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 扁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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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 扁氏
浙江片氏
나라 韓國
貫鄕 浙江省
時調 便갈송(片碣頌)
集姓村 서울特別市
平壤直轄市
忠淸南道 泰安郡 安眠邑 창기리
黃海道 平山郡
主要 人物 便令票 , 編成臺 , 편운태 , 便坐言 , 編戶益 , 편강렬 , 편무경 , 편광우 , 편상욱 , 편혜영 , 便문성 , 편승엽 , 편준범 , 便해랑
人口(2000年) 10,678名 (352位)

절강 扁氏 (浙江片氏)는 浙江省 을 本館으로 하는 韓國의 姓氏 이다. [1] 時調는 便갈송 (片碣頌)이며, 그는 丁酉再亂 明나라 提督中軍으로 朝鮮 에 東萊 하였다.

歷史 [ 編輯 ]

時調는 便갈송 (片碣頌)이며, 그의 者(字)는 경수(景修), 號(號)는 模헌(慕軒)이다. 中國 唐나라 皇族 外戚의 後孫이라고 한다. [2] 明나라 新種 兆에 語洋銃節祀 [3] 가 되었고 壬辰倭亂 때 桐정명군總兵士 [4] , 丁酉再亂 當時, 제독군문섭병부상서중군제독으로 큰 功을 세웠다. 戰亂이 끝난 後 奸臣 정응태의 誣告로 歸國하지 못하고, 慶州市 金烏山에 들어가 隱居하였다. 이 消息을 들은 아들 篇風勢, 便풍원, 便散步 3兄弟가 金烏山으로 가서 아버지를 奉養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世上을 등진 後였다. 아버지를 安葬한 後 便風勢와 便풍원은 全羅道 羅州市 로, 偏産보는 全羅道 만경읍 으로 가서 世居하였다.

편갈송의 宣祖는 절강 사람으로 高調 할아버지 便紙는 明나라에서 太子太師를 歷任했으며 元來는 唐나라 皇室의 李氏의 宗親이었으나 賃金에 對한 忠情을 認定받아 一片丹心의 편자를 性으로 下賜 받았으며 曾祖 할아버지 便일은 絶江百에 封해졌다고 한다. 走者 의 靑年 時節부터 10年間 스승인 移通 (이연평) 또한 宣祖이다. 移通은 朱熹 (走者)의 7年間의 對話와 書信을 記錄한 延坪答問 等을 남겼으며, 走者는 耳痛을 配享하였다, 이통은 나중에 孔子廟에 配享된다. 走者는 "延坪 先生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 悽慘한 心情이 되었고, 나의 깨달음을 延坪(移通) 先生에게 묻지 못함이 恨이 된다."라고 하였다.

時調 편갈송은 蔚山 서생포 窓票當에 配享되었으며, 200餘 年이 지나 功績이 傳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全羅道 儒林의 啓請으로 羅州에 감名詞를 세워 공을 기렸다. 편갈송은 壬辰倭亂 丁酉再亂 때 平壤城과 전주성을 되찾고, 南原과 海南郡을 包含한 全羅道 地域과 慶州를 收復하고 蔚山 서생포倭城을 奪還하였다. 忠淸道 직산면 소사평에 세워진 〈欽差 兵部尙書 總督 提督軍門 便갈송 勝捷碑〉와 《門所萬綠》에는 편갈송의 稷山戰鬪 勝利가 記錄되어 있다. 소사평 戰鬪에서 여섯 番 連續으로 勝利한 어양部隊가 편갈송의 軍隊이다. 朝鮮에 있던 照明 聯合軍의 勝捷碑는 日帝가 모조리 뽑아 버렸다. 편갈송은 桐정명군總病死로 二萬五千餘 兵力의 節姜君을 이끌고 參戰한다. 마지막까지 朝鮮에서 倭敵과 싸우고 돌아가지 못한 名將들의 이름이 새겨진 同情勝捷碑門 [5]

中軍 除毒 便갈송 麾下의 中軍 水軍 이천상 陽川尹 勞得 卜日勝 진잠 等은 李舜臣 將軍과 함께 싸운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李舜臣 將軍 親筆 簡札을 보면 明나라 水軍들의 活動을 肯定的으로 評價하고 있다. 나중에 온 진린에 對한 評價와는 相反된다.

壬辰倭亂 丁酉再亂에서 功을 세워 先祖의 親書를 받고 朝鮮에 머물며 쓴 편갈송의 詩는 다음과 같다.

偶然히 처음으로 발디딘 이 땅, 해 돋는 東海가 바로 저긴데 끝없이 일렁이는 큰물결 작은 波濤 億劫의 歲月에 밀려왔는가 西北쪽엔 山들이 줄을 이으니 하늘 끝이 여기인가 의심스럽고 東南으론 바닷물이 하도 높으니 땅덩이가 그 위에 떠있는 것 같으이

歷代 人物의 事績을 모아놓은 冊인 《禁錮實技》 1905年(光武 9)奎章閣本意 忠勳에 편갈송이 실려있고 [6] , 哲宗 때 편갈송의 業績을 集大成한 《動員機略》이 있다. 도쿠토미 소호 가 壬辰倭亂을 硏究하려고 參考했던 朝鮮의 冊 目錄에 動員機略이 存在한다. [7]

本館 [ 編輯 ]

絶江은 中國 東南部 東海 沿岸에 位置하고 있으며, 揚子江 下流의 南部를 占하고 있다. 錢唐江에 依하여 東西로 나누어지고 杭州를 性度로 하고 있다. '姓氏의 發生社 및 氏族別 人物史'의 著者인 族譜學者 편홍기에 依하면, 大韓民國의 姓氏 250個 中 130個가 中國에 起源을 두고 있다고 한다. [8]

人物 [ 編輯 ]

  • 편동우
  • 便令票 (片永標, 1586年 ∼ 1638年): 朝鮮 中期의 義兵. 字는 형지이고, 號는 小恩이다. 都督 편갈송의 孫子이며, 明나라 英안태부 便풍원의 아들이다. 孝誠이 至極하고 膽力이 있었다. 丙子胡亂 이 일어나자 從兄인 編成臺는 和順에서 仁祖가 남한산성으로 避難하였다는 消息을 듣고서는, 皇恩에 報答할 機會라 여겨 羅州牧使 吳竣의 軍糧調達 約束을 받고 義兵을 募集하였다. 義兵을 금성산에서 訓鍊한 後에 從兄과 함께 淸州로 進軍하였을 때, 强化 消息을 듣고는 “하늘을 차마 볼 수 없다. 어찌 怨讐들과 한 하늘 아래 살겠는가” 하고 칼을 빼어 自決하였다. 忠淸道, 全羅道에서 界請하여 兵曹參議로 追贈되고 宣撫原從功臣으로 錄勳되었다.
  • 編成臺 (片成大, 1605年 ∼ 1673年): 朝鮮 中期 義兵. 者는 형복이高 號는 銀林이다. 全羅道 羅州郡 내동 出身이다. 祖父는 편갈송이며, 父親은 便風勢이다. 1636年(仁祖 14) 丙子胡亂 이 일어나 勤王兵을 募集한다는 檄文을 보고 義兵將 조수성을 찾아갔다. 이에 조수성은 그를 訓鍊大將 兼 督戰軍官에 임명하여 5萬餘 義兵을 訓鍊하게 하였다. 義兵을 이끌고 北上하다 淸州 서평원에서 淸나라 軍隊를 慘殺하여 戰功을 세웠다. 朝鮮 仁祖 가 降伏하였다는 消息을 듣고 痛哭하며 自決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以後 全羅道 和順 에 隱居하면서 '大名日月'을 座右銘으로 삼고 隱居하다가 享年 69歲로 世上을 떠났다. 事後 吏曹參判 에 追贈되었다.
  • 편운태 (片雲泰): 朝鮮 後期 儒學者. 文科에 及第하여 地平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鄕里로 돌아와 後學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 便坐言 (片佐彦): 朝鮮 高宗 때 定評府使, 함안郡守
  • 編戶益 (片鎬翊): 朝鮮 末期 儒生?義烈. 者는 基準이고, 號는 모명재이다. 地平인 편운태의 玄孫이다. 餘力再 장헌주의 아래에서 工夫하였고, 忠情公 閔泳煥, 勉庵 崔益鉉 等과 交遊하였으며, 水質로 好調參判을 받았다. 學問과 德行이 높아서 士林의 推重을 받았다. 日帝가 强制로 大韓帝國 을 倂合瑕疵, 晝夜로 痛哭을 하고 飮食을 全廢하다가, 흰 옷을 입고 흰 띠를 한 채 藥을 먹고 自決하였다.
  • 便軍船(片君善): 義兵들을 이끌고 鬪爭을 벌이다가 被逮되어 1910年 3月 絞首刑으로 殉國한 忠北 槐山 出身의 義兵將. 建國訓長 愛國章을 받았다.
  • 편강렬 (片康烈, 1892年 ~ 1929年): 獨立運動家
  • 편무경 (片茂景, 1893年 ∼ 1961年): 獨立運動家
  • 편혜영 (片惠英, 1972年 ~ ): 小說家

族譜 [ 編輯 ]

人口 [ 編輯 ]

便(片)氏의 人口 分布를 보면, 慶尙北道 金泉市 · 星州郡 · 聞慶市 等地에는 全羅南道 羅州市 에서 移住해 온 宗派의 6歲 後孫 約 160世代, 서울特別市 에는 90年 前 黃海道 延安郡 에서 移住해 온 13歲의 後孫, 忠淸南道 瑞山市 · 公州市 · 洪城郡 · 唐津市 等地에는 5歲의 後孫, 全羅南道 羅州市 · 務安郡 · 咸平郡 · 靈光郡 等地에는 2 ·3 ·4歲의 後孫 約 300餘 名이 居住하고 있다. 1930年度 國稅調査 當時 北韓에는 黃海道 평산 ·新溪 ·松花, 平南 平壤 ·按酒 ·寧邊 等地에 몇 家口씩 散在해 있었다.

扁氏는 2000年 大韓民國 統計廳 調査에서 慶州, 錦江, 金泉, 羅州, 南陽, 大戰, 만경, 密陽, 報恩, 夕講, 世宗, 水原, 順天, 身光, 安城, 洋酒, 언양, 領海, 宜寧, 利川, 仁川, 將星, 全州, 절강, 旌善, 昌原, 통진, 평해, 海州, 紅酒 等 總 29個 本館에 人口는 14,675名이었다. 이 中 절강 扁氏는 10,678名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절강 扁氏 - 韓國學中央硏究院
  2. 박기현 (2007年 3月 30日). 《우리 歷史를 바꾼 歸化 姓氏》 . 歷史醫아침. 219쪽. ISBN   9788995884928 . 2017年 5月 6日에 確認함 .  
  3. 明나라 首都 베이징 節祀들의 最高 大將. 節祀는 平時에는 學問과 武術을 익히다가 나라가 危急하면 召集되는 文武兼備韓 皇帝의 親衛部隊
  4. 同情名君의 總司令官
  5. 提督中軍섭兵部尙書 편갈송이 짓고 遊擊將軍 시문용이 썼으며, 關津相地官 杜思忠, 雲量사도總長 천만리, 總兵把摠 장해빈, 遊擊把摠 西學 等이 指示하여 세웠다.
  6. 《韓國民族文化大百科》〈禁錮實技〉項目
  7. “朝鮮을 求한 韓國姓氏” (PDF) . 2017年 12月 1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5月 6日에 確認함 .  
  8. 김태진 (1999年 9月 7日). “50年 硏究 '姓氏의 發生社…'出刊 族譜學者 便홍기옹” . 《中央日報》 . 2017年 5月 10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