.

    저 많은 '쑥인절미'를 집에서 혼자 다 먹었다는 후문. [김우정 기자]

    저 많은 '쑥인절미'를 집에서 혼자 다 먹었다는 後聞. [김우정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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