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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退 後 그의 眞짜 ‘人生 旅行’이 始作됐다[서영아의 100歲 카페]|東亞日報

隱退 後 그의 眞짜 ‘人生 旅行’이 始作됐다[서영아의 100歲 카페]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2月 24日 01時 40分


코멘트
海外旅行 차림으로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取한 최수길 氏. 큰 背囊 하나에 大體로 모든 짐을 넣고 다닌다. 캐리어는 使用하지 않는다고. 春川=金東周 記者 zoo@donga.com
‘隱退後 世界 旅行 떠난 아부지.’

이런 特異한 題目의 유튜브 사이트를 知人이 보내왔을 때 暫時 망설였다. 紙面에 유튜버를 다룰 境遇 ‘弘報해준다’는 誤解를 살 수 있어서다. 하지만 前職 公務員 최수길 氏(64)의 ‘수길따라(sugilway) TV’는 조금 달라 보였다.

商業性과 距離가 있었고 退職後 삶을 苦悶하는 시니어들에게 좋은 參考가 될 듯했다. 무엇보다 그가 내세우는 ‘가슴 떨릴 때 떠나라, 다리 떨리면 못 간다’는 캐치프레이즈가 强烈했다.

2月初 방글라데시를 旅行 中이던 그와 連絡이 닿았다. 그는 2021年 6月 튀르키예 旅行 때부터 1年의 折半 以上을 海外에서 지내고 있다. 16日 그가 사는 春川으로 向했다.

어쩌다 유튜버
“退職하면 바로 떠나려 했는데, 코로나19 狀況하고 겹쳐 움직일 수 없었죠. 튀르키예가 가장 먼저 觀光客에 對한 防疫을 緩和했어요. 旅行하며 찍은 動映像을 家族에게 보냈는데 딸이 재미있다며 유튜브에 올리자고 하더군요.”

그가 40日間 찍어온 映像들은 ‘60代 아빠의 나홀로 터키旅行’이란 題目으로 約 40篇이 올라갔다. 反應이 暴發的이었다. 몇年間 100名도 안되던 購讀者가 하루 700~800名씩 늘었고, 15篇 程度 올렸을 때 1萬名을 突破했다.

-反應이 좋은 理由는 뭐라고 보세요?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海外에 못 나가니까 代理 滿足이 됐던 것 같아요. 또 댓글을 보면 ‘自身이 旅行하는 느낌’이란 表現이 많아요. 제가 海外에서도 主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분들과의 小小한 對話나 日常을 그대로 傳하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같아요.”

當時 튀르키예는 日常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튀르키예便 마지막回에는 이런 環境에서 40日間 生活하다 歸國한 그가 空港에 내리면서부터 韓國의 嚴格한 防疫 시스템에 當惑해하는 모습도 記錄돼 있다.

以後 ‘隱退 後 따듯한 泰國에서 겨울나기’를 거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베트남, 몽골에 다녀왔다. 필리핀에서는 語學硏修를 겸해 석 달 間 滯留했고 中央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코카서스 3國(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各其 묶어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番의 방글라데시까지 17個國을 돌았다.

코카서스 3國으로 떠나기 위해 到着한 仁川國際空港에서 航空便에 對해 說明하는 최수길 氏. 유튜브 ‘수길따라TV’ 캡처
旅行은 에피소드와 해프닝의 連續으로, 그가 겪는 左衝右突이 加減없이 登場한다. 異邦人에게 親切한 現地人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았다. 言語가 不足한 部分은 웃는 얼굴과 바디 랭귀지로 메웠고 때로는 아마추어 聲樂家를 뛰어넘는 노래實力으로 現地人들과 交感을 이어갔다.

수길따라TV는 購讀者 13.4萬 名, 累積 照會數 2037萬回를 記錄 中이다(15일 現在). 購讀者의 85%가 45~65歲 層이다.

가난, 그리고 夜學 先生님과의 因緣
江原道 華川에서 태어난 그는 江原道 敎育廳에서 40年을 勤務하고 2020年 退職했다. 最終職銜은 道 敎育廳 行政局長. 直前에는 原州 敎育文化館 管掌을 지냈다. 地方職 公務員으로서는 最高位職인 3級 副理事官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의 學歷이 눈에 띄었다. 中古 모두 檢定考試다.

“무척 가난했어요. 혼자 越南했던 아버지는 1907生이셨고 저희가 자랄 무렵에는 이미 年老해 일을 못하셨어요. 南에서 만나 結婚한 어머니는 6.25때 負傷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셨죠. 저희 4男妹의 正規學歷은 國民學校 卒業으로 끝났어요.”

新聞팔이나 ‘아이스케키’ 장사 等으로 家計를 도우며 夜學에서 工夫했다.

“7師團 軍人敎會에서 저녁에 中學校 過程을 가르쳐줬어요. 工夫만이 아니라 人生 멘토로 兄님처럼 도와줬어요. 部隊에서 짬밥을 담아와 나눠주기도 하고 齒藥 비누 等을 주기도 했죠.”

이런 軍人 中 고려대 法大生으로 軍服務 中이던 차석용 前 LG生活健康 副會長(現 휴젤 代表)과의 因緣이 재미있다. 車 代表는 그를 눈여겨보고 繼續 關心을 보이며 激勵해줬다.

“春川의 한 名門高에 奬學生으로 合格해 學費는 解決됐는데 寄宿舍費를 낼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비슷한 處地 親舊 自炊집에서 살며 學校에 다녔는데 끼니를 때울 수가 없었죠. 어느날 寄宿舍 食堂에서 몰래 밥을 먹으려다 들켜 엄청나게 맞고 退學處分 當했어요. 罪名은 ‘無斷圖式(盜食)’이었네요.”

삼청교육대 갈 뻔했던 末端 公務員
1977年, 人權도 福祉도 없던 時節이었다. 그가 어린 時節 살아온 이야기는 當時 時代狀況까지 겹쳐 苦難의 連續이다. 한동안 濟州島에 가서 日本 密航을 꿈꾸기도 했다.

“그 무렵 이미 除隊해 서울로 간 차석용 先生님이 ‘서울로 와서 우리 집에서 지내며 工夫하라’고 勸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固執이 좀 있어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고는 올라와서 高卒檢定考試를 치르고 入住課外를 했어요. 드디어 좀 살 만해졌는데 전두환 政府가 課外 禁止 措置를 내놨죠.”

그해 公務員 試驗에 應試해 1980年 9月 地方公務員으로 任用됐지만 不正投票에 抗議했다가 이듬해 5月 依願免職 當했다.

“삼청교육대 갈지, 입 다물고 辭表쓸지 選擇하라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가 삼청교육대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決死反對하셨어요. 當時 집近處에 敎育長이 있었는데 敎育이라는 未明하게 殘酷한 暴力이 行해지는 걸 아신 거죠.”

그렇게 잘린 뒤 不過 석달 뒤인 8月, 이番에는 敎育行政 公務員 試驗에 다시 合格했다.

“1~2年 일하고 돈을 모아 大學에 가려 했는데, 結婚하고 아이들 생기고 父母님 扶養하고 하느라 그냥 눌러앉게 됐네요.”

그는 50歲에 漢陽사이버大 英文科를 卒業했다. 夜學先生님과의 因緣도 이어지고 있다. 1980年代에 美國으로 留學간 茶 氏는 10餘 年 뒤 그에게 連絡을 해왔다. 歸國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게 그였다며. 2年前 그의 딸 結婚式에는 花環과 祝儀金을 보내왔다.

2022年 딸 恩惠氏의 結婚式 場面. 수길따라TV 캡처


‘觀光’ 아닌 ‘旅行’을 하시라
―自由旅行을 가는 理由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觀光을 가요. 觀光이란 말 그대로 ‘보는’ 거잖아요. 가이드 案內로 다니며 보는, ‘왔노라 봤노라 찍었노라’죠. 旅行은 그 나라의 文化를 直接 體驗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누고 그 나라 飮食을 直接 먹어보는 體驗과 交流를 하는 거죠. 여기 더해 가난한 사람 만나면 쌀 한자루라도 채워주고 떠나는 나눔이 있다면 더 좋겠죠.”

―退職者들은 觀光보다는 旅行을 하시라는 거군요.

“이제는 그럴만한 時間 餘裕가 充分히 있으니까요. 지난番 미얀마 映像에 제가 住民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場面이 있는데, 왜 돈을 나눠주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現場을 보지 못하셔서 그래요. 그 나라는 只今 絶對貧困이라 한 끼 먹기가 宏壯히 힘들어요. 現場을 보면 저보다 더 그런 마음이 生기실 거예요.”

미얀마에서 한 끼를 解決할 때 1000짯(藥 600원) 程度가 必要하다. 그가 나눠준 돈이 1000짯 紙幣였다. 그것 外에 달리 그분들을 도울 方法이 없었다고.

“가난은 猖披한 것이 아니예요. 숨길 일도 아니죠. 다만 어린 時節 가난이 꿈을 빼앗는다면 그건 問題예요. 只今 미얀마는 많은 이들이 끼니를 걱정하는 狀況인데, 이걸 外部로 알리는 일도 수월치 않더군요. 映像을 찍는데도 엄청난 統制를 느꼈어요.”

崔氏는 1986年부터 春川에서 살아왔다. 그가 案內해준 韓方茶집에서. 春川=金東周 記者zoo@donga.com
―어려운 곳들을 다니다 보니 좀 危險한 狀況도 있던데요.

“先進國이라는 유럽도 소매치기가 득실거리고 지저분해요. 旅行은 그 나라에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소매치기 만나거나 바가지 쓰는 건 當然한 거예요. 旅行은 그걸 甘受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堪耐하지 못할 程度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지아에서는 危險한 택시를 타기도 했다. 이때는 카메라가 그의 守護裝備가 된다.

“돈 더 달라면 바가지 써주면 돼요. 싸우는 것보다 낫죠. ‘必要한 거 뭔데, 알았어. 더 줄게’하면서 ‘나 유튜브 하니까 寫眞 좀 찍자’며 그들의 寫眞을 찍고는 ‘이거 實時間으로 韓國으로 電送된다’고 말해요. 그럼 얘네들度 웃어요. ‘이거 더 털다가 다치겠구나’고 생각하는 거죠. 自己들 얼굴이 다 나갔다고 하니까. 그렇게 지혜롭게 넘겨야죠.”

소매치기 바가지 程度는 堪耐해야 眞짜 旅行
-시니어들에게 自由旅行 팁을 주신다면.

“갈 곳 定할 때 날씨를 잘 살펴보세요. 나이가 있는 분들은 날씨 때문에 宏壯히 힘들 수 있어요. 克己 訓鍊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요. 그 나라에 對해 事前에 工夫도 하셔야죠. 一旦 歷史부터, 그리고 지리 交通 飮食 文化 이런 式으로 해나가요. 저는 主로 인터넷으로 해요. 航空券은 한 달 前까지는 購入해야 低廉하게 살 수 있어요.”

한 달 以上 海外旅行을 할 때 準備物들. 旅券 等 書類부터 帽子, 선글라스, 紫外線 遮斷劑, 各種 藥品과 라면, 커피믹스까지 多樣하다. 최수길 氏 提供
中央아시아 3國 旅行方法을 궁금해하는 讀者들이 많아 아예 動線과 經費, 準備物, 호텔 等을 整理한 映像을 올리기도 했다. 그의 境遇 27日間 警備 總 350萬 원 程度가 들었다.

“費用問題를 어떻게 準備해야 되는지에 對해 映像을 올린 것도 있어요. 저는 20年 前부터 年金貯蓄을 들고 달러 預金을 했어요. 外國가서 쓰려면 달러가 있어야 하니까요. IMF外換危機 때 1달러 2000원 近方까지 갔을 때 저는 海外旅行에 나섰어요. 저로서는 1000원도 안 되게 샀던 달러니까 그 돈을 쓸 수 있었죠. 2000원에 換錢해야 한다면 어떻게 나가겠어요?”

―그때 원貨로 바꿨다가 나중에 떨어졌을 때 다시 사면….

“그건 달러를 投資 手段으로 하는 境遇고 저는 海外旅行에 必要한 만큼 모은 거니까 目的에 맞게 잘 쓴 거죠. 退職 後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니 이제 貯金이 바닥났는데 多幸히 구글에서 돈을 주네요.”

―구글이 收益金을 달러로 주죠. 실버버튼(購讀者 10萬) 以上되면 收入이 꽤 될 텐데….

“旅行費用 걱정이 없어진 程度예요. 現地 가서 굶는 사람들에게 쌀이나 밀가루를 사줄 餘裕도 가질 수 있죠. 저는 채널을 돈버는 手段으로 삼지는 않으려 해요. 예컨대 私的인 廣告를 하면 宏壯히 많이 돈을 벌 수 있지만 一切 應하지 않고 있어요. 旅行經費만으로 充分하고 제 經驗을 讀者들과 나누는 게 重要하니까요. 제가 可能하면 講演를 하러 다니는 것도 비슷한 理由예요. 講演은 돈도 안되고 힘들고 時間도 많이 빼앗기지만 제 旅行, 隱退 後 삶에 對해서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은 거죠.”

지난해 9月 大邱 人材開發院을 始作으로 慶北人材開發院 濟州平生敎育院 等에서 ‘旅行으로 始作하는 幸福한 隱退生活’을 主題로 講演했다. 停年退職을 앞둔 公務員들이나 中堅 實務者들이 對象이다.

“‘國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방글라데시에서 歸國한 날 ‘바퀴벌레 모기 없는 便安한 房에서 오랜만에 熟眠을 醉했다’고 하셨는데 苦生하고 돌아오면 이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旅行이 좋은 건 돌아갈 집과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돌아갈 나라가 없다면 難民이죠. 前 집으로 돌아갈 때 宏壯히 氣分 좋아요. 나를 반겨주는 家庭이 있고 내가 돌아갈 國家가 있으니까. 그걸 되새기기 위해 자꾸 떠나는 건지도 몰라요.”

―帽子에 太極旗 마크도 붙이고, 或是 ‘國뽕’같은 거 있으신가요.

“음… 當然히 있어요. 제가 처음에 1980年代에도 旅行을 갔잖아요. 그때만 해도 韓國 모르는 사람 많았죠. 只今은 오히려 ‘서울’이라 하면 ‘와’ 歎聲을 질러요. 요즘 K文化라 하잖아요. 韓國에 가고 싶다는 사람도 많고 韓國人이라면 더 도와주려고 하니 旅行하기도 쉬워요. 國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죠. 代身 예전에는 좀 失手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는데 只今은 韓國人으로서 제대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負擔感이 있어요. 自負心을 갖는 만큼 責任을 져야 하는 거죠.”

유튜브에 올릴 映像을 編輯中인 恩惠 氏. 2年前 結婚했지만 일터가 春川이라 親庭에서 머무는 날이 많다. 藥師인 男便도 早晩間 春川으로 옮겨올 計劃이라고. 최수길 氏 提供
그는 自身이 유튜브를 하는 보람으로 어느 젊은 分의 댓글을 紹介했다.

“그 분은 平素 未來에 對한 꿈이 없었대요. 未來가 不透明하기도 하고 나이 드는 것도 싫었는데 第 유튜브를 보고서 꿈이 생겼다는 거예요. 自己는 60歲 以後의 人生은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저를 보면서 ‘아 내가 왜 젊어서 熱心히 일해야 하는지, 人生을 길게 計劃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 어떤 期待와 希望이 생겼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이럴 때 아, 내가 유튜브를 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죠.”

―그래서 後輩들을 위해서도 시니어들이 幸福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까요.

“退職者들도 그래요. 社會에서 ‘隱退(隱退)’라고 하잖아요. 물러나서 숨는다. 근데 職業에서 隱退하는 거지 人生에서 隱退하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내려놓기는 커녕 새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이 第 映像을 보면서 ‘나도 꿈을 꾸게 됐다’ ‘希望을 갖게 됐다’ ‘當身이 하는 거 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自信感이 생긴다’ 이렇게 反應해주시길 바래요.”

60代, 旅行하기 가장 좋은 時期
그는 正式으로 聲樂 敎育을 받지는 않았지만 各種 大會에서 受賞하는 等 빼어난 聲樂實力을 보인다. 두 子女도 모두 聲樂을 專攻해 機會있을 때마다 세名이 함께 노래하곤 한다.

現在 아들 恩寵(38) 氏는 보디빌더로 유튜브 ‘蔥蔥TV(購讀者 12.1萬)’를 運營한다. 딸 恩惠(33) 氏는 春川市立合唱團원으로 일하는데 崔氏의 유튜브 動映像 編輯者이기도 하다. 題目이나 字幕에 ‘아부지’가 많이 登場하는 理由다.

최수길氏의 敎育廳 退任式에서 노래하는 아버지와 男妹. 최수길 氏 提供
아버지와 男妹는 2013年頃 某 地上波 프로그램 ‘男子의 資格’에 함께 出演했다. 當時 畵面을 캡處했다. 최수길 氏 提供
―앞으로 計劃은?

“旅行은 元來 70歲까지 할 생각이었어요. 人生設計圖 거기 맞춰서, 年金貯蓄을 딱 70歲까지 받도록 設計했어요.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한 75歲까지는 다니겠다 싶어요. 그 以後에는 國內를 다녀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또 제 經驗을 共有하기 위해 講義에 置重해야 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젠 떠나기 싫어질 可能性은 없을까요.

“제가 旅行을 떠나는 건 好奇心과 설렘 德이예요. 저는 아직도 이 나라 저 나라 地圖를 들여다볼 때 너무 氣分이 좋고, 밤에 飛行機를 타고 불빛 반짝이는 낯선 都市에 내려갈 때 가슴이 두근거려요. 이 都市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어떤 趣味를 가졌고 무슨 飮食을 먹고 살까. 그런 期待感이 끝이 없어요. 그 설렘 好奇心이 있을 때까지는 繼續 가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隱退 直後는 旅行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세요”
春川=서영아 記者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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