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盧 요시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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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盧 요시나카
源 義仲
간논지(徳音寺) 소장 기소 요시나카 상(木曾義仲像)
間論旨(?音寺) 所長 起訴 요시나카 賞(木曾義仲像)
용담꽃과 왕대잎
龍膽꽃과 王대잎
無事 情報
時代 헤이안 時代 末期
出生 규週 (久?) 元年( 1154年 )
死亡 駐에이 (?永) 3年 1月 20日(陽曆 1184年 3月 4日 )
享年 31歲
改名 고마오마루(駒王丸), 요시나카
別名 起訴 요시나카(木曾義仲), 起訴 지로(木曾次?), 起訴노 카쟈(木曾冠者), 아사히 쇼군(朝日將軍, 또는 旭?軍 )
誡命 間論人氣山젠고(?音院義山宣公)
官位 宗사위下 , 座마두(左馬頭), 에치高 태수 (越後守, 에치고노카미 ), 俚謠 태수(伊予守, 이요노카미 )
貞洞大將軍 (征東大?軍)
氏族 세이와 겐지 (?和源氏) 料理要時流(?義流), 가와치 겐지(河?源氏)
父母 아버지: 미나모토盧 요시카打 (源義賢), 어머니: 遊女(遊女) 오키 高젠(小枝御前)
養父: 나카하라노 가네토誤 (中原兼遠)
兄弟姊妹 나카이에 (仲家), 미야기쿠히메 (宮菊?)
配偶者 첩: 도모에 高젠 (巴御前)?
子女 미나모토盧 요시카打(義高, 要視시게義重 또는 요시모토義基 ), 起訴 詩로 요시무네(木曾四?義宗)
墓所 사가縣 오쓰視 바바(馬場)의 아사히 산(朝日山) 기슈地(義仲寺)
교토시 히가시野마구 (東山?) 號칸地(法?寺) 舊비즈카(首塚)
나가노縣 (長野?) 起訴 軍(木?郡) 間論旨

미나모토盧 요시나카 ( 日本語 : 源 義仲 )는 日本 헤이안 時代 末期의 시나노 겐지(信濃源氏) 의 武裝이다. 가와치 겐지 의 一族인 미나모토盧 요시카打 (源義賢)의 둘째 아들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 요시쓰네(義經) 兄弟와는 四寸兄弟 之間이다. 起訴 요시나카 ( 日本語 : 木曾 義仲 )라는 通稱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談小說 《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에는 아사히 쇼군( 日本語 : 朝日將軍 , 또는 旭將軍으로도 쓴다 )으로 불리고 있다.

헤이케(平家) 打倒를 命하는 皇族 모치히吐 王 (以仁王)의 領地(令旨)를 받들어 擧兵, 교토에서 도망쳐 온 모치히吐 王의 아들을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로서 받들고 俱利伽羅 고개(?利伽羅峠)의 싸움에서 헤이케의 大君(大軍)을 擊破, 安土쿠(安德) 天皇 을 擁衛한 헤이케가 西쪽으로 빠져나가고 없는 교토에 요리토모보다 먼저 入城하였다. 當時 거듭되던 飢饉과 헤이시의 낭자함으로 荒廢해진 교토의 治安을 그가 회복시켜줄 거라 믿었던 朝廷의 期待와는 달리, 治安 維持에 失敗하고 大規模 群團이 교토에 머무르는 동안 食糧 事情마저 惡化된다. 여기에 皇位 繼承 問題에 介入하면서 當時 實權者였던 高시라카와 法皇(後白河法皇) 過度 不和하게 되었고, 法住寺(法住寺) 戰鬪로 法皇과 高토바 天皇(後鳥羽天皇) 을 幽閉하고 세이토다이쇼군(征東大將軍)으로 任命되었으나, 곧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보낸 미나모토盧 노리料理(源範賴) ? 요시쓰네 兄弟의 攻勢에 밀려 九里쓰(粟津)의 決戰에서 悲鳴에 갔다.

生涯 [ 編輯 ]

成長 [ 編輯 ]

가와치 겐지의 日文으로 道具다치와키센죠(東宮帶刀先生)을 지냈던 미나모토盧 요시카他意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兒名은 고마오마루(駒王丸). 어머니는 遊女(遊女)였다. 요시나카의 前半生에 對해서 史料는 言及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無事時局 (武??)의 오쿠라老타테(大?館) [1] 라는 傳承이 있는데, 아버지 요시타카가 살던 고즈케國 (上野?) 多護軍(多胡郡), 只今의 群馬 縣 (群馬?) 多盧 軍(多野郡)일 可能性이 있다.

《겐페이 盛衰基》(源平盛衰記)에 따르면 요시나카의 아버지인 요시카타는 그 兄인 요시토모 (義朝)와 對立하여, 요시토毛의 長男 요시히라(義平)에게 잡혀 죽었다( 오쿠라 合戰大?合? ). 要視히라는 이때 두 살에 不過했던 고마오마루도 죽이라는 命을 내렸지만, 고마오마루의 有婦(乳父)인 나카하라노 가네토(中原兼遠)가 어린 고마오마루를 안고 하타케야마 시게要視(?山重能) ? 사이토 社네謀利(?藤?盛) 等을 避해 시나노 國(信濃?)의 起訴타니(木曾谷) [2] 로 달아났다(《 아즈마카가미 》). 以後 가네토의 庇護 아래서 자라난 요시나카는 統稱을 起訴 지로(木曾次?)라 하였다. 이福 刑으로 미나모토노 나카이에(源仲家)가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 事後, 교토의 미나모토노 料理마사(源?政)의 養子로 들어갔다. 스와 다이샤(諏訪大社)의 傳承에는 한때 下士(下社)의 九地(宮司)였던 街나사侍奴 모리즈美(金刺盛澄)의 아래서 遂行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뒤에 데즈카 미쓰모리(手塚光盛) 같은 가나斜視 一族이 요시나카의 擧兵 初부터 나카하라 一族과 함께 요시나카의 心腹이 된 事實이 이 全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擧兵 [ 編輯 ]

지쇼 (治承) 4年( 1180年 ), 皇族 모치히吐 王子 (以仁王, 모치히吐誤 )가 全國의 겐지들에게 헤이케 打倒를 命하는 領地(令旨)를 내리고, 叔父 미나모토盧 유키이에(源行家)가 이 領地를 가지고 여러 拘泥(?)를 돌며 겐지들에게 擧兵을 呼訴하고 있었다. 하치調印노 句欄度(八?院?人)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던 兄 나카이에도 5月에 養아버지 料理馬社와 함께 모치히吐 王子의 擧兵에 加擔했고, 함께 우지(宇治)에서 戰死한다. 이 해 9月 7日, 요시나카는 軍勢를 거느리고 시나노 北部의 겐지 一族 救援에 나섰다가( 이치하라 合戰市原合? ) 그대로 아버지의 옛 領地였던 多호군이 있는 고즈케 國으로 向했다. 2個月 뒤에는 시나노 國으로 돌아와 오가타群(小?郡) 饒多 姓(依田城)에서 擧兵한다. 고즈케에서 시나노로 돌아간 것은 當時 요리토모를 支持하던 道稅 아시카가 氏(藤姓足利氏, 후지와라 氏 )와 衝突하는 것을 避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요시나카의 擧兵한 場所에 對해서도 그가 起訴타니에서 자랐으므로 自然스럽게 起訴타니에서 擧兵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겐페이 盛衰機》에도 시게노 유키치카(滋野行親)가 起訴타니의 山 아래 [3] 에서 兵士를 모았다는 技術이 있다. 그러나 理致視 시게키(一志茂樹)는 이 技術에 疑問을 품고 요시나카의 根據地는 시게노 氏(滋野氏) 집안의 本據地였던 東部 시나노의 니시우에노(西上野)였을 것으로 보았는데, 히媤누마 가쓰노리(菱沼一憲)도 뒤의 요코打 江邊(?田河原) 싸움에서 요시나카側에 加擔했던 起訴타니의 無事(起訴츄木曾衆)로서 星氏가 明確한 것은 나카하라노 가네토吳의 아들들뿐이고, 요시나카가 起訴타니에서 擧兵했다고 해도 本據地로 삼은 것은 사쿠(佐久)?오가타 2軍 및 니시우에노 一部 地域이고, 이치하라 캇센이나 요코打 江邊의 싸움도 이를 前提로 생각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이듬해인 지쇼 5年( 1181年 ) 6月에 오가타君의 시라토리街와라(白鳥河原)에서 起訴츄 ? 사쿠츄(佐久衆) ? 소슈츄(上州衆) 等으로부터 3千 基(騎)를 모은 요시나카는 에치高 국(越後?)에서 쳐들어온 죠 스케모치(城助職)를 요코打 江邊에서 맞아 擊破하고 곧바로 에치고에서 호쿠리쿠度(北陸道)로 進擊했다. 駐에이 (?永) 元年( 1182年 ), 호쿠리쿠로 도망쳐 온 모치히吐 王의 幼兒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를 擁護하면서 自身이 모치히吐 王의 擧兵을 이어받았다는 立場을 分明히 했다. 또한 요리토모와 結託하여 南部 시나노로 進出한 다케다 老父미쓰(武田信光) 等의 가이 겐지(甲斐源氏)와 衝突을 避하기 위해 요리토모 ? 老父미쓰의 勢力이 아직 미치지 않고 있던 호쿠리쿠로 勢力을 넓혔다.

駐에이 2年( 1183年 ) 2月 요리토모와 對立하다 敗한 시다 요시히로(志田義?)와 요리토모로부터 쫓겨 온 유키이에가 요시나카를 依支해 오면서 이 두 사람을 요시나카가 庇護한 일로,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사이는 惡化되었다. 또한 《헤이케 이야기》와 《겐페이 盛衰機》에는 다케다 老父미쓰가 딸을 요시나카의 嫡男(嫡男)인 요시타카(義高)에게 시집보내려다 拒絶當하자 怏心을 품고 '요시나카가 헤이케와 손잡고 요리토모를 치려 한다'고 中傷謀略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武力 衝突 直前에 艱辛히 和解가 成立되어, 3月에 요시타카를 人質로 가마쿠라(鎌倉)에 보냄으로써 요리토모와의 對立은 一段落되었다.

5月 11日, 엣츄 國 (越中?) 도나미 산(礪波山)의 俱利伽羅 고개(?利伽羅峠)에서의 戰鬪에서 요시나카는 10萬에 達하는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의 호쿠리쿠 追討軍(追討軍)을 쳐부수고, 시노하라(篠原)에서도 헤이시를 相對로 勝利를 거둔 뒤 途中에서 合流하는 武士들을 糾合해 破竹之勢로 교토로 進軍해 나갔다. 6月 10日에는 에치젠國 (越前?), 13日에는 誤美國 (近江?)을 거쳐 6月 末에 교토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關門이었던 엔랴쿠지 (延?寺)와의 交涉에 들어갔다. 右弼(右筆)이었던 多李候補 가쿠메이(大夫房?明)를 시켜 쓰게 한 帖裝(諜狀)에서 요시나카는 "헤이케를 따를 것인가, 겐지를 따를 것인가? 萬若 惡한 헤이시를 돕겠다면 우리는 僧侶들과 싸울 것이요, 戰鬪가 始作되면 엔랴쿠지는 瞬息間에 滅亡할 것이다."라는 脅迫이 담긴 最後通牒을 傳했고, 實際로 7月 22日에 銅塔(東塔) 所持人(?持院)에 城을 쌓았다. 여기에 미나모토盧 유키이에가 이가(伊賀) 方面에서, 야스다 요시社다(安田義定) 等 다른 겐지 勢力들이 교토로 밀려오는 가운데 셋쓰國 (?津?)의 겐지 勢力인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도 不溫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結局 헤이케는 교토를 버리고 25日에 安土쿠 天皇 (安?天皇)과 그 異腹 兄弟인 모리사다 親王(守貞親王)을 끼고 사이고쿠(西?)로 달아났다. 高시라카와 法皇은 미리 히에이 山 (比叡山)에 숨어 헤이케를 따라가지 않았다.

교토 入城 [ 編輯 ]

7月 27日, 高시라카와 法皇은 요시나카와 協力한 야마모토 요시쓰네(山本義?)의 아들 긴베노카쟈(錦部冠者) 요시타카(義高)의 護衛를 받으며 교토로 돌아왔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이 20餘 年間 보지 못하던 겐지의 흰 旗발이 오늘에야 비로소 교토로 들어오도다"라며 그 感懷를 적고 있다. 요시나카는 다음날인 28日에 교토로 들어와, 유키이에와 함께 렌게오인(蓮華王院)에 들어가 法皇을 謁見하고, 헤이시 追討를 名받는다. 그러나 30日에 열린 舊敎 議政(公卿議定)에서 勳功을 論함에 제1은 요리토모였고, 다음이 요시나카, 그 다음은 유키이에 順으로 順序가 確認되어 各其 位階(位階)와 林地가 주어졌다. 同時에 교토의 治安을 책임지는 任務가 요시나카에게 주어졌다. 요시나카는 교토에 들어온 同盟軍 武裝을 周圍에 配置하고 그 自身은 中心地인 구쥬(九重, 社쿄左京 )의 守護를 맡았다.

8月 10日에 論功行賞을 위해 열린 遲暮쿠(除目)에서 요시나카는 種5爲하 사바老카미(左馬頭) ? 에치高 태수(越後守, 에치고노카미 )를, 유키이에는 種5爲하 貧苦 태수 (備後守, 빈고노카미 )에 任命되었다. 16日에는 다시 요시나카를 俚謠 태수(伊予守, 이요노카미 ), 유키이에를 非젠 태수(備前守, 非젠老카미 )로 옮겼는데,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이때 요시나카가 아사히 쇼군(朝日將軍)이라는 稱號를 얻었고 요시나카와 유키이에가 저마다 赴任地에 不滿을 품었기 때문에 요시나카를 겐지 總領가(?領家)라는 緣故가 있는 이요로, 유키이에를 非젠으로 옮겼다고 했지만, 實際로 요시나카와의 差異를 들먹이며 不滿을 드러낸 것은 유키이에뿐 요시나카가 不滿을 드러낸 記錄은 없다.

王位 繼承 問題 介入 [ 編輯 ]

高시라카와 法皇은 天皇과 神奇 (神器)를 돌려줄 것을 헤이케에 要求했지만 헤이케는 이를 拒否했다. 結局 교토에 남아있던 다카쿠라 狀況 (高倉上皇)의 두 黃自認 산노미야(三之宮) 고레아키라 親王(惟明親王)과 욘노미야(四之宮) 다카나리 親王 (尊成親王) 가운데 한 사람을 擁立하기로 決定했는데, 이때 요시나카는 헤이케 打倒의 공은 自身이 支持하던 호쿠리쿠노미야에게 있고, 헤이케의 惡政이 아니었다면 모치히吐 王子가 卽位했을 것이므로 王子의 直系인 호쿠리쿠노미야를 卽位시키도록 히에이 山의 僧侶 슌料(俊堯)를 통해 調整에 執拗하게 提起해왔다. 하지만 親王이 두 名이나 있는데 그것을 無視하고 一介 王子의 아들에 不過한 호쿠리쿠노미야를 卽位시키자는 要請을 '嫡統'을 重視하는 調整이 받아들일 理가 없었다. "王子(王者)의 일은 法皇께서 정하실 問題이지, 臣下된 者가 어떻게 하라고 命할 일이 아니다"라고 指摘한 셋쇼(攝政) 構造 가네자네 (九條兼實)를 비롯한 朝廷의 舊敎들이나 法皇은 一介 武士가 王位 繼承 問題에 介入하려 드는 自體를 不快하게 여겼다. 요시나카를 牽制하기 위해 몇 次例에 걸쳐 點을 친 結果 8月 20日에 욘노미야가 卽位하였다(형인 山노미야를 제치고 욘노미야가 卽位한 것은 法皇의 寵妃였던 單고노 쓰步네丹後局의 베갯잇訟事가 크게 作用했다고 여겨진다). 傳統이나 格式을 重視하는 法皇이나 舊敎들에게 이 事件은 요시나카를 宮中의 政治나 文化, 歷史에 對한 知識과 敎養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無禮한 者'라는 認識만 심어주고 끝났다. 山골 僻地에서 자란 요시나카로서는 헤이케나 요리토모(어린 時節을 교토에서 보냈다)와는 달리 그런 것을 接할 機會가 全혀 없었던 것이다.

治安 回復 失敗 [ 編輯 ]

또한 요시나카는 교토 治安 維持 및 그 回復에도 失敗했다. 거듭되는 飢饉으로 인한 食糧 事情이 極度로 惡化된 교토에서 遠征으로 지쳐있던 武士들이 居住하는 동안, 이들에 依한 교토나 周邊에서의 掠奪 事件이 頻繁하게 일어났다. 9月에 이르러서는 "大體로 요즘 天下에 武士가 아닌 者는 하루 먹고 살 겨를조차 없다. 거듭 上下가 많이들 山골짜기 마을 같은 곳으로 달아난다고 한다. 四方이 모두 막혀서 基나이(畿內) 가까운 곳에 사람 그림자가 모두 사라지고 段步(段?) 하나 남은 것이 없다. 또한 교토 안의 山골 및 神社(神社)와 節, 사람이 사는 집도 모두 追捕(追捕)되었다. 壯元에서 바친 物品이 運좋게 首都로 올라오면 사람들은 그것이 많건 적건 相關없이 귀천(貴賤)의 體統도 가리지 않고 모두 갖고 갔다."(《교쿠요》)는 말까지 나올 程度였다. 교토 안의 수호군은 요시나카가 어릴 때부터 길러온 部下들이 아니라 유키이에나 야스다 요시社다, 오미 겐지(近江源氏) ? 미노 겐지(美濃源氏) ? 셋쓰 겐지(?津源氏) 等의 混成軍이었고, 그 가운데 요시나카가 가장 有力했을 뿐 全體를 統制할 수는 없었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治安 團束을 命하는 命令에 對해 "都城의 警備를 책임지고 있는 者가 말 한 疋씩 길러 타고 다니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하고 많은 田畓 가운데 벼 좀 베어다 말 먹일 풀로 썼다고 法皇께서 一一이 나무라시다니 말이 되는가? 軍糧米度 없고 해서 兵士들이 이따금씩 郊外로 나가 物件을 徵發해 오는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이란 말이냐? 大臣의 집이나 美야노고쇼(宮御所)에 侵入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고 요시나카가 不滿을 吐露한 發言이 記錄되어 있다.(《헤이케 이야기》는 이 發言을 法住寺 戰鬪 直前의 發言이라고 했지만 實際로는 治安이 問題가 되고 있던 9月의 일이 아닌가 推定된다) 19日, 高시라카와 法皇은 요시나카를 불러 "天下가 安定되지 않았고 또 헤이시가 아직 남아 健在하니 每事가 不便하다"며 꾸짖었다. 自身의 立場이 惡化되었음을 깨달은 요시나카는 곧바로 헤이시 追討에 나서겠다고 아뢰었고, 法皇은 親히 劍을 주어 出陣시켰다. 요시나카로서는 治安 維持 失敗로 잃은 自身의 信用 回復이나 資金 確保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戰果를 올려야만 했다. 요시나카는 心腹 히구치 街네미쓰(?口兼光)을 교토에 남기고 하리마國 으로 내려갔다.

高시라카와 法皇에 對한 抗議 [ 編輯 ]

요시나카가 出陣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리토모의 書信이 교토에 닿았다. 헤이케가 皇族 및 지샤(寺社)로부터 빼앗은 領地를 本來대로 主人인 皇族과 지샤에게 돌려줄 것과, 降伏하는 者에게는 罪를 묻지 않겠다는 요리토모의 書信은 "書信 하나하나가 요시나카 따위와는 比較도 안 되는 區나"라는 調整의 好評을 받았고, 10月 9日에 法皇은 요리토모의 本來의 棺위를 돌려주고 14日에는 이른바 '駐에이 2年 10月의 선지'를 내려, 도카이 (東海) ? 島山 (東山) 2度(道)의 여러 拘泥에 對한 事實上의 支配權까지 요리토모에게 주었다. 한便 요시나카는 西쪽에서 헤이케를 相對로 苦戰을 거듭해, 尹10月 1日에 헤이케와의 戰鬪인 미즈시마(水島)의 싸움에서 有力 武裝인 야다 요시키요(矢田義?)를 잃었다. 요리토모의 男동생이 大將軍이 되어 數萬의 軍勢를 거느리고 교토로 오고 있다는 情報를 듣고 놀란 요시나카는 헤이시와의 戰鬪를 끝내고 15日에 少數 軍勢를 거느리고 교토로 돌아왔다. 20日에 요시나카는 主上이 요리토모의 上京을 재촉한 것과 요리토모에게만 선지를 내린 것, 이 두 가지 일을 들어 "生의 큰 恨"이라며 高시라카와 法皇을 向해 激烈한 抗議를 보냈고, 요리토모 追討를 命하는 선지 및 文書를 내려줄 것과 시다 요시히로를 헤이시 追討使(平氏追討使)로 起用해줄 것을 要求했다. 이때 요시나카의 적은 이미 헤이시가 아닌 요리토모로 바뀌어 있었다. 19日에는 겐지 一族의 會合을 열어, 法皇을 받들고 간토로 進軍한다는 안을 내기까지 했다. 26日에는 高후쿠지의 僧兵들에게 요리토모 討伐의 名이 내려졌지만, 모두 유키이에와 도키 美쓰나가(土岐光長), 그리고 高후쿠지 僧兵들의 猛烈한 反對로 成事되지 않았다. 이때 요시나카의 指揮下에 있던 교토 수호군은 모두 瓦解된 狀態였고, 요시나카와 유키이에의 不和도 當然한 것이었다.

破裂 [ 編輯 ]

11月 4日, 미나모토盧 요시쓰네의 軍勢가 後와(布和) 關門까지 到達해 오자 요시나카는 요리토모軍과 勝敗를 결정지을 생각을 굳혔다. 한便 요리토모軍이 곧 入境할 것이라는 消息에 힘을 얻은 高시라카와 法皇은 요시나카를 교토에서 내쫓기 위해 요시나카軍에 맞설 戰力 增强을 圖謀했고, 요시나카는 요시쓰네가 少數만 거느리고 온다면 교토에 들어와도 좋다는 妥協案을 提示했지만, 法皇은 엔랴쿠지나 온죠지(園城寺)의 協力을 얻어서 僧兵이나 돌 던지는 浮浪民들을 모아서 도랑이며 木柵을 짓는 等 好슈지逃奴(法住寺殿)의 武裝化를 試圖했고, 나아가 요시나카側의 셋쓰 겐지 ? 미노 겐지 等을 我軍으로 끌어들여서 數的으로는 요시나카君을 훨씬 넘어섰다. 하지만 그 武力을 指揮할 總大將 미나모토盧 유키이에가 헤이케 追討를 위해 교토를 떠나 있는 狀態에서 數的으로 요시나카君을 充分히 이길 수 있다고 判斷한 法皇은 곧바로 "當場 西쪽으로 헤이케를 追討하러 가던지, 人센(院宣)을 어기고 요리토모軍과 싸우겠다면 선지 없이 혼자서 요리토모와 맞서라. 그대로 교토에 머무른다면 謀反으로 看做한다"는 最後 通牒을 요시나카에게 보냈다. 요시나카는 "主上을 등질 생각은 없습니다. 요리토모軍이 교토에 들어온다면 싸워야겠지만, 교토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西쪽으로 내려갈 것입니다."라는 對答을 보냈다(구조 가네자네는 이 일을 두고 "요시나카의 말은 圓滿한 答辯이었다. 人의 마음은 法에 지나친 것으로 王子가 할 行動이 아니다."라며 요시나카를 擁護한다). 요시나카의 對答에 法皇이 어떻게 對應했는지는 確實하지 않지만, 이미 18日에 高토바 天皇이나 슈카쿠 法親王(守?法親王), 엔에(円?) 法親王, 天台座主(天台座主) 墓韻(明雲)李 고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아 요시나카를 武力으로 攻擊할 決意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好슈지逃奴 襲擊 [ 編輯 ]

11月 19日, 요시나카는 好슈지逃奴를 襲擊했다. 法皇側에서는 도키 美쓰나가(土岐光長) ? 미쓰쓰네(光?) 富者가 奮戰했으나 요시나카君의 목숨을 건 猛攻 앞에서 敗하고 말았다. 요시나카의 士卒들은 高쇼를 빠져나가려던 高시라카와 法皇을 붙잡았고 歡喜하는 목소리가 하늘에 치솟았다(《교쿠요》). 요시나카는 法皇을 高調 도도인(五?東洞院)의 셋쇼저(攝政邸)에 幽閉했고, 이 싸움에서 墓運이나 엔에 法親王 等 多數의 皇族이 戰死한다. 構造 가네자네는 "여지껏 歸宗(貴種)과 高僧(高僧)李 겪었던 苦難이 이 程度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慨歎할 程度였다. 엔랴쿠지의 僧侶로 天台宗 (天台宗)의 最高 地位인 天台座主에 있었던 僧侶 墓運에 對해서도 요시나카는 "그딴 놈 내가 알 게 뭐냐?"라며 그 목을 쳐서 江에다 던져 버렸다. 20日에 요시나카는 高調 江邊에 美쓰나가 以下 1百餘 人의 목을 梟首하였다. 21日에는 前任 간파쿠 (關白) 마쓰도노 모토後嗣(松殿基房)와 提携하여 "世間의 일은 마쓰도노께 아뢰어 每事를 處理할 것"이라고 命하고, 22日에 모토後嗣의 아들인 모로이에(師家)를 나이다이진 (?大臣) ? 셋쇼로 하는 傀儡 政權을 樹立한다(《헤이케 이야기》에는 요시나카가 모토後嗣의 딸을 억지로 아내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實際로는 福券을 꾀하던 모토後嗣가 요시나카와 손잡고 自身의 딸을 시집보낸 것으로 보인다).

11月 28日, 新任 셋쇼 마쓰도노 모로이에(松殿師家)가 하문(下文)을 띄워 前任 셋쇼 고노에 모토미치(近衛基通)의 집안 領地 80餘 곳을 요시나카에게 주도록 하고, 주나곤 (中納言) ? 후지와라노 圖謀카打(藤原朝方) 以下 43人이 解官(解官)當한다. 요시나카는 12月 1日에 인노미쿠리야노벳토(院御?別?)가 되어 사바老카미(左馬頭)로서 軍事의 全權을 掌握했다. 10日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追討를 命하는 人쵸카몬(院?下文)을 發給해, 形式的으로는 '官軍'(官軍) 體制를 整頓한다.

最後 [ 編輯 ]

駐에이 3年( 1184年 ) 1月 6日, 가마쿠라軍이 스노마타(墨?)를 넘어 미노 (美濃)에 들어왔다는 所聞이 퍼졌고, 15日에는 요시나카 스스로 세이토다이쇼군(征東大將軍)이 되었다. 헤이시와의 和睦 孔雀이나 高시라카와 法皇을 데리고 홋코쿠(北?)로 내려갈 것도 摸索했지만, 미나모토盧 노리料理(源範?) ? 요시쓰네가 이끄는 가마쿠라軍이 눈앞에 들이닥치고 싸움을 避할 수 없게 된 狀況에서, 法皇 幽閉를 비롯한 一連의 行動으로 이미 德望을 잃은 요시나카를 따르는 軍士는 많지 않았다. 結局 우지 江(宇治川)과 세타(?田)의 싸움에서 慘敗한 요시나카는 艱辛히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 데즈카 미쓰모리(手塚光盛) [4] 等 몇 名의 部下와 함께 달아나지만, 20日, 오미 國 아와즈(只今의 日本 詩가 現 오쓰 時)에서 戰死한다(아와즈의 싸움). 享年 31歲였다.

요시나카가 戰死했을 때 赤字 요시타카는 요리토모의 딸 오오히메(大?)의 男便으로서 가마쿠라에 있었지만, 요리토모의 處刑 命令에 도망치려다 잡혀 죽고 요시나카의 家計는 끊어지고 말았다.

센고쿠 다이묘였던 起訴 氏 집안은 요시나카의 子孫이라 自稱하였다.

各州 [ 編輯 ]

  1. 日本 사이타마縣 (埼玉?) 히키 軍(比企郡) 아라시야마 政(嵐山町)
  2. 나가노 縣 (長野?) 起訴群(木?郡) 起訴初(木?町)
  3. 只今의 起訴初(木?町) 신카이우에다(新開上田) 附近
  4. 前後 의 漫畫家 데즈카 오사무 의 祖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