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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勇氣’ 가진 自由인… 活劇 뒤 ‘孔性拂去’ 외치며 退場한 楊正哲[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미움받을 勇氣’ 가진 自由인… 活劇 뒤 ‘孔性拂去’ 외치며 退場한 楊正哲[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15日 14時 00分


코멘트

[22話]

2021년 6월 6일 본보 인터뷰 당시 양정철 전 원장. 동아일보DB
2021年 6月 6日 本報 인터뷰 當時 楊正哲 前 院長. 東亞日報DB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大韓民國이 가야 할 길은, 左도 아니고 于도 아니고 앞으로다. 統合의 政治로 가야 한다. 答은 聯政밖에 없다. 한 10年, 아니 單 5年만이라도 政治的 休戰을 하고 與野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 旗幟下에 協力과 統合의 政治로 가지 않으면 G7 跳躍은 힘들다. 與野가 戀情을 해야 한다. 一時的 協治 實驗이라도 좋다. 안에서 和合하고 바깥 競爭에서 이기려면 그 길밖에 없다.”
-取材 메모 中-
楊正哲 前 民主硏究院長(以下 楊正哲)李 2~3年 前부터 줄곧 强調하는 이야기다. 그의 이 같은 統合論과 聯政論을 처음 들었을 때 意外였다. 率直히 그가 가진 이미지는 强性 이미지였고 論爭的인 이슈의 先鋒에 서서 ‘紅衛兵’으로 불렸으니까.

그 亦是 50代에 들어 30, 40代 때와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 日本과 뉴질랜드, 美國 等 世界를 돌아보며 視野가 바뀐 側面이 있다고 言及한 적이 있다.

“나도 骨髓 運動圈이었는데 靑瓦臺 5年 있으면서 國家 全體를 보는 쪽으로 苦悶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있었고 또 하나가 지난 3年間 流浪을 다니면서 모든 思考와 視角이 바뀌었어. 只今 내 關心은 다음 大統領이 우리 黨이냐, 저 黨이냐, 누가 되냐 關心이 없다. 이젠 大統領 當選이 重要한 게 아니라 大韓民國 發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成功하는 大統領’이 되느냐가 훨씬 重要하다.”
-取材 메모 中-

獨裁政權에 맞서 鬪爭했던 運動圈 出身이라 過去엔 彼我 便 가르기를 하고 旣得權에 憤怒하는 마이너的이면서 人權 感受性이 높은 가슴이 뜨거웠던 靑年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그는 노무현 文在寅 前 大統領의 곁에서 줄곧 ‘惡役’을 도맡아 왔다. 그 탓에 好不好가 엇갈리고 ‘論爭的’인 人物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世上의 誤解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움받을 勇氣’를 지닌 것이다.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證據이자 스스로의 方針에 따라 살고 있다는 證票일세.”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勇氣’ 中-

結局 그는 文在寅 前 大統領을 도와 2017年 文在寅 政府의 一等功臣이 됐다. 하지만 잊혀질 權利와 孔性拂去(功成不居·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 原則, 내 自由도 所重하다며 文在寅 政府 내내 公職을 맡지 않았다.

● 登壇 꿈꾸던 文學少年에서 運動圈 核心으로



楊正哲은 1964年 서울에서 태어나 구로구에 位置한 宇信高等學校를 卒業했다. 글이 좋고 冊이 좋았던 文學少年은 高校 時節에도 文藝서클에서 活動했다.

“내가 初等學校 때 職場에서 밀려난 先親은 어렵게 家族 扶養하느라 移徙를 자주 했다. 自然히 轉學이 잦았다. 親舊 사귈 機會가 적었고 외로움을 冊으로 달랬다. 나중엔 親舊보다 冊이 좋았고 또래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좋았다.”
-楊正哲, ‘世上을 바꾸는 言語’ 中에서 -

가난은 그의 視線을 社會로 向하게 만들었다. 特히 서클 指導敎師였던 童話作家 김진경 先生님으로부터 思想敎育을 받았다. 이에 高校生 楊正哲도 運動圈 大學生들이 보는 이른바 ‘不穩(?) 書籍’들을 그 時節 이미 涉獵했고 社會에 눈을 떴다. (後에 金 先生님은 이를 理由로 解職됐지만 노무현 政府에서 大統領敎育文化祕書官이 됐고 그와 함께 祕書官으로 일하는 奇異한 因緣을 맺게 됐다.)

登壇 作家를 꿈꿨던 그는 國文科에 進學하려 했다. 하지만 形便이 어려웠던 家族의 反對로 韓國외대 法大에 進學했다. 그는 專攻에 關心이 없었고 學報社에 들어가 記者로 活動하는 데 沒入했다. 3學年 때 編輯長을 지냈고 同時에 ‘全國大學新聞記者聯合’(前大氣련) 會長도 맡았다.

그는 漸漸 運動圈 核心에 屬하게 됐다. 1986年 前大氣聯에서 發行한 氣管支가 問題가 돼 指名 手配를 받게 됐고 아예 韓國외대 ‘反美自主化反파쇼民主化祖國統一鬪爭委員會’ 委員長을 맡아 學內 示威를 主導했다. 이와 함께 全國單位 大學 鬪爭組織인 ‘學生鬪爭聯合’ 서울地域 副議長을 맡아 1987年 6月 民主抗爭에서 大學街의 反政府 民主化運動 聯合示威를 主導했다. 1年 넘게 長期 逃避 中에 檢擧돼 그는 結局 國家保安法 違反과 特殊公務執行妨害 等 嫌疑로 拘束 起訴됐다. 實刑을 살았지만 1988年 노태우 當時 大統領이 大規模 赦免·復權을 斷行하면서 受刑 4個月 만에 釋放됐다.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言論社 記者를 해볼 생각도 있었지만 前科도 있는 데다 言論民主化 運動에 對한 믿음이 있어 전국언론노조연맹에서 言論노보 記者로 일을 始作했다. 中央 日刊紙에서 移職 提案도 받았지만 ‘言論勞組를 지켜야 된다’는 使命感에 6年間 일했다.

그러다 結婚을 하면서 大企業으로 자리를 옮겼다. 現實的 理由였다. 나산, 韓寶, 身元그룹과 스카이라이프 等 4곳을 거쳐 次長에서 任員으로까지 昇進했다. 하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젊은 나이에 ‘運動’하다가 갑자기 企業-企業株 代辯하는 일은 마음苦生이 컸다. 言論界에 있는 先輩들에게 부끄럽기도 했다.”
-楊正哲, ‘世上을 바꾸는 言語’ 中에서-

結局 2002年 노무현 候補 大選캠프에 合流했고 引受위를 거쳐 5年 내내 盧 前 大統領을 모셨다.

● 30代 最年少 靑瓦臺 祕書官으로 政治 舞臺 登場
2004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의 양정철 전 원장. 동아일보DB
2004年 靑瓦臺 祕書官 時節의 楊正哲 前 院長. 東亞日報DB

言論人에서 大企業 任職員으로, 靑瓦臺 祕書官으로 變身한 楊正哲은 政治 舞臺의 前面에 섰다. 39歲로 最年少 祕書官으로 高速 昇進했다. 國內言論祕書官과 弘報企劃祕書官을 맡아 政府의 新聞放送 政策을 總括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血氣가 旺盛했고 言論界에선 言論노보 記者 出身인 그를 쉽사리 認定해주지도 않았다.

盧 前 大統領은 言論에 對한 不信이 뿌리 깊었다. “記者室에 몇몇 記者들이 죽치고 앉아 報道 資料를 加工하고 談合한다”며 推進한 ‘取材支援시스템 先進化 方案’은 그 頂點이었다.

言論에 敏感했던 盧 前 大統領이었던 탓에 楊正哲에겐 惡役이 맡겨졌다. 弘報企劃祕書官 時節 동아일보 等 言論의 新行政首都 移轉 關聯 報道에 對해 “詛呪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막말을 했다. 2005年 8月에는 盧 大統領의 大聯政 提案을 拒否한 한나라당 박근혜 前 代表에 對해 “朴 代表의 反應은 責任感, 決斷, 歷史意識, 깊은 省察, 一貫性 等 5가지가 없는 5無(無)”라고 原色的으로 非難해 한나라黨(現 國民의힘)의 反撥을 사기도 했다.

2007年엔 取材支援시스템 先進化 方案을 樹立해 記者室 統廢合을 實行해 全 言論으로부터 ‘言論 彈壓’이라는 批判을 받았다. 事實 그는 先進化 方案에 對해 신중한 立場이었다고 한다. 이를 推進하려면 任期 初에 推進했어야 하고 言論界 內部의 共感과 說得 없이는 實效性도 없을 것이라는 趣旨로 大統領에게 여러 次例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盧 前 大統領이 뜻을 굽히지 않자 主務 祕書官으로서의 責任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前面에 나섰다는 게 周邊 人士들의 傳言이다.

● 盧 지키지 못한 悔恨에… 文 앞세운 政權 交替에 主力
양정철의 ‘세상을 바꾸는 언어’ 저서.
楊正哲의 ‘世上을 바꾸는 言語’ 著書.
노무현 政府 末期 “이게 다 盧武鉉 때문이야”라는 말이 流行할 程度로 國民들의 支持를 받지 못했다. 쓸쓸한 退場이었다. 楊正哲도 參謀로서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罪責感이 들었고 退任 後 烽下마을로 내려간 盧 前 大統領이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

退任 後 어느 날 盧 前 大統領이 楊正哲을 불렀다. 政治에 나서보겠다고 했지만 盧 前 大統領은 뜻밖에도 이를 말리셨다. “政治를 통해 世上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重要한 民主主義的 進步를 이루려면 國民들 생각과 意識을 바꾸고 文化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政治를 하지 말고 좋은 冊을 내자고 提案하셨다.

楊正哲은 두말없이 짐을 싸서 烽下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以後 檢察 搜査를 받던 盧 前 大統領은 2009年 5月 23日 부엉이바위에서 極端的 選擇을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自然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未安해하지 마라. 누구도 怨望하지 마라. 運命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모진 決心을 놓고 煩惱하던 오랜 時間, 그의 孤獨을 가늠조차 못 했다는 罪責感에 楊正哲은 괴로웠다. 그 罪責感을 이겨내고 盧 前 大統領을 再評價할 수 있는 唯一한 길은 政權交替였다.

“盧武鉉의 親舊 문재인이 아니라 文在寅의 親舊 노무현입니다.”
-2002年 11月 노무현 當時 大選 候補가 釜山에서 門 前 大統領을 紹介하며-
盧 前 大統領이 이같이 評價했던 노무현 政府의 마지막 祕書室長, 文在寅 前 大統領을 大統領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課業이 됐다. 政治를 하지 않겠다는 文 前 大統領을 說得했고 2011年 ‘문재인의 運命’ 出刊을 도왔다.

2012年 4月 總選에서 文 前 大統領은 釜山 思想에 出馬해 當選됐지만 楊正哲은 서울 重浪乙에 出師表를 던졌다가 競選에서 박홍근 議員에게 밀려 탈락했다. 文 前 大統領은 民主統合黨 大選 候補가 됐지만 그해 12月 치러진 18代 大選에서 박근혜 前 大統領에게 敗北했다.

● 文在寅 政府의 一等功臣이었지만 大選 뒤 忽然히 떠나

2011년 전국 북콘서트 투어 시절의 양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
2011年 全國 북콘서트 투어 時節의 兩 前 院長과 文 前 大統領.

大選 以後 門 前 大統領을 비롯한 親文(親文在寅) 陣營은 大選 敗北 責任論에 시달렸다. 楊正哲도 그 對象 中 한 名이었다. 그는 이호철 前 民政首席祕書官과 電解鐵 議員 等과 함께 ‘3철’로 불리면서 ‘비선’이라는 따가운 視線을 받았다.

文 前 大統領이 2015年 2·8全黨大會에서 黨 代表로 選出됐지만 野黨은 內訌을 겪으며 混亂이 빚어졌다. 金한길 安哲秀 前 共同代表 等 鼻紋 陣營에선 ‘親盧(親盧武鉉) 霸權主義’로 몰아세웠고 끊임없이 黨을 흔들어댔다는 게 親文 陣營의 視角이었다.

그해 4·29齋·補闕選擧에서 慘敗하면서 代表 責任論은 더욱 심해졌다. 當時 한 最高委員이 傳했던 이야기다.

“再·補選 慘敗 以後 어느 날 非公開 最高委員會에서 ‘楊正哲이 都大體 어떤 ××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뒤에서 다 決定한다고 하냐. 차라리 祕書室長이든 副室長이든 公式的인 職位를 주든지 해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文 代表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取材 메모 中-

거듭된 刷新 要求에 楊正哲도 2015年 12月 이호철 前 民政首席, 尹建永 민형배 金永培 現 議員 等과 함께 20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했다. 거듭된 犧牲 要求이자 文 前 大統領이 平素 强調해온 肉斬骨斷(肉斬骨斷·自身의 살을 베어 내주고, 相對의 뼈를 끊는다는 뜻)이었다.

2016年 結局 안철수 議員이 국민의당을 創黨하면서 門 前 大統領은 黨 代表職에서 물러났다. 民主黨은 김종인 前 代表를 내세워 總選을 치렀다. 그해 6月 文 前 大統領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을 때 楊正哲은 탁현민 前 大統領儀典祕書官과 함께 同行했다.

文 前 代表의 大選 豫備캠프 性格인 ‘廣興倉팀’을 主導하며 大選 準備는 勿論이고 政權 交替 以後 밑그림도 그렸다. 2020年 4月 그가 했던 이야기다.

“政治 經歷이 짧았던 文 大統領에게 核心 側近이랄 수 있는 사람은 나랑 이호철 前 首席 等 單 네 名이었고 그 네 名이 목숨 걸고 大統領 만들기에 올인했다. 甚至於는 大統領에 當選되면 任期 첫날부터 日程도 미리 準備해 둘 程度로 다양한 準備를 했다.”
-取材 메모 中-
楊正哲은 大選 勝利 直後인 2017年 5月 “저의 退場을 끝으로, ‘霸權’이니 ‘親文’ ‘親盧’ 프레임이니 ‘三哲’이니 하는 낡은 言語도 거둬 주시기 바란다”며 “멀리서 그분을 應援하는 여러 市民 中 한 사람으로 그저 조용히 지낼 것”이라며 “잊혀질 權利를 許諾해달라”고 밝혔다. 그 뒤 뉴질랜드로 出國해 日本, 美國 等 流浪에 나섰다.

● 黨 外郭에서 ‘帳幕 뒤 助言者’ 役割 이어가

2016년 히말라야 트레킹 당시 양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의 모습.
2016年 히말라야 트레킹 當時 兩 前 院長과 文 前 大統領의 모습.

그는 7個月 뒤 ‘世上을 바꾸는 言語’ 冊을 내면서 다시 韓國에 돌아왔다. 그를 重用한 盧武鉉 文在寅 前 大統領에게 陳 마음의 빚은 政權交替로 一部 갚게 된 것이다.

“그분이 逝去 며칠 前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은 ‘量비는 먹고살 方道는 있는가?’였다. 죽음을 決心한 분이 一切 내色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瞬間까지 參謀들 걱정을 한 것이다. 이 冊은 ‘깨어 있는 市民으로 이렇게 熱心히 살아가려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분을 向한 나의 安否 人士이기도 하다. 盧 大統領이 부디 그곳에서 便하셨으면 좋겠다.”
-楊正哲, ‘世上을 바꾸는 言語’ 中에서-
주진우 前 記者는 이 冊 推薦辭에서 “楊正哲은 自己를 낮춘다. 周圍를 비춘다. 自己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짠하다. 그리고 찡하다”고 썼다.

그러다 2019年 5月 李海瓚 當時 代表의 强力한 付託을 받고 民主硏究院長으로 電擊 復歸했다. 그는 “民主硏究院이 總選 勝利의 兵站基地 役割을 하도록 하겠다”는 첫 一聲을 냈고, 白元宇 前 議員과 함께 21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하며 公薦에서 물갈이 意志를 드러냈다. 人材 迎入을 맡았고 衛星政黨 論難이 일자 總選 勝利를 위해 比例聯合政黨 參與가 不可避하다며 聯合政黨 參與를 밀어붙였다.

그 結果 민주당은 2020年 21代 總選에서 180席 壓勝을 거뒀다. 勿論 그 以後 열린우리당의 惡夢처럼 立法 獨走 等을 거듭하다가 2年 뒤 政權을 다시 빼앗기게 됐지만 當時로선 前例없는 成果를 낸 것이었다. 總選 直後 그는 寬容과 統合을 외치며 硏究院長職을 던지고 舞臺에서 내려왔다.

文在寅 政府의 마지막 祕書室長 等으로도 擧論됐지만 그는 結局 約束대로 公職을 맡지 않았다. 2021年 美國 戰略國際問題硏究所(CSIS) 客員 先任硏究員을 지내는 等 自由人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민주당과 靑瓦臺 人士들과 接觸하며 助言과 쓴소리를 했다. 2021年 6月 6日 筆者가 했던 인터뷰다.

楊正哲 “與 切迫함 없어…정권 再創出 悲觀的 要素 더 많아”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607/107315901/1

大選을 앞두고 있던 2021年 11月에는 黨內 初選 議員 特講에서 이같이 助言했다.

“스타일리스트型 政治人은 제발 안 되셨으면 하는 懇曲한 付託을 드린다. 하찮은 패션 따위로, 튀는 表現이나 말장난, 突出 行動 等으로, 그저 뜰 수만 있다면 SNS 통해 뭐든 하려는 분들을 많이 본다. 與野의 그런 모습이 政治를 戱畫化시키고 冷笑와 鳥籠을 誘發한다. 各自가 政治的 政策的 信念은 確固히 가져 주시되 行動에서는 팀보다 偉大한 選手는 없다는 原則을 지켜 주셨으면 좋겠다. (中略) 저는 ‘스러짐의 美學’을 아는 사람이 좋은 政治人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卽, 國民과 公共을 위한 獻身과 犧牲 後 어느 때 스스로 消滅되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지 正確히 아는 것이 좋은 政治라 생각한다.”
-取材 메모 中-


● 所聞의 男子… “엇갈리는 評價는 自業自得” 指摘도
野圈 一角에선 그가 結果的으로 尹錫悅 政府의 功臣 役割을 한 것 아니냐는 批判도 나온다. 楊正哲은 2016年 總選을 앞두고 尹錫悅 大統領 迎入을 위해 처음 만나면서 尹 大統領과 적지 않은 親分을 쌓았다. 서울中央地檢長 拔擢이나 檢察總長 任命, 曺國 前 法務部 長官 搜査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當時 與圈에 尹 大統領을 감싸는 等 掩護에 나섰던 것으로 傳해졌다.

文在寅 政府의 킹 메이커였지만 그도 尹錫悅 大統領이 國民의힘 所屬으로 大選에 出馬할 것이라고 豫想하진 못했던 것이다.

所聞이 茂盛하고 論爭的인 人物, 楊正哲에 對한 한 政治權 人事의 評價다.

“楊正哲은 實際로 킹 메이커 役割을 하고 大統領을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實際 企劃力度 認定한다. 다만 그 過程이 透明한 게 아니라 大部分 陰謀的이어서 恒常 帳幕 뒤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陰凶한 이미지가 생긴 거다. 그리고 本人이 또 그걸 즐긴 것 아니냐? 뒤에서 自己가 操縱하고 自己의 힘을 慇懃히 誇示하고 다닌 거다. 그러니까 엇갈리는 評價는 自業自得이지 뭐….”


政府 誕生의 一等功臣이면 어느 자리라도 맡고 싶은 게 人之常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楊正哲 前 民主硏究院長은 事實上 無報酬 名譽職인 싱크탱크 首長만 맡았고 끝까지 原則을 지켰습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次例 도와달라는 要請을 받았지만 자리는 限死코 固辭하고 隱遁을 志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公開席上이나 言論에 登場하지 않을 計劃이라는 게 兩 前 院長 知人들의 傳言입니다. 얼마 前 私席에서 公職은 아니더라도 敎授로 後輩들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다른 적합한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量비는 먹고살 方道는 있는가?’라는 盧 前 大統領의 말처럼 生計는 維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過去 大企業 다니며 모은 돈 等으로 生活하면 足하다고 했습니다.

“배 째드리지요.”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에 對해서도 다시 確認해봤습니다. 2006年 8月 劉震龍 當時 文化관광부 次官이 人事 請託을 들어주지 않자 大統領弘報企劃祕書官이었던 그가 靑瓦臺 行政官을 通해 이 같은 말을 했다고 報道된 적이 있습니다. 當時 記事를 찾아보니 兩 前 院長은 줄곧 事實이 아니라고 解明해왔지만 그의 解明은 저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의 强性 이미지만 덧씌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對해 當時 事情을 正確히 알고 있는 노무현 政府 靑瓦臺 出身 人士들에 따르면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楊正哲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고 누가 들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가 全部인 ‘카더라’였다”며 “當時 訴訟을 해서라도 眞僞를 가렸어야 했는데 當時 民政首席室 挽留로 積極 對應하지 못한 것이 千秋의 恨”이라고 抑鬱해한 것으로 傳해졌습니다.

그가 2018年 펴낸 ‘世上을 바꾸는 言語’ 冊에는 平等, 共存, 配慮 等의 槪念으로 우리 意識을 左右하는 言語의 重要性을 力說하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을 아는 그이기에 誤解는 誤解였나 보다 생각이 듭니다. 必要에 따라 거친 言語를 쓰며 惡役을 맡았지만 알고 보면 부드럽고 文才(文才)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帳幕 뒤에서라도 統合과 협치를 위한 政治權을 만들어가는 데 寄與해주길 바랍니다.

다음 法廷冒瀆 [23話]는 與黨의 ‘一타講師’ 長官님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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