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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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政策 ( 英語 : Sunshine Policy, Engagement Policy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對한 大韓民國 김대중 政府 노무현 政府 의 對外 政策으로, 北韓에 協力과 支援을 함으로써 平和 敵人 統一 을 目的으로 하는 政策이다.

햇볕政策은 比喩法으로 使用된 象徵語로 對北和解政策 , 對北包容政策 또는 包容政策 으로도 불리고, 公式的인 名稱은 對北和解協力政策 이다. 和解協力政策의 公式 英語 名稱은 'Sunshine Policy' 或은 'Engagement Policy'라는 名稱이 더 大衆的으로 알려져 있고, 斷絶을 克服하고 開放하며, 對決하지 않고 協力한다는 意味를 內包하고 있다. 많은 面에서 1970年代 西獨 東方 政策 에 起草했다. '햇볕'이라는 이름은 바람 이 벗기지 못한 사람의 外套를 따스함으로 벗긴 太陽 에 關한 아이소포스 의 寓話 《 北風과 太陽 》에서 비롯되었다.

以前에는 北韓과의 關係는 形式的이고 交流가 이루어지지 않은 狀態로 軍事的 對峙關係에 놓여있었으나, '善平和 後統一'을 統一의 基本原則을 繼承해 김대중 政府 에 들어서 交流를 基盤으로 한 和解, 協力 等을 强調한 包容政策으로 轉換되었다. 現代峨山 을 비롯한 中小企業들이 參與하여 金剛山 觀光 과 離散家族 相逢, 開城工團 造成 等 成果를 이뤘다.

그러나 햇볕政策이 實施되는 渦中에도 北朝鮮은 延坪海戰 과 같은 武力 挑發을 敢行하고 繼續된 核 開發로 核 實驗 을 實施하여, 安保 側面에서의 失敗 問題가 提起되었다. 2016年 脫北한 北側 高位級人 北朝鮮 英國 駐在 太永浩 工事에 依하면, 金日成 , 金正日 , 金正恩 代에 걸쳐 北朝鮮은 核 開發을 中斷한 적이 單 한番도 없으며, 햇볕政策이 實施되던 김정일 執權 時節에도 韓半島 非核化라는 거짓 外皮를 뒤집어쓰고 核 開發을 隱密히 하였다고 알려졌다. [1]

2017年 에 大統領選擧에 當選된 文在寅 政府 는 南과 北의 和解를 다시 한番 試圖하면서, 햇볕政策을 復活하였다. 이런 政策으로 한 해동안 南과 北과의 세番의 頂上會談이 이루어졌으며, 이런 文在寅 政府의 努力은 ' 달빛政策 '으로 알려져 있다.

歷史 [ 編輯 ]

1980年代 以後, 北韓의 核開發 疑惑은 韓半島 安保의 核心 問題가 되었다. 1994年 北韓이 美國과 제네바 合意 를 締結한 以後, 北核 問題는 一旦 解決되는 것처럼 보였다. 1999年 美國 클린턴 政府의 페리 國防長官은 페리報告書에서 北韓이 基本 合意를 지킬 것이며 北韓과의 關係 改善이 必要하다고 强調했다. 자주 韓美間 葛藤을 일으켰던 金永三 과 달리, 大韓民國 第15代 大統領 金大中 은 大統領 候補 時節부터 對北 問題에 對해 클린턴 政府와 類似한 視角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政府 初期에는 北韓과의 對話에 消極的이였지만 2000年 3月 10日 베를린 宣言 ’이 나오면서 和解 協力 雰圍氣가 싹텄다. 2000年 6月 13日 에서 6月 15日 까지 最初로 南北韓의 指導者인 金大中 大統領과 金正日 國防委員長이 平壤 에서 2000年 南北頂上會談 을 통해 6·15 南北 共同宣言 을 發表했다.

1998年 11月 分斷 以後 처음으로 南韓 사람들은 金剛山 觀光에 나서게 되었으며 政府 出帆 以後 2000年 5月 末까지 1萬 667名이 北韓을 訪問했는데, 이는 1989年 訪北 許容 以後 全體 訪北 人員의 80.5%에 該當된다. 南北의 年間 交易 規模도 3億 달러를 넘어섰다.

北韓의 食糧 事情이 좋지 못한 狀態이기 때문에, 國民의 政府는 政府 次元의 人道的 支援에 나섰다. 國民의 政府는 北韓에 2,753億원 어치 肥料를 無償으로 支援하고, 10年 据置 20年 分割 償還, 年利率 1% 條件으로 食糧次官 2,567億원을 北韓 提供했다.

햇볕政策의 透明性에 對한 疑惑으로 對北送金特檢 이 實施되기도 했다. 이 過程에서 搜査를 맡은 송두환 特檢팀은 4月 17日부터 6月 25日까지 廣範圍한 搜査를 벌여 現代家 4億 5,000萬 달러를 國家情報院 計座를 통해 北에 支援했으며, 이 中 南北頂上會談과 關聯한 政府의 政策的 支援金 1億 달러가 包含돼 있다는 結論을 내렸다. 特檢은 "北韓에 送金된 돈의 額數는 總 5億달러이며 이 中 5000萬 달러는 現物로 보내졌다."고 發表하고 "5億 달러 中에는 南北頂上會談 代價로 김대중 政府가 北側에 건네기로 約束한 1億 달러가 包含되어 있다."고 밝혔다. 特檢은 1億달러가 "頂上會談과 關聯돼 있음을 否認할 수 없다."고 말했다. [2]

3原則과 政經 分離 [ 編輯 ]

햇볕政策은 세 가지 原則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

  • 1. 北側의 武力 挑發을 許容하지 않는다.
  • 2. 南側은 吸收 統一을 試圖하지 않는다.
  • 3. 南側은 和解와 協力을 推進한다.

이러한 세 가지 原則을 土臺로 김대중 政府 는 보다 많은 接觸과 보다 많은 對話, 보다 많은 協力을 追求했다. 또 政經分離 原則에 따른 經濟 交流를 活性化했고, 人道的 次元의 對北 食糧 支援과 離散家族 問題 解決에 注力했다.

政治的 側面 [ 編輯 ]

向後 韓半島 問題 解決에 있어 다른 周邊 國家들과 差別化되는 主導權을 잡기위해서는 햇볕政策이 必要하다는 主張이다. 統一時의 衝擊과 莫大한 統一費用을 줄이기 위해서는 只今부터 投資를 해야 한다는 主張이다. 이 主張을 하는 사람들은 또한 强勁策 一邊倒의 對北政策은 效果가 없다고 보며,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어야 하듯 宥和策도 必要하다고 主張한다.

經濟的 側面 [ 編輯 ]

햇볕政策을 推進하던 當時는 IMF 以後 時期였고, 當時 大韓民國의 安定的인 經濟 環境 造成을 위해 北韓을 抑制할 必要가 있었으며, 햇볕政策은 이에 도움을 주었다는 主張도 있다. 實際로 外國人 投資者들은 北韓의 挑發에 크게 動搖하는 모습을 보인다. 2013年 北韓이 키리졸브 訓鍊이 始作되면 停戰協定을 白紙化하겠다며 威脅하자 韓國 有價證券市場에서 約 56兆원이 蒸發하기도 했다. 이를 根據로 7分의 1 程度의 對北支援費用으로 이런 經濟的 打擊을 막을 수 있다면 利得이 아니냐는 主張도 있다. [4] 또한 開城工團의 利點이나 北韓 地下資源 開發時의 利得을 考慮하여 햇볕政策을 推進해야 한다고 主張하는 이도 있다.

對外的으로는 中國의 北韓 經濟 蠶食을 막아야 한다는 理由에서 햇볕政策을 贊成하는 主張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韓國이 햇볕政策을 끝내면서 事實上 中國에 北韓을 빼앗겼다고 報道하기도 하였다. [5]

人道的 側面 [ 編輯 ]

人道的인 次元의 對北支援은 分明 必要하지 않느냐는 主張이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北韓의 武力挑發 [ 編輯 ]

햇볕政策이 施行되었을 當時에 北韓은 武力 挑發을 持續的으로 恣行했다.

  • 1990年代
    • 1998.11.19 江華島海岸 間諜船 浸透 企圖事件
    • 1998.12.17 麗水海岸 間諜船 擊沈 事件
    • 1999.6.15 第1延坪海戰
  • 2000年代
    • 2002.6.29 第2延坪海戰
    • 2003.1.10 北 核擴散防止條約(NPT) 脫退
    • 2003.2.20 北 미그-29期 1代 延坪島 NLL 13km 南下(我軍 戰鬪機 對應出擊)
    • 2004.10.10 北 潛水艦 東海浸透 諜報(我軍 爆雷 投下)
    • 2004.11.1 北 警備艇 3隻, 西海 小靑島 東方 6.5 마일 및 延坪島 西方 25마일 海上 NLL 月膳, 海軍 警告射擊
    • 2005.2.10 北, 核武器 保有 宣言
    • 2005.5.11 北 寧邊 5MW 原子爐에서 8000個의 廢燃料棒 引出 作業 完了 發表
    • 2006.7.5 北, 長距離 미사일 대포동 2號를 包含한 7期 미사일 咸鏡北道 花臺郡 무수단里 發射場서 試驗 發射 實施.
    • 2006.10.9 北, 第1次 核實驗 强行

1999年 과 2002年 西海 延坪島 隣近에서 北韓 警備艇의 NLL 侵犯으로 인한 第1延坪海戰 第2延坪海戰 이 勃發하여 햇볕政策의 平和에 對한 實質的 成果에 對한 論難이 생겼다. 햇볕政策이 北韓의 武力 挑發을 막지 못했다며 保守勢力은 包容政策의 廢棄를 主張했다. 包容政策을 抛棄하거나 적어도 戰術的 修正을 거쳐야 한다고 主張했다.

北韓의 核開發 [ 編輯 ]

새누리黨 , 保守言論 等의 保守陣營에서는 햇볕政策을 失敗作으로 評價한다. 2006年 北韓의 核實驗으로 參與政府의 支持率이 暴落하였고 2009年 北韓의 核實驗을 契機로 한나라당을 비롯한 一部 保守 團體에서는 이른바 "햇볕政策 責任論"李 本格 擧論되기 始作했다. 2009年 6月 15日, 한나라당 北核特委가 開催한 會議에서 윤덕민 外交安保硏究院 敎授는 "北韓 核 問題는 애初부터 北이 核을 抛棄할 것이며, 協商으로 그렇게 誘導할 수 있다고 믿은 김대중·노무현 政府의 判斷 錯誤"라고 말했다. 協商 意志가 없는 北韓을 相對로 協商을 試圖한 것 自體가 北韓에 核開發에 必要한 時間과 돈을 벌어준 셈이란 것이다. [6]

民主黨과 進步陣營에서는 햇볕政策의 目的에는 肯定的이나 現在는 安保를 基本 바탕에 두고 推進하고 있다. 一角에서는 經濟와 安保를 交換한다는 槪念에서 失敗했기 때문에 安保와 安保를 交換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7]

한便, 2016年 1月 美國에서는 오바마 大統領의 對北政策人 '戰略的 忍耐'에 對한 批判이 쏟아졌다. '戰略的 忍耐'란 北核이나 미사일 等에서 北韓이 먼저 變化하지 않는 限 經濟制裁를 强化하며 對話에 나서지 않겠다는 戰略이다. 北韓이 4次 核實驗을 强行한 直後 공화당은 勿論 與黨인 민주당에서조차 "2009年 導入한 '戰略的 忍耐' 政策으로 오히려 北韓에게 核과 미사일 能力을 開發하는 時間만 벌어주는 結果를 招來했다"는 批判이 쏟아졌다. [8]

2016年 9月에는 朴槿惠 大統領이 北核 問題에 對해 햇볕政策을 批判하자 朴智元 議員은 "任期 17個月 남긴 只今 李明博, 朴槿惠 政府 8年 半 동안 5番의 北韓 核實驗 中 4番을 했다"면서 "核미사일의 技術 進展을 알면서도 束手無策이던 大統領께서 '對話 위해 北 준 돈 核開發 資金 됐다'며 햇볕政策에 責任을 떠넘기시네요"라고 指摘했다. 이어 "政府 말대로 하면 北韓은 이미 亡했거나 오늘 或은 來日 亡해야 한다"며 "지난 8年 반간 北에 준 돈이 없는데 北이 어떻게 核 SLBM 미사일 核潛水艦까지 乾燥해서 實驗 할까요?", "京釜高速道路에서 事故 나면 동작동 國立墓地 朴正熙 大統領 墓所로 가서 抗議하나요?"라고 反問했다. [9]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