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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記者 購讀|東亞日報
서영아

서영아 本部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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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人의 100歲 時代를 생각합니다.

sya@donga.com

取材分野

2024-03-26~2024-04-25
福祉 61%
健康 10%
日本 7%
社會一般 7%
칼럼 3%
外交 3%
文化 一般 3%
人事一般 3%
기타 3%
  • [오늘과 來日/서영아]아시아엔 왜 ‘죽음의 自己決定權’ 許容國이 없을까

    ‘내 삶의 마감을 내가 定하겠다’는 생각은 攝理를 거스르는 傲慢일까, 或은 人間 尊嚴性을 지키는 基本權일까. 지난해 12月 助力 尊嚴死 許容을 期待하며 憲法訴願에 나선 이명식 氏는 5年間 每日 찾아오는 痛症에 苦痛받고 있다. 痛症은 痲藥性 藥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苦痛을 1∼2%나마 줄이려면 深刻한 副作用을 覺悟하고 藥물을 抛棄할 수 없다. 憲法裁判所 判決을 기다리는 게 요즘 그의 唯一한 버팀木이다. 이런 그가 日本에서 들려온 뉴스에 憤慨해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2019年 루게릭病을 앓는 女性(當時 51歲)을 安樂死시킨 醫師 오쿠보(46)에게 懲役 18年 兄이 내려졌다는 消息이다. 그는 ‘世上에 無責任한 사람이 많다’며 憤慨했다. 딸을 잃은 83歲 아버지가 “刑이 무겁거나 가벼워도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第2, 第3의 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 發言에 對해서도 “苦痛에 힘들어하는 딸에게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마냥 살아있기를 바라느냐”고 聲討했다. 또 “患者가 苦痛을 이기지 못해 죽게 해달라고 돈을 주고 付託해야 하는 狀況에 國家는 뭘 해줬느냐”며 “責任을 못 지면 對策을 세워줘야 한다”고 主張했다.한국인 63%가 助力尊嚴死 贊成日本 映畫 ‘플랜 75’는 政府에 依해 安樂死 프로그램이 實行되는 世上을 그렸는데 많은 이의 憂慮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背景에는 “넘쳐나는 老人이 나라 財政을 壓迫하고, 그 被害는 靑年이 받는다”는 刻薄한 認識이 깔렸다. 이런 制度가 廣範圍하게 施行된다면 어떤 高齡者가 社會的 壓迫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3月 10日子로 이명식 氏를 다룬 記事가 나간 뒤 리서치앤리서치 노규형 代表가 ‘延命醫療決定法 및 助力尊嚴死法’에 關한 自體 輿論調査 結果를 보내왔다. 記事를 보고 일부러 企劃했다는 調査는 1000名을 對象으로 性別 年齡別 地域別 宗敎別로 標本을 맞췄다. 調査 結果에 따르면 延命醫療決定法에 對해 應答者의 65.3%가 贊成했다. 事前延命醫療意向書를 쓴 사람은 12.7%에 不過했으나 62%가 앞으로 쓸 意向이 있다고 答했다. 助力尊嚴社法에 對해서는 62.7%가 贊成, 12.1%가 反對했다. 注目할 點은 應答者의 年齡帶가 높을수록 贊成率이 높았다는 것이다. 宗敎 與否는 크게 影響을 끼치지 않았다.내 삶에 對한 責任은 어디까지 尊嚴死 或은 安樂死 關聯 論議에 對해 個人的으로는 隔世之感을 느낀다. ‘나는 安樂死로 죽고 싶다’고 公表했던 日本 作家 하시다 스가코를 인터뷰했던 2018年 初만 해도 ‘異常한 記者’로 보일까 萎縮되는 마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不過 5, 6年 韓國 社會에서도 죽음을 眞摯하게 생각하고 尊嚴死에 贊成하는 輿論이 多數를 차지하게 됐다. 高齡者가 늘면서 日常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죽음을 부쩍 가깝게 體驗할 수 있게 된 탓일 것이다. 다른 한便으로는 죽음의 自己 決定權을 許容하는 國家 大部分이 個人主義가 發達한 西歐 先進國이고 아시아圈은 없다는 點이 마음에 걸린다. 生과 死에 對한 觀點, 個人의 權利에 對한 視角이 東西洋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集團主義가 剛한 文化圈일수록 助力尊嚴死의 길을 열어놓는다면 쏠림이 發生할 수 있다는 憂慮도 作用하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던져보는 質問. 韓國은 個人主義와 集團主義 中 어느 쪽이 强한 社會일까. 助力安樂死가 許容된다면 節制된 使用이 可能할까. 最近 保健福祉部는 延命醫療 中斷 時期를 말기 患者에서 癌이나 重症 診斷을 받은 段階로 앞당기는 方案을 論議하기로 했다. 高齡者 問題를 다뤄 온 立場에서 皮膚로 느끼는 건 韓國 社會가 무척 빨리 變하고, 쏠림도 甚하다는 點이다. 그리고 時代 흐름은 ‘個人 尊重’의 方向으로 進步해갈 것이다. 이 問題에 對해 더 眞摯한 社會的 論議와 準備가 必要한 理由다.서영아 콘텐츠企劃本部長 sya@donga.com}

    •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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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오緦麻의 奇跡’ 이끈 會長님이 뉴질랜드로 移住한 까닭은[서영아의 100歲 카페]

    2月 初 ‘現代美術의 聖地’라 불리는 日本 나오시마(直島)에 다녀왔다. 環境破壞로 버려진 섬을 30餘 年에 걸쳐 世界的 觀光地로 바꾼 나오시마 스토리는 識者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얘기. 家族旅行이었던지라 記事로 쓴다는 건 애初에 考慮하지 않았었다.그런데 故鄕인 忠北 報恩에 컬처센터를 짓겠다는 김상문 燐光그룹 會長을 인터뷰하다보니 나오詩魔가 자꾸 떠올랐다. 金 會長은 人口減少로 시들어가는 故鄕에 私財를 들여 컬처센터를 짓고 文化의 힘으로 生氣를 불어넣고 싶어했다. 나오시마야말로 한 企業家의 所信있는 投資로 섬의 未來를 바꾼 케이스가 아니던가.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맞아주는 船着場나오시마는 日本 中南部 가가와 縣에 屬한 人口 3300餘 名의 작은 섬이다. 汝矣島와 비슷한 面積(8㎢)으로 自轉車를 빌려 移動하는 觀光客이 많다. 그 흔한 便宜店도 세븐일레븐 딱 한 個뿐. 이 섬에 年間 50萬 名이 찾아온단다. 觀光客은 勿論 地域再生을 工夫하려는 建築家, 美術家, 活動家 等 面面은 다양하다. 2010年부터 3年마다 열리는 細土憂恥國際藝術祭의 해에는 延人員 100萬 名이 넘는 訪問客이 나오緦麻와 周邊 섬에 몰려온다.나오시마에 到着하면 船着場의 랜드마크가 된 쿠私馬 야요이의 ‘빨간 호박’李 반겨준다. 閑寂한 自然과 아기자기한 마을이 어우러진 風景 속에 어딜 가나 外國人들을 마주친다. 高齡化率은 33.9%(2020年)로 老人들이 많다. 住宅 한쪽을 改造해 直接 구운 쿠키를 파는 집, 살림집에 테이블을 놓은 食堂이나 카페 等 애初에 있던 것들을 活用한 작은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예술과 人間사랑에 眞心인 企業家의 뚝심나오詩魔를 비롯한 세토나이카이(?海)의 섬들은 韓國의 多島海처럼 일찌감치 國立公園으로 指定될 程度로 景觀이 빼어나다. 하지만 1980年代까지만 해도 用途廢棄된 製鍊所와 廢棄物들이 放置된 狀態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런 섬에서 1990年代부터 藝術 프로젝트가 始作됐다.주도자는 後쿠타케 소이치로(福武總一?) 베네歲 홀딩스 名譽顧問(79·以下 소이치로 會長). 1992年 그는 오카야마의 出版敎育 企業 ‘후쿠타케 書店’의 오너로서 나오緦麻에 갤러리와 호텔을 겸한 ‘베네歲하우스 뮤지엄’을 세웠다. 企業 메세나의 一環이었는데 以後 이곳은 나오시마 藝術섬의 出發點이자 中心軸이 된다.호텔방에는 TV가 없고 代身 投宿客들만을 爲한 갤러리가 있다. 投宿客들은 나오緦麻의 自然과 바다, 美術作品을 鑑賞하며 몸과 마음을 淨化할 수 있었다. 베네歲하우스는 요즘이야 半年値 豫約으로 꽉꽉 차 있지만 初期에는 파리만 날리는 時期가 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뚝심있게 다음 計劃들을 밀어부쳐 1994年 쿠私馬 야요이의 호박 等 섬 곳곳에 現代美術을 심어나갔다.1995년에는 아예 會社 이름을 베네勢(Benesse)’로 바꾸고 證市에 上場했다. 베네歲는 라틴語로 ‘잘(Bene) 산다(esse)’는 뚯. 그는 “나오시마 開發의 目的은 ‘베네歲(잘 사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라며 “함께 ‘잘 사는’ 사람이 있어야 人間은 幸福해질 수 있다”는 持論을 편다.2004년에는 世界 最初의 地下美術館인 紙槌(地中) 美術館이 세워졌다. 自然毁損을 막기 위해 建物을 地下로 配置하고 自然採光을 最大限 살려 設計됐다. 2010年엔 이우환 美術館이 들어섰다. 이 모든 作業은 그와 意氣投合한 建築家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맡았다.나오시마 開發의 테마는 ‘自然과 建築, 藝術의 共存’. 소이치로 會長은 이를 通해 外地人들을 끌어들이고, 이들과의 交流 속에서 地域 住民들의 삶에 活氣를 불어넣고 싶어했다. 實際로 紙槌 美術館이 建立된 2004年 頃부터 나오詩魔를 찾는 觀光客은 年間 10萬 名을 넘어서기 始作했다.‘2020년 觀光白書’(日本 觀光廳)에 따르면, 가가와縣은 ‘廣域自治團體別 外國人 觀光客 總增加率(2012-2019年)’李 16倍로 全國 平均의 約 4倍를 記錄했다. 나오緦麻의 藝術 活動이 訪問客 誘致에 크게 寄與한 것으로 밝혀졌다.레지스탕스 마음으로 섬에 投資와세다大 機械工學科를 나온 그는 왜 나오緦麻에 藝術을 심을 생각을 했을까.그는 當初 나오緦麻에 投資를 始作한 原動力은 ‘憤怒’였다고 말한다. “오카야마에서 咫尺이라 靑少年國際캠핑場을 만들기 위해 자주 오갔는데, 이 아름다운 곳에 國家 行政力이 미치지 못하고 放置돼 있다는 點에 火가 치밀어 올랐다”는 것.當時 나오緦麻와 隣近 이누지마(犬島)는 製鍊所가 내뿜는 有毒가스 탓에 온통 잿빛이었고 隣近 데緦麻(豊島)는 有毒性 廢棄物 不法 投機場이 돼 있었다. 自身은 ‘레지스탕스’처럼 “國家를 相對로 現代美術을 武器로 삼아 싸웠다”는 說明이다.나오시마의 奇跡은 周邊 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財團은 2008年 이누지마에 ‘製鍊所美術館’을 지어 經濟成長에 올인海 自尊心을 잃은 日本에 對한 問題意識을 담았다. 2010年 데緦麻에 들어선 흰色 물방울 模樣의 콘크리트 美術館은 ‘産業廢棄物의 섬’이란 汚名을 벗어난 데緦麻의 淨化와 復活을 象徵했다.같은 해에 나오詩魔를 비롯한 周邊 7個 섬(第 2回부터 12個섬)에서 第1回 細土憂恥 國際藝術祭(트리엔날레)를 열었다. 소이치로 會長은 每回 ‘綜合프로듀서’를 맡아 企劃과 財政을 책임지고 있다. 行事는 住民들이 作家들의 作業 過程을 도와주고 作品에 對해 觀覽客에게 說明하는 도슨트 役割을 하는 等 地域民과 疏通하는 祝祭로 定評이 나 있다. 2010年 1回 때 93萬 名, 2013年 2回 때 107萬 名이 다녀갔다. 가가와縣이 推算하는 經濟效果는 第 1回때 111億 엔. 22019年에는 180億 엔, 코로나 事態로 원활치 않았던 2022年에도 103億 엔에 達했다. ‘잘 산다’는 것銀蟾 프로젝트의 眞짜 主人公은 住民들이다. 소이치로 會長은 1986年 父親 데쓰히코의 갑작스런 死亡으로 40歲까지의 도쿄生活을 急히 마무리하고 오카야마에 돌아와 會社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維持였던 나오시마 靑少年캠핑場 建立을 위해 여러次例 섬을 訪問하면서 섬에 魅了됐고, 藝術 프로젝트를 통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 特히 老人의 얼굴에 微笑를 찾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오시마 프로젝트’ 着手에 앞서 섬마을 사람들을 위해 中學校와 마을會館, 船舶터미널 等을 지었다. 住民說明會만 2000番 以上 열었다고 한다. “藝術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藝術作品을 媒介로 外地人들과 疏通하며 生氣를 얻어가는 섬 住民들을 보면서 眞正한 幸福이 무엇인지 깨달았다.”(소이치로 會長)住民 參與를 통한 活力 찾기는 1998年부터 始作한 ‘이에(家·집) 프로젝트’에서도 確認할 수 있다. 버려진 民家나 節, 神社, 齒科, 소금倉庫 等을 사들여 그들이 살았던 時間과 記憶을 담은 作品으로 再創造했다. 집 한 채가 한 作家의 갤러리가 됐다. 人口減少가 멈춘 섬200年 된 고(古)민가를 改造해 巨大한 水槽를 넣고 250個의 디지털 數字를 띄운 ‘街도야(角屋)’가 그 1號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色色의 디지털 數字 LED가 各自의 速度로 1에서 9까지 반짝이는 걸 볼 수 있다. 數字 LED는 住民 250名에게 管理를 맡겨 各自 速度를 調節할 수 있게 했다.7군데에 散在해있는 이 프로젝트를 모두 둘러보기 위해 地圖를 들고 나오緦麻의 작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各自 길을 찾아 三三五五 몰려다니는 外國人들을 마주친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즐거움에 눈빛이 반짝인다. 어딜 가건 길 案內를 自請하는 할아버지, 웃으며 人事를 건네는 할머니, 예쁘게 整頓된 마당이 보이도록 大門을 활짝 열어놓은 家庭집들을 만나게 된다.현장 가이드도 모두 地域 高齡者들. 70~80代는 돼 보이는 職員들은 빠릿빠릿하거나 日本人 特有의 親切한 맛은 別로 없지만 充分히 自己 役割을 해내고 있다. 오히려 무심하게 일을 즐기는 모습이라 서로가 便安하다.나오시마에는 宿泊施設이 많지 않으므로 訪問客들은 大槪 아침일찍 배를 타고 들어가 마지막 倍로 빠져나온다. 觀光客들이 섬에서 1000엔 씩만 消費해도 50萬 名이면 年間 5億엔. 나오詩魔가 조금은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다른 地自體와 달리 나오시마는 人口減少가 거의 멈춰 있다. 隣近 쇼도시마(小豆島)는 每年 約 300名이 移住해오고 오기지마(男木島)는 道民 130餘 名 中 50餘 名이 外地에서 온 移住者다. 이 섬에는 移住民들 德에 初症學校와 保育所가 다시 門을 열었다. “經濟는 文化에 從屬돼야 한다”그는 父親으로부터 資本金 6億엔, 賣出 593億 엔 規模의 ‘후쿠타케 書店’을 물려받아 連結賣出 4000億 엔 規模의 上場企業 베네세로 키워냈다.기업철학은 ‘經濟는 文化의 從僕이어야 한다’는 것. 企業이 經濟活動으로 얻은 部를 經濟가 아닌 文化에 投資해 좋은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쓰는 것이 人間이 ‘잘 사는’ 데 重要하다고 主張한다. 企業은 社主의 利益만이 아니라 寺院과 그 家族, 顧客, 去來處, 地域社會 等 利害關係者 全體에 對한 貢獻(公益)을 重視하는 資本主義로 가야 한다는 것. 그는 이를 ‘公益 資本主義’라 부른다.2004년 個人財産을 寄附해 ‘나오시마 후쿠타케 美術館財團’을 만들었다. 나오緦麻의 開發課藝術祭 等에 그와 家族은 2億 5000萬 달러(藥 3500億, 2022年포브스)가 넘는 費用을 내놓았다. 2012年에는 旣存 財團들을 統合해 ‘公益財團法人 후쿠타케 財團’으로 하고 베네歲 홀딩스 株式 5%와 現金, 保有 作品, 資産 等을 追加로 寄附했다. 株式寄附는 以後로도 이어져 現在 財團이 保有한 베네歲 株式 持分은 8%(藥 1億3600萬 달러 相當, 2022年 포브스)가 넘는다. 이 株式에서 나오는 配當金이 每年 베네歲에서 財團으로 흘러들어간다.한 言論이 인터뷰에서 그에게 “會長 家族과 베네歲 그룹이 나오緦麻에 들인 돈이 1000億 엔(9000억 원) 程度 된다던데”라며 質問하자 소이치로 會長은 “그 程度까진 아닐 걸?”이라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예술을 支援할 資金을 死守하라”관련 資料들을 찾고 工夫하다보니 소이치로 會長의 近況이 더 재미있다. 그는 더 以上 日本에 살지 않는다. 2009年 夫婦가 뉴질랜드로 移住해 그곳에 定着했다. 子女가 없어 조카 히데아키(47) 씨를 養子로 들여 후쿠타케 財團을 맡겼다.일본 言論은 1383億 엔(2022년 포브스)의 純資産을 지닌 그가 뉴질랜드로 옮겨간 理由로 ‘節稅’를 꼽았다. 뉴질랜드는 相續稅나 贈與稅가 없고 個人所得稅 最高稅率은 33%(日本 45%)다. 日本의 相續稅는 50%. 財團의 藝術支援活動은 베네歲 株式에서 나오는 配當金으로 維持되는데, 自身이 死亡하면 以前 配當金을 維持할 수 없다. 이런 事態를 避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移住해 財團의 ‘持續可能한’ 構造를 完成시켰다는 것이다.여기 더해 最近 베네歲는 아예 上場廢止의 길을 擇했다. 1月부터 經營陣 參與 株式公開買收를 통해 大部分의 株式을 買入하고 3月 4日附로 企業을 非公開로 轉換한 것. 지난해 3月 日本 政府가 上場企業들에게 株主價値 擴大를 强調하며 株價純資産比率(PBR) 1.0 以下 企業에 不利益을 주겠다는 方針을 내놓은 것과 關聯이 있다. 앞으로 行動主義 펀드 等으로부터 ‘企業 利益과 상관없는 藝術支援을 그만두라’는 壓迫이 들어올 可能性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것. 日本 言論은 이番 株式公開買收가 80歲를 目前에 둔 ‘에술의 패트論’ 소이치로 會長의 最後의 課業이었다고 評價했다.후쿠타케 財團은 2025年 봄 나오緦麻에 새로운 美術館을 開館한다. 이番에도 안도 다다오가 建築設計를 맡았다. 그로서는 나오시마에서만 10番째 作業이다. 이 發表에 맞춰 소이치로 會長은 “새 美術館은 35年 以上에 걸친 只今까지의 活動의 集大成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2025年은 細土憂恥國際藝術祭度 열리는 해다. 이番에도 소이치로 會長은 祝祭의 綜合프로듀서를 맡을까. 나오시마=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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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鄕에 稅金 내려 住所도 옮겼죠”…어느 自手成家 企業家의 首丘初心[서영아의 100歲 카페]

    會社를 떠난 後輩가 冊 한 卷을 썼다며 보내왔다.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희망마루)’라는 題目의 中堅企業 會長 一代記다. 中卒 흙수저 出身인 主人公이 冊읽는 習慣과 抛棄하지 않는 끈氣로 自手成家하기까지의 過程과 人生哲學이 담겨 있었다.무엇보다 그의 眞心 어린 故鄕사랑에 마음이 끌렸다. 脂肪消滅이 話頭가 되는 요즘, 外地에서 成功한 사람들이 故鄕에 對해 갖는 關心과 使命感은 該當 地域에 큰 힘이 된다. 日本의 작은 섬 나오詩魔를 世界的인 ‘藝術 觀光地’로 바꾼 베넷歲 그룹 오너가 代表的이다.30대에 故鄕을 떠나 成功한 뒤 70歲가 넘어 平生의 成果를 故鄕과 나누려고 움직이는 사람. 지난달 25日 光化門에 자리한 燐光그룹 서울事務室에서 김상문(72) 會長을 만났다. 꼿꼿한 姿勢에 謙遜한 語調가 몸에 밴 老紳士다.200억 컬처센터 지어 故鄕에 憲政그는 지난해 11月頃 住所地를 서울 龍山區에서 忠北 報恩郡의 故鄕집으로 옮겼다. 父母님 山所 近處 작은 韓屋을 고쳐 틈날 때마다 찾아가 쉬곤 하는 집이다. 住所를 옮긴 理由가 재미있다. 事業 一部를 整理하면서 賦課된 稅金 650億 圓에 따라붙는 地方稅 10%를 故鄕에 納付하려는 意圖였다는 것이다.“국세는 國稅廳에 내지만 地方稅는 住所地 管轄 區廳이나 郡廳에 내게 돼 있어요. 내야 할 地方稅가 제몫(65억 원)에 딸의 것까지 더하면 67億 원쯤 됩니다. 돈이 없어 쩔쩔매는 報恩郡에 要緊할 것 같았습니다. 君의 1年 稅收가 300億 남짓이니까요. 最近 崔在亨 郡守를 만나 이 돈은 郡民들의 삶의 質에 關聯된 것에 써달라는 뜻도 傳했어요.”이뿐 아니다. 報恩에 땅買入費를 包含해 200餘 億 원을 들여 컬처센터를 지어 獻呈하기로 하고 지난달 1日 着工式을 마쳤다. 그의 號를 딴 ‘除算(霽山)컬처센터’는 公演場과 갤러리, 圖書館과 카페 等이 結合된 複合文化空間이다. 來年 4月쯤 完工되면 仁川에 있는 公益財團法人 ‘除算平生學習’ 本部도 여기로 옮겨올 計劃. 2018年 設立한 이 財團은 앞으로 그의 活動의 中心이 될 터다.“고향분들은 勿論, 外地 분들도 各種 行事에 參與할 程度로 水準높은 空間으로 만들겠다는 抱負를 갖고 있어요.”“30년 벌었으니 이제는 잘 써야죠”1991년 仁川의 石山 骨材再就業으로 始作한 事業은 仁川(石山, 建築廢棄物, 土壤淨化)과 唐津(레미콘, 아스콘, 레저), 淸州(石山, 레미콘), 浦項(步疆土 블록工場) 等으로 늘어났다. 正職員만 200餘 名, 年 賣出 1500億 원 規模로 成長했다. 이렇게 擴張만 해오던 事業場 中 하나를 처음 整理한 것. 올해부터 그룹名을 IK에서 ‘燐光’이라는 初期 使用했던 것으로 바꿨다.“제 時代는 끝나가고, 未來는 다른 分野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린 決定입니다. 報恩에 컬처센터를 지을 費用을 마련하고 그동안 會社를 믿고 投資해준 株主들, 同苦同樂한 勤續 家族들에게 成果金으로 나눠줄 資金도 必要했습니다. 職員들의 老後를 위해 만든 幸福基金 財源도 擴充해줘야 했고요.”이제 그의 事業計劃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모아놓은 돈을 잘 쓰는 것에 焦點이 맞춰진다. “올해부터 會社 運營을 後繼者들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諮問이나 해주고 財團 일에 힘을 쏟으려 합니다. 큰 方向은 國民이 冊 읽는 데 도움주는 것으로 定했습니다.”중졸, 흙수저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還甲을 앞두고 있었고 어머니도 마흔이 다 된 나이였다. 어머니가 市場에서 露店商을 하며 입에 풀漆을 했다. 中學校 授業料를 내지 못해 설움을 겪어야 했고 農高에 進學했지만 中途에 學業을 抛棄했다. 스무살에 軍隊에서 그는 現實에 對해 覺醒하게 된다. 中卒 學歷에 빈손으로 父母님을 扶養해야 하니 公務員試驗 合格만이 答이라고 생각했다. 步哨를 서면서도 미친 듯이 工夫를 했다. 軍隊 내 冊欌 淸掃를 自願해 꽂혀 있던 冊을 모두 읽었다.“펄벅의 垈地, 韓國文學選集 等 優良圖書가 많았어요. 步哨를 서며 冊을 읽다가 들켜 두들겨 맞곤 했죠. 어느 날 中隊長이 불러 理由를 물었는데 제 處地를 있는 그대로 率直하게 쏟아냈어요. 그러자 中隊長은 아침 6時부터 12時間씩 말뚝步哨를 서라고 하더군요. 步哨를 서면서 高校 課程을 獨學으로 끝냈고 많은 冊을 읽었어요. 고마운 時間이었습니다.”뭔가에 손을 대면 끝장을 보는 性品 때문일까. 74年 末 除隊한 그는 公務員이 아니라 課外先生이 됐다. 옆집 아주머니가 틈틈이 中3 올라가는 아들의 工夫를 봐달라고 付託한 게 契機였다. 班에서 中間 程度 하던 學生인데 數學이 弱했다. 겨울放學동안 初等學校 3學年 算數부터 中2 數學까지 進度를 끝냈다. 이 學生이 3學年 첫 試驗에서 學級 3等을 하자 온洞네에 亂離가 났다. 입所聞이 돌면서 弟子는 200名 單位로 불어났고 學院을 열게 됐다. 많은 돈을 벌다보니 ‘報恩의 돈은 김상문이가 다 가져간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1980年 7月 全斗煥 政權의 課外禁止措置로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당시 오자복 將軍이 그 發表를 했어요. 한참 뒤에 제가 그분을 만나게 돼 그때 얘길 했어요. 그분이 ‘아이고 金 社長 내가 그거 안했으면 當身 只今도 시골에서 學院 運營하고 있었잖아’. 하는데 할 말이 없더군요. 하하.”그 뒤 故鄕을 떠나 日刊紙 어린이新聞 販賣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40歲가 되면 내 事業을 하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있었다.114번 찾아간 끝에 받아낸 承諾燐光그룹 곳곳에는 社訓처럼 ‘114, 學習, find a better way’라는 文句가 걸려 있다.특히 ‘114 精神’은 그룹에서 傳說처럼 膾炙된다. 1990年 事業 아이템을 찾던 그는 新都市 建設熱氣에 骨材가 不足하다는 뉴스를 보고 骨材 採取業에 關心을 가졌다. 石山을 찾아다니다 仁川에서 좋은 山을 發見해 主人을 搜所聞하니 富川의 某 中堅企業 會長이었다. 該當 企業의 管理理事를 찾아가 “山을 빌려주면 採石事業場으로 開發해 돈을 벌어 賃貸料를 갚겠다”고 懇請했다. 외상으로 山을 달라는 뜻이었다.“처음엔 미친놈 취급당하며 쫓겨났죠. 空짜로 남의 山을 달라니, 말이 되나요. 하하.”그는 抛棄를 몰랐다. 承諾을 얻기 위해 該當 理事의 事務室을 株 2回, 1年 2個月間 113番 찾아갔다. 門前薄待度 限界가 있는 法. 移徙는 漸次 茶도 한盞 내주며 얘기를 들어주게 됐다. 그렇게 114番째 찾아간 날, 理事는 金 氏를 會長室로 데리고 가 紹介하며 ‘한番 試驗삼아 맡겨나 보시자’고 勸했다. 그 뒤로는 一瀉千里였다.“두 달 만에 許可證 받아서 레미콘 工場들을 돌아다니니 先受金을 2億, 5億씩 마구 갖다 주는 거예요. 워낙 骨材가 不足했거든요. 처음 賃貸契約額이 13億 2000萬 원이었는데 며칠 만에 갖다 드렸어요.”―그때의 理事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셨더군요. “제가 한番 因緣을 맺으면 오래 갑니다. 會社에 稅務調査 나왔던 분이나 제가 投書 때문에 拘置所 들어갔을 때 擔當矯導官이 모두 저희 會社 株主가 됐어요. 이番에 會社 整理하면서 그분들께 配當을 드렸는데 投資額보다 훨씬 높은 精算을 해드렸어요. 해마다 投資金의 10%를 配當해드렸고요.”“제대로 길 찾으려면 冊을 읽으세요”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갈 때마다 그는 冊이 自身을 이끌어줬다고 믿는다.“사업하며 苦生 많이 했어요. 새벽 6時면 無條件 會社에 出勤했습니다. 每週 懷疑하고 苦悶하고 함께 으쌰으쌰 하면서 만든 會社예요. 하기야, 조금이라도 成功한 분들 들여다보면 다 苦生했지요.”―고생만 하고 좋은 成果를 얻지 못하는 분들도….“잘못 苦生한 거죠.”―잘 苦生하는 것과 잘못 苦生하는 것의 差異는 어디서 비롯될까요.“책을 통해 길을 찾았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冊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實感합니다. 冊을 많이 보면 叡智力이랄까 인사이트 파워가 생깁니다. 例컨대 제가 冊을 안 봤으면 地下採石을 생각이나 했겠어요.”그는 韓國 最初로 地下採石을 始作한 主人公이다. 當時에는 石山에서 산 部分을 다 깎아내면 끝이라고들 여겼다. 石山은 땅 아래로도 이어져 있다. 왜 땅속 돌을 안 꺼낼까, 郡廳 가서 물어봐도 아무도 對答을 못 했다. 그저 ‘해본 적이 없으니 안된다’고 했다. 요즘은 當然해진 地下採掘 許可를 받기까지 온갖 規制를 풀고 說得하는 過程을 거쳐야 했다. 當初 돌을 파낸 자리는 良質의 土壤으로 復元한다는 條件이 딸려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의 왜? 精神이 發動했다. 冊들을 찾아보면 나무가 자라는 데는 흙 1m면 充分했다. 몇 年間의 施行錯誤와 티격태격 끝에 地下 60m까지 石山을 파낸 뒤 깊은 곳은 建築廢棄物處理過程에서 나오는 良質의 循環土沙로 채우고 그 위에 흙을 덮는 方式으로 標準化된 모델이 만들어졌다. 그는 只今도 이런 採石 方式德에 수많은 山林資源 毁損을 막았다고 自負한다.“과거 12萬 名 북적이던 報恩, 人口 5萬은 돼야”수구초심(首丘初心)은 故鄕과 根本을 잊지 않는 마음. 그에게 늘 故鄕은 어머니 품과 같은 存在였다. 다만 故鄕과 關聯해 마음의 傷處를 크게 받은 일이 있다. 2018年 無所屬으로 報恩郡守에 出馬했다 苦杯를 마신 것. 當時 내건 公約은 ‘人口 5萬 報恩을 만들겠다’. 現在 人口는 3.3萬이다.“진심으로 故鄕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報恩 發展을 위한 方向이 제게는 보였거든요. 하지만 政治라는 世界는 그런 眞心과는 距離가 멀더군요. 다시는 選出職 出馬 같은 건 안 합니다.낙선한 뒤 나라 구석구석을 걸으며 생각을 整理했습니다. 다른 쪽에서 役割을 하라는 뜻이로구나. 그 첫 단추가 除算컬처센터입니다.”70세를 넘기는 2022年 全國 5代 둘레길 總 5035km를 完走했다. 이 旅程에는 때로 職員들도 1泊2日, 2泊3日씩 돌아가며 參與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많은 個人的 成就를 이뤘다. 年間 200卷씩 讀書하고 짬짬이 써낸 冊이 18卷이다. 저우언라이, 마오쩌뚱 덩샤오핑의 評傳 等 中國과 關聯된 冊이 많고 最近에는 링컨 評傳을 냈다. 間或 講演도 하는데, 몇年째 成均館大 最高經營者 過程의 피날레 講義를 맡고 있다. 漢字能力檢定試驗 中 가장 難易度가 높은 ‘特級’을 따기 위해 일부러 地下鐵에 서서 工夫하며 出退勤하는 時節을 보내기도 했다.50대 後半이 되어서야 世間에서 말하는 ‘學歷’을 채워넣기 始作했다. 韓國방송통신대 중어中文科에 進學해 4年 내내 奬學金을 받았고 그게 未安해 卒業 때 學校에 發展基金 1000萬 원을 寄附했다. 같은 專攻으로 성균관대에서 碩士를 修了했고 現在는 東아시아學科 博士課程을 밟고 있다.직원들 未來 생각한 老朽幸福基金그의 關心이 ‘擴張’에서 ‘整理’로 넘어간 痕跡은 2022年 職員들을 위해 만든 ‘老朽幸福基金’에서도 읽힌다. 國民年金과 退職年金만으로는 이들의 老後가 便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職員들에게 ‘60歲까지 찾지 않겠다’는 覺書를 받은 뒤 證券社에 計座를 만들어 給與를 除外한 모든 돈을 여기에 넣어주기 始作했다. 名節 떡값이나 成果給은 勿論, 冊을 산 領收證을 提出하면 그 돈도 넣어줬다. 지난해 會社 整理하면서 받은 돈도 年次에 따라 3000~9000萬원 씩 넣어줬다. “1年 餘 만에 全 職員이 5000萬 원 以上 모았고, 1億 원 以上도 相當數 있는 걸로 압니다. 名節 보너스까지 묶여 버리니 처음엔 투덜대던 職員들도 돈이 쌓이는 걸 보며 너무 좋아합니다. 各自 2億 程度 모으면 金融工夫를 시켜 ‘돈이 일하는’ 經驗을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재단에서는 그가 出演한 株式에서 나오는 配當金으로 每年 3~5億 원 程度를 壁紙 學生들에게 冊을 보내주는 데 使用한다. 그는 앞으로 自身의 全 財産을 寄附해 資産 規模를 500億 원 程度로 키울 생각이다.“환경이 어려운 靑少年들에게 ‘물고기잡는 法’을 가르치고 싶은 거죠. 좀더 긴 計劃으로는, 걸으면서 느꼈던 斷想을 모아서 80歲쯤 되면 人生을 整理하는 媤집을 한番 내볼까 생각 中이예요.”인생 整理? 무엇을 남길 것認可企業家들은기업을 일굴 때는 뒷일을 생각지 않지만 黃昏을 바라볼 때쯤이면 머리가 아파온다. ‘企業 두 番 相續하면 國有化 確定’이란 말이 있을 程度로 큰 稅金負擔 탓이다. IK의 境遇 不動産 過多保有 法人이라며 讓渡差額의 49.5%가 稅金으로 매겨졌다. 하지만 金 會長은 이 稅金에 ‘자랑스러운 義務’라며 國家에 還元한다는 意味를 附與했다.그래도 企業을 넘기며 아깝지 않았느냐는 거듭된 質問에 그는 家族 討論房에 自身이 남긴 글을 보여줬다.‘세금납부가 거의 끝났다. 76,574,194,649원. 765億7000萬원의 稅金을 내는가정이 얼마나 되겠느냐. 지난 歲月 아버지의 人生決算이자 자랑스러운 義務다…(중략) …아버지는 큰 짐을 내려놓고 父母님께 感謝하며 어제 단잠을 잤다. 모두 幸福하게 잘 살아가거라. 아버지’1女 2男 子女들은 ‘그 큰 金額을 稅金으로 내면서 많은 感情이 交叉했지만, 아버지 말씀처럼 苦生하시면서 만들어온 結果物을 社會에 還元하는 뜻깊은 稅納이었기에 자랑스러웠다’, ‘처음엔 엄청난 金額에 놀라고 平生을 거쳐 일군 財産을 淡淡히 國家와 社會에 還元하시는 모습에 또 한番 놀랐다’라는 말로 和答했다.“열심히 제 갈 길 걷다보니 어느 새 멀리, 높이 와 있더라구요. 처음엔 돈을 벌려고 事業했지만 나중엔 事業이 좋아서 뛰어다녔는데 精神 차려보니 會社의 價値도 한참 커져 있더군요. 어찌 보면 제가 좀 바보스럽게 산 것 같아요.….”―후회하십니까.“보람을 느끼죠. 보람을 느끼려면 좀 바보스럽고 愚直하게 살아야 해요. 너무 얕게 살면 남는 게 別로 없더라고요.”<길> 김상문祖國山川 걸어간다좋은 길나쁜 길便한 길힘든 길人生이나 길이나 그게 그거다섞여 있는 것이 世上 理致다모두 그렇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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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職 1年만에 電氣技術者 變身한 大企業 電算部長…“일하면서 하루 2萬步씩 걸어요”[서영아의 100歲 카페]

    “延面積 5萬 坪을 終日 뛰어다니다보니 저절로 運動이 됩니다. 하루 2漫步가 基本이예요.”경기도 의왕시에 자리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타임빌라스’. 이정균(60) 氏는 이곳의 電氣安全管理 責任者다. 200餘 個 賣場의 電燈과 콘센트는 勿論, 野外 街路燈까지 그가 이끄는 팀의 所管이다. 쇼핑몰 規模가 크다 보니 온終日 賣場들 사이를 安全帽와 作業服 차림으로 누비고 다닌다. 지난해 9月 警 그가 2019年 폴리텍臺 關聯 記事 링크를 보내왔다. 記事에는 그가 ‘大型 銀行 電算팀에서 30年間 일한 高額年俸者로, 한국폴리텍臺에서 技術을 배우며 人生 2幕을 꿈꾸는 事例’로 登場했다. 그 뒤 實際로 2020年 電氣技師 資格證을 땄고 電氣安全管理者로 變身해 人生 2幕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退職 1年도 안 돼 이뤄낸 놀라운 變身. 그 祕訣이 궁금했다. 13日 그의 일터를 찾았다.준비없이 맞은 名譽退職그는 大學에서 計算統計學을 專攻한 뒤 1989年 韓日銀行 電算部에 入社해 金融電算 開發의 한 우물을 팠다. 그 동안 銀行 看板은 ‘韓日’에서 ‘한빛’, ‘우리’로 바뀌었다. 最終 所屬은 우리은행에서 IT 部分이 噴射된 우리에프아이에스(WFIS)였다.2019년 3月末, 55歲로 명예퇴직할 때 그의 人生計劃에는 오로지 ‘歸鄕’만 있었다. 故鄕에 내려가 홀로 계신 어머니와 살며 옛 親舊들과 어울리고 흙냄새도 맡는 田園生活을 꿈꿨다. 退職 바로 다음날 故鄕인 全南 靈巖으로 내려갔지만 幸福은 暫時, 두달도 안 돼 ‘現打’(現實自覺타임)가 왔다.“어머니가 제 눈치를 보신다는 것. 제가 어머니 自由를 妨害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어머니는 시골生活을 하며 제가 망가질 것을 念慮하셨고 절 내쫓다시피 올려보내셨지요.”퇴직을 전후해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計劃을 세우면서도 寞寞해한다. 歸鄕 計劃이 틀어졌을 때부터 그에게도 漠漠함이 찾아왔다. 不動産 工夫를 한다면서 仲介業所를 기웃거렸고 아파트 價格動向 調査를 한다며 登山服 차림으로 京畿道 一帶를 돌아다니기도 했다.폴리텍과의 만남그 무렵 電鐵에서 城南 폴리텍代의 ‘新中年特化過程’ 募集公告를 보게 됐다. 萬 40~65歲 中·壯年層을 對象으로 職業訓鍊을 통해 資格證 取得과 再就業을 支援해준다고 했다. 무작정 城南市廳을 찾아갔다. 6月부터 3個月間 電氣技術 敎育을 받는 夜間班에 들어갔는데, ‘新世界’가 열린 느낌이었다.“공부와 實習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새로운 人間關係도 즐거웠습니다. 25名이 함께 受講했는데 30代부터 60代까지, 海外營業社員, 치킨집 社長님, 市立交響樂團원, 宅配技士 等 前職이 다양했어요. 過去에 무슨 일을 했건, 새 職業을 얻는다는 目標를 向해 함께 달렸죠. 職場時節엔 몰랐던 人間的인 感情을 느낀 幸福한 時間이었습니다. ”그해 12月까지 △昇降機 技能士 △消防安全管理者(1級) △電氣技能士의 3가지 資格證을 땄다. 敎育이 끝나고 同期들은 하나둘 새 職場을 찾아 떠났지만 그는 좀더 難易度가 높은 電氣技師 資格證에 挑戰하기로 했다. 先輩들 사이에서 ‘따놓으면 平生 먹고 산다’고 불리는 法廷資格證이다. 1年에 4番 試驗이 있는데 合格率은 8~30%臺 程度다. 工夫를 하면서 뒤늦게 自身에 對해 再發見하고 當然히 여겼던 것들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예컨대 난生처음 理科를 專攻하길 잘했다고 생각했고 無心코 따놓은 資格證이 30餘 年 만에 孝子노릇을 하기도 했다. “電氣技師는 專攻者가 아니면 따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나마 저는 理科系여서 內容을 理解하기 쉬웠어요. 大學때(1986年) 따놓은 ‘情報處理記事’ 資格證은 平生 쓸모가 없었는데 電氣技師 應試資格을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넓은 世上에 나와보니 資格證이 自身을 證明해주는 守護神이더군요.”“코로나마저 내 工夫를 도와줬다”이 무렵 첫 就職도 했다. 當時 開院을 準備하던 龍仁 세브란스 病院의 電氣設備管理職. 施設管理 下請業體 所屬으로 勤務하는 條件이다. 처음 面接에서는 보기좋게 탈락했다.“나이는 많은데 經歷이 全혀 없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뒤 같은 求人廣告가 또 뜨더군요. 城南 ‘雇傭福祉 플러스센터’ 職員이 事情을 듣더니 會社 側에 電話를 해주셨어요. 그 德에 施設管理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경력이 없다보니 남들이 忌避하는 일부터 始作할 수밖에 없다. 1年 半 동안 夜間勤務를 專擔하며 經驗을 쌓았다. 電氣技師 試驗을 準備하던 그에게는 工夫할 수 있는 時間이 많아 고마운 일자리였다. “아침에 退勤해서 밥 먹고 4時間 程度 자고 나면 午後 1時예요. 그때부터 밤 9時까지 工夫할 수 있었죠. 사람 만나기 어려운 코로나 時代라는 點도 工夫에는 도움이 됐죠. 게다가 選任勤務者가 電氣技術社 工夫를 하는 분이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20年 12月 31日 마침내 電氣技師 資格證을 取得했다. 이듬해 8月엔 집과 가까운 現在의 職場으로 옮겼다. 資格證과 經歷 德에 就職은 쉬웠다. 15個月 程度 夜間勤務를 하다가 選任이 移職하면서 그가 週刊 選任이 됐고 이달부터는 電氣팀長까지 맡았다.그는 只今 自身의 일에 滿足한다. 여러모로 運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게 일하고 있고, 周邊 評價도 좋다고 느낀단다.정년이 따로 없으니 일만 제대로 한다면 退職 걱정도 없다. 年 4000萬원臺 給與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크게 不足하지도 않다. 4大保險度 保障된다.“저처럼 이미 退職했고 子女敎育이 끝나 큰 돈 쓸 일 없는 境遇 딱 좋은 職場이죠. 많이 움직이니 健康에도 좋아요. 예전 職場에서는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 하루걸러 職員들과 會食하고 疏通하려 애썼어요. 部下職員들도 싫었을 텐데, 實은 저도 스트레스였죠. 하하.”‘중요한 일’ 自負心 剛하지만 社會的 待遇 아쉬워 施設管理職은 陰地에서 일하지만 建物을 管理하고 電氣를 安定的으로 供給하고 火災를 막는 重要한 役割을 한다. 다만 그 重要性 만큼 待遇받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아무리 就業難이라고 해도 靑年들이 이 職業은 忌避하죠. 社會의 視線이나 待遇가 좋지 않으니까요. 給與體系도 契約職처럼 돼 있어 號俸이 오르지 않습니다. 家族들은 제가 폴리텍臺를 다니면서 幸福해하고, 일하는 즐거움을 滿喫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했어요. 하지만 施設管理 일에 對해서는 否定的이었어요. 제가 아파트團地 電氣팀長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는데 그것도 反對했습니다. 아파트 警備員이나 施設管理者들이 住民들에게 甲질 當하는 類의 뉴스들 때문에요. 月給은 더 받을 텐데, 못 옮기고 있어요.”그의 말에 따르면 施設管理는 資格證이 要求되다보니 外國人 勤勞者를 雇用하기도 어렵고 大型建物이 늘어나는 데 따라 일손이 不足해지면 補償 體系도 나아질 것이라고 한다. 쇼핑몰 內 카페에서 커피를 사는 사이 손님用 座席에 앉았던 그는, “이곳에서 2021年부터 일했지만 손님席에 앉아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事實 施設 安全管理는 舞臺 뒤 作業과 類似할 것이다. 커피 賣場의 騷音을 避해 그는 愛玩動物 同伴者들의 食事用으로 設置된 無料 테이블로 案內했다. 前 職場에서 입은 마음의 傷處코딩 烈風이 불고 ‘문송(文科 出身이라 罪悚)하다’가 人事가 되는 時代다. 30餘 年 間 電算職에서 일했고 프로그램 開發도 直接 해온 그가 專攻 쪽에서 길을 찾지 않는 理由는 뭘까.“가장 큰 理由는 經歷 斷絶이죠. 제가 部長만 10年을 했어요. 寺院 代理 課長 時節에는 프로그래밍을 直接 했고 누구보다 잘 할 自身이 있었죠. 하지만 副部長, 部長이 되면서 實務에서 멀어지고 프로그래밍에 對한 감이 떨어졌어요. 個人的으로 電算業種을 아예 떠나겠다고 決心한 契機도 좀 있습니다.”전 職場 마지막 프로젝트인 銀行 次世代시스템 構築 過程에서 完了時期가 若干 늦어졌는데 그 責任을 혼자 떠맡는 狀況으로 내몰리는 씁쓸한 經驗을 했다.“예산 3000億 원, 準備期間 3年이 넘는 큰 프로젝트였어요. 部長級인 저 혼자 막판에 프로젝트에서 排除됐어요. 더 큰 責任이 있는 분들은 끝까지 남아 프로젝트 成功에 對한 祝賀를 받았지만, 저는 뒷房으로 물러났죠. 제게는 苦痛의 時間이었습니다. 다시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지도, 그쪽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게 된 거죠.”직장생활에서 抑鬱한 일을 當하는 境遇는 意外로 많다. 組織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責任’의 무게도 커지지만 뭔가 삐끗했을 때의 犧牲羊은 權力과 責任의 奧妙한 밀당 속에 定해지게 마련이다.“두드려라, 그러면…”人生 2幕을 잘 살아내는 분들 中에는 높은 自尊感의 所有者가 많다. 남들의 耳目에 휘둘리지 않고 自身의 意志로 움직인다. 自尊感이 높으니 어쩌다 남의 도움을 받게 되면 오히려 善意로 받아들이고 積極 臨한다. 이런 열린 姿勢와 積極的 努力이 새로운 機會를 열어준다.이 氏가 退職 後 빠른 時間에 새 生活의 리듬을 찾기까지, 그는 열린 마음으로 폴리텍 受講을 始作했고 누구보다 熱心히 배웠다. 就職 面接에서 탈락하자 雇傭福祉 센터 職員의 도움을 얻기도 했고 職場 先任者의 도움을 工夫에 十分 活用했다. 經歷이 없다는 理由로 夜間勤務 專擔이 됐지만 오히려 資格證 工夫의 機會로 삼았다.“별 期待가 없었는데 政府나 地自體가 意外로 많은 도움을 주더군요. 結局 本人이 얼마나 열린 姿勢로 積極的으로 臨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막막해하는 退職者들에게도, 就業 때문에 힘든 靑年들에게도 이런 길도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最近 文科出身으로 30代에 無職이던 親舊 조카가 第 助言에 따라 資格證을 따고 就職했어요. 親舊가 고맙다며 커피를 사는데, 보람이 느껴지더군요.”이 氏가 修了한 한국폴리텍 ‘新中年特化過程’은 2018年 開設돼 每年 60% 안팎의 就業率을 記錄 中이다. 지난해 上半期 統計를 보면 就業率은 62.8%였다. 訓鍊生은 50臺가 40.5%로 가장 많고 60代 35.8%, 40臺가 23.7%다. 다만 就業率은 40代(73.9%), 50代(64.7%), 60代(55.8%) 順으로 아무래도 젊을수록 높다. 지난해 基準 全國 35個 캠퍼스에서 2500名을 敎育했다. 敎育費와 實習材料費 等이 全額 無料이고 一定額의 訓鍊手當과 交通費를 支給한다.의왕=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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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삶의 마감, 내가 定할 수 있게”… 助力 尊嚴死 憲法訴願 낸 이명식 氏[서영아의 100歲 카페]

    韓國에서 죽음의 自己決定權은 어디까지 認定될까. 現在로서는 2016年 制定돼 2018年부터 施行된 延命醫療決定法에 따라 ‘林鐘 段階에 延命治療를 받지 않는 것’까지다. 本人이 事前에 延命醫療를 받지 않겠다는 誓約을 해 놓거나 本人의 意識이 없다면 家族이 合意해 決定할 수 있다. 主로 心肺蘇生術, 血液 透析, 抗癌劑 投與, 人工呼吸器 着用 等 現代醫學의 힘을 빈 延命過程을 避할 수 있다. 單, 痛症管理와 營養供給은 繼續된다.임종과정을 人爲的으로 ‘늘리지 않는다’는 點에서 ‘消極的 安樂死’라고도 불린다. 萬若 臨終 段階는 아닌 不治病의 境遇는 어떻게 될까. 回復될 可望 없이 痛症이 이어진다면?죽음의 自己決定權 保障해달라제주도에 사는 前職 公務員 이명식(63) 氏가 이런 境遇다. 그는 原因을 알 수 없고 現代醫學으로 治療가 不可能한 ‘脊髓炎’ 診斷을 받고 5年째 下半身 痲痹와 極甚한 幻想통에 시달리고 있다.이런 그가 지난해 12月 助力 尊嚴死를 立法하지 않은 現 狀態는 違憲이라는 憲法訴願을 提起했다. 청구의 內容은 1) 호스피스 緩和醫療 및 臨終過程에 있는 患者의 延命醫療決定에 關한 法律에 助力 尊嚴死를 許容하는 具體的 立法을 마련하지 않은 잘못에 對한 請求 2) 自殺關與罪를 規定한 憲法 條項의 違憲與否에 對한 請求의 2가지. 尊嚴死를 願하는 當事者와 家族의 基本權이 侵害되고 있는데도 國家가 積極的 措置를 取하지 않는 것은 憲法에 保障된 幸福追求權 自己決定權 自己運命決定權 私生活의 自由를 侵害한다는 主張이다.이에 對해 憲法裁判所가 1月 16日 ‘審判回附’를 決定함으로써 助力 尊嚴死에 對한 憲法訴願裁判이 始作됐다. 審判回附는 正式으로 審判하겠다는 뜻인데, 2017年과 2018年에는 類似한 憲法訴願 審判請求가 모두 却下됐었다.<현행 延命醫療 中斷과 醫師 助力 尊嚴死 槪念 比較>延命醫療 中斷醫師助力 尊嚴死關聯法連名醫療結晶法으로 許容法的 根據 없어 不許條件死亡 臨迫, 回復 不能極甚한 苦痛, 回復 不能履行手段人工呼吸器, 心肺蘇生術 等 延命醫療 中斷死亡을 誘導하는 藥물 處方對象意識不明 患者 包含意識不明 患者 未包含幻想통 시달리는 脊髓炎 患者이명식 氏는 濟州島에서 딸(36)과 함께 산다. 5年 前 名譽退職 뒤 濟州島에서 人生 2幕을 始作했다. 그런데 皮膚科에서 알레르기 治療를 위한 注射를 맞고는 高熱과 頭痛에 시달렸다. 며칠 뒤 大學病院 應急室에 갈 때쯤에는 ‘腦 속을 面刀날로 베어내는 듯한’ 痛症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 40餘 日 間의 記憶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精神을 차려보니 悽慘했다. 가슴 아래가 痲痹됐고 脊髓炎이란 診斷이 어렵사리 내려졌다. 脊髓炎은 脊髓 周邊 神經纖維가 損傷돼 神經痛症, 痲痹, 感覺 異常을 誘發한다. 그의 境遇 바이러스가 脊髓에 浸透해 炎症을 일으켰고 神經을 攪亂시키고 있다는 說明이었다. 病院 10餘 군데를 돌았지만 原因도 모르고 治療에도 進陟은 없었다.“차라리 末期癌 患者였다면…”지난달 26日 電話 인터뷰에 應한 이명식 氏는 對象을 알 수 없는 被害意識과 憤怒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건 견딜 수 없는 痛症. 隨時로 찾아오는 痛症은 痲藥性 藥물로도 制御가 되지 않는다.“다리는 痲痹가 됐는데 故障난 神經이 끊임없이 痙攣을 일으키고 痛症을 만들어냅니다. 痛症이 甚하면 마구 火가 나요. 그런데 화낼 곳이 없고 火를 내는 내 모습도 醜접해보이고….”그의 表現에 따르면 다리를 프레스機로 壓迫하거나 꼬아서 꼬집는 듯한 느낌이 隨時로 掩襲해온다. 다리 아래는 차갑고 저려 暖爐불을 쬐고 있는데 머리쪽은 熱이 몰려 땀을 뻘뻘 흘린다. 痲藥性 鎭痛劑 패치를 붙이고 지내며 午後에야 두어時間 精神을 차리는 日常이 이어지고 있다.“통증을 呼訴하면 病院에 入院하라고들 해요. 院內에서는 더 剛한 痲藥性 鎭痛劑를 使用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뿐, 어느 病院이건 3個月 지나면 退院하라고 합니다. 차라리 末期癌 患者였다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어요. 治療라도 할 수 있고, 治療가 안 되면 끝이라도 있으니. 끝없는 痛症에 짓눌려 每日을 견뎌내는 것이 무슨 意味가 있는지….”디그니타스 等 海外 助力 團體 4군데에 登錄그의 딸이 수발을 도맡고 있다. 排便活動이 不可能한 아버지를 위해 每日 肛門에 손을 집어넣어 變을 꺼내야 한다. 人間으로서 最小限의 尊嚴을 지키기 어려운 狀況이다.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記錄을 훑어보니 普通 사람에게는 想像조차 할 수 없는 苦痛이 가득했다. 感覺이 없으니 低溫火傷을 입어 발뒤꿈치와 새끼발가락을 잘라내거나 小便줄에서 일어난 感染 탓에 急性腎盂腎炎을 앓거나 褥瘡으로 苦痛받는 等 여기저기 몸은 부서져간다. 한時도 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만큼 딸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더욱 그를 괴롭힌다. 數次例 極端的 생각을 했지만 家族에게 凶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스위스에 ‘디그니타스’ 等 尊嚴死를 도와주는 團體가 있다는 걸 알고 한동안 希望을 품었지만, 結局 抛棄했다. 혼자 擧動을 못하니 누군가 스위스까지 데려가줘야 하는데 刑法上 自殺幇助4가 된다.이 氏가 韓國尊嚴士協會 최다혜 會長에게 디그니타스에 對한 問議電話를 하면서 길이 보이기 始作했다. 無料辯論을 自處한 辯護士團體 ‘着韓法만드는사람들’과 連結됐고 그는 憲法訴願에 나서기로 했다. 憲法訴願에는 그의 딸도 請求人으로 이름을 올렸다.조력 尊嚴死 認定하는 國家 갈수록 늘어의사의 도움으로 尊嚴한 죽음을 얻는 助力 尊嚴死 或은 安樂死를 合法化하는 國家는 갈수록 늘고 있다.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캐나다, 뉴질랜드, 美國과 濠洲의 一部 州(州)들에서 助力死亡을 許容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의 有名俳優 알랭 들롱(89)李 助力死亡으로 生을 마감하겠다고 밝혔고 最近에는 네덜란드의 前 總理 夫婦가 93歲를 一期로 함께 尊嚴死를 擇해 話題가 되기도 했다.2002년 世界 처음으로 安樂死를 合法化한 네덜란드에선 △患者가 견딜 수 없는 苦痛을 겪고 있으며 △治療의 可望이 없고 △죽고 싶다는 意志를 明確히 밝히는 等 6가지 基準이 充足될 境遇 安樂死를 施行하고 있다. 이렇게 安樂死를 擇한 사람이 2022年 8720名에 이른다.일본의 저널리스트 미야시타 요이치의 著書 ‘安樂死를 이루기까지(쇼가쿠칸)’에는 네덜란드人 시프 避텔스마 氏(2013年 11月 79歲로 死亡)의 그날이 紹介돼 있다. 避텔스마 氏는 子女와 孫子 26名이 모인 居室에서 一一이 抱擁과 키스를 나눈 뒤 아내가 불러주는 追憶의 노래를 들으며 意思가 건네준 컵에 든 藥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제 잠이 오네’라며 앉아있던 소파에 모로 누웠다. 그는 死亡 13年 前 心筋梗塞, 4年 前 皮膚癌을 이겨냈지만 10個月 前 알츠하이머 判定을 받자 安樂死를 實行에 옮기기로 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期間 알츠하이머를 앓았는데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다는 意志가 굳었다. 이를 契機로 네덜란드에서는 癡呆가 ‘견딜 수 없는 苦痛’에 該當되느냐를 놓고 論爭이 벌어졌다.헌재 審判, 이番에는 다를까원혜영 웰다잉文化運動 代表는 “潮力 尊嚴死의 全世界的 擴散은 21世紀 들어 일어난 現象”이라며 “워낙 擴散勢가 빨라 韓國에서도 오래지 않아 現實이 될 것같다”고 말했다.이명식 氏의 訴訟代理人으로 公開辯論을 맡은 金炫 着韓法만드는 사람들 代表(法務法人 세창 辯護士)도 “이番 憲法審判은 過去와는 다를 것”이라고 展望한다. 그의 說明에 따르면 2009年 尊嚴死 許容 與否를 다룬 이른바 ‘金할머니 事件’에서 憲法裁判所는 이미 ‘尊嚴死에 對한 自己決定權은 憲法上 保障된 基本權’임을 認定한 바 있다. 다만 ‘이는 法學 醫學만이 아니고 宗敎 倫理 哲學까지 連結되는 重大한 問題이므로 充分한 社會的 合意가 必要하다’는 理由로 ‘尊嚴死 關聯한 現行 法 外의 立法義務는 없다’고 決定했다.김대표는 “그로부터 15年이 흐르면서 助力 尊嚴死에 對한 社會的 合意는 成熟 段階에 到達했다”면서 “關聯 輿論調査에서도 國民 80% 以上이 贊成하고 있다”고 强調했다.앞서 2022年 國會에서 安圭伯 議員의 發意로 助力 尊嚴司法이 發議됐으나 進陟이 없었다.최다혜 尊嚴士協會 會長은 “죽음을 앞둔 患者가 自己決定權을 行使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憲法 價値를 守護하는 일”이라고 말한다.하지만 先進國家들과 달리 老年의 醫療와 돌봄이 제대로 保障되지 않은 韓國에서 助力 尊嚴死가 施行된다면 ‘너무 쉬운 脫出口’가 될 수 있다는 憂慮도 적지 않다. 本人의 意志보다 社會의 壓力, 家族의 바람 等에 떠밀려 죽음을 選擇하는 境遇가 생길 수 있다는 것. 治療받고 돌봄받지 못해 苦肉策으로 尊嚴死를 擇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야말로 悲劇이다. 崔 會長은 “그래서 社會保障制度나 醫療서비스 擴大와 助力尊嚴死 合法化가 竝行돼야 한다”고 말한다.“죽을 權利 認定받은 瞬間, 살아갈 意志 생겨나”이 氏는 요즘 助力 尊嚴死가 可能하도록 世上을 바꾸는데 힘을 보탠다는 一念으로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다. 그에게 尊嚴死가 認定된다면 卽刻 實行에 옮길 計劃인지 물었다.“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 生命을 스스로 決定할 수 있는 權利를 保障받고 싶다는 거죠. 選擇肢를 하나 더 갖게 되면 그때 가봐야죠. 痛症만 사라진다면….”이는 日本에서 安樂死 問題를 提起했던 作家 하시다 스가코 氏(2021年 작고)가 生前 인터뷰에서 말한 心境과도 같다. “選擇의 權利가 내게 있음을 確認하는 것 自體가 只今까지의 삶에 對한 肯定이자 마지막까지 더 熱心히 살고자 하는 意志를 북돋는 일”이라는 것. 스위스 디그니타스는 登錄 條件이 무척 까다롭지만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會員이 된 뒤 安樂死를 實行에 옮기는 사람은 3%에 不過하다고 한다. 事故로 障礙를 입은 데다 暫時도 그치지 않는 痛症을 얻은 한 젊은이는 가까스로 安樂死 許可를 받아낸 뒤 오히려 自身의 狀況을 肯定하고 障礙人 올림픽 出戰 準備를 始作했다.선택권을 얻더라도 選擇의 自由는 如前히 各自에게 있다. 굳이 낯선 스위스 땅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自身의 意志와 選擇으로 家族의 祝福과 人事를 받으며 아름답게 生을 마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살아갈 힘을 줄 수도 있다.위의 冊 ‘安樂死를 이루기까지’에 登場한 事例. 末期癌 患者였던 네덜란드人 윌 避暑 氏(2012年 65歲로 死亡)는 世上을 뜨기로 定한 날 自宅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다.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무르익던 무렵, 그는 親知와 親舊들에게 이런 人事를 남기고 醫師와 家族이 기다리는 自身의 寢室로 들어갔다. “그럼 여러분, 저는 只今부터 寢臺로 가서 죽겠습니다. 끝까지 파티를 즐겨주세요. 感謝합니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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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隱退 後 그의 眞짜 ‘人生 旅行’이 始作됐다[서영아의 100歲 카페]

    ‘隱退後 世界 旅行 떠난 아부지.’ 이런 特異한 題目의 유튜브 사이트를 知人이 보내왔을 때 暫時 망설였다. 紙面에 유튜버를 다룰 境遇 ‘弘報해준다’는 誤解를 살 수 있어서다. 하지만 前職 公務員 최수길 氏(64)의 ‘수길따라(sugilway) TV’는 조금 달라 보였다. 商業性과 距離가 있었고 退職後 삶을 苦悶하는 시니어들에게 좋은 參考가 될 듯했다. 무엇보다 그가 내세우는 ‘가슴 떨릴 때 떠나라, 다리 떨리면 못 간다’는 캐치프레이즈가 强烈했다.2월초 방글라데시를 旅行 中이던 그와 連絡이 닿았다. 그는 2021年 6月 튀르키예 旅行 때부터 1年의 折半 以上을 海外에서 지내고 있다. 16日 그가 사는 春川으로 向했다.어쩌다 유튜버“退職하면 바로 떠나려 했는데, 코로나19 狀況하고 겹쳐 움직일 수 없었죠. 튀르키예가 가장 먼저 觀光客에 對한 防疫을 緩和했어요. 旅行하며 찍은 動映像을 家族에게 보냈는데 딸이 재미있다며 유튜브에 올리자고 하더군요.”그가 40日間 찍어온 映像들은 ‘60代 아빠의 나홀로 터키旅行’이란 題目으로 約 40篇이 올라갔다. 反應이 暴發的이었다. 몇年間 100名도 안되던 購讀者가 하루 700~800名씩 늘었고, 15篇 程度 올렸을 때 1萬名을 突破했다. -反應이 좋은 理由는 뭐라고 보세요?“코로나19 때문에 다들 海外에 못 나가니까 代理 滿足이 됐던 것 같아요. 또 댓글을 보면 ‘自身이 旅行하는 느낌’이란 表現이 많아요. 제가 海外에서도 主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분들과의 小小한 對話나 日常을 그대로 傳하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같아요.”당시 튀르키예는 日常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튀르키예便 마지막回에는 이런 環境에서 40日間 生活하다 歸國한 그가 空港에 내리면서부터 韓國의 嚴格한 防疫 시스템에 當惑해하는 모습도 記錄돼 있다. 以後 ‘隱退 後 따듯한 泰國에서 겨울나기’를 거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베트남, 몽골에 다녀왔다. 필리핀에서는 語學硏修를 겸해 석 달 間 滯留했고 中央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코카서스 3國(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各其 묶어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番의 방글라데시까지 17個國을 돌았다.여행은 에피소드와 해프닝의 連續으로, 그가 겪는 左衝右突이 加減없이 登場한다. 異邦人에게 親切한 現地人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았다. 言語가 不足한 部分은 웃는 얼굴과 바디 랭귀지로 메웠고 때로는 아마추어 聲樂家를 뛰어넘는 노래實力으로 現地人들과 交感을 이어갔다. 수길따라TV는 購讀者 13.4萬 名, 累積 照會數 2037萬回를 記錄 中이다(15일 現在). 購讀者의 85%가 45~65歲 層이다.가난, 그리고 夜學 先生님과의 因緣江原道 華川에서 태어난 그는 江原道 敎育廳에서 40年을 勤務하고 2020年 退職했다. 最終職銜은 道 敎育廳 行政局長. 直前에는 原州 敎育文化館 管掌을 지냈다. 地方職 公務員으로서는 最高位職인 3級 副理事官까지 올랐다.그런데 그의 學歷이 눈에 띄었다. 中古 모두 檢定考試다. “무척 가난했어요. 혼자 越南했던 아버지는 1907生이셨고 저희가 자랄 무렵에는 이미 年老해 일을 못하셨어요. 南에서 만나 結婚한 어머니는 6.25때 負傷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셨죠. 저희 4男妹의 正規學歷은 國民學校 卒業으로 끝났어요.”신문팔이나 ‘아이스케키’ 장사 等으로 家計를 도우며 夜學에서 工夫했다. “7師團 軍人敎會에서 저녁에 中學校 過程을 가르쳐줬어요. 工夫만이 아니라 人生 멘토로 兄님처럼 도와줬어요. 部隊에서 짬밥을 담아와 나눠주기도 하고 齒藥 비누 等을 주기도 했죠.” 이런 軍人 中 고려대 法大生으로 軍服務 中이던 차석용 前 LG生活健康 副會長(現 휴젤 代表)과의 因緣이 재미있다. 車 代表는 그를 눈여겨보고 繼續 關心을 보이며 激勵해줬다. “春川의 한 名門高에 奬學生으로 合格해 學費는 解決됐는데 寄宿舍費를 낼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비슷한 處地 親舊 自炊집에서 살며 學校에 다녔는데 끼니를 때울 수가 없었죠. 어느날 寄宿舍 食堂에서 몰래 밥을 먹으려다 들켜 엄청나게 맞고 退學處分 當했어요. 罪名은 ‘無斷圖式(盜食)’이었네요.”삼청교육대 갈 뻔했던 末端 公務員1977年, 人權도 福祉도 없던 時節이었다. 그가 어린 時節 살아온 이야기는 當時 時代狀況까지 겹쳐 苦難의 連續이다. 한동안 濟州島에 가서 日本 密航을 꿈꾸기도 했다.“그 무렵 이미 除隊해 서울로 간 차석용 先生님이 ‘서울로 와서 우리 집에서 지내며 工夫하라’고 勸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固執이 좀 있어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고는 올라와서 高卒檢定考試를 치르고 入住課外를 했어요. 드디어 좀 살 만해졌는데 전두환 政府가 課外 禁止 措置를 내놨죠.”그해 公務員 試驗에 應試해 1980年 9月 地方公務員으로 任用됐지만 不正投票에 抗議했다가 이듬해 5月 依願免職 當했다. “삼청교육대 갈지, 입 다물고 辭表쓸지 選擇하라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가 삼청교육대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決死反對하셨어요. 當時 집近處에 敎育長이 있었는데 敎育이라는 未明하게 殘酷한 暴力이 行해지는 걸 아신 거죠.”그렇게 잘린 뒤 不過 석달 뒤인 8月, 이番에는 敎育行政 公務員 試驗에 다시 合格했다. “1~2年 일하고 돈을 모아 大學에 가려 했는데, 結婚하고 아이들 생기고 父母님 扶養하고 하느라 그냥 눌러앉게 됐네요.”그는 50歲에 漢陽사이버大 英文科를 卒業했다. 夜學先生님과의 因緣도 이어지고 있다. 1980年代에 美國으로 留學간 茶 氏는 10餘 年 뒤 그에게 連絡을 해왔다. 歸國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게 그였다며. 2年前 그의 딸 結婚式에는 花環과 祝儀金을 보내왔다. ‘觀光’ 아닌 ‘旅行’을 하시라―자유여행을 가는 理由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觀光을 가요. 觀光이란 말 그대로 ‘보는’ 거잖아요. 가이드 案內로 다니며 보는, ‘왔노라 봤노라 찍었노라’죠. 旅行은 그 나라의 文化를 直接 體驗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 얘기 나누고 그 나라 飮食을 直接 먹어보는 體驗과 交流를 하는 거죠. 여기 더해 가난한 사람 만나면 쌀 한자루라도 채워주고 떠나는 나눔이 있다면 더 좋겠죠.”―퇴직자들은 觀光보다는 旅行을 하시라는 거군요.“이제는 그럴만한 時間 餘裕가 充分히 있으니까요. 지난番 미얀마 映像에 제가 住民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場面이 있는데, 왜 돈을 나눠주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現場을 보지 못하셔서 그래요. 그 나라는 只今 絶對貧困이라 한 끼 먹기가 宏壯히 힘들어요. 現場을 보면 저보다 더 그런 마음이 生기실 거예요.”미얀마에서 한 끼를 解決할 때 1000짯(藥 600원) 程度가 必要하다. 그가 나눠준 돈이 1000짯 紙幣였다. 그것 外에 달리 그분들을 도울 方法이 없었다고.“가난은 猖披한 것이 아니예요. 숨길 일도 아니죠. 다만 어린 時節 가난이 꿈을 빼앗는다면 그건 問題예요. 只今 미얀마는 많은 이들이 끼니를 걱정하는 狀況인데, 이걸 外部로 알리는 일도 수월치 않더군요. 映像을 찍는데도 엄청난 統制를 느꼈어요.”―어려운 곳들을 다니다 보니 좀 危險한 狀況도 있던데요. “先進國이라는 유럽도 소매치기가 득실거리고 지저분해요. 旅行은 그 나라에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소매치기 만나거나 바가지 쓰는 건 當然한 거예요. 旅行은 그걸 甘受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堪耐하지 못할 程度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조지아에서는 危險한 택시를 타기도 했다. 이때는 카메라가 그의 守護裝備가 된다. “돈 더 달라면 바가지 써주면 돼요. 싸우는 것보다 낫죠. ‘必要한 거 뭔데, 알았어. 더 줄게’하면서 ‘나 유튜브 하니까 寫眞 좀 찍자’며 그들의 寫眞을 찍고는 ‘이거 實時間으로 韓國으로 電送된다’고 말해요. 그럼 얘네들度 웃어요. ‘이거 더 털다가 다치겠구나’고 생각하는 거죠. 自己들 얼굴이 다 나갔다고 하니까. 그렇게 지혜롭게 넘겨야죠.”소매치기 바가지 程度는 堪耐해야 眞짜 旅行 -시니어들에게 自由旅行 팁을 주신다면.“갈 곳 定할 때 날씨를 잘 살펴보세요. 나이가 있는 분들은 날씨 때문에 宏壯히 힘들 수 있어요. 克己 訓鍊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요. 그 나라에 對해 事前에 工夫도 하셔야죠. 一旦 歷史부터, 그리고 지리 交通 飮食 文化 이런 式으로 해나가요. 저는 主로 인터넷으로 해요. 航空券은 한 달 前까지는 購入해야 低廉하게 살 수 있어요.”중앙아시아 3國 旅行方法을 궁금해하는 讀者들이 많아 아예 動線과 經費, 準備物, 호텔 等을 整理한 映像을 올리기도 했다. 그의 境遇 27日間 警備 總 350萬 원 程度가 들었다. “費用問題를 어떻게 準備해야 되는지에 對해 映像을 올린 것도 있어요. 저는 20年 前부터 年金貯蓄을 들고 달러 預金을 했어요. 外國가서 쓰려면 달러가 있어야 하니까요. IMF外換危機 때 1달러 2000원 近方까지 갔을 때 저는 海外旅行에 나섰어요. 저로서는 1000원도 안 되게 샀던 달러니까 그 돈을 쓸 수 있었죠. 2000원에 換錢해야 한다면 어떻게 나가겠어요?”―그때 원貨로 바꿨다가 나중에 떨어졌을 때 다시 사면…. “그건 달러를 投資 手段으로 하는 境遇고 저는 海外旅行에 必要한 만큼 모은 거니까 目的에 맞게 잘 쓴 거죠. 退職 後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니 이제 貯金이 바닥났는데 多幸히 구글에서 돈을 주네요.”―구글이 收益金을 달러로 주죠. 실버버튼(購讀者 10萬) 以上되면 收入이 꽤 될 텐데….“여행비용 걱정이 없어진 程度예요. 現地 가서 굶는 사람들에게 쌀이나 밀가루를 사줄 餘裕도 가질 수 있죠. 저는 채널을 돈버는 手段으로 삼지는 않으려 해요. 예컨대 私的인 廣告를 하면 宏壯히 많이 돈을 벌 수 있지만 一切 應하지 않고 있어요. 旅行經費만으로 充分하고 제 經驗을 讀者들과 나누는 게 重要하니까요. 제가 可能하면 講演를 하러 다니는 것도 비슷한 理由예요. 講演은 돈도 안되고 힘들고 時間도 많이 빼앗기지만 제 旅行, 隱退 後 삶에 對해서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은 거죠.” 지난해 9月 大邱 人材開發院을 始作으로 慶北人材開發院 濟州平生敎育院 等에서 ‘旅行으로 始作하는 幸福한 隱退生活’을 主題로 講演했다. 停年退職을 앞둔 公務員들이나 中堅 實務者들이 對象이다. “‘國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방글라데시에서 歸國한 날 ‘바퀴벌레 모기 없는 便安한 房에서 오랜만에 熟眠을 醉했다’고 하셨는데 苦生하고 돌아오면 이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여행이 좋은 건 돌아갈 집과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돌아갈 나라가 없다면 難民이죠. 前 집으로 돌아갈 때 宏壯히 氣分 좋아요. 나를 반겨주는 家庭이 있고 내가 돌아갈 國家가 있으니까. 그걸 되새기기 위해 자꾸 떠나는 건지도 몰라요.”―모자에 太極旗 마크도 붙이고, 或是 ‘國뽕’같은 거 있으신가요.“음… 當然히 있어요. 제가 처음에 1980年代에도 旅行을 갔잖아요. 그때만 해도 韓國 모르는 사람 많았죠. 只今은 오히려 ‘서울’이라 하면 ‘와’ 歎聲을 질러요. 요즘 K文化라 하잖아요. 韓國에 가고 싶다는 사람도 많고 韓國人이라면 더 도와주려고 하니 旅行하기도 쉬워요. 國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죠. 代身 예전에는 좀 失手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는데 只今은 韓國人으로서 제대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負擔感이 있어요. 自負心을 갖는 만큼 責任을 져야 하는 거죠.”그는 自身이 유튜브를 하는 보람으로 어느 젊은 分의 댓글을 紹介했다. “그 분은 平素 未來에 對한 꿈이 없었대요. 未來가 不透明하기도 하고 나이 드는 것도 싫었는데 第 유튜브를 보고서 꿈이 생겼다는 거예요. 自己는 60歲 以後의 人生은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저를 보면서 ‘아 내가 왜 젊어서 熱心히 일해야 하는지, 人生을 길게 計劃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 어떤 期待와 希望이 생겼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이럴 때 아, 내가 유튜브를 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죠.”―그래서 後輩들을 위해서도 시니어들이 幸福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까요.“퇴직자들도 그래요. 社會에서 ‘隱退(隱退)’라고 하잖아요. 물러나서 숨는다. 근데 職業에서 隱退하는 거지 人生에서 隱退하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내려놓기는 커녕 새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분들이 第 映像을 보면서 ‘나도 꿈을 꾸게 됐다’ ‘希望을 갖게 됐다’ ‘當身이 하는 거 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自信感이 생긴다’ 이렇게 反應해주시길 바래요.”60대, 旅行하기 가장 좋은 時期그는 正式으로 聲樂 敎育을 받지는 않았지만 各種 大會에서 受賞하는 等 빼어난 聲樂實力을 보인다. 두 子女도 모두 聲樂을 專攻해 機會있을 때마다 세名이 함께 노래하곤 한다. 現在 아들 恩寵(38) 氏는 보디빌더로 유튜브 ‘蔥蔥TV(購讀者 12.1萬)’를 運營한다. 딸 恩惠(33) 氏는 春川市立合唱團원으로 일하는데 崔氏의 유튜브 動映像 編輯者이기도 하다. 題目이나 字幕에 ‘아부지’가 많이 登場하는 理由다. ―앞으로 計劃은? “旅行은 元來 70歲까지 할 생각이었어요. 人生設計圖 거기 맞춰서, 年金貯蓄을 딱 70歲까지 받도록 設計했어요.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한 75歲까지는 다니겠다 싶어요. 그 以後에는 國內를 다녀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또 제 經驗을 共有하기 위해 講義에 置重해야 겠다는 생각도 합니다.”―어느 날 갑자기 이젠 떠나기 싫어질 可能性은 없을까요.“제가 旅行을 떠나는 건 好奇心과 설렘 德이예요. 저는 아직도 이 나라 저 나라 地圖를 들여다볼 때 너무 氣分이 좋고, 밤에 飛行機를 타고 불빛 반짝이는 낯선 都市에 내려갈 때 가슴이 두근거려요. 이 都市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어떤 趣味를 가졌고 무슨 飮食을 먹고 살까. 그런 期待感이 끝이 없어요. 그 설렘 好奇心이 있을 때까지는 繼續 가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隱退 直後는 旅行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세요”춘천=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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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遺言狀을 써야 나 떠난 뒤 子息들이 안 싸워요”[서영아의 100歲 카페]

    지난달 中旬 午餐을 請해온 元惠榮(73) 웰다잉運動本部 共同代表는 “올해가 超高齡社會의 元年이 될 것같다”는 말부터 꺼냈다. 全體 人口에서 高齡者가 차지하는 比重이 20%를 넘어서면 超高齡社會다. 當初 2026年으로 점쳐지던 韓國의 超高齡社會 進入 時點은 몇 年 前부터 2025年으로 당겨지더니 이제는 올해 後半이 될 거라는 展望이 나온다. 出産率이 떨어진 만큼 高齡化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時代를 제대로 된 準備없이 맞는 現實에 對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26日 正式 인터뷰를 請했다. 100歲카페로서는 3年만에 다시 하는 인터뷰다.1000만 老人時代 元年그는 2020年 70歲를 起點으로 總 7線(國會議員 5線, 富川市長 2線) 經歷을 내려놓고 政界隱退한 뒤 ‘웰다잉 傳道師’로 變身했다. 그間 延命醫療意向書 作成하기, 葬禮文化 改善, 遺言狀 쓰기, 臟器寄贈, 遺産寄附 等의 運動을 펼쳐왔다. 國會議員 時節인 2016年 無意味한 延命醫療를 받지 않을 權利를 保障하는 延命醫療決定法을 通過시켰고 2019年에는 尊嚴하게 죽을 權利를 保障하는 法的 基盤 造成을 위한 웰다잉基本法을 代表發議했다. 이 過程에서 隱退하면 이쪽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지난 3年 間 成果는 어떠셨는지요.“조금씩 천천히 進行되고 있어요. 事前延命醫療 意向書 署名者는 지난해 10月 200萬 名을 넘겨서 어느 程度 定着段階라고 보고, 올해부터는 ‘遺言狀 써보기’에 힘을 기울이려 합니다. ‘遺言狀 쓰기’가 아니고 ‘써보기’예요. 完成된 遺言狀이 아니라 처음 써보는 遺言狀으로 始作하자는 거죠. 延命醫療意向書가 내 生命에 對해 決定權을 行使하는 것이라면 遺言狀은 財産에 對한 決定權을 찾는 게 됩니다.”연명의료결정법(속칭 尊嚴死法)은 그 무렵 日本에서 關聯 取材를 하다보니 自身들이 훨씬 오래 前부터 論議만 하고 있던 것을 韓國이 앞서서 導入했다고 感歎하는 評價를 들은 일이 있다. 그 主人公이 院代表人 셈이다. 그는 1月 初 웰다잉文化運動이 펴낸 ‘遺言狀 槪論’이란 冊을 내밀었다. 相續 專門인 李陽元 辯護士가 執筆했다.“이게 敎科書 役割을 하기를 바랍니다. 올初부터 專門辯護士들이 遺言 無料相談을 해주는 온라인서비스센터도 開設했어요. 美國人은 成人의 56%가 遺言狀을 쓰는데 韓國은 1%도 되지 않아요. 最近 들어서는 相續紛爭度 急增하고 있죠.”이혼소송보다 더 많아진 相續紛爭相續紛爭은 엄청난 富者들에게나 該當되는 얘기일까. 法院行政處에 따르면 最近 10年 사이 相續裁判은 늘고 離婚裁判은 줄어드는 趨勢다(표 參照). 相續裁判에서 83%는 訴訟物 價額이 1億 원 以下다. 돈보다 憾情싸움이 더 크다는 얘기다. 裁判過程에서는 父母의 偏愛, 成長過程에서의 不平等, 獨박看病의 抑鬱함 等 平素 묻어둔 恨이 다 쏟아져나온다. 結局 家族은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이혼과 再婚, 獨身 等 날로 複雜해지는 家族의 形態도 本人이 交通整理 해놓지 않으면 葛藤要素가 된다. 여기 더해 미리 遺産을 配分하는 過程에서 一部를 社會에 寄附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 平素 關心 있었던 分野에 10%건 1%건 寄附한다면 自身의 삶이 더욱 意味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最近 뉴스만 봐도 相續紛爭에 빠진 LG는 遺言狀이 아예 없고 순복음교회의 境遇 遺言狀의 實效性이 다퉈졌죠. 어머니가 셋째아들에게 遺産을 몰아줬는데 遺言狀 作成 當時 法的 能力이 없는 狀態였다는 게 長男과 次男의 主張이었어요. 判決은 遺言 當時 法的인 效力을 認定하는 쪽으로 났더군요. 두 境遇 모두 제대로 된 遺言狀을 準備했더라면 葛藤을 훨씬 줄였을 텐데, 그걸 못한 거죠.”친구의 慌忙한 죽음, 遺族의 悲痛…“遺言狀 썼더라면”유언장 쓰기의 根本的 意味는 더욱 깊이가 있다.“유언장을 쓰는 건 사랑하는 家族과 벗들과의 아름다운 離別을 準備하는 일이예요. 지난해 제 親舊가 腹痛으로 入院한 지 이틀 만에 世上을 떠났어요. 殯所에서 夫人이 ‘말 한마디 못하고 보냈다’고 哀痛해하는데 이 親舊가 遺言狀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遺言狀에 아내에 對한 고마움과 사랑이 表現돼 있었다면 夫人에게 얼마나 慰勞가 됐을까….”―내가 世上에 무엇을 남길까를 생각하다보면 오늘을 意味있게 살기 위해 姿勢를 다잡게 될 것같습니다.“내 마지막 모습을 내가 決定해둔다는 意味도 있지요. 假令 囚衣 代身 平常服을 입겠다거나 작은 葬禮式을 하고 싶다면 미리 決定해둬야 해요. 子息들 立場에서는 體面도 따져야 하고 孝道 意識도 있으니 차마 그런 決定을 할 수 없거든요.”―연명의료를 拒否하거나 臟器寄贈 誓約을 했지만 막상 狀況이 닥쳤을 때 家族이 反對하는 境遇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그러니 家族에게 自身의 뜻을 時間을 들여 알려두는 게 重要하죠. 마음의 準備가 되게끔 말이죠. 그게 좋은 마무리지요.”“난 福받은 人生…돈에 無關心했던 건 後悔”―本人의 遺言狀은 쓰셨나요.“몇년 前부터 썼습니다. 다만 저는 財産이 워낙 없어요. 살고 있는 집, 國民年金, 若干의 貯金이 全部라, 집을 두 아들에게 나눠주는 程度지요. 사람들은 제가 풀무원 創業자니까 뭔가 있을 거라고 誤解하는데 政治 入門할 때 共同創業者에게 다 넘기고 商標權만 갖고 있다가 그것도 나중에 奬學財團으로 넘겨받았어요.” 이렇게 設立된 富川敎育文化財團은 1996年 設立된 뒤 28年째 數千名에게 奬學金을 주고 있다.“은퇴하고 보니 돈에 너무 無關心했던 게 좀 後悔됩니다. 國民年金에 若干의 貯蓄을 더해 月 200萬 원 前後面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萬若의 事態는 念頭에 없었어요. 예컨대 저나 아내가 重病이 걸려 終日 看病이 必要하다면? 내가 老朽 돈 問題에 너무 神經을 안 썼구나 反省이 들더군요.”그는 1951年 自身이 태어난 집에서 只今도 산다. 그린벨트로 묶인 德에 우물과 蓮못, 數百 坪 마당을 가진 豪奢를 누리지만, 집을 팔 수가 없다. 考試地價로는 서울 邊두리의 傳貰값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政界隱退 뒤 失業者 兼 自願奉仕者가 되신 건가요.“70세까지 일했으니 福받은 人生이죠. 親舊들이 60歲 전후해서 모두 退職했는데 그동안 이 親舊들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얼마나 외롭고 심심하고 답답했을지 미처 몰랐어요. 제가 隱退하고 보니 아차하는 거죠. 같이 놀아주고 밥도 먹고 旅行도 다니고 해야 했는데 그걸 생각 못했네…라고. 사람은 다 自己가 겪어봐야 아는 거예요.”여권 重鎭 時節, 靑瓦臺에서 擔當 찾다 抛棄“1000萬 老人 時代인데, 그 분들이 活氣없이 時間만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예요. 1000萬 老人은 한番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新人類’라고도 하죠. 隱退 뒤에도 30年을 더 살아내야 하는 이 분들이 보람있게, 品位있게 人生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重要한데, 最高 政策決定機構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런 槪念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이를 위해 發議했던 웰다잉 基本法은 21代 國會에서도 通過되기 어려워보인다.그는 文在寅 政府 때 市民社會首席 社會政策首席 政策室長 等 擔當者(가 될 만한 候補들)를 찾아다녔다고 한다.“이 새로운 現象이 워낙 重要하고 빨리 進行되고 있으니 關心을 갖고 어디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부터 論議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抛棄했어요. 다들 ‘내 擔當이 아닌 것같다’고 하더군요. 當時 與圈 重鎭이던 제가 그런 狀況이었으니 오죽했겠어요. 위에서 關心 없다면 公務員들은 絶對 움직이지 않아요.”―정부로서는 아무래도 財政負擔을 의식하지 않을까요.“고령자 關聯해서는 基礎年金부터 醫療費 支援, 看病支援에 일자리支援까지 天文學的 돈이 必要한 일이 많지요. 唯一하게 財政이 들지 않는 分野가 웰다잉이예요. 오히려 費用을 줄이는 效果가 있지요. 高齡者들이 延命醫療를 하지 않으면 醫療費가 줄고 작은 葬禮式은 家計에 보탬이 되죠. 高齡者들이 寄附를 많이 하면 社會의 脆弱한 곳에 遺産이 돌아가니 도움이 되고요. 只今의 高齡者 世代는 韓半島에서 처음으로 오랜 貧困의 代물림에서 벗어나 自身이 땀흘려 모은 깨끗한 돈을 後代에 물려주는 世代라고 봐요.”1000만 老人 品格 지키고 社會的 浪費 葛藤 줄여야―좀더 具體的인 아이디어가 있을까요.“이제라도 關心을 가지고 이 問題를 다루기 위한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워보이는 게 低出産高齡化委員會인데, 低出産과 高齡化는 內容上 떼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人口를 늘릴 것이냐와 現在 存在하는 1000萬 老人을 어떻게 健康하고 責任있고 堂堂한 市民으로 살도록 도와줄 거냐는 次元이 다른 얘기죠. 法으로서는 一旦 ‘웰다잉基本法’이 通過되고 시스템은 低出産高齡社會委員會에서, 行政은 保健福祉部가 主務가 돼 좀더 統合的인 體系를 만들어야 합니다.”―취재를 하다보면 高齡者問題를 다루려는 努力들이 여기저기 있긴 한데 全體를 아우르는 머리 部分이 없고 斷片的인 對應만 있더군요.“법이 만들어진 것만 따로따로 이뤄지는 現實이죠. 一例로 葬禮文化를 改善한다며 保健福祉部가 만든 葬禮文化振興院도 있고 延命醫療決定法에 따라 만들어진 國家生命倫理委員會 안에 事前延命醫療 管理機關이 있어요. 두 機關은 類似한 일을 하지만 따로 놀아요. 葬禮에 對한 것, 延命醫療, 臟器寄贈, 遺言狀 쓰기, 後見制度 이런 것들을 統合的으로 하면 시너지도 생기고 浪費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다시 遺言狀으로 돌아와서, 언제 쓰는 걸 勸합니까.“정해진 때는 없지만 정년퇴직할 때 或은 65歲 法的인 高齡者가 됐을 때를 契機로 하는 건 어떨지요.”친척 親知들과 만나고 時間 餘裕도 갖는 名節이 다가온다. 暫時 몸과 마음의 짬을 내어 自身의 삶을 되돌아보고 나는 世上과 家族에게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遺言의 方式 5가지―‘遺言狀槪論’에서遺言은 法에 依한 方式으爐해야 效力을 갖는다. 우리 相續法에는 遺言의 方式으로 5가지를 定해놓았다.1) 自筆證書에 依한 遺言 : 遺言者가 그 全文과 年月日, 住所, 姓名을 自書하고 捺印해야 한다(작성이 쉽고 祕密維持에 容易하나 僞造나 紛失, 相續人들이 그 存在를 모르게 될 可能性이 있다)2) 錄音에 依한 遺言 : 遺言者가 遺言의 趣旨, 姓名과 年月日을 口述하고 證人이 遺言의 正確함과 自身의 姓名을 口述해야 한다(필기가 어려울 境遇 適合. 僞 變造 憂慮)3) 公正證書에 依한 遺言遺言者가 證人 2名이 參與한 公證人의 面前에서 遺言의 趣旨를 말하고 公證人이 이를 筆記朗讀하여 遺言者와 證人이 그 正確함을 承認한 뒤 各自 署名 또는 記名捺印(가장 安全하고 正確하지만 費用이 든다. 1億 원에 15萬 원 程度)4) 祕密證書에 依한 遺言遺言者가 筆者의 姓名을 적은 證書를 嚴封捺印하고 이를 2名 以上의 證人에게 提出해 自身의 遺言書임을 表示한 뒤 그 封書 表面에 提出年月日을 記載하고 遺言者와 證人이 各自 署名 또는 記名捺印. 表面에 記載된 날로부터 5日 內에 公證人 또는 法院書記에게 提出해 封印 確定日子人을 받는다(절차 複雜하고 遺言의 存在가 露出된다)5) 口授證書에 依한 遺言疾病 其他 急迫한 事由로 인해 위 4가지 方式을 따를 수 없을 境遇 遺言者가 2名 以上 證人 中 1名에게 遺言 趣旨를 口述하고 이를 들은 自家 筆記朗讀하여 遺言者의 證人이 그 正確함을 承認한 뒤 各自 署名 또는 記名捺印, 7日內 檢認申請(實效性 많지 않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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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門턱에서 돌아온 그…‘카르페 디엠’, 只今을 잡아라[서영아의 100歲 카페]

    4日 麻浦平生學習館 1層에 자리한 市民 展示館 麻浦갤러리. 올해 七旬을 맞은 이승룡 氏와 初等學校 6學年에 올라가는 外孫女 김리원(12)孃의 새봄맞이 祖孫(祖孫) 展示會 ‘幸福을 그리다’의 現場이다.할아버지는 平素 그려온 民畫 10餘 點을, 김리원 量은 아크릴畫, 色鉛筆畫 等 10餘 點을 내걸었다. 展示會場에는 主人公들 外에도 李 氏의 夫人과 큰딸 작은 딸에 동생들까지, 出勤한 사람 빼고 온 家族이 모였다.“양념으로 할머니의 그림 한 點과 孫子 犁鶘(3)가 그린 ‘아기상어’도 걸었어요. 말 그대로 이 집안 祖孫 全員이 出動한 展示會죠. 하하.”(이승룡)손녀딸이 6學年에 올라간다거나 3살 孫子가 그린 落書인지 抽象畫인지 모를 그림. 刻薄해진 우리 社會와는 距離가 있어 보이는 작고 小小한 意味들이 이곳에서는 世上 그 무엇보다 값지고 所重하다. 이제 俗稱 ‘7學年’이 됐다는 이승룡 氏는 이런 작은 것에 熱과 誠을 바치며 幸福해한다. 事實 이런 작은 意味들이 쌓이고 모여서 歷史가 되고 世界史가 되는 것 아닌가.한때 잘 나갔지만그는 30年間 廣告會社 LG애드에서 일하다 2009年 55歲로 退職했다. 2010年부터 모下(慕何) 이헌조 前 LG電子 會長(1932~2015)李 私財 80億 원을 出演해 만든 財團 ‘實施學士’의 常任理事 및 事務局長을 맡아 13年間 일하다가 지난해 봄 여기서도 退職했다. 30年間 廣告會社 물을 먹었다고 하지만 정작 廣告 만드는 일에 關與한 것은 中盤期 3年 程度. 나머지는 戰略과 組織管理 專門家로 일했다. 2003年 病魔로 쓰러졌을 때 職銜은 經營戰略本部長 常務였다. “入社 4年 車에 企劃管理課長, 8年 車에 部長이 됐습니다. 11年 차였던 1990年 會社는 企劃管理室이라는 組織을 새로 만들고 當時 없던 ‘室長’이라는 職責을 주더군요. 밑에 3個 팀이 있었어요.” 1990年代는 LG애드의 賣出이 해마다 1000億 원 單位로 늘어나던 時節이었다.3개월 時限附 宣告2003年 轉換點이 찾아왔다. 배가 아파 洞네病院부터 찾았던 것이 瞬息間에 有名 綜合病院에서 應急手術을 받는 事態가 됐다. 그런데 醫師가 手術을 抛棄하고 患部를 다시 닫아버렸다.종양 近處를 動脈과 靜脈이 지나가고 炎症까지 있어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夫人은 “3個月 內에 萬若의 事態가 일어날 수 있으니 對備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49歲. 治療法을 묻는 李 氏에게 當時 擔當 醫師는 唯一한 可能性으로 ‘글리벡’ 服用을 말했다. 글리벡은 當時 白血病 治療劑로 나온 新藥이었다. 李 氏가 “그럼 글리벡이 나오기 前에는 어떻게 治療했느냐”고 물으니 그 醫師는 “方法이 없었다”고 했다.절망에 빠져 病院에 누워있는 그에게 當時 LG電子 顧問이었던 이헌조 會長이 電話를 해왔다. “우리 會社 社長과 暮夏 會長이 어느 結婚式場에서 만났는데 會長님이 제 消息을 듣고 電話를 주신 거죠. 偶然인 듯싶지만 전 이런 건 宿命이라고 믿어요. 會長님은 本人이 癌 手術을 받은 日本의 醫療陣을 紹介해줬습니다.”일본으로 건너간 李 氏 夫婦는 이 會長의 主治醫와 그 弟子 2名에게 다시 診斷을 받았고 그中 40代였던 野스노 博士가 “確率은 半半이지만 열어봐야 안다”며 手術하겠다고 나섰다. 多幸히 再手術은 成功했다. 그 뒤 國內 綜合病院에서 20年 가까이 追跡觀察을 해왔는데 지난달 ‘더 以上 오지 않아도 된다’는 判定이 떨어졌다.다행인 일은 또 있었다. 日本에서 두 달間 入院해 있다가 歸國한 그에게 會社는 ‘一線에서 일하기 어려울 테니 常勤監査職을 맡아달라’고 提案했다. 當時 會社는 多國籍 廣告그룹 WPP에 賣却된 狀態였는데, 辭職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모하 이헌조 前 會長과의 人戀慕하 이헌조 前 會長은 그가 1979年 LG애드의 前身인 희성産業(LG애드는 1984年 희성産業에서 獨立했다)에 入社했을 때 社長이었다. 2010年 그 모下會長이 LG애드를 退職한 李 氏에게 連絡해왔다.“재단을 設立하려는데 設立과 運營을 좀 맡아서 해다오. 處遇를 아주 잘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때까지 길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모하 會長은 韓國의 思想的 뿌리를 實學에서 찾는 實施學士를 財團으로 設立해 私財를 投與할 생각이었다. “그날 밤 會長님께 이메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째 제가 能力은 안 되지만 會長님 뜻을 받들어 誠心껏 熱心히 하겠다. 둘째 或是라도 저를 불러주는 더 좋은 處遇의 자리가 나오면 그때는 놓아주십사. 셋째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時間에 얽매이지 않고 自由人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會長님 答은 ‘100% 受容한다’는 것이었죠.”이 氏가 財團에서 일한 지 2年 程度 된 무렵, 地方 어느 上場會社의 監査 자리를 제안받고 苦悶 끝에 許諾을 求하자 暮夏 會長은 ‘사람이 돈만 갖고 사나?’라고 물었다. 財團에서의 人生이 決코 허술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사람에게는 名分과 矜持가 돈보다 더 重要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거죠. 제 生命을 살려주신 분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財團에 남았습니다.” 그는 木工에도 재미를 붙였다. 作品을 만들며 關聯된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連載한 것이 10年間 180點쯤 쌓이자 冊 ‘이야기가 있는 木工(2020)’으로 묶어냈다. 記錄과 保存에 마음을 담아그는 記錄과 保存에 熱心이다. 이렇게 만든 레거시를 適切한 임자에게 依託해 더 큰 쓰임새를 期待한다.2015년 先親 이효석 氏(1929~2000)가 남긴 文件과 勳章, 證明書, 記錄物 等 148點을 大韓民國歷史博物館에 孫女 吏員 量 이름으로 寄贈했다. 先親은 獨逸駐在 大使館 首席勞務館, 靑瓦臺 司正祕書官을 歷任했다. 寄贈에 앞서 自身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人生 記錄’ 一部를 公開했는데 反應이 뜨거웠다고. 資料 中에는 꼼꼼하게 整理된 1950年代 結婚祝儀錄, 1970年代 葬禮賻儀錄 等도 있어 當代 民俗史 硏究에 도움이 될 것이란 評價를 받았다.“기록을 保存하는 건 집안 來歷인 것 같아요. 집 안에 있던 古典 冊이나 옛날 文書 같은 것은 安東의 國學振興院에 孫女딸 이름으로 寄贈했습니다. 제가 會社生活 30年 동안 받은 給與 명세표, 名銜 40餘 張, 辭令狀 等은 LG그룹 歷史觀에 寄贈했어요.” 성균관대 新聞放送學科 學生 時節 일어난 東亞日報 白紙廣告事態도 그에겐 記錄과 保存의 對象이었다. 當時 3個月間의 白紙廣告를 모두 모아 製本해서 所藏하고 있었다.“신문 放送學徒로서 이런 歷史的인 記錄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製本한 걸 移徙 다니면서도 늘 寢臺 밑에 保管하곤 했어요. 2000年 當時 동아일보가 新聞博物館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寄贈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그게 保管된 게 大韓民國에 3質인가 밖에 없었대요.”―일부 寄贈을 孫女 이름으로 하신 理由가 있을까요.“어차피 吏員이도 後孫이니까 나름 意味 있는 일이잖아요. 當時에는 孫女밖에 없었고요.” 큰딸이 낳은 리원이 12살, 둘째 딸이 낳은 孫子 犁鶘는 이제 3살이 됐다.시니어들의 가슴 속 앙금60代 以上쯤 된 분들을 만나보면 뭔가 하나씩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 같은 게 있다. 그의 境遇는 13年間 일해온 實施學士가 그랬다. 當初 韓國 實學 硏究의 泰斗라 불리는 成均館大 이우성 敎授가 만든 工夫 모임에 이헌조 前 會長이 80億 원을 出演해 財團으로 만들었다. 李 氏는 2010年부터 事務局長으로 일했다. 2015年 李 會長 死後에는 그 理事職을 이어받아 常任理事를 겸했다. 그런데 2020年 11月 새 理事長이 난데없이 ‘事務局長 停年을 60歲로 하자’는 規定을 理事會에서 通過시켰다. 當時 이승룡 事務局長은 66歲. “나가라, 못 나간다” 싸움이 벌어졌고 結局 지난해 3月 退職했다. 現在 8名의 財團理事陣 가운데 過半을 特定 人脈이 掌握하고 있다고 한다. 暮夏 會長이 世上을 떠나며 財團에 남겼던 代理人이 他人들에 依해 쫓겨난 셈. “다른 未練보다 暮夏 會長의 遺志를 받들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무척이나 괴롭습니다.”“할아버지, 只今 遺言하는 거예요?”―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글쎄요. 너무 많아서. 우리보다 좋은 環境에서 꿈을 맘껏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뭐 特別히 工夫를 잘하거나 좋은 大學에 가거나 그런 거 말고요.”특별히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子孫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할아버지가 持續的으로 冊을 만드는 것을 본 當時 3學年 吏員 羊이 ‘나도 冊 한 卷 내고 싶다’고 하자 이 氏가 돕겠다고 나섰다. 리遠邇가 48名의 神의 모습을 그리고 이 氏가 各 神에 얽힌 이야기를 써넣은 ‘리遠邇의 그리스 로마 神話’가 2021年 誕生했다.“그때는 무척 기뻤는데 只今 와서 보니까 그림들이 너무 어릴 때 그린 거라서 좀 異常해요. 若干 제 黑歷史가 된 것 같아요.^^”(김리원)이런 逸話도 있다. 어느 날 初等學校 2學年이던 리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할아버지 只今 遺言하는 거예요?”이 氏가 家族 모임에서 自身의 집을 後날 어떻게 活用할지 딸들에게 當付하던 中이었다.“그래. 遺言 맞아. 언젠가 할아버지가 없어도 엄마랑 姨母랑 이 집을 잘 活用해서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 마음을 말하는 거야라고 말해줬지요.”책, 世上에 쓰레기를 더하지 않기이 氏는 2001年 先親의 1週期를 맞아 追慕文集을 엮은 것을 始作으로 15卷의 冊을 펴냈다. 二重 6卷은 非賣品이고 나머지는 POD(Publish On Demand) 方式으로 刊行했다. 本人이 컴퓨터를 利用해 글을 쓰고 그림을 넣어 PDF파일로 出版社 홈페이지에 登錄하면 出版社 側이 顧客의 注文을 받아 出版해주는 서비스다.“자꾸 冊을 내는 行爲가 第게야 意味가 있겠지만 世上에는 別로 貢獻하는 바도 없고 浪費일 수 있어요. 그래도 別 負擔이 없는 건 注文만큼만 冊을 製作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冊을 내지만 ‘公害는 되지 않는다’고 自慰하는 거죠.”POD방식은 作家 本人을 包含해 누구나 政街로 注文해야 하고 冊값의 20%가 作家에게 印稅로 돌아온다. 作家는 自己 冊을 80% 價格에 사는 셈이다.―많이 팔렸나요.“간혹 팔리기도 하는지 몇 달에 한 番씩 몇千 원 또는 2, 3萬 원 이렇게 印稅가 들어옵니다. 하하.”“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이제 말 그대로 年金生活者. 婦人과 합쳐 200萬 원 程度 된다. 實施學士 事務局長 할 때는 적지만 固定給與가 있었지만 지난해 3月 以後 받은 失業給與度 이달 끝난다.“저도 딸들도 일찍 結婚했어요. 夫婦 둘만 살면 되니까 큰 돈이 必要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데 크게 無理가 없습니다.”―이 年齡帶 大部分이 “생각보다 돈 쓸 일이 많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子息들이 집에 돌아와서 손 벌리기 始作하면 골치 아프다고요.“자식들이 사고 치면 問題지만 우린 그런 것 없으니까요. 저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목숨 건져 다시 온 뒤 제 人生觀이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가 됐어요. 집사람도 크게 奢侈하지 않고 名品 가방 이런 거에 關心도 없어요. 둘이 어디 旅行가고 맛있는 것 먹고, 아무튼 只今 現在를 재밌게 잘 사는 게 目標예요.”옆에서 夫人이 “本來 名品을 싫어했던 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좋은 物件 같은 건 男便이 죽다가 살아 돌아오니 아무 意味 없어지더라구요. 그저 조금이라도 이 時間들이 이어져 주길 바랄 뿐입니다.”(부인 박양화 氏)“李 나이가 되면 世上에 고맙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저는 因緣, 宿命 같은 걸 믿는 사람입니다. 暮夏 會長 德分에 다시 살아 돌아온 것, 좋은 사람들과의 因緣도 모두 宿命이 아닐까. 죽고사는 것도 本人의 宿命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는 歲月이 익어갈수록 잘 늙어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야지요.” 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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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過去 내려놓고 一身우일신”… “老年, 배우고 일해야 몸도 마음도 健康”[서영아의 100歲 카페]

    100歲 카페는 2021年 1月 인터넷版으로 始作해 隔週 土曜版 新聞과 日曜日 인터넷版으로 讀者들과 만나왔다. 低出産이 深刻한 가운데 高齡者가 急增하는 ‘定해진 未來’ 앞에서 國家와 社會, 個人의 準備는 未洽해보였다. 豐饒로운 100歲 人生을 위해 必要한 것으로 △돈 △健康 △幸福의 3가지를 꼽고 젊어서부터 미리미리 準備하자는 메시지를 傳達하고자 했다.연재 滿 3年이 돼 가는 只今도 이 趣旨는 變함이 없다. 올해에는 特히 인터뷰 性格의 ‘이런 人生2幕’을 많이 썼다. 한바탕 現役時節을 거친 시니어들의 다양한 2幕을 통해 讀者들도 아이디어를 얻고 힘을 內侍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저물어가는 한해, 100歲 카페를 빛낸 主人公들을 돌아본다.“노년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健康”外國語高 校長 退職 後 個人택시 運轉士로 일하는 정정호 氏(67)를 紹介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은 ‘年金 받는 분이 굳이 돈을 번다’는 否定的 反應이었다. 鄭 氏도 같은 理由로 한 次例 만남을 辭讓했다가 한 달 뒤에야 인터뷰에 應했다. 技士에 달린 댓글들은 豫想대로였다. 여기 더해 生計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다른 택시 運轉士들이 느낄 違和感을 憂慮하거나 老年 運轉의 危險性을 指摘하는 內容들이 많았다. 정작 本人은 “充分히 豫想했고 나 自身이 떳떳하니 全혀 問題없다”며 淡淡했다. 말 그대로 남의 눈보다 내 마음가짐이 重要하다는 姿勢다.신문기사가 나간 土曜日부터 그의 携帶電話는 불이 났다고 한다. 仁川의 敎員 커뮤니티부터 學生들, 學父母들까지, 甚至於 어릴 적 故鄕 鐵原時까지 들썩였다고 한다. 그를 통해 ‘過去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實感할 수 있었다. 分明 그의 블로그에는 敎師로서의 正體性이 거의 없었는데, 技士에 使用할 옛날 寫眞들을 찾아 보여주는 場面에서 억눌러왔던 追憶과 그리움이 생생히 傳達돼왔다. 그의 記事에 뜨겁게 反應하는 분들도 오랜 敎職生活에서 맺어진 因緣들이 많았다.정 氏는 敎育者답게 記者에게도 많은 激勵를 傳해줬다. 인터넷版 記事가 나간 日曜日 閑散하던 그의 블로그에 하루 訪問者가 2000名이 넘었다며 寫眞을 찍어 보내주고 自身에게 몰려오는 周邊 反應과 激勵들을 共有해줘 記事 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소박하고 하찮은 일이라도 좋다100세 카페에는 老年에 새로운 일거리에 푹 빠져 있는 분이 적잖게 登場했다. 大槪 現役 時節보다 素朴한 일거리다.3년째 江原 春川에서 田園生活을 하는 박의서 前 안양대 敎授(72)는 地域의 텃勢를 살짝살짝 느끼면서도 時 所屬 文化觀光解說師 일에 熱心이다. 月 100萬 원 안짝으로 버는 程度지만 이 일이 없었다면 삶의 質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解說을 더 잘하기 위해 工夫를 繼續하고 個人的으로 冊을 쓸 準備도 하고 있다.은행 任員으로 退職한 뒤에도 開放形 公職에서 일하던 박삼령 氏(76)는 65歲에 癌이 發病한 以後 삶을 百八十도 바꿔 山林治癒指導士가 됐다. 競爭이 熾烈해져 일할 機會가 줄고 있지만 하루 일을 얻기 위해 自費를 들여 地方에 踏査를 다닐 程度로 眞心이다.10년 以上 父母님 看病을 하다가 아예 直接 療養院을 設立한 임수경 氏(62)는 本來 情報技術(IT) 專門家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年 門을 연 療養院은 이제 軌道에 올라 設立 過程에서 진 莫大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게 됐다. 父母님 便安하게 모실 수 있어 한시름 덜었고 高齡者의 隊列로 접어든 本人과 家族, 親舊들을 위한 ‘갈 곳’을 장만했다는 點에서 洽足해한다. 그는 “父母님 世代는 우리가 負擔하지만 우리 世代는 子女에게 기댈 수 없다”며 ‘現打’를 안겨주기도 했다. 退職이라는 ‘現實’, 미리 準備해야퇴직은 잘 準備하고 맞이하는 境遇와 그렇지 않은 境遇 以後 삶에 天壤之差가 난다.정년퇴직을 向해 緻密하게 準備한 케이스로는 流通業體 部長級으로 停年退職한 다음 날 知識産業센터 管理所長으로 새出發한 최경묵 氏(62)가 있다. 前 職場에서는 萬年 次長(退職 前 마지막 1年間만 部長이었다)으로 30年 가까이 일하며 資格證을 땄고 그것을 活用해 在職 中에도 經歷을 쌓았다. 會社 立場에서는 그가 建物 安全管理者를 겸해주니 한 사람分 雇傭을 줄일 수 있었다. 그의 境遇 職場에서 서러움을 겪었던지라 더 일찌감치 自身의 앞날을 걱정하고 準備할 수 있었다.반대로 適當히 따뜻하게 지낸 사람일수록 비바람 치는 曠野에 던져졌을 때 衝擊이 크다.신세계그룹에서 任員을 지냈지만 4年 前 滿 50歲에 退職해야 했던 정경아 全 常務(54)는 그 衝擊을 삭여 冊을 두 卷이나 썼다. 退職 2年 만인 2021年 낸 첫 冊 ‘독한 언니의 職場生活白書’에서 그는 退職은 내色 않고 職場生活만을 다뤘는데, 그가 받은 衝擊을 逆說的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退職 4年 車가 된 올해에야 自身의 退職을 正面으로 마주한 두 番째 冊 ‘어느 大企業 任員의 退職日記’를 내놓았다. 그는 요즘 동아일보에 칼럼을 連載하는 한便 유튜브와 講演 等을 통해 새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統計廳에 따르면 韓國人의 주된 職場에서의 非自發的 退職年齡은 平均 49.5歲. 어찌보면 정년퇴직할 수 있다는 것 自體가 福받은 케이스다. 두 사람 사이 어디쯤에 該當하는 職場人이라면 會社를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準備가 必要하다는 點을 새겨둬야 할 듯하다.힘의 源泉은 家族 시니어들에게도 家族은 힘의 源泉이 된다.초등학교 中退 學歷을 克服하고 60歲부터 慶南 巨濟의 韓醫院에서 看護助務士로 일하는 이숙희 氏(64)에게 100歲 카페 인터뷰는 世上에 自身을 커밍아웃하는 일이었다. 記事가 나간 뒤 모두의 理解와 認定을 받게 돼 餘恨이 없다며 기뻐했다. 11月 KBS 라디오放送에 出演하기 위해 夫君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늘 아내를 믿고 支援해주는 男便, 엄마에게 自信感을 심어주고 方向을 正確하게 짚어주는 딸까지, 家族은 이숙희 氏를 支撐해주는 든든한 ‘빽’이다.경기 平澤에서 理髮所를 運營하는 조동근 氏(63)도 먹고사는 問題에 쫓겨 中學校 中退로 끝날 뻔했던 境遇다. 新婚 初期 中學校와 高校 檢定試驗에 合格하고 방송통신대에 入學했지만 20代 夫人에게 닥친 病魔에 다시 한番 危機가 몰려왔다. 記事에서 빼먹은 에피소드 하나. 夫人이 非長巖으로 癌病棟에 長期入院했던 當時, 病院 側은 病勢를 체크하기 위해 患者의 피를 엄청나게 뽑아가곤 했다. 患者食만으로는 回復이 어려울 것을 걱정한 그는 病棟 階段站에서 携帶用 가스버너로 보양食을 만들어 아내에게 먹였다. 病院 側에서 制止하자 “난 저 사람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며 抵抗해 警察署에 끌려가기도 했다. 2, 3日 뒤 그가 다시 料理를 始作하자 病院 側도 모른 척해버렸다고. 1980年대니까 可能했던 얘기지만 그는 이런 執念으로 家庭과 婦人을 지켜냈다.30여 年 間 어머니의 看病을 위해 애썼던 在美作家 김석휘(74) 氏는 記事를 읽은 周邊사람 德에 美國 移民 初期 同苦同樂했다가 40年間 連絡이 杜絶됐던 親舊와 連結될 수 있었다. 다만 親舊분이 알코올과 心臟疾患 탓에 認知 障礙가 相當히 進行돼 疏通은 어려웠다고. 그는 “나이들면서 後悔되고 마음 아픈 記憶들만 늘어난다”고 吐露했다.공부하는 老年이 아름답다이순국 前 신호그룹 會長(81)은 出版社에서 新刊 ‘다시 始作하는 人生授業’을 보내온 것이 契機가 돼 인터뷰를 請했다. 한때는 財界序列 25位를 넘볼 程度로 事業을 키웠지만 外換危機로 모든 것을 잃은 뒤 68歲부터 健康을 扶餘잡기 爲한 努力을 始作했다. 自身의 몸을 實驗對象으로 삼아 身體 改造를 斷行하고 74歲에 體育學 碩士, 76歲에 體育學 博士, 81歲에는 醫學博士(豫防醫學) 學位를 받으며 “뭔가를 始作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證明해보였다. 新刊에서 그는 홀로 죽음을 向해 櫓를 저어가는 한 人間의 모습을 表紙에 그려놓고 있다. 只今도 每日 2時間씩 筋力運動을 하는 理由는 ‘自身의 人生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라고 한다.13년 째 방송통신대 學生 身分을 이어가는 김광성 氏(71)도 뒤늦게 알게 된 工夫의 재미를 놓지 못하는 境遇. 7年 前 再就業해 서울市內 鑑定評價法人의 常任顧問, 그 子會社인 不動産仲介法人의 代表를 맡아 現役 生活을 한다. “방송大에서 젊은이들과 만나며 感覺을 維持했기에 就業도 可能했다”며 學校에 공을 돌리는 그는, “이 나이에 工夫는 知識이 아닌 智慧를 얻는 過程”이라고 말한다.대구의 環境美化員 정연홍 할머니(71)는 장난처럼 ‘冊을 쓰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지난해 11月 첫 冊 ‘나의 監査는 늙지 않아’를 내면서 꿈을 이뤘다. 갑자기 듣게 된 ‘作家’ 呼稱이 쑥스럽지만 幸福하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해 熱心히 冊을 읽고 重要한 대목을 베껴 써보기도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쓰고 있다.이웃과 함께, 同世代와 함께정영록 前 서울大 敎授(65)는 8月 末 學校를 停年退職했다. 5年 前부터 全南 求禮로 居處를 옮기고 뜻 맞는 사람들과 歸村타운을 만든다는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旣成世代의 歸村으로 脂肪消滅을 막고 質 높은 老後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3月에 인터뷰 記事가 나간 뒤 政府나 地自體, 個人들의 連絡이 많았다. 政府에서 主管하는 地域活力타운 選定 審査에도 參與했는데, 이곳저곳 候補地를 돌면서 ‘쓴소리’를 쏟아냈다고 한다.올 初 100歲 카페를 裝飾한 金宗壎(50) ‘우리洞네좋은사람들’ 代表는 올해도 서울 江南區에서 ‘우리 洞네와 함께 나이들基’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地域 어르신들의 住宅에 落傷을 防止하기 위한 設備를 마련해주는 일에서부터 ‘살던 곳에서 나이들基(aging in place)’가 可能한 地域社會 만들기를 摸索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活動을 持續可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18日 共有오피스에 冊床 한個 놓고 작은 社會的企業 ‘쉘位파트너스’를 出帆시켰다.지난해 末 100歲 카페에서 隱退者들이 ‘갈 곳’에 對해 ‘公共에서 施設을 提供하고 民間이 運營主體가 되는 方式‘을 提案했던 백만기 慰禮人生學校 校長은 11月 ‘京畿人生캠퍼스’가 열린다는 消息을 傳해왔다. 當時 記事를 본 京畿道에서 그를 찾아갔고 京畿道廳 舊廳舍에 場所를 만들고 運營을 그에게 委任하기로 했다는 것. 그로서는 盆唐, 慰禮에 이은 세 番째 人生學校다. 現在 25個 示範講座가 運營中인데, 京畿道는 앞으로 31個 市郡에 人生學校를 普及할 豫定이라고 한다. 白 氏의 平生 目標인 ‘全國에 人生學校 100個 만들기’가 現實感을 갖기 始作했다.‘느리게 나이들基’ 硏究하는 젊은 醫師지난해 4月 여러次例 取材했던 정희원(39) 서울峨山病院 老年內科 敎授. 처음 만난 날 記者가 “當身은 반드시 스타가 될 것”이라고 自信있게 豫言한 人物이다. 젊지만 該博했고 流暢한데 謙遜하고 問題意識도 좋았다. “아하하..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요, 冊이나 좀 팔렸으면 좋겠어요”라고 答하던 그의 表情이 개구장이 같았다. 豫言은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뒤로 冊을 2卷 더 냈고 新聞에 定期칼럼을 쓰는가하면 各種 講演에 불려다니고 TV나 유튜브에도 자주 얼굴을 내민다. 趣味인 호른을 熱心히 練習해 ‘동아音樂콩쿠르에 出戰할 거’라 했는데 지난해 正말 ‘出戰했고, 떨어졌다’는 消息을 傳해왔다. 올해 두番째 新刊인 ‘느리게 나이드는 習慣(한빛라이프)’을 最近 보내왔다. 댓글에서 읽히는 ‘살기 힘들다’는 아우聲記者는 100歲 카페 技士에 달리는 댓글들을 熱心히 읽는 便이다. 우리 時代 시니어의 肖像이 그려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좋은 기운도 얻을 수 있어서다.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熱心히 사는 老年을 紹介하면 種種 ‘이제 됐으니 그만 쉬며 人生을 즐기시라’는 助言이 달리는데, 이는 他人에 對한 理解가 不足한 탓이라고 본다. 30, 40臺가 보람을 얻고 活力을 느끼고 싶다면 70, 80代 어르신도 보람과 活力이 必要하다.타인의 努力이나 幸福을 認定하고 싶지 않은 心理가 읽히거나 過度한 被害意識이 傳해져오기도하는데, 그만큼 ‘내 삶이 힘들다’는 마음의 表現으로 보였다. 特히 安定的으로 年金을 받는 職種에 對한 疾視가 甚한데, 아직 不實한 韓國의 年金制度 탓도 있어 보인다. 國民年金이 導入된 1988年 以來 꾸준히 年金을 納付해온 世代가 本格的으로 受給者가 된다면 맞벌이라면 3~400萬이 넘는 家庭도 드물지 않게 된다. 反面 低出産으로 인한 生産人口 減少로 年金의 未來를 憂慮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실제로 老後를 살아본 분들의 共通된 證言은 나이가 들수록 生活費는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 이때는 生計問題보다 남는 時間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 보람과 意味를 찾을 것인가가 더욱 重要해질 수 있다.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런 人生 2幕’에 登場하는 분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장 많은 境遇는 이메일을 通한 自薦他薦이다. 出版社에서 100歲카페에 어울릴 것같은 神竿을 보내주기도 한다(내돈내산인 境遇가 더 많다). 재미있는 것은 한 記事가 나가면 類似한 분들의 紹介가 몰려온다는 點. 예컨대 前職 敎師가 主人公으로 나가면 敎職에서 隱退하신 분들의 메일이 갑자기 많아지고, 隱退 後 電源살이하는 분 얘기가 나가면 全員에 定着한 분들이 全國에서 連絡해오는 式이다. 이런 境遇 아무래도 비슷한 事例를 連달아 다루기 어렵다보니 뒤로 돌려지게 된다. 이 밖에도 言及하지 못한 더 많은 분들을 人生2幕이라는 主題로 만났다. 이들은 老年에도 社會와 사람, 世上과의 疏通은 重要하다고 입 모아 말한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熱心히 찾아 紹介하고자 한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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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받으며 世上 구경, 얼마나 좋아요”… 택시 運轉하는 前職 校長先生님[서영아의 100歲 카페]

    “先生님, 安全하고 便安하게 모시겠습니다!”깔끔한 洋服 正裝에 나비넥타이, 왼쪽 가슴에는 名札을 단 中年 技士님이 微笑와 함께 이런 멘트를 날린다. 이 택시를 타면 5살 꼬마도 ‘先生님’李 된다. ‘제임스네네(JamesYes!Yes!) 택시’. 1956年生 정정호 氏가 仁川에서 몰고 다니는 個人택시의 愛稱이다. 2018年까지 그는 仁川에서 工夫 잘하기로 소문난 彌鄒忽外國語高等學校 校長 先生님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中卒 學歷으로 영등포의 한 工場에서 일하는 배고픈 少年이었고, 이 少年은 27歲에 7살 아래 막냇同生과 함께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師範大에 進學해 英語 敎師가 됐다.그는 100歲 카페 愛讀者다. 記事에 自身의 體驗을 例로 들며 ‘退職 後에도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健康하다’는 댓글을 誠心껏 달아주곤 했다. 記者는 그 댓글에 들어 있는 나비넥타이, 仁川, 個人택시 等을 端緖로 無作爲 檢索을 통해 그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30日 그를 만나러 仁川 南東區의 한 카페로 갔다.학생들과 親舊처럼 지낸 校長 先生님정정호 氏와 仁川과의 因緣은 1987年 31歲에 大學을 卒業하고 제물포고등학교로 發令받으면서 始作됐다. 以後 仁川에서 31年間 敎職에 머물며 英語 敎師, 奬學士, 校監, 校長을 거쳤다. 停年退職 直前 3年 半 동안 校長으로 奉職한 彌鄒忽외고는 2010年 仁川 唯一의 公立 外國語高로 開校했다. 當時 그가 仁川市敎育廳에서 奬學士로 일하며 設立을 이끌었고 2015年 2代 校長으로 就任했다.교장 時節 그는 全校生 587名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매일 校長室에서 寫眞妾 들고 애들 이름 외우곤 했지요. 왜 그랬냐고요? 제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學生들에게 절 부를 때는 ‘校長先生님’이라 하지 말고 ‘제임스’라고 부르라고 했지요.”재미있는 것은 校長이 學生들과 똑같은 校服을 입고 다녔다는 點. 그가 보여주는 옛날 寫眞을 보니 意外로 잘 어울렸다. “學生들이 무척 좋아했죠. 親舊같이 지냈거든요. 正말 재미있었어요.”택시 運轉을 始作한 얼마 뒤 쓴 그의 블로그에는 ‘松島에서 택시 內部를 消毒하고 있는데 뒤에서 “제임스, 멋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彌鄒忽 外高 卒業生 000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偶然히 만난 弟子가 親舊처럼 負擔 없이 큰 소리로 부를 수 있는 그런 校長이었다는 얘기다.―제임스라는 이름은?“영어교사 하면서 제가 지었어요.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아시죠? 그처럼 敎師도 萬能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미추홀외고 學生들은 언제부턴가 學校 앞에 있는 커다란 湖水를 ‘정정호’라 불렀다. 구글에서 學校 이름을 檢索하면 이 湖水에 對해 ‘正式 名稱은 해오름湖水지만 在學生들은 前任 校長의 姓銜을 따서 정정호라고 부른다’는 句節이 나온다(더 위키).本人은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2018年 8月 그의 退任일에 그의 意志와는 달리 點心時間에는 學生들이, 밤에는 學父母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줬다는 대목에서 그의 人氣度는 斟酌할 수 있다. 退任 뒤에는 仁川英語마을 院長으로 자리를 옮겨 2年間 일했다.10대 後半엔 少年工 生活, 4年 늦게 高等學校 入學敎師가 되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1·4後退 때 新義州에서 맨몸으로 越南한 鄭 氏의 아버지는 戰爭이 끝난 뒤 失鄕民들 사이에 ‘곧 統一이 된다’는 所聞이 돌자 急히 서울 生活을 整理해 北韓과 가까운 江原道 鐵圓으로 移住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統一은 오지 않았고 膝下에 1女 5男이 태어났다. 6男妹 中 長男이던 정정호 少年은 빤한 形便에 차마 高等學校에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年年生 동생과 함께 上京해 영등포의 한 工場에 就職했다. “저는 組立, 동생은 工作機械 선반을 했어요. 동생은 아직도 그 技術을 살려 일하고 있는데 다들 부러워하지요. 萬一 펜대를 잡고 있었다면 66歲인 只今 갈 데가 없겠죠. 그 1年 아래 동생도 亦是 工場에 들어갔고 只今도 일합니다. 大型 펌프의 權威者예요.”그는 3年 만에 工場일을 접고 高等學校에 進學했다. 同期들보다 4年 늦었는데 在學 中 軍服務를 한 탓에 卒業은 7年 늦어졌다.“고교 3學年 10月에 軍隊 들어가서 3年 뒤 7月에 除隊했어요. 저보다 7살 어린 막냇同生과 함께 卒業했지요. 같은 철원고를 다니다 보니 참 洞네 猖披했던 記憶이 있습니다.”얼마 되지 않는 少年工들의 月給이나마 家計에는 크게 도움이 됐다. 歸鄕을 抛棄하고 빚을 얻어 農事를 짓던 아버지는 아들들이 積金을 타면 그 돈을 가져가 빚을 갚았다.“그렇게 돈 번 德에 제가 高等學校에 간 거죠. 저는 家計에는 크게 도움을 못 줬습니다. 둘째 셋째 동생들이 繼續 일하면서 큰 寄與를 해줬지요.”두 동생은 그가 大學校에 들어가자 放送通信高에 支援해 卒業했다. 그 아래 동생들은 집안 살림이 나아진 德에 제때 高等學校에 갈 수 있었다. “正말 苦生들 많이 했지요. 꼰대 같은 얘기가 되지만 우리나라가 이렇게 發展한 데는 이런 世代들이 逆境에 맞서 뭔가를 이뤄낸 德도 크다고 봅니다.”퇴직한 해에 택시運轉資格症 取得 택시運轉 資格證은 敎職에서 退任한 2018年에 땄다. 2021年부터 個人택시免許 讓受要件이 大幅 緩和돼 쉽게 免許를 얻게 됐다.―교장 先生님은 社會的 體面을 重視할 자리인데, 어떻게 택시技士를 생각하셨나요.“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人乃天(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죠. 平素에도 ‘敎藏 옷을 벗으면 내가 校長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리자’고 다짐했었습니다. 退職 後에는 남에게 서비스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호텔 웨이터도 생각했어요. 當時 志願書까지 보냈지만 答이 안 왔죠. 只今 보면 잘 됐어요. 택시運轉이 더 自由롭고 좋아요.”―가족의 反應은 어땠나요.“집사람이 全的으로 贊成했어요. 自己도 免許證 있으면 택시 하고 싶대요.”택시 運轉을 準備하며 블로그度 始作했다. 블로그 첫 글이 2021年 2月 올린 ‘제임스 第4의 人生’이다. 그대로 옮기자면 ●第1의 人生 영등포 鐵工場 儒城工業 少年工 勞動者 ●第2의 人生 彌鄒忽 外高 校長을 마지막으로 한 敎職 ●第3의 人生 仁川英語마을 院長 ●第4의 人生 제임스네!네!택시 運轉士 이렇게 딱 4줄이 올라와 있다. ―本格的인 글은 그해 7月부터 作成하셨는데 손님들 얘기를 簡略하게 쓰셨더군요.“다니다 보니 特異한 粉을 많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건 記錄을 해야겠다, 人生 工夫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과거를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實踐하고 있었던 걸까. 2年 以上 記錄된 블로그에는 校長 時節 얘기는 거의 없었다. 直接 만나 인터뷰하며 옛날 寫眞들을 보여줄 때에야 그가 當時를 얼마나 아름다운 記憶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노년에 택시 運轉은 하늘이 주신 職業平素 시니어 個人택시 技士들의 일에 對한 滿足度가 매우 높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鄭 氏가 마침 ‘택시 技士 해서 좋은 點 10가지’를 블로그에 記錄해 놓았다. ● 1. 多樣한 분을 만날 수 있다 ● 2. 運轉대는 바로 내가 잡고 있다● 3. 自家用을 끌고 나가면 돈이 나가지만, 택시는 가지고 나가면 돈이 들어온다● 4. 癡呆 豫防에 最高다● 5. 삼식이를 면할 수 있다(집안의 平和)● 6. 맛집을 찾아 다니며 다양한 飮食을 즐길 수 있다● 7. 乘客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8. 勞動의 神聖함을 느끼게 해 준다● 9. 休日의 맛을 滿喫할 수 있다● 10. 삶의 時計는 멈추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보너스 : 亡할 일이 없다.―‘망할 걱정이 없다’는 말이 와닿습니다.“퇴직자가 創業하면 大部分 失敗한다던데, 個人택시는 나중에 讓渡하면 살 때와 거의 비슷한 價格을 받거든요. 月貰니 施設費, 職員 人件費도 必要 없죠. 亡할 수가 없어요.”10가지를 하나하나 說明하려면 限도 끝도 없을 터. 그는 ‘世上 구경을 하며 배울 수 있다’는 點을 가장 强調했다. “택시의 작은 窓을 통해 넓은 世上을 보는 거죠. 게다가 돈 받으면서 世上 구경 다니잖아요.”―100세 카페에 退職 後에도 熱心히 사는 분들의 얘기가 자주 나가는데, ‘뭘 굳이 그렇게 熱心히 일하려 하느냐’는 댓글들이 種種 달립니다. 겪어본 분들은 일이 없이 時間을 보내야 하는 그 當惑感을 많이 얘기하시던데…. “敎藏 모임 같은 곳에 가면 ‘그 나이 먹어서도 일하느냐’고 물어요. 저는 ‘水曜日 日曜日엔 쉰다’고 答하죠. 정주영 氏가 ‘임자 해봤어’라고 했다지만, 두려움은 바로 ‘해보지 않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前 結婚式場에서 만난 어느 名譽退職 敎師도 ‘어떻게 그걸 始作했느냐, 나는 발 들여놓기가 두렵다’고 하시더군요. 처음 하는 일들은 다 두렵죠. 하지만 그런 길을 가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 아닌가요.”그는 自身의 택시 이름에 들어간 ‘네!네!’의 뜻을 熱心히 說明했다. “顧客의 모든 것에 肯定한다는 뜻이에요. 택시가 a에서 b로의 物理的 移動만이 아니라 心理的 共感의 場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社會가 참 살기 힘들죠. 乘客이 무엇을 얘기하건 價値 判斷을 하지 말고 無條件 共感을 하자. 그래서 ‘네네’입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하든 ‘네 先生님 말씀이 맞습니다’며 肯定해드려요.”“택시운전은 靑年들의 羨望 職種은 아니죠” ―公務員 年金 받으면서 또 돈 버느냐는 叱咤도 나올 듯합니다. “제 境遇 月 賣出 200萬 원이 目標예요. 費用 除하면 100萬 원 남기는 程度죠. 아침 9時 半에 出勤해 5時間 半만 일하고 週 2日은 쉽니다. 제 동생도 딸도 ‘젊은이들 일자리 뺏지 말고 조금만 하라고’ 해요. 다만 우리 社會가 慇懃히 分業化되고 있는데 택시技士는 靑年들이 羨望하는 일자리는 아니에요. 高齡者들한테는 宏壯히 좋은 일자리지만요. 그러니 젊은이 일자리 빼앗는다는 말은 하기 어렵게 돼 있어요.” 實際로 個人택시業界는 高齡化됐고 法人택시는 技士 不足으로 稼動率이 떨어져 深刻한 問題가 되고 있다.―비슷한 履歷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고요.“2021년 讓受條件이 緩和되고 나서 仁川에서 校長 出身으로는 제가 1號예요. 그 뒤 校長先生님 두 분과 명예퇴직한 敎師 한 분이 택시를 始作했다고 들었습니다.”택시라는 窓을 통해 世上을 본다택시를 몰고 다니면 재미난 일들이 많다. 特히 그의 視線은 어려운 處地의 高齡者들에게 자주 向한다. 基本的인 問題意識은 便利함의 象徵인 택시 앱 탓에 老人들이 힘들어졌다는 것. “젊은이들은 집 앞에서 택시를 부르는데 老人들은 道路까지 나가 택시를 잡으려 애태우시죠. 그나마 빈 택시는 모두 ‘豫約’이 걸려 있고요. 전 그런 어르신이 보이면 콜을 끄고 유턴을 해서라도 앞에 세워 드립니다. 무척 좋아하시죠.”94세 할머니가 扇風機 파는 곳으로 가자고 해 商店에 내려드렸다가 結局 할머니 집 앞 거리에서 扇風機 組立까지 해드리고, 남동구청까지 가자며 택시를 탄 남루한 할아버지를 目的地에 내려드리며 택시費를 받는 代身 돌아갈 때도 택시로 가시라고 2萬 원을 쥐여 드린 얘기 等 運轉을 하지 않았다면 體驗하지 못했을 에피소드가 많다.물건 두고 내린 손님을 쫓아 追擊戰도 벌이고 손님들과의 對話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老父母님이 全 財産을 일찍 아들에게 주고 나서 오갈 데 없게 된 事緣을 들으며 “財産은 미리 주면 안 되는 거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直接 택시 呼出 앱을 使用하는 92歲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인터넷뱅킹度 한다는 그 할머니가 ‘조금만 배우면 이렇게 便利한데 親舊들이 그걸 못한다’라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며 ‘變化하는 世上, 主導는 못 할지라도 따라는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꽃 피듯 살아온 人生, 꽃 지듯 살다 간 人生…―택시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세요?“몇 살이라고 못 박기는 어렵지만 認知能力이나 運動感覺이 떨어졌다고 느껴지면 바로 그만둬야죠. 저는 젊고 깔끔하게 보이려고 눈썹 그리고 비비크림 바르고 染色도 하고 다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認知能力은 當然히 떨어집니다. 本人은 모르더라도 客觀的으로 認知能力이 떨어지면 그만둬야죠. 저만 타고 다니는 거라면 괜찮지만 所重한 生命이 타고 계신데….”―택시를 그만두신 다음은요?“집사람하고 언젠가는 ‘제임스네!네!카페’를 열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에 작은 心理 相談所도 두자고. 집사람이 心理相談士 資格證이 있거든요. 많은 시니어들이 속 얘기를 털어놓을 데가 없잖아요. 그런 자리를 좀 만들어보자. 오시는 분들에게 茶 待接하고 그분들의 人生사도 들어주고….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죠.” 30代 中後半에 들어선 두 子女가 婚姻한 지 몇 年 됐는데도 손주 消息이 없어 서운하지만, 그 期待또한 내려놓았다고. 그는 歌手 MC 스나이퍼의 ‘人生’이란 노래를 말했다.“중간에 女歌手가 피처링하는 臺詞가 나와요. ‘꽃피듯 살아온 人生/ 꽃 지듯 살다 간 人生/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人生/ 이젠 未練이 없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택시 하면서 車窓 밖에 보이는 人生들…. 熱心히 살아가는 모습들 많이 보잖아요. 저런 平凡한 사람들 德分에 우리나라가 잘 돌아가는구나. 나의 들어 몸 아프신 분들, 그건 또 저의 미래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工夫를 많이 합니다. 이게 택시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지요.”인천=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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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停年退職 10年次가 孤軍奮鬪 끝에 찾은 平生 일자리는…“내가 ‘正말로’ 즐길 수 있는 일”[서영아의 100歲 카페]

    近 10年 前인 2014年 4月, 김학서(67) 氏는 32年間 다니던 韓國貿易協會에서 停年退職했다. 萬 58歲. 한 달 程度는 참 좋았다. 소파에서 딩굴며 世上을 다 가진 듯 속이 便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좀이 쑤시면서 깨닫게 됐다. ‘退職 後에 뭐라도 배워 새롭게 일을 始作해야 하는구나….’‘OECD 保健統計(2023)’에 따르면 0歲 韓國人의 期待壽命은 83.6歲, 65歲가 된 사람의 期待壽命은 86.6歲에 이른다. 反面 法定 退職年齡은 60歲, 民間企業의 非自發的 退職年齡은 49.5歲로, 退職 後 20~30年이 宿題처럼 남게 된다. “平生 어느때보다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金 氏는 지난 10年間 어떤 過程을 거쳤을까. 13日 그가 運營하는 시니어 讀書모임에 가봤다.시니어들, ‘내 이야기’ 하면서 治癒되고 自尊感 높여서울 강동구에 자리한 서울市民大學 東南圈캠퍼스의 한 敎室. 시니어 男女 10名이 둥근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冊 質問紙로 討論하는 讀書모임. 自身들은 ‘수다떨기 人生學校’라고도 부른다.수다의 話頭는 김학서 氏가 新作 隨筆集에서 뽑아온 9가지 質問. 예컨대 △싫은 사람 △밥벌이 △田園生活 △멍 때리기 △새로움과 마주할 勇氣 等이 이 날의 質問, 卽 話頭다. 質問別로 參加者들은 돌아가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話頭가 多樣하다보니 平素에 생각지도 않았던 記憶이나 經驗들이 마구 떠올라 自己도 모르게 얘기하는 境遇가 많다고.김 氏는 2年 前 偶然히 冊 質問紙 만드는 法을 배워 質問紙 讀書 모임 企劃價로 活動하고 있다. 여러 冊에서 拔萃한 文章과 함께 던지는 質問이 사람들이 自然스레 얘기를 꺼내는 마중물 役割을 한다.내 事緣이 所重하면 當身의 事緣도 所重하다“퇴직 後 同病相憐의 시니어를 많이 만나면서 알게됐습니다. 그들 大部分이 누군가에게 自己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럴 機會가 別로 없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自己 敍事를 이야기하며 그 自體로 慰勞받고 治癒된다는 것을요. 나이 든 世代는 하소연할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 自體로 마음 治療가 되는 것같아요.”구성원은 글쓰기나 讀書에 關心이 많은 시니어들. 現在는 55歲부터 78歲까지 있다. 自身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뭔가 후련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을 體驗해본 사람들이다. 한 멤버는“10년 間 혼자 지내던 生活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는 過程 自體가 勇氣가 必要했다”면서 “이제는 每週 이 時間을 기다리게 됐다”고 말한다. 構成員은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政策이라 조금씩 들고 나며 8~10名 規模로 2年 가까이 維持하고 있다. ―혼자서만 길게 얘기한다던가, 물 흐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요. “자연스럽게 필터링이 되더라구요. 討論 때는 2分以上 發言禁止, 다른 사람 얘기에 對한 論爭 禁止. 이런 原則이 있어요. 지나칠 境遇 制止를 하기도 하지요.”각자의 小小한 事緣은 自身에게는 所重하지만 他人에게는 關心을 끌기 어렵다. 그런 點에서 이 자리에서는 一種의 社會契約이 作動하는 느낌이었다. 他人의 얘기를 所重하게 들어주고 그것을 통해 自身의 얘기를 할 수 있는 勇氣를 얻는다. 退職後 5~6年은 經驗과 知識 살려 社會活動김학서 氏가 平生 몸담았던 貿易協會는 中小貿易業體의 輸出入業務를 도와주는 機關. 그는 中國室長, 상하이支部長 等을 歷任한 中國專門家다. 退職 後 優先은 履歷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 찾기에 積極的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創業컨설턴트 等 專門家 過程을 履修하기도 했다.이듬해부터 2年間 광운대에서 兼任敎授로 ‘中國 經濟’를 講義했다. 2016年부터는 韓國貿易協會 輸出專門委員으로 委囑돼 江原地域 中小企業의 輸出 活動을 도왔고, 中小벤처企業 振興公團, 對中蘇農漁業 協力財團, 서울市 創業포럼 等에서 諮問과 評價 業務에 參與했다.“퇴직 後 5年 程度는 各種 機關과 團體에서 올리는 募集公告에 積極的으로 申請했습니다. 現職에서 익힌 經驗과 知識, 노하우를 必要한 사람들에게 傳達한다는 使命感이 컸지요.”―여러 일을 兼職하면 輸入도 어느 程度 確保되나요?“턱도 없죠. 敎授는 한 科目 講師料가 全部이고 各種 委員의 境遇 한달에 한番 會議 參席하고 交通費 받는 程度입니다. 退職 後에 돈 생각하면 즐겁게 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人生을 즐긴다는 쪽으로 接近해야죠.”―경제적으로 支障은 없나요.“크게 問題 없어요. 平生 月給쟁이였으니 집 한 채에 國民年金, 個人年金 程度 있는데, 베이비붐 世代가 다 비슷할 거예요. 間或 뉴스에 나오는 老朽 夫婦 最低生活費(月 200~300萬원)程度면 無理없이 살 수 있다고 봐요.”100세 時代 無色한 시니어 일자리 事情그에 따르면 이런 公的 領域에서의 活動은 딱 65세까지다. 65歲가 넘으면 아무리 經驗이나 知識이 많아도 社會 活動을 中斷하라는 公式的인 壓力을 皮膚로 느낀다.“국제노동기구(ILO) 統計가 萬 64歲까지를 生産活動人口에 넣기 때문일까요. 大部分의 일에서 아예 志願資格이 없어지더군요. 100歲 時代가 無色하죠.”사실 60歲를 넘기면서 슬슬 社會에서 排除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距離나 슈퍼마켓에서 흔히 마주치는 同年輩들이 일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언젠가부터 會議가 있어 가보면 恒常 제가 最高齡者더군요. 외롭다는 생각을 넘어, 이걸 繼續 나와야 하는지 苦悶이 되더라구요.”―지자체 等에서 運營하는 ‘老人일자리’는 있을 텐데요.“명목은 ‘일자리’지만 月 30萬 원 짜리 돈 뿌리기예요. 그분들이 平生 쌓아온 經驗이나 知識과는 無關한, 福祉의 對象이 되는 거죠. 問題는 이걸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거예요.”그러고보니 그가 가리킨 壁에 붙어 있는 서울市民大學의 ‘中壯年 進路探索 워크샵’ 포스터는 募集對象을 ‘40~64歲 中壯年 누구나’로 限定하고 있었다. “65歲 以上은 모든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어요. ‘當身들이 알아서 하라’는 거겠죠. 結局 當事者들이 목소리를 높이던지 勢力化해서 輿論과 政治人들을 움직여야 고쳐질 겁니다. 전 그런 일을 始作하기엔 늦었지요.”동년배들의 同病相憐그래도 한 20~30年은 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 길을 찾자. 그가 찾은 일은 두가지. 첫째는 隨筆家 登壇이다.“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게 100歲 時代를 즐기는 길 中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文化센터에 登錄하고 熱心히 배워 지난해 1月 隨筆作家로 登壇했습니다. 習作으로 쓴 글을 모아 ‘삶의 溫度는 따뜻한가요’라는 隨筆集도 냈지요.”이에 앞서 2020年에 退職 後 6年間의 생각을 整理한 ‘끝이 아닌 새로운 始作(마이북하우스)’을, 이듬해에는 電子冊 ‘中壯年, 새 꿈을 펼치자(낙서당)’를 냈다. 그가 찾은 두 番째 일이 이날 보여준 質問紙 讀書모임이다.“글쓰다 보면 혼자서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어요. 그런데 同年輩들이 눈에 밟히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 나오는 어르신이 78世인데 出席率이 第一 높아요. 말씀 들어보면 ‘이 나이 되니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모임 와서 얘기도 하고 또 年輩가 아래인 사람들 얘기를 듣고 하면서 너무 즐겁다고 하세요.”―시니어층 中에서도 特히 70代 男性들이 가장 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敬老堂은 너무 이르고. “그러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시니어와 質問紙 모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早晩間 이분들 이름이 共同으로 들어간 結果物을 만들 생각입니다. 종이冊이나 電子冊, 動映像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만의 武器를 기르세요―베이비붐 世代의 退職과 高齡者層 進入이 順次的으로 이뤄지고 있죠. 이 분들, 살 길을 찾아 各自圖生하거나 世上에서 한 발 빼고 조용히 傍觀者로 살거나 대충 두갈래인 것 같습니다.“제가 보기에 極少數 退職者들이 뭔가를 하려고 하고, 大部分은 그냥 人生을 놓고 살아요.” ―왜 그럴까요.“무언가에 새롭게 挑戰한다는 생각을 쉽게 못하는 탓 같아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生産者 立場에서 생각해보라’고 늘 얘기해요. 消費者 立場에서 노래를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노래件 뭐건 재미있으면 그걸 直接 하라는 거죠. 누구든지 뭔가를 한 2~3年 꾸준하게 붙들고 가면 밥벌이도 된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反應들이 ‘그 동안에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해요. 하지만 뭘 하든 間에 그 3年은 지나가요. 아무 것도 안하고 살면 그냥 지나가는 거고 뭔가를 하면 成果物이 조금씩은 쌓이는 거죠.”―좀 더 積極的으로 삶을 開拓해나가라는 말씀인가요.“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잘 할 수 있는 武器를 만들지 못하면 남들이 차려주는 밥床이나 바라게 됩니다. ‘나 좋은 밥床 줘, 그럼 내가 먹을게’ 이런 생각이거든요. 모두가 다 그런 態度라면 世上이 어떻게 되겠어요. 스스로가 밥床 차릴 생각을 해야지요.”나를 위해, 他人 위해 밥床 차리는 姿勢그는 요즘 世上의 變化를 오픈카톡房에서 배운다고 했다. “요즘 오픈카톡房 보면 작은 것은 100名 單位, 큰 것은 1200名 程度 加入돼 있는 것도 있어요. 저는 누구건 1000名 程度만 내 顧客을 갖고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봐요. 그걸 가지고 事業을 한다면 모두 1人 企業이 되는 거죠. 事業도 옛날에는 組織에 依存해서 했다면 只今은 個人들이 할 수 있는 環境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自己 것을 確實하게 갖고서 뭔가 챙기는 사람이 勝者예요. 즐기면서 잘하는 사람이 가장 剛할 수밖에 없고요. 앞으로 人間은 自己가 좋아하는 일만 해야 해요.”―무슨 말씀인지. “退職하고 보니 더더욱 確實하게 알겠어요. 좋건 싫건 義務에 따라 일하는 月給쟁이는 하다 보면 끝내 그냥 月給쟁이죠. 이들은 別 苦悶도 안 해요. 그에 비해 1人企業들은 그게 自己 것이니까 苦悶을 하더라고요. 눈덩이로 比喩하자면 처음에는 잘 안 뭉쳐지는데 自身의 苦悶이라든가 생각을 거기다 자꾸 쏟아붓기 始作하면 어느 瞬間 눈덩이가 확 커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經濟的인 部分도 自動으로 따라올 수 있을 거예요. 스타트업이나 유튜브 채널이나 다 그런 過程을 거치지요.”용기를 내는 것도 習慣“저는 只今도 무언가를 배우려고 애씁니다. 最近에는 人工知能(AI)을 工夫하고 있어요. 두어달 前, 動映像 만들기 講義를 들으러 富川까지 갔어요. 8萬 원 내고 8時間 授業을 듣는데 머리만 아팠죠. 하지만 어찌어찌 動映像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勇氣를 내는 것도 習慣이에요. 習慣은 그 다음부터는 反復되기 때문에 쉽게 굴러가죠.”그는 質問紙 만들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그것을 同僚들과 나누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요즘 ‘平生 中 가장 熱情的’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뭐라도 좋으니 ‘正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始作해보세요. 功을 들여 確實하게 내 것으로 만든 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지요. 100歲 人生 後半部 30~40年을 自身이 좋아하는 것,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 關心있는 것 中에 하나씩 붙들고 가면 뭔가를 이룰 수 있어요. 요즘은 人工知能이 發達해서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專門家의 境地에 들어서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다 좋은데 隨筆도 讀書모임도 돈되는 일은 全혀 아니네요.“지금은 그렇지요. 이것저것 勇氣를 내어 試圖해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 그 過程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런 게 제겐 더 所重합니다. 또 누가 압니까. 하다보면 제게도 어떤 機會가 올지. 하하…”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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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한일의원연맹, 韓日 專門家 招請 세미나 開催

    ‘캠프 데이비드 以後 韓美日 關係-韓日 安保協力 課題와 展望’ 主題로한일의원연맹(會長 鄭鎭奭 國民의힘 議員)은 오는 27日 서울 永登浦區 汝矣島 이룸센터에서 韓日 專門家 招請 세미나를 연다고 22日 밝혔다. 行事는 경남대 極東問題硏究所와 共同으로 主催한다. 이番 세미나에서는 美中 戰略競爭과 러시아·우크라이나 戰爭, 北韓의 核·미사일 威脅 等 周邊 安保 環境 變化 속에서 韓日 兩國 政府의 認識과 對應에 對해 論議할 豫定이다. 兩國 政府가 採擇한 國家安保戰略 文書 等에 對한 評價도 進行한다. 또 지난 8月 美國 캠프데이비드 韓美日 頂上會議에서 나온 共同聲明의 意味와 實踐 方案을 論議하면서 政策的 提言을 내놓을 것으로 期待된다.한국 側에서는 이상현 세종연구소 所長과 김숙현 國家安保戰略硏究院 硏究委員, 李秉喆 경남대 敎授가, 日本 側에서는 支持와 야스아키 防衛省 防衛硏究所 主任硏究官과 度쿠치 히데시 平和安全保障硏究所 理事長, 사하시 料 도쿄대 敎授가 發題와 討論을 맡았다. 한일의원연맹에서는 河泰慶 國民의힘 議員과 金漢正 더불어民主黨 議員이 패널로 參與한다.한일의원연맹은 지난 6月 ‘金大中-오부치치 韓日 파트너십 共同宣言 25周年 記念심포지엄’을 日本 와세다大學 一味硏究所와 共同으로 開催한 바 있다. 한일의원연맹은 “앞으로도 兩國 專門家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國會 次元에서 安定的이고 바람직한 韓日關係 發展方向을 찾도록 努力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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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픈 아내 위해 始作한 飯饌가게 ‘大박’… “60부터는 나를 위한 삶”[서영아의 100歲 카페]

    京釜線 平澤驛에서 걸어서 4分, ‘着韓男性컷’ 看板이 눈에 띈다. 지난해부터 조동근(63) 氏가 혼자 運營하는 理髮所다. 메뉴는 크게 컷과 染色 두가지. 컷 7000원, 染色도 1萬 원의 破格的 價格을 자랑한다. 代身 머리는 本人이 감아야 한다. 말 그대로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便하게 찾는 實用的 理髮所다.그는 安定된 職場으로 소문난 한국전력을 50歲에 그만두고 飯饌專門店 社長을 거쳐 理髮所 社長님이 됐다. 그의 事緣을 들으러 3日 京畿道 평택시의 理髮所를 찾았다.20대 後半, 아내가 癌 宣告를 받았다 50歲까지 그의 本業은 韓國戰歷 職員이었다. 19歲에 韓電職業訓鍊所를 거쳐 技能職으로 入社했다. 所謂 ‘前紀元’이라 불리던, 鐵塔에 오르고 電報대를 타며 故障을 고치는 그 일을 했다. 32歲 때 會社 內 系列 轉換 試驗에 挑戰해 技術職 職員이 됐다. 年俸 높고 安定的인 職場으로 有名한 韓電이지만 그는 未來가 不安했다. 일찌감치 結婚해 아들딸 낳고 잘 살던 아내가 그의 나이 29歲에 非長岩 宣告를 받았다. 悲壯은 잘못 건드리면 出血이 멈추지 않아 死亡한다는 長期. 手術이 안 돼 抗癌治療에 希望을 걸었다.“병명을 알기까지, 入院해서 두 달이 걸렸어요. 만 한 살, 네 살 된 아들딸을 親戚 집에 맡기고 會社도 一時 休職하고 아내 看病에 매달렸죠. 治療費에 가진 것 全部 쏟아붓고 一山의 외양間 같은 곳을 얻어 살았어요. 退院 後에는 집 앞 밭 200坪을 얻어 온갖 作物을 길러 自然食을 아내에게 해 먹였지요.”그의 나이 37歲, 夫人이 完治判定을 받았을 때 그는 거의 無一푼이 돼 있었다.“‘이런 狀態에서 아내의 病이 再發한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제가 아내를 看病하는 渦中에도 1年을 工夫해 技術職에 挑戰한 것도 或如 아내가 죽고 저마저 일하다가 事故로 죽으면 아이들이 孤兒가 될 수 있다는 切迫함 때문이었습니다.”반찬전문점으로 ‘大박’돈을 벌기 위해 副業에 나섰다. 낮에는 한전에서 勤務하고 밤이면 食堂에서 일하며 補身湯집 오리로스구이 가든食堂 김치工場 等 닥치는 대로 손댔지만 모두 失敗했다. 食堂은 그의 事情을 理解하는 職場 同僚들의 會食 場所로 愛用되곤 했다.1997년 무렵, 5日場에 가서 김치를 팔던 그에게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다른 飯饌은 없어요?” 閃光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飯饌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外食 장사도 사람들의 生活方式의 變化가 重要하다는 걸 讀書를 통해 알고 있었다. 外換危機( IMF)事態가 오면서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는 時代가 왔다. 需要가 적지 않을 것 같았다.상가 한구석에서 始作한 飯饌가게는 時代 흐름과 맞아떨어져 ‘大박’을 쳤다. ‘名家 찬房’이란 看板을 달고 商家 前面으로 進出했고 賣場은 세 군데로 늘었다.성업의 背景에는 끊임없는 硏究가 있었다. 그에게는 讀書를 통해 얻은 새로운 飯饌 레시피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예컨대 食材料를 包裝해서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되게 한 淸麴醬, 部隊찌개 等의 反應이 뜨거웠다. 요즘으로 치면 밀키트다.“製造業에 從事하는 오너는 그 製造過程을 다 알고 있어야 해요. 제가 直接 廚房에 들어가 飮食을 배웠어요. 名節 때 부침개 같은 건 正말 어마어마하게 팔렸어요. 3日間 賣出이 3000萬 원을 넘겼죠. 제가 直接 綠豆 갈고 아주머니 10名이 終日 부치고….”50세, 本業보다 副業 收入이 더 많아지자 그는 한전을 7年餘 당겨 명예퇴직했다.시대가 變해도 ‘鎭火’할 職業을 찾아 이 飯饌가게를 그는 2015年까지 모두 접었다. 時代가 빠르게 變했고 飯饌가게度 時流를 탔다. 1人 家口가 늘고 1人當 所得 3萬 달러 時代가 되니 飯饌을 사다 먹는 사람이 줄었다. 올라가는 人件費, 大企業들의 市場進出度 설 자리를 좁게 만들었다.그는 老後 自身의 進路를 놓고 硏究를 거듭했다. 多幸히도 아내의 健康은 괜찮았고 아들딸 모두 家庭을 이뤘다. 平生 먹고 살 것은 어느 程度 마련돼 있지만 스스로가 놀 수 없는 體質임을 알고 있었다. 世上과의 疏通도 이어가야 했다. 바야흐로 世上은 4次 産業革命과 人工知能(AI)李 支配하는 時代를 豫告하고 있었다.-그래서 찾은 게 理髮인가요?“이발, 設備, 重裝備運轉 等 몇가지를 놓고 檢討했어요. 未來 職業을 △없어질 職業 △代替될 職業 △進化할 職業으로 分類해봤지요. 사람마다 頭相이 다르고 毛髮 質도 다른데, 이 일은 機械가 할 수 없다는 確信이 들었습니다. 高齡時代에 싸고 簡便하게 理髮할 곳을 찾는 需要도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利用學院에 登錄하고 6個月間은 마침 學院 위層에 있던 考試院에서 지내며 工夫에 邁進했습니다.”이발사는 어떻게 進化할 수 있을까. 그는 高齡者가 더 늘어나면 出張 理髮 需要도 增加할 거라고 보고 있다. 只今은 理髮師가 家庭을 訪問해 理髮해주는 것은 法으로 禁止돼 있다. “頹廢理髮所에서 聯想되는, 그런 憂慮 때문이겠죠. 그런데 直接 理髮所에 오기 어려운 高齡者들이 더 늘어나면 그에 맞게 法도 整備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나이가 많은 理髮師들도 負擔 없이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時代가 열릴 수 있지요.”나이 60에 理髮師 資格證 따고 平澤에 자리 잡아어디에서 開業할 것인가. 自宅이 있는 一山 一帶를 檢討했지만 新都市는 젊은이가 많다. 나이 든 理髮師에게 젊은 손님이 오지 않으리라는 게 自明했다. 人口 密度와 年齡帶 等을 따져 서울에서 멀지 않고 交通이 便利한 京畿道 平澤과 安城 舊市街地를 노렸다. 高齡者도 流動人口度 많아 틈새市場이 있다고 봤다. 그가 2019年 아무런 緣故도 없는 安城에 ‘着韓男性컷’ 1號店을 연 理由다.“저는 어떤 머리라도 5~7分이면 다 깎습니다. 不必要한 動作을 모두 排除합니다. 패턴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죠.”평택에는 시니어層도 많지만 軍部隊도 많아 休暇 나온 軍人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理髮所에는 飮食店 메뉴처럼 머리模樣 샘플 寫眞이 있고 顧客은 그中 番號를 고르면 된다.“평택에는 外國人 勤勞者도 많아요. 그분들이 머리 깎으러 와서 願하는 스타일을 說明하는 건 쉽지 않죠. 그림을 보며 番號를 고르게 하니 서로 便했어요.”나아가 이 分野에서 일하기 願하는 사람들의 멘토 役割을 自處했다.“한사람 몫의 利用社가 되려면 1)資格證을 따고 2)實習 750餘 時間을 거쳐 3)創業 或은 就業하는 세 段階를 거쳐야 해요. 資格證은 學院에서, 創業 就業은 本人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實習을 堪當해줄 곳이 마땅치 않죠. 그걸 제가 돕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봉사활동과 機能硏磨 두 마리 토끼 잡아그는 週末이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 弟子들을 가르치고 每週 火曜日이면 함께 理髮 奉仕를 나가 實習 機會를 만들어준다. 카카오톡에 ‘着韓男性컷 學習房’을 만들어 隨時로 日程과 情報를 共有하고 參考할 만한 知識을 傳達해준다. 이 카톡房에는 現在 40名이 들어와 있다.“인근 療養院이나 精神病院 等에 아침 9時부터 7~8名이 가서 100餘 名 程度 理髮해드립니다. 奉仕는 그 自體로도 氣分이 좋기도 하지만 理髮 技術이 熟鍊되는 좋은 機會예요. 이분들은 조금 밉게 깎아도 相關 않으시잖아요. 特히 高齡 男性들은 大槪 빡빡 밀어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弟子들에게 理髮 機械로 밀기 前에 상고머리 커트하는 練習을 해보라고 하지요. 練習用 假髮 한 個에 7~8萬 원인데, 絶好의 機會죠.”유튜브에 이 발技術 資料 映像을 80餘 個 올렸는데, 理髮을 工夫하다가 이 映像을 發見하고 찾아오는 弟子들이 間或 있다. 그의 信條는 ‘最高보다 最初가 돼라’는 것. ‘크몽’이라는 專門家 登錄 電子冊 포털 사이트에 ‘理髮의 定石’ 敎材를 登錄하고는 “男性헤어컷 分野 敎材로는 最初”라며 자랑한다.현재 ‘着韓男性컷’은 全國에 5곳이 있다. 1號店이 자리가 잡히자 弟子에게 넘기고 2號店을 平澤 서정리에 열었다. 그 뒤 2號店도 다른 弟子에게 넘기고 지난해 平澤驛에 둥지를 튼 게 只今의 3號店이다. 서울 봉천동과 光州廣域市에도 50代, 60代 弟子들이 ‘着韓男性컷’을 열었다.“1호점은 58歲 前職 美容師가 맡았는데 센스가 좋아 盛業 中이에요. 2號店은 60歲 女性인데 거기도 잘 되지요. 3號店은 아직 完全히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後날 여길 根據地로 하려고 합니다.”“사는데 大學은 그리 必要하지 않더라구요”베이비붐 世代의 特徵 中 하나가 極度로 어려운 家庭環境에서 태어난 사람이 적지 않다는 點, 또 그렇게 바닥에서 始作했어도 左衝右突 부딪히며 어려움을 克服하고 큰 跳躍을 해낸 境遇가 적지 않다는 點이다. 曺 氏 또한 本人 表現에 따르면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8男妹 中 일곱째로 태어났다. 煉炭 한 張 한 張 사다가 때우며 生活하는 어려운 環境이었다. 中學校 1學年 때 月謝金 낼 돈이 없어 中退하고 印刷所에 就職하면서 社會生活을 始作했다. 工場을 轉轉하다 18歲가 되자 ‘이렇게 살면 未來가 없겠구나’는 ‘現打’가 찾아왔고, 夜學에 다니기 始作하면서 韓電 職業訓鍊所에 들어갔다.1985년 첫 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檢定考試 學院에 있었다. 그해 高入 檢定에, 이듬해 大入 檢定에 合格해 1987年 방송통신대 法學科에 入學했지만 2年 뒤 아내의 病으로 休學하면서 그의 學業은 끝났다.-왜 나중에라도 學業을 마치지 않으셨나요.“사는데 大學이 그리 必要하지 않더라구요. 10年間 冊을 2000卷쯤 읽었어요. 特히 自己啓發書에 빠져들었지요. 冊 內容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늘 메모하고 時間 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나름 時代를 조금은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사실 學閥과는 相關없이 그는 只今도 熱心히 工夫한다. 飮食 장사를 하던 時節에는 外食業 關聯 冊을 涉獵하고 어떻게 하면 成功할지 苦悶한 痕跡들을 手帖에 빽빽이 남겼다. 飯饌가게를 할 때도, 只今의 理髮 일을 할 때도 늘 메모하고 읽고를 反復한다. 다만 요즘은 手帖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貯藏한다고. “韓國 靑年 걱정되지만…앗! 내色은 안 합니다”마음 같아서는 靑年들의 앞길도 열어주고 싶은데 靑年世代에는 아직 그의 眞心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전철에서 젊은 아이들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요. 그 貴한 時間을 시시한 게임이나 하며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막상 表情을 보면 世上에서 自己 役割을 찾지 못해 주눅 들어 있고요.”화요일 奉仕 모임에도 가끔 靑年 理用司 志望生이 오는데 疏通이 쉽지 않다. “奉仕 다녀오면 後記를 쓰라고 해도 안 써요. 하나라도 배우려는 姿勢가 잘 안 보여 답답합니다. 그래도 내色하면 ‘꼰대’가 되니까 참아야죠.”-혹시 나이 든 멘토와 疏通이 語塞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저는요, 平生 世上에 들이댔어요. 제가 世上에 들이댄 것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저에게, 世上에게 들이대기를 懇切히 願합니다.”“60세부터 아내는 가끔 만나는 게 반갑고 좋아요”이 世上 많은 家長이 그러하듯 平生 그를 움직인 動力도 家族이었다. 아내가 鬪病하던 當時에는 어딜 가도 손을 붙잡고 다녔다. 癌으로 인해 血小板이 줄어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出血이 멎지 않을 憂慮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週 1~2回 程度 一山에 올라가 만나는 程度로 쿨하게 지낸다. 子女들은 다 出嫁했고 아들과 함께 사는 夫人은 敎會活動에 熱心이라고. 조氏는 主로 平澤에 얻은 오피스텔에서 生活한다. 그는 “60歲 넘으면 夫婦는 가끔 만나는 게 第一 반갑고 좋다”며 웃는다. “平生 일해 家族을 지켰습니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이 일은 제가 世上과 만나는 窓門 같은 겁니다. 人生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이 일을 하길 正말 잘했죠. 아니었으면 世上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 싶은 이 마음을 傳할 方法을 어디서 찾았을지 모르겠어요.”평택=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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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停年退職 다음날 새 職場 出勤, 어느 빌딩 管理所長의 ‘가늘고 긴’ 平生就業機[서영아의 100歲 카페]

    1961年生 최경묵 氏는 2021年 12月 31日 停年退職하고 이듬해 1月 3日 새 職場에 出勤했다. 延面積 5萬 坪 規模 빌딩의 管理所長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금요일까지 全 職場에서 勤務하고, 新正을 낀 週末 쉬고 月曜日부터 出勤했어요. 正말 運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최 氏)單純히 韻으로만 돌리기엔 說明이 不足하다. 50代 初盤부터 그가 勞心焦思하며 쌓아온 準備過程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漠漠하게 느껴지는 退職 後 삶. 그는 어떻게 幕間도 없이 人生2幕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그를 만나러 17日 서울 송파구 문정現代知識産業센터 管理事務所를 찾았다.●무조건 生存하라, ‘가늘고 길게’지하 2層에 자리한 管理事務所 所長室. 그는 이곳에서 아침저녁으로 會議를 하고 所屬 職員 50餘 名의 中間報告를 받는다. 平日 常住人口 1萬1000名이 넘는 建物의 冷暖房과 給湯, 消防 安全管理가 그의 責任下에 돌아간다.통계청에 따르면 韓國人의 非自發的 退職 平均年齡은 49.5歲. 法廷 停年인 60歲를 채우는 것은 天運이라고들 한다. 反面 韓國人이 일을 손에서 놓는 時期는 72歲까지 늦춰진다. 充分하지 않은 老後準備 탓이다. ―退職과 同時에 再就業이 어떻게 可能했는지요.“틈틈이 따놓은 資格證 德分이죠. 在職 中에 資格證을 活用해 經歷까지 쌓아 놓았어요.”그가 가진 資格證은 安全, 消防, 危險物 關聯의 3가지. 用意周到하게 退職을 準備한 背景에는 남들보다 일찌감치 ‘철이 든’ 過去事가 있다.●이직 5年 만에 不渡가 나버린 會社行政學을 專攻한 그는 大型 建設社 人事팀에서 6年 半 程度 일한 뒤 當時 百貨店 事業에 進出하는 韓信公營으로 所屬을 옮겼다. 하지만 會社는 그가 移職한 5年 뒤인 1997年 不渡가 났고 迂餘曲折 끝에 中堅 流通企業에 吸收돼 버렸다.“고용승계 條件으로 會社가 整理됐으니 于先은 버틸 수 있었지만, 同僚의 折半 以上은 會社를 나갔습니다. 會社는 隨時로 構造調整을 했고 눈치를 줬습니다. 被合倂會社의 職員으로서 갑자기 閑職으로 發令이 나거나 進級이 안 되거나, 여러모로 限界가 느껴졌죠.”그의 職級은 1992年 移職할 때 課長이었는데, 停年 1年 前까지 ‘次長’에 머물렀다. 어제까지 그의 業務指示를 받던 部下 職員이 商社로 오는 일은 茶飯事. 40代 後半쯤 되니 ‘나이가 많다’는 눈치가 더해졌다.“그런 侮蔑感을 이겨내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호기롭게 나간 사람들이 例外 없이 後悔하는 모습을 봤거든요. 異口同聲으로 ‘힘들어도 참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手段 方法 가리지 않고 停年退職하는 게 最高의 老後 對策’이라고 忠告하는 분도 있었죠.”최 氏는 典型的인 韓國의 베이비붐 世代(1955年~1963年生). 自尊心 세우고 목소리 크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禿수리打法’이나 驅使하는 ‘꼰대’ 同年輩들과 線을 긋고 ‘가늘고 길게’ 生存하는 길을 擇했다. 도무지 理解할 수 없는 發令에 默默히 따랐고 地方 發令을 받자 더 熱心히 일했다. 새벽에 컴퓨터學院에 다니며 파워포인트 포토샵 動映像 製作을 배워 20代 靑年보다 빠른 情報化 能力을 搭載했다. 會社에서도 重要한 報告書 作成 때마다 그를 찾게 됐다. 昇進은 못 했어도 밥값은 하며 살았다고 自負한다.●만년 次長의 설움, “資格證이 날 지켜줄 것”展 職場에서의 마지막 職責은 經營支援部長. 主로 建物과 用役管理 일을 하면서 關聯 資格證이 있다는 데 눈을 떴다.―회사 일하면서 資格證 挑戰, 할 만한가요.“본격 工夫는 3年 程度 했는데, 會社일 正常的으로 하면서 試驗工夫 하는 건 正말 힘듭니다. 技術 資格證은 大體로 工大 出身에 유리하고 文科 出身에게는 用語부터 生疏해요. 冊만 보면 졸리고, 봐도 봐도 잊어버리고…. ”3次까지 있는 試驗에서 數次例 失敗했지만 反復하다 보니 조금씩 實力이 쌓였다.“근무시간에는 會社 일을 熱心히 하되 밤時間과 週末 等 自己 時間을 最大限 活用했습니다. 어느 程度 軌道에 오른 뒤에는 退勤 後 바로 圖書館에 가서 平均 2時間 程度는 工夫했고, 試驗 臨迫해서는 밤 12時에 집에 와서 씻고 한두 時間 더 하곤 했습니다. 이런 때는 하루 서너 時間 자고 工夫했던 거 같아요.”●자격증+경력 있으면 좋은 機會 늘어다만 資格證이 좋은 일자리를 保障하는 것은 아니다.“즉시 現場에 投入되려면 經歷이 있어야 합니다. 제 境遇 産業安全技士 資格證을 딴 뒤 退職할 때까지 3年 程度 免許를 걸고 經歷을 쌓았어요.”―무슨 말씀인가요.“구청이나 消防署, 産業安全公團 等 公式 機關에 資格證 免許 申告를 하고 實際 活動을 해야 經歷이 됩니다. 事前에 會社에 問議를 했어요. ‘資格證을 따면 免許를 걸 테니까 해도 되겠느냐’고. 人事 擔當者는 ‘資格證만 따시라, 그 뒤에 얘기하자’고. 아마 手當도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그는 資格證을 딴 뒤 會社를 통해 區廳에 ‘總括災難管理子’로 申告하고 3年間 일했다.―다른 退職 豫定者度 따라 할 수 있는 걸까요.“자격증을 딴 뒤 會社와 잘 協議해 公式 機關에 會社의 ‘總括災難管理子’로 申告할 수 있으면 勤務 期間이 經歷으로 認定되죠. 그러면 退職과 同時에 就業으로 連結될 수 있어요.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電氣 安全 消防 等의 ‘技士’ 資格證을 가지면 就職이 수월해져요. 예컨대 消防 關聯 資格證을 따면 아파트 같은 데서 勤務할 수 있습니다. 技士로 勤務하다가 經驗이 쌓이고 能力이 되면 管理所長에 挑戰해 볼 수도 있죠.”●“퇴직하면 모두 똑같아지더라”물론 누구에게나 未來는 알 수 없고 不安하다. 그 또한 다르지 않았다.“퇴직 1年 남기고는 ‘뭐 하고 사나’ 걱정의 連續이었지요. 資格證을 準備는 했지만 이게 社會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디서건 淸掃夫라도 하겠다고 作心하고 있었지요.”그런데 退職 6個月 前부터 인터넷으로 職場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履歷書를 보냈더니 한 곳에서 ‘當場 와 달라’는 連絡을 받았다. “退職日로 定해진 12月 31日까지 마무리는 해주고 나가는 게 道理인 것 같다고 그쪽 會社에 事情했어요. 그런데 그쪽은 當場 사람이 必要하다고 해서, 못 갔어요. 그 뒤 連結된 只今 職場은 기다려줄 수 있다고 해서 이곳으로 決定했지요.” 管理所長으로서 年俸은 5000萬 원 水準. 4大保險, 週 5日 勤務가 保障된다.“이 程度 큰 빌딩을 管理하다 보니 나름 責任感도 크고 自負心도 느낍니다. 여기서 일하는 게 幸福합니다. 普通 退職者들이 第2의 職場을 잡아도 2年 以上 다니기 힘들고 經歷을 살리기도 힘들죠. 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요즘은 退勤할 때 表情이 便安해서 너무 좋다고요.”●“나는 ‘崔部長’ 아닌 ‘崔氏 아저씨’”―退職하는 분들에게 助言을 한다면….“과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停年退職하고 밖에 나오면 다 똑같아져요. 職責이 語땠건, 學歷이 높건 낮건, 再就業을 하면 給與는 大槪 200萬 원臺 初盤이에요. 只今 여기서 일하는 記事님들 中에도 서울大 出身, 銀行 支店長 出身, 公務員 出身이 있어요. 50代 初盤쯤 構造調整 當해서 山戰水戰 겪고 資格證 딴 케이스가 많아요. 제가 볼 때 ‘깨인’ 분들이죠. 이렇게 깨인 분이라야 自身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일할 수 있어요.”―어차피 退職하면 누구나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전화 通話 목소리나 態度에서 보면 옛날을 내려놓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높은 地位였을수록 그렇겠지요. 退職하면 모두 똑같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本人만 괴롭죠.”이런 그는 옛 職員들이 그를 ‘崔 部長님’이라 부르면 “그냥 ‘崔氏 아저씨’라 부르라”고 한다고. 反對로 進級이 빨라 한때 上司가 됐던 親舊가 退職 後에도 上司 마인드로 自身을 對하는 걸 느낀 瞬間, 그 親舊를 孫絶해버렸다고 한다.●남은 꿈은 技術士 挑戰 그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 있다.“기술사 工夫를 하고 있는데 여러 番 떨어졌습니다. 消防設備技術士 같은 資格證은 最下 年俸 8000萬 원 以上이고 健康만 받쳐준다면 80歲까지는 일할 수 있어요. 問題는 試驗이 어렵다는 거죠. 제대로 準備하려면 專業으로 한 2年 工夫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한便으로는 더 늦기 前에 좀 놀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다리 성할 때 집사람과 旅行도 좀 다니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挑戰을 抛棄하고 싶지 않은데, 요즘 苦悶이 많습니다.”기술사는 應試 資格 自體가 까다롭다. 技士 資格證을 딴 뒤에도 다시 오랜 經歷을 쌓아야 한다. 그는 韓國産業人力工團에 가서 面接과 審査를 거쳐 應試 資格을 인정받았다. 前 職場에 資格證을 걸었던 3年은 勿論, 그곳에서 20餘年間 建物 施設 管理 業務를 한 履歷이 도움이 됐다. -或是 ‘일 中毒’이란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그냥 그렇게 됐어요. 지난 秋夕 때 6日 連休가 있었잖아요. 제 平生 가장 길게 쉰 것 같아요. 前 職場에서는 여름休暇 一週日 받아도 2, 3日 쉬고 會社에 나갔어요. 施設管理라는 일 自體가 마음 놓고 쉬기 어려운 데다가 위에서도 慇懃히 눈치를 주곤 했지요.” ● “이 나이 되면 工夫보다 運動이 重要”―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세요.“지금 職場은 제가 그만둘 때까지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一旦은 65歲까지 바라보고 있고, 그 後에는 狀況을 봐야죠. 다만 모든 건 健康을 前提로 합니다. 이 나이에는 工夫보다 體力 지키는 게 더 重要한 것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雇用하다 보니 딱 보면 알아요. 그분의 健康 狀態가 어느 程度인지. 行動이나 말, 걸음걸이가 語訥해지면 일하기 어렵죠. 이건 제게도 該當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요즘 運動을 最優先順位에 두고 있어요.”40, 50代 때 熱中했던 마라톤 代身 요즘은 筋力運動과 걷기를 熱心히 한다.“얼마 前 同窓 모임이 있어 故鄕에 갔는데 열두어 名 中 現役은 저 혼자였어요. 親舊들이 ‘都大體 腦 構造가 어떻게 됐길래 只今까지 일을 하느냐’며 놀리더군요. 親舊들이 저를 稱讚해주고 부러워하는 걸 보니까 내가 잘하고 있구나 싶고, 親舊들에게 밥이라도 한 番 더 사게 되니 ‘이게 幸福이구나’ 싶기도 합니다.”1막에서 마음껏 꽃피우지 못한 아쉬움은 다 풀린 걸까. 不斷한 準備로 華麗한 2幕을 始作하며 웃는 그를 보며 普通 사람의 成功談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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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우리가 그리는 未來’ 韓日祝祭한마당, 22日 코엑스서 열린다

    ‘韓日祝祭한마당 2023 in Seoul’李 22日 ‘우리가 그리는 未來’를 主題로 서울 강남구 코엑스 D홀에서 開催된다고 19日 韓日祝祭한마당 實行委員會(委員長 孫京植)가 밝혔다. 韓日祝祭한마당은 2005年 韓日國交正常化 40周年을 記念한 ‘韓日友情의 해’ 主要 事業으로 始作돼 每年 빠짐없이 開催되며 兩國 最大 規模의 民間 交流 行事로 자리매김했다. 第 19回를 맞는 올해 祝祭에서는 特히 韓國과 日本의 傳統탈춤 特別公演(韓國 鳳山 탈춤, 日本 이와사키 誤니켄바이)李 펼쳐질 豫定이다. 지난해 유네스코 人類無形文化遺産에 韓國과 日本의 傳統탈춤 舞踊劇(韓國 탈춤, 日本 後流오도리)이 同時에 登載된 것을 祝賀하는 意味를 담았다. 이 行事는 유네스코 無形文化遺産保護에 關한 協約 20周年 記念事業으로 認定됐다.오전 11時부터 午後 6時 30分까지 進行되는 行事의 오프닝 舞臺는 서울市 少年少女合唱團과 서울日本人學校의 合同公演으로 兩國의 代表的인 動搖를 韓國語와 日本語로 함께 부르는 것으로 始作된다.이어 朝鮮通信使를 主題로 한 日本劇團 시즈오카현社의 公演, 韓日 힙합 公演, K-POP과 J-POP 公演 等이 祝祭場을 뜨겁게 달굴 豫定이다. ‘韓日 傳統衣裳 體驗 부스’에서는 韓服과 기모노 等을 直接 입어 보고 포토존에서 追憶을 남길 수 있다. ‘韓日 傳統 놀이 體驗 부스’와 日本 文化를 經驗할 수 있는 ‘日本 茶 文化 體驗’, ‘日本 꽃꽂이 體驗’도 마련됐다. 韓日 漫畫 特別展 부스에서는 40周年을 맞이한 日本의 人氣 애니메이션 ‘마크로스’ 시리즈의 展示 코너가 마련됐고, 오리지널 크리에이터 中 한 名인 가와모리 쇼지 監督을 招待해 사인會를 進行한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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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年 넘은 父母님 看病… 60歲 딸은 直接 療養院을 세웠다[서영아의 100歲 카페]

    15年 前 어느 金曜日 밤. 어머니(當時 72歲)가 좀 異常했다. 腦卒中 前兆症狀이었지만 家族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綜合病院 應急室에서 12時間을 기다린 뒤에야 腦磁氣共鳴映像(MRI)을 찍었다. 腦硬塞으로 이미 왼쪽 腦가 하얗게 變했다고 했다. 기나긴 看病生活의 始作이었다.4년 뒤에는 아버지가 腦出血로 쓰러졌다. 아내가 鬪病生活을 始作한 뒤 마음 둘 곳 몰라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病院에 入院하면서 차라리 便安해보였다. 그 뒤 大學病院과 療養病院, 再活病院을 옮겨다니는 父母님 看病이 이어졌다. 月 700萬~800萬 원 씩 들어가는 費用은 네 兄弟가 分擔했지만 버거운 일이었다.임수경 보아스골든케어 代表(62)의 苦悶도 깊어갔다. 돌봄이 必要한 어르신들이 便하게 지내고 保護者에게도 힘을 줄 空間은 없는 걸까. 어디에도 없다면 내가 한番 만들어볼까. 마침 그가 8月에 낸 冊 ‘우리 父母님은 療養院에 사십니다’(삼인)가 손에 들어왔다. 5日 그의 일터이자 ‘집’인 京畿道 高陽市 一山東區의 療養院을 찾았다.잘 나가던 IT專門家, 療養院腸이 되다그는 잘 나가던 IT專門家였다. LG CNS 常務, KT 專務, 國稅廳 첫 女性 局長, 韓電KDN 첫 女性 社長, 光州科學技術院(GIST) 理事長 等 功·私企業을 오가며 華麗한 履歷을 쌓았다. 이런 그가 人生 마지막 ‘使命’을 老人療養으로 定했다.-요양 現實에 對한 問題意識은 알겠는데 直接 療養院을 짓는 건 次元이 다른 挑戰이네요.“아픈 父母님을 安心하고 맡길 수 있는 療養院을 찾다가 이렇게 됐네요. 兄弟들 모두 바쁘게 生活하면서 父母님을 穩全히 모시지 못했다는 罪責感도 作動했어요.”형부가 마침 갖고 있던 現在의 敷地를 내어줬다.여기에 어떤 療養院을 지을지 構想하던 2014年 그가 한전KDN 社長으로 拔擢돼 全南 羅州로 내려가게 되면서 프로젝트는 遲延됐다. 2018年 任期를 마친 그는 男便과 媤어머니에게 諒解를 求하고 父母님을 直接 모시기로 했다. 再活醫療機器를 갖춘 집을 마련하고 看病 도우미도 救했다. 7年 만에 한 房에 누운 父母님은 깜짝 놀랄 程度로 즐거워했다. 늘 無表情에 가까웠던 어머니의 활짝 웃는 얼굴이 寫眞에 남아 있다.“더 以上 해드릴 게 없습니다. 退院하세요”노인성 疾患의 特徵은 分明 아프고 不便한데 病院에서는 더 以上 解決해줄 수 없다는 點이다. ‘더 以上 해줄 게 없다’니, 保護者 立場에서는 이보다 寞寞한 말이 없다. 그렇게 病院에서 내쳐진 老人이 갈 곳은 집이나 療養病院, 療養院 再活病院 中 하나다.“이런 現實에 對해 最小限의 案內도 없는 境遇가 많아요. 只今도 痛歎스러운 게, 어머니가 처음 腦硬塞으로 入院했다가 退院할 때의 情報不足이예요. 그때 醫師가 ‘再活病院으로 가라’는 한마디만 해줬어도 어머니가 臥牀狀態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뒤늦게 看病人의 귀띔으로 再活病院에 들어간 어머니는 再活治療 德에 다리에 조금 힘이 생겼다. 療養院을 짓기 위해 設計만 14番 바꿨다. 10餘 年間 여러 病院을 轉轉하며 아쉬웠던 點을 깨알같이 反映했다. 그에 따르면 原則은 ‘老人의 삶이 삶인 채로 存在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곳’.“單純 治療 外에 老人의 健康과 情緖 狀態에 따라 運動·認知·情緖 프로그램이 必要합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運動 삼아 病室 밖에 나가려 하면 看病人이 막아섭니다. 或是 넘어져 骨折傷을 입을까봐. 꼼짝 말고 寢臺에 누워있으라는 겁니다. 老人을 對하는 우리 社會의 態度가 大槪 이래요. 늙고 병들었어도 如前히 오늘을 사는 사람이란 걸 看過하죠. 老人에게도 療養 돌봄 再活治療뿐 아니라 親舊 餘暇 웃음 놀이 쉼이 모두 必要해요.” 父母님 모시고 療養院서 生活그렇게 2020年 4月 門을 연 療養院은 延面積 3000坪에 寢牀 250個로 民間에서는 國內 最大 規模다. 4層짜리 2個棟이 療養院이고 부속동에는 老人療養硏究所와 채플을 넣었다. 個人生活과 共同生活의 均衡을 갖추도록 ‘유니트 케어 시스템’을 導入했다. 유니트(이곳에선 ‘마을’이라고 부른다)마다 居室을 中心으로 廚房이 있고 個人 寢室이 配置된다. 한個 層마다 두個의 유니트 사이에 看護스테이션과 沐浴室 等이 있다.어르신들은 居室에서 이웃과 함께 食事하고 色漆놀이나 노래敎室 等 프로그램을 共有한다. 飯饌은 共同調理室에서 만들어오지만 밥은 居室마다 따로 짓는다. 밥짓는 내음으로 입맛을 돋우고 내 집같은 느낌을 살렸다.공간이 널찍널찍하고 어디나 햇빛이 들어오도록 設計돼 밝다. 屋上庭園과 텃밭 等 面會 온 家族들과 함께 즐릴 수 있다. ‘從事者들이 즐거워야 어르신도 즐겁다’며 마련한 扁柏나무 休憩室도 賃貸表의 자랑거리다. 現在 237個 寢牀이 稼動中인데 2인실을 혼자 쓰며 追加費用을 내는 入所者들이 있어 빈자리는 없다. 看護師 療養保護士 等 正規職 從事者 160餘 名이 이들을 돌본다. 林 代表는 開院 以來 父母님 옆房에서 生活한다.건축비와 初期費用이 고스란히 貸出로 남아 있는데, 寢牀이 꽉 차면서 利子를 낼 수 있게 돼 安堵하는 中이라고.어르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合치면 100坪 規模인 두 군데 物理治療室에는 코끼리自轉車와 全東自轉車, 起立機, 赤外線 治療機 等 老人에게 必要한 機器들을 채웠다. 그가 物理治療를 强調하는 理由는 父母님에게서 效果를 봤기 때문. 老人들이 筋力을 키워 조금이라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삶의 質과 直結된다. 自身의 힘으로 化粧室에 가는 것만으로도 自尊感은 크게 回復된다.딜레마도 있다. 筋力을 조금 키운 어르신들이 自信感이 붙어 혼자 움직이려다 넘어지는 事故가 적지 않다는 것. 股關節 骨折을 입은 入所者가 手術까지 해 겨우 나았는데 放心한 사이 혼자 움직이다가 주저앉는 바람에 다시 手術한 境遇가 있었다. “얼마나 애써서 回復된 건데, 保護者께도 罪悚하지만 저희가 더 속이 傷했어요. 그런데 이 어머니는 조금 回復되니 또 움직이려 하세요. ‘어머니 筋力 運動하시면 또 움직이려 하실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여쭈면 保護者도 答을 못하세요. 저는 어르신이 自力으로 움직이기 願한다면 그래도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휠체어는 正말 못 일어나게 되면 그때 타시면 되죠.”큰 療養院에서는 事故 危險을 避하기 위해 걸을 수 있는 어르신도 모두 휠체어에 태워버리는 境遇가 많다. 安全과 걷는 能力, 어느 쪽이 重한지 섣불리 答할 수 없는 事案이긴 하다.‘집 代身 療養院’도 充分한 選擇肢-療養院에 對해 否定的인 視線이 적지 않은데….“입소하는 어르신도 保護者도 마음의 짐이 크죠. 어르신들은 療養院 가는 걸 猖披하게 여기고 保護者들도 父母奉養 제대로 못한다는 自責感을 가지세요. 하지만 어르신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면 共同生活이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저는 ‘保護者들도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하죠. 제가 2年 程度 집에서 父母님을 모셨는데, 제 生活이 없었어요. 看病 도우미 2名 데리고 했는데 費用도 많이 들고요. 問題는 父母님께 ‘집에 있다’는 것 말고는 別로 해드릴 게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1年쯤 되니 ‘심심하다, 지루하다’ 자꾸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癡呆가 오셨어요.”-여기서는 어떻게 지내시나요?“아버지는 여러 프로그램에 參與하고 散策도 많이 하고 남들 사는 모습도 보고…나름 社會生活이 可能하니 무척 좋아하세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좋아하시고요. 틈만 나면 두 분이 손 붙잡고 계세요.”-가장 힘든 일은?“어르신들은 狀態가 나빠지는 境遇가 많아요. 그런데 ‘들어올 때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되셨느냐’며 抗議하는 保護者들이 계세요. 孝心이 큰 분일수록, 내가 모셨어야 한다는 自責感이 剛한 분일수록 더 그러세요. 罪悚하다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일에 에너지 消耗가 많습니다.”따지고 보면 모두가 이미 ‘돌봄이 매우 必要하다’는 長期療養等級을 받은 어르신들이다. 時間이 흐르면 나빠질 可能性이 크다. 人生 攝理가 그러한 것 아닌가. -좋았던 일은?“이제 보내드려야 하나, 생각했던 분이 回復되시면 힘이 나지요. 4月 病院에서 膽石除去 手術을 받고 한달間 入院했던 99歲 어르신이 復歸하겠다고 하시길래 保護者께 ‘療養病院쪽으로 알아보시는 게 좋겠다’고 勸했어요. 저희는 病院이 아니니 臨終을 놓칠 수도 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여기가 내 집’이라고 固執하신다는 거예요. 結局 제 房 옆房에 모시고 들여다봤는데 처음엔 飮食을 잘 못드시더니 5個月 지난 只今은 스스로 휠체어 運轉하고 다니세요.”여생을 어디에서 보낼까여생을 어디에서 보낼까에 正答은 없다. 世界的으로 ‘살던 곳에서 나이들基(aging in place)’가 붐이지만 各自 處한 與件도, 狀態도 다르다. 父母 立場에서는 돌봄은 必要하지만 子息들 삶을 망가뜨리면 안된다. 子息 立場에서는 돌봄뿐 아니라 父母님 삶의 質도 생각해야 한다.“어, 우리 아버지 춤춘다. 옆에 우리 어머니…”(임 代表)房을 비운 林 院長의 父母님을 찾아 노래敎室이 한창인 居室로 가봤다. 트로트에 맞춰 律動指導가 進行되는 現場을 보자마자 賃貸表는 아버지가 律動을 따라하시는 것을 반겼다. 擧動이 부자유스러운 어르신들의 춤이란 게 講師의 指導에 맞춰 손을 움직이는 程度지만 몸이 리듬을 타고 있는 건 분명했다.“매일 아침 일어나면 13個 마을을 돌며 人事드리고 ‘拍手치기’ 같은 것을 함께 합니다. 어르신들과의 疏通이 즐겁습니다. 只今이 너무 좋아요. 이곳을 만든 德分에 저는 老後에 할 일을 얻었고 父母님은 安定되고 便히 지낼 곳을 얻었습니다. 最終的으로는 제 家族이 生의 마지막에 돌아와서 살 곳도 얻었지요.”사실 그가 療養院을 세운 데는 本人 世代의 未來를 準備해야 한다는 使命感도 크게 作動했다. “父母님 世代는 우리가 돌보면 되는데, 우리 世代는 그런 걸 期待할 수 없죠. 흔히 孝道를 하는 마지막 世代, 孝道를 못 받는 첫 世代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갈 곳을 스스로 만들어야겠구나…이곳을 세운 뒤 제 兄弟나 親舊들 모두 ‘더 나이들고 아프면 갈 곳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하고 있어요.”포부는 老人 돌봄 福祉 모델을 만드는 것. 療養院에서 다양한 事例를 모아 老人療養 서비스, 프로그램, 老人療養政策 等을 開發하는 데 힘을 실을 생각이다. “어르신들은 살아온 삶에 對한 稱讚과 激勵가 必要합니다. 共感하고 慰勞받는 분들이 많아져 어르신과 保護者들, 便치 않은 분들이 조금은 便해졌으면 좋겠습니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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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等 中退 ‘工事판 아지매’, 나이 60에 看護助務士 된 事緣은[서영아의 100歲 카페]

    “하이고, 제가 뭐라고, 이렇게 멀리까지…”그를 搜所聞해 인터뷰 約束을 잡을 때 이숙희(64) 氏가 되뇌었던 말은 ‘제가 뭐라고’였다. 그는 4年 前부터 딸 권기순(40)氏가 院長인 韓醫院에서 看護助務士 일을 하고 있다.이 氏는 지난해 慶尙南道가 主催한 ‘人生二毛作 成功手記’ 公募展에서 最優秀賞을 받았다.우연히 이 手記 ‘굳세어라 숙희야’를 읽고,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韓國의 高度成長 時節, 犧牲만 하고 살았던 우리 누이들의 해피엔딩 스토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11~12日 慶南 巨濟의 韓醫院을 찾았다.“내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洞네에선 아무도 몰랐어요”1959년 生인 李 氏의 學歷은 오랜 歲月 初等學校 4學年에서 멈춰 있었다.14세부터 20代 初盤까지는 工場에서 보냈다. 23歲 때 只今의 男便 권오언(68) 氏와 結婚하며 工場을 떠났지만 가난은 如前했다. 27歲부터는 혼자가 된 媤어머니(當時 57歲)를 모셨고, 30代 後半부터 工事場 日傭職 勤勞者, 俗稱 ‘노가다’로 20年 가까이 일했다. 病弱한 媤어머니와 아들딸 5食口가 살아가려니 男便의 외벌이로는 不足했다.현장에서는 ‘設備 아지매’로 불렸다. 아파트 工事 初期에 水道管이나 수전, 洋便器 等을 設置하는 일이 主 業務였다. 洞파이프 鎔接 程度는 식은죽 먹기로 해냈다.“설비는 骨格만 만들어진 建物에 올라가 作業하는 일이 많아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家族에게도 正確히 제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얘기 안했어요. 이웃들에겐 더욱 숨기는 데 汲汲했죠. 猖披했으니까요.”그 많던 女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그가 工場에서 일하던 1970年代 寫眞을 보며, 그 많던 ‘産業役軍’ 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했다. 낮은 賃金에 人生의 꿈과 可能性을 抵當 잡혔던 그女들은 아마도 工場을 벗어난 卽時 이 記憶을 黑歷史로 묻어버리지 않았을까. 그가 只今도 아파트 建設現場에서 땀흘린 그 수많은 나날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하듯이.한의원에 到着하니 男便 權氏도 와 있었다. 아내에게 重要한 날이니 記事 노릇을 自處했다고. 無言의 應援이 느껴졌다. 저녁 7時, 診療가 끝나자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權院長度 合流했다.“내는 죽어도 大學은 가보고 죽을 끼라”‘못 배웠다’는 것이 그의 平生 恨이었다. 男便에 對해 “착한 사람”이라며 “못 배운 저를 받아줬다”고 몇番이나 말했다. 結婚할 때 媤아버지께 ‘中卒’이라고 거짓말 했고, 學校에 보내는 書類에도 ‘中卒’이라고 써보냈다. 이 男便에게조차 끝내 ‘實은 初等學校를 卒業하지 못했다‘는 말은 못했다고 한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權氏가 한마디 거든다. “못 배웠어도 사람이 똑똑하면 되는기라. 當身은 똑똑하잖아.”평생의 恨을 푼 실마리는 61歲 知人이 인터넷 講義로 工夫해 心理相談士 資格證을 땄다는 消息. “귀가 번쩍 뜨였죠. 學院에는 猖披해서 못 가지만 認講이라면 혼자 얼마든지 工夫할 수 있겠구나…”밤마다 밥床 펴놓고 男便에게서 數學課外 받아딸에게 처음으로 “내가 실은 初等學校 卒業資格이 없다”고 커밍아웃했다.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程度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告白한 거였는데, 딸은 “그게 뭐 대수라고, 檢定考試 보면 되지”라며 집 近處 初等學校에 問議해 解決策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1年 4個月 만에 이 氏는 初中高 檢定考試를 모두 通過했다. 初等學校는 한달 餘 獨學으로 工夫한 뒤 2015年 3月에, 中學校는 5月에 合格證을 받았다. 高校 合格證은 이듬해 5月에 받았다.“고등학교 過程은 獨學만으로는 벅차서 學院에서 工夫했지요.”기초가 없는 數學이 問題였다. 救援投手는 가까이에 있었다. 公告와 폴리텍을 나온 ‘理科系’ 男便 權 氏가 밤마다 밥床을 펴놓고 數學課外를 해줬다.대망의 高校 卒業證書는 손에 넣었지만 修學能力試驗을 볼 自身은 없었다. 딸은 公認仲介士 資格證을 따보라고 勸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大學에만 向해 있었다. 그러다 檢定考試 學院에서 ‘晩學徒들이 가는 2年制 週末大學’ 情報를 얻게 된다.나에게도 同窓이 생겼다!“2년제건 4年制件, 그냥 大學에 한番 다녀보는 게 所願이었어요. 週末에 終日 몰아서 授業하는 學校였는데 保育福祉相談科로 들어갔어요. 리포트도 써보고 MT도 가고, 學士帽 쓰고 卒業寫眞도 찍었습니다. 저는 平生 同窓이 없었잖아요. 남들이 學窓時節 얘기하면 낄 수가 없었죠. 그런 제게도 大學同窓에 敎授님까지 생긴 거예요.”사실 ‘晩學徒를 위한 選擇肢’는 하나 더 있었다. 國立창원대에 開設된 4年制 ‘資産管理學科’가 그것. 며느리가 英語敎師란 點도 考慮해 아들 夫婦에게 相談을 請했더니 2年制 쪽을 推薦해줬다고. “資産管理는 저로서는 別로 써먹을 데가 없지요. 하하.”의료봉사 現場 도우며 남 돕는 일의 기쁨 맛봐卒業班(2學年) 올라갈 때 미션 하나가 追加됐다. 딸의 勸誘로 看護學院에 登錄한 것. 권기순 院長의 回顧다.“그 즈음 加助島에 醫療奉仕를 갔는데 엄마가 와서 도와줬어요. 敎室을 빌려 地域 어르신 30餘 名을 治療해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氣分 좋아하시는 거예요. 韓醫院에서도 일손이 不足하면 엄마가 가끔 허드렛일을 도와주셨는데 一 把握도 잘 하시고 正말 믿음직했어요. ‘看護學院 1年이면 看護助務士 資格證 딸 수 있는데, 그거 따서 우리 韓醫院에서 일하시면 어떠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하시더군요.”1년 간 週中에는 看護學院, 週末에는 大學講義를 듣는 强行軍을 벌인 끝에 2019年 봄, 滿 60歲에 李 氏는 看護助務士 資格證과 大學卒業狀을 모두 따냈다.“간호학원 相談 課長님이 ‘學院 創立 以來 60歲 넘어 合格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너무 고맙다’고 하셨어요. 제가 고맙죠. 안 받아주셨으면 제가 어떻게… ”事實 看護學院 入學할 때 여러 군데에서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이 學院 相談課長은 後날 “여러 사람 만나다 보니 나름 사람보는 눈이 생겼는데, 이 분은 해낼 것 같았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家族의 無關心에 初4에 中斷된 學業1960年代에도 初等學校는 義務敎育이었다. 李 氏는 왜 卒業하지 못했을까.“2남 4女 中 막내딸이었어요. 初等學校 4學年 무렵 집이 시골에서 安東으로 移徙를 갔어요. 아버지가 學校에 轉學手續을 밟아줘야 하는데 時機를 놓쳤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언니오빠들은 모두 出嫁하거나 집을 나갔고 어느 틈에 제가 少女家長이 돼 있더군요. 父母님 모두 예순이 넘으셨고요. 열넷 程度부터 집近處 菓子工場에 다니기 始作했죠.”그뒤로는 아무도 學校 얘길 꺼내지 않았다. 19歲 때에는 親戚의 紹介로 龜尾의 纖維工場에 就職했다. 이 무렵 全南 光州에서 空軍 中士로 勤務하던 男便 權 氏와 펜팔로 連結됐고, 權氏가 昌原의 技能大(現在의 폴리텍臺)에서 工夫하면서 昌原에 자리를 잡게 됐다.“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그런데 다른 일도 있는데 왜 ‘노가다’ 일이었나요?“제 마음 속에 定해둔 原則이 있었어요.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家族 저녁밥은 내가 차려야 한다는 原則이죠. 해질녘 歸家할 수 있으면서 學歷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選擇肢가 없었지요.” 이 일은 當時에도 벌이가 쏠쏠했다. 男便보다 많이 벌 때도 적지 않았다.2002년, 最惡의 試鍊이 닥쳐왔다. 딸이 大學入試에서 떨어져 서울로 留學을 떠났다. 學院費寄宿舍費를 대야 했는데 男便은 다니던 大企業에서 ‘잘렸다’. 어머니 病勢는 더욱 나빠져 大小便 수발이 必須가 됐다. 집을 사며 얻은 貸出도 있었다.모든 不幸이 다 내게로 왔던 時節“모든 不幸이 제게로만 오는 것같았어요 . 그때 제가 43살. 只今 생각하면 참 젊었는데, 當時에는 제가 무척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를 療養病院에 보낼 돈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끝까지 모시겠다는 마음도 컸지요.”당시 그는 늘 不安했다고 한다. “새벽 6時에 어머니 點心까지 차려놓고, 요강 準備 다 해놓고 나가요. 高校生이던 아들이 할머니 要綱수발을 많이 도와줬어요.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心臟이 두근거렸어요. 或是라도 나 없는 사이 어머니 혼자 돌아가셨을까봐… 玄關에서부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불러서, ‘그래 에미냐’ 對答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내렸죠.”2003년 初 딸이 한의대에 合格한 直後 할머니가 他界했다. 걱정과 달리 媤누이 두 분과 李氏까지 집에 있는 狀況에서 돌아가셨다. 葬禮式에 온 親戚이 ‘자네는 父母한테 잘해서 福 받은 거’라고 했다.‘설비 아지매’에서 ‘숙희 쌤’으로요즘 이 氏는 週 3日 慶南 昌原의 집에서 韓議員이 있는 巨濟까지 市外버스로 出勤한다. 2015年 開院한 韓議員은 地域에서 자리를 잡아 손님들이 줄을 선다. 일터에서 母女는 서로 ‘院長先生님 ’ ‘숙희 쌤’이라고 부른다. 다른 4名의 看護助務士度 이름에 ‘쌤’을 붙여 부르기는 마찬가지. 20年 間 工事 現場에서 ‘設備 아지매’라 불리던 그가 ‘숙희 쌤’으로 自身의 이름을 되찾았다.권 院長이 韓醫師를 志望한 理由도 家族생각이 컸다.“우선 우리 家族 健康을 제가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여기저기 아프고, 엄마는 40代부터 얼굴이 퉁퉁 붓고 잘 걷지도 못했어요. 收入도 생각했죠. 父母님 苦生이 모두 돈 때문인데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우리 집에 좀 도움이 되겠다….물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보람도 크죠. 只今 엄마에게 月給 兼 用돈 兼 돈을 드릴 수 있어 너무 좋아요.”(권 院長)無理해서 일 하다 스테로이드 副作用까지卷 院長은 工夫하다보니 李 氏의 症狀이 스테로이드 副作用으로 인한 ‘쿠싱症候群’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날 그날 일을 나가야만 벌이가 있으니 藥 먹고 注射 맞아가며 無理를 했는데 스테로이드를 너무 맞았다는 것. -그렇게 苦生했는데 가끔 男便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제가 모자라 그 일을 擇했는데 男便 탓할 立場이 아니죠. 率直히 제가 잘났다면 그런 데 갔겠어요. 다른 거 했겠지.” 夫人이 번듯한 職業을 가진 男便 同僚들을 보면 이 氏는 男便에게 未安해했다. 그때마다 權氏는 “當身이 工夫 더 했으면 나 못 만나. 날 만나줬겠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 어떤 일도 제가 다 이겨내야겠다는 責任感이 굳어지곤 했지요.”세대간 犧牲과 도움의 善循環世代 葛藤이니 世代間 搾取니 하는 말이 亂舞하는 世上이지만, 李 氏 家族은 犧牲을 한 世代德에 잘 된 아랫世代가 다시 윗世代를 도와서 함께 잘 되는 ‘윈윈’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가족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엄마, 그 엄마의 마음을 아는 딸은 問題에 부닥칠 때마다 答을 찾는데 힘을 보탰다. 特히 平生 李氏를 가둬둔 學歷 콤플렉스를 떨치고 世上에 나오도록 마음 썼다. 李氏가 手記를 통해 世上에 모든 걸 公開하겠다는 勇氣를 낸 것도 딸의 劇藥處方 德이다.“(수기 쓸 때) 처음에는 初等學校 中學校 못 간 얘기는 빼고 高等學校 中心으로 썼어요. 남들 보기 猖披하니까요. 그런데 딸이 막 뭐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다 넣었어요.”(이 氏)엄마가 初等學校도 卒業하지 못했었다는 얘기는 아들조차 手記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엄마의 境遇 제 눈에는 世上에서 말하는 學歷은 別 意味가 없었어요. 엄마는 손에서 冊을 놓은 적이 한番도 없어요.저희가 學校를 卒業할 때마다 엄마는 함께 卒業한 셈이예요. 저희가 읽는 敎科書, 參考書, 漫畫冊, 제 專攻書籍까지 모두 읽었거든요. 化粧室에 앉으면 新聞조각이라도 읽으세요. 늘 조그마한 거 하나에도 배울 게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저희도 熱心히 工夫할 수 있었지요.” (權 院長)“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所重하죠”공모전 最優秀賞 賞金은 50萬 원. 이 賞金을 分配한 얘기에서 李 氏에게 가장 重要한 게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苦生은 누구나 하는 거고 本人 運命일 뿐이죠. 남탓할 必要 없어요. 그래서 더더욱 옆에 있는 사람이 所重해요. 우리 男便은 그 賞金 받을 充分한 資格이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큰 힘이 돼 줬어요. 그래서 10萬 원 더해서 60萬 원 줬고, 사위 딸 며느리 아들에게도 10萬 원씩 딱딱 줬어요.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完成品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고.”이번엔 權氏에게 60萬 원 받아서 뭐하셨냐고 하니 “딱 半 갈랐지”라며 킥킥 웃는다. 이 夫婦는 뭐든 생기면 卽時 折半으로 나눠 갖는다는 것. 68歲, 64歲인 夫婦는 모두 現役.李 氏는 韓醫院 일을 힘닿는데까지 繼續할 생각이다. 男便 權 氏도 電氣技師 資格으로 每日 會社에 出勤하는 生活을 이어가고 있다.먼길을 돌긴 했지만 健康한 家庭을 일구고 子女 잘 키우고 60歲 넘어 自身의 이름으로 일하기 始作한 李氏. 그의 原動力은 本人의 懇切함, 그리고 自身이 안간힘 다해 지켜낸 家族의 뜨거운 應援이었다. ‘굳세어라. 숙희야!’ 巨濟=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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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老朽 田園生活에도 다 때가 있더군요”…60~75세가 즐길 수 있는 黃金期[서영아의 100歲 카페]

    3年째 春川市 所屬 文化觀光解說師로 活躍하는 박의서(72) 氏는 當初 春川과 緣故가 없는 外地人이었다. 2018年 安養大 觀光經營學科 敎授에서 停年退職하면서 곧장 春川으로 居處를 옮겼다. 18年間 大學에서 敎鞭을 잡았고 그前에는 한국관광공사에서 22年間 勤務했으니 말 그대로 旅行과 觀光分野 專門家다. 只今은 市內 近郊 住宅에서 텃밭을 일구고 산다.도시인들의 로망이기도 한 歸村과 全員살이, 그 생생한 體驗談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달 31日 春川을 찾았다.“춘천은 우리 家族의 블랙홀이었다”요즘 朴 氏 家族은 두 딸 內外와 손주 4名까지 모두 10名이 春川에서 산다. 세 집이 自動車로 5~10分 거리에 있다. 一家의 春川 入城 契機는 2011年頃 둘째 사위의 軍服務였다. 入隊 前 結婚해 아들을 둔 둘째 사위의 勤務地가 春川이었다. 部隊 近處에서 살던 딸 內外는 除隊 뒤에도 그냥 春川에 눌러살기로 했다.-명문대를 나온 젊은 夫婦에게 適當한 일자리가 있었나요.“둘이 똑같이 미니멀리스트예요. 딱 먹고 살 만큼만 일하면서 農家住宅을 빌려 改造해서 재미나게 살더군요. 처음에는 걱정도 하고 잔소리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賢明했다’고 하게 되더군요.”뒤늦게 結婚한 큰딸도 몇 番 와보고는 春川이 좋다며 다 整理하고 내려와 버렸다. 只今은 큰 사위만 서울로 出勤하는 生活을 한다. 田園生活과 歸村은 박의서 氏의 로망이기도 했다. 정년과 同時에 서울 生活을 果敢히 整理하고 딸들이 사는 곳, 春川으로 옮겼다. “春川이 우리 一家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지요. 하하.” “隱退하고 歸村해도 消日거리는 있어야 해요”귀촌하면 그저 隱退生活에 充實할 생각이었다. 春川에 地緣과 學緣이 全혀 없다 보니 工夫도 하고 사람도 사귈 兼 平生學習館이니 圖書館 文化講座 等을 熱心히 다녔는데, 漸次 지루함을 느끼게 됐다. 뭔가 消日거리가 必要했다. 하다못해 幼稚園 버스 運轉이나 注油所 알바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高齡 탓에 여의찮았다. 그러다 偶然히 市廳에서 文化觀光解說師 募集이 있어 應募했다.“은퇴하고 歸村했어도 消日거리는 있어야 하겠더군요. 그때만 해도 ‘大學敎授까지 하고 解說師 하려고 하냐’는 反應들이 있었어요. 英語特技者로 合格했지요.”면접시험을 通過하고 集合敎育 100時間, 現場 敎育 100時間을 받은 뒤에야 資格證이 나왔다. 現在 全國에서 3000餘 名이 文化觀光解說師로 活動 中인데, 春川市에는 20名이 있다. 昭陽江댐, 申崇謙 將軍 墓域, 淸平寺 等 春川의 主要 觀光地 8個 地區에서 돌아가며 일한다. 한 사람이 한 달에 10~15日 程度, 午前 10時부터 午後 5時까지 일한다고. 法的으로는 自願奉仕지만 交通費 等의 名目으로 時間當 1萬 원이 支給된다. 그의 境遇 月 80~100萬 원 程度 받는다.“돈 생각은 全혀 없었는데, 이게 쏠쏠하더군요. 손주들 用돈도 주고 밥도 사고, 아주 즐겁게 하고 있어요.” 春川의 魅力, ‘다 갖춰져 있는데 호젓하다’그가 말하는 春川의 長點은 끝이 없다. 山水가 좋고 交通이 便利한데 快適하고 없는 게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것. 例컨대 서울까지는 ITX로 1時間 남짓, 電鐵로도 1時間 半이면 갈 수 있다(심지어 電鐵은 敬老優待가 適用돼 無料다).요즘 地方에서 盛行하는 파크 골프를 즐기기에도 絶對的으로 유리하다. 파크 골프는 클럽 하나로 치는 골프인데 골프보다 規模는 작지만 재미는 똑같고 費用이 들지 않는다. 세 바퀴 돌면 1萬步 程度 걷게 되니 쏠쏠하게 運動도 된다. 春川에는 只今 파크골프場이 두 군데 있는데, 3군데 더 만들 豫定이라고 한다.“월회비 몇萬 원이면 每日 나갈 수 있어요. 함께 파크 골프 하는 醫師들 말이, 요즘 老人들 健康管理의 首勳甲이 파크 골프라고 합니다.”그의 境遇 거의 每日 水泳을 하는데 利用料 1500원에 國際規格 水泳場이 새벽 5時부터 저녁 8時까지 아무 때나 가도 利用할 수 있다. 서울에서 레인別로 時間表 보며 豫約해야 했던 것과는 비할 수 없을 程度로 快適하다. 이뿐인가. 老年의 田園生活에는 단골손님처럼 登場하는 ‘病院에서 멀다’는 指摘도 痛快하게 反駁할 수 있다.“집에서 15分 距離에 大學病院이 두 군데나 있어요. 제가 서울에서 빅5病院 바로 곁에 살았는데 應急室에 빨리 가면 뭐합니까. 기다려야 하는데. 여긴 기다릴 必要가 없죠. 老人들 살기에는 天國이에요.”평생 ‘都市女子’였던 夫人 신재희(67) 氏도 大滿足이라고 한다.“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宏壯히 즐기고 있어요. 요즘은 파크 골프에 푹 빠져서 同好會 사람들과 每日같이 나가요. 女子들은 나이 들어도 새 親舊를 잘 사귀더라구요. 男子들은 있던 親舊도 整理하는 마당인데… 하하. 거기에 딸 둘 가까이에 살죠, 텃밭 일에도 재미를 붙여서…” “田園生活 제대로 즐기려면 60代 初盤에는 옮겨야”100평 程度 짓던 텃밭 農事는 最近 30坪 規模로 줄였다. 主로 申 氏가 고추 호박 가지 상추 等 10가지가 넘는 푸성귀들을 키운다.“(아내가) 아침에 눈 뜨면 텃밭부터 나가는데, 農作物은 主人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요. 그걸 體感하곤 해요.”“이렇게 이쁜 애들이 아침마다 절 부르는데 어떻게 안 나와 보나요”(신 氏).朴 氏는 農事일은 한해가 다르게 힘들어져 몇 年 더 지나면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그때는 어떻게 하실 計劃인가요.“저는 療養院에는 絶對 가기 싫어요. 農事 못 짓더라도 여기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제가 經驗해보니 田園生活을 꿈꾸는 분들은 적어도 60代 初盤에는 옮겨야 15年 程度 田園生活을 누릴 수 있어요. 더 氣力 있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시라고 勸하고 싶어요.”서울에 竣工을 앞둔 再建築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만, 돌아가지 않게 될 것 같다. “텃勢? 없진 않지만 어디나 사람 사는 곳”100歲 카페에서 脂肪消滅이니 歸農 歸村에 對한 記事를 쓰면 반드시 地方의 텃勢 問題를 呼訴하는 댓글이 달린다. 理想的인 메시지는 歸農歸村을 奬勵하지만 막상 現實에서는 不條理한 規制니 卓上行政, 地域社會의 따돌림 等으로 발길을 되돌리는 都市民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교수님 境遇 그런 問題는 없습니까.“사람 사는 世上이니 이런저런 問題가 생기지요. 適當히 잘 지내는 境遇는 괜찮아요. 그런데 利害關係가 얽히거나 外地人이 조금 튀는 行動을 하는 境遇는 逆風을 만나요. 저는 觀光 쪽을 오래 했으니 아무래도 地域 觀光政策에 對해 意見이 있거든요. 地域新聞에 칼럼을 連載했는데, 反應이 아주 차갑더군요. ‘春川에 對해 當身이 뭘 안다고’ 이런 反應들이죠.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내기로 했습니다. 제 눈에는 春川이 가진 潛在力이 무척 큰데, 콘텐츠를 잘 만들어가면 發展 可能性이 無窮無盡한데, 안타깝지요.”이웃과의 關係도 어려움에 빠졌다. 이웃집이 道路敷地를 남몰래 大地로 編入한 것을 뒤늦게 알고 抗議했지만 問題提起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過程에서 이웃들과 사이가 不便해졌다.“절차상 瑕疵가 深刻했는데 통하지 않더라구요. 地緣 學緣으로 얽힌 地域분들끼리 ‘좋은 게 좋은’ 式으로 하는 것은 社會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아내와는 ‘이럴 바에야 移徙를 가 버리자’는 말도 했는데, 只今은 關係가 나쁘면 나쁜 대로, 神經 쓰지 말고 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너무 좋으니까요. 不便하긴 하지요.”주경야독으로 碩博士 取得鳥致院 隣近 農家에서 태어나 中學校까지는 奬學金으로 다녔지만 高等學校는 焉敢生心. 當時 朴正熙 政權이 育成하던 國立 大專攻展에 進學했다. 高校 3年과 專門大 2年을 합친 5年制 專門學校였다. 建交部에서 末端 公務員으로 일하다가 軍에 入隊했다.“운 좋게도 美 8軍에 配屬돼 美軍病院에서 일하게 됐어요. 醫師들을 相對하다 보니 高級 英語를 배울 수 있었죠. 제가 平生 써먹은 英語는 여기서 배운 거였습니다. 苦生도 많이 했지만 運도 좋았어요”제대 後 觀光公社에 入社했을 때는 京畿大 3學年에 編入한 狀態. 碩士는 美國 뉴욕支社에서 일하면서 夜間大學에서 받았고 博士는 다시 경기대에서 職場生活을 하면서 땄다.-늘 晝耕夜讀이었네요.“제가 博士까지 받아 敎授 生活도 했지만 率直히 제대로 工夫해본 적이 없어요. 渦中에 運은 좋은 便이었어요. 博士學位를 따자마자 大學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요.”-운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父母 잘 만나 아무 걱정 없이 工夫하고 遊學 하러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주어진 環境에서 最善을 다하면 運도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이 나이 되어, 더할 나위 없이 幸福합니다”그는 3年 前쯤 自身의 雅號를 허당(虛堂)이라 지었다. 千字文의 ‘허당습청(虛堂習聽 빈房에서 소리를 내면 울려서 다 들린다는 뜻)’에서 따왔는데, ‘싹 비우고 새롭게 채워 넣겠다’는 覺悟를 담았다. 春川으로 옮긴 直後 다니던 書藝 敎室에서 이 四字成語를 만났다. 그즈음부터 平生 잘못한 것에 對해 ‘거꾸로 쓰는 自敍傳’도 조금씩 쓰고 있다고 한다. 現役 時節에는 ‘記錄 따라 떠나는 韓國古典奇行(2018) ’, ‘極限을 克服한 글로벌 苦戰 奇行’ 等 人文書와 講壇에서 아직도 使用되는 觀光經營 關聯 敎材 等 10餘 卷을 냈다.늘 不足한 것을 메우려 努力하는 삶을 이어와서일까. ‘더할 나위 없이 幸福하다’는 그에게서 어딘가 헛헛한 느낌도 傳해져온다.“제가 平生 웃는 얼굴로 살았는데, 나이 드니 異常하게 웃음氣가 줄어요. 優雅하게 늙는다는 게 物理的 心理的으로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분명한 건 살다가 머무는 곳이 故鄕이라면 이제 이곳이 제 故鄕이란 겁니다.”춘천=서영아기자 sya@donga.com}

    • 202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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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職者의 時急, 어딜 가도 1萬 원이더군요”…어느 大企業 任員의 退職日記[서영아의 100歲 카페]

    大企業 任員 人事는 大體로 金曜日 午後에 있다. ‘任員=臨時職員’이란 우스개가 있을 程度로 파리 목숨 身世인 任員들. 이들에게 退職 通報를 할 때는 더욱 金曜日이 有用하다. 週末 새 그들의 痕跡을 지워내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새로운 한 週를 始作할 수 있으니까. 정경아 前 新世界그룹 常務(54)가 30年 職場生活을 끝낸 2019年 10月 그날도 金曜日 午後였다.그날, 한 會議室에 불러모아진 10餘 名의 任員들을 둘러보며 代表가 무거운 입을 뗐다. “여기 계신 분들은 올해가 마지막인 분들입니다.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名 한 名 握手를 請했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던가요. 30年間 아등바등 일하며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딱 3秒 걸리더군요.”● 滿 50歲, 하루아침에 白手가 되多유튜브 알고리즘 德에 정경아 全 常務를 알게 됐다. 앳돼 보이는 女性이 退職 體驗을 얘기하길래 아나운서인 줄 알았는데, 듣다 보니 本人 얘기였다. 그가 最近 낸 冊 ‘어느 大企業 任員의 退職日記’(RHK)도 言及됐다. 退職 4年次로 접어들었다는 鄭 氏를 17日 서울 鍾路區 東亞日報 本社에서 만났다.-금요일 退職 通報를 받고도 月曜日 아침에 出勤하려 했다면서요.“사실 아무도 ‘來日부터 나오지 말라’고 明示的으로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雰圍氣로 제가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꿈을 꾼 것 같았거든요. ‘이제 出勤할 必要 없잖아’라는 男便의 말에 들었던 핸드백을 놓고 주저앉았지요.”책은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그가 써온 退職 關聯 글들이 基盤이 됐다. 退職의 當惑感과 以後 겪은 心境 變化, 迂餘曲折을 거치며 社會에서 홀로서기 위해 努力하는 過程들이 담겼다. 너무 率直한 描寫에 “名色이 大企業 任員이었는데 이미지 생각은 안 하느냐”는 反應도 꽤 있었다고 한다.“그런 말 듣고 더 熱心히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體面 따지며 쉬쉬하다 보니 退職者들의 삶은 世上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잖아요. 退職의 實相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해요.”-50대 初盤쯤 大企業 任員이 됐다가 2年 만에 나온(잘린) 분들을 여럿 만나봤는데 다들 衝擊을 삭이지 못해 힘들어하시더군요.“멘털이 털린다고 할까. 平生을 바쳐온 會社에 버려진 느낌? 背信感이라기보다는 一方的으로 依存하고 짝사랑하다가 잘린 느낌 같은 거죠. 會社는 무심한데. 그게 會社의 屬性이에요.”2017년 末 48歲에 常務補로 昇進했을 때만 해도 그해 新世界그룹 數十名 昇進人事에서 唯一한 女性任員으로 注目받았다. 하지만 任員 生活은 滿 2年으로 끝났다. 任員 1年次의 實績不振이 致命的이었는데, 때마침 環境 이슈가 터져 그가 맡은 商品 分野가 直擊彈을 맞았다. 2年次는 所謂 ‘退職 前 마지막 關門’이라 불리던 자리에 發令받았다. 會社에 올인하다시피 살아온 그에게 ‘現打(現實自覺타임)’가 찾아왔다. ● “最大 復讐는 退職 前보다 더 잘사는 것” 職場生活을 오래 한 사람 大部分이 鄭 氏처럼 ‘現打’가 오는 瞬間을 만난다. 會社와 自身의 關係가 어느덧 變했음을 깨닫는 瞬間이다. 會社는 좋은 新入社員을 뽑고 이들을 잘 키워 成果를 내도록 努力하지만 一定 時間이 흐른 뒤엔 이들을 부담스러워한다. 잘나가던 職場人이 瞬息間에 退物 取扱받게 되는 때다.-덕분에 退職準備할 時間을 얻은 셈이네요. 그런데 ‘退職의 關門’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요? “對外 營業인데, 會社의 新規 收入源을 찾는 일이에요. 돈 되는 건 뭐든지 찾아서 하는 거죠. 그 1年 間은 사람들을 거의 안 만났어요. 事實 만나자는 사람도 없었지요. 名色은 任員이지만 사내 모든 關係에서 排除되는 느낌이었어요. 個人的으로 週末이나 밤 時間을 풀로 活用해 사이버 大學 講義도 듣고 民間 資格證도 5個쯤 땄습니다. 그 代身 會社 일은 더 熱心히 했어요. 有終의 美를 거두고 싶었고 或是나 여기서 成果를 내면 雰圍氣가 바뀌지 않을까라는 未練도 없지 않았지요.”-그동안 쌓은 功이 있는데, 1年 삐끗했다고 내치는 건 會社가 너무한 것 아닌가요. “時代的 狀況도 제 몫이니까, 會社에 對한 서운함은 全혀 없습니다. 不斷히 새로워져야 하는 게 會社의 生理죠. 온라인에 밀리고 있는 流通 分野는 特히 그렇습니다.” 空氣처럼 自身을 감싸주던 會社를 떠난다는 것,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멍이 뻥뻥 뚫리는 經驗이었다. 銀行에서 마이너스 通帳 貸出 延長이 안 된다는 通報가 왔고 健康檢診, 保險 等 生活 全般에 問題가 생겼다.“가볍게 떠나는 週末旅行도 事前調査를 하고 計劃을 세우는데, 退職 後 數 十 年 남은 人生 旅程을 全혀 準備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 會社 안은 정글, 會社 밖은 戰爭터退職 뒤 많은 일이 있었다. 2021年 첫 冊 ‘독한 언니의 職場生活白書’를 냈고 지난 6月 두番째 冊인 ‘어느 大企業 任員의 退職日記’를 펴냈다. 놀라운 것은 退職한 뒤에 첫 冊을 썼지만 冊 內容에 退職 얘기가 거의 없다는 點이다. 本人은 職場生活 가이드 槪念이라 그렇다고 說明하지만, 그만큼 退職의 衝擊이 컸기 때문은 아닐까. 5個月 程度 서울 江南의 面接學院에 相談室長으로 就職해 備品管理, 化粧室 淸掃를 度맡기도 했다. 代價는 時急 1萬 원에 點心으로는 김밥 한줄이 提供됐다. -相談室長이 왜 淸掃하고 쓰레기 버리는 일까지 하지요? “會社 나오면 어디나 그래요.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를 選擇할 뿐, 다른 餘地는 없어요. 이게 世上이에요. 給與도 無條件 時間當 1萬 원이에요. 어딜 가도 1萬 원. 稀罕한 일이죠. 退職者들은 다 알아요. 會社 나갔을 때 나의 價値는 時間當 1萬 圓이라는 것을. 職場 門을 딱 나오면 正말 무엇이든지 想像 그 以上이더라구요.”그 渦中에 힘든 사람을 등치는 者들은 꼭 있다.어느날 헤드헌팅 業體에서 00期業 00자리에 有力 候補로 올랐다며 連絡하더니 履歷書를 넘겨주자 消息을 끊었다. 클라이언트에게 涉外力을 誇示하기 위해 利用됐다는 걸 깨달았다. 한때 衣類流通業 關聯 스타트업에 오픈 멤버로 參與해 땀을 흘렸지만 經營이 어려워지자 瞬息間에 解雇되기도 했다.“사회에서는 履歷이 있는 職場人을 一回用 消耗品으로 利用하려는 境遇가 많아요. 例를 들면 流通業界에 있던 사람은 納品處를 찾는 분들이 販路를 뚫는 役割을 期待하며 接近하죠. 大部分 단물만 빨리고 버려집니다. 아무리 華麗하게 再就業한 退職者도 1,2年이면 會社를 떠나야 하죠.”● “會社 없이도 내가 成長할 수 있구나”이런 그에게 보람을 안겨준 것은 區廳에서 主管하는 敎育 프로그램이었다. 脆弱階層 靑少年에게 1對 1로 進路指導를 해주는 멘토링 事業이었는데 처음에는 對答도 하지 않던 中學生 閔준이가 漸次 마음을 열며 成長하는 모습이 큰 慰勞가 됐다. 멘토링 期間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민준에게서 文字 하나가 왔다. ‘先生님 저예요. 感謝합니다!’ 달曆을 보니 스승의 날. 눈물이 핑 돌았다.“그 前까지 저를 성장시키는 動力은 會社가 唯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욱 會社에 매달렸고요. 이런 생각이 민준이를 通해 깨졌어요. 아이가 成長하는 모습이 제게 뿌듯함과 慰勞를 줬고 저 스스로 徐徐히 回復되고 있다고 느끼게 됐어요.”● 우리 모두에게 世上의 中心은 自身-드디어 會社없는 生活에 適應하는 거군요.“퇴직후 제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會社가 아니라 내 人生이 삶의 中心에 놓여야 한다는 點이에요. 只今도 後輩나 同僚들, 會社에 미친 듯이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어요. 會社 일은 當然히 熱心히 해야 하지만 會社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會社를 나온 뒤의 삶에 對해서도 생각하고 準備해야 한다고. 世上의 中心은 바로 當身이란 걸 잊지 말라고.”그래서 그는 새로운 目標를 세웠다. 職場 生活과 退職 關聯 專門家로서 關係者들에게 動機를 附與하는 役割을 하겠다는 것이다. 글쓰기, 講義, 콘텐츠 만들기 等 方式은 여러 가지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冊을 내고 關聯 講義를 準備하는 데 이어 最近에는 유튜브 채널을 2個 開設했다. 이 中 退職 經驗者들의 直接 인터뷰를 담은 채널 ‘退職學校’는 開設 한 달餘 만에 購讀者가 4000名을 넘어섰다. ● ‘잘려서’, ‘잘릴 豫定이라서’… 工場서 마주치는 大企業 任員들그는 요즘 유튜브 撮影을 위해 많은 退職者를 만나고 있다. -會社 밖에서 만난 退職者들은 어떻게 살고 있던가요.“임원을 했던 분이건 아닌 분이건 제대로 자리잡은 분을 만나기 쉽지 않아요. 모두 힘들죠. 쿠팡같은 配達일, 工事판, 單純 아르바이트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분들이 오히려 깨어 있다고 생각해요. 最近 인터뷰한 大企業 任員 出身 退職者 얘기가 재미있었어요. 잘리자마자 어느 企業 工場에 일하러 갔는데 거기서 다른 企業의 現職 任員을 마주쳤대요. ‘왜 왔느냐’고 물으니 ‘곧 잘릴 豫定이라 어떤 職種이 있는지 練習삼아 다니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退職者件 在職者件 이런 現實 얘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各自 뿔뿔이 흩어져 아무 情報도 없이 退職해 時間만 흘려보내며 悔恨을 쌓는 것보다 말이죠.”유튜브 채널을 위해 맨처음 인터뷰했던 中堅企業 前 代表 얘기는 여러모로 가슴아팠다고 한다. 業界에서는 꽤 알려진 百貨店체인을 만들고 10年間 社長을 맡았던 그는 派遣勤勞法 違反으로 會社가 困境에 處하자 그 責任을 지고 辭職했다. 하지만 이 事件탓에 3年間 訟事를 거쳐 執行猶豫 2年刑을 받으면서 都合 5年間 아무것도 할 수 없는 狀態가 됐는데 이런 現實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그의 인터뷰 中에는 이런 씁쓸한 에피소드도 나온다.“현역시절 유난히 잘 따르던 後輩가 父親喪을 當했다. 道理라고 생각해 釜山까지 아내와 함께 내려갔는데, 問喪을 한 뒤 1時間을 앉아있어도 後輩가 나와보지를 않더라. 社長 時節 現場 巡視가면 ‘그만 들어가서 볼 일 보라’고 아무리 勸해도 끝까지 남아 遂行하던 親舊였는데…. 그대로 葬禮式場을 나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제 弔問같은 건 가지 말아야겠다’고 말했다.”정 氏는 ‘이런 얘기가 繼續 알려져야 退職者들은 조금이라도 慰勞받고 在職者들은 精神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 退職者 世界에도 롤 모델이 必要하다 -요즘 우리 社會가 시니어世代나 나이에 對해 宏壯히 薄한 待遇를 하지요.“그래도 늘어나는 머릿數의 힘을 無視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요즘 시니어들은 新人類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같이 살자, 내 삶도 價値가 있다. 너희도 늙는다’ 程度는 堂堂히 말할 수 있어야죠.”그는 3年 後에 ‘大企業 任員의 退職 日記 3年 後’를 쓸 豫定이다. 只今까지 職場물을 빼는 데 3年 걸렸고 다시 3年 뒤엔 어디쯤 가 있을지, 그걸 確認해야 이 退職 壯丁이 어느 程度 一段落이 될 거라는 생각이다.“퇴직자 世界에도 롤모델이 必要합니다. 제 境遇도 그랬지만 退職者들에게 가장 絶望的인 게 보고 따라갈 里程標가 없다는 거예요. 退職의 成功 事例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많은 退職者에게 꿈과 希望을 줄 수 있을 텐데, 그게 참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길은 없지만,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그냥 뚜벅뚜벅 가보려 합니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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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靑年學生이 主人公, 第1回 韓日未來學會 開催

    (寺)韓日未來포럼(代表·釐革)은 25日 동국대학교에서 第 1回 韓日未來學會를 열었다. 學會는 日本學 및 韓國學에 關心을 가진 後續世代 養成과 友好 交流를 위해 靑年學生들을 主體로 構成됐다.이날 行事는 6名의 靑年 發表者가 發題를 하고 兩國의 敎授 專門家가 코멘트를 하는 方式으로 進行됐다. 첫 세션에서는 東國大 日本學科 이영식 學生이 ‘韓日 移民者 勞動政策 比較分析 및 示唆點‘에 對해 發表했고 이규용 한국노동연구원 雇傭政策硏究本部腸이 討論을 進行했다. 日本 고베大學院 國際協力硏究과 博士課程 다카오카 미나(高岡聖奈) 學生은 ‘日本 서브컬처로 보는 靑年 文化의 變遷’을 發表했고 간토가쿠人大學校 經營學部 이와사키 다쓰야(岩崎達也) 敎授가 코멘트했다. 이어 東國大 日本學科 이현승 講師가 ‘日本 文化콘텐츠 源泉소스로써의 傳統文化와 當面課題’를 發表하고 상명대 SW融合學部 雁奴 마사히데(阿武正英) 敎授가 討論했다.제 2세션에서는 한양대 大學院 日本言語文化學科 碩士課程 김영채 學生이 ‘日本 서브컬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오타쿠’를 主題로 發表하고 金永悳 前(前) 韓國콘텐츠振興院 副院長이 討論했다. 淑明女大 日本學科 朴民設 學生은 ‘映畫 <한 男子>와 <드라이브 마이 카>가 담고 있는 日本 社會’에 對해 發表했으며 논픽션 記者인 間노 도모코(菅野朋子)가 討論했다. 서울市立大 融合專攻學部 박모세 學生은 “本格的인 AI 大轉換 時代를 準備하는 韓日 兩國의 戰略과 協力可能性, 世界競爭力”에 對해 發表했고 市價현립대 人間文化學部 生活디자인學科 야마다 아유미(山田?) 敎授가 討論者로 參與했다. (寺)韓日未來포럼의 釐革 代表는 “未來志向的 韓日關係의 基盤은 韓日 兩國 靑年의 自由로운 對話와 交流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며 “앞으로도 韓日未來學會가 兩國 後續世代 養成과 交流 活性化를 圖謀하는 討論의 場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서영아 記者 sya@donga.com}

    • 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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