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 (忠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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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 (李藝, 1373年 ~ 1445年 3月 31日 ( 陰曆 2月 23日 ) [1] )는 朝鮮 電氣의 外交官으로 本貫은 鶴聲( 鶴城). 雅號는 學派(鶴坡). 諡號는 忠肅(忠肅)이며, 蔚山을 世居地로 하는 鶴聲 李氏 의 始祖이고 朝鮮 初期 日本 科의 外交를 專擔한 專門外交官이다.

그는 朝鮮 開國以後 倭寇에게 拉致된 지蔚山軍事(知蔚山郡事) 이은(李殷)을 救出한 공으로 鄕吏役을 면하게 되었고 벼슬을 받아 士大夫가 되었다.

以後 日本과의 外交的 交涉을 통해 667名에 達하는 朝鮮人 被虜人(被虜人)을 送還하고 癸亥約條 를 締結함으로써 倭寇의 勢力을 약화시키는 等의 功을 세웠다.

官職은 1401年(太宗1) 種5品 左軍副司直(左軍副司直)에서 出發하여 1443年(世宗25) 種2品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까지 [1] 昇進했고 1910年(隆熙4) '忠肅(忠肅)'이라는 諡號를 받으면서 鄭2品 資憲大夫(資憲大夫) 知中樞府事(知中樞府事) 世子左賓客(世子左賓客)으로 追贈되었다. 遺稿로 《學派實技(鶴坡實紀)》가 있다.

아들로는 이종실(李宗實)이 있다. [1]

生涯 [ 編輯 ]

1373年(高麗 恭愍王22) 에 태어나 1445年(世宗27)에 死亡했다. 그의 一家는 高麗時代부터 代代로 이어진 蔚山 有力 土着 9個 性(姓)氏 中 하나였다. [2] 1396年(太祖5)에 24歲의 이예는 蔚山郡의 機關(記官)이었다고 [1] 世宗實錄에 記錄되었는데, 이는 官命(官命)의 收納과 記錄 等을 맡은 鄕吏 階級의 職責이었다. 高麗時代 蔚山의 土星 卽 土着勢力은 王朝 交替를 전후하여 士大夫/兩班 階級과 鄕吏/中인 階級으로 分化되는 過程을 거치게 된다. [2]

1397年 3千名의 倭寇들이 蔚州抛 [3] 에 侵入하여 郡守 이은(李殷) 等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4] 다른 官吏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데 비해 이예는 自進해 郡守를 따라가 끝까지 輔弼해 海賊들을 感服시켰다. 後日 朝鮮에서 派遣한 通信社 의 仲裁로 1397年 2月 이예는 郡守와 함께 無事히 朝鮮으로 돌아왔다. [1] 朝廷에서는 이예의 忠情을 가상히 여겨 衙前의 役(役)을 免除하고 벼슬을 주었다. [5] 이를 契機로 이예는 中人 階層의 衙前 身分에서 벗어나 士大夫로 專門 外交官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8歲 때(1380年, 禑王 6年) 海賊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調整에 請해 1400年 回禮使 (回禮使) 允命(尹銘)의 隨行員으로 對馬島 에 갔으나 찾지 못했다. [1]

처음으로 使節의 責任을 맡은 것은 1401年 ( 太宗 1年)으로, 報聘社 로 日氣圖에 派遣되었다. [1] 1406年 日本 廻禮館(日本回禮官)으로 派遣되어, 拉致되었던 男女 70餘 名을 데리고 돌아왔다. [6] 1416年 1月 27日 유구국 (現在의 오키나와)으로 가서, 倭에 依해 捕虜가 되었다가 유구국으로 팔려간 百姓을 데려오기 위해 유구국으로 派遣되었다. [7] 그는 유구국에서 44人을 데리고, 같은 해 7月 23日 歸國하였다. [8]

1418年 (太宗 18年). 對馬島 守護 宗正巫歌 死亡하자, 弔意 使節로 對馬島에 派遣되어 , , 종이 를 附議하여 그의 忠誠을 厚謝하였다. 種政務는 治世 期間 盜賊을 禁制하여, 邊境을 侵犯하지 못하게 했다는 理由로 特別히 이例를 派遣한 것이다. [9]

以後에도 여러 次例 日本을 오가면서 專門 外交官으로 활동횄다.

1443年 (世宗 25年) 倭敵이 邊方에 盜賊질하여 사람과 物件을 掠奪해 갔으므로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려 하니, 이예가 自請하여 對馬島 體察使 (對馬島體察使)로 派遣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蛇行(使行)이었다. [10] 28歲인 1400年에서 71歲인 1443年까지 44年間 40餘回 日本 [11] 에 임금의 使節로 派遣되었다. 그 中 朝鮮王朝實錄에 記錄되어 蛇行(使行)의 內容이 具體的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13回에 達한다 [12] . 朝鮮王朝實錄에는 44年間의 射倖에서 이예가 刷還해온 朝鮮人 捕虜의 數가 667名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業績 [ 編輯 ]

日本人의 朝鮮 入國 許可와 關聯한 文人制度와 兩國의 交易條件을 規定한 癸亥約條 를 情弱하여 倭寇의 發生原因을 根絶시키고자 하였고 癸亥約條 締結 以後 朝鮮은 中宗 時期의 三浦倭亂 때까지 大規模 倭寇의 侵奪을 單 한次例도 받지 않게되었다. 이밖에도 日本 科의 外交에서 많은 業績을 남겼다.

世宗의 名으로 대장경을 日本에 傳達하고 朝鮮에 自轉(自轉) 물레방아를 導入하였으며 日本式 商家制度의 施行을 建議하는 等 兩國 文化 및 經濟의 交流에도 크게 寄與하였다. 또한 沙糖수수의 栽培와 普及, 또한 民間에 依한 鑛物採取自由化와 이에 對한 課稅, 火筒 및 玩具의 材料를 同綴에서 무쇠로 變更, [13] 外國 朝鮮技術의 導入 等을 建議한 바 있다. [14]

評價 [ 編輯 ]

1910年 忠肅工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2005年 2月에 文化관광부 이 달의 文化 人物 로 選定했다. 2010年 에는 外交通商部 가 올해의 外交 人物에 選定하였다.

어린나이에 어머니가 倭寇에 拉致된 事緣속에서도 日本과 朝鮮과의 平和와 友好關係를 위해 一平生을 獻身했던 忠肅共의 삶은 示唆하는 바가 크다

家族關係 [15] [ 編輯 ]

  • 本人: 이예(李藝)
    • 아들: 이종실(李宗實)
      • 孫子: 移職江(李直剛)
        • 曾孫子: 移植(李植)
          • 玄孫子: 異變林(李變林) - 訓鍊院正(訓鍊院正)
            • 內孫子: 이우춘(李遇春) - 職場(直長)
            • 內孫子며느리: 朴氏(朴氏) - 禦侮將軍(禦侮將軍) 拍子공(朴自恭)의 딸
              • 곤孫子: 이겸수(李謙受) - 井州(定州) 判官까지 지냄
              • 곤孫子: 이겸록(李謙祿)
              • 곤孫子: 二兼狂(李謙光)
              • 곤孫子: 이겸복(李謙福)
              • 곤孫子: 이謙益(李謙益: 1576年 ~ 1646年 )

大衆媒體 [ 編輯 ]

2013年 6月 1日 韓日 合作 다큐멘터리 映畫 '이예'(감독 이누이 히로아키 (乾弘明), 主演 윤태영 , 내레이션 고미야 에쓰코(小宮?子)가 도쿄 市內 劇場에서 開封되었다.

各州 [ 編輯 ]

  1. 《世宗實錄》 卷107, 世宗 27年(1445年) 2月 23日(丁卯) 2番째 記事
  2. 土星(土姓) 9個는 朴(朴), 金(金), 李(李), 목(睦), 前(全), 오(吳), 尹(尹), 文(文), 임(林)이다(《세종실록》 卷150, 地理誌 慶尙道 蔚山郡).
  3. 現在의 蔚山廣域市 이다.
  4. 《太祖實錄》 卷11, 太祖 6年(1397年) 1月 3日(丙辰) 2番째 記事
  5. 《太祖實錄》 卷13, 太祖 7年(1398年) 1月 26日(甲戌) 2番째 記事
    이명훈의 論文에 따르면, 이 記事의 이도(李陶)와 박언(朴焉)은 이예(李藝)와 迫請(朴靑)을 잘못 表記한 것이다. 이명훈, 〈李藝 關聯 王朝實錄의 誤記-國史編纂委員會 校勘의 優先順位〉, 《韓日關係詞 硏究》 57, 2017年 參照.
  6. 《太宗實錄》 卷12, 太宗 6年(1406年) 尹7月 3日(更新) 5番째 記事
  7. 《太宗實錄》 卷31, 太宗 16年(1416年) 1月 27日(更新) 4番째 記事
  8. 《太宗實錄》 卷32, 太宗 16年(1416年) 7月 23日(임자)
  9. 《太宗實錄》 卷35, 太宗 18年(1418年) 4月 24日(甲辰) 2番째 記事
  10. 《世宗實錄》 卷100, 世宗 25年(1443年) 6月 22日(乙巳) 2番째 記事
  11. 對馬島-일기도 包含
  12. 日本 國王에 6回, 對馬島-일기도-유구국에 7回
  13. 《世宗實錄》 卷1, 世宗 卽位年(1418年) 8月 14日(辛卯) 8番째 記事
  14. 《世宗實錄》 卷46, 世宗 11年(1429年) 12月 3日(乙亥) 5番째 記事
  15. 이 家系圖는 《世宗實錄》과 남경희, 《치암집》 卷10, 軍資監奉事李公行狀을 根據로 作成된 것이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