渤海의 交通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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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度(五道)는 渤海의 對外 交通로써, 黨과 通交하던 朝貢도(朝貢道)·영주도(營州道)를 비롯하여 거란·일본·신라와 通交하던 거란도(契丹道)· 日本도 (日本道)· 新羅도 等이 있었는데, 新羅道는 南京 남해부(南京南海府)를 거쳐 新羅로 가던 交通路였다.

《新唐書》의 記錄에 따르면 渤海에는 5個의 交通路가 있었다. 東京 龍原府의 東南쪽 바다와 隣接한 곳은 日本刀이고, 南京 남해부는 新羅도 이고, 西京 압록부는 조공도이고, 장령부는 영주도이고, 部員부는 거란도이다.

上京용천부가 세워진 以後 모든 出發地는 政治 中心地이자 首都였던 上京 용천부에서 始作하였고 나머지 5個의 5臺 交通路는 最前方 出發地이다.

渤海의 交通 中 鴨綠江은 黨으로 가는 重要 經路였으며 도문강은 日本으로 가는 길, 第2松花江은 거란도, 牧丹江은 黑手靺鞨로 대표되는 北쪽말갈로의 交通路이다.

新羅도(新羅道) [ 編輯 ]

新羅도(新羅道, Silla-Do)는 南北國 時代 新羅 渤海 가 서로 오가던 對外交通路이다.

新唐書(新唐書)』 발해전에는 國道인 상경을 中心으로 하여 各 方面에 이르는 交通路를 說明하고 있다. 그 中에 南京남해부(南京南海府)는 新羅 로 가는 길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渤海와 新羅 는 以下(泥河 : 現在의 龍興江)를 境界로 隣接하여 있었고, 또 『三國史記』에 引用된 賈耽(賈耽)의 『古今군국지(古今郡國志)』에 依하면 柵城府(柵城府 : 卽 東京龍原府)와 新羅 의 遷葬군(泉井郡 : 現在

의 德源) 사이는 39役(驛)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사이에 남경남解剖가 있었다. 따라서, 新羅도 는 上京에서 東京을 거쳐 南京에 이른 다음 新羅로 들어가는 經路를 指稱하였다.

新羅道는 陸上交通路와 海上交通路(東海, 西海)로 나뉜다. 代表的인 陸上交通路는 新羅道로 알려진 곳으로 新羅와 渤海 사이에 設置된 常設交通路이다.

이 陸上交通路人 新羅 道에는 39個의 歷史 乃至 譯官이 있었다. 이는 唐나라 地理學者였던 賈耽의 《古今군국지》記錄을 통해 알 수 있다.

古今군국지記錄에는 '발해국의 南海, 압록, 扶餘, 柵城 等 4個 부는 高句麗의 옛地域이다. 新羅 정천군으로부터 柵城까지 이르는 사이에 39個 驛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海上交通路에서 東海는 南京 남해부 淸津港을 통해 韓半島의 東海岸을 따라 南下하여 徐羅伐 에 이르는 길이다.

海上交通路에서 西海는 上京에서 西京 압록부의 鴨綠江 河口를 통해 西海 바닷길로 南下하여 火星의 淡흥포까지 海路를 통해 가고 陸路로 東南으로 350km 程度 가서 首都인 徐羅伐 에 到着하는 길이다.

渤海와 新羅 間의 常設交通路의 存在는 兩國의 頻繁한 接觸을 의미한다.

新羅道를 통하여 渤海와 新羅가 接觸하였던 具體的인 事實은 『三國史記』에 보이는 두 番에 걸친 新羅의 使臣派遣 記錄, 『거란國志(契丹國志)』에 보이는 渤海가 新羅와 缺員(結援)하려 하였다는 記錄, 日本記錄에 보이는 唐나라 使臣 한彫彩(韓朝彩)가 渤海에서 直接 新羅로 갔다는 記錄 等에서 찾아볼 수 있다.

政治的으로는 對立關係에 있었지만 經濟的으로 民間 接觸은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交通路는 渤海와 新羅만을 잇는 구실만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渤海 使臣이 日本으로 가는 經路로도 使用하였다.

卽, 『속일본기(續日本紀)』에 依하면 777年 1月에 渤海 使臣이 남해부의 土豪脯(吐號蒲)를 出發하여 日本으로 向하였다고 한다.

日本도(日本道) [ 編輯 ]

日本刀는 渤海 上京性에서 日本으로 가기 위한 陸地길과 渤海港口에서 日本港口로 가는 海路上의 日本刀와 日本에 到着한 渤海使臣들이 日本의 首都로 들어가기 위한 길로 나뉜다.

먼저 渤海 上京에서 東京龍原府로 到着하여 出發 港口로 到着하는 陸路에는 2가지가 있다.

첫番째는 上京에서 옛 救國(只今의 敦化)로 가서 延邊地域을 지나 豆滿江을 따라 내려가 東京龍原府人 훈춘의 동경성으로 到着하는 길이다.

두番째로 上京에서 왕청현으로 내려와 팔련성과 크라스키노土城으로 接近하여 훈춘 東南 4km 떨어진 러시아 沿海州 크라스키노 土星 푸시에트항에서 배를 타는 길이 있다.

日本으로 가는 海路를 통해 日本에 到着하여 陸路로는 794年 以前까지는 나라 時代의 首都인 헤이죠쿄로 들어갔으며 헤이안時代가 始作된 794年부터는 오늘날의 쿄토人 헤이안쿄로 들어갔다.

定着한 港口로는 代表的으로 데와, 사도, 에치高, 노토, 가가, 에치젠, 다지마, 오끼, 豪雨키, 조몬, 쓰시마 等에 到着하였다. 이곳은 日本 列島의 北六道와 山音圖에 集中되어 있다. 日本刀를 통해 渤海와 日本은 229年間 47回 使臣이 往來를 하였다. 그러나 《三國史記》 本紀는 公式的인 記錄이 10回도 되지 않다.

日本刀로 渤海는 初期 政治的 目的에 따라 交涉을 하였다. 新黨聯合過程에서 日本을 통한 新羅를 牽制하기 위해 渤海에서 먼저 使臣을 보냈다.

이는 "속일본기"와 "木管"에서 '728年 正月 쇼무 天皇을 만나고 渤海의 國書와 膳物을 傳達하였다.'는 內容을 통해 알 수 있다.

渤海 中盤 以後에는 經濟的인 目的 中心으로 日本刀를 통한 交流가 있었다. 日本貴族들이 渤海 特産物인 담비가죽과 學問的 交流에 對한 關心이 높았고 渤海의 地方守令들度 經濟的 欲求를 충족시키는데 積極的으로 日本과 交流를 하였다.

朝貢도(朝貢道)와 영주도(營州道) [ 編輯 ]

唐나라와 渤海는 130回~160回看 交流할 程度로 活潑히 交流를 하였다. 黨에서 渤海로 30回의 使臣을 派遣하였고 渤海에서 唐나라로 100回 程度 使臣을 派遣하였다.

이러한 使臣派遣은 水路와 陸路를 통해 이루어졌다. 조공도는 그 中 代表的인 水路이다.

《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國道(國都)인 上京(上京)을 中心으로 하여 各 方面에 이르는 交通路를 說明하고 있는데 그 中에 朝貢도 ‘西京압록부(西京鴨綠府)는 朝貢하는 길(朝貢道也)’ 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朝貢도 는 渤海立場에서는 等主導, 黨指導, 압록도라고 불릴 수 있었던 길이었다. 조공도는 海路로 西京압록부를 지나 鴨綠江을 따라 黃海를 통해 東周에 到着하는 길이다.

東周에는 渤海, 新羅 사람들이 많이 居住하는 곳으로 渤海館, 新羅館, 新羅院 等이 있었다. 이로 因해 등주를 통해 交流가 頻繁하였다.

영주도는 上京에서 장령부를 거쳐 黨의 榮州都督府에 이르는 길이다.

出發根據地로는 지린省 화디엔시의 數미청, 卽 疏密性으로 大部分의 學者들이 알고 있다.

具體的인 經路는 《新唐書》 地理誌에 引用된 賈耽(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仔細히 나타나 있다. 上京에서 出發하여 첫 都邑地였던 敦化(敦化)를 지나 장령부(現在의 吉林省 海龍縣 山城眞) 管內를 通過한 다음 瀋陽(瀋陽)·흑산(黑山)·北進(北鎭)·의현(義縣 : 當時의 燕郡城)을 거쳐 領主에 이른다. 이는 上京에서 牧丹江을 따라 南쪽으로 가서 제2송화강 流域으로 들어가 榮州로 통하는 길이다.

이러한 영주도는 실크로드의 東쪽 끝이 渤海와 이어진다고 하여 韓半島의 '草原로 東端'설, 渤海의 '緋緞길'설, 발해국의 '실크로드'說이 있다.

거란도(契丹道) [ 編輯 ]

거란도(契丹道)는 거란 渤海 間 交易路로 使用된 길로 出發據點은 부여부이다. 부여부는 눙안詩로 얘기가 되는데 이보단 지린時에 西斷産 文化 遺跡이 있으며 扶餘遺跡의 東端山 文化遺跡이 많아 지린詩를 渤海 建國者 大祚榮의 출신지로 推定하기도 한다.

지린市의 西쪽 區間은 平原이어서 各地로 통하는 陸路의 據點이 되었으며 東쪽 區間은 上京으로도 通하는 地理的 位置에 있다.

거란도는 第2松花江水路를 利用하였다. 이 길은 突厥이나 回紇, 시리 等으로 가는 出口일 可能性도 있다고 본다.

이 外에도 只今의 歷史家들은 담비길과 黑貂의 길, Sable Road가 있었고 이를 통해 外國과의 交易, 經濟 交流 및 政治交流를 實現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소그드 銀貨의 發見으로 渤海와 中央아시아의 交流의 證據도 있다. 이란系 소그드人들은 渤海를 包含한 極東 地域에까지 交易 網을 뻗쳤다.

記錄 [ 編輯 ]

三國史記 》에 引用된 賈耽(賈耽)의 《古今군국지(古今郡國志)》에 따르면 渤海의 柵城府(柵城府:東京 龍原府, 中國 吉林省 훈춘)와 新羅의 朔州(朔州:천정군, 咸南 文川郡 德源) 사이에 驛이 39個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新羅道義 主要 經路로 推定된다. 卽 新羅道는 渤海의 首都 上京 용천부 를 出發하여 東京 龍原府 南京 남해부 를 거쳐 新羅의 首都 金星 으로 가던 交通路로서 오늘날의 東海岸 을 따라 渤海와 新羅가 通交하였음을 보여준다.

新羅道는 大體로 8世紀 前半에 開設된 것으로 推定되지만, 兩國이 이 交通路를 利用하여 자주 交流한 것은 8世紀 後半에서 9世紀 前半이다.

現存 記錄上 新羅道를 最初로 利用한 사람은 唐나라 使臣 한彫彩(韓朝彩)로서 764年( 渤海 文王 ( 大興 ) 28年) 渤海에서 新羅로 直接 갔다고 하며, 新羅人으로는 790年( 원성왕 6年) 渤海에 使臣으로 派遣된 日記贊 白魚(伯魚)가 있다.

그 以後 9世紀 全般 兩國은 이 交通路를 利用하여 頻繁하게 來往하였을 것으로 推定되는데 812年( 헌덕왕 4年)에 新羅가 渤海에 使臣을 派遣하였다는 記錄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