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의 IMF 救濟金融 要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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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의 IMF 救濟金融 要請
期間 1997年 12月 3日 ~ 2001年 8月 23日
場所 大韓民國

大韓民國의 IMF 救濟金融 要請 ( 1997年 12月 3日 ~ 2001年 8月 23日 )은 國家不渡 危機에 處한 大韓民國 IMF 으로부터 資金을 支援받는 諒解覺書를 締結한 事件이다. 企業이 連鎖的으로 倒産하면서 外換保有額이 急減했고 IMF에 20億 달러 緊急 融資를 要請하였다. [1] [2] 外換 危機 속에 大韓民國은 外換保有額이 한때 39億 달러까지 急減했다. 그리하여, IMF에서 195億 달러의 救濟金融을 받아 그 以後 韓國經濟는 IMF가 要求하는 經濟體制를 受容하고 그 要求에 따라 大大的인 國家經濟 構造調整이 始作되었다. [3] [4]

'IMF 經濟 危機', 'IMF 外換 危機', 'IMF 患亂', 'IMF 管理體制', 'IMF 時代', 'IMF 事態' 等으로 불리나 IMF라는 名稱 自體가 外換 危機의 意味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表現이다. 그러나 IMF에 救濟金融을 要請했다는 象徵性으로 인해 內容이 壓縮된 單語로 大韓民國 言論 等에서 자주 使用되고 있다.

泰國 , 홍콩 , 말레이시아 , 필리핀 , 인도네시아 東南아시아 의 連鎖的 '外換 危機' 속에 大韓民國 政府의 外換管理政策의 未熟과 失敗가 'IMF 患亂'의 直接的인 原因이다. 大韓民國 第14代 大統領 金永三 은 1997年 11月 10日 에 이루어진 강경식 經濟部總理와의 通話 以前까지 韓國에 닥쳐올 外換危機의 深刻性 自體에 關心을 가지지 않았다. [5]

IMF가 要求하는 體制가 始作되자 많은 會社들의 不渡 및 經營 危機가 나타났고, 이 過程에서 大量 解雇와 京畿 惡化로 인해 大韓民國의 온 國民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事件이 일어난 直後인 1997年 12月 18日 에 大韓民國 第15代 大統領 選擧가 치러졌고, 이 選擧에서 與黨 人 한나라당은 IMF外換危機와 國家不渡의 責任으로 野黨 인 김대중에 敗北하여 政權 交替가 이루어졌다.

1998年 2月, 김대중 政府 가 들어섰고 金大中 大統領은 就任 以後 IMF의 要求를 全面受容하고 IMF가 要求하는 構造調整에 着手했다. 大韓民國은 以後 IT 産業 奬勵 政策이나 大企業 間의 事業 交換 및 統廢合으로 經濟 再建을 圖謀했다. 1999年 3月, 政府는 사이버 코리아 21 計劃을 發表하며 IT 産業 發展 및 인프라 投資에 힘을 쏟았다. 2000年 코스닥과 벤처産業 그리고 6月, 南北頂上會談 을 開催하여 韓國經濟와 社會 對北關係에 大大的인 變革이 始作되었다. [6] [7]

1998年 12月, IMF 緊急 保管 金融에 18億 달러를 償還한 것을 契機로 大韓民國은 金融 危機로부터 徐徐히 빠져나갔다. 2000年 12月 4日 , 김대중 大統領은 "國際 通貨 基金의 모든 借款을 償還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危機'에서 完全히 벗어났다"라고 公式 發表하였다. 2001年 8月 23日 , 大韓民國에 對한 IMF 管理 體制가 公式 終了되었다.

大韓民國 政府는 危機 發生 때 衝擊을 吸收하는 緩衝裝置로서 外換保有額을 꾸준히 늘려왔다. '外換 危機'로 39億 달러까지 떨어졌던 大韓民國의 外換保有額은 이듬해인 1998年 末 520億 달러로 增加했고, 2001年 末에는 1028億 달러로 1000億 달러線을 突破했다. 2001年 8月 23日에는 IMF 救濟金融 195億 달러를 早期 償還해 IMF 管理體制를 卒業했다. [8] [9] [10]

歷史 및 日誌

原因

支給準備政策의 變化

1990年代 들어 金融自由化 進展 및 金融市場 發電으로 公開 市場 造作 乙 主된 通貨政策手段으로 活用함에 따라 支給準備制度 의 役割은 크게 縮小되었다. 特히 1996年 以後 金融機關의 對外競爭力 提高와 公正競爭을 위해 9%를 上廻했던 支給準備率을 1~5% 水準까지 大幅 引下함으로써 通貨政策 手段으로서 支給準備率의 有用性은 크게 낮아졌다.

外換 保有高 管理의 失敗

當時 泰國 , 홍콩 , 말레이시아 , 필리핀 , 인도네시아 等 東南아시아의 連鎖的 外換危機 속에 大韓民國 政府의 外換管理政策의 未熟과 失敗가 IMF 患亂의 直接的인 原因이다. 正常的 經濟活動을 위한 國家의 外換保有高 를 維持 管理하고 責任을 지는 行政 시스템이 제대로 作動하지 않았다. 綜合金融會社를 비롯한 國內 金融企業들은 低利의 海外短期債를 얻어 東南亞 國家들에 長期債로 빌려주면서 2~3%의 利子 差益을 보았다.

그런 狀況에서 東南亞 國家들의 外換危機로 海外短期債들의 滿期가 延長되지 않자 國內 資金을 利用해 이를 償還하고, 結果的으로 國內資金이 流出되었다. [11]

마치 企業의 不渡와 마찬가지로 外換保有高 가 減少하여 外換支給不能事態의 危機를 招來하였으며 이로 인해 國家信用度가 下向 調整되었고 원貨價値의 換率이 急激히 下落하는 等 連鎖的으로 國際的 經濟活動에 莫大한 支障을 招來하였다.

政經癒着으로 인한 不正貸出

金永三 政府와 與黨인 신한국당 의 政經癒着으로 因해 起亞自動車 , 한보그룹 , 한라그룹 等에 無分別한 銀行貸出을 容認했다. 特히 이 過程에서 김영삼 大統領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철강 으로부터 莫大한 額數의 賂物을 받아 큰 物議를 일으켰다. 이와 같은 不法貸出로 인해 두 業體의 不渡로 各各 5兆 원과 10兆 원의 不實 債券이 發生했고 이는 國家信認度 下落에 큰 影響을 미쳤다. [12] 財界10卷 밖의 閑步는 不渡處理하면서 엄청난 不實企業으로 當場 不渡處理해야할 財界4位의 기아그룹을 選擧로 인해 제때 不渡處理하지 못한 것이 對外信認度 下落의 決定的 原因이 되었다. 기아그룹은 支配株主가 없는 專門經營人體制의 企業으로 湖南出身의 김선홍이 會長이었다. 當時 기아本社는 汝矣島 國會議事堂앞에 位置해 있었는데 김대중은 6番이나 찾아가 回生을 約束했다. 政權이 바뀌고 나서 特殊鋼 等 다른 分野는 不渡處理되었으나 自動車는 현대그룹으로 넘겨 살아나게 했다.

換率 運用 政策 失敗

1997年 末 周邊 東南아시아 國家들의 經濟가 어려워지자 外國 投資機關들은 韓國의 經濟도 곧 어려워질 거라 判斷하여 投資資金을 大規模로 回收해갔다. 또한 政府는 1997年 9月 以後 繼續된 外換市場 不安定 속에서 원貨 價値를 지키기 위한 人爲的인 換率 防禦를 始作하였고 이에 들어가는 費用이 增加함에 따라서 韓國의 外換保有高는 急激히 減少하기 始作했다. 한便 滿期가 돌아오는 國外 借入金의 規模는 漸次 增加하기 始作하여 外換支給不能事態가 招來하기 直前까지 몰리는 外換危機가 全面的으로 可視化되었다.

金融機關의 不實

1996年까지 24個의 投資金融會社가 綜合金融會社 로 轉換되었고 以後 30個로 늘어나서 海外業務를 始作하였다. 이들은 外債를 끌어와서 어음交換을 始作하게 되었다. 企業이 不渡를 일으키게 되자 外債를 끌어서 어음割引韓 이들 種禽舍(綜合金融會社)들이 連鎖的으로 影響을 받게 되었고 特히 閑步와 起亞의 12兆 원假量의 大型 不渡事態는 危機를 決定的으로 악화시키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었다. 1998年 6月 29日 대동, 동남, 동화, 京畿, 충청은행等 5個 退出銀行을 發表하고, 國民, 住宅, 宸翰, 韓美, 하나銀行 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官治 金融의 그늘아래에서 不實한 經營을 하였으며 이들에게 聯關된 작은 關聯企業들度 連달아 倒産의 危機에 빠지게 되었다.

1998年 8月 11日 高麗, 國際, 太陽, BYC等 不實한 4個 生命保險社가 營業停止를 發表하고, 各各 알리안츠生命, 三星生命 , 대한생명 , 敎保生命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危機의 根本的인 原因은 허술한 官治金融體制, 無能한 政府의 豫算 浪費, 大企業들의 粉飾會計 와 過度한 借入 不實 經營 그리고 當時 社會全體에 蔓延된 經濟的 無能力과 腐敗, 責任意識 失踪에 依한 結果였다.

對外 金融勢力의 攻擊

國家介入 爲主였던 아시아 國家들이 開放市場 政策을 始作했지만, 外換管理 能力과 外換保有量이 不足하였기 때문에 對外 金融勢力의 攻擊에 無力할 수밖에 없었다. 固定換率을 쓰던 泰國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外換을 견디지 못해 變動換率로 旋回한 것에 아시아 各國의 外國資本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當然한 일이었다. 조지 소로스 가 運營하던 퀀텀펀드를 비롯한 規模가 큰 國際金融勢力들이 1990年代에 이미 스웨덴, 아르헨티나, 멕시코 等地에서 여러 次例 敢行했던 手法대로 約束한 듯이 同時에 短期 投資金을 回收해 빠져나가면서 先物換去來를 利用한 株式大量賣渡와 幻投機 攻擊 等을 敢行하여 東아시아 前半에 中央銀行의 外換保有量을 枯渴시키고 그 後 달러 救濟金融 要請을 받은 IMF가 强要한 苛酷한 構造調整 條件을 통해 不實企業 뿐만 아니라 正常的인 企業까지 黑字倒産等으로 박살내고 美國과 英國等의 資本에 歇값에 再引受하려는 美國-英國 投機勢力들의 意圖가 있었다.

이러한 國際的 投機 勢力들의 攻擊과는 別途로 그 무렵 美國 政府의 立場이 相當히 注目되는데, 美 國務部 情報調査局 INR은 韓國에 外換危機가 發生하기 훨씬 前인 1997年 初부터 閑步事態 等 韓國의 經濟 動向을 有心히 觀察해왔고, 駐韓 美 大使館은 韓國이 IMF 管理體制에 들어간 1997年 12月부터 아예 'IMF 데일리'라는 題目의 一日報告書를 作成해 本國으로 電送했는데 1998年 2月 美 國務部에 보낸 祕密 全文에 담긴 98年도 韓國 關聯 最優先 政策目標에는 韓國이 金融危機를 헤쳐나가도록 돕는 同時에 IMF와 美國에 對한 要求를 徹底하게 지키느냐는 것이라고 明示돼 있었는바, 當時 韓國은 IMF 協約뿐 아니라 美國式 整理解雇制 導入과 敵對的 M&A 許容도 約束한 狀態였고, 또한 IMF 處方의 效果로 1998年 下半期에는 美國의 金融資本과 金融會社들이 大擧로 韓國에 進出함으로 因해 韓國과의 市場開放協商에서 좋은 利權을 노릴 수 있을 것이라고 展望하고 있기까지 하다. 特히 美國政府는 韓國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外換危機가 發生했다고 訓育하고 IMF의 命令에 徹底하게 服從하며 美國과 英國等의 外資誘致를 積極 歡迎하게 하고 그들에게 徹底하게 服從하게 하는 點이 重要하다면서, 外換危機의 原因과 關聯해 이른바 內人論에 韓國 輿論이 쏠리는 것을 韓英하고 이로 인해 美國과 英國의 金融資本에 徹底하게 服從하여 IMF를 利用하여 아시아 國家들에게 韓國式 構造調整을 强要하게 하며 東北亞 經濟的利權 擴張을 노리며 美國 英國等 西區 投機資本들의 植民地化를 IMF와 美國이 노렸던 側面도 剛하다. 이는 韓國과 韓國政府로 하여금 當時 東아시아 全體 外換金融市場의 全般的 狀況에 對한 理解보다는 當時 執權政府의 政策 失敗와 無能에 對한 否定的 輿論을 오래도록 刻印시키는 데에 크게 寄與하며 그로 인해 IMF와 美國 英國等 西歐 金融資本과 投機勢力들이 自身들의 經濟的 利權을 챙기는 機會로 韓國과 아시아國家들의 金融危機를 利用한 것이다. 當時 IMF 外換危機 에 對해 美國과 日本의 經濟的 利權다툼에 韓國이 犧牲羊이었다는 앤드류 월터 敎授의 칼럼이 동아일보에 偈諦되기도 했다. [13]

IMF 經濟危機 克服

김대중 政府로 政權이 바뀌면서 IMF를 克服하는 一環으로 外國人 投資 自律化 政策, 大企業을 各 企業으로 독립시키는 構造調整을 斷行, IT 育成政策, 信用카드 政策, 整理解雇制를 導入했다. IMF 2年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經濟指標上으로 失業率을 除外하고 成長·物價·經常收支 等에서 全般的으로 外換危機 以前 水準을 거의 回復했다. 株價는 外換危機 以前 水準보다 높아졌고 金利는 낮아졌으며 換率도 거의 비슷한 水準까지 내려 앉았다. 外換危機의 影響으로 1998年에 急速하게 內需가 萎縮되면서 큰 幅의 마이너스 成長을 記錄했지만 1999年 들어 豫想보다 훨씬 빠른 回復速度를 보이며 두 자리數 成長을 바라볼 程度였다. 1998年 貿易收支 黑字가 390億 달러로 史上 最大를 記錄한 데 이어 1999年에도 239億 달러 黑字를 記錄했다. 2000年에는 油價上昇과 景氣上昇으로 인한 輸入需要 增加에 따라 黑字 規模가 縮小되기는 했지만 亦是 117億 달러 以上의 黑字를 記錄했고. 工場 稼動率도 內需 增加勢를 反映하며 輸出이 꾸준히 增加하면서 80%臺로 다시 上昇했다. 業種間의 隔差가 多少 있기는 하지만 鐵鋼, 纖維를 除外한 大部分의 業種에서 뚜렷한 景氣上昇이 보이고 特히 半導體·情報通信·朝鮮·自動車는 1990年代 初에 이어 好況期를 맞은 狀態였다. 1999年 1人當 國民所得도 約 8,400餘 달러, 2000年의 11,292달러로 回復하기 始作했다. 失業率은 IMF管理體制로 들어간 지 1年 만인 1999年 2月에 8.9%로 急騰한 뒤, 이 以後 景氣回復과 IT붐으로 給付로 1999年 12月에는 5.3%를 보였지만 不實企業의 退出과 IMF의 命令으로 强力한 構造調整이 이루어지면서 2000年 6.4%로 如前한 高失業率에 허덕였다.

이처럼 韓國 經濟는 IMF 危機를 겪은 지 2年 만에 '高成長-低物價-經常收支 黑字'라는 세 마리 토끼를 同時에 잡는 能力을 發揮했다. 또한 1997年 IMF 救濟金融 要請 當時 大韓民國의 外債를 갚기 위해 市民들이 自發的으로 自身이 所有하던 金을 寄附해 全國 累計 約 350萬 名이 參與한 이 運動으로 約 227톤의 금이 모아져 世界的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金모으기 運動은 韓國經濟에 對한 國際社會의 肯定的 評價를 이끌어 내는데 一助했다.

財政經濟部가 發表한 資料에 따르면 1997年 5.8%를 記錄한 成長率은 外換危機를 겪은 1998年의 境遇 1分期 마이너스로 돌아선 뒤 3分期 -8.7%까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1999年 1分期부터 플러스로 反轉을 試圖, 1999年 들어서는 2分期 7.6%, 3分期 13.8%臺로 뛰어 올라 經濟 關聯機關들 사이에 景氣過熱 論爭마저 불러 일으켰다. 한便 消費者物價는 1998年 7.5%에서 1999年엔 2% 以下로 뚝 떨어졌으며, 2000年에도 3%臺의 安定勢를 持續했다. 이러한 巨視經濟指標 好調에 힘입어 1997年 12月 18日 바닥(39億 달러)이 보이던 外換保有高는 2000年 5月, 800億 달러에 肉薄하였다. 外債規模 縮小로 1979年 韓國銀行이 外債統計를 作成한 以來 最初로 純債權國으로 탈바꿈했다. 投資不適格 等級으로 墜落했던 國家信用 等級도 主要 國際 信用評價 機關들에 依해 投資適格 等級으로 上向調整됐다. 金融市場도 外形上 安定勢를 되찾았다. 外換危機로 騰落을 거듭했던 달러當 換率은 1,100원臺로 安定勢에 접어들었다. 30%臺로 솟구쳤던 市場金利(콜金利)는 安定勢를 보이면서 1998年 10月 以後 한자리數(4%臺)로 下落했다. 1998年 6月 16日 280線까지 下落했던 綜合株價指數는 1999年 6月 23日 95年 以後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突破한 뒤 大宇問題로 一時 調整을 받았으나, 11月 以後 上昇勢를 타며 950 - 1000포인트를 오르내렸다. 어음不渡率도 外換危機 以前 水準으로 下落했으며, 하루 平均 不渡業體數는 97年 末 128個에서 99年 10月 20個대로 떨어졌다. 反面 失業者數는 178萬名을 頂點으로 減少하기 始作했으나, 1999年 末까지 100萬名을 維持하였다. [14]

2000年 12月 4日 김대중 大統領은 "우리나라가 IMF 危機에서 完全히 벗어났다"고 公式 發表했다. 그러나 그 以後에도 內需 振作을 위한 無分別한 信用카드政策, IT 거품, 非正規職 問題, 公的資金 透明化 및 公的資金 回收, 靑年失業과 高失業亂 等이 있었다.

消費部門

大企業들의 연이은 不渡事態에 따른 雇傭不安과 實質賃金 增加勢 鈍化, 株式價格의 暴落 等으로 消費는 뚜렷하게 鈍化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7年 들어 3/4分期까지 消費增加率은 成長率에 비해 1%포인트 낮은 水準을 보였다. 1997年 11月 外換危機 以後 換率이 크게 오르고 IMF 救濟金融이 決定된 以後 輸入制 價格上昇과 未來 所得에 對한 不安感으로 消費는 더욱 萎縮되었다. 1998年 中 消費는 마이너스 成長을 記錄했다. 實質賃金의 下落으로 家計의 購買力이 크게 떨어진 데다 株式價格이나 不動産價格 亦是 弱勢를 면치 못하여 資産價格의 上昇에 따른 富의 效果도 期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8年 中 名目賃金은 雇傭不安에 따른 賃金引上 要求 抑制와 企業의 收益性 下落으로 1.5% 內外의 增加에 그친 反面 消費者 物價上昇率은 換率上昇과 稅率引上으로 거의 7%에 이르러 實質賃金은 오히려 減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97年 株式價格의 暴落으로 40兆 원假量 줄어든 上場株式의 市場價値는 1998年 中에도 마이너스 成長과 높은 利子率로 回復의 幅이 크지 않았다. 利子率 上昇과 景氣沈滯에 따른 住宅需要 鈍化와 企業構造調整에 따른 商業用建物과 土地의 賣物增加로 不動産 價格도 弱勢를 면치 못했다. 消費心理도 크게 萎縮되었다. 社會的으로 消費節約 雰圍氣가 廣範圍하게 擴散된 데다 失業이 크게 늘어 未來所得에 對한 不安感도 增幅되었다. 또 借入을 통한 消費支出 與件도 매우 惡化되었는데 利子率 上昇으로 消費의 機會費用이 커진 데다 債務償還이 큰 負擔으로 作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金融産業의 構造調整으로 金融機關의 家計에 對한 信用供與 餘力도 크게 떨어졌다. 消費支出 減少는 民間보다는 政府部門에서, 非耐久財나 서비스보다는 耐久財 部門에서 더욱 甚했다. IMF와의 協議에 따라 政府는 財政을 最小限 均衡水準으로 맞춰야 하는 데다 金融産業의 構造調整 費用과 成長率 鈍化에 따른 稅收減少 等으로 政府消費는 大幅 줄어들었다. [14]

建設部門

建設投資는 1996年 經濟成長率보다 높은 8.2%의 增加率을 보였으나 1997年中에는 크게 萎縮되는 모습을 보였다. 社會間接資本에 對한 投資가 큰 幅으로 늘어났음에도 不拘하고 아파트, 多世帶住宅 等 住居用 建物建設이 分讓低調 및 不渡業體 增加 等으로 不振한 데다 工場, 빌딩 等 非住居用 建物建設이 크게 減少했기 때문이다. 1998年中 建設投資는 1997年보다 더욱 萎縮되어 極甚한 沈滯 狀態를 보였다. 不實債券 整理費用과 稅收減少로 來年 政府豫算이 當初 計劃보다 훨씬 縮小되어 그동안 建設投資를 主導했던 社會間接資本 中心의 土木建設이 크게 萎縮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政府豫算 中 約 57%가 硬直性 經費로 構成되어 있기 때문에 政府豫算의 縮小는 相對的으로 彈力的인 調整이 可能한 社會間接資本에 對한 投資部門에서 相當 部分 줄일 수밖에 없는 狀況이다. 特히 大型 國策事業의 縮小 或은 部分的인 延期는 不可避한 狀況이었다. 建設投資 不振은 1999年부터 다시 增加勢로 돌아섰으나 增加幅은 微微한 水準에 그쳤다. 不實債券 整理, 預金者 保護基金 마련 等을 위해 發行될 國公債에 對한 利子 負擔 等으로 1999年 以後에도 相當 期間 동안 緊縮的인 財政運用이 不可避하여 公共部門의 大規模 土木工事 發注를 期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住宅建設에서도 住宅普及率 上昇으로 新規住宅 需要가 過去에 비해 줄어들고 있을 뿐아니라 低成長에 따른 民間의 所得增加勢 鈍化로 活氣를 되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2000年頃 景氣가 多少 回復되면서 建設投資도 小幅이나마 살아나겠으나 經濟成長率보다 多少 낮은 3.6% 程度의 水準에 그쳤다. [14]

設備部門

1996年 7%의 增加率을 記錄했던 設備投資는 1997年 減少勢로 돌아선 以後 下落幅이 漸次 커졌다. 主要 裝置産業의 設備擴張이 一段落된 데다 在庫增加와 輸出單價 下落으로 投資 誘引이 크게 줄어들었고 大企業의 連鎖不渡와 金融市場의 不安 等으로 投資心理도 萎縮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97年中 設備投資는 約 9.0% 減少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8年 中 設備投資는 1997年보다 훨씬 큰 幅으로 萎縮되었다. IMF 救濟金融이 始作된 以後에도 金融市場 不安이 繼續되고 있어 企業들의 投資心理가 極度로 萎縮되어 있는 데다 急激한 換率上昇으로 施設用 資本財 輸入이 急激히 減少했기 때문이다. 世界景氣가 當初 豫想보다 鈍化되었고 主要 輸出商品의 國際的인 供給過剩 現象이 1998年에도 解消되지 않아 設備擴張에 對한 誘引이 크게 減少했다. 그동안 設備投資를 主導했던 半導體, 鐵鋼, 石油化學, 自動車産業 等이 全體 設備投資의 折半假量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供給過剩이 憂慮되고 있는 이들 裝置産業에서의 投資鈍化는 向後 全體 設備投資 鈍化에 적지 않은 影響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98年의 急激한 設備投資 減少의 原因은 무엇보다 IMF의 緊急資金 支援後 大部分의 企業들이 投資는 고사하고 生存自體가 威脅받는 急迫한 經營環境에 逢着했기 때문이다. 企業 內部的으로는 內需不振과 輸出單價 下落으로 採算性이 惡化되어 投資財源 確保가 어려운 狀況이다. 더욱이 企業不渡 可能性이 漸次 커지고 있기 때문에 泄瀉 內部資金이 造成되더라도 企業들은 無理한 投資를 自制하고 內實을 다져 流動性을 確保하려는 態度를 堅持하고 있다. 1999年의 境遇 設備投資는 24.9%까지 이루어졌다. 換率上昇에 힘입어 輸出物量이 크게 늘어나면서 生産能力 擴大의 必要性이 커지고 金融市場이 어느程度 安定되면서 設備投資 環境이 多少나마 改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經濟가 IMF體制 以後 低成長期에 접어들어 過去와 같은 높은 投資需要를 創出해내기 어려운 데다 반드시 必要한 部門에 選擇的으로 投資하는 經營 雰圍氣가 擴散될 것으로 보여 큰 幅의 設備投資 增加勢는 期待하기 어려운 狀況이었다. 投資의 內容도 單純한 施設擴張보다는 合理化나 R&D 投資 等 企業의 生産性을 높이기 위한 投資에 集中되면서 2000年에는 年間 12.9% 水準의 增加勢를 보였다. [14]

失業問題

1998年 中 우리나라는 失業者數 130萬 名 以上의 本格的인 高失業 時代에 접어들었다. 마이너스 經濟成長率, 企業들의 投資縮小 等으로 新規雇傭 創出力이 急激히 鈍化된 데다 金融産業 等의 構造調整과 이에 따른 企業 連鎖不渡 等으로 旣存 就業者의 失職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IMF가 要求하고 있는 引受合倂 關聯 整理解雇 等 勞動市場 柔軟性 關聯 政策이 施行되면서 構造調整에 따른 失職이 現實化되면서 失業者 增加速度가 豫想外로 빨라졌다. 1999年末 基準으로 失業率은 約 4.6%로 如前히 100萬名 程度 失業自家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IMF의 金融支援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1999年 以後 景氣가 다시 回復되고는 있지만 高失業 現象이 解消되기까지는 앞으로도 相當期間이 所要될 展望이다. 成長에 따른 産業의 雇傭創出이 1990年代 以後 뚜렷한 鈍化勢를 보이고 있는 데다 1∼2年 안에 本格 導入된 것으로 보이는 整理解雇制 等 勞動市場 柔軟化 政策이 企業의 構造調整 强度를 더욱 높여 每年 失職者가 量産될 것으로 豫想되기 때문이다. 또한 男性失職에 따른 女性들의 經濟活動參加 增加 傾向이 當分間 持續될 兆朕을 보이고 있고 旣存의 外形成長 爲主에서 內實爲主 經營基調로 轉換하고 있는 企業들의 組織 및 人力規模 縮小 傾向도 雇傭不安을 더욱 加速시킬 것으로 보인다. 特히, 企業들이 構造調整 等 急激한 環境變化에 따른 彈力的인 人力調整을 위해 人力採用視 常傭職 比重을 줄이고 臨時職 또는 契約職 比重을 擴大하는 한便 派遣勤勞者를 積極 活用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非正規職 勤勞者가 急騰하면서 國民들이 體感하게 될 雇傭不安 程度는 當分間 持續될 展望이다 [14] .

賃金上昇率

1997年 5月까지 두 자리 數를 維持하던 賃金上昇率이 6月부터 6%臺의 急激한 鈍化勢를 보였다. 1997年 初의 낮은 協約 賃金引上率이 6月 以後 本格的으로 反映되기 始作했기 때문이다. 1997年 10月末 基準으로 全國 100인 以上 事業場의 平均 協約賃金引上率은 1996年 같은 期間에 비해 3.5%포인트가 下落한 4.3% 上昇에 그쳤고 景氣沈滯와 잇따른 企業不渡의 影響으로 企業들의 賞與金 支給이 크게 줄어들면서 特別給與 上昇率도 前 해의 折半水準에 그쳤다. 이에 따라 1997年 1月부터 9月까지의 平均賃金上昇率은 9.3%로 지난 1986年 以後 11年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리數 上昇에 머물렀다. 1998年에는 賃金上昇率 鈍化勢가 더욱 뚜렷해졌다. 雇傭不安에 따른 勤勞者들의 賃金引上 欲求 自制, 收益性 下落에 따른 企業의 支拂能力 低下 等으로 賃金凍結 乃至 減縮 雰圍氣가 擴散되면서 名目賃金上昇率은 1998年中 1.5% 水準까지 떨어졌다. 特히 景氣變化에 相當히 彈力的인 企業들의 賞與金 等 特別給與 資金이 大幅 줄어들면서 全體 賃金上昇率을 끌어내리는 主要因이 되었다. 그러나 換率急騰의 餘波로 物價가 名目賃金上昇率을 上廻하는 큰 幅의 오름勢를 相當期間 持續하였고, 景氣가 回復局面에 접어든 1999年 以後로 賃金上昇 壓力이 높아졌다. [14]

物價

1997年 物價는 1996年보다 多少 不安한 모습을 보였다. 農産物 等 商品 物價는 1996年보다 多少 不安했으나 個人서비스料金 等 서비스 物價는 消費不振, 人件費 上昇勢 鈍化 等으로 安定勢를 보였다. 1991年 以後 長期 下向 安定趨勢를 持續해오던 住宅賣買·傳貰價格은 1996年 末부터 1997年 봄 移徙철까지 不動産景氣 10年週期說 等 집값 오름勢 心理가 擴散되면서 新都市를 中心으로 比較的 큰 幅으로 올랐다. 上半期中 不安했던 物價는 가을철 들어 農産物의 本格的인 出荷期로 접어들면서 下向 安定勢를 維持했다. 쌀 等 農産物 作況이 3年째 好調를 보여 가을 物價安定에 큰 寄與를 했다. 1997年 年初 크게 올랐던 住宅賣買·傳貰價格도 가을 移徙철 以後 下落勢로 돌아섰다. 그러나 12月 들어 物價는 가파른 上昇勢를 보였다. 換率急騰의 影響으로 石油類, 都市가스 等 에너지 價格이 큰 幅으로 引上된 데다 輸入 元副資材를 主로 使用하는 밀가루 加工食品, 雪糖, 커피, 햄 等 生必品 價格이 크게 올랐다. 1998年 物價는 큰 幅의 上昇勢를 보였다. 緊縮政策 및 消費沈滯로 총수요 壓力은 顯著히 낮아졌으나 大部分 元副資材를 輸入에 依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生産構造로 원貨換率 上昇幅이 워낙 커 原價上昇에 따른 物價波及 效果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換率急騰에 따라 國際原資材, 國際穀物 等 元副資材 輸入價格 上昇이 時差를 두고 國內物價에 影響을 끼쳤고 또한 輸入品 및 原材料 依存度가 높은 關聯商品의 價格引上은 勿論 에너지 價格上昇에 따른 工産品 및 서비스 物價上昇 等 直間接的인 經路를 통해 廣範圍한 部門에 걸쳐 影響을 주었다. 換率急騰에 따른 物價不安은 이미 1997年 12月 들어 可視化되었다. 11月 中 消費者物價는 0.1% 上昇에 그쳤으나 生産者物價는 0.7% 올라 換率急騰에 따른 消費者物價 上昇을 豫告했다. 實際로 12月 消費者物價는 月刊上昇率로 16年만의 最高値인 2.5%를 記錄했으며 生産者物價는 12月 한달 동안 8.2%나 올라 1998年 上半期까지 가파른 物價上昇勢가 이어졌다. 그러나 1999年 消費者物價 上昇率은 0.8%에 그쳤으며, 2000年에도 3% 內外에서 머물렀다 [14] .

金利와 換率

大韓民國의 金利는 1998年 下半期 以後부터 資金需給 狀況이 多少 改善되며 下向安定勢로 轉換되고 있다. 원貨換率 亦是 1998年 下半期부터 外國人 投資資金이 漸次 再流入되기 始作하면서 中長期的인 下向安定勢로 돌아섰다. 그러나 數年 內에 外換危機 發生 以前인 달러當 1,000원 以下 水準을 回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14] .

金利

IMF와의 救濟金融 協商이 妥結된 以後 資金市場의 梗塞이 繼續되고 있다. 14個 種禽舍가 營業停止를 當한데 이어 救濟金融協約에 BIS 自己資本比率이 8% 以下인 銀行에 對해 閉鎖措置를 取할 것이라는 內容이 包含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銀行들이 種禽舍에 對한 콜資金 提供 및 企業들에 對한 新規與信을 中斷하는 同時에 貸出金을 回收하였기 때문이었다. 現在의 高金利는 當分間 繼續될 것으로 展望된다. 于先 緊縮的인 通貨政策이 相當期間 持續될 것으로 豫想된다. IMF와의 協約에 따르면 總流動性(M3) 增加率을 1997年 15% 線에서 1998年에는 9%線으로 낮추었다. IMF는 원貨切下가 물가에 주는 衝擊을 緩和하기 위해 通貨管理를 緊縮的으로 運用하고 高金利를 維持할 것을 要求했다. 따라서 韓銀(韓銀)의 資金放出은 制限的인 水準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며, 特히 換率切下에 따른 輸入物價 上昇으로 物價 不安 心理를 억누르기 위해서 緊縮的인 通貨管理는 不可避했다. 또한 追加的인 換率上昇을 抑制하기 위해서 高金利政策을 當分間 維持할 것으로 豫想된다. 金融機關의 構造調整은 市中流動性을 壓迫하는 要因으로 作用해 왔다. IMF와의 救濟金融協商에 따라 1998年 6月까지 BIS 自己資本比率 8%를 충족시키기 위해 國內銀行들은 保守的인 資金運用으로 一貫했다. 卽 BIS 自己資本比率을 높이기 위한 銀行들의 努力은 與信凍結, 貸出金利 引上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通貨緊縮과 高金利에 따른 大量不渡는 金融機關의 資金供給과 債券買收를 위축시켜 金利下落을 가로막는 要因으로 作用했다. 한便 1997年 末 無慮 29%까지 치솟았던 金利는 1999年 末 9%臺로 安定되었다. [14]

換率과 外債

원-달러 換率表.
98年, 換率이 急上昇했음을 알 수 있다.

IMF와 美·日 等의 早期 資金支援으로 國家不渡라는 最惡의 狀況이 發生할 可能性이 弱化되고 換率安定의 발板이 마련되었지만, 如前히 不安要因이 없는 것은 아니다. 果敢한 金融改革 및 對外開放 政策이 제대로 施行되지 않거나 經濟構造調整 過程에서 經濟主體 또는 政派間의 利害關係 衝突로 社會·經濟的 混亂이 招來된다면 또다시 對外信賴度 墜落과 國家不渡 危機, 換率急騰 現象이 反復될 수 있기 때문이다. 中長期的으로 볼 때도 莫大한 外債償還 負擔이 원貨換率의 安定을 어렵게 할 可能性이 높다. 우리나라 總外債 規模는 1998年 基準으로 1,493億 5,400萬 달러이다. 總外債 規模가 東南亞 國家들과 1994∼1995年中 外換危機 當時 멕시코에 비해서도 적다고 할 수가 없으며, 短期外債 比重은 越等히 높은 狀態이다. 이에 따라 國家不渡의 危機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숨쉴 틈 없이 滿期가 돌아오는 外債에 對해 100% 滿期延長이 되지 않는 限, 外債償還 負擔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向後 數年間 外債償還 負擔으로 인해 外貨流動性이 넉넉지는 못할 可能性이 높은 것이다. [14]

빅딜

企業交換을 말한다. 卽 業種專門化를 꾀하는 한 企業이 主力 業種을 다른 企業과 交換하는 것을 말한다. 經營用語로는 事業交換이라고 表現한다. 빅딜의 形態는 A와 B라는 業種을 함께 所有하고 있는 두 會社가 相對方에게 競爭力이 弱한 業種을 引繼하고, 다른 業種을 引受받는 形式으로 進行된다. 빅딜을 위해서는 事前에 對象 業體에 對한 資産을 評價하고, 이 資産을 資本金으로 내놓은 다음 共同法人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빅딜 對象 事業體에 對한 資産評價가 一致할 수 없기 때문에 共同法人을 만들기로 合意하는 것은 쉽지만 實際로 法人 設立은 어려운 것이다. IMF金融 危機 以後 國內에서도 企業間 빅딜 作業이 活潑히 進行되고 있으나 最終 成事까지는 많은 陣痛이 豫想되고 있다. 대우전자를 三星電子 에, 삼성자동차를 大宇自動車 에 넘기는 빅딜이 代表的이다. [14]

國際收支

1998年 經常收支는 換率의 急騰과 內需의 萎縮으로 輸入이 크게 萎縮되고 反面 輸出은 크게 切下된 원貨價値로 價格競爭力이 提高되어 높은 水準의 增加率을 보였다. 또한 旅行支出의 減少 等으로 貿易外收支의 赤字幅도 많이 줄었다. 1999年 11月까지 輸出 累計는 1,288億 8,000萬 달러, 輸入 累計는 1,071億 2,000萬 달러로 貿易黑字 累計는 217億 6,000萬 달러로 年間 目標値 250億 달러의 87.1%에 達하고 있다. 産業資源部 는 12月에는 輸出이 11月보다 7億 - 8億 달러 늘기 때문에 輸入만 現 水準을 維持하면 目標 達成도 可能할 것으로 期待하고 있으나, 大略 245億 달러 안팎이 될 것으로 展望하고 있다. 經常收支의 黑字趨勢는 2000年까지도 持續되어 100 - 150億 달러 內外의 黑字 基調가 維持될 것으로 展望된다 [14] .

輸出展望

1997年 中 輸出은 輸出單價의 持續的 下落에도 不拘하고 輸出物量의 꾸준한 增加에 힘입어 金額基準으로 1996年보다 높은 增加率을 記錄하였다. 上半期 中 마이너스 增加率을 記錄하기도 했던 通關基準 輸出은 3/4分期 中에는 두 자리代의 增加率을 記錄했다. 物量 側面에서 보면 1/4分期 中에도 16.8%나 增加했고 3/4分期 中에는 36%의 높은 增加率을 보였다. 4/4分期 들어서도 東南 아시아의 通貨危機로 이들 地域에 對한 輸出이 蹉跌을 빚으면서 輸出增加勢가 다시 한 자리대로 鈍化되었지만 輸出物量은 如前히 20% 以上의 增加勢를 보였다. 이처럼 輸出物量 增加原因은 원貨切下로 인한 國內 輸出企業의 價格競爭力 提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貨切下는 輸出單價 下落을 더욱 부채질하는 側面도 存在한다. 달러貨 標示 輸出單價가 下落하더라도 원貨標示 輸出單價의 下落幅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急激하게 進行된 원貨價値의 下落에 힘입어 1998年에도 輸出은 好調를 보였다. 1998年中 원/달러 換率은 1997年에 비해 年平均으로 40% 以上 높아졌기 때문에 이로 인한 價格競爭力 提高 效果는 매우 컸다. 뿐만 아니라 內需景氣의 萎縮으로 販賣難에 直面한 企業들이 輸出擴大에 總力을 기울인 點도 認定된다. 極甚한 外換不足에서 어느 程度 벗어난 1998年 下半期부터 원貨가 切上趨勢로 反轉되어 上半期에 비해 輸出의 價格競爭力 提高 效果가 많이 줄어들었다. 大韓民國을 비롯한 아시아 國家들에서 通貨危機의 餘波가 거의 解消될 것으로 보이는 2000年에는 各國의 景氣가 本格的인 回復局面에 접어들면서 輸出增加率도 多少 높아질 것으로 展望된다. 그러나 設備投資의 不振으로 生産能力의 擴大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원貨의 切上趨勢가 持續됨에도 不拘하고 輸出單價가 上昇勢로 反轉되기는 힘들어 輸出增加率이 두 자리臺까지 높아지지는 않을 것으로 展望된다. [14]

收入展望

景氣沈滯와 원貨切下로 1997年 中 輸入은 빠른 速度로 鈍化되었다. 원貨切下로 輸入品의 價格이 비싸지면서 國産品으로의 代替가 늘고 있는데다 設備投資의 不振에 따른 資本財 輸入의 減少에 힘입어 下半期 들어서는 輸入增加率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더구나 輸出單價 못지않게 輸入單價도 큰 幅으로 下落하고 있어 收入의 減少幅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穀物과 原油 等 國際原資材 價格이 弱勢를 보이고 있는데다 엔貨 價値 下落과 景氣沈滯에 따른 日本의 物量攻勢로 資本財의 輸入單價도 큰 幅의 下落勢를 나타내고 있다. 收入의 減少 趨勢는 1998年中에도 持續되었다. 穀物, 原油 等의 原資材 輸入은 代替가 힘들기 때문에 크게 줄지 않았지만 資本財 輸入은 設備投資가 크게 萎縮되면서 큰 幅으로 줄어들었다. 消費財 輸入의 境遇도 그동안 높은 增加勢를 보이던 奢侈性 消費財의 輸入이 大幅 줄어들고 원貨切下로 輸入品의 價格이 비싸져 奢侈品이 아니더라도 相當部分 國産品으로 代替되기도 했다. 輸入線多邊化 解除 等 市場開放이 擴大됨에도 不拘하고 1998年에는 消費者의 購買力 減少로 消費財 輸入이 크게 늘지 않았다. 1999年부터 景氣가 多少 回復勢로 反轉되고 特히 消費와 投資 等 內需競技가 增加勢로 돌아서면서 輸入도 많이 늘었다. 內需競技가 本格的으로 살아나는 2000年부터는 더욱 늘어 通關基準 輸入增加率이 1999年 5.7%에서 2000年에는 9.5%로 높아질 것으로 展望된다. [14]

經常收支

1996年 中 237億 달러를 記錄했던 經常收支 赤字는 1997年 1/4分期 中 74億 달러를 記錄하기도 했으나 2/4分期 以後 輸入이 크게 줄어들면서 赤字幅도 減少했다. 11月부터는 經常收支가 黑字로 轉換되어 年間으로는 1996年의 折半 水準인 109億 달러의 赤字에 머물렀다. 經常收支 赤字의 折半 以上을 차지하면서 赤字 改善에 걸림돌로 作用하던 貿易外收支 赤字도 4/4分期 以後 크게 改善되기 始作했다. 經常收支의 改善 趨勢는 1998年 中에도 이어져 年間으로 큰 幅의 黑字를 記錄했다. [15] 貿易外收支의 赤字는 持續될 것으로 보이지만 貿易收支가 큰 幅의 黑字를 實現하면서 經常收支의 黑字反戰을 主導한 것이다. 원貨切下에 따른 輸出好調와 內需景氣 沈滯에 따른 收入減少로 1998年 貿易收支는 豫想을 깨고 400億 달러, 1999年 230億 달러가 넘는 黑字를 記錄하면서 經常收支 改善에 크게 寄與했다. 産資部는 輸出이 7 - 8% 늘고 輸入이 7 - 18% 늘 것으로 假定해 2000年度 貿易收支 黑字規模는 100億 - 150億 달러로 縮小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輸出增加率 7%, 輸入增加率 18%, 貿易黑字 125億 달러로 豫測했으며, 현대경제연구원은 輸出增加率 6.6%, 輸入增加率 18.2%, 貿易黑字 97億 달러로 내다봤다. LG經濟硏究院은 輸出增加率 13.3%, 收入增加率 24.6%, 貿易黑字 135億 달러로 展望했다. 1998年을 고비로 競技가 回復되고 換率 與件이 好轉되면서 海外旅行 需要는 다시 增加勢로 돌아설 可能性이 크다. 經常收支 黑字로 外債規模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國內 資本市場의 開放과 對外信認度 下落效果가 持續되면서 投資는 豫想보다 많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4]

2000年 韓國經濟 展望

民間硏究所 2000年 經濟 展望 [16] (單位:%)

舊 分

三星

現代

LG

待遇

韓經硏

經 제 性 張 률

閔 肝 소 비 增 가 율

건 설 套 者 增 가 율

설 비 套 者 增 가 율

經 賞 수 지 黑 者(億달러)

소 비 자 물 가 上 勝 률

失 業 률

6.5

5.7

8.5

10.9

101

3.2

5.8

5.9

6.5

7.7

17.8

87

4.0

5.4

6.7

5.8

9.2

11.0

107

3.5

5.3

5.0

4.9

10.2

8.9

97

2.7

6.4

7.0

3.6

12.9

92

3.9

國際通貨基金(IMF)과 大韓民國 政府는 1999年 成長率 8~9%, 消費者物價 上昇率은 1% 以內, 經常收支 黑字는 GDP의 6% 內外(藥 250億 달러)에 이른다는 巨視指標 展望에 合意했다. 또 2000年에는 經濟成長率 5~6%, 物價 3%, 經常收支 黑字 100~150億 달러 等의 展望値에 意見一致를 이뤘다. 이와함께 現在의 景氣 狀態는 過熱이 아니며 來年에도 低金利 基調를 維持해야 한다는 旣存 原則을 再確認하고 景氣回復에 따라 財政赤字幅을 줄여나가되 2004年에는 均衡財政을 達成하기로 했다. 2000年 世界經濟는 3%臺, 아시아는 5.7%, 우리나라는 6%臺의 高成長을 記錄할 것이라고 主要 國際機構들이 展望했다. 世界貿易機構(WTO)는 美國과 西유럽·日本 等의 經濟成長에 힘입어 來年 世界貿易이 6~7% 成長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1999年의 4%보다 2倍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金額으로 치면 8~9% 程度 늘어난 數値다. ADB는 特히 韓國이 아시아經濟의 回復勢를 主導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1998年 5.8% 成長에 그쳤지만 1999年은 9.0%, 2000年에는 6.0% 成長할 것이라고 展望했다. 英國 이코노미스트 經濟硏究所(EIU)는 最近 發刊한 '2000年 對豫測' 報告書에서 來年 우리나라 經濟成長率이 6.1%에 達하고 物價上昇率은 2.7%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또 來年 經濟開發協力機構(OECD)會員國들은 平均 3%, 開發途上國들은 4%의 記錄해 世界經濟가 全般的으로 健全한 成長勢를 보일 것으로 豫測했다.EIU는 特히 來年 우리나라 GDP는 總 4,277億 달러, 1人當 GDP는 9,040달러에 이르고 失業率은 올해 7%에서 來年 6.8%로 낮아질 것으로 展望됐다. 그러나 이 硏究所는 韓國의 빠른 經濟成長은 政府가 構造調整의 고삐를 늦추도록 할 念慮가 있다고 警告했다 [14] .

IMF의 主要 影響

政權 交替

IMF 事態는 最初로 與野 政權交替를 가져올 程度로 매우 深刻한 危機 狀況이었고, 旣存의 社會 觀念들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IMF 救濟金融 事態를 불러일으킨 責任으로 辭任했던 강경식 財政經濟部 長官은 '患亂 事件'의 職務遺棄 等의 嫌疑로 裁判을 받았지만, 無罪判決을 받았다. 執權 與黨이었던 신한국당 (現 새누리黨 )의 候補 李會昌 은 野黨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現 새政治民主聯合 )의 金大中 大統領 候補에게 敗北했다.

獨占 財閥의 解體

1996年, 京畿道 高陽市 一山에서 건영빌라를 大量으로 建設한데서 얻은 放漫한 資金管理에 시화地區 未分讓까지 겹쳐 優性과 건영이 倒産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問題의 始作일 뿐이었다. 1997年과 1998年에는 한 해 동안 한보철강 (現 現代製鐵 ), 삼미그룹 , 진로그룹 , 대농그룹 , 三立食品 , 한신공영 , 기아그룹 , 쌍방울그룹 , 태일정밀 , 해태그룹 , 뉴코아 , 水産重工業 , 한라그룹 , 고려증권 , 請求그룹 , 극동건설 , 나산그룹 , 거평그룹 , 한일그룹 , 雙龍그룹 , 동아그룹 , 고합그룹 , 아남그룹 , 신호그룹 , 友邦그룹 , 새한그룹 , 강원산업 , 큐닉스컴퓨터 , 身元그룹 , 美洲그룹 等 大部分의 財閥 大企業들이 倒産하였으며 以外에도 많은 企業들이 倒産하고 法定管理를 받게 되었다.

特히 1998年 6月 18日에는 이헌재 金融監督委員會 委員長이 이찬우 商業銀行長이 參席한 가운데 記者會見을 가져 55個 企業 淸算, 賣却 方針을 發表하였다. 1999年 大宇그룹 은 過度한 引受 金融을 利用한 企業 擴張이 原因이 되어 負債가 65組로 엄청나게 불어나 IMF 救濟金融 事件 以後 政府의 엄청난 國庫 支出에도 不拘하고 解體되었다.

2000年에는 現代그룹 의 ‘王子의 亂’과 流動性 危機로 現代自動車 , 現代百貨店 , 現代重工業 , 現代海上 , 現代産業開發 , 現代建設 , 현대전자 (現 SK하이닉스 ) 等으로 系列分離를 하였다. 銀行들은 大規模 引受 合倂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途中 많은 企業들이 外國 企業에 歇값에 賣却되는 等 國富의 流出이 深刻하였다.

1998年 7月 1日, 政府가 公企業 民營化 方案을 發表하였고, 남해화학 , 대한교과서 (現 未來엔), 韓國綜合技術金融 (現 KTB네트워크), 大韓送油管公社 , 포항제철 (現 포스코 ), 한국종합화학 (現 케이씨), 한국중공업 (現 斗山重工業 ), 한국통신공사 (現 KT ), 한국담배인삼공사 (現 KT&G ) 總 9個 公企業이 民營化가 되었다. 그리고 只今은 仁川國際空港 等의 公企業 民營化가 進行 中이다.

그리고 三星그룹 , LG그룹 , 선경그룹(現 SK그룹 ), 現代그룹 , 롯데그룹 , 韓華그룹 , 韓進그룹 , 동양그룹 , 대림그룹 , 효성그룹 , 東國製鋼 , 코오롱그룹 , 斗山그룹 , 大象그룹 , 扞率그룹 , 錦湖아시아나그룹 , 동부그룹 , 제일제당그룹(現 CJ그룹 ), 熊進그룹 , 敎保그룹 , 東遠그룹 , 亞洲그룹 과 같이 一部 財閥들은 危機를 敎訓으로 삼아 IMF를 克服할 수 있었다.

解雇 規制 緩和

IMF의 元祖 條件에 따라 雇用市場에 自由競爭體制가 導入되어, 많은 勞動者가 失業者가 되었고 平生雇傭制와 平生職場이라는 槪念이 없어지고 代身 平生職業이란 槪念이 생겨났다. 給與에서도 號俸 槪念 年功序列 代身 年俸制 로 바뀌었고, 또한 整理解雇가 自由로워져 正規職 勤勞者의 比率이 줄어들고 非正規職 勤勞者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政府의 企業政策 變化

金大中 政權은 景氣 浮揚을 위해 建設 支援과 카드 使用 代金의 年末精算 還給 等의 消費 促進 政策을 實施하여 景氣 浮揚에 成功하고 2001年 8月 23日 , 韓國銀行 의 借入金으로, 韓國은 IMF의 救濟金融의 管理體制에서 일찍 벗어났다. 하지만 이 消費 促進 政策은 카드빚에 依한 信用不良者 數를 急激히 증가시켰고 이는 2003年 부터 2005年 까지 이어진 內需不振의 原因이 되었다.

IMF 患亂이 大企業 育成政策에 依한 一部 大企業들의 市場 獨占 때문이라는 分析에 따라 公正去來委員會 金融監督委員會 가 出帆하는 等 財閥 改革이 始作되었으며, 政府는 大企業 育成政策을 抛棄하는 代身 벤처企業 中小企業 育成政策을 始作하여 테헤란로 를 中心으로 많은 벤처企業들이 全盛期를 누렸다.

國民 意識 變化

이 時期는 經濟的으로는 國家全體가 IMF의 命令에 服從해야되던 時節이라 온나라가 그 IMF의 體制를 堪耐해야했다. 그 渦中에 全 國民이 金모으기 運動 等으로 一致·團結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過去의 無事안일주의가 打破되었다는 點에서 肯定的인 評價를 받기도 한다.

公共財 怜悧火 問題

IMF의 元祖 條件에 따라 수자원공사, 韓國電力, 가스公社 等의 放漫 經營으로 電氣, 가스, 水道, 鐵道, 醫療 等 公共財에 對한 民營化가 强制的으로 推進되었다. 하지만 一部 國民들의 反撥로 인해 IMF는 約 10年의 猶豫期間을 주었다. 2008年 李明博 政府에 이르러 猶豫 終了日이 다가옴에 따라 再推進하려했으나 國民들의 大規模 示威로 인해 또 다시 猶豫되었고 IMF는 어쩔 수 없이 約 8年의 猶豫 期間을 주었다. 猶豫 期間이 終了되어가는 只今, 朴槿惠 政府는 民營化를 推進 中이다.

國防事業의 遲延

1980年代 中盤부터 正確히는 1986年부터 1989年에 이르기까지 3低 好況이라고 해서 經濟 成長과 輸出 增加를 거치면서 全 人口의 絶對 多數를 차지할 程度로 中産層의 比重이 두터워졌으며 1990年代 中盤까지 繼續 經濟成長을 하면서 當時 韓國經濟는 檀君 以來 最全盛期기라고 할 程度로 比喩했다. 特히 1990年代 中盤이 되면서 가장 庶民들의 生活이 安定됐고 社會發展이 순조로웠고 失業率은 낮고 物價는 낮았다. 經濟가 꾸준히 하늘 높이 成長하던 時期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庶民들의 將來에 對한 樂觀과 社會에 對한 信賴가 높았으며 韓國社會가 先進國에 進入하는 時期이기도 했고 經濟가 急成長하고 있는 時點으로 1990年代 韓國軍은 韓國의 달라진 經濟力에 걸맞고 他 國家의 對應할 수 있을만한 國防力을 建設할 新武器 導入 事業 및 現代化를 進行하고 있었다.

陸軍의 境遇에는 1990年代 初盤의 大韓民國 陸軍은 美國과 協力하여 3世代 轉借人 K-1 電車를 1987年부터 實戰配置하는 것을 始作으로 1990年代 中盤이 되면 3世代 電車를 1,000餘臺 異常을 實戰配置하게 되었다. 게다가 K200 裝甲車나 K-55 自走砲度 量産이 한창 進行 中이었으며 K-9 自走砲 , K1 電車를 改良한 K1A1 戰車 等은 開發 中이었고 1990年代에 AH-X 事業으로 AH-1 코브라 攻擊헬기를 代替할 次期 攻擊헬기를 購買할 豫定이었다.

그러나 經濟 危機의 影響은 AH-X 事業이 遲延되어 AH-64E 아파치 가디언을 導入한 것은 2010年代에 確定되어 그 結果 2018年 基準으로 AH-1S/F와 함께 AH-64E를 運用하고 있다. [17] 하지만 1990年代 時期를 基準으로 가장 現代化가 必要한 것은 陸軍이 아닌 空軍과 海軍이었다.

그러나 1997年의 外換危機는 各種 國防力 增大 事業들이 取消되거나 延期되는 일이 많았다. 實際로 2001年 記事에서는 "陸軍 AH-X 事業과 海軍 KDX-3 等의 事業들은 모두 各 軍의 代表的인 宿願事業들로 97年 外換危機로 미뤄졌던 것. 特히 지난해 6·15 共同宣言 으로 南北關係가 急進展하면서 자칫 始作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니냐는 憂慮가 强하게 일면서 各 軍의 熾烈한 로비戰이 展開됐다."라는 言及을 하고 있다. [18]

空軍의 境遇에는 現代化 計劃으로 1991年에 KFP 事業으로 選定된 F-16 Block 52 免許生産에 이어서 進行될 元來의 韓國軍 計劃은 1990年代 1次 FX로 F-15 戰鬪機(正確히는 次期 戰鬪機) 120臺 導入으로 마무리가 될 豫定이었고 早期警報器 事業도 進行될 豫定이었다. 그러나 外換危機 以後 1 ~ 2次 FX事業으로 60臺를 나누어서 導入하고 3次 FX 事業으로 F-35 40代(+追加 導入 옵션 20代)의 結果로 나오게 되면서 FX 事業이 길어지고 또한 早期警報器度 1990年代 導入에 關心을 보였으나 1997年 外換危機로 인해서 事業이 無期限 留保되었다가, 2002年에 事業이 再開되었고 더 時間이 흘러서 2010年代가 되면서 E-737 피스아이가 導入되었다. [19]

海軍의 境遇에는 1990年代 初에 大韓民國은 이미 朝鮮産業 規模에서 世界 1位를 達成했다. 軍艦島 나름의 體系를 갖춘 蔚山級 護衛艦 을 乾燥하는 技術 力量을 지녔다. 그러나 海軍은 蔚山級 等의 旣存 體系를 運用했으며 미사일 中心의 先進的인 戰鬪體系, 네트워크 能力은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遠洋能力과 同時에 現代的 戰鬪能力을 갖춘 艦船 建造 技術을 獲得하려는 目標를 세운다.

그것이 KDX-1 計劃으로 KDX-1 廣開土大王級 事業은 우리나라의 驅逐艦 事業의 始作으로 本格的으로 韓國 海軍의 强化를 꾀하는 始作點으로 1998年에 就役했다. 하지만 KDX-1은 運用 以前에도 大洋環境에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指摘이 있었고, 實際로 림팩 訓鍊 等에서 限界를 느껴 3千 톤級은 大洋函으로서는 適合하지 않다는 判斷을 내리게 된다. KDX-1 事業은 3隻에서 終結하고 運用 經驗을 土臺로 1996年부터 KDX-2 忠武公 李舜臣級 事業을 始作하였다.

하지만 IMF 事態로 KDX-2 事業이 危險했지만 2001年 1月부터 乾燥事業을 始作하고 2002年 5月에 鈔盜함을 進水한다. 廣開土大王級의 노하우와 技術을 살려 빠른 時間에 向上된 性能으로 乾燥되었으며 비슷한 時期에 獨島艦 은 2002年 10月 乾燥 開始, 2005年 7月 12日 진수, 2007年 7月 3日 就役했다.

KDX-3로 2007年에 世宗大王函 이 進水되었는데 元來 計劃으로는 이지스艦 6隻을 配置할 計劃이었으나 外換危機의 影響으로 一旦 3隻만 進水되었으며 2020年代 以後에 追加로 進水될 豫定이다. [20]

게다가 2010年代가 되면서 蔚山級 護衛艦, 浦項級 哨戒艦 을 代替할 仁川級, 大邱級 等의 新型 護衛艦 等을 眞髓하고 있다.

그 結果 IMF 救濟金融 要請의 影響으로 早期警報器 等의 支援 前歷을 除外하더라도 2018年을 基準으로 F-15 戰鬪機만 比較해도 美國이 450代, 日本이 200代, 大韓民國이 59臺를 運用하고 있다.

이지스艦 으로 比較하자면 美國이 90隻(줌曰트級 3隻, 알레이버크級 65隻, 타이콘데로가級 22隻), 日本 8隻(공高級 4隻, 아타高級 2隻, 摩耶級 2隻)이다. 하지만 大韓民國 海軍은 3隻(世宗大王級)만을 運用 中이며 2020年代가 되어서 追加로 3隻을 進水할 豫定이다.

그 結果 1997年의 外換危機는 國防力의 增大에 많은 影響을 주었다.

같이 보기

各州

  1. 外貨準備高と債務?債?を合計するとなんと?家が債務超過?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新BIS規制??で貯蓄銀行に業務改善命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달라진 大韓民國의 7가지 참모습 . 國政브리핑. 2007年 11月 9日.
  4. 이정환. IMF 10年…韓國 經濟는 왜 力動性을 잃었을까 . 미디어오늘. 2007年 11月 21日.
  5. 유석재 (2008年 8月 18日). “寫眞으로 본 '建國 60年, 60代 事件' 大量 不渡?實業(不渡·失業)… 온國民이 한마음으로 이겨내” . 朝鮮日報 . 2008年 8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8月 18日에 確認함 .  
  6. 손철. (統一의 燈臺, 南北輕俠을 다시 본다) <上>韓半島 經濟의 象徵, 開城工團 . 서울經濟. 2015年 1月 21日.
  7. 이재홍. 鐵道는 坡州의 希望이다 . 경인일보. 2015年 2月 24日.
  8. 이한용. 外換保有額의 爭點 이슈 點檢 . 연합인포맥스. 2009年 8月 10日.
  9. 정남기. 換率 1千원 時代 오는가 . 한겨레21. 2003年 1月 8日.
  10. 조하현. 원貨切上의 損益計算書 . 韓國經濟. 2014年 5月 19日.
  11.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20726141526&section=02
  12. 프레시안
  13. 앤드류 월터 칼럼 1999.9.1 東亞日報
  14.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IMF 克服과 韓國經濟 展望〉
  15. 황정우 記者 (1999年 2月 26日). “지난해 經常收支 黑字 400.4億弗” . 《聯合뉴스》.  
  16. 金利(3年滿期 會社債 基準)-10%線, 원·달러 換率-1,130원, 綜合株價指數-1,100~1,300 [14]
  17. 北空氣浮揚艇·戰車 擊破用 아파치헬기 36代 導入
  18. 軍 10兆 'X프로젝트' 問題없나 (2001年 4月 記事)에서 陸軍의 AH-X 事業과 海軍의 KDX-3 事業 等을 言及하고 있다.
  19. 躁急症에 빠진 3次FX (2001年 記事)에서 FX事業이 言及이 되며 軍戰力增强事業 統合 運營… 陸海空軍別 豫算編成 廢止 에서 C4I體系 構築, 編制裝備 補强事業 等이 單一豫算 項目이 됐으며, 空軍 豫算이었던 早期警報統制機(EX)事業은 C4I戰力으로 統合되고, 海軍 豫算이었던 一部 海兵隊 豫算은 機動·打擊戰力에 包含돼 推進된다라고 言及이 된다.
  20. 꿈의 巡洋艦’에 比肩되는 海軍 最大의 陷穽 世宗大王函(下) 에서 KDX-1부터 KDX-3의 歷史를 簡略하게 言及

參考 文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