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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運動史 다시 쓰게 한 ‘默庵備忘錄’ ‘장효근日記’는 位·變造作|新東亞

3·1運動史 다시 쓰게 한 ‘默庵備忘錄’ ‘장효근日記’는 位·變造作

[歷史 스캔들] 獨立記念館 정욱재·최우석 歷史 바로잡았다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2-03-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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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年代 歷史學系 달군 獨立運動 飼料 發掘

    • 이현희 敎授, 普成社 總務였던 장효근 遺品에서 찾아내

    • ‘民族代表 33人’ 이종일의 備忘錄 “3·1運動史 다시 쓰게 할 劃期的 內容”

    • 잇따른 發掘로 少壯學者에서 獨立運動史 權威者로 急浮上

    • 獨立記念館 少將 ‘장효근日記’와 ‘이현희本’ 大棗, 明白한 造作

    • 한 글字를 81글字로 늘리기 “이현희本은 廢棄돼야 할 時代的 怪作”

    • ‘默庵備忘錄’은 만들어진 飼料, 처음부터 存在하지 않았을 수도

    • 1979年 備忘錄 紛失 騷動 미스터리, 43年 만에 풀리나

    독립기념관 소장 ‘장효근일기’ 1922년 1월 부분. 조선책력 여백에 메모를 하거나 인쇄된 글자 위에 겹쳐 쓰기도 했다. 2018년 ‘항일독립문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영철 기자]

    獨立記念館 少將 ‘장효근日記’ 1922年 1月 部分. 朝鮮冊曆 餘白에 메모를 하거나 印刷된 글字 위에 겹쳐 쓰기도 했다. 2018年 ‘抗日獨立文化 登錄文化財’로 指定됐다. [조영철 記者]

    連日 30度가 넘는 汗蒸幕 더위로 全國이 달아오르던 1979年 여름, 歷史學界는 重要 飼料(史料)의 紛失 騷動으로 끓어올랐다.

    1979年 7月 27日子 동아일보 社會面에 ‘獨立運動史料 默庵備忘錄 紛失’ 記事가 실렸다. 默庵(默菴)은 3·1運動 當時 民族代表 33人 中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1858~1925) 先生이 天道敎에서 使用하던 도호(道號)이며 號는 옥파(沃坡). 1919年 印刷所 普成社 社長이었던 이종일은 3·1獨立宣言書 印刷와 配布를 主導했다. ‘默庵備忘錄’은 李鍾一이 1898年 1月부터 1925年 8月 初까지 28年間 日誌式으로 쓴 글. 이 備忘錄을 發掘한 이현희(1937~2010), 當時 性申女史臺 敎授가 ‘第2獨立宣言文(또는 自主獨立宣言文, 自主獨立宣言서)과 함께 紛失했다는 消息이었다.

    동아일보 記事를 보면 ‘第2獨立宣言文’ 等 36卷 車 위에 놓고 그대로 달려’ ‘이현희 敎授 20日 뒤늦게 申告’ ‘近世史 硏究 貴中 資料 다시 못 찾을지도 몰라’ ‘遺族-紛失 事實 疑心스럽다’ 等 主要 內容만 一瞥해도 어처구니없는 事件이 벌어졌고 紛失 經緯도 釋然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하루 뒤인 7月 28日子 ‘默庵備忘錄은 어디에’라는 記事에서 默庵이종일先生記念事業會 會長이자 學術院 會長인 李丙燾 博士가 “여러 次例 複寫를 付託했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 近世史 硏究의 貴重한 資料를 複寫해두지도 않은 채 잃어버렸다는 것은 學者的 態度로는 믿을 수 없으나 그게 事實이라면 섭섭한 마음을 禁할 수 없다”며 恨歎했다고 傳했다.

    “資料難에 허덕이던 韓國 近代史 硏究의 活力素” “3·1運動史 다시 쓰게 할 劃期的 內容”이라는 評價를 받으며 學界를 떠들썩하게 했던 ‘默庵備忘錄’은 世上에 알려진 지 1年餘 만에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備忘錄의 祕密, 43年 만에 풀어줄 두 篇의 論文

    그로부터 43年 뒤 이현희 敎授와 ‘默庵備忘錄’을 둘러싼 歷史 스캔들에 마침標를 찍을 硏究 論文이 發表됐다. 獨立記念館(館長 한시준)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 최우석(40) 硏究院이 쓴 ‘만들어진 資料, 默庵備忘錄 批判’(한국독립운동사연구 第77輯, 2月 28日 發刊)이다. 崔 硏究院은 이 論文에서 ‘默庵備忘錄’의 公開부터 亡失(亡失) 過程을 되짚고, 歪曲된 原本 이미지 公開, 不完全하고 非正常的인 原文 公開를 確認했다. 더 나아가 여러 資料를 베낀 部分이 確認됐고, 19~20世紀 初 當代 民族運動 및 獨立運動 狀況에서 實現될 수 없는 거짓들이 記錄돼 있음을 根據로, 現在 傳해지는 ‘默庵備忘錄’은 加筆을 넘어 創作된 資料일 可能性이 높다고 結論지었다.



    ‘만들어진 資料, 默庵備忘錄 批判’에 한발 앞서 2021年 11月 이현희 敎授의 硏究를 批判的으로 接近한 또 다른 論文이 發表됐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第76輯(2021年 11月 30日)에 실린 ‘이현희本 장효근日記 批判-1916年~1920年을 中心으로’라는 題目의 論文이다.

    장효근(張孝根·1867~1946) 先生은 3·1運動 當時 普成社 總務로 獨立宣言書 印刷의 숨은 主役으로 꼽힌다. 1916年 1月부터 1945年 12月까지 30年間 쓴 ‘장효근日記’(天道敎 度號인 東菴을 붙여 ‘동암日記’라고도 函)를 남겼다. 1975年 이현희 敎授가 發掘했고, 原本은 1987年 장효근의 長孫 장세왕 氏가 獨立記念館에 寄贈해 2018年 ‘抗日獨立文化登錄文化財’로 指定됐다.

    이 論文을 쓴 정욱재(49) 獨立記念館 硏究委員은 獨立記念館 少將 ‘장효근日記’ 原本과 이현희 敎授가 탈초(草書로 된 글씨를 읽기 쉬운 筆體로 바꿈)하고 整理한 ‘이현희本’을 比較·檢討한 結果, 이현희本이 原本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50% 以上 加筆·操作돼 事實上 廢棄돼야 할 時代의 怪作(怪作)이라고 했다. 資料에 對한 加筆·造作은 重大한 硏究 倫理 違反이다.

    1919년 3월 ‘장효근일기’ 원본과 ‘이현희본’ 비교. 굵게 칠한 부분이 원본에 없는 가필된 부분이다. [조영철 기자]

    1919年 3月 ‘장효근日記’ 原本과 ‘이현희本’ 比較. 굵게 漆한 部分이 原本에 없는 加筆된 部分이다. [조영철 記者]

    장효근 “(默庵이) 備忘錄 내게 맡겼다”

    ‘장효근日記’와 ‘默庵備忘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關係이다. 두 資料의 發掘自認 이현희 敎授에 따르면 장효근은 1925年 8月 31日 日記에 “備忘錄을 내게 맡겼다”고 썼다.

    “默庵 이종일 先生 自宅에서 藏書(長逝)하다. 享年 68歲. 默庵腸(?庵丈)을 哭하노라. 그분이 著述한 備忘錄은 내 手中에 保管되어 있어서 張差 出版하여 世上에 公開할 생각이다. 이 著述의 期間은 1898年으로부터 今年(1925) 8月까지로 그 分量은 數十 卷에 이르는데 默庵이 病患이 든 以後 내게 맡긴 것이다.”(이현희, ‘新資料解除 默庵備忘錄-그 思想史的 認識’, 1978年 10月 國學資料 30號)

    卽 이 敎授는 장효근 遺族들의 도움으로 ‘장효근日記’를 發掘해 탈초하고 硏究하는 過程에서 ‘默庵備忘錄’의 存在를 認知했고, 나머지 遺品 속에서 ‘默庵備忘錄’을 찾아냈다는 連結고리가 成立된다.

    그러나 1916年부터 1945年까지 쓴 ‘장효근日記’ 30冊 가운데 何必이면 1925年, 1934年, 1937年 日記가 結實돼, 實際 장효근이 日記에 “내게 맡겼다”고 썼는지 確認할 方法이 없다. 장효근 先生 遺族들이 1978年 李 敎授가 日記 28冊을 빌려갔다고 證言한 것으로 미루어, 30冊 가운데 1934年과 1937年 日記는 처음부터 없었고, 1925年 日記는 이 敎授가 빌려가 硏究하는 過程에서 紛失했다.

    여기서 疑問이 생긴다. ‘장효근日記’의 加筆·造作은 ‘默庵備忘錄’의 創作과 무슨 關係가 있을까. 이현희 敎授는 왜 歷史的 發掘을 하고도 資料를 汚染시키는 危險한 選擇을 했을까. 發掘 當時 ‘默庵備忘錄’은 몇 張이라도 남아 있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實在하지 않은 資料였을까. 43年 前 紛失 騷動은 單純한 事故였을까 아니면 이 모든 責任을 回避하기 위한 意圖된 事故였을까.

    李 敎授가 ‘장효근日記’를 發掘한 時期는 1975年. 1976年 12月 ‘韓國史論叢 1輯’에 실린 ‘장효근日記解除’(解題·冊의 著者, 內容, 體裁, 出版 年月日 等을 大略的으로 說明한 글)에 따르면, 1975年 6月 20日 장효근 先生의 外孫女社位인 최선겸 氏의 도움으로 先生의 셋째 아들 장영환 氏가 居住하는 競技도 高陽郡 지도면 행주내리 自宅 다락에서 遺品을 調査하던 中 偶然히 朝鮮民力(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가 漢文本으로 發行한 달曆)에 漢文으로 쓴 日記를 發見했다고 한다.

    ‘默庵備忘錄’의 存在가 알려진 것은 3年 뒤인 1978年. 最初 報道한 京鄕新聞 2月 28日子 記事는 이현희 敎授가 장효근 氏의 3男 장영환 氏 집에서 한張本(韓裝本·韓紙로 된 冊을 가리키나 傳統 制策 方式으로 製本한 冊도 包含) 25卷과 조선민力에 日記體 記事로 整理한 15卷 等 40卷의 備忘錄을 發見했다고 傳했다. 以後 이 敎授는 1979年 ‘월간중앙’ 3月號에 ‘默庵備忘錄의 資料的 價値’라는 글을 發表하고 “‘장효근日記’ 30餘 卷을 행주에서 챙겨가지고 올 때 먼지가 까맣게 묻어 있는 또 한 뭉치의 備忘錄도 함께 가져왔다”고 發掘 經緯를 밝혔다.

    實學-東學-開化로 無理한 連結 짓기

    정욱재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조영철 기자]

    정욱재 獨立記念館 硏究委員. [조영철 記者]

    李 敎授는 京鄕新聞 最初 報道에서 ‘默庵備忘錄’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事實들을 公開했는데 그것만으로도 歷史學界를 흥분시키기에 充分했다. “默庵備忘錄은 天道敎의 自立自强을 위한 貢獻과 寄與度를 理解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日帝 占領 아래서도 生動했던 民族意識을 實感케 한다.” “默庵의 備忘錄을 통해 第2의 己未運動이 1921年 3月 1日을 期해 天道敎 單獨으로 推進됐다는 새로운 事實을 알게 됐다.” “第2의 獨立宣言書가 基礎됐다는 記錄도 보인다.” “默庵의 日記에 高宗이 죽음으로써 일어나는 民族의 怨恨을 民衆에게 擴散시켜 第2의 東學革命을 일으키자는 記錄이 보인다.” “己未獨立運動이 일어나기 3年 前인 1916年에도 日人에게 虐殺된 天道敎人 10萬 名의 怨讐를 갚기 위해 抗日運動을 일으킬 것을 謀議한 事實도 記述돼 있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 [조영철 기자]

    최우석 獨立記念館 硏究員. [조영철 記者]

    그러나 최우석 硏究員은 以後 公開된 ‘默庵備忘錄’에서 ‘第2의 東學革命’ ‘天道敎人 10萬 名의 怨讐’ 等의 表現은 確認되지 않고, 大韓自彊會 活動 等의 內容 亦是 빠져 있어 言論報道와 公開된 原文 사이의 間隙이 存在한다고 말했다. 單純 訛傳이나 漏落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은 이 敎授가 最初 인터뷰에서 이미 “‘默庵備忘錄’은 實學-東學-開化로 이어지는 韓國 近代 思想史 體系化의 決定的인 資料의 出現”라며 이를 土臺로 向後 어떤 硏究 結果가 發表될지 豫告했기 때문이다. 정욱재 硏究委員은 “‘默庵備忘錄’은 當時 學界가 얻고 싶었고, 바라고 있던 欲望을 채워주는 資料였다”고 했다.

    이종일 再照明 烈風

    1975年 ‘장효근日記’에 이어 1978年 ‘默庵備忘錄’의 發見은 歷史學界로선 劃期的인 事件이었다. 當場 1978年 6月 5日 默庵이종일先生記念事業會 發起總會가 열려 遺稿文集과 電氣 刊行, 銅像 建立, 默庵言論賞 制定 等이 論議됐고, 8月 31日 이종일 先生 誕生 120周年 및 逝去 53週期를 記念하는 學術發表會가 열렸다.

    여기서 ‘民族思想家로 본 默庵’이라는 題目으로 主題發表를 한 이 敎授는 “(默庵은) 天道敎人으로서 言論人이며 開化思想家이고 한글學者이며 獨立志士였다”면서 “默庵은 3·1運動을 甲午東學運動과 甲辰開化運動의 再現으로 評價, 3·1運動의 計劃과 脈絡性을 民族史 內部에서 찾으려는 史觀을 提示했다”고 主張했다. 그해 10月 4日 KBS 日曜史劇 ‘맥’에서 ‘어떤 先覺者’라는 題目으로 이종일 先生의 一代記를 다루기도 했다.

    이듬해 1979年 2月 27日 이 敎授는 또 한 番 놀라운 資料를 公開했다. ‘默庵備忘錄’를 檢討하던 中 李鍾一이 쓴 ‘第2獨立宣言文’ 이른바 ‘自主獨立宣言서’를 發見했다는 것이다. 21×11cm 韓紙 2張에 757者의 漢字로 쓰인 이 宣言書는 1922年 李鍾一이 普成社 職員, 天道敎人들과 함께 3·1運動 3周年을 맞아 推進했던 第2의 3·1運動을 위해 準備한 것으로 알려졌다. ‘自主獨立宣言서’는 “3·1運動 以後 國內 抗日運動社 體系化에 없어선 안 될 劃期的 資料”라는 學界의 評價가 이어졌다. 그해 3月 이종일 先生의 生家가 旣存에 알려진 京畿道 抱川이 아니라 忠南 瑞山郡 원북면 반계리 3具 89番地로 正確한 位置까지 밝혀지면서 古宅 原形 保存 運動이 벌어졌다.

    같은 해 5月에는 이 敎授가 ‘장효근日記’ ‘默庵備忘錄’ ‘自主獨立宣言서’ 等 自身이 發掘한 資料를 土臺로 3·1運動史를 새롭게 整理한 ‘3·1運動史論’을 發刊했다. 동아일보는 이 冊의 發刊 消息을 傳하면서 “日本 側 資料보다는 開化思想家나 獨立志士들의 記錄을 통해 새롭고 主體的인 韓國士官의 定立을 試圖한 點이 特色”이라고 썼다. 1979年 ‘3·1運動史論’ 以後 1996年까지 이 敎授가 ‘默庵備忘錄’을 根據로 發表한 論文과 冊은 23篇(卷)에 이른다. 少壯學者였던 이 敎授는 單숨에 3·1運動史의 權威者가 됐다.

    訴訟으로 飛火된 備忘錄 紛失 事件

    이현희 교수가 동아일보에 낸 ‘묵암비망록’ 분실 광고. 현상금 20만 원을 걸었다. [1979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이현희 敎授가 동아일보에 낸 ‘默庵備忘錄’ 紛失 廣告. 懸賞金 20萬 원을 걸었다. [1979年 7月 7日子 東亞日報]

    愛國志士 이종일 先生의 追慕 熱氣가 高調되던 1979年 7月 27日 ‘默庵備忘錄’ 分室이라는 靑天霹靂 같은 消息이 傳해졌다. 동아일보는 1979年 7月 30日子 ‘默庵備忘錄 紛失 못 믿겠다-문중 廁鼠 이현희 敎授 相對 資料返還 訴訟’이라는 速報를 냈다. 元來 所藏者인 동암 장효근 先生 遺族 側이 이현희 敎授를 相對로 ‘資料返還 및 原稿料 無斷 詐取’로 서울地檢에 告訴했다는 內容이다.

    告訴狀에 따르면 이 敎授는 1975年 6月과 1977年 5月에 ‘동암日記(장효근日記)’ 28冊과 ‘默庵備忘錄’ 12冊, 기타 10冊을 빌려갔으나 ‘동암日記’ 27冊과 其他 5冊만 返還했을 뿐 나머지는 紛失을 理由로 返納하지 않았다. 遺族 側은 이 敎授의 分室 經緯 說明이 模糊할 뿐 아니라 그동안 資料 返納 督促 때마다 이 敎授가 엇갈린 解明을 해왔기 때문에 紛失 事實을 믿을 수 없다고 主張했다.

    그런데 이 敎授의 解明 가운데 귀를 疑心케 하는 대목이 있다. 遺族 側이 ‘默庵備忘錄’의 返還을 要請하자 이 敎授가 “默庵備忘錄은 實在(實在)한 것이 아니고 自身이 ‘天道敎月報(天道敎月報)’와 ‘新人間(新人間)’ 等의 資料와 ‘동암日記’ 內容을 꾸며 創作했다”고 說明했다는 部分이다.

    그러나 以後 이 敎授가 日曜新聞 1979年 8月 5日子를 통해 公開한 解明書의 內容은 全혀 달랐다. 오히려 資料를 獨占해 硏究하다가 公開도 안 하고 紛失했다고 自身을 非難하는 學界에 對해 섭섭한 마음을 吐露했다.

    그렇다면 이 敎授의 “默庵備忘錄 創作” 發言은 一時的으로 紛失 責任을 謀免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였을까. 事實關係가 가려지기도 前에 遺族 側이 告訴를 取下하면서 이 事件은 單純 紛失 事故로 處理됐다.

    全知的 作家 時點으로 쓴 備忘錄?

    최우석 硏究員이 40餘 年 만에 다시 ‘默庵備忘錄’을 들여다보게 된 契機는 2018年 3·1運動 100周年을 앞두고 外部의 여러 諮問 要請으로 다시금 資料를 살펴보던 過程에서였다.

    “‘默庵備忘錄’은 原本이 사라진 안타까운 資料라고만 생각했지 變形되거나 創作됐을 可能性은 생각하지 못했다. 當代를 具體的으로 傳해 주는 重要 資料라 精密하게 살펴보았는데 異常한 點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中 하나가 全知的 時點에서 獨立運動을 敍述했다는 點이다. 3·1運動 後 監獄에 갇혀 있던 李鍾一이 어떻게 塔골公園에서 獨立宣言書를 朗讀한 사람이 정재용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漢城臨時政府나 義烈團이 組織되는 날짜는 어떻게 알았을까. 出獄 後 나중에 整理했다고 쳐도 그것을 어떻게 날짜別로 整理했을까. 天道敎人人 李鍾一이 어떻게 柳寬順, 김마리아 같은 基督敎界 젊은 女性들과 交流하고 獨立運動에 對해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들여다볼수록 資料의 信憑性을 疑心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정욱재 硏究委員은 ‘장효근日記’에 關心을 갖고 있었다.

    “日帝强占期 日記 資料가 發掘되거나 硏究에 活用되는 것이 如意치 않은 狀況에서 獨立記念館 少將 ‘장효근日記’가 제대로 刊行되지 못한 點이 아쉬웠다. 日記는 1916年 1月부터 1945年 12月까지 30年間인데, 發掘自認 이현희 敎授가 탈초·活字化해 公開한 것(이현희本)은 1916年부터 1930年까지 15年間에 그쳤다. 李 敎授가 처음부터 1930年까지만 脫超했는지 아니면 1945年까지 脫超하고도 公開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問題는 只今까지 硏究가 元本 ‘장효근日記’가 아니라 ‘이현희本’을 根據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鄭 硏究委員은 原本이 行書나 草書로 돼 있고 印刷된 글字 위에 겹쳐 쓴 部分까지 있어 解讀하기 쉽지 않다 보니 硏究者들이 잘 整理된 이현희本을 利用했다고 說明했다. 여기에는 韓國 近代史 硏究 1世代인 이현희 敎授의 硏究 成果와 學問的 權威를 믿었던 탓도 있다.

    ‘장효근日記’의 價値를 제대로 알리려면 이현희本의 問題點부터 살펴보는 게 順序라고 생각한 鄭 硏究委員은 1916年 1月 日記를 펼치자마자 異常하다는 것을 알았다.

    “當時 時代 狀況과 全혀 맞지 않거나 나올 수 없는 表現들이 나오고, 1970年代 硏究 成果를 反映한 記錄이 아닐까 疑心되는 內容도 있었다.”

    儒學思想史 專攻인 鄭 硏究委員은 漢文 資料에 强點이 있었고, 3·1運動史를 專攻한 崔 硏究院은 그 時代 狀況과 硏究 動向에 强했다. 學者로서 共通된 問題意識을 가진 두 사람은 鄭 硏究委員이 ‘장효근日記’를, 崔 硏究院이 ‘默庵備忘錄’을 맡아 再檢討 作業에 들어갔다. 그렇게 誕生한 것이 ‘이현희本 장효근日記 批判’과 ‘만들어진 資料 默庵備忘錄 批判’이다. 두 篇의 論文과 著者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현희本 ‘장효근日記’와 ‘默庵備忘錄’이 어떻게 再創造 또는 創造됐는지 살펴보자.

    서울 종로구 조계사 맞은편 옛 보성사 터에 세워진 이종일 선생 동상.

    서울 종로구 曹溪寺 맞은便 옛 普成社 터에 세워진 이종일 先生 銅像.

    時代의 怪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19年은 3·1運動이라는 巨事가 있었던 해여서 다른 時期보다 注目할 部分이 많다. ‘장효근日記’ 1919年 1月 1日 原本은 ‘進拜聖師主道主丈’ 8글字. ‘成事(當時 天道敎 指導者인 孫秉熙를 가리킴)에게 나아가 절을 했다’는 簡單한 內容이다. 그러나 이현희本은 ‘乘此機會 消滅日帝侵略之輩 擄忿雪恥 以伸大義勝利於天下 則豈不爲公私之最又大幸也 我天道敎人合心協力 與共大事 幸甚且幸甚 果爲實現乎’로 60글字가 더해졌다. 이 機會에 日帝 侵略 무리를 소멸시키는 데 天道敎人이 合心하자는 意味가 追加됐다.

    1919年 1月 6日 日記는 ‘寒’ 한 글字로 날씨만 적었다. 그러나 이현희本은 ‘在日韓國留學生 決議韓國獨立 卽作各種請願書 送于各大臣各國大公使言論機關 連於國內 選實行委員十一名 卽崔八鏞李光洙金度演崔謹愚金尙德李琮根白寬洙田榮澤尹昌錫宋繼白徐椿也’ 無慮 80글字가 加筆됐다. 在日 韓國 留學生들이 獨立을 決意하고 請願書를 作成해 各國 臺·空士, 言論機關에 보냈다는 記事로 11名의 이름까지 적었지만 原本에는 없는 內容이다.

    鄭 硏究委員은 “1919年 1月 한 달 日記만 計量的으로 比較해도 原本은 302字, 이현희本은 671字로 事實上 50% 以上 分量이 많다. 1916年부터 1930年까지 整理된 이현희本은 原本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50% 以上 加筆·造作된 資料”라고 했다.

    3·1運動 當時 狀況을 描寫한 1919年 2月 27日 日記와 3月 1日 日記에도 巧妙한 加筆이 있다. 2月 27日 日記 原本은 ‘밤에 朝鮮獨立宣言書 2萬1000枚를 印刷해 角度 敎人에게 頒布했다’는 內容이 全部이나 이현희本은 밑줄 친 部分을 追加해 ‘夜朝鮮獨立宣言書二萬一千枚印刷於普成社 頒布各道主要地敎人及有志 逼近絶叫萬歲運動之日 期於參與 擄忿雪恥’로 늘어났다. 天道敎 側의 獨立運動을 强調하기 위해 ‘普成社’를 追加하고 歷史的 現場感을 表現하는 文章을 揷入했다.

    3月 1日 日記에는 ‘普成社에서 被捉(被捉), 每달 1日 城內 撤市, 天道敎·基督敎·佛敎 33人, 協同宣言’이나 이현희本은 協同宣言 뒤에 ‘태화관에서’를, 被捉 앞에 ‘自現(自顯)’을 追加했다. 被捉은 單純히 逮捕됐다는 것이고 ‘自現被捉’은 스스로 나타나 逮捕됐다는 意味여서 差異가 있다. 後者는 堂堂한 抗日獨立運動家의 面貌가 强調돼 있다. 이현희 敎授는 2006年 出刊한 歷史 에세이 ‘歷史를 알면 未來가 보인다’에서 自身이 追加한 部分을 引用하며 “自現被捉 되어간 눈물겨운 祕境이 아닐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1970年代 硏究 成果가 1910年代 史料에 登場

    이현희本의 더 큰 問題는 單純히 史料 몇 글字를 바꾼 게 아니라 自身의 意圖를 담아 史料 內容 自體를 造作했다는 點이다. 代表的으로 ‘實學’이라는 用語의 使用이다.

    “1916年 1月 1日 日記에 ‘이때는 반드시 朝鮮末의 實學을 일으켜야 한다’, 1月 19日에는 ‘문득 깨달은 일은 반드시 實學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니’라는 敍述이 나온다. 오늘날 學界는 ‘實學’이란 槪念이 1930年代 정인보, 安在鴻 等이 展開한 朝鮮학운동에 依해 ‘發明’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1916年 장효근이 어떻게 ‘朝鮮말의 實學’이라는 敍述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當代의 實學은 말 그대로 虛學(虛學)의 反對말로서 性理學을 의미했다. 이현희本에서 1916年에는 斷片的으로 言及되던 實學인 1926年 9月 5日에는 그 나름대로 體系를 갖추어 相當한 分量으로 登場한다. ‘民主主義的 性格’ ‘主體的 世界觀’ ‘民權尊重思想’ ‘北學派’ 等 現代 學術 用語에 가까운 表現을 쓰는데 이는 1920年代 儒敎的 素養을 갖춘 장효근이 쉽게 使用할 수 있는 用語가 아니다. 이 記錄은 1970年代 實學 硏究 成果를 反映해 이현희 敎授가 創作한 內容이라고 斷言할 수 있다.”(정욱재)

    鄭 委員에 따르면 이현희本에는 장효근 自身의 家族史 外에, 原本에 없는 日帝强占期에 일어난 다양한 事件과 獨立運動家들의 逮捕와 死亡 消息 및 感懷, 當代 人物들에 對한 評價, 朝鮮總督府의 人事 및 各種 法令·制度의 施行·改正, 時代 認識 等이 追加됐다. 鄭 委員은 이를 當代에 確實하게 發生한 歷史的 事件 等을 該當 날짜에 記錄하고, 狀況에 따라 장효근 自身의 感想이나 評價 等을 덧붙여서, 讀者가 疑心 없이 當時 장효근이 見聞한 事實을 記錄했다고 믿게끔 誘導한 裝置라고 說明했다.

    鄭 委員은 國史編纂委員會에서 刊行한 ‘日帝侵略下 韓國 36年史’(1966年부터 1978年까지 13卷으로 完刊) 같은 1次 史料를 參考하고, 장효근이 記錄하지 않은 言行과 생각, 評價 等을 더해 이현희本이 誕生했다고 말한다. ‘日帝侵略下 韓國 36年史’는 日帝强占期 國內外에서 展開된 獨立運動과 全般的 動向을 整理한 資料集으로, 1910年 8月에서 1945年 8月 15日까지 그날그날 主要 事件을 日誌(日誌)式으로 整理해 놓은 것이다.

    엉터리 이미지 公開, 卷數와 形態도 달라져

    ‘장효근日記’는 多幸히 原本이 있기에 對照가 可能하지만, ‘默庵備忘錄’은 原本이 사라져 批判的 檢討는 制限的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明白한 造作의 痕跡은 남아 있다.

    崔 硏究員은 時時때때로 變하는 備忘錄의 卷數와 形態 問題를 指摘한다. 이현희 敎授는 1978年 2月 28日 京鄕新聞 最初 報道에서 “紀事本末體로 記述한 한張本 25卷과 조선민力에 日記體 記事로 整理한 15卷 等 40卷”이라고 밝혔으나, 다른 인터뷰에서는 “草書體와 半草書體로 씌어진 30餘 卷 規模” “27年間의 日記體的인 記錄集”이라 했다가 월간중앙 1979年 3月號에 寄稿한 ‘默庵備忘錄의 資料的 價値’에서는 한張本과 朝鮮民力 外에 馬糞紙, 노트, 原稿紙, 달曆 等 다양한 形態로 資料가 構成됐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紛失 騷動이 일어났을 때에는 12冊 36卷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只今까지 公開된 ‘默庵備忘錄’의 이미지도 엉터리다. 1978年 2月 28日 경향신문에 실린 두 個의 이미지 中 하나는 ‘默庵備忘錄’이 아니라 ‘장효근日記’ 1917年 1月 寫眞이고, 李鍾一이 晩年에 全國을 다니며 山川景槪의 아름다움과 亡國의 슬픔을 담은 七言絶句媤집이라고 紹介된 寫眞은 장효근의 七言絶句詩集 ‘한집(閑集)’이었다. 1978年 ‘國學資料’ 30號와 월간중앙 1979年 3月號에 실린 이미지는 同一한 資料로 推定되나, 焦點이 흐릿해 全體 內容은 알 수 없다. 다만 判讀 可能한 天馬來天國?于生平厭世?便○의 글字는 現在 傳해지는 ‘默庵備忘錄’에서 찾아볼 수 없다.

    明示的으로 ‘默庵備忘錄’임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월간중앙 1979年 3月號에 실린 것이 唯一하다. 매우 흐릿하지만 漢字로 ‘默庵備忘錄’ ‘이종일 저’ ‘鳶島’ ‘1月 1日’이라 적고 日記 記事 巡으로 構成된 한張本임을 알 수 있다.

    崔 硏究員은 “이것이 眞짜 ‘默庵備忘錄’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問題가 남는다. 最初 報道에서 한張本은 紀事本末體, 朝鮮民力은 日記體로 敍述했다고 했는데, 이 이미지는 한張本임에도 日記體 形式을 取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崔 硏究員은 唯一하게 ‘默庵備忘錄’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는 이 이미지조차 ‘만들어진 資料’일 可能性이 많다고 보고 있다.

    日記 속 날씨 ‘續陰晴史’ 베껴

    備忘錄의 原文 公開도 疑問투성이다. 李 敎授는 1978年부터 1997年까지 ‘韓國思想’, 월간중앙, ‘옥파이종일先生 論說集’ ‘이종일 生涯와 民族運動’에 9次例에 걸쳐 原文을 公開했다. 初期 資料(1898~1902)는 漢文으로 公開한 뒤 飜譯했고, 1910年 以後 資料는 한글로 飜譯된 內容만 公開했다. 分量 面에서도 1898年 1月 1日부터 1899年 5月 31日까지 1年 半의 日記는 88쪽에 이르는데 정작 이종일 先生이 가장 活潑하게 獨立運動을 하던 時期인 1910年 9月 30日부터 1922年 2月 27日까지 12年間 日記는 53쪽에 不過해 對照的이다. 또한 原本을 紛失한 뒤에도 創作과 加筆이 繼續됐는데 무엇을 根據로 이러한 作業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默庵備忘錄’李 創作됐다는 證據 中 하나가 ‘다른 資料 베끼기’다. 通常的인 日記에는 날씨를 記錄하는데 ‘默庵備忘錄’의 날씨 記錄이 金允植의 ‘續陰晴史’를 베낀 情況이 捕捉됐다. 1898年 1月 날씨 31件 中 25件이 一致하거나 變形된 形態의 類似性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종일과 金允植의 날씨 記錄이 一致하기란 거의 不可能하다. 이 時期 이종일은 서울에서 活動했고, 金允植은 濟州島에서 流配 生活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효근日記’ 加筆 後 다시 ‘默庵備忘錄’에서 再湯

    또 ‘默庵備忘錄’ 紛失 後 公開된 內容에는 ‘장효근日記’를 그대로 옮겨오거나 그 資料를 土臺로 加工 添加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 例를 들어 ‘장효근日記’ 1919年 6月 9日은 漢文으로 ‘聖師(成事), 患候(患候), 小差度(小車도)’라고 썼는데 ‘默庵備忘錄’은 같은 날짜에 “손의암(孫秉熙)의 患候는 如前하다. 昨年에 비하면 조금 車道는 있는 것 같다”는 內容이 한글로 公開됐다. 孫秉熙의 病患을 記錄한 日記가 네 次例 나오는데 同一한 날짜에 類似한 內容이 적혀 있는 것이 偶然일까. 漢文과 한글이라는 差異만 있다.

    甚至於 ‘장효근日記’ 原本에는 없는 內容을 이현희本에 加筆한 뒤 이를 ‘默庵備忘錄’에 再收錄하는 自己 剽竊이 發見되기도 한다. 1920年 1月 27日 ‘默庵備忘錄’의 “천敎徒 500餘 名이 中心이 되어 太極旗를 흔들며 大韓獨立萬歲를 마음껏 높이 외쳤다고 한다. 太極旗는 卽時 빼앗겼으나 死傷者는 없었다니 千萬多幸이다”는 이현희本 ‘장효근日記’에는 있고 原本에는 없다.

    이 밖에도 다른 사람의 글을 剽竊한 事例도 적지 않다. 1919年 3月 7日 ‘默庵備忘錄’에서 3·1運動에 對해 “創世記 以來 最初의 맨손革命運動”이라고 評價하는데 이는 朴殷植 先生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나온 表現이다. 더욱이 ‘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1920年 12月 상하이에서 發行돼 時期的으로 이현희 敎授가 ‘默庵備忘錄’을 創作하는 過程에서 朴殷植의 글을 剽竊했다고 할 수 있다. 1919年 1月 31日 備忘錄에 “半島 3千里가 모두 監獄”이라는 表現이 登場하는데 이것은 1972年 出刊된 박화성 ‘타오르는 별-柳寬順의 一生’에서 柳寬順이 한 말로 나온다.

    ‘默庵備忘錄’에는 歷史的 實相과 不一致하는 內容도 나온다. 1912年 10月 14日 日記를 보자.

    “나(이종일)는 中央布敎堂으로 韓龍雲, 백용성, 이능화, 鄭雲復 等 佛敎界 人士를 찾아갔다. 天道敎 側과 合同으로 民族文化 守護의 維持를 위한 汎國民運動의 推進을 協議하기 위해서였다. 韓龍雲은 卽席에서 ‘只今 이 時點에서 民族文化의 守護 推進보다는 民生 安定이 더 重要하오’ 하면서 얼른 協助하지 않아 天道敎 單獨으로 于先 이 運動을 일으킬 것을 決心하고 細部 計劃을 짰다.”

    그러나 韓龍雲은 이때 서울에 없었다. 滿洲 地域 獨立運動 動向을 살피러 갔다가 日本 密偵으로 疑心받아 銃傷을 입고 通話病院에서 治療를 받은 뒤 1913年 1月 즈음에야 서울에 돌아왔다.

    飼料 批判은 ‘科學으로서의 歷史學’을 위한 첫걸음

    ‘默庵備忘錄’이 만들어진 資料임을 밝힌 최우석 硏究員은 “現在의 狀態에서 ‘默庵備忘錄’은 絶對로 使用해서는 안 되는 飼料”라며 “다만 “왜 이현희는 ‘장효근日記’를 加筆하고 ‘默庵備忘錄’을 創作했느냐의 問題가 남는데 그 答을 들려줄 當事者가 없어 解答을 얻기 힘들지만 向後 이러한 資料 造作 및 創造로 어떤 硏究 內容들을 生産했는지를 批判的으로 檢討하는 過程에서 一部 解明될 것”이라고 期待했다.

    정욱재 硏究委員 亦是 “이현희本 ‘장효근日記’는 原本과 完全히 다른, 어떤 目的을 가지고 造作된 資料”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현희本의 出現으로 ‘장효근日記’ 原本이 硏究者들의 視野에서 멀어진 點도 指摘했다.

    “이현희本에 對해 얼마든지 合理的인 疑心이 나올 만한 狀況임에도 只今까지 看過됐다는 것은 當代 學界가 基本的으로 史料 批判을 疏忽히 했음을 의미한다. 1970年代 近代化 熱氣가 剛했던 時代 狀況과 그것에 副應하기 위한 歷史的 近代性을 ‘實學’에서 찾으려는 學界의 雰圍氣가 이현희本 같은 時代的 怪作을 誕生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최우석 硏究員도 “根本的인 史料 批判이 40年 넘게 遲滯됐음을 學界 全體가 反省하고 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면서 “다시는 한 硏究者가 資料를 獨占하고 다른 硏究者와 共有하지 않는 行態를 容忍해서는 안 될 것이며, 相互 間의 牽制와 批判으로 ‘科學으로서의 歷史學’이 作動할 수 있도록 歷史學系 構成員 모두가 努力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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