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오 一兵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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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 (崔永吾, 1938年 ~ 1963年 3月 18日 ) 一兵 事件은 1962年 7月 8日 午前 8時, 現役 一兵 최영오가 駐屯 部隊 內에서 選任兵士 2名을 銃器 殺害 한 事件이다.

事件 發端 [ 編輯 ]

최영오는 自身에게 到着한 愛人의 便紙를 先任兵이 먼저 가로채 뜯어본 後 최영오를 嘲弄하자 이에 對한 謝過를 要求하다가 도리어 先任兵들에게 毆打를 當했다. 이에 憤을 참지 못한 최영오는 結局 先任兵 2名을 M1 小銃 으로 銃殺하기에 이르렀다.

社會 이슈 및 餘波 [ 編輯 ]

서울大 天文氣象學科를 다니다 休學하고 學報甁 身分으로 入隊한 최영오는 名門大生이라는 點 때문에 社會的으로 相當한 關心을 불러 일으켰다. 軍事法院 은 최영오에게 死刑 判決을 하였다. 各界 各層에서 救命運動이 벌어졌음에도 不拘하고 法院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被殺者 遺族의 建議를 받아들여 1963年 3月 18日 午後 2時 40分, 서울 近郊 搜索의 刑場에서 銃殺刑이 執行되었다. 그와 反對로 被殺된 鄭 兵長과 고 上兵은 國立墓地에 묻혔고 1階級 特進을 받았다. 그의 집안은 1987年 8月 까지 容共分子 집안으로 낙인찍힘으로 社會로부터 隔離 措置되었다. [1] 處刑 直前 그는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軍隊가 官僚主義 敵인 것으로부터 個人의 權利를 保障해주는 民主的인 軍隊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2] 최영오 一兵의 死體 引受 通知書를 받아들고 衝擊을 받은 어머니는 그날 밤 11時 50分쯤 서울 麻布 近處 漢江에 投身自殺했다. 이 事件 以後 말이 많았던 鶴步兵 制度 가 廢止되었다. '푸른별 아래 잠들게 하라'라는 映畫도 製作 되었다.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