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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門店 共同警備區域(JSA)을 가다|신동아

르포

板門店 共同警備區域(JSA)을 가다

“南北頂上 걷던 ‘徒步다리’엔 ‘出入禁止’ 警戒라인이…”

  • 최창근 客員記者

    caesare21@hanmail.net

    入力 2019-06-25 15: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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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끼蠻行, 金訓 中尉 疑問死, 오청성 歸順 ‘歷史 現場’

    • 超大型 太極旗와 人共旗는 體制競爭 記憶 떠올려

    • 5月 1日 再開放, 部隊 口號 ‘in front of them all’(最前方에서)

    • 韓國人 ‘女親’ 둔 맥셰인 少領, 北韓軍에 ‘자랑’

    • 9·19 平壤宣言 薰風…拳銃 代身 戰鬪服에 베레모

    • 共同警備區域 自由往來 언제쯤 可能할까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6月 12日 午前 11時, 서울 忠正路 동아일보 社屋을 出發한 取材 車輛은 자유로를 타고 京畿道 坡州市 板門店으로 向했다. 거리는 62km. 京畿 高陽市 일산구를 지나 坡州出版都市, 坡州市 汶山邑을 지나 目的地에 가까워질수록 道路 위 車輛은 드물었다. 出發 한 時間 뒤, 統一大橋에 到着했다. 1番 國道가 지나는 길이 900m, 幅 24m 4車線 橋梁의 元來 이름은 自由의 다리다. 1998年 6月 15日 現在 이름으로 擴張·開通했는데, 開通 다음 날 故(故) 정주영(1915~2001) 現代그룹 名譽會長이 訪北하면서 소 떼를 몰고 건넌 歷史的 場所다.

    1952年 創設된 JSA警備大隊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왼쪽)과 소회의실(T3). [홍중식 기자]

    板門店 軍事停戰委員會 本會議室(T2·왼쪽)과 小會議室(T3). [홍중식 記者]

    통일대교 北쪽은 民間人 出入統制區域이다. 出入하려면 統一部나 유엔軍司令部의 事前 許可가 必要하다. 檢問所 哨兵에게 訪問 目的을 밝히고 身分證을 提示하자 數次例 無電을 주고받았다. 5分 만에 車輛用 出入證을 내주며 遮斷器를 올린다. 

    첫 番째 檢問所 通過 後 다시 5分餘를 달리니 太極旗와 星條旗로 裝飾된 進入路가 나타났고, 이어 두 番째 檢問所가 보였다. 板門店 共同警備區域(JSA) 經費를 擔當하는 유엔司警備大隊(通稱 JSA警備大隊) 入口다. 部隊 口號는 ‘in front of them all(最前方에서)’, 最前線을 지키는 部隊답다. 스피커에서 ‘電線을 간다’ 等 軍歌가 흘러나와 ‘軍事地域’에 들어섰음을 直感했다. 

    JSA警備大隊는 6·25戰爭 中이던 1952年 5月, 將校 5名, 兵士 10名으로 創設됐다. 主 任務는 停戰會談 支援이었다. 1953年 停戰(停戰) 무렵에는 部隊院 數가 1萬9000名에 達했다. 現在는 韓國軍 600餘 名과 유엔軍 70餘 名으로 構成돼 있다. 隸下 2個 警備中隊, 1個 민정중臺로 編成돼 있으며, 1個 警備中隊와 1個 民政小隊 兵力이 交代로 最前方에 配置된다. 그中 JSA 地域에는 警備大隊 所屬 人員 35名, 北側 人員 35名이 交代 勤務한다. 

    첫 番째 檢問所는 無事通過했으나, 두 番째 檢問所에서 길이 막혔다. 哨所 警備兵은 “板門店 境內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案內者 引率이 必要하다”며 車를 돌려 待機할 것을 勸했다. ‘12時 30分에 統一大橋에서 만나자’던 유엔軍司令部 公報室 關係者의 말을 잘못 理解하고, 먼저 檢問所를 通過한 것이 禍根이었다. 部隊 正門 옆 駐車場에서 40分餘 기다리자, 車輛 無理가 모습을 드러냈다. 線도 車輛에 搭乘한 한 韓國 男子가 車窓 밖으로 손을 흔들며 “따라오세요”라고 案內한다. 김영규 유엔司令部 公報官이었다. 線도 車輛을 따라 部隊 境內로 進入했다. 



    午後 1時, 安保敎育觀에 入所했다. “北韓軍이나 民間人을 만날 때 말을 걸거나, 손짓 等 好意를 보이는 行動은 嚴格히 制限한다” 等 注意事項이 담긴 保安誓約書에 署名한 後, 記者 腕章을 着用하고 25人乘 버스에 搭乘했다. 車輛에는 미디어데이 프로그램에 參與하는 5個 內·外信 記者, 김영규 公報官 外 유엔軍司令部 公報室 職員, JSA警備大隊 정훈·公報將校와 案內兵士, 美軍 關係者가 同乘했다.

    金訓 中尉 疑問詞한 ‘오바마 哨所’

    북한군이 판문점 북측 판문각에서 망원경으로 남측 지역을 살펴보고 있다. [홍중식 기자]

    北韓軍이 板門店 北側 판문각에서 望遠鏡으로 南側 地域을 살펴보고 있다. [홍중식 記者]

    車輛 出發 3分 後, 案內兵士가 “只今부터 非武裝地帶(DMZ)에 進入합니다”라고 알려준다. “2時 方向을 보세요”라는 案內에 따라 눈을 돌리니 哨所가 눈에 들어온다. 軍事分界線으로부터 25m 떨어진 最北端 哨所(一名 241哨所)다. 2012年 3月 25日 버락 오바마 大統領이 航空점퍼 차림으로 訪問한 後로는 ‘오바마 哨所’로 불리기도 한다. 20年 넘게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은 1998年 2月 金訓 中尉 疑問詞 事件 現場이기도 하다. 

    視線을 왼쪽으로 돌리니 車窓 밖으로는 ‘대성동 마을 入口’라는 標識板이 보인다. ‘自由의 마을’로도 불리는 대성동 마을은 47家口, 94名이 居住한다. 대성동 마을은 大韓民國 領土 內에 자리하지만, 政府의 統制를 받지 않는 地域이다. 유엔軍司令部가 管轄하며 民政(民政) 業務도 JSA警備大隊 隸下 민정중代가 맡는다. 마을 住民은 參政權·敎育權을 가지고 있으나, 納稅·兵役 義務는 免除받는다. 每日 저녁 7~10時 民政中臺의 家口別 人員 點檢을 받아야 하고, 子正부터 다음 날 새벽 5時까지 通行禁止가 實施된다. 住民은 1年에 8個月 以上 마을에 居住해야 居住 資格을 維持할 수 있다. 

    대성동 마을 現況 說明을 듣는 사이 大型 太極旗가 눈에 들어온다. 一名 ‘대성동마을 太極旗’다. 國旗 揭揚臺 높이는 아파트 33層에 該當하는 99.8m다. 揭揚된 國旗는 가로 19m, 세로 12m. 1980年 12月 18日 85m 높이로 建設된 揭揚臺는 이듬해 補修 工事를 거쳐 現在 높이가 됐다. 車窓 오른쪽을 바라보니 大型 人工祈禱 보인다. 대성동 마을에서 直線距離로 1.8km 떨어진 北韓 ‘기정동마을 人共旗’다. 南韓의 太極旗에 刺戟받은 北韓은 1982年 2月 16日 높이 165m 鐵塔을 세워 가로 30m, 세로 15m의 人共旗를 揭揚했다. 熾烈했던 男·北韓 體制競爭, 體制 宣傳戰의 産物이다.

    “테이블에 物件 올리지 마세요”

    남북 장성급 회담 시 양측 군 대표단이 마주 앉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 테이블 위 마이크 장치는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한다. [홍중식 기자]

    南北 將星級 會談 時 兩側 郡 代表團이 마주 앉는 軍事停戰委員會 本會議室(T2). 테이블 위 마이크 裝置는 軍事分界線(MDL)을 表示한다. [홍중식 記者]

    午後 1時 20分쯤 車輛은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에 到着했다. 이 區域은 東西 800m, 南北 400m 長方形 空間이다. 1953年 7月 27日 停戰協定 締結 後, 같은 해 10月 19日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이 設置됐다. 以後 軍事停戰委員會 유엔軍司令部와 公算(北韓·中國)君은 軍事停戰委員會 會議를 圓滿히 運營하기 위해 1963年 10月 軍事分界線(DML)上에 假建物을 設置했다. 共同警備區域MDL 床에 東西 方向으로 놓인 7洞의 假建物 中 왼쪽에서부터 4, 5, 6番째 파란色 建物은 各各 T1 中立國監督委員會 會議室, T2 軍事停戰委員會 本會議室, T3 軍事停戰委員會 小會議室이다. 

    案內에 따라 T2 軍事停戰委員會 本會議室 建物에 들어섰다. 南·北韓 將星(二星將軍·南韓은 所長, 北韓은 中將)을 代表로 하는 南北 將星級 軍事會談 開催 場所다. 會議場 內에서는 南北 境界 없이 자유로이 月經(越境)할 수 있다. 中央에 놓인 會談 테이블의 가운데를 軍事分界線이 지난다. 取材手帖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同行한 韓國軍 兵士가 “테이블 위에 物件을 올리지 마세요”라며 注意를 준다. 會議場은 南·北이 共同으로 使用하고 韓國 側에 管理責任이 있는데, 相對方에 對한 配慮 次元이라는 說明이다. 南北韓이 ‘共有’하는 軍事停戰委員會 本會議室에는 南北 兩側에서 立場이 可能하다. 서로 遭遇하는 語塞함을 避하기 위한 規則도 있다. 먼저 門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먼저 구경하는 先着順 原則이다. 

    南北 將星級 軍事會談은 노무현 政府 時節인 2004年 5月 26日 金剛山에서 첫 會談을 연 後, 2018年 10月 26日 第10次 會談이 開催됐다. 10次 會談에서 敵對行爲 中止, GP 示範 撤收, 共同 遺骸 發掘, 臨津江 水路 調査 等을 合意했다. 

    軍事停戰委員會 本會議室 밖에는 南韓軍 警備兵이 警戒勤務를 서고 있다. 지난날 映畫나 寫眞에서 보던 차림새(MP 글字가 찍힌 防彈모를 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의 兵士는 없었다. 그냥 平常 戰鬪服에 베레모를 썼을 뿐이다. JSA 警備大隊 兵士의 特權이자 象徵처럼 여겨지던 拳銃도 携帶하지 않았다. 2018年 9·19 平壤共同宣言 中 軍事 分野 合意의 産物이다. 合意書 2兆 3項에서 南北은 ‘板門店 共同警備區域 非武裝化’를 合意했다. 以後 非武裝化가 進行됐고 10月 26~27日 共同警備區域 內 南北 施設物 相互 共同檢證을 거쳐, 28日 유엔軍司令部는 共同警備區域 非武裝化를 宣言했다. 

    會議室을 나오자, 한 美軍 將校가 取材陣의 耳目을 끈다. 대니얼 맥셰인(Daniel McShane) 海軍 少領이다. 유엔軍司令部 日直(當直) 將校로 北韓軍과의 連絡을 擔當한다. 共同警備區域 南側 區域에 자리限 日直士官 事務室에서 38m 떨어진 北側 統一閣에는 直通電話가 架設돼 있다. 2013年 3月 北韓의 一方的 停戰協定 無效 宣言 後 斷絶됐던 直通電話는 지난해 7月 再開됐다.

    每日 通話하는 美軍 將校와 北韓軍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보다리’ 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사진공동취재단]

    2018年 4月 27日 文在寅 大統領과 金正恩 北韓 國務委員長이 ‘徒步다리’ 위에서 談笑를 나누고 있다. [韓國寫眞共同取材團]

    맥셰인 少領은 하루에 두 番 北側과 通話한다. “安寧하세요”라는 韓國語 人事로 始作해 그날의 特別事項을 서로 傳한다. 通話는 實時間 한·영 通譯으로 이뤄진다. 北韓軍과 每日 通化하다 보니 脈셰인 少領은 北韓 兵士와 ‘親密한’ 사이가 됐다. 美 프로野球팀 LA다저스 팬인 그는 野球를 主題로 對話를 나누기도 했다. 自身의 女子 親舊가 韓國人이라 紹介하니 北韓 兵士는 “우와”하는 反應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末에는 北韓軍이 먹고 싶어 하는 菓子를 記憶했다가 가져다주기도 했다. 

    지난해 7月 直通電話 再開 以後 現在까지 180回의 通話가 이뤄졌다. 非武裝地帶(DMZ) 地雷 除去, 6·25戰爭 戰死者 遺骸 送還 等이 對話 主題였다. 2013年 2月부터 板門店 勤務를 始作한 맥셰인 少領은 곧 6年 4個月의 勤務를 마치고 歸國한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所願은 北韓軍을 만나 握手하며 作別人事를 傳하는 것이라고 한다. 

    午後 1時 40分 마지막 見學 場所로 向했다. 지난해 4月 27日 文在寅 大統領과 金正恩 國務委員長이 散策하며 單獨 對話를 나눈 徒步다리다. 다리는 6·25戰爭 停戰 直後 中立國(當時 체코, 폴란드, 스위스, 스웨덴) 監督委員會 將校들이 板門店을 드나들 때 動線을 줄이기 위해 濕地 위에 놓은 것이다. 元 이름은 ‘풋 브리지(Foot Bridge)’인데 우리말로 直譯해서 ‘徒步다리’라 불린다. 한동안 거니는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없던 이 다리는 지난해 第1次 南北 頂上會談을 앞두고 大大的인 補修作業을 했다. 유엔軍司令部의 象徵色인 파란色 페인트도 漆했다. 以後 ‘블루 브리지’라는 새 別稱을 얻었다. 南側 管轄區域 밖 中立國監督委員會 事務室로 이어지는 다리는 中間에서 더는 건널 수 없다. 事件 現場에 設置된 노란色 ‘폴리스 라인’처럼 ‘出入禁止’를 意味하는 파란色 警戒라인이 設置됐다.

    分斷의 象徵, 韓半島의 방아쇠

    1992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에서 남북한 군인이 엇갈려 선 채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김녕만 사진작가 제공]

    1992年 板門店 共同警備區域(JSA) 內에서 南北韓 軍人이 엇갈려 선 채 反對 方向을 바라보고 있다. [김녕만 寫眞作家 提供]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은 南北 分斷의 象徵的 空間이자 오늘날 韓半島 狀況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南北 軍 當局은 ‘4·27 板門店宣言 履行을 위한 軍事分野 合意書’(9·19 軍事合意書)에 各各 署名하고 그 後續措置로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의 非武裝化와 自由 往來를 推進했다. 南北和解 무드 造成에 가장 象徵的인 措置였다. 南과 北, 유엔司令部는 지난해 10月 共同警備區域을 暫定閉鎖한 뒤 地雷 除去 作業과 一部 哨所를 撤收·新設하고, 拳銃, 小銃, 彈藥 等을 共同警備區域 밖으로 옮겼다. 警備人員度 各各 80餘 名에서 35名으로 大幅 줄였다. 그러나 北韓은 突然 美國이 主軸인 유엔司의 介入 排除를 要求했고, 우리 側의 軍事合意 履行 要求에 對해 默默不答으로 一貫하면서 5月 1日 우리 側만 ‘半쪽 開放’을 한 것이다. 

    共同警備區域은 1963年 設置된 以來 유엔司令部 側과 北側(北韓·中國) 關係者는 자유로이 往來할 수 있었다. 警備哨所度 南北 兩側에 婚材돼 있었다. 南側에도 北側 哨所가, 北側에도 南側 哨所가 있었다. 分斷 以後 南北韓이 唯一하게 自由 往來가 可能했던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에도 ‘分斷’이 찾아온 것은 1976年이다. 그해 8月 18日 共同警備區域 南側 유엔軍 第3哨所 앞에서 警戒 視野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作業 監督을 하던 JSA警備大隊 警備中隊腸 아서 보니파스(1943~1976) 大尉, 警備小隊長 마크 배럿(1951~1976) 中尉가 北韓軍 30餘 名이 휘두른 도끼에 목숨을 잃었다. 

    激憤한 美國 政府는 問題의 미루나무를 베고, 共同警備區域 內 北韓軍이 不法 設置한 바리케이드를 除去하기 위한 作戰을 實施했다. 폴 버니언 作戰(Operation Paul Bunyan·美國 傳說에 登場하는 巨軀의 나무꾼 ‘폴 버니언’에서 따온 作戰名)이었다. 戰鬪準備態勢人 ‘데프콘 3’가 發令되고, F-4 戰鬪機, 核武器 搭載가 可能한 F-111 戰鬪機, B-52 爆擊機가 韓半島에 急派됐고, 美 海軍 第7艦隊 航空母艦 미드웨이號度 韓半島 海域에 進入했다. 

    戰爭 危機 狀況에서 김일성 北韓 主席은 “人民軍 總司令官의 資格으로 가장 빠른 方法으로 當身 側(유엔軍 側) 總司令官에게 傳해주기 바랍니다.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에서 일어난 事件에 遺憾을 표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事件이 일어나지 않도록 努力해야 하겠습니다”라고 遺憾을 表明했고, 美國이 이를 受諾함으로써 戰爭 勃發은 避했다. 代身 板門店 共同警備區域 內에 南北 間 境界가 設定됐다. 9月부터 軍事分界線 施設物이 들어섰다. 共同警備區域 外郭, 建物이 없는 地域에는 1m 높이의 흰 말뚝이 10m 間隔으로 126個가 設置됐다. 軍事停戰委員會와 中立國監督委員會 等 施設物 사이에는 높이 5㎝, 幅 50㎝의 콘크리트 境界石이 놓였다. 事件 10週期인 1986年 8月 18日, JSA警備大隊 캠프 키티호크(Kitty Hawk)가 보니파스 大尉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로 改稱됐다.

    映畫와 現實

    1976年 도끼蠻行 事件 以後, 共同警備區域 內에서 南北 分斷 狀態는 持續되고 있다. 9·19軍事合意書 後續 措置로 共同警備區域 境內 自由 往來를 위한 共同勤務守則 마련과 監視裝備 調整 問題에 對한 協議가 進行됐다. 非武裝化는 進行됐지만, 自由 往來를 爲해 必要한 南·北共同 勤務守則은 合意에 陣痛을 겪었다. 南北 兩側은 如前히 警戒席을 넘지 못하는 形便이다. 언제 自由 往來가 이뤄질지도 膠着狀態에 빠진 南北 關係를 考慮하면 遙遠하다. 

    一般人에게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의 存在 意義를 되새긴 것은 박찬욱 監督의 2000年 映畫 ‘共同警備區域 JSA’다. 박상연의 長篇小說 ‘DMZ’(1997)를 原作으로 製作된 映畫는 1998年 2月 金訓 中尉 死亡事件 發生 後 ‘現實性’을 評價받았고, 作品性과 商業性을 모두 認定받았다. JSA警備大隊에서 發生한 南北 軍人 間 銃擊事件을 背景으로 한 作品은 事實과 虛構를 巧妙히 넘나든다. 

    主人公 소피 腸 少領(이영애 分)은 6·25戰爭 停戰 後 第3國行을 擇한 人民軍 將校의 딸로 스위스 國籍의 法務官이다. 中立國監督委員會 所屬인 그는 事前 調査를 위해 南北韓을 오간다. 하지만 이는 虛構다. 停戰協定 締結 後 中立國 監督委員會는 南側 유엔軍司令部가 指名한 스위스와 스웨덴, 北韓·中國이 指名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現 체코)로 構成됐다. 1990年代 舊蘇聯 解體 等 共産圈 國家 崩壞 속에서 北韓은 1993年 체코 代表團, 1995年 폴란드 代表團을 中立國監督委員會에서 追放하고, 中立國監督委員會 事務室을 閉鎖하는 等 中立國監督委員會 活動을 中斷시켰고, 스위스·스웨덴 國籍의 將校 出入도 禁止했다. 非武裝地帶(DMZ) 發生 銃擊事件 等 停戰協定 違反 事例 調査는 中立國監督委員會가 아닌 軍事停戰委員會 任務다.

    “對決의 場所가 交流의 場所로 바뀐 것”

    군사분계선(MDL)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놓인 회의실 앞을 비무장한 군인이 지나고 있다. [홍중식 기자]

    軍事分界線(MDL)을 따라 東西 方向으로 놓인 會議室 앞을 非武裝韓 軍人이 지나고 있다. [홍중식 記者]

    取材 案內를 맡은 김영규 公報館은 板門店 共同警備區域 再開放의 意味를 “‘對決의 場所’에서 ‘交流의 場所’로 바뀐 것”이라 했다. 

    “1984年 9月 北韓의 對南 秀才(水災)物資 提供 提議를 南韓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걸 契機로 그해 11月 南北經濟會談을 始作으로 赤十字會談, 國會會談, 體育會談 等이 연이어 열렸습니다. 이듬해 9月에는 첫 離散家族 故鄕訪問, 藝術公演團 交換訪問이 成事돼 南北 間 交流에 물꼬를 텄습니다. 以後 1990年 南北韓 總理 間 高位級會談이 열렸고, 1992年 南北基本合意書에도 署名했습니다. 以後 北核 危機 等을 거치며 南北關係가 梗塞되기도 했지만, 文在寅 政府 出帆 後 새로운 轉機를 마련하고, 板門店 非武裝化度 이뤄졌다는 點에서 感慨無量합니다.” 

    金 公報館은 板門店 共同警備區域 歷史의 산證人이다. 濟州島가 故鄕인 그는 濟州大 英語英文學科 敎授였던 父親의 影響으로 어린 時節부터 英語에 친숙했다. 연세대 史學科 在學 時節에는 ‘타임’ 等 英字紙를 涉獵했다. 1976年 30歲에 카투사에 入隊한 그는 美 陸軍 第2師團에 配置받았다. 部隊 配置 後 部隊 機關紙 ‘인디언헤드(Indian Head)’ 記者로 일했다. 東豆川 基地村 混血兒 記事 等이 反響을 일으켰다. 

    金 公報官이 板門店 共同警備區域과 첫 因緣을 맺은 것은 1976年 도끼蠻行 事件 때부터다. 取材 命令을 받은 卽時 헬리콥터를 타고 現場으로 向했다. 防彈服 차림이었다. 北韓 側이 總 한 放만 쐈어도 戰爭이 벌어질지 모르는 一觸卽發 狀況에서 목숨을 건 取材였다. 除隊 後 美 陸軍 第2師團 公報室 軍務員으로 採用돼 일흔을 넘겨서도 現役으로 일하고 있다. ‘國土 最南端에서 태어나 最北端에서 일하는’ 그는 유엔軍司令部, 韓美聯合司令部, 駐韓美軍司令部 3곳에 所屬됐다. 駐韓美軍司令官이 3個의 職責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名銜도 3個가 됐다. 年間 30次例 以上 板門店을 드나든다고 했다. 

    取材를 마치고 乘合車에 오르는 刹那, 金 公報官이 한 標識石을 가리켰다. 標識石에는 國·英文으로 ‘最前方에서 쏘련人 歸順者 事件에서 戰死한 장명기 上兵에게 獻納 1984. 11. 23.’이라 씌어 있다. 1984年 11月 23日 舊蘇聯 觀光案內員 바실리 야코볼里備置가 共同警備區域 內 軍事分界線(MDL)을 넘어 歸順한 事件이 發生했다. 北韓 警備兵이 軍事分界線을 넘어와 銃擊을 加했고, 銃彈에 장명기 上兵(當時 一兵)李 목숨을 잃고, 美軍 1名이 負傷했다. 北韓軍도 警備兵 3名이 死亡하고 1名이 負傷했다. ‘2017年 北韓軍 오청성 歸順事件’의 援助 格이라 할 수 있는 이 事件은 北韓軍이 共同警備區域 內 軍事分界線을 넘어와 銃擊을 加한 唯一無二한 事例로 記錄됐다. 

    7個月 만에 다시 門을 연 板門店 共同警備區域은 警備兵力 非武裝化 面에서는 1976年 以前으로 돌아갔지만, ‘自由 往來’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映畫가 아닌 現實 속에서, 板門店 共同警備區域 境內를 自由롭게 오가는 꿈은 언제 이뤄질까. 半쪽짜리 共同警備區域 取材記가 아닌 穩全한 取材記를 쓰는 날을 期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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