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夢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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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準
出生 1951年 11月 15日 ( 1951-11-15 ) (72歲)
大韓民國 慶尙南道 釜山市 東區 범일동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平倉洞
本館 河東 [1]
學歷 존스홉킨스 SAIS 國際政治學 博士
職業 企業人 , 政治人
經歷 現代重工業 會長
現代重工業그룹 會長
통일국민당 代辯人
대한축구협회 名譽會長
現代오일뱅크 會長
현대미포조선 會長
現代建設機械 會長
韓國造船海洋 會長
現代三湖重工業 會長
한나라黨 서울 銅雀區 을 國會議員
한나라黨 代表最高委員
새누리黨 서울 銅雀區 을 國會議員
새누리黨 中央選擧對策委員會
牙山나눔財團 名譽理事長
牙山社會福祉財團 理事長
父母 鄭周永 (簿), 변중석 (某)
兄弟 8男 3女 中 6男
配偶者 김영명
子女 2男 2女
軍服務 陸軍 中尉 轉役
宗敎 長老敎(統合) [2]
議員 選手 7
議員 臺數 13·14·15·16·17·18·19
正當 無所屬
地域區 慶南 蔚山市 東區 (13·14·15代)
蔚山 東區 (16·17代)
서울 銅雀區 을 (18·19代)

鄭夢準 (鄭夢準, 1951年 11月 15日 ~)은 大韓民國 財閥 家門 利子, 政治人 家門 이며, 企業人 , 政治人 이다. HD現代그룹 大株主이자 拷問이다. 第13~19代 國會議員 을 지냈다.

現代重工業 會長을 지내고, 第13代 總選 에서 當選되며 政界에 入門하였다. 第18代 總選 에 出馬하여 서울 銅雀區 을 에서 當選되며 地域區를 옮겼다. 2014年에 서울特別市葬 出馬를 宣言하고 5月 15日 國會議員職을 辭退한 後 第6回 地方 選擧 에 出馬하였으나, [3] 現職 市長인 새政治民主聯合 朴元淳 候補에게 敗北하며 落選되었다. 國際蹴球聯盟 名譽副會長이며, 牙山나눔財團 名譽理事長職과 牙山社會福祉財團 에서 理事長을 맡으면서 現代重工業그룹 에서 會長職을 맡고 있다.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生涯 [ 編輯 ]

정몽준은 서울大學校 在學 時節 ROTC 候補生이 되었다. 學群士官候補生 13期로 兵役을 履行하였으며 그의 長男 亦是 學群士官候補生 43期로 任官 將校의 身分으로 兵役의 義務를 移行하였다.

1982年부터 現代重工業 代表理事 社長을 지냈다.

政治入門 [ 編輯 ]

1988年 13代 總選 때 無所屬으로 政治에 入門했다. 아버지를 따라 통일국민당 에 入黨하였고, 金永三 政府 當時 草原福집事件 때 不法盜聽한 犯人들에게 逃避 資金을 提供한 嫌疑로 不拘束 起訴되었다. [4]

2002年 大統領 選擧 [ 編輯 ]

정몽준은 2002年 韓日 월드컵 바람을 타고 大統領 選擧 出馬를 宣言한다. 瞬間 그가 거센 突風을 일으키자 盧武鉉 은 支持率이 急落하고 黨內 議員들로부터도 排斥받기 始作했다. 盧武鉉 흔들기는 더욱 露骨化되었고, 候補 單一化論은 勿論 候補 交替論까지 나왔다. 盧武鉉 은 競爭力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輸血해 大選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政治工學的 判斷이었다.

10月 들어서 狀況이 惡化되었다. 盧武鉉 의 落馬를 바라는 議員들이 脫黨하여 候補 單一化 推進 協議會 (後단협)를 만들고 候補 單一化를 主張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候補 單一化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發言하였고 鄭夢準 支持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5] 11月 19日 後단협은 鄭夢準에 對한 公開 支持를 밝혔다. [6] [7] 以後 後단협이 解除되자 一部 國會議員은 한나라黨 에 入黨했고, 나머지는 民主黨 에 復黨했다. [8]

이때 鄭夢準의 國民統合21 에 入黨하기 爲한 金民錫 의 脫黨은 盧武鉉 에게 反轉의 契機가 되었다. 그의 脫黨은 盧武鉉 에게 惡材가 되지 않겠느냐는 觀測이 있었으나, 踏步 狀態였던 盧武鉉의 支持率은 20%臺를 回復하고 後援金 額數도 크게 늘었다.

盧武鉉과의 候補 單一化 [ 編輯 ]

候補 單一化는 정 代表로의 單一化를 念頭에 둔 民主黨 內 反(反)노무현, 비(非)노무현 側의 要求에서 비롯하였다. [9] 單一化 方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國民 競選과 輿論 調査와 協商 談判이었다. 이 中 協商 談判은 鄭夢準의 候補의 主張으로 11月 1日에 正式 提案했고, 國民 競選안은 國民 參與 50%, 黨員 參與 50%의 민주당 案을 盧武鉉 候補가 11月 3日 正式 提案했다. 輿論 調査안은 單一化 輿論 調査를 實施했을 때 優位를 占하는 정몽준 候補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候補가 選好하는 안이었다. [10] [11]

國民統合21 은 노무현 陣營 側의 提案을 反對하며 “國民 競選을 할 時間的 餘裕가 없다”라는 理由를 들었다. 그러나 판勢는 1强(이회창) 2重(盧武鉉-정몽준)의 構圖로 바뀌고 있던 次였다. 國民統合21度 더는 單一化 方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狀況이 아니었다.

노무현 候補는 11月 11日 自身에게 不利한 輿論 調査를 통한 單一化를 提議하였고, 單一化 再協商에서도 마지막 爭點인 ‘無效化 條項’을 電擊 受容하면서 讓步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設問 內容 變更도 單一化를 위해 受容했다. 민주당 김원기 顧問은 盧武鉉의 決斷은 “이기고 지는 것을 超越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候補의 支持度는 더욱 反騰하기 始作했다. [12] [13]

텔레비전 討論을 거쳐 2002年 11月 24日 노무현 候補는 劇的으로 單一化 輿論 調査에서 勝利했다. 24日 實施된 2군데 輿論 調査 中 리서치 앤드 리서치 競爭力 調査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鄭 候補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調査에서는 이회창 候補 支持率이 調査 有效化 條件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無效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候補를 앞섰다. 盧 候補 側은 이날 勝利 原因에 對해 ‘성실하게 原則과 程度를 지켜온 것이 國民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14]

單一化가 되고 나서 輿論 調査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候補를 逆轉한 直後 李仁濟 가 脫黨하여 自由民主聯合 에 入黨한 後 이회창을 支持하는 宣言을 하는 等 새로운 葛藤을 惹起하기도 하였다. 2002年 11月 새千年民主黨 候補였던 그는 서울 汝矣島 에서 열린 ‘全國 農民大會’에 參席했다가 성난 農夫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正面으로 맞았다. [15]

候補 單一化 破棄 [ 編輯 ]

하지만, 정몽준은 大選 投票 前날인 12月 18日 저녁 10時 民主黨과의 選擧 共助를 破棄했다. 支持 撤回 發表文에 따르면, 노무현 候補가 ‘美國과 北韓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表現을 했는데, 國民統合21은 “美國은 우리를 도와주는 友邦이고, 美國이 北韓과 싸울 理由가 없다는 視角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發言을 問題 삼았다. [16]

노무현 候補는 說得을 위해 深夜에 정몽준 國民統合21 代表의 自宅을 訪問하였다. 노무현은 정대철 選對委員長 等과 함께 自宅 앞에서 記者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代表는 만나주지 않았고, 深夜 會同은 決裂되었다. [17] 그러나 鄭夢準의 支持撤回로 危機感을 느낀 進步 陣營이 민주노동당 을 支持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票를 몰아주는 意外의 效果가 나타난다.

한나라당 入黨 [ 編輯 ]

2007年 大選을 앞두고 한나라黨 李明博 候補 支持를 宣言하며 한나라당에 入黨했으며, 2008年 4月 總選에서는 5線을 거둔 蔚山 洞口를 떠나 서울 銅雀乙 로 地域區를 옮겨 出馬해 鄭東泳 候補에 맞서 勝利해 6選 高地에 올랐고, 2008年 7月에는 한나라당 全黨大會에서 最高委員에 選出되어 活動하다가 2009年 9月 박희태 代表의 量産 再選擧 出馬로 인한 辭退로 當代豹直을 承繼하게 된다. [18]

代表 活動 [ 編輯 ]

2009年 9月 9日 李明博 大統領과 朝餐會同에서 새로 就任한 정몽준 代表는 " 金大中 前 大統領 逝去 以後 國葬 을 잘 치른 게 國民和合에 크게 寄與했다"며 이를 契機로 東西和合과 國民統合 이뤄지도록 努力할 必要가 있다고 말했다. 東西和合이라는 側面에서 정 代表는 東西高速道路 建設을 積極 推進해달라고 注文했다. 李 大統領은 터널과 橋梁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問題가 있지만, 肯定的으로 檢討하겠다고 答했다. [19]

寬勳클럽 招請 討論會에서 北韓의 核 開發에 對해 "金日成·김정일 政權의 나름대로 合理的인 判斷이라고 생각한다"면서 "在來式 武器로 軍事 競爭이 안돼서 그렇게 한 것이다. 北韓의 核武器 開發이 (金大中·노무현) 進步 政權의 責任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指摘했다. 정 代表는 또 對北 支援과 關聯해 "모든 것을 甘受하고서라도 人道的 支援은 해주어야 한다"고 强調했다. [20]

2010年 6月 3日 정몽준은 大韓民國 第5回 地方 選擧 의 敗北를 認定하고 黨 代表에서 辭退하였다. [21] 이에 當時 第1 野黨인 民主黨 代表 丁世均 은 鄭夢準에 對해 "與野關係를 좀 더 부드럽고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 많은 努力을 했다", "與野關係 뿐 아니라 全般的으로 國會의 機能과 政治를 復元시키려는 努力을 熱心히 했다", "鄭 代表가 앞으로도 大韓民國 政治 中心에 서서 政治發展에 寄與하기를 期待한다"고 말하였다. [22]

財團 設立과 私財 出捐 [ 編輯 ]

2011年 8月 16日 犯 現代家 關係者들은 서울特別市 현대 季冬 社屋에서 記者會見을 열고 牙山나눔財團 設立을 發表하였다. 이 財團은 現代그룹 의 創業主인 鄭周永 의 10週期를 기리기 위하여 設立된 財團이며, 財團의 財源은 정몽준이 約 2000億 원 程度 私財를 出演하여 財源을 負擔하였고, 現代重工業 系列 6個社의 2380億 원과 現代海上 , 現代産業開發 , KCC , 現代綜合金屬 , 現代百貨店 等의 620億 원을 합쳐 總 5000億 원 規模로 만들어지었다. [23] 財團의 規模는 2007年 三星그룹 의 會長인 李健熙 一家의 私財와 株式 8000億 원을 財源으로 設立된 三星고른기회장학재단 에 이어 大韓民國 에서 2番째 規模이다. [24]

大韓民國 蹴球와 2002年 월드컵 誘致 [ 編輯 ]

대한축구협회, FIFA 任員 當選 [ 編輯 ]

1993年 1月 대한축구협회 會長이던 金宇中 에 이어서 정몽준은 第47代 대한축구협회 會長으로 就任하였고 [25] , 就任 後 2002年 월드컵 誘致에 나서겠다고 宣言하였다. [26] 1993年 11月 정몽준은 월드컵 誘致 成功을 위하여 FIFA 副會長 選擧에 挑戰하겠다고 表明하였으며 [27] , 1994年 5月 13日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힐튼호텔에서 열린 第16回 아시아蹴球聯盟 年次總會 中 實施된 아시아地域 FIFA 副會長 選擧에서 當選이 되었다. [28]

2002年 월드컵 誘致 [ 編輯 ]

1996年 5月 31日 FIFA 2002年 FIFA 월드컵 을 滿場一致로 大韓民國 日本 이 共同 開催하는 것으로 確定하였고 [29] , 12月 30日 정몽준은 2002年 월드컵 韓國側 組織委員會 實務副委員長에 選出되었다. [30] 1997年 美國 의 時事週刊誌 타임 은 大韓民國의 2002年 월드컵 開催에 寄與를 한 정몽준을 아시아 次世代 指導者에 選定하였다. [31]

대한축구협회 活動 [ 編輯 ]

정몽준은 1993年 第47代 대한축구협회 會長으로 選出된 以來 第50代까지 4回에 걸쳐 會長으로 選出되어 在任하였으며 [32] , 1994年 12月에는 當時 競技團體長 中 가장 많은 41億 원의 出捐金을 支援하여 話題가 되었다. [33]

大韓民國 女子 蹴球에 對한 寄與 [ 編輯 ]

1993年 當時 現代學院 理事長이었던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會長에 就任한 後 實務者에게 `韓國蹴球는 男子보다 女子가 더 빨리 世界舞臺를 號令할 것'이라며 中·高等學校 女子축구팀 創團을 指示하였다.

하지만 當時 女子蹴球의 不毛地나 다름없던 韓國에서는 쉽지 않은 것이 現實이었으며, 根本的인 問題로는 選手들의 進學, 進路 問題 等의 理由로 運動을 繼續 이어갈 수 있는 大學팀, 그리고 實業팀이 必要하였다.

이런 理由로 1993年 靑雲中學校 를 始作으로 現代工業高等學校 , 蔚山科學大學 , 仁川 現代製鐵 레드엔젤스 로 이어지는 體系를 갖추도록 하였다.

정몽준은 이 때 이들 팀의 創團 費用은 勿論 年間 運營費도 支援하도록 하였고, 청운중과 現代情報과학고는 6~7千萬 원, 蔚山科學大 1億 원, 現代製鐵 約 20億 원, 어린이蹴球敎室 運營費 等까지 包含하여 女子蹴球團을 運營하는데 必要한 運營費를 年間 數十 億 원 支援하였다.

全國體典 의 正式種目으로 選定되는데 必要한 登錄팀 數를 채우려고, 現在는 解體된 서울 현대高等學校 女子축구팀을 創團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努力 等으로 人한女 2010年 9月 26日 大韓民國 17歲 女子 蹴球 國家代表팀 FIFA U-17 女子 월드컵 에서 優勝을 한 밑거름은 鄭夢準과 現代價의 支援 德分이라는 評價가 있다. [34]

FIFA 活動 [ 編輯 ]

1994年 5月 FIFA 副會長에 當選된 정몽준은 2007年 選出까지 4番 FIFA 副會長에 選出되었고 [35] , 4番째 副會長 任期가 마쳐진 해인 2011年 3月 3日에는 스위스 취리히 에서 열린 執行委員會 會議에서 지난 17年間 世界蹴球發展에 이바지한 功勞가 認定되어 FIFA 名譽副會長에 推戴되었으며 [36] , 이는 6月 1日 열린 第61次 FIFA 定期總會에서 承認되었다. [37]

1997年 5月 31日 정몽준은 FIFA 미디어 委員會 委員長에 選任되었으며 [38] , 2007年 6月 28日에는 FIFA 올림픽組織委員會 委員長에 選出되었다. [39]

2015年 7月 21日 그는 FIFA 會長 出馬를 宣言하였다.

일화 [ 編輯 ]

버스料金 70원 發言 [ 編輯 ]

2008年 6月 27日 KBS1에 放送된 라디오에서 한나라당 공성진 議員으로부터 "庶民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 基本料金이 얼마인지 아시나요?"라는 質問에 "요즘은 카드로 타는데 한 番 탈 때 70원 하나요?"라고 答하였다. [40] [41] 發言 後 論難이 일자 정몽준은 自身의 홈페이지를 통하여 "마을 버스를 利用하며 料金이 700원이었던 것으로 記憶 하는데 그것을 70원으로 錯覺했다"며 解明하였다. 이어 그는 "事實 一般버스 料金에 對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며 "庶民 物價를 알아보기 위해 在來市場에서 일부러 物件도 사보고 하지만 不足한 點이 많다"고 解明하였다. [42] 以後 정몽준은 交通카드 機能을 갖춘 信用카드를 장만하고, 間或 大衆交通을 利用한 것으로 알려졌다. [43]

2002年 南北蹴球競技日 朴槿惠의 抗議와 鄭夢準의 答辯 [ 編輯 ]

  • 정몽준은 2011年 9月 6日 出刊한 自身의 自敍傳 《나의 挑戰 나의 熱情》을 통하여 自身이 살아오면서 겪을 逸話들을 公開하였다. 그 中 한나라黨 의 前 代表인 朴槿惠 와의 逸話도 있는데, 일화의 內容은 박근혜가 2002年 9月 南北蹴球競技 當日 競技場 에 먼저 와있었는데, 정몽준을 보더니 화난 얼굴로 왜 約束을 지키지 않느냐며 抗議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정몽준은 朴槿惠의 抗議가 무슨 소리인가 하였는데, 朴槿惠의 項의 內容은 "觀衆들이 韓半島旗를 들기로 했는데 왜 太極旗를 들었느냐는 것", "競技 始作 前 붉은 惡魔가 `大韓民國'을 외치자 朴槿惠는 口號로 `統一祖國'을 외치기로 했는데 왜 約束을 지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44] 이에 정몽준은 "觀衆들은 蹴球協會 職員이 아니고, 自己 내고 들어온 사람들한테 太極旗 를 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等의 答을 했다고 한다. [45]

새千年民主黨 候補 노무현에 對한 支持 撤回 [ 編輯 ]

  • 정몽준은 2002年 大選 當時 새千年民主黨 의 候補였던 盧武鉉 과 候補 單一化를 하였는데, 大統領 投票日 하루 前날인 2002年 12月 18日 노무현에 對한 支持를 撤回하였다. 정몽준은 自敍傳을 통하여 "20餘年間 政治人生에서 나를 힘들게 한 때는 2002年 大統領 選擧 마지막 瞬間 盧武鉉 前 大統領에 對한 支持를 撤回하던 밤"이라고 밝혔다. 정몽준은 또 노무현에 對한 支持 撤回를 한 理由에 對하여서는 아래와 같이 밝혔다.

"單一化는 했지만, `反美(反美)면 어떠냐'는 노무현 候補의 認識이 바뀌어야만 (共同遊說에) 合流할 수 있다고 剛하게 主張했다", "10餘日間 協商을 벌인 끝에 韓美 關係에 있어서만큼은 盧 候補 쪽이 우리 立場을 따르기로 했다", "盧 候補 陣營의 脆弱한 外交ㆍ安保 分野를 우리가 補完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以後 盧 候補 側에서 나를 `國政同伴者'라고 表現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大選 前날 鳴動과 鍾路 遊說에서 `國政同伴者'에 對한 信賴가 깨졌다고 밝혔다.", "鳴動 遊說에서 盧 候補는 `北韓과 美國이 싸우면 우리가 말리겠다'는 말을 하며 우리 쪽과 合意한 基本原則을 完全히 뒤집었다", "鍾路 遊說에서 盧 候補가 정동영 議員을 데리고 (壇上에) 올라갔다. 單一化와 共同政府를 나타내는 나와 盧 候補의 協力 모습은 사라지고, 盧 候補를 兩옆의 두 사람이 떠받드는 異常한 模樣이 演出됐다"

以後 정몽준은 노무현에 對한 支持를 撤回하였고, 정몽준은 支持 撤回 以後의 狀況에 對하여서는 아래와 같이 밝히었다.

"支持 撤回 後 나는 다음해 2月 初 현대전자 株價造作 事件으로 檢察 調査를 받았다", "또한 내가 株主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盧 大統領 在任 中 4個月 以上 稅務査察을 받았다" [44]

김대중 政權 時節 對北 送金 反對 [ 編輯 ]

  • 정몽준은 自身의 自敍傳인 《나의 挑戰 나의 熱情》을 통하여 김대중 政府 時節 現代 의 對北事業 關聯 人士들이 現代重工業 財政 擔當 任員을 불러 "현대중공업에서 몇億 달러를 내놓으라"고 要求한 事實을 公開하였다. 정몽준은 瞬間 "瞬間 南北頂上會談을 위해 北韓에 보낼 돈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이틀 後 靑瓦臺 高位 人士를 만나 `會社 돈을 보내면 祕密이 지켜지겠느냐. 金大中 大統領을 이렇게 모시면 안된다'고 했으며, 새千年民主黨 李海瓚 政策위議長을 만나서도 같은 얘기를 했다"고 밝히었다. 정몽준은 "結局 현대중공업에서 資金이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 현대상선 資金이 使用됐다"며 "退任 直前 金大中 前 大統領은 談話를 통해 모든 責任을 現代에 떠넘겼다"고 述懷하였다. [44]

大學生 時節 武器停學 [ 編輯 ]

정몽준은 서울대학교 在學時節 該當學期 科目 受講 取消 및 無期停學 處分을 받은 바 있다. 정몽준은 1970年 서울大學校 1學年 2學期 ‘文化史’ 敎養科目 期末考査에서 他 學友의 答案을 어깨 너머로 훔쳐보다 摘發되어, 懲戒委員會에 回附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大學을 1年 더 다녀야 했다. 동아일보 取材陣에 “試驗을 빨리 끝내고 놀러가겠다는 들뜬 氣分에서 저지른 衝動的인 일이었다”고 吐露했다. [46]

論難 [ 編輯 ]

. 記事의 內容은 정몽준이 自身의 自敍傳의 販賣 實績을 올리기 위하여 그룹과 財團 쪽 任職員에게 文化商品券을 大量으로 나눠주어 冊을 사오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內容이다의심을 받지 않도록) 冊을 나눠 사도록 要領을 알려주고, 산 冊을 도로 領收證과 함께 會社에 返納하게 했다”, “지난 17日 永登浦 교보문고에서 열린 鄭 議員의 著者 사인會에도 現代重工業그룹社 職員들이 動員됐다”}}

그리고 取材 中 敎保文庫 光化門店에서 한 男性이 鄭夢準의 自敍傳을 大量으로 購入한 事實도 報道 하였다. [47]

外統委 國政監査 中 敬語 未使用 叱咤 [ 編輯 ]

2011年 9月 19日 정몽준은 外交通商部 를 對象으로 한 國會 外交通商統一委員會 國政監査에서 外交通商部 長官인 김성환 에게 質疑하던 中 敬語 를 使用하지 않고 叱咤를 하여 論難이 일었다. 論難의 內容은 外統委 國政感謝狀에서 정몽준이 外通部 長官 김성환에게 2012年 3月 大韓民國 서울 에서 開催될 核安保頂上會議 에 對해 質疑하면서 發生하였는데, 정몽준은 김성환에게 質疑 中 아래와 같이 發言하였다.

"大統領이 北韓 김정일 國防委員長을 會議에 招請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매우 敏感한 發言", "萬若 金 委員長이 온다면 總選을 앞두고 南北頂上會談을 開催하려 한다는 誤解를 살 수 있고 反對로 안 오면 空然한 말로 信賴度에 損傷이 가는 것" [48] “이는 長官이 大統領을 잘못 補佐하는 것” [49]

그리고 정몽준은 核安保頂上會議의 開催時期에 對해서 김성환에게 다음과 같이 質疑 中 發言하였다.

“核安保頂上會議는 G20 會議라고 봐도 無妨”, “이런 會議를 總選 直前에 하는 게 옳느냐” [50] , “처음부터 아예 核安保頂上會議 時期를 總選 以後로 잡았어야 한다”, “버락 오바마 美國 大統領의 日程을 考慮해 3月 末로 잡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主催하는 行事의 日程도 못 定해 總選 選擧運動 期間에 하는 것은 國家의 尊嚴性을 우습게 만드는 것" [48] “核安保頂上會議 날짜를 定한 것이 一年은 된 것 같은데 우리 行事를 우리가 決定하지 못하는게 말이 되느냐” [50]

또 정몽준은 與黨인 한나라黨 議員임에도 不拘하고 政府를 叱咤하는 것에 對하여

“健康한 國家를 위해 與野가 行政府를 牽制해야 한다” [50]

라고 밝혔고, 鄭夢準의 質疑에 對해 김성환은 아래와 같이 答辯을 하였으며,

“國內 選擧 日程과 效率性을 가지고 定한 것이다. 國內政治에 影響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50]

정몽준은 김성환에 答辯에 對하여 敬語를 使用하지 않고 아래와 같이 發言하였다.

“그게 무슨 詭辯이야”, “날짜를 定한 게 언제야”, “왜 總選 法定選擧 運動 期間에 끼워넣은 거야, 그게 常識에 맞아” [48] , “選擧期間에 G20 하는게 말이 돼?”, “어떻게 選擧期間에 하겠다는 거야. 行使하는게 자랑이 아니야” [50] , “美國이 萬若 重要한 選擧가 있다면 그랬겠어” [51]

이런 發言 對해 論難이 일자 정몽준은 午後 補充質疑 때 아래와 같이 김성환에게 公式 謝過하였다.

"午前 質疑 때 거친 表現으로 缺禮를 해 未安하게 생각한다", "平素 長官과 隔意 없이 지내다 보니 表現이 지나쳤다", "제가 正式으로 謝過를 드린다" [52]

막내아들의 페이스북 發言 [ 編輯 ]

2014年 4月 18日, 歲月號 沈沒 事故 에 對해, 鄭夢準의 막내아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發言이 問題가 되었다. 그는 事故 이틀 後인 4月 18日 自身의 페이스북 에서 "大統領에 소리 지르고 辱하고 國務總理에 물洗禮. 國民 情緖 自體가 宏壯히 未開"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지난 17日 一部 失踪者 家族이 珍島 室內體育館을 訪問한 鄭烘原 國務總理에게 生水甁을 던진 것에 對한 글로 보인다. [53] 이에 對해 非難輿論이 日子 정몽준 議員은 21日 午前 國會 정론관에서 記者會見을 열고 "國民 여러분께 다시 한 番 眞心으로 謝罪드린다"라고 말했다. [54]

사죄드립니다

遺家族과 失踪者 家族 여러분, 그리고 國民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謝罪드립니다.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짓에 아버지로서 罪悚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反省하고 謹愼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不察입니다.

이番 일로 마음의 傷處를 입으신 遺家族과 失踪者 家族, 그리고 國民 여러분께 다시 한 番 眞心으로 謝罪드립니다.

2014. 4. 21.

情 몽 준 올림 [55]

막내아들 事件 以後 鄭夢準 夫人의 發言 [ 編輯 ]

4月 21日에 정몽준이 아들의 不適切한 發言으로 謝過한 지 約 한 달 餘 만인 5月 11日, 한 인터넷 言論에서 鄭夢準 서울市長 새누리黨 競選候補의 夫人인 김영명의 막내아들 事件 以後에 서울의 한 黨協 事務室에서 했던 말이 알려져 論難이 되었다.

김영명 氏는 이 動映像에서 "막내가 일을 저지른 거 아시죠? 그 아이가 只今 지난番 大學街는 거 失敗하고, 再修生이다. '바른소리 했다'고 激勵해주시고 慰勞해주시긴 하는데, 時機가 안 좋았고, 어린아이다 보니까 말 選擇이 좀 안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對해 非難 輿論이 일자, 鄭夢準 競選候補의 이수희 代辯人은 論評을 내고, "年老한 한 參席者가 위로 次元의 말을 하자, 막내아들의 잘못을 强調하는 말을 한 것이며, 一部 인터넷 言論에서 '어휴.. 옳은 말 썼드만...'이라고 한 말을 金氏가 한 것처럼 報道해 歪曲 시켰다."고 說明했다. 이에 鄭夢準度 立場資料를 내고, "제 아내가 앞에서 謝過하고, 뒤에서 딴 말을 하는 二重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면서, "다시 한 番 謝罪드린다"고 덧붙였다. [56]

配偶者의 事前選擧運動 嫌疑 [ 編輯 ]

鄭夢準의 配偶者인 김영명氏는 公職選擧法 違反 嫌疑로 檢察에 告發을 當하였다.

서울 영등포警察署에 따르면, A氏는 金氏가 새누리黨 黨舍에서 代議員들에게 鄭 議員 支持를 呼訴하는 等의 不法 選擧運動을 했다고 主張하며 告發狀을 提出했다.

公職選擧法 上 國會議員이 地方自治團體長 選擧에 立候補를 하려면, 議員職에서 辭退해야 候補者로 登錄할 수 있지만, 當時 議員 身分이었던 정몽준은 豫備候補로 登錄하지 않아서 配偶者인 김영명氏에게는 選擧運動 資格이 附與되지 않았다. [57] 그 後 2014年 5月 11日 한 인터넷 言論에서 公開된 動映像에 따르면 김영명氏는 이 發言을 하였다.

"서울을 正말 變化시키고, 發展시킬 候補는 정몽준 候補로, 정몽준 候補가 돼야 朴元淳 市長에게 競爭力이 있다."

이 發言에 對해서도 5月 9日에 不法選擧 運動 嫌疑로 警察에 告發된 以後에도 鄭夢準의 支持를 呼訴한 게 아니냐는 論難이 提起되었다.

略歷 [ 編輯 ]

  • 1982年: 現代重工業 社長
  • 1983年: 大韓洋弓協會 會長
  • 1983年: 蔚山大學校 理事長
  • 1984年: 失業테니스聯盟 會長
  • 1987年: 現代重工業 會長
  • 1988年: 第13代 慶尙南道 蔚山 東區 國會議員
  • 1990年: 現代學院 理事長
  • 1990年: 現代經濟社會硏究院 會長
  • 1992年: 第14代 慶尙南道 蔚山東區 國會議員
  • 1993年 1月~2009年 1月: 대한축구협회 會長
  • 1994年~2011年 1月: 國際蹴球聯盟 副會長
  • 1995年: 美國 존스홉킨스대學校 財團 理事
  • 1996年: 第15代 慶尙南道 蔚山東區 國會議員
  • 1997年: FIFA 미디어委員長
  • 1997年: 韓國外國語大學校 國際地域大學院 特別招聘敎授
  • 1998年: 韓國유네스코協會聯盟 會長
  • 1998年: 명지대학교 名譽博士
  • 1999年: 慶熙大學校 體育大學院 兼任敎授
  • 1999年: 高麗大學校 境域大學 碩座敎授
  • 1999年: 學校法人 고려중앙학원 財團理事
  • 2000年: 21世紀 平和財團 理事
  • 2000年: 第16代 蔚山廣域市 東區 國會議員
  • 2000年: 2002 월드컵 蹴球大會 組織委員會 共同委員長
  • 2001年~: 美國 아시아 소사이어티財團 理事
  • 2001年~: 牙山財團 理事長
  • 2004年~2008年 5月: 第17代 蔚山廣域市 東區 國會議員
  • 2004年: 東아시아蹴球聯盟 會長
  • 2005年: 第50代 대한축구협회 會長
  • 2007年 6月: FIFA 올림픽組織委員會 委員長
  • 2008年 1月~2009年 9月: 한나라당 最高委員
  • 2008年 5月~2012年 2月: 第18代 서울特別市 동작구을 國會議員
  • 2008年: 第18代 國會 韓美協議會 會長
  • 2008年: 國會 統一外交通商委員會 委員
  • 2009年 1月~: 대한축구협회 名譽會長
  • 2009年 9月~2010年 6月: 한나라당 代表 最高委員
  • 2011年 6月~: 國際蹴球聯盟 名譽副會長
  • 2011年 10月~: 牙山나눔財團 名譽理事長
  • 2012年 2月~2014年 5月: 第19代 서울特別市 동작구을 國會議員
  • 2012年 7月: 第19代 國會 保健福祉委員會 委員
  • 새누리당 中央選擧對策委員會 共同委員長
  • 2014年: 蔚山 현대 球團主
  • 現代重工業 , 現代重工業持株 最大株主 現代重工業그룹 會長
  • 2018年 1月~2026年 1月: 學校法人 現代學院 名譽理事長

受賞 [ 編輯 ]

  • 1983年 새마을勳章 노력장
  • 1984年 體育勳章 猛虎章
  • 1988年 올림픽 誘致 功勞包裝
  • 1995年 아이보리코스트 體育勳章
  • 1997年 體育勳章 靑龍狀
  • 2002年 國民勳章 無窮花章
  • 2009年 말레이시아 다투 爵位
  • 2010年 南美蹴球聯盟 最高 勳章
  • 2012年 몽골 政府 北極星 勳章
  • 2013年 獨逸 政府 大十字 功勞 勳章

家族 關係 [ 編輯 ]

  • 할아버지: 정봉식
  • 할머니: 한성실
    • 아버지: 鄭周永 (1915~2001) 現代그룹 名譽會長
    • 어머니: 변중석 (1921~2007)
      • 兄: 정몽필 (1936~1982)
      • 兄嫂: 이양자(1943~1991)
        • 조카: 정은희(1971~)
        • 조카: 정유희(1973~)
      • 兄: 鄭夢九 (1938~) 현대자동차그룹 會長
      • 兄嫂: 이정화(1939~2009)
      • 兄: 정몽근 (1942~)
      • 兄嫂: 우경숙(1951~)
        • 조카: 정지선 (1972~)
        • 조카: 정교선(1974~)
      • 누나: 정경희(1944~)
      • 妹兄: 정희영(1940~)
      • 兄: 정몽우 (1945~1990)
      • 兄嫂: 履行者(1945~)
        • 조카: 정일선(1970~)
        • 조카: 正門線(1974~)
        • 조카: 鄭大選(1977~)
      • 兄: 정몽헌 (1948~2003) 現代그룹 前 會長
      • 兄嫂: 현정은 (1955~) 現代그룹 會長
        • 조카: 정지이(1977~)
        • 조카: 정영이(1984~)
        • 조카: 정영선(1985~)
      • 配偶者: 김영명(1956~)
      • 동생: 정몽윤 (1955~)
      • 祭需: 김혜영(1961~)
        • 조카: 訂正이(1984~)
        • 조카: 鄭敬善(1986~)
      • 동생: 정몽일 (1959~)
      • 祭需: 권준희(1962~)
        • 조카: 정현선(1989~)
        • 조카: 正門이(1991~)
        • 동생: 정정인(1979~)
        • 동생: 정정임(1981~)
    • 叔父: 정인영 (1920~2006)
    • 叔父: 정순영 (1922~2005)
    • 姑母: 정희영(1925~2015)
    • 姑叔: 金榮珠(1920~2010)
    • 叔父: 정세영 (1928~2005)
    • 叔父: 정신영(1931~1962)
    • 叔父: 정상영 (1936~2021)

[58]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88年 總選 13代 國會議員 慶南 蔚山市 東區 無所屬 40,253 票
54.35%
1位 初選
1992年 總選 14代 國會議員 慶南 蔚山市 東區 통일국민당 61,263 票
71.14%
1位 再選
1996年 總選 15代 國會議員 慶南 蔚山市 東區 無所屬 55,697 票
71.00%
1位 3選
2000年 總選 16代 國會議員 蔚山 東區 無所屬 51,346 票
61.48%
1位 4選
2004年 總選 17代 國會議員 蔚山 東區 國民統合21 56,851 票
65.22%
1位 5線
2008年 總選 18代 國會議員 서울 銅雀區 을 한나라黨 47,521 票
54.41%
1位 6線
2012年 總選 19代 國會議員 서울 銅雀區 을 새누리黨 46,480 票
50.80%
1位 7線
2014年 地方 選擧 36代 市場 서울特別市 새누리黨 2,109,869 票
43.03%
2位 落選 民選 6期

各州 [ 編輯 ]

  1. 鄭夢準 - 大韓民國헌정회
  2. 錚錚한 人士들의 ‘親睦 네트워크’ 소망교회 , 中央Sunday
  3. “<搖動치는 選擧 판勢, 서울을 잡아라 2彈 ? 候補들의 말 속에 나타난 核心公約>, newsjelly, (2014年 5月 25日)” . 2015年 6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4月 16日에 確認함 .  
  4. ''草原福집'' 事件 道廳搜査 檢察에 參考될까 :: 네이버 뉴스
  5. 박창식, 신승근 (2002年 11月 12日). “後단협 속내는 '盧候補 落馬 ' . 한겨레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박창식, 신승근 (2002年 12月 19日). “後段協議 目的은 '候補單一化'가 아니었다.” . 오마이뉴스. 2012年 3月 2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7. 남기현 (2002年 11月 20日). “後단협 純粹性 도마 위에” . 每日經濟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8. 김현재 (2002年 11月 26日). “後단협 12名 民主 復黨” . 파이낸셜 뉴스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9. 맹찬형 (2002年 12月 19日). “候補單一化에서 破棄까지(종합)” . 聯合뉴스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0. “候補單一化에서 破棄까지” . 聯合뉴스. 2002年 12月 19日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1. 김현재 (2002年 11月 5日). “候補單一化 方法論과 展望” . 聯合뉴스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2. 김현재 (2002年 11月 22日). “盧 單一化 `勝負手" 안팎” . 聯合뉴스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3. 金宜謙, 李容鎬 (2002年 12月 5日). “勝負師 盧武鉉 마침내 해냈다” . 《한겨레21》 436 . 2011年 11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4. 김현재 (2002年 11月 25日). “피말린 接戰 盧勝利 結末” . 聯合뉴스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5. 김선주 (2007年 11月 18日). “<大選 D-30>政治테러 警戒令…歷代 大選테러 事例” . 뉴시스. 2014年 1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6. “統合21 支持撤回 發表文” . 聯合뉴스. 2002年 12月 19日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7. 김종우 (2002年 12月 19日). “深夜會同 決裂 안팎(綜合)” . 聯合뉴스 . 2010年 4月 22日에 確認함 .  
  18. 박희태 代表 辭退...鄭夢準號 出帆 데일리 政經 뉴스, 2009年 9月 7日
  19. 李明博 大統領-정몽준 代表 첫 黨靑會同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 “MJ “北核 合理的”에… 親朴 重鎭間 ‘舌戰’” . 2011年 11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0月 8日에 確認함 .  
  21. “鄭夢準, 地方選擧 敗北 責任 電擊辭退(2報)” . 聯合뉴스 政治. 2010年 6月 3日.  
  22. “鄭夢準 辭退, 民主黨 "與野關係 回復위해 努力한 사람 " . 뉴스웨이 政治. 2010年 6月 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3. “鄭夢準 議員 5000億원 規模 財團 設立…네티즌 關心도 높아” . 韓國經濟 政治. 2011年 8月 16日.  
  24. “犯 現代家, 5千億 規模 社會財團 만든다(종합)” . 聯合뉴스 經濟. 2011年 8月 15日.  
  25. “蹴協(畜協)會長 鄭夢準(鄭夢準)氏” . 京鄕新聞. 1993年 1月 1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6. " 2002年 월드컵誘致" 鄭夢準(鄭夢準)會長 再確認” . 每日經濟. 1993年 11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7. “鄭(正)몽준會長 FIFA派遣副會長 出馬檢討” . 京鄕新聞. 1993年 11月 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8. “鄭夢準(鄭夢準) 對한蹴協(축협)회장 FIFA副會長 被選” . 東亞日報. 1994年 5月 14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9. “월드컵 韓(韓)·日(일) 共同開催” . 京鄕新聞. 1996年 6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0. “월드컵 한국조직위腸 李東燦(이동찬)氏 選任” . 東亞日報. 1996年 12月 3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1. ' 타임'아시아 次世代指導者 정몽준氏 選定” . 每日經濟. 1997年 10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2. “鄭夢準 蹴球協會長 告別人事 “幸福한 16年 보냈다”” . 서울신문 스포츠. 2009年 1月 3日.  
  33. ' 94 스포츠 파노라마 (1) 蹴球 정몽준會長 41億支院 最高” . 京鄕新聞. 1994年 12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4. “女子蹴球 世界制霸..현대家 18年 投資도 一助” . 聯合뉴스 스포츠. 2010年 9月 27日.  
  35. “鄭夢準, FIFA 아시아大陸 副會長 再選.. 4線 成功” . 聯合뉴스 스포츠. 2007年 5月 8日.  
  36. “鄭夢準, FIFA 名譽副會長 推戴(綜合)” . 聯合뉴스 스포츠. 2011年 3月 4日.  
  37. “FIFA, 鄭夢準 名譽副會長 推戴 承認” . 聯合뉴스 스포츠. 2011年 6月 2日.  
  38. “FIFA 미디어委長(僞裝) 鄭夢準(鄭夢準)氏” . 東亞日報. 1997年 6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9. “鄭夢準 會長, FIFA 올림픽組織委員長 選出” . 뉴시스 스포츠. 2007年 6月 28日.  
  40. “鄭夢準 最高委員 “버스비 70원 하나요?”” . 파이넨셜뉴스. 2008年 6月 28日 . 2009年 9月 15日에 確認함 .  
  41. 發言 動映像
  42. “鄭夢準 "700원을 70원으로 錯覺 " . 뷰스앤뉴스. 2008年 6月 28日 . 2009年 9月 15日에 確認함 .  
  43. 김범현 記者 (2009年 9月 22日). “鄭夢準, `車없는 날' 大衆交通 出勤” . 聯合뉴스 . 2010年 5月 14日에 確認함 .  
  44. " 朴槿惠, 南北蹴球서 太極旗 들었다고 抗議"(綜合)” . 聯合뉴스. 2011年 9月 4日.  
  45. ' 大韓民國' 외치자 朴槿惠 "왜 約束 지키지 않느냐" 抗議” . 노컷뉴스. 2011年 9月 4日.  
  46. “[Who Is ?] 鄭夢準 새누리黨 議員” . 비즈니스포스트 인사이드. 2014年 8月 18日.  
  47. “鄭夢準 自敍傳 現代重 職員 動員 ‘사재기’” . 한겨레 社會. 2011年 10月 2日.  
  48. “鄭夢準, 김성환 長官에게 “그게 무슨 詭辯이야” 半말 論難” . TV리포트. 2011年 9月 19日.  
  49. “[18代 國會 마지막 國監] “그게 常識에 맞아” “무슨 詭辯이야”… 鄭夢準 또 막말” . 國民日報. 2011年 9月 19日.  
  50. “鄭夢準 “只今 詭辯 늘어놓는 거야?” 半말 國監” . 데일리안. 2011年 9月 19日.  
  51. “[國政監査] 與는 半말, 野는 호통… 魂쭐 난 金外交” . 서울新聞. 2011年 9月 20日.  
  52. “<國監現場> MJ "그게 무슨 詭辯이야"(종합)” . 聯合뉴스. 2011年 9月 19日.  
  53. 정몽준 아들, 세월호 失踪者 家族 卑下 '衝擊'…"國民 情緖가 未開해서" - 韓國經濟TV 뉴스사이트, 2014年 4月 21日 揭載
  54. '아들의 失踪者 家族 未開 發言' 沙果...고개숙인 鄭夢準 - 오마이뉴스 政治 카테고리, 2014年 4月 21日 作成
  55. 정몽준 議員 謝過文 專門 - 한겨레新聞 홈페이지 政治 카테고리, 2014年 4月 21日 作成
  56. 鄭夢準 否認 "아들 發言 時期 안좋았다" 言及 論難 - 聯合뉴스 뉴스사이트, 2014年 5月 11日 揭載
  57. 鄭夢準 否認 '不法 選擧運動' 告發當해 - 聯合뉴스 2014年 5月 10日 揭載
  58. [財閥家族社 鄭周永 현대그룹 創業主 2013-05-15]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金宇中
第47~50代 대한축구협회 會長
1993年 1月 12日~2009年 2月 22日
後任
조중연
前任
非아체슬라 콜로소프
國際蹴球聯盟 副會長
1994年 5月 13日~2011年 1月 6日
後任
알리 빈 알 후세인
前任
박희태
第9代 한나라黨 代表最高委員
2009年 9月 7日~2010年 6月 3日
後任
安商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