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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형준|記者 購讀|東亞日報
황형준

황형준 記者

동아일보 社會部

購讀 368

推薦

2007年 入社해 社會部, 經濟部, 政治部를 거치며 警察, 企劃財政部, 政黨, 法曹, 靑瓦臺 等을 取材했습니다. 政治와 法, 權力構造 그리고 사람 等에 關心이 많습니다.

取材分野

2024-03-21~2024-04-20
政治一般 30%
칼럼 17%
正當 17%
人物 13%
檢察-法院判決 13%
社說/칼럼 7%
大統領 3%
  • “10年 臥薪嘗膽은 鍛鍊의 時間”… 弱者 同行 외치는 ‘勝負師 吳世勳’[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본격적으로 工夫한 지 3年 만에 司法試驗을 通過했다. 環境 專門 辯護士에서 TV 放送 進行者로, 國會議員으로 變身한 뒤 45歲 最年少 서울市長이라는 記錄을 達成했다. 30, 40代에 一種의 퀀텀 점프를 한 것이었다. 훤칠한 키에 貴公子 같은, 好感 가는 外貌로 特히 女心을 사로잡았다. 出世 街道를 달리며 萬人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成功한 人生’이었다. 吳世勳 서울市長(以下 吳世勳)의 政治 人生만 놓고 보면 2000年부터 2010年까지 ‘前半戰’엔 乘勝長驅했다. 그러나 ‘後半戰’이 始作된 2011年부터 2021年까진 挫折이 이어졌다. 겨울은 길었다. 한 番 KO敗 해도 打擊이 큰 데 세 番의 選擧에서 떨어졌다. 서울 鍾路, 서울 廣津乙 國會議員 選擧와 黨 代表 選擧에서 잇따라 敗北한 것이다. 周邊에 이른바 ‘側近’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始作했다. 그도 한番쯤은 花鬪 用語인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그래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남들은 안 될 거라고 했지만 2021年 10年 만에 다시 서울市長 補闕選擧에 挑戰해 3線 서울市長이 됐고 이듬해 地方選擧에서 4線 서울市長이 됐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政治 空白 10年 동안 臥薪嘗膽(臥薪嘗膽)하며 再跳躍을 위해 工夫했고 反省했고 스스로를 鍛鍊했다. 그 10年이 決코 ‘잃어버린 10年’이 아니었다. 自身을 담금질하는 時間이었다. “제 政治的인 運命에 對해서 어떤 確信 같은 게 있는 便이었다. 그래서 選擧에 떨어져도 그렇게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이건 어느 目標를 向해 가는 過程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또 工夫했네’, ‘나를 다듬는, 나를 鍛鍊하는 訓鍊하는 期間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10年 동안 뭐가 第一 힘들었냐는 質問을 받으면 나는 한 番도 힘들었다고 答辯한 적이 없다. 나는 繼續 充滿한 生活을 했기 때문이다. 甚至於 鍾路 選擧에서 떨어지는 날, 廣津乙에서 떨어지는 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取材 메모 中 -그는 只今 延長戰을 뛰고 있다. 前半戰에서의 得點과 後半戰에서의 失點을 넘어 이제 延長戰에서 마지막 勝負를 기다리고 있다.● “工夫해야 가난 이겨낼 수 있다” 敎育熱 높았던 어머니 吳世勳은 1961年 1月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中小建設會社를 다녔고 아버지 月給만으로 不足했기에 어머니는 方席과 베갯잇 等을 만드는 手藝店을 하셨다. 아버지 月給이 몇 달씩 遲滯돼서 며칠 라면이나 싸라기 밥만 먹으며 지낸 적도 있고 姨母님 宅에 돈 꾸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아준 택시에서 내려 걸어온 적도 있었다. 택시費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늘 “세훈아, 工夫해야 이 가난을 이긴다”고 强調했다. 어머니는 初等學校 4學年 때 先生님으로부터 “세훈이가 몸이 弱하니 特別히 神經을 쓰시라”는 말을 듣고 1年 내내 된醬찌개와 밥을 담은 錚盤을 褓따리에 싸서 學校까지 갖다줄 程度로 아들을 챙겼다. 어머니의 敎育熱 德分인지 그는 初等學校(當時 國民學校) 때부터 工夫를 잘했고 6年 내내 班長을 놓치지 않았다. 學窓 時節 그의 別名은 日本語로 젓가락인 ‘와리바시’, 키가 커서 冊床에 엎드려 잘 때 새우처럼 등이 굽어진다는 意味의 ‘잠새우’ 等이었다. 高校 時節 그의 키는 180cm에 55kg으로 마른 體軀였다.1979년 한국외대에 入學했다가 2學年 때 고려대 法大에 編入學했다. 이 過程엔 當時 고려대 文科大를 다니고 있던 夫人 송현옥 세종대 映畫藝術學科 敎授의 影響이 컸다. 宋 敎授의 오빠인 송상호 경희대 經營大學院 敎授가 디스크로 學校를 1年 쉰 뒤 吳世勳과 같은 班이 되면서 세 사람은 高2 때 함께 課外를 하게 됐다. 課外는 今方 깨졌지만 두 사람은 高3 때 入試學院에서 다시 만났고 以後 고려대에서 有名 커플이 됐다. 吳世勳은 아내가 市場에서 국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이 程度라면 이 親舊와 結婚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가 考試 工夫를 하게 된 契機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會社의 會長님은 어머니의 姨母夫였다. 選對 會長이 돌아가신 뒤 그에게 外五寸 堂叔이 되는 그 아들이 會長이 됐는데 大學生 때 집안 어른들끼리 對話를 나누는 것을 듣고 熱心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考試 工夫를 始作했다고 한다.“어느 날 집안의 어른들끼리 對話를 나누는 것을 듣던 中 아버님이 會社에서 손아래 동생뻘인 會長님께 깍듯하게 例를 갖추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只今 생각하면 當然할 것 같은 그 말이 當時에는 왜 그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絶對로 샐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考試 工夫를 始作했다.” -오세훈, ‘가끔은 辯護士도 울고 싶다’, 1995年-그는 考試生 時節에 하루 14時間 앉아 끈氣 있게 工夫를 했다. 大學院 1年 때 1次 試驗을 붙었고 2次 試驗은 같은 해 바로 붙었다. 時間 끌면 패스를 못 한다는 생각으로 熱心히 工夫했다. 1984年 第26回 司法試驗에 合格한 것.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에 엉덩이에 난 腫氣가 甚해져 2時間 넘게 手術을 받기도 했고 只今도 흉터가 남게 됐다. 吳世勳은 司法試驗에 붙은 直後인 1985年 結婚했다.연수원을 卒業한 뒤 辯護士 生活을 하며 環境 分野에 눈을 떴다. 1993年 仁川 부평구의 한 아파트 住民들이 日照權 問題로 大企業과 訴訟을 準備한다고 찾아왔다. 日照權에 對한 判例가 없어 스스로 日本 等 海外 判例를 손수 飜譯해 裁判部에 提出했다. 結局 裁判部는 大企業에 賠償金을 支給하라고 判決했고 이 事件은 大韓民國 最初로 憲法上 日照權을 環境權으로 認定받은 判例가 됐다. 이 過程에서 環境運動聯合(當時 公害追放運動聯合)을 알게 됐고 市民相談室長과 法律委員長 兼 常任執行委員을 지내며 環境辯護士로 活躍했다.“환경운동연합을 갔는데 衝擊을 받았다. 나는 初任 辯護士라도 먹고살 만했는데 環境運動聯合의 젊은 活動家들이라는 게 大部分 20代인데, 그때 會社員들이 받는 月給의 한 半이나 3分의 1을 活動費라는 名目으로 받고 事實上 自願奉仕를 했다. 그런 市民團體 活動을 報告書 ‘이 사람들이 이렇게 自己 젊은 時節을 犧牲하면서 熱情的으로 하는구나’ 感動을 해서 그 사람들을 돕기 始作한 것이다. 하다 보니 運動家들과 親해지게 되고 熱心히 돕다 보니 여러 職責을 맡게 됐다.” - 取材 메모 中 -● TV 프로그램 進行者로 人氣 누리다 政治權 進出그는 以後 MBC의 法律相談 프로그램인 ‘吳辯護士, 배辯護士’를 進行하면서 人氣를 누렸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等 各種 時事 프로그램의 進行도 맡았다. 正裝 等 TV 廣告모델이 돼 달라는 要請도 들어왔다. 認知度가 높아지자 政治權에서 ‘콜’을 받았다. 그도 “社會에 寄與하기 위해 現實政治에 參與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當時 김대중 大統領의 迎入 提案도 받았지만 그는 이회창 總裁의 提案을 受容해 한나라당에 入黨하며 保守 政治의 길을 選擇했다. 基本的으로 國家는 人間의 自律과 動機附與를 重視하는 政策 原理로 運營돼야 한다는 信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定義하는 保守는 이렇다. “報酬는 ‘물’ 같은 것이다. 每日 아침 일어나 마시는 물 한 盞에 특별한 感興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保守는 겉보기에 대단한 理念이나 以上이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속을 仔細히 들여다보면 個人의 挑戰과 國家의 發展을 可能하게 한 根本理念인 自由와 競爭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中略) 保守 右派는 歷史의 底流임과 同時에 現實이다.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失手가 적어 施行錯誤를 最少化할 수 있고 實用的이다.” - 吳世勳, ‘未來’, 2019年 -反面 進步는 톡 쏘는 시원함과 淸凉感이 있는 ‘사이다’였다. 變化와 革新을 追求하기에 가슴 뛰고 재미있고 興味津津하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失手가 잦고 挫折과 誤謬가 頻繁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2000年 16代 總選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入黨한 그는 서울 江南乙 地域區에서 當選됐다. 黨 副代辯人, 靑年委員長, 이회창 大選 候補의 祕書室 副室長을 맡는 等 黨 初選으로서 比重 있는 役割을 했다. 自身의 關心 및 專門 分野인 國會 環境勞動委員會에서 活動했다.● 少壯派로 活動하며 不出馬 宣言… 政治改革法案人 ‘吳世勳法’ 主導國會議員이 됐지만 그는 至毒한 마음苦生을 했다. 힘없는 政治 初年生에게 隨時로 주어지는 役割이 ‘小銃手’ 驛이기 때문이다. 그는 相對 黨 所屬 國會 副議長의 날치기 法案 通過를 막기 위해 自宅 앞에 動員됐을 때 限없이 부끄러웠다고 한다.중학교 2學年이던 둘째 딸이 先生님으로부터 “政治人은 모두 쓸어서 韓江에 처넣어야 할 族屬들”이라는 말을 듣고 제 房에 와서 틀어박혀 울었던 일도 있었다. 딸이 아빠를 猖披해한다는 게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以後 그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시인 폴 발레리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切迫함이 내게 또 다른 勇氣를 불러일으켰다. 當時 나를 支配하던 가장 큰 생각은, 1人 보스를 中心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牌거리 政治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1人 보스 中心의 政治가 地域主義의 深化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또 그 集團을 維持하기 위한 莫大한 資金 所要가 政治 腐敗를 낳는 原因이 되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先決課題는 政治資金 시스템의 革命的 變化라는 確信이 섰다.” - 吳世勳, ‘시프트 : 생각의 프레임을 轉換하라’, 2009年 中 - 이에 吳世勳은 黨內 整風運動에 앞장섰다. 2003年 少壯派였던 南景弼 원희룡 議員 等이 함께한 ‘未來連帶’ 代表를 맡아 ‘5, 6共 勢力 勇退論’을 主張했다. 以後 2004年 1月 그는 부끄러움과 政治改革 外侵에 對한 責任을 擧論하며 總選 不出馬를 宣言했다. 黨 改革을 외쳐도 空虛한 메아리에 그치는 데 挫折했던 그가 “내가 던져야겠구나”라는 생각에 劇藥處方을 한 것이었다.“지난 4年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먼저 政治 現實에 精通하지 못하면서 政治를 바꿔보겠다고 덤벼든 無謀함이 부끄럽고, 잘못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默認한 武力함이 부끄럽고, 默認을 넘어서서 어느 사이 同化되어 간 無感覺함이 부끄럽고, 未熟한 自己 確信을 眞理인 양 錯覺한 無知함이 부끄럽고, 世界觀이 다르다는 理由로 內心 無視하고 排斥한 偏狹함이 부끄러우며, 그리고 이렇게 부끄러운 自身의 입으로 歷史에 功過가 있음을 애써 無視하고 先輩들께 敢히 勇退를 要求한 그 勇敢함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흔들리는 나라를 살리려면 政治를 바로 세워야 하고, 政治를 바꾸려면 多數黨인 한나라당이 바뀌어야 하고, 한나라당을 바꾸려면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는 躁急症 때문이었음을 理解하여 주십시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제 自身이 그에 對한 責任을 져야 할 것이며, 조그마한 旣得權이라도 이를 버리는 데에서 政治改革이 始作된다고 主張했던 대로 이제 實行하려 합니다. 그러한 苦悶의 産物이 지난番 地區黨委員長職 辭退에 이은 이番 不出馬이며, 이것이 政治權의 새로운 變化를 바라는 國民의 期待를 충족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 2004年 1月 吳世勳의 不出馬 宣言文 中 -‘不出馬 勝負手’는 오히려 轉禍爲福이 됐다. 吳世勳의 支持者 2萬餘 名은 인터넷을 통해 ‘吳世勳을 사랑하는 모임’을 結成해 ‘午風(吳風)을 일으키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기 始作했다.또 그는 政治改革特別委員會 政治資金法小委員長을 맡아 企業의 政治資金 寄附 禁止, 國會議員 1年 後援金 1億5000萬 원(選擧가 있는 해는 3億 원) 制限, 地區黨 廢止 等 法 改正을 主導했다. 2002年 大選을 앞두고 與野가 數百億 원의 大選資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非難 輿論이 거세게 일었던 德分이다. 그의 政治改革法案은 그대로 反映이 됐고 나중에 一名 ‘吳世勳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國民들에게 그의 이름을 刻印시킨 첫 番째 瞬間이었다. 以後 그는 다시 辯護士로 돌아갔다. 같은 해 6月 江原 속초시에서 열린 2004설악國際트라이애슬론大會(鐵人3種競技)에 出戰해 이를 完走하며 剛한 體力과 精神力을 誇示하기도 했다.휴지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年 地方選擧에서 서울市長 候補로 나서며 다시 政治權으로 돌아온 것이다. 競選 過程에서 그는 홍준표 맹형규 等 候補와 競爭했지만 壓倒的인 差異로 勝利했다. 洪準杓 大邱市長은 當時 그를 向해 “黨이 어려울 때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혼자 이미지만 가꾸고 다녔다”고 批判하기도 했다. 黨 候補로 選出된 그의 選擧캠프는 過去 選擧캠프와 달리 壁(파티션), 돈, 종이컵 等이 없는 3無(無) 캠프로 注目을 받았다. 캠프 部署 間 境界를 허물어 疏通하고, 政治改革을 앞세운 그의 깨끗한 이미지를 위해 選擧費用을 줄이고, 環境保護를 위해 종이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結局 열린우리당 강금실 候補 等과 붙어 勝利했고 最年少 民選 서울市長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 디자인에, 福祉에, 環境에 ‘미친’ 市長님吳世勳은 市場으로서 신명 나게 일했다. 디자인, 環境, 福祉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0年 世界 디자인 首都에 選定되며 서울을 ‘디자인 中心都市’로 만들며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했다. 서울市廳 廳舍 新築을 果敢히 推進했고 露店商 等을 說得해 동대문야구장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變身시켰다. 盤浦大橋 隣近 세빛섬과 頒布 分數 等 漢江 造景도 바꾸며 行政家로서의 面貌를 보여줬다. 特히 그는 人生의 轉換 機會를 주는 것이 眞正한 福祉라는 생각에서 ‘露宿人 希望의 人文學 코스’를 만들었다. “十 年 前에 人文學 講義로 人生 바뀐 사람이 많다. 얼마 前에 警備員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10年 前에 그 希望의 人文學 코스를 2年을 들었다더라. 그래서 人生이 달라졌다고 했다. 露宿人들이 重要한 건 알코올中毒 때문에 안 바뀌는 境遇가 많은데 그런 敎育을 받음으로써 알코올中毒을 벗어날 수 있는 意志가 생긴다.” - 取材 메모 中 -이와 함께 그는 創意行政과 女性이 幸福한 都市 프로젝트인 一名 ‘旅行(女幸) 프로젝트’를 導入해 ‘UN 公共行政上’을 2回 連續 受賞했다. 直接 市民인 척 民願室에 電話를 걸어본 뒤 느낀 不便함을 解消하기 위해 ‘茶山 120콜센터’로 行政 問議 案內를 統合한 서비스를 정착시켰다. 長期傳貰住宅인 ‘시프트’도 정착시켰다.오세훈의 業務 스타일에 對한 前職 서울市 公務員의 이야기다. “꼼꼼하게 直接 챙기고 每日 아침 會議를 통해서 點檢하고 또 問題가 있으면 바로바로 解決하려고 한다. 報告를 하면 바로 피드백을 주고 狀況 把握과 業務 掌握力, 問題 解決 能力이 뛰어났다. 業務 理解度가 높고 시스템을 掌握하고 있으니 公務員들은 늘 勞心焦思하고 坐不安席이다. ‘無寬容’, ‘盧 머시(no mercy)’ 스타일이어서 매몰차게 面前에서 斷罪하는 스타일” - 取材 메모 中 -2010年 再選에서 成功했지만 2011年 危機가 찾아왔다. 當時 與野는 段階的 無償給食이냐 全面的 無償給食이냐를 놓고 尖銳하게 對立했는데 오세훈이 住民投票로 이를 決定하자고 提案한 것이다. 그해 8月 及其也 吳世勳은 政治的 生命을 걸고 投票率이 33.3%에 未達하면 市長職을 辭退하겠다는 意思까지 公式 發表했다. 突破를 위한 勝負手였지만 結局 自充手로 돌아왔다. 投票率은 25.7%에 그쳤고 그는 結局 市長職에서 물러났다.● 英國·中國 硏修, KOICA 諮問團 等으로 活動하며 10年 臥薪嘗膽이때부터 吳世勳은 酷毒한 後半戰에 突入한다. 市長職을 건 決定은 黨 指導部의 同意 없이 進行해 黨內에선 保守 陣營의 潰滅을 自招했다는 責任論이 提起됐다. 그해 10月 치러진 補闕選擧에선 서울市長 자리를 朴元淳 市長에게 내줬다. 그는 이듬해 5月 英國 킹스칼리지 公共政策大學院 硏究員 資格으로 留學길에 올라 福祉政策에 對해 工夫하고, 中國 상하이(上海)로 넘어가선 語學 工夫를 했다. 2012年 12月 大選 直前 歸國했지만 좀처럼 言論에 登場하지 않았다. 一種의 自肅의 時間을 보낸 것이다. 漢陽大 公共政策大學院 特任敎授와 法務法人 大陸亞主義 顧問辯護士 等을 지내던 그는 2013年 12月부터 2015年 1月까지 韓國國際協力團(KOICA) 中·短期 諮問團의 一員으로 中南美 페루에서 6個月,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6個月을 보냈다. 修道僧같이 지내던 외로운 時間이었다. 그는 每日 혼자 밥을 해 먹었다. 每日 視聽에 出勤해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助言할 게 있으면 助言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아프리카 等 現地에 있다고 率直하게 얘기를 못 했다. 懶怠해지지 않기 위해 골프場은 勿論 술집 한 番 가지 않았다. 日記를 쓰며 現地에서 느낀 걸 冊으로 出刊했다. 自身과 마주하는 時間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다 거머리에게 물려 結局 발목을 자르는 事例를 보고 신발 普及 活動도 펼쳤다. 오세훈이 事實上 政界에 復歸한 건 2016年 20代 總選이다. 總選을 앞두고 黨 指導部로부터 險地 出馬 要請을 받았지만 그는 서울 鍾路 出馬를 固執했다. 鍾路 地域區에서 3選을 했던 朴振 現 外交部 長官과 競選 끝에 本選에 進出했지만 민주당 所屬 정세균 前 國務總理에게 敗北했다. ‘政治 1番地’에서 當選된 뒤 大選 候補로 浮上하려는 ‘華麗한 復歸’는 失敗로 끝났다.이후 2019年 黨 代表 選擧에서 黃敎安 前 代表에게 敗北했고 2020年 21代 總選에서 서울 廣津乙에 出馬했다가 高旼廷 議員에게 苦杯를 마셨다. 2021年 서울市長 補闕選擧에 出馬할 무렵엔 그의 周邊에 사람이 없었다. 캠프 代辯人을 시킬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廣津乙 選擧에서 떨어지자 ‘再起 不能’에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도 밉거나 섭섭하지 않았고 理解가 됐다고 한다. 그는 2021年 再·補闕 選擧 初盤 史上 初有의 ‘條件附 不出馬’를 宣言했다. 안철수 議員이 國民의힘에 入黨하면 市場에 出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當時 政治權에선 奇異한 行步라는 批判이 나왔다. 無償給食 住民投票 自進 辭退와 겹치면서 當時 與圈 안팎에선 “吳世勳度 이제 政治生命 끝난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難關 끝에 그는 이를 突破했고 當選됐다. 後半戰 10年이 그를 가장 서글프게 한 건 달라진 世上의 人心을 보는 것이었다.“2021년 選擧에서 4位로 出發했을 때 나는 속으로 當選된다는 確信이 있는데 世上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競選에서 羅卿瑗 候補를 이기고 나니까 그때는 이제 일할 사람들이 캠프에 찾아오기 始作했다. 안철수 議員과 單一化에 成功하니까 이제 正말 못보던 사람들까지 全部 캠프에 와 가지고 ‘자리를 달라’고 亂離 치고 싸우기 始作했다. 그 10年은 宏壯히 큰 人生 工夫가 됐다.” - 取材 메모 中 -● 서울市長 5善이냐, 大選 挑戰이냐…오세훈의 길은? 그렇게 吳世勳은 10年 만에 다시 서울市長 자리로 돌아왔고 尹錫悅 政府가 出帆한 뒤 치러진 2022年 地方選擧에서 4線에 成功했다. 그는 ‘弱者와의 同行’이라는 是正哲學을 통해 安心所得, 安心住宅, 서울런(Learn) 等 福祉政策을 推進하고 있다. 漢江 首相버스 導入, 上巖洞 하늘公園 大觀覽車, 서울 高度 制限 緩和 等 다양한 政策도 推進 中이다.그는 10年 동안 끊어진 서울市 政策을 보면서 無償給食 住民投票에 職을 건 것을 많이 後悔했다고 한다. 土建(土木建設) 爲主 政策을 反對했던 朴元淳 前 市長 時節 基盤施設에 對한 投資家 멈춰 있었고 自身의 在任 時節 推進했던 政策이 中斷됐기 때문이었다. 特히 最近 日本 도쿄를 다녀온 뒤 後悔를 많이 했다고 한다. 지난 10年 동안 日本은 도쿄 올림픽을 準備하면서 디자인과 基盤施設을 準備했고 綠地空間 等 都市計劃을 새로 하면서 市民들에게 아름답고 便利하게 空間이 再編된 反面 서울은 멈춰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서울 올림픽 誘致를 내세운 理由이기도 하다.“내가 할 말을 잃었다. 이番에 眞짜 뼈저리게 내가 지난 10年 동안, 政治를 그만둔 때에도 勿論 瞬間瞬間 後悔하고 反省하고 할 때가 있었지만 이番만큼 내가 切實하게 쇼크를 받은 적이 없어요.” - 取材 메모 中 -自身이 推進했던 政策이 中斷된 것을 본 그는 2026年 市場 5線 挑戰과 2027年 大選 出馬에 對해 “只今 마음은 半半”이라고 했다. 自身이 推進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市長職을 繼續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서다.대선 走者로서 그는 如前히 組織과 勢力이 弱하다거나, 이미지 政治를 한다거나 ‘선당후사’가 아닌 船社後唐의 政治를 하며 개인플레이를 해왔다는 批判을 받아 왔다. 旣成 政治人답지 않다는 意味도 담겨 있다. 過去의 吳世勳은 이런 批判을 內心 無視하며 ‘일만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깨끗한 政治가 그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酷寒期 10年을 보낸 只今의 吳世勳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런 批判을 受容하고 民心을 얻기 위해 努力하고 있다고 했다. 各各 成功과 失敗의 原因이 됐던 그의 勝負師的 氣質이 어떻게 發揮될지 지켜볼 일이다. 勝負處는 結局 서울施政의 成果物이 될 것이다. 吳世勳 市長의 核心 目標인 ‘弱者와의 同行’이 吳 市長의 ‘웰빙 辯護士’ 이미지와 庶民的이지 않은 느낌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指摘이 있다고 그에게 돌直球를 던졌습니다. 아마 吳 市長 삶의 軌跡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고 이를 稀釋시키기 위해 오히려 同行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담긴 批判이지요.그러자 그는 “政治人의 말이나 이미지를 보지 말고 行跡과 발자취를 봐달라”며 “10年 前에도 서울型 그물網 福祉를 推進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自身이 서울市長 初再選 時節부터 一貫되게 福祉에 焦點을 맞춘 다양한 政策을 推進해 왔다는 겁니다.오 市場의 冊들을 豫想보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서울市民人 저 自身도 吳 市長이 남긴 成果에 對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率直담백하고 指導者로서의 所信과 一貫性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延長戰’에선 그의 哲學과 眞心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呼訴力있게 傳達되길, 멋진 勝負를 겨룰 수 있게 되기를 期待해 보겠습니다. 올 1月부터 連載하기 始作한 시리즈는 이番 25火로 끝을 맺습니다. 政治의 司法化와 司法의 政治化가 이뤄지고 있는 現實에 對한 苦悶도 있었고, 또 政治가 우리 삶에 얼마나 重要한지를, 그래서 政治를 嫌惡의 對象으로 置簿해선 안 된다는 생각과 그래서 各各 政治人들의 魅力을 알리고 應援하고 싶었던 筆者의 속마음이 담겼습니다. 그동안 愛讀과 應援해 주셔서 感謝합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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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황형준]검찰수사가 불러온 政治改革… 政治權은 부끄러워해야

    政治權에선 過去 大選이나 總選 때마다 돈이 大量으로 撒布되는 境遇가 많았다. ‘눈먼 돈’李 그나마 줄어들기 始作한 건 2003年 大選 資金 搜査 以後였다. 當時 檢察 搜査에선 2002年 大選 直前 이회창 候補 側에서 ‘車떼기’ 等의 方式으로 823億 원의 不法 選擧資金을 받은 事實이 드러났다. 以後 한나라당(現 國民의힘)은 ‘車떼기 黨’이란 汚名을 얻었고 國民들에게 謝罪하며 黨舍를 팔고 天幕黨舍로 옮겨야 했다. 민주당에서도 不法 大選資金 113億 원을 받은 事實이 드러나 盧武鉉 前 大統領 側近들이 拘束되거나 裁判에 넘겨졌다. 以後 國民들의 따가운 視線 때문에 政治資金法이 改正돼 企業이 法的으로 政黨에 寄附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後援金은 個人만 낼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檢察이 이끈 政治改革이었다. 當時 搜査팀엔 尹錫悅 大統領과 한동훈 法務部 長官, 이원석 檢察總長 等이 있었다. 2012年에는 한나라당 고승덕 前 議員이 2008年 當時 全黨大會에 出馬했던 박희태 前 國會議長으로부터 300萬 원이 든 돈封套를 받은 事實을 暴露해 政治權이 발칵 뒤집혔다. 돈封套를 받은 사람은 高 前 議員뿐이 아니었을 可能性이 높지만 客觀的 證據가 不足했다. 돈을 받은 人士들이 스스로 自白할 理도 없는 만큼 어려운 搜査였다. 檢察은 朴 前 議長과 全黨大會 캠프 狀況室長으로 돈封套 傳達에 關與한 김효재 前 大統領政務首席祕書官을 調査한 뒤 裁判에 넘겼다. 두 사람 모두 現職에 있어 政權 外壓도 적지 않았지만 搜査를 貫徹시킨 것이다. 그 代身 朴 前 議長이 高齡인 데다 3部 要因이고, 議長職 辭退 意思를 밝힌 點 等을 考慮해 不拘束 起訴했다. 結局 朴 前 議長은 懲役 8個月에 執行猶豫 2年, 金 前 首席은 懲役 6個月에 執行猶豫 1年을 確定받았다. 이듬해 與野는 政黨法을 고쳐 全黨大會 때 觀光버스 費用이나 食事費를 中央黨에서 提供하게 했다. 政治的 現實에 맞게 法을 바꾼 것이다. 當時 與圈은 ‘慣行’이라는 點을 强調하며 두 사람을 掩護했고 結局 모두 特別赦免을 받았다. 그로부터 11年 만에 다시 더불어民主黨 全黨大會 돈封套 疑惑이 불거졌다. 類似 事件이 再演된 것은 當時 制度 改善이 未盡했거나 方向이 잘못됐다는 얘기다. 어쩌면 ‘솜방망이’ 處罰 때문일 수도 있다. 이番 事件도 서울中央地檢 反腐敗搜査2部(部長檢事 김영철)가 李炡根 前 民主黨 事務副總長의 錄音파일을 確保하지 못했다면 水面 위로 드러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當事者들은 嫌疑를 全面 否認하고 있지만 錄音파일에 드러난 內容을 보면 이들의 抑鬱함을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監視가 느슨해지면 爲政者들은 警覺心을 잃고 逸脫하게 마련이다. 그 被害는 고스란히 國民들에게 돌아온다. 이를 監視할 檢察의 役割이 重要한 理由다. 只今도 陰地에선 進化된 方式으로 不法 資金이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自體 改革을 못 하는 건 政治權이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與野는 이番 事件을 契機로 政治改革 方案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곪은 傷處는 完全히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황형준 社會部 次長 constant25@donga.com}

    • 202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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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펙은 非人間的이지만… ‘告示3冠王’ 金寬永 支社의 大學 時節 別名은 ‘스트립’[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學窓時節에 꼭 그런 親舊가 있다. 노는 것도 잘 놀면서 工夫도 잘한다. 競爭者를 의식해 工夫 안 한 隻 안심시키고 몰래 工夫하는 ‘No 再修’도 아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지 化粧室에서 몰래 초코파이를 까먹는 ‘二等兵’도 아니었을 것이다. 班長은 高3 때 1番 맡았지만 娛樂部長은 늘 맡았다. 누구나에게나 眞心으로 對해 주기 때문에 與野를 떠나 敵(敵)이 없다. 親和力이 있고 무엇보다 疏脫하고 人間的이다. 最年少 公認會計士試驗 合格을 包含해 行政考試, 司法試驗 等 考試3冠王 스펙(spec)李 非人間的일 뿐….金寬永 全北道知事(以下 金寬永)는 늘 웃는 賞이다. 失敗를 겪어도 自信感이 있다. 아무리 秀才與도 하나도 通過하기 어려운 考試를 3個나 패스한 經驗이 그의 資産인 것이다. 2011年 펴낸 冊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題目도 自信感이 넘친다. 누구든 幸福 바이러스로 즐겁게 해줄 自身이 있다는 거 아닌가.● 6男 中 5男…‘리어카에서 태어날 뻔했던 아이’“참말이지, 官營이 너는 리어카에서 나오는 줄 알았어야.” 1969年 全北 군산시 學堂群(當時 地名은 沃溝郡 회현면 학당리)에서 6男 中 5男으로 태어난 金寬永은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菜蔬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算筒을 느끼고 歸家하던 中 陣痛이 始作됐다. 버스 停留場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要請해 리어카에 실려 집에 온 뒤 無事히 自宅에서 그를 出産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農事일을 했고 市場에서 소매로 菜蔬 等을 팔았다.김관영도 어릴 때부터 農事일을 거들었다. 오이 심고 農藥 주고 가지 심고, 배추 다듬고, 마늘 심고 生薑 심고… 一 年 내내 農事는 이어졌다. 아버지는 工夫를 하기 싫으면 나랑 같이 農事짓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農事는 너무 힘들고 利文이 別로 남지 않는 일이라 그 말이 무서웠다고 한다. 아들만 6名인 兄弟들은 勇敢했다. 싸움을 하건 農事일을 하건 團結 하나는 끝내줬다고 한다. 兄들은 동생들이 工夫할 수 있게 도와줬고 犧牲했다. 兄弟들 사이에서 政治와 社會를 배웠다. 金寬永이 天才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兄들로부터 “야, 우리 집에 너같이 工夫 못한 사람은 없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中學校 3學年 때부터 熱心히 해서 240名 中 3等으로 卒業했다. 群山제일고에도 全校 18等 程度로 入學했지만 漸漸 工夫에 재미를 붙였다. 大入 學力考査를 豫想보다 잘 못 보았지만 아버지는 財數는 絶對 안 된다고 했다. 큰兄의 助言으로 理科에서 文科로 바꿔 성균관대 經營學科에 入學했다.1987년 大學校 1學年 때 熱心히 데모에 參席하며 火焰甁을 던지는 等 ‘熱血靑年’으로 지냈다. 6月 民主抗爭으로 6·29宣言이 이어지자 큰兄은 여름에 “시골 父母님 생각하고 네 自身도 생각하면서 工夫를 좀 해라”라며 商業簿記 學院 受講證을 끊어줬다. 2學期부터 成均館大 考試班에 들어가 會計士 試驗을 準備했다. 그는 經濟學 等을 工夫하며 재미를 느꼈다. 다음 해 4月 치러진 1次 試驗에서 客觀式 問題가 宏壯히 쉽게 나왔다. 1次 合格者 發表가 6月이고 8月 2次 試驗 豫定이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1次 試驗 準備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合格했고 11月 最終合格者 發表에서 230名 中 自身의 이름을 發見했다. 成大 考試班에서 2學年이 合格한 것도 처음인 데다, 學校를 일찍 들어간 金寬永은 滿 18歲 最年少 合格者로 紹介됐다. 그는 이 過程에서 “試驗場에서는 끝까지 最善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試驗 準備할 때 나는 無條件 된다고 생각하고 工夫를 해야 한다”는 敎訓을 얻었다고 한다.● 非人間的 스펙…金寬永의 工夫法“工夫와 關聯된 一般 原則 中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集中力’을 높이는 것이다. 工夫를 잘하고 못하고의 差異는 結局 集中力의 差異다. 集中力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動機 附與’가 重要하다. 가난과 逆境에도 挫折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挑戰의 機會로 삼는다는 精神, ‘헝그리 精神’ 같은 것이다. 集中力 다음으로 重要한 것은 實踐力을 기르는 것이다. 實踐力은 ‘成功하는 習慣’을 들이는 것이다. (中略) 내가 開發한 나만의 學習法은 ‘나만의 冊’ 만들기이다. 요즘은 이런 式의 學習法을 ‘單權化’ 作業, ‘誤答 노트’ 만들기라고 하면서 奬勵하는 것을 보면, 그 效果가 檢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金寬永,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中에서 在學 中에 會計士 試驗에 合格한 金寬永은 指導敎授로부터 行政考試를 準備하라는 助言을 받고 다시 行政考試班에 들어갔다. 다시 한番 最年少 合格을 하겠다는 欲心이 있었지만 1次에서 2番 떨어졌다. 3年 9個月 동안 考試班에 있으면서 結局 1992年 10月 合格했다.대학이랑 大學院을 다닐 때 課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考試 工夫를 했다. 敎師를 꿈꾸던 아내를 만나서 內助를 받았고 1995年 4月 會計將校로 入隊하기 前에 結婚式을 올렸다. 元來 司法試驗을 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經濟企劃院(現 企劃財政部)에 配置되고 보니 法案을 만드는 過程이 재밌었다. 마침 軍隊에서 午後 5時 退勤 後 저녁時間을 낼 수 있어 法 工夫를 始作했다. ‘이렇게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考試를 目標로 工夫를 始作했다. 두 番의 落榜 끝에 軍隊 마치기 直前인 1998年 1次 試驗에 合格했다. 財政經濟部에 復職한 뒤 工夫 時間 確保를 위해 政府果川廳舍 옆에 考試院을 얻어 ‘晝耕夜讀’을 했다. 兄을 따라 성균관대에 入學한 金寬永의 막냇同生이 함께 司法試驗 工夫를 하며 資料 等 도움을 줬다. 兄弟는 나란히 1999年 合格해 言論의 注目을 받기도 했다.“같은 大學을 나온 兄弟가 나란히 司法考試 2次에 合格했다. 主人公은 金寬永(金寬永·31) 兄완(炯完·26) 氏 兄弟. 特히 兄 官營 氏는 88年 公認會計士資格證(CPA), 92年 行政考試 合格에 이어 ‘考試 3冠王’에 올랐다. 그는 現在 財經部 監査擔當官室에 勤務하고 있다. 全北 沃溝郡 회현면에서 農事를 짓고 있는 金 氏 兄弟의 父母는 무엇보다 兄弟愛를 强調했다. 이 때문에 이들 兄弟는 이番 合格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 兄弟는 성균관대 東門으로 各各 經營學科와 行政學科를 卒業했다. 兄弟는 이 大學 司法考試 準備班인 ‘양현관’에서 함께 試驗 準備를 했다. 동생은 낮에 資料를 整理해 退勤 後 양현관을 찾은 兄에게 줬고 兄은 슬럼프에 빠진 동생을 激勵했다. 이들 兄弟는 23日 面接만 남겨놓아 事實上 合格한 狀態. 官營 氏는 財經部에서 繼續 勤務할 豫定이며 형완 氏는 判事나 檢査를 希望하고 있다.” ―1999年 11月 10日子 東亞日報그 스스로 本人이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學生은 아니었다고 여긴다. 中學校 時節 IQ 테스트 結果도 113이었다. 代身 그는 남들보다 剛한 忍耐心과 意志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세 個의 合格證이 아니라 그 過程에서 기울였던 나의 ‘熱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大學 別名은 ‘스트립’…‘가장 金앤張 같지 않은 辯護士’로 불려공부도 工夫지만 그는 놀기도 잘 놀고 舞臺 體質이었다. 노래를 잘했고 中學校 逍風 때 長技자랑으로 시골 藥장사 寸劇을 벌였다. 大學校 1學年 때 엠티 長技자랑에서 4學年 先輩의 ‘픽업’으로 스트립쇼를 演出해서 別名이 ‘스트립’으로 불렸다고 했다. 大學院 新入生 歡迎會 때도 어김없이 長技자랑에 나서 노래를 불렀고 沈봉사 演技를 해 拍手를 받았다. 中央公務員敎育院 時節엔 自治會 企劃部長을 맡아 娛樂部長 役割을 했고 人氣가 많았다.사법연수원에 있는 동안 金앤張法律事務所로부터 스카우트 提議를 받았다. 當初 公務院으로 돌아갈 計劃이었지만 影響力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는 생각에 提案을 받아들였다. 當時 그는 나중에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에서 할 수 없는 事業에 資源을 分配하는 ‘社會福祉共同募金會’ 같은 慈善事業을 생각하고 있었다. 會計士 資格證과 財經部 在職 經驗 및 人脈 等은 辯護士로서 큰 長點이었다. 人材들이 모인 金앤張에서도 金寬永은 잘나갔다. 疏脫함과 率直함, 誠實性은 그의 品性이었고 金앤張의 第1原則인 ‘顧客中心主義’에도 잘 符合했다. 그러면서도 謙遜한 好感型이었다. ‘가장 金앤張 같지 않은 辯護士’라는 別名도 붙었다. 그의 座右銘은 ‘地境을 넓히는 삶’, 卽 善한 影響力을 끼치는 삶이다. 基督敎人인 그는 ‘야베스의 祈禱’라는 祈禱文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表現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政治人이 돼 只今보다 더 살맛 나는 世上을 만들겠다는 目標를 세웠다. 金앤張에서 勤務한 지 10年 만이었다.● 次世代 리더로 注目…第3黨 院內代表 지내고향인 群山에서 出馬한 金寬永은 2012年 4月 19代 總選에서 民主統合黨 候補로 全北 群山에서 當選됐다. 그의 나이 43歲였다. 黨 基準으로 靑年(45歲)이었다. 그는 ‘考試 3冠王’이라는 ‘看板’으로 인해 注目을 받았고 黨 非常對策委員과 首席代辯人, 代表 祕書室長 等 要職을 차지했다. 注目받는 初選 議員이자 次世代 리더로 불렸다. 勿論 實力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19代 國會 前半期엔 國土交通委員으로 活動하다 後半期엔 기재부 出身의 長點을 살려 企劃財政위원으로 活動했다. 2014年 12月 當時 與黨인 새누리黨(現 國民의힘)李 推進하던 相續稅 및 贈與稅法 改正案 票決을 앞두고 反對討論에 나섰다. 中小企業의 家業相續控除 適用 要件을 낮춰 經濟 活性化를 꾀하겠다는 게 當時 與黨 立場이었다.하지만 金寬永은 “大韓民國에 傳統 있는 名門 家族企業을 育成해서 持續的으로 雇傭과 成長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政府의 趣旨에 100% 同意한다”면서도 “그 方法이 企業을 하는 富者들에게 그냥 數百億 원의 稅金을 免除해주는 方式語서는 안 된다”고 主張했다. 與野가 合意한 事案임에도 金寬永의 反對討論 以後 與黨 內 棄權票가 늘면서 結局 否決됐다.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이 민주당에 있던 時節 그를 따라 國民의黨으로 옮겼다. 그는 2016年 20代 總選에서 再選에 成功했다. 朴趾源 院內代表 體制에서 院內首席副代表를 맡은 金寬永은 20代 國會에서 與野 協商 窓口를 맡으며 第3黨의 存在感을 보여줬다.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審判이 始作되자 彈劾訴追委員을 맡았다.당시 國民宜當 安哲秀 候補가 大選에서 敗北한 뒤 유승민 議員이 創黨한 바른政黨과 合當하면서 바른未來黨 所屬이 됐다. 金寬永은 再選 議員으로선 드물게 바른未來黨에서 院內代表에 當選됐다. 2019年 4月 選擧制 改編과 公搜處 設置法 等의 패스트트랙 指定 論難에 中心에 서기도 했다.바른미래당이 內紛으로 黨이 깨지면서 2020年 總選에서 無所屬으로 出馬했지만 結局 落選했다. 그 뒤 싱크탱크인 韓國公共政策戰略硏究所(KIPPS·킵스)를 設立해 金成植 蔡利培 前 議員 等과 함께 與野를 뛰어넘는 共同의 政策 어젠다를 만들었다.2022년 大選을 앞두고 민주당에 復黨했고 같은 해 6月 地方選擧에서 全北道知事에 當選됐다.● MB의 淸溪川처럼 새萬金은 金寬永의 브랜드… 親企業 性向 批判도 그는 워커홀릭이다. 金앤張法律事務所에 있으면서 하루 14時間씩 일했고 國會議員이 되고 나서도 8年 동안 地域區인 全北 群山에 있을 때를 除外하고 每日 午前 6時에 京畿 성남시 분당구 自宅에서 出勤을 했다고 한다. 道知事가 된 只今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 自體가 재밌고 일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本人이 즐거우니 그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몇 달 前 金寬永에게 行政(道知事)과 政治(國會議員) 中 어떤 게 더 재밌냐고 물어봤다.“일단 行政이 더 재밌지, 只今은 道知事인데… 왜냐하면 여기는 이제 내가 얘기를 하면 執行이 되잖아 그 變化가 卽刻 있잖아. 그리고 一週日 後에 報告를 하잖아. 내가 强調하는 게 ‘한 番 指示, 세 番 點檢’이야. 내가 報告받을 때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報告를 받은 뒤부터 내가 세 番 點檢하는 것. 하겠다라는 計劃에 對한 보고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 그러나 點檢이 더 重要해.” ―取材 메모 中 金寬永에게 새만금 開發事業은 政治의 始作이자 끝이다. 새만금 開發의 成敗에 따라 그의 未來도 달렸다. 2013年 새萬金廳이 設立될 때부터 地域區 議員으로 도레이첨단소재 等 海外 企業 誘致에 나섰다. 2013年 以後 9年 동안 새萬金 投資 誘致 規模가 1兆5000億 원에 不過했지만 金寬永은 7月 就任 以後 6月 末까지 60個 企業과 投資協約을 締結해 7兆1000億 원의 投資를 誘致했다. 발로 뛰고 海外 企業人들을 直接 만나 投資를 說得한 結果다.그는 野黨 再選 議員 當時 새만금에 카지노複合리조트 建設을 推進하기 위해 새萬金 內國人 카지노 許容 法案을 내기도 했지만 野黨과 市民團體 等의 反對가 거세 挫折된 狀態다.이런 點 때문에 一角에선 그를 向해 엘리트 出身, 金앤張 出身답게 지나치게 親企業的이라는 批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金寬永이 追求하는 건 무엇보다 實用이다. 그는 書生적 問題意識과 商人의 現實感覺을 强調한 金大中 前 大統領을 政治的 스승으로 삼고 있다. “大韓民國은 이미 이미 政治와 行政이 이끄는 社會가 아니다. 나는 經濟人이 이끈다고 봐요. 公職者들의 月給이 어디서 나오냐. 다 稅金 걷어야 나온다. 法人稅 附加價値稅 所得稅 等 3個가 國稅의 80%인데 이 3個는 徹底하게 企業 活動과 關聯해서 나온 것이다. 大韓民國은 資本主義가 高度化됐기 때문에 結局 企業人들이 大韓民國을 이끌어 간다. 그러면 政治人의 롤은 뭐냐. 우리 企業人들이 國際的 글로벌 競爭에서 뒤지지 않도록, 그 사람들이 너무나 뒤처지지 않도록 빨리빨리 制度 改善을 해서 뒷받침하는 것이 나는 政治와 行政의 役割이라고 본다. 特히 韓國은 輸出 經濟이고 글로벌 經濟에서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글로벌 經濟에 뒤지지 않도록 制度를 政治와 行政이 뒷받침해주는 것이 너무 重要하다.” ―取材 메모 中● 與黨과 協治의 協治 行步로 注目… 全北 國家豫算 9兆 원 時代 熱여김관영에게 가장 큰 影響을 끼친 政治人은 金한길 委員長이다. 金 委員長이 民主黨 代表였던 時節 그를 首席代辯人과 祕書室長 等으로 重用했다. 金寬永은 그를 보며 政治를 배웠다. 金 委員長 側이 지난해 大選을 앞두고 여러 次例 함께 尹錫悅 大統領을 돕자는 提案을 했지만 그는 “國民의힘으로 갈 境遇 群山을 떠날 수밖에 없는 狀況이 올 可能性이 높고 나중에 退任하고 나서 地域에 있는 親舊들하고 便하게 燒酒 한盞, 막걸리 한盞 마시기가 어려운 狀況이 올 수도 있다”는 判斷에서 완곡히 拒絶했다고 한다.김한길계로 불렸지만 그다음 黨 代表였던 文在寅 大統領도 그를 아꼈고 마지막까지 國民의黨으로의 脫黨을 挽留했다. 안철수 議員도 그를 좋아해서 ‘初選 院內代表’로 내세우자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道知事가 되고 나서도 尹錫悅 政府, 國民의힘과 協治를 통해 補助를 맞추고 있다. 國民의힘 全北道黨 事務處長 出身인 박성태 氏를 3級 政策協力館 職位에 임명했고, 金 知事는 道·政協議會를 全北道-민주당이 아닌 全北道-國民의힘-民主黨으로 바꿨다. 與野 協治 結果 金寬永은 史上 처음으로 전북도 豫算 9兆 원 時代를 따내는 成果도 냈다.지난해 12月엔 尹 大統領과 市道知事協議會 任員들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2023年 8月 새萬金 世界스카우트잼버리 開催와 關聯해 60億 원 特別交付稅가 必要하다고 言及했더니 尹錫悅 大統領이 李尙玟 行政安全部 長官에게 “豫算을 한 푼도 깎지 말고 다 도와줘라”라고 했다고 한다. 金寬永이 잼버리의 重要性에 對해 說明하자 尹 大統領이 “내가 옛날에 보이스카웃을 했다”며 關心을 갖고 呼應을 해줬다는 것이다. 豫算 支援은 勿論 잼버리 組織委員長에도 行安部 長官과 文化體育觀光部 長官도 包含시켰다고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金寬永이 尹 大統領의 信賴를 받고 歡心을 샀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이 傳해지자 다른 市道知事가 “왜 全北만 챙겨주냐. 우리도 챙겨달라”고 抗議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金寬永의 政治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哲學이 깔려 있다. 그 스스로 ‘치어리더’를 自請하는 理由다.“우리 삶에서 元來 힘들고 지루했던 일을 그 自體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眞正 意味 있는 일이 아닐까. 政治 指導者라면 그 過程에서 누구보다도 有能한 ‘치어리더’를 自請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中略) 하지만 結局 ‘眞心은 通한다’는 것이 나의 人間關係 持論이다. ” ―金寬永,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中에서2014년 민주당 首席代辯人이던 金寬永 全北道知事를 처음 만났습니다. 以後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冊을 읽었습니다. 그 뒤 “오늘은 저를 어떻게 즐겁게 해주실 거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政治는 成績順이 아닙니다. 하지만 工夫할 때 體得한 성실함과 熱情으로 政治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金 支社의 最大 長點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金寬永의 ‘즐거운 政治’가 國民들을 좀 더 즐겁고 幸福하게 만들어주길 期待해봅니다. 54歲, ‘道伯’으로 成長한 그는 이제 次世代 走者로 꼽힙니다. 周邊에서 2027年 大選 挑戰을 勸誘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만금 開發이 그의 政治的 브랜드로 자리 잡을지, 黨內 走者들의 力學關係에 따라 決定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낮은 認知度와 黨內 勢力 不在 等도 그가 넘어야 할 壁입니다. 여지껏 서울市長을 除外하곤 廣域團體長 中에 大權을 잡은 人物은 없습니다. 中央 舞臺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地方政治의 限界이기도 합니다. 다음 法廷冒瀆 [25話]는 7月 13日 公開될 豫定입니다. 與圈의 有力 政治人에 對해 쓸 豫定입니다. 參考로 [25話]를 마지막으로 法廷冒瀆 連載를 마칩니다.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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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界 最初 유튜버 兼職 長官…23年째 非常 못하는 ‘完全燃燒남’ 원희龍[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뒤늦게 才能을 찾은 것 같았다. 國民들도 그를 다시 보기 始作했다. ‘工夫의 新’이라고 해서 꼭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둘 다 갖췄다.전국 首席과 大庄洞 1打 講師로 國民的 認知度를 얻었던 元喜龍 國土交通部 長官(以下 元喜龍)의 이야기다. 1982年 大學入試에서 全國 首席과 서울大 法大 首席 入學, 1992年 34回 司法試驗 首席 合格이라는 珍貴한 記錄을 가지고 있다. 元喜龍은 長官 就任 以後인 지난해 7月 ‘元喜龍 TV’에서 유튜브를 다시 始作했다. 그는 政治的 發言은 하지 않는 端緖로 國務總理로부터 兼職 許可까지 받았다고 했다. 世界 最初라고 한다. 그는 當時 “여러 長官 中에 代表 走者로 유튜버 兼職 長官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다”며 “어떤 분들은 또 長官이 매정하게 ‘야 長官이 일이나 똑바로 하지 무슨 유튜버野?’ 그런 분들은 아시죠, 時代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늘, 참, 熱心이다. 政策 弘報와 國民 疏通 等을 理由로 始作한 유튜브의 이 映像은 現在 基準 照會 數 1萬7000回에 그쳤다. 다시 始作한 元喜龍 TV 購讀者 數도 17萬8000名에서 約 1年 동안 19萬4000名으로 1萬6000名밖에 안 늘었다(그는 “間에 奇別도 안 간다”고 아쉬워했다).원희룡은 올해로 政治에 入門한 지 23年이다. ‘少壯派’로 이름을 날린 그도 이제 어느덧 還甲을 앞두고 있다. 더 以上 ‘次世代’가 아니라는 것이다. 國會 外交通商統一委員長을 지냈고, 黨 事務總長과 最高委員 等을 歷任했고 濟州道知事에 두 番 當選됐다. 하지만 全黨大會에서 黨 代表가 되지 못했고, 2007年과 2022年 大選을 앞두고 大統領選擧 競選에 出馬했지만 注目받지 못했다. 꽃이 너무 빨리 핀 것일까. 좀처럼 뜨질 않는다. 韓國 社會에서 主流이면서도 黨內에선 非主流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保守 與黨에서 改革的인 목소리를 내왔고, 濟州島 出身으로 嶺南이 基盤인 黨에서 活動했다. 政治를 오래했지만 最近 國民들에게 刻印된 건 大庄洞 1打 講師였다. 하지만 一角에선 只今이라도 그냥 1打 講師로 轉業해 敎育業界로 進出하는 게 어떠냐는 嘲弄도 들린다. 2020年 總選을 앞두고 ‘마라톤 遊說’를 폈던 안철수 議員에게 ‘마라토너로 專業하라’는 非難처럼…물론 元喜龍度 마라톤에 心醉해 2005年에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라는 題目으로 自敍傳을 發刊하기도 했다.그가 政治를 하는 理由는 國民의 苦痛을 덜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다. 政治的 浮沈은 있었지만 그의 政治엔 眞情性이 느껴진다.“우리 社會에 苦痛이 있는 限, 누군가는 이 苦痛을 나누고 덜어내고 治癒하기 위해 努力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저의 運命으로 받아들입니다. (中略) 肯定의 政治의 根本 뿌리에는 우리 社會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哲學’, ‘사랑의 政治’가 있습니다.” -元喜龍, ‘사랑의 政治’-● 硏修院 動機 “濟州島에서 ‘元喜龍 아냐’ 물으면 다 알아”그는 1964年 濟州島 西歸浦에서 2男 4女 中 次男으로 태어났다. 市場에서 고무신, 農藥 等 物件을 팔아 生計를 維持하던 父母님 밑에서 자랐다. 늘 가난과 함께했다. 中學校 3學年까지는 電氣불도 없었다. 빚 督促에 시달리는 父母님을 보면서 함께 떨었던 적도 있었다. 父母님이 마지막에 하다 亡한 게 冊 장사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家庭醫學大百科 事典부터 童話冊, 漫畫冊, 甚至於 農事에 關한 冊까지 다 읽었다. 濟州제일고를 卒業한 뒤 서울對 法大에 入學했다. 전두환 政府 時節 들어간 大學 캠퍼스에선 軍事獨裁에 對한 鬪爭이 한창이었다. 그도 바로 司法試驗을 보지 않고 學生運動을 함께 했다. 獨裁에 反對했다는 理由로 몇 番이나 警察署에 끌려갔고 鐵製 椅子로 숱하게 맞았다고 한다. 實際 동아일보에 처음 登場하는 元喜龍은 가리봉동 5거리 示威와 關聯해 警察 調査를 받고 있는 서울대生의 모습이다. 歐露工團에 있는 夜學에서 聯合을 해서 共同으로 油印物을 뿌리며 街頭示威를 벌인 것. “서울南部警察署는 지난 25日의 九老區 加里峰洞5거리 示威와 關聯、元喜龍 軍(20·公法學科 3年) 等 서울大生 4名을 召喚、事件 經緯를 調査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4年 6月 4日 者 <警察 示威 主動 大學生 一齊 召喚> 記事 中- 그는 學業을 中斷하고 京仁 地域 工場에 僞裝 就業해 2年 가까이 地下 勞動運動을 벌이기도 했다. 東歐 共産圈이 沒落하고 1987年 6月 民主抗爭 以後 第6共和國이 들어서자 苦悶이 깊어졌다. 석 달 동안 無錢旅行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戰鬪的인 社會主義나 民族主義 理念이 아닌 自由主義를 통해 憲法 內에서 우리의 理想을 充分히 담아내고 살기 좋은 社會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鬪爭的·組織的으로 陣地戰을 벌이는, 集團主義 理念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司法試驗 準備에 나섰고 1992年 司法試驗에 首席 合格했다. 首席 合格 記錄이 많던 그는 硏修生 사이에서도 有名했다고 한다. 24期 硏修院 同期의 傳言이다.“연수생들 사이에 리더 같은 存在였다. 硏修院 때 우리가 다 모여서 무슨 民事 判決文이 어쨌다, 刑事 判決文이 어쨌다, 試驗 얘기만 할 때 喜龍이 兄은 ‘只今 世界情勢가 어떻고 아시아가 어떻고’ 이런 宏壯히 들을 만한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때도 앨빈 토플러의 ‘第3의 물결’ 等 未來學에 關한 冊도 많이 봤다. 그때부터 ‘正말 이 사람은 똑똑하다 그러고 政治할 것 같다’ 그런 評이 많았다. 그때 이제 硏修生들이 놀란 게 濟州島를 놀러 가서 택시를 타서 ‘或是 元喜龍 아시냐?’ 그러면 다 알 程度로 濟州島에서 秀才(秀才)로 有名했다.” -取材 메모 中- 最上位圈 成績으로 司法硏修院을 마친 그는 檢事를 支援했다. 判事보다는 現場을 다니며, 백지인 無에서 有를 만들어내는 檢事職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서울地檢(現 서울中央地檢) 2年, 驪州支廳 1年, 釜山地檢 6個月 等 3年 6個月間 檢査 生活을 했다. 하지만 1998年 外換危機를 맞으면서 國家的 危機에 스스로의 役割에 對한 懷疑가 들었다. 辭表를 냈고 辯護士로 活動하다 이회창 當時 한나라당 總裁의 勸誘를 받고 한나라黨(現 國民의힘)에 入黨했다.● 少壯派 改革運動 이끌어… ‘한나라당의 柳時敏’ 評價도“대한민국 安保와 經濟 成長을 이끌어온 게 報酬였다. 保守가 變해야 韓國이 壓倒的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先進國의 右派나 保守들이 갖고 있는 그 品格과 實力에 對해서 相當히 부러웠다. 그래서 韓國도 그렇게 가야 되지 않았나 이렇게 봤고… 386運動圈의 相當히 腐敗하고 自己 合理化的인 傲慢한 그런 구석들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들과 同化되기 싫은 側面도 있었다. 그게 20年 뒤에 曺國 事態로 피크를 쳤다.” -取材 메모 中- 元喜龍은 2000年 16代 總選에서 서울 陽川甲에 出馬해 國會에 入城했다. 그의 나이 滿 36歲였다. 그는 黨內에서 南景弼 정병국 議員 等과 함께 움직이며 所長 改革派의 代表 選手가 됐다. 그는 이회창 候補가 大選에서 敗北한 뒤 2003年 “黨內 60歲 以上은 물러가라”고 主張하기도 했고 2004年 최병렬 當時 代表 退陣 카드를 꺼내 드는 等 刷新에 목소리를 냈다. 2004年 7月부터 2006年까지 最高委員을 지내며 쓴소리를 이어갔다. 國家情報院의 X파일 處理와 減稅案, 對北 支援 方案 等 與野가 對峙하는 主要 懸案마다 黨論과 다른 見解를 公開的으로 밝혀 왔고 ‘한나라당의 柳時敏’이라는 評價까지 받았다. 2006年 1月엔 黨의 私學法 場外 鬪爭과 關聯해 當時 代表였던 朴槿惠 前 大統領을 向해 “朴 代表의 이념적 偏見은 病(病)”이라며 批判했다가 黨內 反撥이 커지자 公開 謝過하기도 했다.“저는 그동안 黨內에서 別로 人氣가 없었습니다. ‘所長 改革派’로 黨內에서 쓴소리를 많이 하니까 한나라당 支持者들 사이에서는 人氣가 別로 없고 오히려 野黨 支持者들 사이에서 人氣가 많았습니다. 참 당혹스러운 狀況이었습니다.” -元喜龍, ‘사랑의 政治’-黨 안팎에서 注目을 받았지만 與黨에선 “左派”라고, 野黨에선 “變節者”라는 等 兩쪽으로 批判을 받았다. 學生運動圈 出身이 保守 政黨에 몸을 담는다는 것부터 覺悟는 했고 內部에서 批判的 목소리를 내는 役割로 ‘포지셔닝’을 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所信대로 하고 不利益은 堪當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變化하지 않으려는 集團의 慣性은 公告했다. 그가 與黨 內 非主流로 注目받지 못하게 된 理由다. 少壯派로서 주어진 役割은 딱 거기까지였다. 元喜龍은 2007年 大選 競選에서 李明博 朴槿惠 洪準杓 當時 候補와 競選했지만 落馬했다. 2010年 서울市長 競選에서 吳世勳 當時 市長에게 밀렸고 2011年 全黨大會에서 黨 代表 宣言과 함께 19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했지만 洪準杓 現 大邱市長에 밀려 黨 代表의 꿈은 挫折됐다. 周邊에서 秀才라고 待遇만 받던 그도 줄줄이 쓴맛을 맛본 것이다.● ‘잃어버린 10年’ 以後 다시 中央舞臺로2012년 總選에 不出馬한 그는 英國 케임브리지對 等에서 房門硏究員을 지내고 休止期를 가진 뒤 2014年 濟州道知事로 出馬해 當選됐다. 2017年 大選에 不出馬했고 2018年 地方選擧에서 無所屬으로 再選에 成功했다. 道知事로 7年間 勤務하며 元喜龍은 차근차근 行政 經驗 等을 쌓았다. 2017年 有權者市民行動이 授與하는 ‘大韓民國 有權者 對象’을 3年 連續 受賞했다. 濟州 新港灣 建設과 營利病院 等을 推進했다. 하지만 그는 中央舞臺에선 조금씩 잊혀져 갔고 疏外됐다.반전은 2021年 大選 競選에 出馬하면서부터 始作됐다. 元喜龍은 그해 10月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代表가 城南市長 時節 벌어진 大庄洞 開發事業 特惠 疑惑이 불거지자 유튜브를 통해 關聯 疑惑에 對해 ‘對國民 講義’를 했다. 反應은 暴發的이었고 누리꾼들로부터 ‘大庄洞 1打 講師’라는 別稱을 얻었다. 尹錫悅 大統領도 當時 “怨 候補의 ‘大庄洞 게이트 1打 講師’ 動映像을 봤다. 아주 잘 說明하셨다”며 “率直히 말하면 元 候補의 그런 能力이 부럽기까지 했다”고 公開的으로 稱讚하기도 했다. 2021年 11月 競選 結果 尹 大統領이 大選 候補로 選出되고 元喜龍은 4位에 그쳤다. 하지만 尹 大統領은 그를 選擧對策本部 政策本部長으로 任命해 政策을 總括하도록 했다. 大選 뒤에도 大統領職引受委員會에 企劃委員長을 新設해 元喜龍에게 委員長을 맡긴 뒤 5年의 核心 國政 課題를 調律하도록 했다.윤 大統領의 信任을 받은 元喜龍은 지난해 4月 尹錫悅 政府 初代 國土部 長官으로 拔擢됐다. 서울大 法大 3年 先後輩 사이지만 學窓 時節에는 全혀 親分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不動産政策, 地域 均衡 發展, 貨物連帶 罷業 等 各種 懸案의 主務 長官으로서 現場을 누비고 있다.● 學報社 記者였던 한동훈이 ‘硏修生 元喜龍’ 인터뷰… 奇異한 因緣 한동안 ‘次世代’로 불렸던 元喜龍은 이제 한동훈 法務部 長官과 같은 後輩들에게 ‘次世代’란 바통을 물려줄 때가 됐다. 서울大 法大 10年 後輩인 한 長官과 그의 因緣도 奇異하다. 元喜龍은 大學에서부터 全國 首席 等으로 有名했던 만큼 그가 司法硏修院을 다닐 時節 한 長官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서울大 法大의 學報社인 ‘法大新聞’ 記者로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것. 向後 그를 만난 한 長官이 約 30年 前 일을 또렷하게 記憶하며 이를 言及했다고 한다. 元喜龍은 韓 長官에 對해 “아주 明晳하고 狀況에 對한 感覺도 뛰어나고 저랑도 옛날에 因緣이 있는 先後輩 關係”라고 評價했다. 元喜龍은 이미 尹錫悅 政府와 運命共同體다. 그의 未來는 尹錫悅 政府의 成功 與否와 櫃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그를 두고 國務總理 拔擢이나 來年 總選 出馬 및 向後 黨 代表 挑戰 等 여러 可能性이 提起된다. 이에 對한 元喜龍의 答辯이다. “아직 國土部에서 해야 될 任務가 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個人의 어떤 未來의 進路를 따로 생각하기보다는 尹錫悅 政府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거기서 우리 大統領께서 가장 좋은 構想을 펼쳐 가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國民들에게 團體戰 評價 點數를 잘 받을 거냐, 여기에 對해서 最善을 다해야 되는 거고요. 그런 點에서는 한동훈 長官이나 저나 마음이 똑같다. 萬若에 總選을 앞두고 尹 大統領이나 黨에서 ‘黨으로 돌아가라’ ‘總選을 뛰어라’라고 하신다면 나는 가기 싫어요라고 하기는 어렵겠죠.”원희룡 長官은 自稱 ‘頑素남’입니다. ‘完全 所重한 男子’가 아니라 ‘完全 燃燒를 꿈꾸는 男子’라는 意味입니다. 그는 自身의 著書 ‘사랑의 政治’에서 “되돌려주는 삶, 이것이 우리가 人生의 方向을 잡거나 速度를 調節함에 있어 가장 智慧로운 哲學”이라며 “되돌려주는 삶은 ‘只今 바로 여기에서’ 始作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自身이 韓國으로부터 많이 받은 人生을 산 만큼 自身을 불살라 韓國에 바치겠다는 뜻이지요.그는 尹 大統領의 長點에 對해 “決斷을 내렸을 때 그 決斷을 믿고 밀고 나가는 어떤 결氣와 剛斷, 뚝심이 있다”며 “또 사람에 對해서 宏壯히 關心이 많고 사람 關係 속에서의 人間的인 結束力을 宏壯히 重視하는 리더십이다. 그러니까 이제 ‘석열이 兄’으로 불리고 보스 氣質이 있고 親和力이 있다”고 評價했습니다. ‘석열이 型’으로 부른 적은 아직 없다고 하네요.정치인으로서 그의 限界는 낮은 認知度와 勢力의 不在입니다. 그 亦是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不足한 點을 알고 또 거기에 眞情性과 全力을 다하면,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둘 것”이라며 “함께할 勢力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들하고 모든 걸 나눠야 되는데, 元喜龍이 안 나눠줄 것 같고 自己 혼자 깨끗할 것 같은 이런 느낌 때문에 안 되는 거라면 그건 제가 問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結局은 내가 안 變했기 때문에 國民들의 認識이 안 變하는 問題일 테니까 제가 變化하면 저에 對한 國民들의 認識도 變化할 것”이라며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20年 前 “黨內 60歲 以上은 물러가라”고 외쳤던 나이도 이제 來年입니다. 頑素남은 果然 뜰 수 있을까요? 그의 眞情性이 받아들여질지 그의 未來와 變化가 궁금해집니다.다음 法廷冒瀆 [24話]는 野黨의 廣域團體長으로 넘어갑니다. 自稱 ‘즐거운 希望 傳道師’입니다.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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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獨裁 打倒 외치는 ‘이른바 進步’, 職務遺棄한 ‘뒤끝 政府’[光化門에서/황형준]

    2008年 5月 筆者는 修習記者를 마친 뒤 社會部에 配置돼 警察을 出入하는 事件팀 記者가 됐다. 正式 記者가 됐다는 기쁨이 가시기도 前에 비슷한 時期 始作된 美國産 쇠고기 輸入 反對 示威 現場을 몇 달 동안 取材해야 했다. 示威隊는 就任한 지 몇 달 안 된 當時 이명박 大統領을 向해 ‘獨裁 打倒’, ‘命薄 退陣’ 等의 口號를 외쳤다. 民主的 節次에 따라 選出된 大統領을 否定하고 獨裁라고 낙인찍는 ‘이른바 進步’ 진영을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던 記憶이 생생하다. 眞짜 獨裁政權이었다면 이들이 ‘獨裁’라고 마음대로 외칠 수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一部는 暴力 示威로 變質돼 갔다. 辭典的 意味에 맞지도 않지만 代案이 없어 그대로 쓰고 있는 表現이 進步 對 補修다. 歷史는 15年이 지나 反復되고 있다. 이른바 進步 陣營에선 日本 후쿠시마 汚染水 放流 問題와 關聯해 비슷한 主張을 펴기 始作했다. 狂牛病 怪談처럼 汚染水 怪談과 假짜뉴스度 나오기 始作했다. 野黨은 먹거리에 銳敏한 民心을 政治的으로 利用하고 나섰고, 一部 團體는 거리에서 ‘尹錫悅 大統領 退陣’ 口號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제 ‘獨裁’라는 主張에 拍手를 치는 國民은 거의 없다. 大部分이 誇張된 口號로 여길 뿐이다. 이를 두고 民度가 높아졌다는 分析도 나온다. 한便 지난주 行政安全部는 6·10民主抗爭 記念式에 不參했다. 記念式을 主管하는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가 大統領 退陣 主張 團體를 後援했다는 理由에서였다. 事業會는 “該當 團體가 協議 없이 政治的 內容을 包含했다. 後援金은 執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行安部는 搖之不動이었다. 6·10民主抗爭이 2007年 國家記念日로 制定된 뒤 줄곧 行安部가 主催하고 事業會가 主管하던 記念式의 傳統이 깨졌다. 主催者인 行安部와 與黨 指導部가 不參하면서 行事는 싱겁게 끝났다. 지난해 한덕수 國務總理가 記念辭를 하고 李俊錫 當時 與黨 代表가 參席했던 것과 對照的이었다. 行安部의 不參은 過去 政府에서 市民團體에 준 補助金 相當數가 否定 執行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尹 大統領 및 大統領室의 생각과 無關치 않아 보인다. 問題는 行安部의 行事 主管이 慣行이 아니라 法 規定 事項이란 것이다. 大統領令 ‘各種 記念日 等에 關한 規定’에 따르면 行安部는 ‘6月 民主抗爭을 記念하는 行事를 한다’고 明示돼 있다. 勿論 안 지켰을 境遇 罰則 條項은 없다. 하지만 法令에 規定된 業務를 하지 않은 것은 儼然한 職務遺棄다. 行事 不參을 行安部 혼자 決定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有關 團體의 些少한 失手로 主催者가 行事에 빠진 건 自己否定이다. 一部 報道를 問題 삼아 記者를 空軍 1號基에 못 타게 한 것처럼 ‘길들이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壅拙하다”는 野黨의 批判이 나오는 理由다. ‘이른바 進步’와 ‘뒤끝 政府’는 現行 憲法을 탄생시킨 1987年 6·10民主抗爭의 意味와 精神을 鎭靜 尊重하고 繼承하는 걸까. 그랬다면 怪談을 앞세운 示威도, 民主抗爭 記念式 不參 해프닝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황형준 社會部 次長 constant25@donga.com}

    •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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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움받을 勇氣’ 가진 自由인… 活劇 뒤 ‘孔性拂去’ 외치며 退場한 楊正哲[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左도 아니고 于도 아니고 앞으로다. 統合의 政治로 가야 한다. 答은 聯政밖에 없다. 한 10年, 아니 單 5年만이라도 政治的 休戰을 하고 與野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 旗幟下에 協力과 統合의 政治로 가지 않으면 G7 跳躍은 힘들다. 與野가 戀情을 해야 한다. 一時的 協治 實驗이라도 좋다. 안에서 和合하고 바깥 競爭에서 이기려면 그 길밖에 없다.” -取材 메모 中-楊正哲 前 民主硏究院長(以下 楊正哲)李 2~3年 前부터 줄곧 强調하는 이야기다. 그의 이 같은 統合論과 聯政論을 처음 들었을 때 意外였다. 率直히 그가 가진 이미지는 强性 이미지였고 論爭的인 이슈의 先鋒에 서서 ‘紅衛兵’으로 불렸으니까. 그 亦是 50代에 들어 30, 40代 때와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 日本과 뉴질랜드, 美國 等 世界를 돌아보며 視野가 바뀐 側面이 있다고 言及한 적이 있다.“나도 骨髓 運動圈이었는데 靑瓦臺 5年 있으면서 國家 全體를 보는 쪽으로 苦悶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있었고 또 하나가 지난 3年間 流浪을 다니면서 모든 思考와 視角이 바뀌었어. 只今 내 關心은 다음 大統領이 우리 黨이냐, 저 黨이냐, 누가 되냐 關心이 없다. 이젠 大統領 當選이 重要한 게 아니라 大韓民國 發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成功하는 大統領’이 되느냐가 훨씬 重要하다.” -取材 메모 中- 獨裁政權에 맞서 鬪爭했던 運動圈 出身이라 過去엔 彼我 便 가르기를 하고 旣得權에 憤怒하는 마이너的이면서 人權 感受性이 높은 가슴이 뜨거웠던 靑年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그는 노무현 文在寅 前 大統領의 곁에서 줄곧 ‘惡役’을 도맡아 왔다. 그 탓에 好不好가 엇갈리고 ‘論爭的’인 人物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世上의 誤解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움받을 勇氣’를 지닌 것이다.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證據이자 스스로의 方針에 따라 살고 있다는 證票일세.”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勇氣’ 中- 結局 그는 文在寅 前 大統領을 도와 2017年 文在寅 政府의 一等功臣이 됐다. 하지만 잊혀질 權利와 孔性拂去(功成不居·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 原則, 내 自由도 所重하다며 文在寅 政府 내내 公職을 맡지 않았다. ● 登壇 꿈꾸던 文學少年에서 運動圈 核心으로 楊正哲은 1964年 서울에서 태어나 구로구에 位置한 宇信高等學校를 卒業했다. 글이 좋고 冊이 좋았던 文學少年은 高校 時節에도 文藝서클에서 活動했다.“내가 初等學校 때 職場에서 밀려난 先親은 어렵게 家族 扶養하느라 移徙를 자주 했다. 自然히 轉學이 잦았다. 親舊 사귈 機會가 적었고 외로움을 冊으로 달랬다. 나중엔 親舊보다 冊이 좋았고 또래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좋았다.” -楊正哲, ‘世上을 바꾸는 言語’ 中에서 - 가난은 그의 視線을 社會로 向하게 만들었다. 特히 서클 指導敎師였던 童話作家 김진경 先生님으로부터 思想敎育을 받았다. 이에 高校生 楊正哲도 運動圈 大學生들이 보는 이른바 ‘不穩(?) 書籍’들을 그 時節 이미 涉獵했고 社會에 눈을 떴다. (後에 金 先生님은 이를 理由로 解職됐지만 노무현 政府에서 大統領敎育文化祕書官이 됐고 그와 함께 祕書官으로 일하는 奇異한 因緣을 맺게 됐다.) 登壇 作家를 꿈꿨던 그는 國文科에 進學하려 했다. 하지만 形便이 어려웠던 家族의 反對로 韓國외대 法大에 進學했다. 그는 專攻에 關心이 없었고 學報社에 들어가 記者로 活動하는 데 沒入했다. 3學年 때 編輯長을 지냈고 同時에 ‘全國大學新聞記者聯合’(前大氣련) 會長도 맡았다. 그는 漸漸 運動圈 核心에 屬하게 됐다. 1986年 前大氣聯에서 發行한 氣管支가 問題가 돼 指名 手配를 받게 됐고 아예 韓國외대 ‘反美自主化反파쇼民主化祖國統一鬪爭委員會’ 委員長을 맡아 學內 示威를 主導했다. 이와 함께 全國單位 大學 鬪爭組織인 ‘學生鬪爭聯合’ 서울地域 副議長을 맡아 1987年 6月 民主抗爭에서 大學街의 反政府 民主化運動 聯合示威를 主導했다. 1年 넘게 長期 逃避 中에 檢擧돼 그는 結局 國家保安法 違反과 特殊公務執行妨害 等 嫌疑로 拘束 起訴됐다. 實刑을 살았지만 1988年 노태우 當時 大統領이 大規模 赦免·復權을 斷行하면서 受刑 4個月 만에 釋放됐다.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言論社 記者를 해볼 생각도 있었지만 前科도 있는 데다 言論民主化 運動에 對한 믿음이 있어 전국언론노조연맹에서 言論노보 記者로 일을 始作했다. 中央 日刊紙에서 移職 提案도 받았지만 ‘言論勞組를 지켜야 된다’는 使命感에 6年間 일했다. 그러다 結婚을 하면서 大企業으로 자리를 옮겼다. 現實的 理由였다. 나산, 韓寶, 身元그룹과 스카이라이프 等 4곳을 거쳐 次長에서 任員으로까지 昇進했다. 하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젊은 나이에 ‘運動’하다가 갑자기 企業-企業株 代辯하는 일은 마음苦生이 컸다. 言論界에 있는 先輩들에게 부끄럽기도 했다.” -楊正哲, ‘世上을 바꾸는 言語’ 中에서- 結局 2002年 노무현 候補 大選캠프에 合流했고 引受위를 거쳐 5年 내내 盧 前 大統領을 모셨다.● 30代 最年少 靑瓦臺 祕書官으로 政治 舞臺 登場言論人에서 大企業 任職員으로, 靑瓦臺 祕書官으로 變身한 楊正哲은 政治 舞臺의 前面에 섰다. 39歲로 最年少 祕書官으로 高速 昇進했다. 國內言論祕書官과 弘報企劃祕書官을 맡아 政府의 新聞放送 政策을 總括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血氣가 旺盛했고 言論界에선 言論노보 記者 出身인 그를 쉽사리 認定해주지도 않았다.노 前 大統領은 言論에 對한 不信이 뿌리 깊었다. “記者室에 몇몇 記者들이 죽치고 앉아 報道 資料를 加工하고 談合한다”며 推進한 ‘取材支援시스템 先進化 方案’은 그 頂點이었다. 言論에 敏感했던 盧 前 大統領이었던 탓에 楊正哲에겐 惡役이 맡겨졌다. 弘報企劃祕書官 時節 동아일보 等 言論의 新行政首都 移轉 關聯 報道에 對해 “詛呪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막말을 했다. 2005年 8月에는 盧 大統領의 大聯政 提案을 拒否한 한나라당 박근혜 前 代表에 對해 “朴 代表의 反應은 責任感, 決斷, 歷史意識, 깊은 省察, 一貫性 等 5가지가 없는 5無(無)”라고 原色的으로 非難해 한나라黨(現 國民의힘)의 反撥을 사기도 했다.2007년엔 取材支援시스템 先進化 方案을 樹立해 記者室 統廢合을 實行해 全 言論으로부터 ‘言論 彈壓’이라는 批判을 받았다. 事實 그는 先進化 方案에 對해 신중한 立場이었다고 한다. 이를 推進하려면 任期 初에 推進했어야 하고 言論界 內部의 共感과 說得 없이는 實效性도 없을 것이라는 趣旨로 大統領에게 여러 次例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盧 前 大統領이 뜻을 굽히지 않자 主務 祕書官으로서의 責任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前面에 나섰다는 게 周邊 人士들의 傳言이다.● 盧 지키지 못한 悔恨에… 文 앞세운 政權 交替에 主力노무현 政府 末期 “이게 다 盧武鉉 때문이야”라는 말이 流行할 程度로 國民들의 支持를 받지 못했다. 쓸쓸한 退場이었다. 楊正哲도 參謀로서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罪責感이 들었고 退任 後 烽下마을로 내려간 盧 前 大統領이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퇴임 後 어느 날 盧 前 大統領이 楊正哲을 불렀다. 政治에 나서보겠다고 했지만 盧 前 大統領은 뜻밖에도 이를 말리셨다. “政治를 통해 世上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重要한 民主主義的 進步를 이루려면 國民들 생각과 意識을 바꾸고 文化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政治를 하지 말고 좋은 冊을 내자고 提案하셨다.양정철은 두말없이 짐을 싸서 烽下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以後 檢察 搜査를 받던 盧 前 大統領은 2009年 5月 23日 부엉이바위에서 極端的 選擇을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自然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未安해하지 마라. 누구도 怨望하지 마라. 運命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모진 決心을 놓고 煩惱하던 오랜 時間, 그의 孤獨을 가늠조차 못 했다는 罪責感에 楊正哲은 괴로웠다. 그 罪責感을 이겨내고 盧 前 大統領을 再評價할 수 있는 唯一한 길은 政權交替였다. “盧武鉉의 親舊 문재인이 아니라 文在寅의 親舊 노무현입니다.” -2002年 11月 노무현 當時 大選 候補가 釜山에서 門 前 大統領을 紹介하며- 盧 前 大統領이 이같이 評價했던 노무현 政府의 마지막 祕書室長, 文在寅 前 大統領을 大統領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課業이 됐다. 政治를 하지 않겠다는 文 前 大統領을 說得했고 2011年 ‘문재인의 運命’ 出刊을 도왔다. 2012年 4月 總選에서 文 前 大統領은 釜山 思想에 出馬해 當選됐지만 楊正哲은 서울 重浪乙에 出師表를 던졌다가 競選에서 박홍근 議員에게 밀려 탈락했다. 文 前 大統領은 民主統合黨 大選 候補가 됐지만 그해 12月 치러진 18代 大選에서 박근혜 前 大統領에게 敗北했다.● 文在寅 政府의 一等功臣이었지만 大選 뒤 忽然히 떠나 大選 以後 門 前 大統領을 비롯한 親文(親文在寅) 陣營은 大選 敗北 責任論에 시달렸다. 楊正哲도 그 對象 中 한 名이었다. 그는 이호철 前 民政首席祕書官과 電解鐵 議員 等과 함께 ‘3철’로 불리면서 ‘비선’이라는 따가운 視線을 받았다.문 前 大統領이 2015年 2·8全黨大會에서 黨 代表로 選出됐지만 野黨은 內訌을 겪으며 混亂이 빚어졌다. 金한길 安哲秀 前 共同代表 等 鼻紋 陣營에선 ‘親盧(親盧武鉉) 霸權主義’로 몰아세웠고 끊임없이 黨을 흔들어댔다는 게 親文 陣營의 視角이었다. 그해 4·29齋·補闕選擧에서 慘敗하면서 代表 責任論은 더욱 심해졌다. 當時 한 最高委員이 傳했던 이야기다.“재·보선 慘敗 以後 어느 날 非公開 最高委員會에서 ‘楊正哲이 都大體 어떤 ××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뒤에서 다 決定한다고 하냐. 차라리 祕書室長이든 副室長이든 公式的인 職位를 주든지 해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文 代表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取材 메모 中- 거듭된 刷新 要求에 楊正哲도 2015年 12月 이호철 前 民政首席, 尹建永 민형배 金永培 現 議員 等과 함께 20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했다. 거듭된 犧牲 要求이자 文 前 大統領이 平素 强調해온 肉斬骨斷(肉斬骨斷·自身의 살을 베어 내주고, 相對의 뼈를 끊는다는 뜻)이었다. 2016年 結局 안철수 議員이 국민의당을 創黨하면서 門 前 大統領은 黨 代表職에서 물러났다. 民主黨은 김종인 前 代表를 내세워 總選을 치렀다. 그해 6月 文 前 大統領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을 때 楊正哲은 탁현민 前 大統領儀典祕書官과 함께 同行했다. 文 前 代表의 大選 豫備캠프 性格인 ‘廣興倉팀’을 主導하며 大選 準備는 勿論이고 政權 交替 以後 밑그림도 그렸다. 2020年 4月 그가 했던 이야기다. “政治 經歷이 짧았던 文 大統領에게 核心 側近이랄 수 있는 사람은 나랑 이호철 前 首席 等 單 네 名이었고 그 네 名이 목숨 걸고 大統領 만들기에 올인했다. 甚至於는 大統領에 當選되면 任期 첫날부터 日程도 미리 準備해 둘 程度로 다양한 準備를 했다.” -取材 메모 中-楊正哲은 大選 勝利 直後인 2017年 5月 “저의 退場을 끝으로, ‘霸權’이니 ‘親文’ ‘親盧’ 프레임이니 ‘三哲’이니 하는 낡은 言語도 거둬 주시기 바란다”며 “멀리서 그분을 應援하는 여러 市民 中 한 사람으로 그저 조용히 지낼 것”이라며 “잊혀질 權利를 許諾해달라”고 밝혔다. 그 뒤 뉴질랜드로 出國해 日本, 美國 等 流浪에 나섰다.● 黨 外郭에서 ‘帳幕 뒤 助言者’ 役割 이어가 그는 7個月 뒤 ‘世上을 바꾸는 言語’ 冊을 내면서 다시 韓國에 돌아왔다. 그를 重用한 盧武鉉 文在寅 前 大統領에게 陳 마음의 빚은 政權交替로 一部 갚게 된 것이다.“그분이 逝去 며칠 前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은 ‘量비는 먹고살 方道는 있는가?’였다. 죽음을 決心한 분이 一切 내色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瞬間까지 參謀들 걱정을 한 것이다. 이 冊은 ‘깨어 있는 市民으로 이렇게 熱心히 살아가려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분을 向한 나의 安否 人士이기도 하다. 盧 大統領이 부디 그곳에서 便하셨으면 좋겠다.” -楊正哲, ‘世上을 바꾸는 言語’ 中에서-주진우 前 記者는 이 冊 推薦辭에서 “楊正哲은 自己를 낮춘다. 周圍를 비춘다. 自己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짠하다. 그리고 찡하다”고 썼다.그러다 2019年 5月 李海瓚 當時 代表의 强力한 付託을 받고 民主硏究院長으로 電擊 復歸했다. 그는 “民主硏究院이 總選 勝利의 兵站基地 役割을 하도록 하겠다”는 첫 一聲을 냈고, 白元宇 前 議員과 함께 21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하며 公薦에서 물갈이 意志를 드러냈다. 人材 迎入을 맡았고 衛星政黨 論難이 일자 總選 勝利를 위해 比例聯合政黨 參與가 不可避하다며 聯合政黨 參與를 밀어붙였다. 그 結果 민주당은 2020年 21代 總選에서 180席 壓勝을 거뒀다. 勿論 그 以後 열린우리당의 惡夢처럼 立法 獨走 等을 거듭하다가 2年 뒤 政權을 다시 빼앗기게 됐지만 當時로선 前例없는 成果를 낸 것이었다. 總選 直後 그는 寬容과 統合을 외치며 硏究院長職을 던지고 舞臺에서 내려왔다. 文在寅 政府의 마지막 祕書室長 等으로도 擧論됐지만 그는 結局 約束대로 公職을 맡지 않았다. 2021年 美國 戰略國際問題硏究所(CSIS) 客員 先任硏究員을 지내는 等 自由人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민주당과 靑瓦臺 人士들과 接觸하며 助言과 쓴소리를 했다. 2021年 6月 6日 筆者가 했던 인터뷰다. ▶楊正哲 “與 切迫함 없어…정권 再創出 悲觀的 要素 더 많아”대선을 앞두고 있던 2021年 11月에는 黨內 初選 議員 特講에서 이같이 助言했다.“스타일리스트형 政治人은 제발 안 되셨으면 하는 懇曲한 付託을 드린다. 하찮은 패션 따위로, 튀는 表現이나 말장난, 突出 行動 等으로, 그저 뜰 수만 있다면 SNS 통해 뭐든 하려는 분들을 많이 본다. 與野의 그런 모습이 政治를 戱畫化시키고 冷笑와 鳥籠을 誘發한다. 各自가 政治的 政策的 信念은 確固히 가져 주시되 行動에서는 팀보다 偉大한 選手는 없다는 原則을 지켜 주셨으면 좋겠다. (中略) 저는 ‘스러짐의 美學’을 아는 사람이 좋은 政治人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卽, 國民과 公共을 위한 獻身과 犧牲 後 어느 때 스스로 消滅되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지 正確히 아는 것이 좋은 政治라 생각한다.” -取材 메모 中-● 所聞의 男子… “엇갈리는 評價는 自業自得” 地籍圖野圈 一角에선 그가 結果的으로 尹錫悅 政府의 功臣 役割을 한 것 아니냐는 批判도 나온다. 楊正哲은 2016年 總選을 앞두고 尹錫悅 大統領 迎入을 위해 처음 만나면서 尹 大統領과 적지 않은 親分을 쌓았다. 서울中央地檢長 拔擢이나 檢察總長 任命, 曺國 前 法務部 長官 搜査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當時 與圈에 尹 大統領을 감싸는 等 掩護에 나섰던 것으로 傳해졌다. 文在寅 政府의 킹 메이커였지만 그도 尹錫悅 大統領이 國民의힘 所屬으로 大選에 出馬할 것이라고 豫想하진 못했던 것이다. 所聞이 茂盛하고 論爭的인 人物, 楊正哲에 對한 한 政治權 人事의 評價다. “楊正哲은 實際로 킹 메이커 役割을 하고 大統領을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實際 企劃力度 認定한다. 다만 그 過程이 透明한 게 아니라 大部分 陰謀的이어서 恒常 帳幕 뒤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陰凶한 이미지가 생긴 거다. 그리고 本人이 또 그걸 즐긴 것 아니냐? 뒤에서 自己가 操縱하고 自己의 힘을 慇懃히 誇示하고 다닌 거다. 그러니까 엇갈리는 評價는 自業自得이지 뭐….”정부 誕生의 一等功臣이면 어느 자리라도 맡고 싶은 게 人之常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楊正哲 前 民主硏究院長은 事實上 無報酬 名譽職인 싱크탱크 首長만 맡았고 끝까지 原則을 지켰습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次例 도와달라는 要請을 받았지만 자리는 限死코 固辭하고 隱遁을 志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公開席上이나 言論에 登場하지 않을 計劃이라는 게 兩 前 院長 知人들의 傳言입니다. 얼마 前 私席에서 公職은 아니더라도 敎授로 後輩들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다른 적합한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量비는 먹고살 方道는 있는가?’라는 盧 前 大統領의 말처럼 生計는 維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過去 大企業 다니며 모은 돈 等으로 生活하면 足하다고 했습니다.“배 째드리지요.”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에 對해서도 다시 確認해봤습니다. 2006年 8月 劉震龍 當時 文化관광부 次官이 人事 請託을 들어주지 않자 大統領弘報企劃祕書官이었던 그가 靑瓦臺 行政官을 通해 이 같은 말을 했다고 報道된 적이 있습니다. 當時 記事를 찾아보니 兩 前 院長은 줄곧 事實이 아니라고 解明해왔지만 그의 解明은 저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의 强性 이미지만 덧씌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對해 當時 事情을 正確히 알고 있는 노무현 政府 靑瓦臺 出身 人士들에 따르면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楊正哲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고 누가 들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가 全部인 ‘카더라’였다”며 “當時 訴訟을 해서라도 眞僞를 가렸어야 했는데 當時 民政首席室 挽留로 積極 對應하지 못한 것이 千秋의 恨”이라고 抑鬱해한 것으로 傳해졌습니다.그가 2018年 펴낸 ‘世上을 바꾸는 言語’ 冊에는 平等, 共存, 配慮 等의 槪念으로 우리 意識을 左右하는 言語의 重要性을 力說하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을 아는 그이기에 誤解는 誤解였나 보다 생각이 듭니다. 必要에 따라 거친 言語를 쓰며 惡役을 맡았지만 알고 보면 부드럽고 文才(文才)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帳幕 뒤에서라도 統合과 협치를 위한 政治權을 만들어가는 데 寄與해주길 바랍니다.다음 法廷冒瀆 [23話]는 與黨의 ‘一타講師’ 長官님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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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政治 꿈꾸던 ‘企劃者’ 金한길… 中道實用 ‘ONE WAY’[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以下 金한길)은 汝矣島에서 ‘戰略企劃通’으로 불린 代表的인 ‘브레인’이다. 金大中 盧武鉉 前 大統領의 選擧 企劃을 맡았고 DJ政府 靑瓦臺 政策企劃首席祕書官, 盧武鉉 前 大統領 引受委 企劃特報,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議員 時節 戰略企劃委員長, 總選企劃團長 等 그의 履歷엔 唯獨 ‘企劃(企劃)’이 많다. 2000年과 2004年 두 番이나 總選企劃團長을 맡은 것은 거의 前例가 없다. 選擧 ‘판’을 짜고 ‘킹메이커’ 役割을 잘하는, 汝矣島式 表現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2016년 20年 가까이 몸담았던 민주당을 떠난 뒤 국민의당을 거쳐 尹錫悅 大統領을 도와 現在 長官級 國民統合委員長을 지내고 있다. 愛煙家였던 그는 2018年 肺癌으로 死境을 헤맸지만 新藥을 통해 奇跡的으로 完治됐고, 다시 政治의 中心에 뛰어들었다. 野黨 支持者들은 그가 脫黨했을 때마다 그를 向해 間或 ‘創黨 專門家’라거나 ‘政黨 브레이커(breaker)’라는 等의 非難을 해왔다. 민주당에 있을 때부터 中道 路線으로 ‘禹클릭’한다는 攻擊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實踐해온 政治는 ‘끝까지 抛棄하지 않고 버티면서 希望을 探索하는 職業’이요, DJ의 金言人 ‘書生적 問題意識과 商人的 現實感覺’을 조화시키는 中道實用의 政治였을 것이다. DJ가 迎入했지만 그는 朴趾源 前 國家情報院長과 같은 DJ맨도 아니었다. 盧武鉉 前 大統領이 그를 아꼈지만 親盧(親盧武鉉)系와 特히 角을 세우며 ‘系派 霸權主義’를 외친, 어쩌면 政治權의 외로운 異邦人이었다. ● 金에게 ‘諸葛孔明’級으로 評價한 김중권 前 祕書室長베스트셀러 作家였던 김한길은 1996年 14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DJ에 依해 迎入돼 새정치국민회의 比例代表 候補로 當選되며 政治人으로 變身한다. 總選 選對委 代辯人을 거쳐 總裁特報, 1997年 大選에서 TV 討論會 等을 맡아 DJ의 勝利를 이끌었고 大統領職引受委員이자 當選者 公報팀長, 代辯人 等으로 活躍했다. 1999年 3月 大統領政策企劃首席祕書官으로 拔擢되면서 比例代表 議員職을 辭退했다. 政策企劃首席으로서 各種 政策 調律과 行事 企劃, 國政弘報 等을 맡았다. 小說家이자 放送人 經驗을 活用해 DJ의 메시지 및 弘報戰略 等을 맡았던 것이다. 2000年 總選을 앞둔 1999年 11月 總選 出馬者들이 靑瓦臺를 나가자 DJ는 “室長도 나가고, 政務首席도 그만두는데 김한길 首席만큼은 絶對로 안 된다. 金 首席은 여기 남아 繼續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金한길의 總選 出馬를 反對했다고 한다. 하지만 以後 DJ가 마음을 바꾸면서 그에게 “總選企劃團長을 맡아라”는 任務를 주며 2000年 새千年民主黨 比例代表 候補로 總選에 내보냈고 그는 다시 國會로 돌아왔다. 黨 總裁를 겸하던 DJ가 그에게 比例代表 議員職을 두 番이나 준 것이다. DJ는 그해 9月엔 朴趾源 當時 長官의 後任으로 그를 文化관광부 長官으로 指名해 김한길은 1年間 內閣 經驗을 쌓았다. 2001年 10月 比例代表 議員職을 버리고 서울 구로乙 再選擧에 出馬했지만 落選했다. DJ 政府의 김중권 前 大統領祕書室長은 함께 呼吸을 맞췄던 金한길에 對해 이렇게 評價했다.“역사가들은 中國 歷史上 뛰어난 參謀의 典型으로 諸葛孔明을 擧論하면서 그를 ‘式치(識治)의 良才(良才)’라고 評했다. 어려운 時期에 大統領을 至近 距離에서 補佐하면서 그의 眞面目을 直接 體驗한 사람의 立場에서 評하자면, 金 首席은 이 時代가 必要로 하는 ‘食値의 良才’라는 評價가 決코 過分하지 않은 사람이다.” - ‘김한길의 希望政治’ 推薦辭에서 -김한길은 DJ에 對해 자주 言及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같은 분”이라며 “내가 評價하기에 너무나 큰 巨人”이라고 했다. ● “金한길 아니었으면 내 當選도 없었다”고 했던 盧 김한길은 向後 非盧(非노무현)系의 座長, 首長으로 불렸지만 親盧, 親文(親文在寅)의 系派主義를 警戒했을 뿐 盧武鉉 前 大統領에 對한 ‘舍監’은 없었다. 2002年 9月 大選 支持率이 下落했던 盧 前 大統領은 김한길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選對委 미디어特別本部長을 맡기면서 事實上 全權을 줬다고 한다. 그는 노무현-정몽준 候補 單一化 協商에선 盧 候補 側 協商團 代表로 나서 鄭 候補 側과 單一化 協商을 妥結하기도 했다. 大選 直後에는 當選者 企劃特報를 맡았다.노 前 大統領은 그를 아꼈다는 逸話도 많다. 大選 勝利 뒤 少壯派 議員들과 夫婦同伴으로 63빌딩에서 自體 祝賀宴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房에 盧 前 大統領이 다른 사람들과 食事 中이었다. 盧 前 大統領은 잠깐 그 자리에 들러 金한길 夫婦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金한길 本部長 아니었으면 내 當選도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議員들의 立場에선 別로 氣分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以後 김한길은 다른 議員들로부터 慇懃한 牽制를 받았다고 한다. 2003年 열린우리당 創黨이 推進되자 그도 새천년민주당을 脫黨해 열린우리당에 合流했고 2004年 17代 總選 서울 九老乙 地域區에서 當選됐다. 3選 議員으로서 當時 國會 建設交通委員長을 지냈고 2006年엔 열린우리당 院內代表로 選出됐다. 88 臺 49의 歷代級 票 差異로 當選됐다. 하지만 2006年 6月 치러진 4回 地方選擧에서 열린우리당이 16個 廣域團體 中 全北 1곳에서만 이기고 當時 한나라당이 廣域自治團體 12곳을 차지하는 等 慘敗하고 2007年 大選 敗北 危機感이 돌자 黨內 新黨 論議에 불이 붙기 始作했다. 같은 해 11月 當時 院內代表였던 김한길은 國會 交涉團體代表演說에서 “열린우리당의 創黨은 우리 政治史에 크게 記錄될 만한 意味 있는 政治實驗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政治實驗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番 ‘다시 始作하는 아침’이 必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그는 脫黨하기 前날 靑瓦臺에 가서 盧 前 大統領을 만났다. 그는 “當時 박상천 代表의 ‘꼬마 민주당’과 힘을 합쳐야 된다”고 主張했지만 盧 前 大統領은 “地域主義 克服을 외친 내가 어떻게 地域黨과 합치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열린우리당을 나오기 前날 만난 盧 前 大統領은 내 옆에서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내가 金 代表에게 陳 마음의 빚은 여기에 담아두고 잊지 않겠습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때문인지 盧 前 大統領이 脫黨한 다른 議員들에 對해선 實名을 擧論하며 非難했지만 나에 對해서는 끝까지 辱을 안 했다. 그 마음의 빚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 생각했다.” - 取材 메모 中 - 結局 김한길은 열린우리당을 脫黨해 2007年 統合新黨모임을 이끌며 中道改革統合新黨을 創黨했고 열린우리당 創黨 當時 盆唐됐던 민주당과 統合 等 合從連橫 過程을 거쳐 11月 大統合民主新黨으로의 統合을 完成시키는 데 寄與했다. 하지만 2007年 12月 大選은 鄭東泳 大統合民主新黨 候補의 慘敗로 끝났다. 김한길은 “大選 慘敗 後 아무도 責任지는 사람이 없다는 指摘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부터 旣得權을 버려야겠기에 18代 總選 不出馬를 決心했다”며 不出馬를 宣言했다. 當時 서울에서 九老乙을 包含한 4곳만 民主黨 勝利가 豫想됐는데 當選될 수 있는 사람이 責任을 져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 4選 議員으로 復歸하자마자 全黨大會 出馬4年間 野人으로 지냈지만 空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年 뒤 김한길은 選擧를 한 달餘 앞두고 서울 廣津甲에 戰略公薦을 받아 當選됐다. 韓明淑 當時 代表의 出馬 勸誘를 여러 次例 辭讓했지만 公薦 마감日이 끝난 뒤에도 出馬 要求가 거듭되자 이를 拒絶하지 못한 것이다. 大選을 8個月 앞둔 時期였다. 김한길은 總選 直後 當選者 身分이 된 2012年 4月부터 存在感을 보였다. 그는 “總選 敗北의 重要한 原因이 系派 公薦”이라며 쓴소리를 始作했고 當時 ‘李海瓚 黨 代表-朴趾源 院內代表’로 指導部를 꾸리자는 이른바 ‘李-朴 談合’ 論難을 批判하기 始作했다. 그는 곧장 周邊 議員들의 督勵를 받아 6·9 全黨大會에 黨 代表 候補로 나섰다. 이해찬 前 代表가 24.3%(6萬7658票)를 얻어 金한길(23.8%·6萬6187票)을 0.5%포인트(1471票) 差로 제치고 1位를 차지했다. 忠南과 釜山을 除外한 地域 代議員 投票에서 김한길이 앞서 있었지만 모바일 投票에서 結果가 뒤집어졌다. 모바일 選擧人團 不法 募集 疑惑이 불거졌지만 그는 僧服을 宣言했다. 몇 年 뒤 그가 했던 이야기다. “2012年 黨 代表 競選에서는 모바일 投票에서 뒤집히면서 내가 지고 李海瓚이 當選되지 않았나. 나를 따르던 議員들은 全部 다 不服 宣言하라고 亂離를 쳤다. 그런데 그때가 大選 6個月 남았을 때다. 내가 不服하면 黨이 엉망이 되고 大選에서 이길 可能性이 없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 李海瓚 代表에게 다음 날 ‘結果를 受容하겠다. 代身 이番 地方 競選에서 나타난 黨員들 票心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고 이 代表도 ‘알겠다’고 했다.” - 取材 메모 中 -以後 민주당 大選 候補였던 文在寅 前 大統領과 安哲秀 候補 側이 單一化 協商을 進行하는 過程에서 安 候補 側이 黨 革新을 要求해 11月 李海瓚 當時 代表가 辭退했다. 大選에서도 敗北하면서 이듬해 치러진 5·4 全黨大會에서 김한길이 黨 代表로 選出됐다. ● 野黨 代表 時節, 政權交替 위해 안철수 新黨과 統合 決斷第1野黨 代表가 된 김한길은 그해 8月 國家情報院의 大選 介入 疑惑 等에 對한 大統領의 謝過 等을 要求하며 45日間 서울廣場 天幕黨舍에서 露宿 籠城을 벌이며 朴槿惠 政府와 角을 세웠다. 國會를 植物 狀態로 마비시켰다는 批判도 받았지만 野黨의 存在感을 보여줬다는 肯定的 評價도 있었다. 다음은 朴槿惠 前 大統領에 對한 그의 逸話다. “처음 만난 게 ‘박근혜 隨筆家’였다. 내가 MBC 토크쇼 進行할 때였는데 여러 次例 出演 提議가 들어왔다. 클로징 멘트에서 ‘우리는 同甲인데 같은 歲月을 살았지만 서로가 너무 다른 歲月을 살았다. 朴槿惠 氏가 어머니를 代身해 靑瓦臺에서 안主人 노릇을 하는 동안 나는 緊急措置로 監獄에 갇힌 아버지를 面會 다니면서 歲月을 까먹은 사람이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한 時間 동안이나 사이좋게 얘기한 것은 아마 좋은 일일 겁니다’ 뭐 이런 멘트였는데 이거를 빼달라고 要求했다. 結局 나가긴 나갔더라. (中略) 大統領이 돼서도 會同하면 便하게 얘기했다. 朴 大統領도 格式을 안 따지더라. 恒常 準備 많이 해서 手帖에 빼곡히 써온다. 中間에 내가 말을 끊고 하면 다시 볼펜으로 짚어가면서 써온 것을 읽더라. 내가 열린우리당 院內代表 時節에 朴 大統領이 與黨 代表였다. 生日날 꽃을 사 들고 찾아갔더니 記者들이 많이 와 있는데 記者들에게 그가 ‘우리가 同甲인데 난 머리에 물감을 안 들였다’고 내 白髮을 가리키며 얘기해 한바탕 웃었다. 재밌는 구석이 있다.” - 取材 메모 中 -김한길은 2014年 3月 創黨을 推進하던 안철수 議員 側과 合黨을 宣言해 새政治民主聯合을 出帆시켰다. 中道層을 吸收하고 野圈 統合을 이뤄내야 政權交替와 大選 勝利가 可能하다는 平素 所信을 發揮한 것이다. 北韓人權法을 與野 合意로 通過시켰고, 北韓의 武力挑發을 批判하는 等 튼튼한 安保를 强調하며 中道 路線을 强化했다. 그 탓에 黨內 親文 陣營 等 傳統的인 支持層으로부터 ‘禹클릭’을 한다는 批判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批判을 甘受하며 “陣營 論理와 막말과 泥田鬪狗로 國民을 不安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던 政治와 訣別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合當한 뒤 안철수 議員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 共同代表를 맡았던 그는 7·30 再·補闕選擧에서 敗北하자 다음 날 卽刻 黨 代表職에서 辭退했다. 以後 非對委 體制를 이어가던 黨은 2015年 2·8 全黨大會에서 文在寅 前 大統領이 代表로 選出되며 親文-鼻紋 陣營 間 葛藤이 極甚해졌다. 이 무렵부터 金한길度 제3지대 新黨 創黨과 ‘創造的 破壞’를 苦悶하기 始作했다. 2015年 1月 그가 했던 이야기다.“우리 政治가 全般的으로 兩黨 中心 體制에서 敵對的 共生 關係에 安住하고 있다는 指摘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指摘을 克服하기 위한 眞摯한 摸索이 있어야 된다. 重要한 問題예요. 只今은 理念과 地域과 世代 間의 一種의 分裂을 基盤으로 旣得權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果敢하게 그 旣得權을 벗어버린다는 覺悟가 있어야 우리 政治에 새로운 場이 열리지 않겠는가. 敵對的 共生이 아닌 競爭的 相生 關係가 되어야 國民으로부터 拍手를 받고 國民이 政治에 希望을 가지지 않겠나.” - 取材 메모 中 -以後 김한길은 親文 陣營의 霸權政治에 絶望하다가 안철수 議員과 함께 국민의당을 創黨했다. 2016年 總選을 앞두고 當時 野圈의 壓倒的 勝利를 위해 민주당과 首都圈에서의 野圈連帶를 剛하게 主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主張이 貫徹되지 않자 責任 政治 次元에서 不出馬를 宣言했다. 當時 國民의黨은 38席을 얻어 躍進했다. 連帶를 拒否한 安 議員이 옳았다는 視角도 있지만 萬若 金한길의 主張대로 野圈連帶가 成事됐다면 (국민의당이) 더 큰 成果를 거뒀을 것이라는 指摘도 있다.▶섣부른 不出馬 金한길… DJ 後光 못 챙긴 金弘傑…結果的으로 朴 前 大統領이 彈劾되면서 치러진 2017年 5·9大選에서 文 前 大統領이 當選됐다. 政治權의 諸葛孔明으로 불렸던 그의 判斷도 結果的으론 어긋난 셈이다. ● 2013年 國精院 댓글 搜査팀長이던 尹과 妙한 因緣… 킹메이커 된 金國民의黨의 大選 走者였던 안철수 議員은 大選에서 敗北했고 바른未來黨과 合當하며 結局 사라졌다. 安 議員이 다시 국민의당을 創黨했지만 그마저도 2022年 國民의힘과 統合됐다.이 무렵 김한길은 政治舞臺에 거의 나서지 않으며 休止期를 가졌다. 肺癌 宣告를 받은 뒤 放射線 治療 等을 받고 2018年 12月 3週假量 意識을 잃을 程度로 死境을 헤맸다. 多幸히 新約이 몸에 잘 맞아 事實上 完治됐다. 자연스럽게 政界를 隱退한 것으로 보였지만 世上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尹錫悅 大統領이 有力 野圈 大選走者로 急浮上하면서 그를 찾아왔고 그는 結果的으로 킹메이커로 다시 成功한다. 어찌 보면 尹 大統領이 只今 자리에 있는 것도 김한길과 無關치 않다. 當時 김한길은 議員總會에서 2013年 國精院 댓글 搜査팀長이었던 尹 大統領에 對해 “尹錫悅 檢事와 같이 正義로운 檢事를 野黨 國會議員들이 保護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여러 次例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野黨 法司委員들이 尹 大統領을 國監 證人으로 申請했다. 이어 法査委에 나온 尹 大統領은 外壓을 暴露하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면서 國民들에게 깊은 印象을 남겼다. 이날 金한길度 法査委 會議室을 찾아 구석에서 ‘檢査 尹錫悅’을 멀리서 처음 봤다고 한다. 김한길은 尹 大統領에 對한 마음의 빚도 있었다. 場外鬪爭을 하던 김한길이 朴 前 大統領과 領袖會談에서 尹錫悅 檢査 等 댓글搜査팀의 身分 保護를 要求했는데 이듬해 1月 人事에서 左遷됐기 때문이다. 自身의 要求가 오히려 尹 大統領을 左遷되게 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김한길은 2014年 7·30 再補選 當時 大邱高檢으로 左遷됐던 尹 大統領에게 出馬 意思를 打診하기도 했다. 2019年 5月 서울中央地檢長 時節 尹 大統領이 했던 이야기다. “김한길 前 民主黨 代表가 2014年에 누구 통해서 再補選 나오라고 하길래 ‘政治 안 합니다’고 했어. 2016年에도 민주당, 國民의黨에서도 電話가 오더라고. 근데 내 適性도 아니고 國精院 事件 裁判 進行 中인데 政治판 간다는 게 말이 안 돼서 氣分 안 나쁘게 拒絶했어. 裁判 進行 中인데 性向이 野黨 쪽이라 起訴한 거 아니냐는 말 나올 수 있으니까 黨에 負擔될 거라고 말했어.” - 取材 메모 中 - 以後 種種 만남을 이어오던 두 사람은 檢察總長職에서 辭退한 尹 大統領이 本格的으로 大選 出馬를 決心하면서 政治的 멘토와 멘티 關係로 發展했고 김한길은 또 한 番 킹메이커로 불렸다. ● 尹과 자주 獨對하며 懸案 論議“行政府와 立法府 關係라고 볼 때 이 與黨과 靑瓦臺 亦是 牽制와 均衡이 原則인 것이죠. 우리 政治가 크게 잘못된 거 하나가 靑瓦臺가 汝矣島를 우습게 여긴다는 거죠. 靑瓦臺와 與黨과의 關係는 宏壯히 어려운 關係거든요. 靑瓦臺가 汝矣島, 國會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요. 特히 與黨과의 關係가 與黨이 靑瓦臺의 卒이 아니잖아요. 問題가 크지요. (中略) 왜 政治의 中心이 國會與野 하냐. 어쨌든 國會議員들은 民心에 敏感하니까 이렇게 莫無可奈 할 수 없거든요.” - 取材 메모 中 -朴槿惠 政府 時節인 2015年 1月 김한길이 筆者에게 했던 이야기다. 程度의 差異는 있지만 尹錫悅 政府에 對해서도 適用될 수 있는 部分이 있다. 김한길은 尹 大統領과 자주 獨對하며 懸案에 對해 이야기를 나누고 助言과 쓴소리도 적지 않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尹 大統領을 돕기로 한 그였지만 모든 게 計劃된 대로 흘러간 것 같지는 않다. 김한길과 가까웠던 한 野黨 人士는 金한길로부터 “尹錫悅 大統領이 國民의힘이 아닌 第3地帶로 갈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傳했다. 敵對的 共生關係인 兩黨制를 깨고 第3黨을 꿈꿨던 것이다.다음은 金한길의 말이다. 그를 向한 世上의 삐딱한 視線에 對한 抗辯이자 理想主義者의 面貌가 드러난다. “지난 大選 마지막 討論會에서 尹錫悅 李在明 안철수 等 모든 候補들이 政治發展의 첫 段階로 韓國이 多黨制가 돼야 된다는 데 同意했다. 多黨制는 結局 兩黨이 아닌 第3黨이 있어야 된다. 政黨 設立은 犯罪도 아니고 憲法에 있는 基本權이다. 그런데 創黨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攻擊을 받고 創黨하려고 하면 逆賊이 된다. 내가 비록 失敗는 했지만 3黨을 만들려고 했던 努力들이 적어도 非難받을 對象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大選 끝나고 본 文句 中 마음에 와닿는 文句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世上도 수많은 理想主義者의 挫折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는 말이다.”정치권에선 김한길 委員長의 向後 役割에 對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大統領祕書室長, 國務總理 等 現 政府에서 尹錫悅 政府의 成功을 위해 役割을 할 可能性도 있습니다. 그의 어깨가 무거운 理由입니다.김 委員長은 尹 大統領에 對한 信賴를 갖고 있습니다. 率直하고 뚝심 있고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보기보다 훨씬 더 괜찮은 政治人이라는 것입니다. 政治 經驗이 적은 尹 大統領의 不足한 點을 그가 잘 채워주고 그가 말했던 ‘人間化의 時代’를 여는 데 寄與하기를 期待합니다. 다음 [22話]는 다시 野黨 政治人으로 넘어갈 豫定입니다. 지난 政府의 ‘킹메이커’로 불린, 好不好와 評價가 克明하게 엇갈리는 野人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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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放浪이여…베스트셀러 作家였던 ‘이방인’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내가 생각하는 政治는 이런 거야. 우리社會 構成員들 저마다의 꿈과 自由의 한部分씩을 抵當 잡아 생긴 큰 힘으로 뭔가를 해내서, 그래서 結果的으로는, 사람들에게 抵當 잡았던 것보다 더 큰 꿈과 自由를 되돌려주는 일이야.“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以下 金한길)李 1981年에 쓴 短篇小說 ‘세네카의 죽음’에는 男子 主人公이 이같이 말하는 內容이 나온다. 作家로서 이름을 날리던 김한길이 政治에 뛰어들게 된 理由가 담겨 있다. 김한길은 學窓 時節 模範生도 아니었고 旣成 政治人의 視角에서도 ‘異端兒’였다. ‘모든 試驗問題에는 模範答案만 있을 뿐 正答은 없다’고 생각하고, ‘弄談이나 하면서 實속 없이 살자’고 생각했던 閑良이고 ‘아무것도 覺悟하지 않고 딱 一 年만 살아보고 싶다’던 靑年이었다. 삶을 사랑하고 離別할 줄 알며, 아파할 줄 알고, 成長痛을 겪으며 靑春을 보냈다. 그는 한때 젊은이의 偶像이었고 女性 팬이 많았다. 本人 스스로 어느 女性雜誌에서 當時 大統領이었던 김영삼 前 大統領(YS)을 제치고 ‘인기남 1順位’였다고 傳한 적이 있다. 實際 그는 當代 最高 女俳優였던 탤런트 崔鳴吉 氏와 1995年 結婚해 한길이 명길이 ‘길길이’ 夫婦가 됐다. 作家로서 이름을 날렸고, 放送人으로도 活動하다 政治權에 進出했다. 民主黨에서 4選 議員과 민주당 代表를, 김대중 政府에서 文化部 長官과 大統領政策企劃首席祕書官을 지냈다. 中途改革 性向으로 脫黨과 中道政黨 創黨을 反復했던 그는 尹錫悅 大統領의 멘토 役割을 하며 長官級인 國民統合委員長을 맡고 있다.● 政治인 아들로 日本에서 태어난 金… 永遠한 異邦人 김한길은 김철 全 社會민주당 委員長의 3男 中 2男으로 1953年 日本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留學 中 그가 태어난 것이었고 일곱 살 때까지 日本에서 컸다. 그 時節부터 그는 異邦人이었다.“우리는 勿論 間或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나를 어김없이 ‘조센징’이라고 놀렸다. 日本 사람들의 어느 名節날, 때때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를 끈으로 묶어 앉혀놓고 自己들이 지어낸 노래를 불렀다. 兆五世엔징…兆五世엔징…그러면서 한 녀석씩 내게 다가와서 나를 쥐어박았다. 조센징에게는 그러는 것이 너무나 當然하다는 듯이. 그 얼마 뒤부터 나는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우리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조센징들의 나라에서 初等學校에 다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다시 始作해보려고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주 착한 아이인 체하였다. 새로 사귄 親舊들이 나를 ‘쪽발이’라고 놀려대기 前까지는. (中略) 나는 나를 조센징이라고 놀려대던, 只今은 四十 代가 돼 있을 어린 날의 옛 親舊들을 진작부터 容恕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그 옛 親舊들을 容恕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내가 더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잊자 한들 잊혀질 일은 決코 아니었다.”- 1995年 8月 16日 者 東亞日報 칼럼 ‘김한길의 世上읽기 <日本의 옛 親舊에게>’ 中에 -韓國의 代表的인 社會民主主義 系列 政治人이었던 아버지는 家庭에 疏忽했다. 外國을 오갔고 1971年엔 社會黨 候補로 大選에 出馬하기도 했고, 朴正熙 政府에서 彈壓을 받았다. 1975年 緊急措置 違反으로 懲役 2年의 實刑을 宣告받고 服役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進步政黨 履歷으로 因해 公安當局의 監視를 받은 적도 있었고 大學生일 때 쓴 글이 問題가 돼서 機關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時代의 反抗兒로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누군가를 미워했던 양으로 친다면, 가장 많이 미워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늘 民主化와 統一과 民族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當身이 거느린 食率들에게는 限없이 無力했던 分. 世上에서는 壅固執, 反骨로 불리면서도 정작 當身 둘째 아들의 反抗에는 束手無策이었던 분. 統一이고 民主化고 개뿔이고 間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神經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가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 - 1994年 7月 5日 者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寄稿文 - 20代의 김한길은 “무슨 꿈 같은 것도, 希望 같은 것도, 野望도 欲心도 없었다. 그런 알량한 낱말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조차 許諾되지 않는 狀況이었다. 何如間 그랬다”고 썼다. 合格한 大學을 때려치우고 구두닦이를 하기도 했다. 건국대 國文科에 入學했다가 除隊한 뒤 政治外交學科로 轉科해 卒業한 뒤 서울 中央女高에서 暫時 敎鞭을 잡기도 했다. 1978年 김한길이 軍에 入隊하고 나서 처음 넉 달 동안에 쓴 ‘兵丁日記’는 月刊 ‘문학사상’에 실려 話題가 됐지만 中央情報部와 保安司는 이 글이 완간되는 것을 許諾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한길이 美國行을 擇한 것도 그런 理由였다. 獨裁政權下의 故國은 憂鬱했고 未來는 보이지 않아 不安하게 했다. “내가 쓴 어떤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理由로 내가 某 機關의 地下室에 끌려가서 惹端을 맞고 나온 뒤로는, 周圍 사람들이 더욱 積極的으로 내게 勸했다. 一旦은 海外에 나가서 觀望해보는 게 좋을 거라고.” - 金한길 隨筆集 ‘눈뜨면 없어라’ 中 - ● 美國 건너간 뒤 注油所, 햄버거 가게 等에서 일하다 5年 만에 言論社 支社長1981年 6月 美國 로스앤젤레스(LA)에 到着한 그는 木手 補助, 注油所 計算員, 햄버거 가게 料理師補助 等으로 일하기도 했다. 黑人들이 많이 살아 ‘흑석동’으로 불린, 紅燈街에 있는 注油所에서 防彈琉璃 안쪽에서 카운터를 맡았다. 밥벌이를 하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지만 勞動과 生活의 무게는 그를 짓눌렀다. 睡眠 不足과 지나친 吸煙으로 인한 頭痛에 시달렸다. “나는 注油所 主人인 崔 氏를 미워한다. 崔 氏는 每日 아침 交代 時間보다 三四十 分씩 늦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單 한 番도 未安하다고 말하지 않는 그를 나는 眞짜로 미워한다. 나를 三四十 分씩 덤으로 더 부려 먹는 것이 自身의 純利益이라고 생각하는 崔 氏의 그 낯간지러운 꾀를 미워한다. 또 崔 氏는 내게 單 한 番도 補修를 제날짜에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를 더 미워한다. 며칠을 참다가 내가 마지못해 말을 꺼내면 그제야 잔뜩 목에 힘을 주며 돈을 던져주는 崔 氏를 나는 속으로 미워한다. 일한 만큼의 正當한 報酬를 받는 나를 괜스레 초라해지게 만드는 崔 氏를 나는 無知無知 미워한다. - 金한길 隨筆集 ‘눈뜨면 없어라’ 中 -“完全히 美國 사람이 되지는 말라는 너희들의 忠告는 엉터리다. 생각해보렴. 내가 어디 女湯에 뛰어든다고 갑자기 女子가 되겠니, 이 바보들아. 우리는 어떤 ‘人種’이나 한 ‘世代’에 對해서가 아니라 ‘사람’ 그 自體에 對한 理解를 키워가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길만이 世上에 對한 우리의 숱한 疑問과 混沌을 조금씩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거야.” - 金한길 隨筆集 ‘눈뜨면 없어라’ 中 弟子들에게 보낸 便紙 -이듬해 3月 以後 그는 美洲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支社에 記者로 就職했고 中央日報 美洲支社長까지 지냈다. 美國에 온 지 5年 만에 이룬 成功이었다. 그는 美洲한국일보 記者로 일하면서부터 억척으로 일했고 남에게 지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충성스럽게 일하고 뛰며, 己巳며 칼럼을 써제꼈다. 1987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강원용 牧師가 組織委員會 文化藝術行事推進委員長을 맡으면서 業務를 도와달라고 해 韓國으로 돌아와 委員會에서 일을 始作했다. 이듬해 姜 牧師가 放送委員長을 맡으면서 放送위 企劃局長으로 일했다.그러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고 글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1981年에 小說 ‘바람과 剝製’가 문학사상에서 小說 部門 新人賞을 受賞했고 ‘兵營日記’, ‘美國日氣’ 等 에세이와 ‘女子의 男子’, ‘駱駝는 따로 울지 않는다’ 等 小說을 써 베스트셀러 作家가 됐다.1992년 3卷짜리 長篇小說 ‘女子의 男子’는 400萬 部가 넘게 팔렸고 1993年 MBC에서 같은 이름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放送局에서 構成 作家로 일하고 있는 男子 主人公과 大統領의 외동딸인 女子 主人公의 러브스토리로 드라마에선 정보석 김혜수 氏가 主演을 맡았다. 김한길은 1988年 發表된 歌手 조영남의 ‘화개場터’를 作詞했다. 2015年 1月 그가 直接 했던 이야기다.“내가 화개場터가 있다는 걸 조그마한 記事를 보고, 嶺湖南 사람이 어울리는…그래서 作詞하자고 했는데 조영남 氏가 健全歌謠라 팔리지도 않는다며 反對했다. 그런데 조 氏가 레코드 만드는 데 노래가 몇 個 없어서 화개場터도 넣은 거야. 그게 曺 氏 노래 中 톱10에 들어간 唯一한 노래가 된 거야. 그게 26年 前인데 著作權法이 없었다고 조 氏가 얘기하더라고. 어쨌든 그때 美國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嶺湖南 問題가 오래갈 거 같은데 講演하고 冊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래서 가요 만들자고 한 것이다…국민들 마음속에 嶺湖南이 和合해서 같이 살면 좋겠다…그런 마음을 담아서 우리나라 全體가 하나의 화개場터가 됐으면 좋겠다고 作詞를 했다.” - 取材 메모 中 -● 作家·放送人 等으로 全國的 人氣 누린 金小說 外에도 위트와 諷刺, 寸鐵殺人 等이 담긴 칼럼을 썼고 라디오와 TV 放送에서 토크쇼를 進行했다. 이 過程에서 배우자 崔鳴吉 氏를 만났다. 두 番째 結婚이었다. MBC 라디오의 進行者로 平素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1994年 MBC 放送大賞 라디오 部門 受賞者로 나란히 選定돼 各種 行事에 參席하면서 자주 만난 것이 서로에 對한 好感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契機가 됐다고 한다. 대뜸 1995年 1月 그가 “나에게 시집오면 어떻겠느냐”고 電話로 請婚을 했고 崔 氏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무렵부터 本格的인 政治活動을 하고 있었다. 自身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마지막에 和解한 것도 影響을 미친 것 같다. “나는 이 땅에서는 可望이 없다는 周圍 사람들의 말을 좇아 美國으로 도망갔는데 아우의 便紙가 나를 못살게 굴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내가 當身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아. 偉人傳을 읽을 때처럼 距離感이 느껴지는 거야. 너무나 성실하게 自己 갈 길을 가는 한 巨人을, 決코 挫折할 줄 모르는 한 英雄을 아버지에게서 보는 거야.’ 文民政府가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셨다. 나는 이제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의 열 倍쯤 내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 1994年 7月 5日 者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寄稿文 -1996年 15代 總選을 앞두고 김영삼 前 大統領과 김대중 前 大統領 等 與野 兩쪽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韓國 社會의 地域主義와 地域 葛藤이 第一 큰 걸림돌이라고 봤던 그는 文化的으로 차별당하는 쪽에 힘을 보태는 게 맞다는 생각에 野黨을 擇했다. 새정치국민회의에 入黨해 比例代表 議員으로서 本格的인 政治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자주 言及했던 單語 中 하나는 希望이었다. 그가 政治를 하게 된 理由는 여기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政治는) 차라리 散文 쪽에 가깝다. 우리들 自身과, 우리가 모여 사는 社會의 크고 작은 實體와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일이 政治의 始作이니까 그렇다. 우리의 現實을 고스란히 담은 거울 속의 風景은 種種 荒凉하고 을씨년스럽다. ‘動物의 王國’에서처럼 野卑하고 殘忍하고 冷酷하다. 그 속에서나마 끝까지 抛棄하지 않고 버티면서 希望을 探索하는 職業이 政治가 아닐까 싶다.” - 著書 ‘김한길의 希望日記’ -어느 날 9살 된 아들이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慶尙道와 全羅道를 가로지르는 / 蟾津江 줄기 따라 화개 場터엔 / 아랫마을 河東 사람 윗마을 求禮 사람 / 닷새마다 어우러져 場을 펼치네~” 그래서 저도 따라 부르다가 “아빠가 잘 아는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作詞했단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조영남 氏의 ‘화개場터’를 어린이가 아는 것도 神奇했습니다. 그 무렵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의 이야기를 한 番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國民統合委員長 자리를 맡았을 때 참 적합한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異邦人 經驗이 많았고 地域主義와 系派主義의 問題를 直視했고 늘 統合과 葛藤 解消, 希望을 이야기했습니다. (勿論 그의 對蹠點에 있던 政治人들은 ‘政黨 브레이커’라거나 葛藤을 만드는 人物이라고 批判했습니다.) “人間化時代라는 것은 窮極的으로 追求해야 하는 時代的 價値이자 時代精神입니다. 所謂 우리가 겪은 産業化 民主化 時代 다음에 어떤 時代를 우리가 志向해야 하는가. 産業化 時代가 最小限의 物質을 追求하고 民主化 時代가 民主的 制度를 갖춰가는 時期였다면 이제 物質과 制度가 사람을 위해서 쓰이는 時代가 되어야 된다는 것. 그런 意識은 相當 期間 夙成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國民이 그런 認識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希望을 살려 나가는 게 우리 政治를 살려 나가는 것입니다.”그의 글에선 휴머니즘이 묻어납니다. 短文을 驅使하며 위트와 유머가 담겼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피츠제럴드의 ‘偉大한 개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番 20禍에서 冊에 나오는 그의 아픈 個人事는 일부러 擧論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金 委員長이 繼續 作品 活動을 했다면? ‘政治人 金한길’로 살았을 때보다 우리 社會에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 에선 그의 政治活動을 中心으로 다뤄보겠습니다.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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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황형준]‘사법의 政治化’ 속에 存在感 잃어가는 憲裁

    2016年 12月 9日 國會가 朴槿惠 前 大統領에 對한 彈劾訴追案을 통과시키자 憲法裁判所는 國家的 混亂을 早期에 解消하기 위해 裁判에 速度를 냈다. 憲裁는 每週 1, 2次例 裁判을 열었고 總 3回의 辯論準備期日과 17回의 辯論期日 等 20次例 裁判을 거쳐 이듬해 3月 10日 罷免 決定을 내렸다. 彈劾審判의 裁判長이었던 박한철 前 所長은 任期가 2017年 1月 31日 끝나 裁判을 마無理하진 못했지만 每日 言論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退任式에서 “憲法秩序에 極端的 對立을 招來하는 制度的·構造的 問題가 있다면 智慧를 모아 빠른 時日 內 改善하는 方向으로 나아가길 希望한다”고 改憲의 必要性을 主張했다. 朴 前 所長의 뒤를 이어 憲裁所長 權限代行을 맡은 李貞味 前 裁判官은 “注文 被請求人 大統領 박근혜를 罷免한다”는 歷史的 宣告文을 朗讀했다. 宣告 當日 平素보다 일찍 出勤하느라 미처 떼어내지 못한 뒷머리 ‘헤어롤’ 2個가 카메라에 捕捉돼 話題가 됐다. 法曹界에선 이때만큼 憲裁가 國民的 支持와 拍手를 받고 役割과 位相이 높았던 때는 찾기 어렵다는 意見이 많다. 憲法의 最終 守護者인 憲裁가 彈劾審判을 마무리함으로써 國家的 混亂을 마무리하고 새 大統領 選出 節次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았던 憲裁의 位相은 6年 만에 急激히 墜落했다. 特히 最近 더불어民主黨이 主導했던 이른바 ‘檢搜完剝’(檢察 搜査權 完全 剝奪) 立法에 對한 憲裁의 權限爭議審判 結果를 두고선 ‘司法의 政治化’의 典型을 보여줬다는 指摘이 法曹界에서 나온다. 憲裁는 올 3月 國民의힘과 한동훈 法務部 長官이 請求한 權限爭議審判을 모두 閣下 또는 棄却했다. 눈길을 끈 건 憲裁 判斷이 4 對 4로 克明하게 갈렸다는 點이다. 進步 性向 裁判官과 中道保守 性向 裁判官의 意見이 거의 모든 爭點에서 對立하면서 키는 文在寅 前 大統領이 임명한 이미선 裁判官이 쥐게 됐다. 이 裁判官의 決定에 따라 憲裁는 立法過程이 國民의힘 議員들의 表決權을 侵害했다면서도 無效는 아니라고 判斷했다. 宣告 直後 與黨에선 “憲裁가 아니라 政治裁判소 같다”는 날 선 反應이 나왔다. 박한철 前 所長은 지난해 9月 發刊한 著書 ‘憲法의 자리’에서 “‘政治의 司法化’는 다시 司法을 特定 勢力의 政治的 立場을 代辯하거나 그의 숨겨진 政治 行爲로 전락시키는 ‘司法의 政治化’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結果 司法에 對한 國民 信賴가 低下되고, 憲法시스템의 弱化와 毁損, 國家 共同體의 危機라는 惡循環이 發生할 可能性이 더 커지고 있다”고 썼다. 只今 憲裁를 두고 指摘되는 司法의 政治化는 文在寅 政府에서 深化됐다. 우리法硏究會 創立 멤버인 유남석 所長 等 이념적 志向性이 같은 裁判官을 大擧 充員했기 때문이다. 裁判官이 人事權者의 입맛에 맞는 決定을 내렸다는 評價가 나오면 結果的으로 國民 信賴를 갉아먹게 된다. 그 責任도 人事權者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올 11月부터 柳 所長의 後任을 包含한 裁判官 3名에 對한 人事權을 行使하는 尹錫悅 大統領이 잊지 말아야 할 點이다. 황형준 社會部 次長 constant25@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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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에서 遂行 中인 ‘獨逸 兵丁’ 박한철 前 所長… “어디서든 主人이 돼라”[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나는 훌륭한 憲法裁判이란 直線과 曲線, 그리고 色彩가 調和를 이룬 아름다운 音樂과 같다고 생각한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國家와 社會의 持續性을 意味하는 直線, 共同體의 發展에 必要한 創意性을 뜻하는 曲線, 그리고 意見과 價値의 多樣性을 象徵하는 色彩가 어우러져 고된 現實에 부대끼는 國民의 마음을 便安하게 하고 希望을 주는 旋律이 되어야 한다는 意味다.”박한철 前 憲法裁判所 所長(70)은 지난해 9月 發刊한 著書 ‘憲法의 자리’에서 憲法裁判의 意味와 價値를 이같이 表現했다. 朴 前 所長은 歷代 唯一한 檢察 出身 憲裁 小將이었다.2016년 12月 9日 國會가 朴槿惠 前 大統領에 對한 彈劾訴追案을 통과시키자 憲裁는 國民的 混亂을 早期에 解消하기 위해 裁判에 速度를 냈다. 憲裁는 이듬해 3月 10日 罷免 決定을 내릴 때까지 每週 1, 2次例 裁判을 열었고 總 3回의 辯論準備期日과 17回의 辯論期日 等 無慮 20次例 裁判을 열었다. 그 首長이 朴 前 所長이었다. 朴 前 所長은 任期가 2017年 1月 31日 끝나면서 裁判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言論으로부터 每日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退任式에서는 “우리 憲法 秩序에 極端的 對立을 招來하는 制度的 構造的 問題가 있다면 智慧를 모아 빠른 時日 內에 改善되는 方向으로 나아가기를 希望한다”고 改憲 必要性을 主張했다. 이때만큼 憲裁가 國民的인 支持와 拍手를 받고 그 役割과 位相이 높았던 때를 찾기 어렵다. 憲法의 最終 守護者인 憲裁가 나서서 彈劾 審判을 마무리함으로써 國家的 混亂을 收拾하고 大選을 통해 새로운 大統領을 選出하는 節次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年 만에 높아졌던 憲裁의 位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只今도 現 유남석 憲裁 所長이 누군지는 몰라도 朴 前 所長을 記憶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特需·企劃 거친 ‘獨逸 兵丁’ 檢事1953年 釜山에서 태어난 朴 前 所長은 初等學校 2學年 때 仁川으로 올라와 中·高校를 卒業한 뒤 1975年 서울對 法大를 卒業했다. 1981年 第23回 司法試驗에 合格해 司法硏修院 13期로 修了한 뒤 1983年부터 檢事로 在職했다.그는 檢事 時節 特殊通이자 企劃通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平檢事 時節 要職인 法務部와 서울地檢(現 서울中央地檢), 靑瓦臺 派遣 等을 거쳤다. 막스 플랑크 國際刑事法硏究所 客員硏究員 等으로 獨逸에서 留學을 했고 憲裁 派遣, 仁川地檢 特殊部長, 大檢 企劃課長, 서울중앙지검 3次長檢事, 三星 祕資金 特別搜査·監察本部長, 大檢察廳 公安部長, 大邱地檢長, 서울東部地檢長 等을 歷任했다. 그는 後輩들에게 信望이 두터운 檢事였다. 檢事長 時節 朝會 때 漢詩와 英詩를 引用하기도 하고 後輩 檢事들에게 媤집을 膳物하는 等 市와 苦戰을 즐겨 읽었다. 東洋과 西洋 歷史는 勿論 文學과 哲學에도 造詣가 깊은 浪漫主義者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別名이 ‘獨逸 兵丁’이었다. 워낙 嚴하고 徹頭徹尾한 業務 스타일 때문이었다. 朴 前 所長 밑에서 일했던 檢事 出身 A 辯護士의 이야기다.“굉장히 꼼꼼하시고 일을 無知하게 熱心히 하시는 분이니까 檢事들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決裁도 워낙 꼼꼼하게 하다 보니 次長 時節에 그 밑에 있던 部長들이 아무도 決裁를 안 올리려고 했다. 決裁를 할 때 記錄에다가 本人이 修正한 部分을 접어놓는데 數十 개가 접혀 있어서 놀라고 그걸 밤늦게까지 부랴부랴 修正한 記憶이 있다.” - 取材 메모 中 -그는 이원석 檢察總長의 招請으로 올해 2月 서울 瑞草區 大檢 廳舍에서 講演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後輩 檢事들에게 公益 實現 機關으로서의 檢察은 政治的 中立이 必須的이며 均衡感覺 等을 통해 憲法 價値를 實現하는 게 重要하다고 强調했다.“정치적 中立 義務는 憲法 價値를 實現함에 있어서 매우 重要하다. 檢察 構成員, 總長으로부터 正門을 지키는 請願警察에 이르기까지 모든 構成員들이 한마음으로 智慧를 짜내야 한다. 끊임없이 交感하면서 答을 찾아가야 한다. 檢察이 擔當하는 모든 事件은 크고 작은 걸 떠나서 全部 方程式으로 풀어야 한다. 特히 複雜한 事件은 8,9次 方程式을 풀어야 하는데 高次方程式에 있어서는 國民 說得 問題가 가장 앞에 나온다. 國民이라는 건 言論이 가장 많은 部分을 代辯하고 있고, 言論을 說得하는 問題, 信賴와 支持를 받을 수 있는, 그걸 풀어나가는 게 檢察의 重要한 宿題다.” - 2月 大檢察廳 講演 中 - 搜査에 對한 國民의 信賴와 支持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結局 檢察이 致命傷을 입게 된다는 意味다. 이런 理由로 그는 言論 對應을 重視했다고 한다. 公報 役割을 맡을 때는 搜査 狀況을 具體的으로 밝힐 수 없어 禪問答을 즐겼다. 서울중앙지검 3次長檢事로 있던 2005年 6月엔 記者團과의 티타임 途中에 “호연(浩然)韓 氣槪 맑고 드높으며 선재(仙才) 뛰어나 俗人은 알아보기 어렵네”라며 갑자기 漢詩를 읊기도 했다. 當時 불거진 ‘행담도 開發非理 疑惑’을 둘러싸고 記者들이 “이 事件을 서울중앙지검이 맡게 되느냐”고 執拗하게 묻자 中國 考査를 꺼낸 것이다. 當時 그는 이처럼 對答하기 難處하거나 保安이 必要한 質問에는 歷史, 文化에 關聯된 다양한 知識을 說明하며 避해 갔다고 한다. 記者들도 原則을 지키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2005年 4月 初旬이었던 것 같은데 봄이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는데 봄이 온 거 같지가 않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엄청난 權力型 非理로 浮刻이 돼 있고 그게 궁금해하는 事項이니까 搜査하는 데 여러분들의 協助를 懇曲히 付託한다. 疑惑을 提起하는 것만으로는 記事를 쓰지 말고 檢察 數詞와 速度를 맞춰서 報道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中略) 言論과는 職分을 誠實히 遂行하면서 信賴關係를 維持해야 한다는 걸 强調하는 意味에서 말씀드렸다. ” - 2月 大檢察廳 講演 中 - 그는 △午前 10時와 午後 2時 브리핑 △記者들이 取材해 오는 事項에 對한 確認 △記者들의 電話는 無條件 받을 것 等 記者團과의 約束을 몇 달間 지켰고 그 結果 言論과의 信賴關係가 形成됐다고 한다. ● 高檢長 昇進 苦杯… ‘轉禍爲福’으로 憲裁 裁判官 指名그런 그도 大檢察廳 公安部長 時節인 2008年 美國産 쇠고기 集會를 잘 統制하지 못했다는 理由로 高檢長에 昇進하지 못하고 서울東部地檢長으로 옷을 벗었다. 以後 金앤張法律事務所에서 일하던 中 反轉이 찾아왔다. 憲裁 派遣 勤務를 하던 時節 눈에 띄었던 德分인지 法務部 次官을 지낸 檢事 出身 김희옥 裁判官 後任으로 2011年 2月 指名된 것이다. 李明博 政府 時節이었다. 이어 裁判官을 하면서도 當時 이강국 憲裁 少將으로부터 “所長을 맡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種種 들을 程度로 그 資質을 인정받았다. 結局 2013年 憲裁 所長으로 指名돼 憲法裁判의 首長을 맡게 됐다. 또 다른 檢察 出身 B 辯護士의 말이다.“대구지검장 時節에 大邱 갓바위를 한 몇 달을 每日 올라가셨어. 佛心이 깊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나라에 對한 걱정이 많으셔서… 나라를 위해서 祈禱를 많이 하셨는데 結局 그 祈禱가 憲裁 所長까지 만들어 주신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取材 메모 中 -그가 所長이던 時節 憲裁는 歷史에 남을 만한 決定을 많이 내렸다. 2014年 統合進步黨 違憲政黨 解散 審判 事件에서 政黨 解散 引用 決定을 내렸다. 政黨 解散 審判에 對한 最初의 憲裁 決定이었다. 當時 憲裁는 “統進黨이 追求하는 北韓式 社會主義 體制는 조선노동당이 提示하는 政治 路線을 絶對的인 線으로 받아들이고 그 政黨의 특정한 階級 路線과 結付된 人民民主主義 獨裁 方式과 首領論에 기초한 1人 獨裁를 統治의 本質로 追求한다는 點에서 民主的 基本秩序와 根本的으로 衝突한다”고 밝혔다. 또 2015年에는 姦通罪에 對해 “姦通 行爲를 國家가 刑罰로 다스리는 것이 適正한지에 對해 더 以上 國民의 認識이 一致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며 “婚姻과 家庭의 維持는 當事者의 자유로운 意志와 愛情에 맡겨야지 他律的으로 强制할 수 없다”고 姦通罪 條項을 違憲으로 判斷했다. 朴 前 所長은 憲裁 裁判官 任命 制度에 對해 根本的인 懷疑를 提起하기도 했다. 그는 2013年 人事聽聞會부터 “9名의 裁判官 中 大統領과 國會가 各各 3名씩 指名하는 것은 國民的 代表性이 있으나 大法院長이 3名을 指名하는 것은 國民的 代表性이 없다”며 “大統領과 國會의 合同 行爲로 裁判官 任命이 이어진다면 (이 問題가) 解消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所信 發言을 했다. 2016年 3月 新聞放送編輯人協會 討論會에선 “率直히 自尊心이 傷한다”며 “(選出되지 않고 大統領이 指名한) 大法院長은 國民의 民主的 正當性을 附與받지 못한 狀態다. 憲裁가 二重으로 民主的 正當性이 稀釋돼 果然 權威를 가질 수 있느냐는 根本的인 疑問을 提起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判事 出身 憲裁 所長이었다면 하기 어려운 所信 發言이었다. 朴 前 所長과 함께 일했던 한 前職 憲裁 裁判官은 “檢事 出身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바르고 훌륭한 분이었다”고 말했다.2017년 1月 末 隱退한 뒤에는 서울대 法學專門大學院 招聘敎授와 서울市立大 法學專門大學院 招聘敎授 等을 지냈고 只今은 東國大 法大 夕座敎授로 지내며 人權法 講義를 學部生에게 가르치고 있다.● “司法의 政治化로 國民 信賴 低下되고 憲法시스템 毁損” 朴 前 所長은 지난해 9月 發刊한 著書 ‘憲法의 자리’에서 憲法裁判의 社會 統合 機能도 强調했다. 그는 “憲裁는 보다 積極的인 憲法解釋을 통해 우리 憲法이 具體的인 葛藤 解決의 手段이자 目標로 作動하도록, 段階的 價値判斷에 있어 憲法을 準據의 틀로 活用해야 한다”며 “同時에 政治와 權力機關에는 共同體가 나아가야 할 方向을 보다 具體的이고 積極的, 持續的으로 提示해 밝은 未來를 向한 社會 統合의 羅針盤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政治의 司法化와 司法의 政治化에 對한 問題意識도 담았다. 그는 “‘政治의 司法化’는 다시 司法을 特定 勢力의 政治的 立場을 代辯하거나 그의 숨겨진 政治 行爲로 전락시키는 ‘司法의 政治化’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結果 司法에 對한 國民 信賴가 低下되고, 憲法 시스템의 弱化와 毁損, 國家 共同體의 危機라는 惡循環이 發生할 可能性이 더욱 커지고 있다”라고 썼다. 特히 “政治의 過度한 司法化는 司法機關에 對한 所謂 코드 人事와 맞물릴 境遇 憲法裁判이나 司法이 憲法과 法治主義의 實現을 넘어 裁判官 個人 또는 그가 代表하는 政治的, 社會的 勢力의 特定 政治的 立場을 代辯하거나 追從하고자 하는 숨겨진 政治 行爲로 轉落할 危險性이나, 明白한 政治的 判斷은 아니라 하더라도 憲法精神과 政治的 意圖를 適當히 折衷·調停하는 妥協的 判決에 이르게 할 可能性을 갖는다”라고 코드 人事를 에둘러 批判하기도 했다. 只今 憲裁와 關聯된 私法의 政治化는 文在寅 政府에서 이념적 志向性이 같은 裁判官을 一方的으로 임명한 것과 無關치 않다.특히 最近 더불어民主黨이 主導했던 이른바 ‘檢搜完剝’(檢察 搜査權 完全 剝奪) 立法에 對한 憲裁의 權限爭議審判 結果를 두고 ‘司法의 政治化’라는 指摘이 다시 나오고 있다. 憲裁는 國民의힘과 한동훈 法務部 長官이 請求한 權限爭議審判을 올해 3月 閣下 또는 棄却했는데 憲裁 判斷은 4 對 4로 克明하게 갈렸다. ‘우리法硏究會’의 創立 멤버인 柳 所長을 包含한 進步 性向 裁判官과 中道保守 性向 裁判官의 判斷이 엇갈리면서 文在寅 大統領이 임명한 이미선 裁判官이 決定權을 쥐게 됐다. 그의 決定에 따라 憲裁는 立法 過程이 國民의힘 議員들의 表決權을 侵害했다면서도 無效는 아니라고 判斷했다. 이렇다 보니 與黨에선 “憲裁가 아니라 政治裁判소 같다”는 날선 反應을 보였다. 尹錫悅 大統領은 올해 11月 退任하는 柳 所長의 後任을 包含해 任期 中 裁判官 3名에 對한 人事權을 行使할 豫定이고 이番 政府에서 憲裁 構成員이 모두 交替된다. 憲裁가 信賴를 回復하기 위해선 司法의 政治化에 對한 朴 前 所長의 指摘을 귀담아들을 必要가 있다. ● 夫人과 死別한 뒤 節에서 起居… ‘아우라’ 있는 法曹界 元老篤實한 佛敎 信者인 그는 2009年 서울 瑞草區 아파트를 佛敎財團에 寄附한 뒤 當時 傳貰保證金 2億2000萬 원에 月貰 100萬 원을 내고 그 아파트에 그대로 살았다. 여기에는 佛子였던 夫人의 뜻이 反映됐다고 한다. 子女가 없는 그는 2019年 夫人과 死別한 뒤 서울 종로구의 한 절에서 起居하며 週末에만 瑞草區 아파트에서 지낸다고 한다. 공수래공수거다. 檢事 出身 A 辯護士는 “間或 大邱地檢長 時節 멤버들과 골프를 치시는데 그때 보니 가방이나 골프靴, 골프채 等이 正말 오래됐다”며 “하나 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골프 가방을 하나 사드렸는데 如前히 안 쓰신다. 요즘 나오는 게 아무래도 華麗해서 比較的 점잖은 걸 사드렸는데 또 안 쓰시더라”고 傳했다. 또 다른 後輩 檢事는 “내가 檢察 先輩 中에 唯一하게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朴 前 所長이다. 通商 長官이나 總長을 한 사람도 時間이 지나면 얼굴이 달라진다”며 “하지만 朴 前 所長은 그 아우라가 過去나 現在나 如前하다. 그분은 한결같고 私利私慾이 없는 분이라서 늘 尊敬하게 되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그는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主人이 되라’는 뜻의 數處酌酒(隨處作主)라는 말을 座右銘처럼 周邊에 자주 한다고 한다. 中國 唐나라 때 임재선사가 한 말씀이다. 그는 檢事 時節은 檢事로서, 憲裁 裁判官과 所長 時節에는 法官으로서의 役割을, 只今은 敎授로서 充實히 後學을 養成하며 만족해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自己 人生의 主人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法廷冒瀆 시리즈의 近間에는 政治와 法曹의 領域이 區分되지 않고 收斂하고 있다는 現象이 담겨 있습니다. 最初로 檢察總長 出身 大統領이 誕生했고, 國會議員 等 政治人의 主流 集團은 法曹人입니다. 로스쿨 導入 以後 法曹人의 數가 늘어나면서 政治와 法曹의 化學的 結合은 더욱 加速化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現象입니다. 問題는 政治의 司法化, 司法의 政治化가 深化되고 있다는 點입니다. 主要한 政治的 決定을 司法의 領域으로 미루는 일도 벌어지고, 그 過程에서 司法이 정치화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渦中에 朴 前 所長에 對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法廷冒瀆 [19話]의 主人公으로 쓰게 된 理由입니다.글을 쓰기 前에 그를 直接 만나서절에 가보고 싶었지만 冊이 나온 뒤 한 番 인터뷰한 것을 빼곤 모두 言論과의 接觸을 避했다며 완곡히 拒絶하셨습니다. 本人을 내세우는 것도 世上에 近況을 傳하는 것도 꺼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大部分 法曹人들이 現職에서 떠난 뒤 開業해 前官禮遇를 받아 富를 蓄積하는 狀況과 달리 辯護士로 開業하지 않았습니다. 如前히 俗世와 距離를 두며 儉素하게 한결같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後輩 法曹人들로부터 尊敬받는 理由겠지요.다음 [20話]는 與圈의 政治人을 다룰 豫定입니다. 修飾語가 많습니다. 言論人, 小說家, 野圈 出身 中道 性向의 重量感 있는 政治人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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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바이든’ 꿈꾸는 ‘엉클 朴’… 사라지지 않는 老兵[황형준의 法廷冒瀆]

    “내가 아는 命理學者가 있는데 앞으로 7年間 運이 第一 좋다고 하더라. 元來 政治人이 苦難을 겪는 使嗾여야지 大成한다. 나는 監房도 한番 갔다 왔고(웃음). 1942年生의 時代가 온다.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 고이즈미 준이치로 前 日本 總理, 후진타오 中國 國家主席, 김정일 前 北韓 勞動黨 總祕書… 42年生 中에 國內에서 第一 有名한 李健熙 前 三星前者 會長은 죽었고 그다음 나다. 靑瓦臺에 잘 出入하고 있어라ㅎ” - 取材 메모 中 - 2021年 4月 靑瓦臺 出入記者였던 筆者를 包含한 記者들과 私席에서 만난 朴趾源 當時 國家情報院長(以下 朴智元)은 이렇게 말했다. 4選 議員과 文化관광부 長官, 大統領祕書室長, 國精院長 等 大韓民國에서 ‘내로라’하는 자리는 다 했다. 그러면서도 大統領과 國務總理, 國會議長 等 끊임없이 權座를 志向하는 게 그다. 이를 두고 一角에선 “老慾(老慾)에 끝이 없다”는 非難과 함께 “그래도 그만큼 熱情的인 經驗과 智慧가 많은 元老가 없다”는 評價가 엇갈린다. 金大中 前 大統領(DJ)李 感歎할 程度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政治的 瞬發力’ 때문에 好不好를 떠나 ‘대단한 政治人’이라고 評價받는 理由다. 그의 旺盛한 活動엔 權力慾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健康한지 모른다. 그에겐 ‘嫉妬는 나의 힘’이 아니라 ‘權力慾은 나의 힘’인 셈이다. 最近 그는 每週 10~12回의 放送 出演을 하며 懸案에 對해 言及하고 政府를 向해 쓴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올 2~4月에 全國 16個 廣域自治團體를 訪問해 30餘 回 招請 講演을 했다. 그만큼 그의 政治評論을 듣고 싶어하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非好感을 갖는 ‘안티’도 많다. 누리꾼은 그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는 意味로 ‘박쥐원’이라는 別名을 붙이기도 하고, 老慾을 부린다고 非難하기도 한다. 그는 放送이나 講演에서 “제가/ 그/ 有~命한/ 朴智元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름부터 元來 熱河日記를 쓴 燕巖 朴趾源과 같아 韓國에서 義務敎育을 받은 사람이면 다 아는 이름이다. 게다가 그 亦是 言論과 SNS에 끊임없이 每日 登場하니 三尺童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17話]에 이어 노무현 政府 以後 그의 行跡으로 돌아가 보자. ● 對北送金 事件으로 拘束돼 懲役 3年 살아박지원이 檢察에 拘束돼 懲役 3年의 有罪 判決을 받는 契機가 된 ‘對北送金 疑惑’은 2002年 9月 國政感謝狀에서 처음 불거졌다. 한나라黨(現 國民의힘)에서 현대상선이 2000年 6月 南北頂上會談을 전후해 産業銀行에서 4900億 원, 當時 換率로 4億 달러를 緊急 貸出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北韓에 넘겨줬다고 主張하면서다. 이듬해 1月 末 監査院은 ‘4000億 원 中 1760億 원은 현대 系列社 運營資金으로 使用됐고, 나머지 2240億 원은 北韓에 支援한 것으로 보인다’는 內容의 監査 結果를 發表했다.파문이 커지자 DJ도 退任을 앞둔 이듬해 2月 事實關係를 認定하며 “어떻게 하면 韓半島에서 戰爭을 막고 民族이 서로 平和와 繁榮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國民이 安心하고 살면서 統一에의 希望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忠情에서 行해진 것”이라며 “저는 이番 事態에 對한 責任을 지겠다”고 對國民 謝過를 했다. 結局 송두환 特別檢事팀은 6月 김대중 政府와 현대그룹이 2000年 4月 8日 北韓과 南北頂上會談 開催에 最終 合意하면서 政府와 현대가 各各 1億 달러, 4億 달러를 北韓에 支給하기로 約束했다는 事實을 把握해 이에 關與한 朴趾源을 職權濫用 및 南北交流協力法 違反 等의 嫌疑로 拘束 起訴했다. 그는 收監 中 綠內障 等 健康이 惡化돼 拘束執行停止와 刑執行停止를 反復하다 釋放됐고 2007年 2月 盧武鉉 大統領의 特別赦免 對象에 包含됐다.● 黨 代表 1番, 非對委員長 3番, 院內代表 3番 記錄재기는 順坦하지 않았다. 朴趾源은 DJ의 ‘政治的 故鄕’이자 自身이 高等學校를 나온 全南 木浦에서 民主黨 所屬으로 出馬하려 했지만 公薦審査委員會의 ‘禁錮 以上 刑 確定者 排除’ 原則에 따라 公薦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無所屬으로 出馬해 木浦市民의 評價를 받겠다”며 脫黨한 뒤 DJ의 夫人 이희호 女史의 支援 遊說와 동교동系의 全幅的인 支援을 받으며 當選됐다. 以後 再選 議員으로는 異例的으로 2010年 5月 민주당 院內代表로 選出됐다. 그는 이를 始作으로 2012年 民主黨 院內代表와 非常對策委員長을 지내는 等 議員 時節 동안 民主黨에서만 院內代表와 非常對策委員長을 2番씩, 2016年 안철수 議員이 創黨한 국민의당에서 院內代表와 非對委員長, 黨 代表까지 지내는 政治史의 新記錄을 세웠다. 國會 法制司法委員會에선 情報力과 專門性을 中心으로 頭角을 드러냈다. 2009年 7月 當時 檢察總長 候補者였던 천성관 氏와 스폰서 朴某 氏의 海外 골프 旅行, 千 氏 婦人의 免稅店 쇼핑 明細 等을 暴露하며 候補者 辭退에 決定的인 影響을 미쳤다. 이를 包含해 院內代表로 聽聞會를 指揮하면서 7名의 聽聞 對象者를 落馬시켜 ‘聽聞會 落馬 7冠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汝矣島를 中心으로 活動하면서도 거의 每週 地域區인 全南 木浦를 訪問할 程度로 地域에도 功을 들였다. 金曜日 歸鄕해 地域區 業務를 보고 月曜日 새벽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금귀월래(金歸月來)’라는 말을 流行시켰다. 그 結果 18~20代 總選까지 木浦에서 내리 3線에 成功했다.하지만 좋은 評價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年 ‘李海瓚 代表-朴趾源 院內代表’로 親盧(親盧武鉉) 勢力과 湖南 勢力이 結託했다는 ‘飴粕 談合’ 論難도 불러왔고 舊政治의 象徵으로 非難받기도 했다. 잦은 SNS와 放送에서 가끔 根據 없는 疑惑 提起나 말失手를 해서 口舌數에 오른 적도 적지 않다. 2014年 1月 當時 같은 黨 重鎭 議員의 批判이다. “SNS에 글 올리기 좋아하는 X들은 먼저 생각을 안 하고 말이랑 行動이 앞서서 問題야. 너무 경망스러워.” - 取材 메모 中 -朴 前 院長은 DJ 精神을 기리고 國民들에게 繼續 알리는 걸 使命으로 생각하지만 一角에선 지나치게 DJ를 팔아 自己 政治를 하려 한다는 非難도 提起된다. ● 2015年 2·8 全黨大會 落馬 以後 脫黨-新黨 合流까지그에게도 試鍊은 있었다. 2015年 2·8全黨大會에선 2012年 大選에서 落馬한 뒤 黨 代表 候補로 나선 文在寅 前 大統領에게 苦杯를 마셨다. 當初 노무현 政府 時節 對北送金 特檢法을 통과시키고 特別赦免이 미뤄지는 等의 過程에서 親盧·親文 勢力과는 멀어진 그였다. 다음은 그가 2014年 12月 한 이야기다. “2年 前 文在寅 落選 直後 만났다. DJ의 길을 갈 거냐 이회창의 길을 갈 거냐 選擇해야 한다며 說明해줬다. DJ는 落選하고 政界 隱退를 宣言하고 英國으로 갔다. 하지만 支持者들은 DJ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DJ가 돌아오고 大統領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DJ는 結局 돌아와 大統領 候補가 됐지만 弱點을 補充하기 위해 保守右派人 김종필 前 總裁(JP)를 迎入해 大統領에 當選되지 않았느냐. 이회창의 길을 봐라. 大統領 選擧에 失敗하고 政界를 떠났다. 그러나 바로 復歸해서 손에 피를 묻히더라. 自己에게 大統領 候補를 讓步한 調馴 總裁를 쳐내고, 野黨에서 與黨으로 넘어온 이기택을 쳐내고 朴槿惠 當時 代表가 오겠다는 걸 쳐내버렸다. 피를 묻혀서 大統領 候補는 됐지만 大統領은 안 되더라. 그랬더니 그가 宏壯히 좋은 얘기라고 參考하겠다더니…” - 取材 메모 中 - 大選 候補로서 政策 準備에 汨沒해야지 黨 代表로서 各種 論難에 휘말리면 안 되는 만큼 黨 代表로 나서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趣旨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全黨大會에서 落馬한 뒤에도 文 前 大統領과 角을 세우던 그는 2015年 當時 새政治民主聯合(現 民主黨)에서 ‘親盧霸權主義’가 論難이 되며 안철수 議員이 國民宜當 創黨을 推進하자 2016年 1月 脫黨했다. 같은 해 3月 국민의당에 合流했고 4·13總選에서 國民의黨이 38席을 얻는 氣焰을 吐하며 朴趾源도 20代 總選에서 當選됐다. 當選 直後 그가 私席에서 했던 말이다.“안 代表가 未來를 보는 眼目이 있다. 卓越하다. 그런 政治 指導者가 얼마나 있냐. 깜짝 놀랐다. IT 强國, 新知識을 얘기했던 김대중 大統領에 이은 眼目이다. 나도 統合論者였지만 結局 金한길 千正培 朴趾源이 틀리고 安哲秀가 맞았던 거 아니냐. 깔끔하게 認定하고 따라가야지.” - 取材 메모 中 -4月 總選 前에 민주당과 國民의黨이 野圈連帶와 候補 單一化 論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安 議員이 이에 同調하지 않은 德分에 國民의黨이 ‘綠色 突風’을 일으켰다는 뜻이었다. 以後 그는 國民宜當 院內代表로 推戴됐고 安 議員을 DJ級으로 모시며 킹메이커 役割에 專念한다.● 安哲秀 大統領 만들기 銃대 멨지만… ‘文모닝’ 別名만 남아그가 黨 初選 議員들에게 한 ‘十誡命’ 講義는 只今 봐도 政治人들이나 豫備 政治人들이 배울 點이 있다. 筆者가 썼던 記事다. ▶初選의 先生님 된 朴趾源 ‘깨알 講義’朴趾源은 第3黨의 院內代表로서 法案 處理 等의 캐스팅보트를 쥔 3黨의 存在感을 드러내며 國會의 中心에 섰고 安 議員이 國民의黨 總選 리베이트 事件으로 代表職에서 물러나자 非對委院長을 맡았다. 그해 8月 當時 國民宜當 6選 議員이었던 千正培 前 法務部 長官은 私席에서 이렇게 評價했다.“박지원 代表가 잘하고 계신다. 어떤 분은 몇百 年 만에 한 番 나올 분이라고 하던데…삼국지에 나오는 英雄들을 다 합친 것 같다.” - 取材 메모 中 - 國政壟斷 事態가 터지고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訴追案 處理 局面에서도 그는 “彈劾 列車는 出發했다” “개가 짖어도 ‘彈劾 列車’는 달린다” “법꾸라지 金淇春” 等 語錄을 내놓으며 政局의 中心에 섰다. 하지만 ‘政治 9段’인 그도 結局 틀렸다. 文 前 大統領 批判으로 하루를 始作해 ‘文모닝’이라는 別名도 얻었지만 漸次 安 議員에게 失望했고 2017年 5月 大選은 文 前 大統領의 勝利로 끝났다. 國民의 選擇은 安哲秀 候補는 勿論 朴趾源과 國民의黨이 아니었던 것이다. ● ‘winter is coming’ 2017年 大選 以後 찾아온 暗黑期… 國精院長 指名 反轉2017年 5月 大選 以後는 試鍊의 季節이었다. 2017年 10月 安 議員이 當時 彈劾 事態를 契機로 갈라져 나온 保守 政黨인 劉承旼 前 議員의 바른政黨과 合黨을 推進하면서다. 結局 安 議員을 비롯한 統合派와 朴趾源을 包含한 湖南 議員이 訣別하면서 이들은 바른未來黨과 民主平和黨으로 分黨됐다. 單獨으로 院內交涉團體를 構成하기 위한 議席數(20席)가 모자랐던 民主平和黨은 正義黨과 共同交涉團體를 構成했지만 與野 關係에서 存在感을 보이지 못했다. 大選과 그 以後 湖南에서 文 前 大統領이 壓倒的인 支持를 받고 門 前 大統領이 DJ의 햇볕政策을 繼承한 南北 對話 雰圍氣를 造成하자 朴智元의 門 前 大統領에 對한 立場도 批判에서 支持로 旋回하게 됐다. 2018年 2月 民平黨이 創黨된 以後 朴趾源의 立地도 쪼그라들었다. 民平黨이 院內政黨이긴 했지만 議政活動에서 存在感을 보이지 못했고, 黨 代表였던 정동영 前 議員을 中心으로 한 主流와 非主流의 反目이 심해졌다. 結局 朴趾源을 包含한 光州·全南 議員 9名은 脫黨해 2020年 1月 代案新黨을 創黨하고 以後 民生黨으로 統合됐지만 2020年 4月 21代 總選에서 院內 進出에 失敗했다. 그도 全南 木浦에서 더불어民主黨 김원이 議員에게 敗北하면서 2008年 以後 12年 만에 自由人이 됐다. 勿論 그는 各種 放送에 出演 要請을 받으며 ‘過勞死 直前의 白手’였다. 汝矣島 周邊에선 總選에서 民主黨이 180席을 얻으며 壓倒的 支持를 받은 만큼 門 前 大統領이 朴趾源 等을 重用해 統合 人事를 하고 協治 內閣을 構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實際 文 前 大統領은 같은 해 6月 朴趾源을 國精院長에 內定하는 깜짝 人事를 發表했다. 그는 國內 政治에 介入하지 않고 國精院 改革에 힘을 쓰겠다고 所感을 밝혔다. 또 國會 人事聽聞會 書面 答辯書에서 文모닝 行步에 對해 ‘後悔나 反省을 하느냐’는 質疑에 朴 候補者는 “熾烈한 選擧 遊說 過程에서 나온 發言이었음을 諒解해달라”고 答했다.그해 12月 私席에서 朴趾源이 한 이야기다.“내가 呼價 丹齋(旦齋)야. 有名한 漢學者 先生님이 지어주셨어. 周易을 만든 住公(周公)을 中國 사람들이 尊敬해서 ‘單(旦)’字를 이름에 잘 안 쓰는데 나에게 그 單子를 지어줘. 住公이 文王에 이어서 武王度 엄청 잘 모셔서 中國을 이끌었다. 當時 다 住公이 武王을 치고 王이 될 거라 했는데 오히려 武王을 極盡히 모셨다.” - 取材 메모 中 -當時 이에 對해 DJ에 이어 文 前 大統領, 두 王을 모시는 것을 豫見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라고 答했다.● “政治는 生物… 다음은 나(next is me)”問 前 大統領이 朴趾源을 國精院長에 指名한 것은 그만큼 南北關係 改善에 對한 意志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朴趾源이 任命된 以後에도 狀況은 碌碌지 않았다. 이듬해 初부터 코로나19 危機가 찾아왔고 西海 公務員 被殺 事件이 發生하면서 南北關係는 더욱 梗塞됐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前 美國 大統領이 再選에 成功하면 南北頂上會談이 再開될 수 있을 것으로 展望했지만 美國 大選은 조 바이든 大統領의 勝利로 끝났다. 朴趾源은 國精院 內部에서 女性 幹部를 重用했다. 2020年 8月 史上 最初로 女性 次長이 任用됐고 女性 最初 選任 局長도 輩出됐다. 政治介入 禁止와 對共 搜査權 移管을 骨子로 하는 國精院法 改正案을 任期 中에 通過시켰고 國精院의 사이버保安 機能과 痲藥 等 海外 連繫 犯罪 對應 能力도 强化했다. 口舌數도 如前했다. 그는 院長으로 在職하며 2021年 6月 創設 60周年을 契機로 ‘國家와 國民을 위한 한없는 忠誠과 獻身’으로 元勳을 바꾸고 院訓席을 交替했다. 그런데 院訓席에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敎授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體’가 쓰였다는 點이 論難이 됐다. 申 敎授는 過去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20年間 服役한 前歷 等이 있어 不適切하다는 批判이 나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等 SNS를 하루에도 몇 次例씩 直接 써온 그가 院長 就任 뒤에도 美國을 訪問해 自身의 動線을 露出해 論難이 됐다. 在職 當時 벌어진 西海 公務員 被殺 事件과 關聯해 事件 다음 날 國精院 職員들에게 關聯 諜報와 報告書를 削除하게 한 嫌疑 等으로 起訴돼 現在 裁判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그런 事實이 없다”고 反駁하고 있다. 2022年 5月 大選 以後 國精院長 任期를 마친 뒤에는 다시 放送 等에 出演하며 政治 懸案에 對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해 12月 結局 復黨해 約 7年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와 李在明 代表를 中心으로 뭉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처럼 ‘政治는 生物’이다. 朴趾源이 앞으로 어떤 經路를 거쳐 汝矣島 政治 現場에 復歸할지 아무도 모른다. 민주당 非常對策委員長으로 推戴되거나 2024年 總選에서 地域區였던 全南 木浦나 故鄕인 全南 海南·莞島·進度에 出馬할 可能性도 있고 總選에서 不出馬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最終 目標는 ‘엉클 兆’라는 親近한 別名이 있는, 同甲내기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일 것이다. ‘다음은 나야(next is me)’라고 英語로 말하는 그를 보면 ‘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는 맥아더 將軍의 말이 생각난다. 勿論 그의 ‘안티’들은 “제발 TV 放送 等 視野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할 테니 그냥 채널을 돌리는 게 사라지길 기다리기보다는 賢明할 것이다. 朴趾源 前 院長은 술자리에서 乾杯를 할 때 現職 大統領을 붙여 ‘○○○ 大統領을 위하여’를 많이 외칩니다. 朴槿惠 文在寅 前 大統領부터 ‘尹錫悅 大統領을 위하여’는 勿論 國民의黨 時節엔 安哲秀를 위하여까지 들어봤습니다. 그의 政治엔 基本的으로 나라 걱정과 忠誠心이 깔려 있습니다. 勿論 DJ 逝去 以後엔 그의 忠誠心도 누구를 向했는지 오락가락하긴 했지요.한 讀者분께서 朴 前 院長의 政治觀(觀)에 對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過去에 “政治는 곱하기의 藝術, 綜合 藝術이다. 政治가 제 役割만 해도 經濟 社會 文化는 잘 돌아가고 政治가 0이면 나머지가 아무리 잘해도 0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政治는 남의 不幸이 나의 幸福으로 오지 않는다. 타 糖이 잘못하면 結局 政治權 全般으로 問題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認識이 그를 政治人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17화]의 댓글에 많은 누리꾼이 ‘酸素 같은 男子’를 O₂價 아닌 tomb(무덤)으로 解釋해주셨더군요. 正말 대단한, 大韓民國의 底力입니다. 韓國 政治에 山所인지 煉炭가스인지 判斷하는 것은 個人의 몫입니다. 앞서 書頭에 썼던 命理學者가 2021年에 7年間 朴 前 院長의 運이 좋다고 했으니 다음 大選까진 運이 좋을까요? 그분이 ‘건진法師’級인지는 다음 大選까지 지켜볼 일입니다. 다음 [19話]의 主人公을 누구로 할지는 未定입니다. 애初에 念頭에 뒀던 法曹界 元老가 登場하길 願하지 않고 있어 說得 中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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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가 ‘酸素 같은 男子’라 表現한 政治人은?… 商社맨에서 ‘政治 9段’까지[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放送에선 얘기를 못 하는데… 내가 돈을 많이 줘보기도 하고 받기도 해봤는데 돈 센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안 나와~(웃음)” - 取材 메모 中 - 올 3月 私席에서 만난 朴趾源 前 國家情報院長(以下 朴智元)은 지난해 12月 한동훈 法務部 長官이 더불어民主黨 노웅래 議員의 逮捕同意案 通過를 要請하기 위한 國會 本會議 發言에 對해 이같이 말했다. 當時 한 長官은 “具體的인 請託을 주고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這番에 주셨는데 뭘 또 주냐’ ‘這番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盧 議員의 목소리, 돈 封套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錄音돼 있다”고 했는데 이를 反駁한 것이다. 朴智元 이야기를 이 發言으로 始作하는 理由는 經驗과 年輪, 政治 現象을 꿰뚫어 보는 洞察力과 分析力, 타고난 유머와 才致, 率直하지만 老獪한 政治人이라는 評價 等의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發言이기 때문이다. 그는 韓國 現代政治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證人’이다. 朴趾源은 現在까지 4選 議員과 文化관광부 長官, 大統領祕書室長, 國精院長 等을 지냈다. (아직도 그의 履歷은 ‘現在進行形’이다) 全南 珍島 出身으로 金大中 前 大統領(DJ)의 ‘마지막 祕書室長’으로 불리는 그는 81歲의 高齡임에도 如前히 健在하고 가장 影響力 있는 政治 最鼓手 中 하나로 꼽힌다. 自古로 일찍부터 그를 重用한 DJ는 그를 이같이 評價했다. 1996年 朴 前 院長이 發刊한 著書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發刊 祝辭에서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政治的 瞬發力.’ 朴趾源 代辯人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表現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政治人의 最高 德目은 身言書判(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言辯과 文筆力, 判斷力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分野에서든 斷然 頭角을 나타내는 法인데, 朴 代辯人이 그런 政治人이다…소신과 原則에도 强한 朴 代辯人이다. 그러면서도 悠然함과 해맑은 微笑를 늘 잃지 않는다. 누가 朴 代辯人을 ‘酸素 같은 男子’라고 해서 아주 適切한 表現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中 - ‘酸素 같은 男子’란 1990年代 히트를 친 俳優 이영애 氏가 나오는 아모레퍼시픽의 ‘酸素 같은 女子’ TV 廣告에서 따온 表現으로 보인다. ● 中學生 때부터 朴智元의 꿈은 ‘野黨 總務’ ‘震度 섬놈’ 朴趾源은 1993年 建國褒章을 追敍받은 獨立運動家 박종식 先生의 4男 1女 中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바다가 親舊이자 놀이터였고 陸地를 憧憬하는 섬 少年으로 자랐다. 肋膜炎을 앓아 健康이 좋지 않았다.밀양 朴氏 집안 어른 中에 國會議員이 있었고 가까이서 본 그는 政治의 꿈을 키웠다. 初等學校(當時 國民學校) 時節부터 將來 希望은 國會議員이었고 中學校 때부턴 ‘野黨 總務’(現 野黨 院內代表)였다고 한다.“고등학교 때 우리 班 親舊 中 한 놈이 나처럼 政治에 關心이 많았다. 한 番은 그 親舊가 내게 한 가지 내기를 提案했다. 누가 現職 國會議員의 이름을 더 많이 써내는지 한番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親舊는 100名 程度를 썼고, 나는 150名 程度를 써내 이긴 記憶이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中 - 朴 前 院長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工夫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木浦 문태고를 다니다 大入에서 떨어져 光州에서 再修를 했지만 當時엔 夫人 이선자 氏를 만나면서 戀愛에 빠졌다. 단국대 經營大에 入學한 뒤로는 以前과 달리 아주 熱心히 工夫했다. 卒業 後 軍隊를 다녀온 뒤 어려운 就業門을 뚫고 ‘LG그룹’ 系列社였던 當時 半島上司(現 LX인터내셔널)에 就職했다. 그는 맡은 바 任務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處理했고 誠實性을 인정받아 美國支社로 發令받았다고 한다. 美國支社에서 勤務하던 中 그는 事業을 始作했다. 親兄이 美國에서 貿易業을 하고 있었는데 兄님이 會社 生活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던 그에게 事業을 勸誘하며 事業資金을 대준 것이다. 뉴욕에 事務室을 내고 처음 가죽 輸入을 始作했지만 돈만 날렸다. 代身 失敗를 딛고 假髮 輸入을 始作했다. 새벽에 집을 나와 化粧室 갈 時間이 없어 小便을 종이컵으로 받아둘 程度로 齷齪같이 일했다. 流行에 敏感한 패션産業이었기에 有名 패션쇼나 헤어쇼, 그리고 뷰티숍을 두루 살펴보며 트렌드를 把握했다. 需要를 正確히 把握한 德分에 事業에 成功해 날로 繁昌했다. 뉴욕 맨해튼에 建物 몇 채를 가질 程度였다고 한다.그러자 다른 苦悶이 생기기 始作했다. 그의 오랜 꿈인 國會議員이었다. 美國에서 그냥 돈만 벌어 韓國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當時 僑民들은 美國에서 어려운 生活을 하고 있었고 韓人會 일을 거들어야겠다고 決心했다. 一種의 政治 練習으로 뉴욕 韓人會 活動을 熱心히 했고 會長 候補로 推薦을 받게 됐다. 15代 뉴욕 韓人會長에 出馬했지만 落馬했고 2年 뒤 歷代 最年少 會長이 됐다. 그 뒤 僑民社會에서 뉴욕 韓人會를 成功的으로 이끌었다는 評價를 받으면서 1981年 8月 美洲 韓人 總聯合會에서 98個 韓人會長의 滿場一致로 總聯合會 會長에 當選됐다.● 全斗煥 동생 전경환과 DJ 사이… 뒤바뀐 朴趾源의 ‘운명’ 總聯合會長을 맡던 그는 전두환 前 大統領의 동생 전경환 氏와 가깝게 지냈다. 專 前 大統領의 美國 訪問 歡迎委員長을 맡았고 그 일로 韓國의 民主化를 위해 애쓰던 수많은 良心的인 人士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全 氏는 그의 政界 入門을 도와주려고 애썼고 與黨인 민정당의 全國區 議員 入城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전 前 大統領이 海外 同胞에겐 全國區를 줄 수 없다는 指示를 내리면서 霧散됐다. 未安했던 全 氏는 엄청난 利權이 있는 事業을 提議했지만 바로 拒絶했다. 그가 그때 민정당 議員이 됐거나 事業을 챙겼더라면 아마 只今의 朴趾源은 없었을 것이다.“어쨌든 잘못된 行動이었음은 分明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얼마 뒤 김대중 先生을 만나면서 深刻한 人間的 苦惱에 빠지기도 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中 - 朴智元의 運命이 바뀐 건 뉴욕에서 ‘獨立新聞’을 發行하던 김경재 前 議員의 紹介로 亡命 中이던 DJ를 만나면서부터다. 1983年 5月이었다. “絶對權力은 반드시 腐敗하게 돼 있다. 1980年代 後半에는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民主化가 온다”는 等 DJ의 말에 感銘을 받은 朴趾源은 무릎을 꿇고 “先生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懺悔했다. 첫 만남 以後 그는 김대중 師團의 末席에 자리 잡게 됐고 DJ가 하던 人權問題硏究所 일을 돕고 國內에서 동교동系 人士들에게 DJ의 메시지를 傳하는 ‘密使’驛 等을 맡았다.이는 ‘一級祕密’이었다. DJ의 最側近인 권노갑 拷問조차 그의 存在를 몰랐다고 한다. 1987年 平和민주당 創黨 過程에서 朴趾源은 故鄕인 全南 珍島委員長을 맡았다. 權 顧問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굴러온 돌”로 여기고 이를 反對했다. 美國에서 맺어진 DJ와 朴智元의 關係를 모르던 權 前 議員의 立場에서 보면 옳은 進言이었다. 以後 權 顧問이 처음 美國을 訪問할 當時 美國에 있던 朴趾源을 만났다. 權 顧問은 “이番에 美國 오기 前에 동교동에 들렀더니 師母님과 總裁께서 美國 가면 꼭 朴 會長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면서 그間 朴 會長과의 關係에 對해서 仔細하게 說明을 해주셨소”라며 손을 꽉 잡고 “前에 正말 未安했다”며 몇 番이나 謝過를 했다고 한다. “五十이 넘어야 官運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使嗾家들에게 들었던 朴趾源은 實際 3修 끝에 全國區 議員이 됐다. 大入에서 再修한 것을 합쳐 “내 人生은 汚水(五修)”라는 게 그의 말이다. 1984年엔 野黨인 신민당에서 全國區(現 比例代表) 議員職을 提議받았으나 當選圈 順番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拒絶했다. 選擧 結果는 當選圈이었다. 첫 番째 失敗였다. 美國에서 들어온 뒤 珍島委員長과 總裁 言論特報 等을 맡았지만 1988年엔 地域區가 統合되면서 出馬가 挫折됐다. 全國區로 出馬하기로 했지만 마지막에 DJ가 다른 人物에게 自身에게 주겠다던 全國區 順番을 줘 機會가 없었다. 다시 4年 뒤에 全國區 國會議員 候補 21番으로 艱辛히 當選됐다. 그의 나이 滿으로 50歲였다. 1987年과 1992年 大選에서 DJ의 至近距離에서 選擧運動을 도왔다. 特히 1992年에 그는 首席副代辯人을 맡아 4月부터 12月까지 每日 午前 6時 10分이면 동교동에 到着해서 DJ와 함께 하루終日 選擧運動을 했다. 記者들과 ‘떡’李 되도록 暴飮을 한 이틀을 빼곤 하루도 그 時間에 到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대선을 熱心히 뛰었지만 結果는 김영삼 前 大統領(YS)의 勝利로 끝났고 DJ는 다음 날 政界 隱退를 宣言했다. DJ 大統領을 만들려던 朴智元에겐 눈앞이 깜깜한 瞬間이었다. ● 몸으로 때운 ‘毒舌’ 名代辯人…“復活한 예수님, ‘記者들 왔냐’고 물을 것” “나는 本變因이 아닌 代辯人이니 좀 봐주시오. 큰 政治 하는 분들이 그깟 代辯人의 말에 神經을 써야 되겠느냐.”‘대변인 朴趾源’은 間或 自身이 論評에서 批判한 當事者가 直接 電話를 해 “너무 甚한 것 아니냐”고 抗議하면 이같이 달랬다고 한다. 一部 論評에 人身攻擊性이나 嘲弄이 들어가는 等 센 論評을 낸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一角에서는 “水準 以下”라거나 “補佐官이 쓴 것을 읽기만 한다”고 非難하기도 했다. 하지만 大部分 代辯人 名義 論評은 그가 直接 썼다고 한다. 그는 1992年 大選에선 YS가 財産을 公開했을 때 “머리부터 公開하라”며 攻擊했고 TV 討論을 拒否하자 “演說 때 使用하는 原稿를 가져와도 된다”고 비꼬았다. 巷間에서 DJ에 比해 YS가 덜 총명하다는 指摘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 1994年 當時 박찬종 新政治改革黨 代表가 DJ의 政界復歸論에 對해 批判하자 “煉炭가스는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人體에 害만 주고 있는데 朴 代表도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野黨 分裂을 助長하고 있다”고 非難해 話題가 되기도 했다. 1995年 11月엔 當時 민자당이 唐名 改稱을 推進하자 “戶籍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민자당은 이름을 바꾸어도 大統領이 되기 위해 野合했던 金 大統領과 민자당 그 이름으로 歷史는 記錄하고, 國民은 記憶할 것이다”고 했다.그러면서 그는 “代辯人 聲明이 개떡 같더라도 記事는 찰떡같이 써 주시오”라고 記者들한테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黨의 言論 政策이 맘에 들지 않을 때는 “萬若 예수님이 復活하신다면, 가장 먼저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記者들 왔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復活한 事實이 一般人들에게 알려질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그 時節부터 朴趾源을 오래 지켜본 한 人士의 말이다. “DJ가 여러 長點을 가진 指導者지만 基準이 높아 모시기 어려운 指導者다. 성실함과 集中力을 要求하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은 곁에 안 둔다. 그 基準에 符合하는 게 朴智元이고 내가 본 사람 中에 그만큼 瞬發力이 있고 성실하고 集中力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 時節 낮밤으로 記者들과 爆彈酒를 마시면서도 每日 아침 일찍 DJ가 있던 一山과 靑瓦臺로 出勤했다.” - 取材 메모 中 -1996年 朴趾源은 富川 小祀에 出馬하며 再選에 挑戰했다. 相對는 신한국당 候補였던 金文洙 現 經濟社會勞動委員會 委員長.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著書도 1996年 總選을 앞두고 發刊됐는데 이를 두고 ‘넥타이’ 工房도 있었다고 한다. 當時 勞動運動家 出身에서 與黨 신한국당의 候補로 變身한 金 委員長이 먼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語塞하다’라는 冊을 냈는데 以後 朴趾源이 이 같은 題目의 冊을 내자 金 委員長 側에서 ‘狙擊用’이라고 反撥한 것이다. 朴趾源은 前에도 “넥타이를 제법 잘 맨다는 報道가 있었다”고 反駁했지만 金 委員長은 朴趾源을 著作權法 違反으로 告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結局 苦杯를 마셨다. 當時 그를 向해 左翼이라고 攻擊하는 等 色깔論爭, 容共몰이를 한 탓도 컸다. ●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대(代)통령’이라는 말까지 膾炙落選한 뒤에도 朴趾源은 政界 復歸를 宣言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創黨한 DJ의 特報 等을 맡았다. DJ는 自由民主聯合의 김종필 總裁와 DJP聯合을 성사시키며 結局 大選에 成功한다. 朴趾源은 當選者 代辯人, 大統領公報首席祕書官, 文化관광부 長官 等을 거치며 DJ를 代理해 對北特使를 다녀와 6·15 南北頂上會談 成功에 寄與했다. 大統領祕書室長으로 오르며 名實相符한 DJ의 ‘2人者’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DJ의 旣存 家臣그룹인 ‘동교동系’가 2線으로 물러나면서 그가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도 影響을 끼쳤다. 동교동系는 1997年 大選 直前에 選出職을 除外한 任命職은 맡지 않겠다는 宣言을 했고 2000年 12月 座長인 權 顧問은 鄭東泳 當時 最高委員으로부터 2線 後退를 要求받고 最高委員職을 辭退했다. 이 같은 狀況에서 DJ의 心腹이지만 동교동系와는 若干 異質的인 그가 前面에 나서게 됐고 權力이 쏠리게 된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이야기도 많았고 猜忌와 嫉妬, 미움도 많이 받았다. 김창혁 前 동아일보 記者와 權 前 顧問이 쓴 권노갑 回顧錄 ‘順命’에는 朴趾源에 對해 이 같은 祕話가 나온다. 18代 總選을 앞둔 2008年 初, 全南 無顔으로 向하는 권노갑의 乘用車 안. DJ의 次男인 金弘業 議員의 選擧를 돕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권노갑의 携帶電話가 울렸다. DJ였다. “務安 가는 김에 木鋪道 좀 다녀오소.” 金弘業 支援 遊說를 마친 다음 木浦에 가서 朴趾源도 좀 도와주고 오라는 말이었다. “無顔은 가겠지만 木浦는 到底히 못 가겠습니다.” - 권노갑 回顧錄 ‘順命’ 中 -DJ의 ‘外遊 勸誘’를 물리치자 朴趾源이 DJ의 뜻을 直接 傳한 것, 2002年 4月 ‘진승현 게이트’에 權 前 顧問이 連累됐다는 報道가 나오자 權 前 顧問은 朴趾源에게 電話를 걸어 이 같은 內容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는데 알고 있었지만 이를 傳達하지 않은 것 等 一連의 過程에서 權 前 顧問도 적지 않은 서운함을 품었던 것이다. 마지막 祕書室長을 지내면서는 ‘代身할 臺’字가 붙은 ‘大(代)通靈’이라는 別稱이 붙을 程度였다. 恒常 處身에 留意하고 몸操心을 했지만 미움을 받았다. 言論社 人事에 介入하거나 言論社 稅務調査를 그가 企劃했다는 疑懼心과 論叢을 받으면서 그의 專門 分野이자 同伴者였던 言論들도 一部 등을 돌렸다. ‘太陽에 가까우면 타죽을 수 있다’는 말처럼 權力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朴趾源도 DJ 政府가 끝난 뒤 갖은 苦楚와 受難을 겪게 된다. 이 또한 그의 運命이었다. 記者 初年兵 때인 2009年頃 어딘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巷間에 떠도는 所聞이었습니다. 朴趾源 前 院長이 文化관광부 長官 時節, 女俳優 C 氏와 艶聞說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最近 朴 前 院長에게 물었더니 “全혀 事實無根이다. C 氏는 본 적도 없다”며 웃었습니다. 根據가 없는 ‘찌라시’인지 類似한 事件이 訛傳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박 前 院長이 現在까지 낸 冊은 딱 두 卷입니다. 2018年 10月 夫人 고 이선자 女史가 腦腫瘍으로 世上을 뜬 뒤 追慕집으로 發刊한 ‘고마워’가 가장 最新입니다. 冊까지 낼 程度로 ‘사랑꾼’인 그에게 過去 저런 所聞이 있었다는 게 神奇해서 던진 質問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卷은 1996年에 發刊된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였습니다. 2019年 무렵 議員室에 付託해서 複寫本으로 求해 읽었던 冊입니다. 이番 便宜 相當 部分은 그 冊에 依存했습니다. 저 亦是 記者로서 그 時節을 直接 겪지 못했고, 27年 前 씌어진 데다 絶版된 지 오래여서 讀者분들도 새롭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朴 前 院長에게 1996年 以後 自敍傳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DJ와 관계된 얘기를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每日 TV와 라디오, 유튜브 等에 每日 4番 안팎 出演해 一角에선 “DJ 장사를 그만 좀 해라”라는 말도 나오지만 基本的으로 DJ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自制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權力의 核心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자리지만 元來 미움을 많이 받는 자리입니다. 銅錢의 兩面입니다. ‘大(代)通靈’이라는 말을 들을 程度였던 그도 榮辱의 歲月을 겪었습니다. 다음 [18話]에선 그의 노무현 政府 時節 以後를 다루겠습니다. 그가 酸素 같은 男子인지 煉炭가스(一酸化炭素) 같은 男子인지는 後續을 보고 判斷하시길 바랍니다.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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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킹맘 A 檢事가 겪은 檢察 안의 ‘파시즘’[光化門에서/황형준]

    몇 年 前 A 檢事는 檢察 內에서 이른바 部署 末席(末席)李 맡는 ‘밥總務’였다. 每달 10萬∼30萬 원씩 職級에 맞는 돈을 걷은 뒤 每週 定해진 날 部員들의 食堂 豫約부터 돈 管理까지 하는 게 밥總務의 일이다. “初任檢事는 아침에 밥總務 일밖에 안 한다. 家族 없이 地方에 온 檢事들은 平素 혼자 밥먹으러 다니니까 點心을 먹을 때 맛있는 걸 먹고 싶어한다. 그런데 先輩들마다 메뉴와 食堂에 對한 要求事項이 다 다르다. ‘어제 술먹었으니 解酲국집 가자’ ‘바쁘니 가까운 데서 먹자’ 等 아침마다 쪽紙가 數十 個씩 온다. 이를 調律하다 보면 午前 時間이 다 간다.” 問題는 밥總務를 向한 ‘職場 內 甲질’을 同伴했다는 點이다. ‘밥總務를 잘해야 企劃도 잘한다’는 말은 甲질을 숨기기 위한 包裝이었을 뿐이다. 말하는 사람보다는 地位가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 낮은 境遇에 쓰는 ‘壓尊法’ 때문에 A 檢査는 先輩 B 檢事로부터 數없이 많은 言語暴力을 當했다. “쪽紙 때문에 每日 혼났다. 壓尊法이 틀렸다고 첫날 불려가 눈물이 쏙 빠지게 세 時間 동안 혼났다. 두 番째는 메신저의 글씨色이 粉紅色이라고 또 혼났다. 세 番째는 ‘○○○ 先輩 △△△ 先輩’라고 써야 되는데 ‘○○○ △△△ 先輩’라고 썼다고 ‘○○○가 네 親舊냐’라고 혼났다. 奇想天外한 理由로 繼續 괴롭혀 머리가 다 빠졌다.” 壓尊法은 軍隊에서조차 2016年 廢止됐다. A 檢事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했더니 B 檢事는 “先輩의 (搜査)記錄은 두껍고 너의 記錄은 얇지 않느냐. 그 代身 너는 밥總務라는 任務가 있다”고 했다. “繼續 시키면 會社를 나가겠다”는 말에는 “그 精神으로 나가서 뭐라도 될 거 같냐.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A, B檢査가 모두 女性이어서 젠더 이슈로 번지진 않았다. 이는 2018年 1月 取材파일에 적어둔 內容이다. 2017年 9月 朴相基 法務部 長官이 밥總務를 廢止하라는 指示를 내린 以後에도 繼續된 것이다. 아직도 밥總務는 相當數 남아 있다고 한다. 以後 A 檢査는 出産을 한 뒤 復職했다. 特別한 理由가 없는 날이면 育兒 때문에 午後 7時면 退勤을 한다. 일이 많으면 出勤을 일찍 하거나 밤에 다시 廳舍로 나온다.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때 早退를 하거나 年次를 쓰겠다는 A 檢事에게 部長檢事는 못마땅하다는 듯 “父母님은 뭐하시길래 아이를 돌봐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내 새끼를 내가 키워야지, 왜 어른들이 봐주셔야 되냐”고 反駁했다고 한다. 媤宅과 親庭 어른들은 居住地가 멀고 持病을 앓고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없다. 最近 만난 A 檢査는 業務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만 昇進은 抛棄했고 進路를 苦悶 中이라고 했다. 上司의 不當한 指示에 ‘아닌 건 아니다’라고 하고, 育兒休職을 쓰고, ‘칼退勤’을 한 것과 無關치 않아 보인다. A 檢事의 事例가 특수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惡習과 弊端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곰팡이처럼 繼續 피어난다. 人權守護機關을 自處하는 檢察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그리고 內部에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年진이’가 없는지 늘 警戒해야 한다.황형준 社會部 次長 constant25@donga.com}

    • 202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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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琴泰燮의 ‘잘못된 만남’…사람 보는 眼目은 ‘正義의 女神’級[황형준의 法廷冒瀆]

    琴泰燮 前 國會議員(以下 琴泰燮)에게는 3人의 有名한 스승이 있었다. 한 名은 學問的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요, 나머지 두 名은 政治的 스승이렷다. 그中 누가 映畫 ‘죽은 詩人의 社會’ 키팅 先生과 같은 偉大한 스승인지, 아니면 反面敎師해야 할 對象인지, 政治人 琴泰燮의 行步를 보고 讀者가 判斷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잘못된 만남’이다. 琴泰燮 周邊에선 “어떻게 10年 동안 안 되는 길만 골라 가나 싶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琴泰燮은 ‘개구리 王子’처럼 눈이 크지만 사람 보는 眼目은 裝飾品 水準이요, 눈을 가린 ‘正義의 女神’級이다. 正義의 女神은 形象이 조금씩 다르다. 서울 瑞草區 大法院에 있는 ‘正義의 女神’은 눈을 뜨고 저울과 法典을 든 形象인데 공교롭게 琴泰燮이 著書 ‘디케의 눈’ 冊 表紙에 引用한 寫眞은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든 形象이다. ● 政治權 入門 契機 된 안철수와의 訣別첫 出發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琴泰燮은 2007年 檢察을 나온 뒤 5年 만에 2012年 안철수 캠프에 合流했다. 안철수 議員(現 國民의힘)李 大選 出馬 宣言을 하기 前 ‘시골 醫師’ 박경철 氏로부터 提案을 받았고 2012年 봄에서야 非公式 캠프인 ‘汝矣島 오피스텔’에 合流한 것이다. 琴泰燮은 안철수 캠프에 合流하게 된 背景에 對해 이같이 밝혔다. “2012年 大選을 앞둔 우리 앞에 選擇의 길은 그렇게 平面的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文在寅, 朴元淳, 安哲秀 等을 놓고 長點과 短點을 比較해가며 한 名을 고를 수 있는 處地가 아니었다. 그때 나도 많은 사람들이 願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政權을 交替해서 판을 갈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契機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安哲秀 院長뿐이었다. (中略) 나는 그 努力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한 것이지 여러 政治人 中에서 한 名을 選擇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狀況이 아니었다.” - 2015年 8月 發刊한 ‘이기는 野黨을 갖고 싶다’ 中 -한마디로 얘기하면 政治는 始作해야겠고 딱히 安 議員을 ‘主君’으로 삼을 만큼 끌리진 않았지만 마침 提案이 들어왔으니 合流했다고 多少 率直히 밝힌 것이다. (勿論 이 冊은 琴泰燮이 安 議員과 事實上 訣別한 뒤 쓰여졌다.)그 뒤 그는 안 議員에 對한 言論과 野黨 等의 檢證作業이 本格的으로 進行되면서 ‘네거티브’ 對應을 맡았다. 박근혜 캠프의 정준길 辯護士가 琴泰燮에게 電話를 걸어 이른바 ‘安哲秀 大選 不出馬 慫慂’ 論難이 일었고 이 일로 어쨌든 有名해졌다.그해 11月 23日 當時 민주당과 單一化 協商을 進行하던 中 安 議員이 結局 候補 辭退를 決心하면서 眞心캠프度 解散됐다. 安 議員은 18代 大選 當日 美國 샌프란시스코로 떠났고 朴槿惠 前 大統領이 文在寅 前 大統領을 꺾으면서 當時 與黨의 勝利로 끝이 났다.금태섭은 2013年 秒 安 議員을 만나러 美國 샌프란시스코를 찾아갔다. 이와 關聯된 두 時間 동안 琴泰燮이 진흙 길을 걷고 있는 데도 안 議員이 몰랐다는 에피소드는 法定冒瀆 [8話]에서 다룬 적이 있다.이 內容이 言論에 注目을 받자 2015年 8月 安 議員 側 人士는 이같이 말했다. “금 辯護士가 當時 美國에 온 게 結局 4月 再·補選 때 노원丙에서 自身이 나가려고 한 것인데, 거기에 對한 說明은 쏙 뺐다.” - 取材 메모 中 - 當時 琴泰燮은 2013年 4月 24日 치러지는 서울 노원丙 補闕選擧에서 大選에서 敗北한 지 몇 달 안 된 安 議員이 出馬하는 것을 反對했다고 한다. 代身 自身이 出馬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安 議員은 歸國해 補闕選擧에 直接 出馬했고 琴泰燮은 怒怨丙 選擧에 直接 關與하지 않았다. 安 議員은 無所屬으로 當選이 됐다.그 뒤 安 議員은 新黨 創黨 方針을 밝혔고 琴泰燮도 新黨 創黨機構의 代辯人을 맡으며 活動했다. 그러던 中 그해 3月 2日 安 議員이 민주당 김한길 代表와 電擊 合黨을 發表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誕生했다. 祕密裏에 推進되던 合當 計劃이 發表되고서야 알게 된 琴泰燮은 2012年 候補 辭退에 이어 또 한 番 적지 않은 背信感을 느꼈다.합당 뒤 第1野黨인 새정치민주연합 代辯人으로 活動하던 琴泰燮은 7·30 再·補選에서 서울 銅雀乙 出馬를 宣言했지만 出馬는 挫折됐다. 當時 金한길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指導部는 그를 水原丙에 戰略公薦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동작乙에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다른 地域으로 出馬할 수 없다며 所信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結局 代辯人職에서 물러났고 安 議員과 訣別했다. 그 뒤 安 議員이 새정치민주당을 脫黨해 2016年 국민의당을 創黨할 때도 함께하자는 提案을 받았지만 琴泰燮은 민주당에 그대로 남았다. 그해 1月 末 琴泰燮이 했던 이야기다. “지지난주에 안철수 議員을 만났다. 自己가 2015年에 왜 脫黨했는지 말한 다음에 ‘금 辯護士는 心地가 곧은 사람이고 오래 생각해서 한番 決定하면 안 바꾸는 사람이니까 내가 얘기해도 所用없겠지만 우리 黨에 왔으면 좋겠다. 公薦받고 出馬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가 ‘眞心으로 잘하시길 바라지만, 이番에는 黨에 있는 게 맞겠다’고 했고 安 議員은 ‘언제든 생각 바뀌면 이야기해라’고 했다.” - 取材 메모 中 -● 20代 國會 入城…屬望받는 初選으로 ‘신들린 발演技’까지 消化結局 琴泰燮은 민주당 候補로 서울 講書甲에 出馬해 20代 國會議員이 됐다. ‘김종인 非對委’ 體制에서 代辯人에 拔擢됐고, 秋美愛 代表 時節엔 戰略企劃委員長을 맡는 等 初選 議員으로 黨 要職을 맡았다.대선 直前엔 文在寅 캠프의 政策弘報 사이트인 ‘文在寅 1番街’를 弘報하기 위해 俳優 정우성 장쯔이가 登場했던 ‘2% 不足할 때’ 飮料의 過去 廣告를 패러디해 秋美愛 當時 代表와 呼吸을 맞추기도 했다. (나무위키에는 ‘신들린 발演技’였다고 表現돼 있다.)원내에선 法曹人의 專門性을 살려 法制司法委員會에서 活動하며 注目을 받았다. ‘그 일’李 있기 前까지는 屬望받는 初選 中 한 名이었다. 初選으로선 異例的으로 2019年 백봉신史上 大賞을 받았다. ● ‘指導敎授’ 曺國 前 長官 正面 批判… ‘조금迫害’로 拂戾琴泰燮과 曺國 前 法務部 長官은 各各 서울對 法大 86學番과 82學番이다. 네 學番 差異지만 조 前 長官이 學校를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는 두 살 差異다. 琴泰燮은 學校 다닐 때는 조 前 長官을 몰랐지만 大檢察廳 硏究官으로 勤務하면서 그를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檢事 時節 琴泰燮은 1年間 美國 硏修를 통해 碩士 學位를 땄지만 論文을 안 쓴 狀態였다. 敎授들이 論文 없는 碩士를 탐탁지 않게 여겨서 博士 過程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當時 顔面이 있는 조 前 長官에게 付託했고 그가 琴泰燮을 弟子로 받아들이면서 親하게 지냈다. 結局 琴泰燮은 論文을 쓸 餘裕가 없었고 博士 學位는 받지 못했다. 本格的으로 政治를 始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琴泰燮은 2011年 서울市長 補闕選擧를 앞두고 새로운 人物이 必要하다는 생각에 조 前 長官에게 서울市長 出馬를 勸誘한 적도 있다. “나는 조국 敎授가 그때부터 政治를 始作하더라도 18代 大選에서 野圈의 候補로 나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候補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野圈에 유리하게 造成된 서울市長 選擧에 나간다면 勝算이 充分하다고 봤다. 그러면 野圈은 泄瀉 大權에서 敗北하더라도 젊고 有力한 政治人을 서울市長으로 保有하게 되는데 여기엔 작지 않은 意味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支持者들에게 未來에 對한 希望을 줄 수 있었다.” - ‘이기는 野黨을 갖고 싶다’ 中에서 -그러나 조 前 長官은 選擧에 出馬할 생각이 없었고 代身 박원순 辯護士를 돕는 것이 自身의 役割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文在寅 政府 出帆 뒤 조 前 長官은 初代 大統領民政首席祕書官이 됐다. 이어 2019年 8月 文在寅 大統領이 朴相基 前 長官의 後任으로 조 前 長官을 指名했고 子女 入試非理 等에 對한 疑惑이 提起되면서 論難이 거세졌다.여기서 ‘그 일’李 벌어졌다. 法査委 所屬이었던 琴泰燮은 조 前 長官이 記者懇談會에서 ‘金수저는 進步를 志向하면 안 되냐’고 反駁한 點을 言及하며 “사람이 이걸 묻는데 저걸 答辯하면 火가 난다. 言行不一致 東問西答式 答辯으로 傷處를 깊게 한 것에 對해 眞心으로 謝過할 생각이 없냐”고 조 前 長官을 몰아세웠다. 이어 “進步的 삶을 살아왔다는 理由로 批判받는 게 아니다. 言行不一致 때문이다”라고 指摘했다. 이런 理由로 親文(親文在寅) 陣營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조 前 長官과의 關係도 事實上 끝났다. 또 琴泰燮은 當時 政府가 推進하던 檢察改革 法案에 對해 公開的으로 反對 목소리를 냈다. 搜査와 起訴의 分離를 主張했고 檢察의 直接 搜査는 줄이는 方向의 檢警 搜査權 調整에 懷疑的이었다. 高位公職者犯罪搜査處 新設에 對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結局 2019年 12月 公搜處法 修正案을 민주당이 밀어붙이며 本會議에서 表決할 때 棄權票를 던졌다. 琴泰燮은 쓴소리를 하던 黨內 ‘非主流’ 趙應天 朴用鎭 金海泳 當時 議員과 함께 ‘조금迫害’로 몰리며 한 묶음으로 ‘빨간 점퍼’라는 批判을 받았다. 겉은 民主黨 所屬이지만 속은 國民의힘이라는 비아냥이었다.결국 그는 21代 總選 競選에서 탈락했다. 그 過程도 結果도 물밑에서 이뤄졌지만 그는 競選 結果 發表날 筆者에게 “다 제가 不足해서 그렇다. 面目이 없다”고 敗北를 認定했다. 甚至於 그해 5月 末 黨 倫理審判員은 公搜處法 票決에서 棄權을 했다는 理由로 琴泰燮에 對해 ‘警告 處分’을 내렸다. 다음은 當時 민주당 懲戒에 對한 不當함을 指摘한 筆者의 칼럼이다.결국 琴泰燮은 같은 해 10月 “民主黨은 예전의 悠然함과 謙遜함, 疏通의 文化를 찾아볼 수 없을 程度로 變했다”며 “마지막 抗議의 뜻으로 忠情과 眞心을 담아 脫黨屆를 낸다”고 밝혔다.‘내로남불’을 批判하며 所信 있고 合理的인 政治人으로 琴泰燮이 國民들에게 刻印되는 場面이었다. 메시지에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波長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黨內 勢力이 없는 孑孑單身 非主流 初選 議員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이듬해 4月 서울市長 補闕選擧에 出馬하며 人爲的으로 體級을 올렸지만 評價는 冷靜했다. 안철수 議員과의 ‘第3地帶 候補’ 單一化에서 敗北했고 安 議員도 오세훈 候補와 單一化를 했다. 琴泰燮으로선 서울市長 出馬로 認知度를 올렸을지 모르지만 別로 얻은 게 없는 選擧였다. ● 琴泰燮의 ‘멘토’ 김종인의 빛과 그늘그 뒤 琴泰燮은 政治評論家로서 言論 寄稿와 放送 出演, 放送進行者 等으로 活動했다. 그러던 中 이달 18日 國會에서 연 ‘다른 未來를 위한 省察과 摸索’ 모임 討論會 發題文을 통해 兩極化, 便 가르기식 政治, 兩黨制의 問題 等을 韓國 政治의 問題點으로 꼽았다. 그는 “새롭게 出現할 勢力은 旣存 韓國 政治의 問題들을 一掃하는 合理性과 客觀性을 갖추어야 하고 自己便에게 有利한 議題가 아닌 우리 社會에 眞짜 重要한 問題를 찾아서 提起하는 能力이 있어야 한다”며 “單純히 旣存 政黨들의 行態를 反對하고 批判하는 ‘反射體’가 되는 데서 存在 理由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自己 비전을 提示하는 ‘發光體’가 되어야 한다. 兩 陣營으로 나누어져 있는 現在의 政治 地形을 3分 하는 것이 아니라 旣存의 勢力을 갈아치우겠다는 意志와 힘이 있어야 새로운 勢力으로서 意味가 있다”고 强調했다. 東亞日報와의 인터뷰에선 “올해 9月 秋夕 前에 제3지대 旗발을 들어 올리겠다”고 했다.금태섭이 新黨 創黨에 對한 意志를 드러낸 것은 이番이 처음이 아니다. 2年 前 서울市長 補闕選擧 때도 靑年들이 主軸이 된 新黨을 만들겠다고 여러 次例 强調했다. 하지만 이番 討論會에선 김종인 前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이 座長을 맡았고 新黨 創黨에 對해 “금 前 議員이 勇氣를 갖고 그런 試圖를 하니까 도우려 한다”고 했다. 與野를 두루 經驗하고 ‘킹 메이커’이자 影響力 있는 ‘스피커’ 元老인 金 前 委員長은 琴泰燮에겐 든든한 後援者다. 하지만 靑年 新黨 方針을 밝히는 자리에 老獪한 政治人이 登場해 背後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指摘도 있다.금태섭은 2016年 當時 민주당 非對委 代表였던 金 前 委員長으로부터 公薦狀을 받은 因緣이 있다. 그前에도 그 以後에도 特別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祖國 事態와 公搜處法 反對 等 過程에서 琴泰燮이 所信 發言을 할 때마다 金 前 委員長으로부터 激勵를 받았고 公薦에 탈락했을 때 가장 먼저 電話를 건 것도 金 前 委員長이었다고 한다.금태섭도 金 前 委員長에 對해 “兩黨을 다 經驗했고 또 오래 政治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슨 個人的인 欲心이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적어도 제가 겪어본 바로는 私心이 없는 분”이라며 “當身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나보고 이런저런 걸 해보라고 助言하는 關係”라고 했다.김 前 委員長은 ‘經濟民主化’ 條項을 憲法에 反映시켰고 朴槿惠 文在寅 政府 誕生에 寄與한 元老다. 하지만 大選에 直接 ‘플레이어’로 나섰다가 一週日 만에 撤收한 적도 있다. 2017年에 민주당을 脫黨하며 大選 出馬를 宣言했다가 注目을 받지 못하자 出馬를 접고 안철수 議員을 支持했다. 李俊錫 全 國民의힘 代表와도 가까운 그는 琴泰燮과 李俊錫 같은 人物을 통해 韓國 政治의 變化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금태섭은 政治人 10餘 年 동안 左衝右突 ‘잘못된 만남’을 이어왔다. 그리고 訣別을 거듭했다. 이제 그가 主導하는 第3地帶 新黨 創黨에 關心이 쏠리고 있다. 金 前 委員長이 참스승으로 그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까. ‘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琴泰燮이 3人의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 成功 與否에 따라 政治人 琴泰燮의 未來도 달렸다. 琴泰燮 前 議員에겐 팬덤이 아직 없습니다. 政治 10年이면 팬클럽이라도 생길 만한데 없습니다. 임팩트가 弱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는 “組織이 안 되어서 그러지 길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根據 없는 自信感과 밉지 않은 王子兵입니다.신당 創黨 方針을 두고도 그 周邊에서조차 憂慮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너무 性急한 거 아닌가”, “大選 走者도 아닌데 함께 出馬할 人物도, 組織도, 아직까진 콘텐츠도 뭔지 모르겠다”는 等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는 自身이 中心이 되는 ‘琴泰燮 新黨’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兩黨으로는 안 된다는 問題意識下에 論議하는 過程이기 때문에 ‘낡은 잣대’로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過去 個人을 中心으로 한 創黨은 모두 失敗했다. 勢力化보다는 國民들이 共感할 수 있는 答을 찾기 위해 論議하고 또 工夫도 하고 專門家들 얘기도 듣고 하는 過程”이라고 說明했습니다. 더 以上 묻기가 어려워 혼자 그의 未來를 想像해 봅니다. 그래도 그의 ‘近者감’과 充滿한 ‘똘끼’라면 좀더 國民들에게 剛한 印象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期待해 봅니다.다음 [17話]는 2週 뒤인 5月 11日까지 차분히 써볼 豫定입니다. 大韓民國에서 가장 바쁜 野圈의 ‘셀럽’이어서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친숙하지만 眞面目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周邊에선 彼我를 떠나 다들 “대단한 사람”이라고 感歎하는 人物입니다.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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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돈封套 疑惑’ 강래구 拘束令狀 棄却…急물살 타던 搜査 制動

    더불어民主黨의 ‘全黨大會 돈封套 疑惑’ 事件에서 資金을 마련해 傳達한 嫌疑를 받고 있는 강래구 韓國監査協會長이 21日 拘束을 免했다. 12日 强制搜査에 着手한 檢察은 이 事件의 ‘키맨’인 姜 會長 拘束令狀을 請求하며 搜査에 速度를 냈지만 身柄 確保가 挫折되면서 制動이 걸릴 것으로 展望된다. 서울中央地法 윤재남 令狀專擔 部長判事는 21日 午後 11時 半頃 姜 會長에 對해 “現在까지 提出된 資料만으로는 被疑者 等에 對한 押收搜索 以後에 被疑者가 直接 證據湮滅을 試圖하였다거나 다른 關聯者들에게 證據湮滅 및 虛僞事實 陳述 等을 하도록 懷柔하였다고 斷定하기 어렵다”며 令狀을 棄却했다. 尹 部長判事는 또 “現在까지 確保한 主要 證據와 向後 蒐集이 豫想되는 證據들에 對해 被疑者가 搜査에 影響을 줄 程度로 證據를 湮滅하였다거나 張差 證據를 湮滅할 것으로 豫想된다고 斷定하기도 어렵다”며 “逃亡의 念慮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棄却 事由를 밝혔다. 앞서 檢察은 姜 會長이 2021年 3∼5月 9400萬 원이 담긴 돈封套를 配布한 嫌疑(政黨法 違反)와 함께 事業街 朴某 氏로부터 2020年 9月 水資源公社 納品 請託 名目으로 300萬 원을 받은 嫌疑(賂物收受)를 適用해 拘束令狀을 請求했다. 姜 會長은 9400萬 원의 돈封套 中 8000萬 원을 마련하고 나머지 1400萬 원에 對해서도 資金 造成을 指示, 勸誘한 것으로 調査됐다. 이날 拘束令狀實質審査에서 姜 會長 側은 “國會議員들에게 돈封套가 傳達됐다는 건 全혀 아니다”거나 一部 嫌疑에 臺下船 “記憶이 안 난다”고 否認했다. 그러면서도 그間 搜査에 잘 協助를 해왔다며 證據湮滅 憂慮 等이 없다고 强調한 것으로 傳해졌다. 이에 맞서 檢察은 監視 死角地帶에 있는 全黨大會에서 金品이 撒布됐고 이 過程에 關與한 嫌疑를 받는 윤관석 民主黨 議員 等 宋永吉 캠프 人士들이 黨內 要職을 차지하는 等 賣官賣職 情況이 뚜렷한 點을 强調했다고 한다. 또 姜 會長이 共犯 等을 接觸해 回游한 情況이 多數 確認된 點 等을 들어 拘束 必要性을 主張했지만 法院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檢察은 令狀 棄却 事由 分析과 補强 搜査를 거친 뒤 令狀 再請求 與否를 檢討할 것으로 보인다. 장은지 記者 jej@donga.com김자현 記者 zion37@donga.com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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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理由 있는 反抗兒’ 琴泰燮을 키운 건 八割이 懲戒…總長·代表에게 ‘警告’ 新記錄[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먹고 노는 大學生’이라는 말이 있던 韓國 經濟의 高度成長期 時節, 大學에서 學事警告(학고)를 받은 兄弟姊妹가 8寸 一家親戚 內에 꼭 한 名씩은 있었다. 그는 大學에서 아슬아슬하게 艱辛히 학고는 免한 模範生(?)이었다.사춘기가 늦게 온 것인지 10, 20代가 아닌 30, 40代에 들어 反抗이 始作됐다. 한 番 받기도 힘든 ‘별’을 各各 두 個나 달았다. 한 番은 檢察總長에게 社會的 物議를 일으켰다는 理由로, 한 番은 所屬된 政黨 代表에게서 黨論을 違背했다는 理由로 ‘警告’ 懲戒를 받은 것이다. 이 두 가지 懲戒를 잇달아 받은 大韓民國 國民은 처음일 것이다. 학고까지 받았다면 ‘트리플 크라운’으로 기네스북감日 텐데 아쉬울 뿐이다. 집에도 놀러 갈 程度로 親했던 4個 學番 先輩이자 博士學位 指導敎授였던 曺國 前 法務部 長官에겐 “言行 不一致”라며 正面 批判을 했다. 巷間에는 博士學位만 줬다면 그렇게 척支持 않았을 것이라는 根據없는 所聞까지 돌았다. 이 程度면 逼迫받는 先驅者인지 惡童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所信이나 개똥哲學 없인 不可能한 일이었다. 제임스 딘의 ‘理由 없는 反抗’과 달리 理由 있는 反抗이었다.12년간 檢査 生活을 했지만 檢察 出身 티가 나지 않는다. 辯護士나 政治人 이미지가 더 剛하다. 一刀兩斷으로 有無罪를 가리는 二分法的 視角으로 世上을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울퀴어文化祝祭에 參席해 손등에 찍었던 ‘무지개 圖章’의 强烈한 印象 때문인지도 모른다.신언서판(身言書判)이 뛰어난 ‘서울깍쟁이’ ‘車道남’(차가운 都市 男子)이다. 白眉는 해맑은 微笑다. 눈가의 주름이 無色할 만큼 少年처럼 純粹하게 웃는 게 트레이드마크다. 琴泰燮 前 國會議員(以下 琴泰燮)의 이야기다.● 어릴 적 꿈은 ‘探偵’…平檢事 時節 特需-企劃 分野에서 頭角1967年生인 琴泰燮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父親은 判事 出身의 금병훈 辯護士였다. 경기고와 서울대 法大를 卒業한 琴 辯護士는 朴正熙 政府의 維新時代에 判事를 하며 緊急措置 違反 事件으로 起訴된 大學生들에게 無罪를 宣告하거나 時局事犯들에게 가벼운 刑量을 내리면서 미움을 사 法院의 再任用 節次에서 탈락해 法服을 벗었다. 1973年 비슷한 理由로 數十 名의 判事들이 再任用에서 탈락한 이른바 ‘司法波動’ 때다. (餘談이지만 이때 國民의힘 유승민 議員의 아버지 유수호 前 議員도 判事를 하다가 같은 理由로 法服을 벗었다고 한다. )金 辯護士는 第11代 總選에서 京畿 龍仁-伊川-驪州에 出馬했지만 落選했고 그 뒤 다시 出馬하지 않았다고 한다. 琴泰燮이 法曹人과 政治人의 길을 걷게 된 것은 勿論 正義에 對한 原則이 있는 것도 家風을 이어받은 德分이라는 게 周邊人들의 分析이다. 辯護士 아버지를 둔 德에 琴泰燮은 裕福하게 자랐다. 1986年 汝矣島高를 卒業하고 서울대 法學科에 入學했다. 大學 時節에도 그는 똑똑하고 매너 좋은 模範生이었다. 유머感覺이 있었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推理小說을 좋아했던 그의 어렸을 적 꿈은 探偵이었다. 하지만 그가 大學生이 되던 때만 해도 1987年 民主化 되기 前이어서 檢査에 對한 否定的인 視角이 많았다. 그래서 1992年 司法試驗에 合格한 뒤에도 아버지를 따라 判事가 되려고 했다. 그러던 中 學生運動을 하던 親舊가 1年 먼저 檢事가 된 걸 보고 檢察을 志望했고 아버지도 反對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司法硏修院 24基를 修了한 뒤 1995年 檢事로 任官했다. 서울地檢 東部支廳(現 서울東部地檢)과 昌原地檢 統營支廳, 蔚山地檢, 仁川地檢을 거치는 동안 特殊部 搜査를 많이 했다. 初任 檢事 때부터 國家代表 볼링 選手들의 痲藥 事件과 可樂市場 멸치 都賣人 價格 談合 事件 等 搜査에서 頭角을 드러냈다. 2002年 大檢察廳 中搜部로 5個月間 派遣을 나갔다. 特定 事件 搜査를 뭉갰던 신승남 前 檢察總長에 對한 職權濫用 疑惑 搜査팀의 막내로 勤務했다. 琴泰燮을 除外하곤 申 前 總長과 함께 勤務했던 因緣이 있어서 쉬운 搜査는 아니었지만 結局 그를 起訴했다. 文在寅 政府 以後 잦아진 職權濫用 搜査 以前에 職權濫用 嫌疑로 有罪 判決을 確定받은 事例는 거의 없지만 有罪를 이끈 成功한 搜査였다. 搜査 能力뿐만 아니라 平素 論理的이고 明晳한 頭腦를 가졌다는 評價를 받은 그는 2003年 1月부터 3年間 大檢 企劃調整部 檢察硏究官으로 拔擢됐다. 大檢 中搜部와 基調副를 합쳐 總 3年 半假量 大檢 硏究官으로 勤務하며 ‘特殊통’과 ‘企劃通’으로 認定받은 것이다. 特히 그가 남긴 足跡은 檢察 CI다. 5個의 대나무 模樣에 正義의 女神이 들고 있는 저울 形象과 칼이 대나무 5個의 위쪽 라인과 가운데 대나무 칼 模樣으로 形象化돼 있다. 勿論 그가 디자인한 것은 아니지만 實務者로서 業體를 골라 몇 個의 試案을 받은 뒤 總長에게 報告하는 等 CI를 貫徹시켰다. 또 檢察 在職 中 美國 코넬대 로스쿨에서 碩士學位를 딴 그는 英語가 流暢해 國際檢事協會 서울總會 開催 準備를 맡아 無事히 任務를 마쳤다. ● 被疑者 위해 ‘搜査 제대로 받는 法’을 連載하려다 挫折組織 內에서 乘勝長驅했던 그가 有名稅를 탄 건 서울중앙지검 刑事4部 檢事 時節인 2006年 9月 한겨레신문에 ‘現職 檢事가 말하는 搜査 제대로 받는 法’ 連載를 始作하면서다. 連載를 위해 그는 新聞에 寄稿하기 위한 提案書를 直接 作成했다고 한다. “弱者인 被疑者가 반드시 지켜야 할 行動 指針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辯護人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이다. (中略) 아무것도 모르는 狀態에서 섣불리 行動하면 傷處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狀況을 把握하는 것이 賢明한 態度다. 더구나 搜査機關에는 被疑者에게 유리한 事實까지 찾아내야 하는 義務가 있다. 어떤 檢査도 無辜한 被疑者를 起訴했다가 無罪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陷穽에 빠지는 것만은 避하라. 狀況을 把握한 以後에도 搜査에 對應할 充分한 時間과 機會가 있다.” - 한겨레신문의 ‘現職 檢事가 말하는 搜査 제대로 받는 法’ 中 -題目은 ‘섹시’하고 破格的이지만 只今 觀點으로 보면 現職 檢査라도 못 할 이야기는 아니다. 搜査를 避해 가는 妙手를 밝히는 것도, 搜査 技法을 公開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過去의 잘못된 慣行에서 벗어나야 檢察이 살 것이라는 趣旨에서 始作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波長은 컸다. 琴泰燮은 檢察 指揮部로부터 叱責을 받았고 當初 10回 分量으로 始作한 連載는 1回로 끝났다. 그는 다음 달 “檢察의 搜査 現實을 歪曲하고, 檢察의 公益的 義務에 符合하지 않는 私見을 任意로 寄稿해 國民에게 混亂을 惹起하는 等 社會的 物議를 일으킨 것은 職務上 義務 違反과 品位 損傷에 該當된다”며 總長 警告를 받았다.당시 檢察 內部에서는 “뜨고 싶어서 사고 친 것” “혼자 잘난 척한다”는 等의 批判도 나왔다. 搜査를 하는 平檢事들의 士氣를 떨어뜨리는 結果도 낳았다고 한다. “檢察에서 繼續 熱心히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政治的 欲心이 있는 것 같았다. 本人이 檢察에 繼續 있는 것보다는 政治的으로 成長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읽혀졌다. 公報指針을 違反하면서까지 하는 건 政治的 動機에서 出發한 것이라고 봤다. 性急하게 가야 되는 狀況이구나라고 생각했다. (琴泰燮은) 되게 똑똑하고 工夫도 잘하고 基調部 硏究官을 맡을 程度로 글도 잘 쓰고 將來가 屬望되는 檢査였는데… 本人은 時間이 없다고 느꼈는지 빨리 政界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 當時 大檢 課長級으로 勤務했던 A 辯護士와의 通話 -反面 檢事 琴泰燮을 잘 아는 또 다른 전관 辯護士는 相反된 評價를 내놓았다. “나는 그가 大槪 純粹하다고 봤다. 刑事司法 節次에 關心이 많았고 實力이 있고 自己 基準과 所信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 글을 쓴 理由는 市民의 權利를 檢事가 親切하게 가르쳐주는 게 檢察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理解했다. 그걸 若干 재밌게 쓰고 싶었던 欲心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글이 나왔을 때 참 좋은 글이고 檢察 이미지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錯覺이었다. 大怒한 先輩들도 있었다. 그만큼 當時 先輩들이 너무 偏狹했다. 나는 琴泰燮이 이를 발板 삼아 그때부터 政治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以後에 政治人이 된 건 結果論的인 것이다. ” - 當時 大檢 硏究官으로 平檢事였던 B 辯護士와의 通話 -琴泰燮의 說明은 또 다르다.“나는 檢事가 規定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當時엔 慣行的으로야 그랬는지 모르지만 (言論 寄稿에) 上部의 承認을 받으라는 規定은 없었다. 그래서 公式 懲戒가 아닌 總長 口頭 警告를 받았다. 나 때문에 公報指針이 생겼다. (中略) 當時 노무현 大統領이 ‘檢事와의 對話’로 檢事들이 辱을 많이 먹었다. 그때 檢事들의 抗辯이 ‘밤새워 일하는데 國民들이 몰라준다’였다. 나는 밤새워 일한다고 國民들의 信賴가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글을 썼다. 나는 여러 經歷을 犧牲할 覺悟를 하고 獻身的으로 한 것이지만 혼자 變化를 하려고 하면 結局 失敗한다는 걸 깨달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監督의 ‘라쇼몽’에 登場하는 人物마다 저마다 다른 얘기를 하듯 各自 다른 이야기다. 琴泰燮은 2008年 發刊한 著書 ‘디케의 눈’에서 라쇼몽과 親舊들의 에피소드를 言及하며 “第三者로서는 서로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果然 眞實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 境遇에, 果然 客觀的인 眞實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檢査 琴泰燮’에 對한 評價는 讀者들의 몫이다. ● 11年 만에 ‘第3地帶’ 助演에서 主演으爐組織에서 懲戒를 받은 經驗에서 ‘혼자 變化를 꾀하려 하면 失敗한다’는 敎訓을 얻은 그는 그 무렵 政治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萬若 政治를 하게 되더라도 當場 할 생각은 없었다. ‘搜査 제대로 받는 法’ 寄稿로 워낙 큰 波紋을 일으킨 데다 批判하는 사람들은 ‘琴泰燮이 政治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政治權에 기웃거리면 ‘싸구려’로 보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4, 5年 以上은 政治權은 쳐다도 안 보려했다. 이듬해인 2007年 1月 그는 人事를 앞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며 辭表를 냈다. 辯護士로 變身한 그는 放送과 라디오 프로그램 進行者 等으로 活動하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實際 그의 뜻대로 5年 지난 뒤인 2012年 봄에서야 그는 本格的인 政治 活動을 始作했다. 安哲秀 當時 서울대 融合科學技術大學院腸(現 國民의힘 議員)이 ‘安哲秀 現象’의 主人公으로 急浮上하면서 캠프 狀況室長 提案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無所屬으로 始作한 政治人 琴泰燮은 安 議員과 함께 新黨 創黨을 準備하다 더불어民主黨과 合黨했다. 國民의黨이 생길 때 合流하지 않고 민주당 所屬으로 서울 강서갑에서 20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21代 總選 競選에서 떨어진 뒤 脫黨해 다시 無所屬으로 돌아왔다. 2021年 서울市長 候補로 나섰다가 2022年 大選에선 尹錫悅 캠프에 合流했다. 하지만 國民의힘엔 入黨하지 않고 ‘第3地帶’에 머물렀다. 이달 18日 그는 “새로운 勢力이 出現해서 平凡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나아지게 할 수 있는 政治를 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新黨 創黨 可能性을 열어뒀다. 11年 만에 助演에서 主役으로 成長한 그의 反抗이 다시 始作된 것이다. 어느덧 그도 56歲다. 안철수 議員이 結局 抛棄한 第3黨 實驗을 다시 試圖하는 게 얄궂은 運命처럼 보인다. 琴泰燮이 든 旗발이 果然 成功할 수 있을까.2014년 當時 ‘안철수의 입’ 役割을 하던 琴泰燮 前 議員을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安 議員의 側近’으로 表現된 記事에 對해 “내가 왜 누구의 側近이냐”며 그렇게 쓰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自尊感이 높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私席에선 率直했습니다. 安 議員과 함께 政治를 始作했지만 安 議員에게는 勿論 記者들에게도 本人의 생각과 感情을 多少 加減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2, 3年 程度 지난 뒤 서로 어느 程度 親해졌다고 느낄 때쯤 술자리에서 “앞으로 兄님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왜 黃 記者 兄이냐”는 答이 돌아왔습니다. 말門이 막혔습니다. 呼兄呼弟를 거절당한 건 生前 처음이었습니다. 까칠하다기보단 깍쟁이, 車道남 같았습니다. 윗線의 눈치를 보지 않는 言行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思考를 가진 人物입니다. ‘檢察 全盛時代’라지만 檢察 出身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습니다. 유머 코드가 ‘王子兵’이지만 아무리 자랑질을 해도 밉지는 않습니다.에는 政治人 琴泰燮과 그의 未來에 對해 좀더 다뤄보겠습니다. 法廷冒瀆이 回를 거듭해갈수록 ‘짠맛’이 없고 ‘단맛’만 있다는 指摘을 받고 있습니다. 筆者로선 苦悶이 깊습니다. 그런데 權力이 없는 ‘未來 權力 呼訴人(?)’들에겐 회초리가 別로 所用은 없습니다. 弱者에게 强하고 强者에게 弱한 것보다는 낫지 않냐라고 抗辯해 봅니다. 황형준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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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황형준]이상한 辯護士와 노쇼 辯護士

    修能 滿點 出身의 醫大生이 自己 房에서 숨진 채 發見됐다. 現場에선 동생이 죽은 兄의 가슴을 세게 때리는 場面을 父母가 目擊했다. 唯一한 目擊者지만 自廢를 겪고 있는 동생은 ‘죽는다’는 말만 反復할 뿐 事件에 對해 제대로 陳述하지 못해 殺人犯으로 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人氣 캐릭터 ‘펭수’ 아이템을 裝着할 程度로 ‘덕후’인 동생의 마음을 열기 위해 辯護士는 ‘펭수 마이크’를 잡고 熱唱한다. 또 當時 狀況을 再構成하기 위해 醫大生 房을 찾아 自殺을 暗示한 日記를 發見한다. 그렇게 동생은 陋名 危機에서 벗어나게 된다. 自廢를 앓고 있는 天才 辯護士를 主人公으로 한 드라마 ‘異常한 辯護士 우영우 3回’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영우 같은 辯護士가 드라마에만 있는 건 아니다. 再審 專門으로 有名한 박준영 辯護士는 1999年 三禮 나라슈퍼 殺人事件의 犯人으로 몰려 3∼6年 동안 獄살이를 한 ‘三禮 3人組’와 ‘益山 약촌五거리 택시技士 殺人事件’에서 抑鬱하게 陋名을 쓴 이들을 代理해 再審을 進行한 끝에 無罪 判決을 받아냈다. 辯護士들은 누구나 法과 知識이 不足한 依賴人을 法廷에서 代理하는 基本 役割을 맡는다. 하지만 더 重要한 건 事件의 眞實을 파헤치고 勝訴를 위해 依賴人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現場을 調査하고 關聯者를 만나고 法廷 證言을 要請하는 것도 辯護士의 重要한 業務다. 이런 辯護士들의 自尊心과 名譽를 失墜시킨 人物이 抗訴審 ‘노쇼’로 論難이 된 권경애 辯護士다. 權 辯護士가 맡은 事件은 2015年 學校暴力에 시달리다 極端的인 選擇을 한 故 박주원 孃(當時 16歲) 事件이다. 朴 孃의 어머니는 2016年 8月 權 辯護士를 選任해 서울市敎育廳과 加害 學生 等 30餘 名을 相對로 損害賠償을 請求했다. 지난해 2月 1審은 피고 30餘 名 中 1名에게만 “5億 원을 支給하라”며 一部 勝訴 判決을 내렸다. 朴 孃의 어머니는 抗訴했지만 權 辯護士가 抗訴審 裁判에 3回 出席하지 않아 지난해 11月 抗訴가 取下됐고 1審 結果도 敗訴로 變更됐다. 再審 請求는 要件에 該當하지 않아 어렵고 權 辯護士에 對한 民事上 損害賠償 請求는 可能하다는 게 法曹界 衆論이다. 遺族 側은 13日 權 辯護士 等을 相對로 2億 원을 賠償하라는 趣旨의 訴訟을 냈다. 民事訴訟은 法院에서 辯論期日 通知書를 보내고 이메일 또는 文字메시지로도 날짜를 알려준다. 權 辯護士는 9000萬 원 賠償의 覺書를 썼을 뿐 어떤 理由로 辯論期日에 不出席했는지, 왜 遺族에게 5個月 동안 抗訴審 結果를 알리지 않았는지 等에 對해 充分한 解明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權 辯護士는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모임(民辯) 所屬이었지만 曺國 事態를 契機로 民辯을 脫退하며 이른바 ‘曺國 黑書’를 執筆해 注目받았다. 하지만 本業과 基本에 忠實하지 못한 職業人은 似而非日 뿐이다. 權 辯護士가 6年餘 동안 이 事件에 얼마나 心血을 기울였을지도 疑問이다. “드라마에 나온 우영우 같은 辯護士가 있냐”는 박 兩 어머니의 呼訴를 法曹界는 무겁게 되새겨야 한다. 그들의 業務가 한 사람의 人生을 天國으로 만들 수도, 地獄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황형준 社會部 次長 constant25@donga.com}

    •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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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가지 없는 進步’는 틀렸다…반증해준 ‘才勝薄德’ 李俊錫 [황형준의 法廷冒瀆]

    ‘才勝薄德(才勝薄德)’旣成 政治權을 몰아세우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하는 것이 李俊錫 全 國民의힘 代表의 長點이자 魅力이다. 하지만 그 自體로 短點이 되기도 한다. 李 前 代表와 같은 政黨에 몸담았던 한 有力 政治人은 그에 對해 한마디로 재주는 많지만 人德이 없다는 意味로 이 같은 評價를 내놓았다고 한다.● 過度하게 自我가 剛한 ‘才勝薄德’ 스타일이 前 代表에 對한 拒否感이 있는 政治權 人士들은 “한마디로 아주 잔머리 굴리는 데 道가 튼 ‘道士’인 데다 하나도 損害는 안 보려 하니 德이 없다” “政治人들은 基本的으로 自己愛가 剛하지만 李 前 代表는 에고(ego)가 剛해도 너무 剛하다”는 評價를 내놓았다. “內功은 없고 입만 살아 있다” “言論과 SNS에 自己 이름이 나오는지 每日 檢索하는 데 中毒된 ‘關種’” 等의 酷評도 있다.흔히 ‘싸가지 없는 進步’라는 말이 있다. 17代 國會에 大擧 進出한 當時 열린우리당 386運動圈 出身 初選 議員들의 行態 以後부터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26歲에 政治를 始作하고 保守를 標榜한 李 前 代表도 旣成 政治人들로부터 같은 評價를 받는다. 싸가지 없음이 進步의 專有物은 아닌 것이다. 紀元前 1700年 무렵 수메르 粘土板에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고 써 있듯이 그저 世代 差異에 따른 葛藤일 수 있다.이 前 代表도 挑發的인 發言을 하다 보니 口舌數에 자주 휘말렸다. 國政壟斷 事態가 論難이 됐던 2016年 11月엔 當時 李貞鉉 代表 辭退를 促求하며 斷食籠城을 벌였다. 또 安哲秀系 國民의黨과 유승민系 바른政黨이 合當해 만든 바른未來黨에선 2019年 4月 再·補闕選擧 成績表가 期待에 미치지 못하자 孫鶴圭 當時 바른未來黨 代表의 辭退를 促求했다. 李 前 代表가 非公開 會食 자리에서 안철수 議員을 向해 ‘病×’라는 卑俗語를 써서 論難이 된 일도 있다. 李 前 代表는 “私席에서 한 말이고 이것이 問題 될 發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謝過하지 않았다. 安 議員 側의 問題 提起로 바른未來黨 倫理委員會는 이 前 代表에 對한 懲戒 決定을 내렸다. 結局 이 事件으로 系派 間 葛藤이 暴發하면서 바른政黨界 議員들은 脫黨한 뒤 새로운보수당을 創黨했다. 以後 2020年 總選을 앞두고 다시 國民의힘으로 統合됐다.2021년 國民의힘 黨 代表로 選出된 뒤에도 親尹 側과 葛藤이 깊어졌다. 親尹 側에선 이 前 代表를 意圖的으로 疏外하거나 그를 깎아내리는 匿名 인터뷰를 하는 等 牽制球를 날리며 不和를 일으켰다. 李 前 代表도 ‘尹核關’이라는 單語를 公開的으로 擧論하며 여러 次例 衝突했다. 特히 이 前 代表는 自身이 連累된 性 接待 疑惑을 搜査하는 警察의 背後에 尹核關이 있을 수 있다는 主張도 폈다. 國民의힘 代表와 大選 候補 兩側이 大選 앞에서 힘을 모아 一致團結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泥田鬪狗를 벌이며 몇 次例 싸웠다 和解하는 꼴不見의 場面을 만들었다는 批判도 나온다.성 接待 疑惑에도 휘말렸다. 2013年 7月 11日과 같은 해 8月 15日에 大田 儒城區 素材의 某 호텔에서 金聖鎭 當時 아이카이스트 代表理事의 周旋으로 性賣買 女性에게 두 次例 性 接待를 받았다는 것이다. 가로세로硏究所가 2021年 末 疑惑을 提起하면서 警察 搜査로 이어졌다. 지난해 7月 黨 倫理委員會가 그에 對해 黨員權 6個月 停止 決定을 내리자 그는 不服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洪準杓 大邱市長은 ”바른未來黨 時節 大先輩이신 손학규 代表를 밀어내기 위해 그 얼마나 모진 말들을 쏟아냈느냐”며 “좀 더 成熟해져서 돌아와라”라며 業報이자 自業自得이라는 點을 꼬집기도 했다. 같은 해 9月 警察은 2013年의 性 接待를 包含한 收受 行爲에 對한 斡旋受財 嫌疑는 公訴時效가 지나 ‘公訴權 없음’으로 無嫌疑로 不送致 決定을 했다. 代身 이 前 代表가 疑惑을 提起한 가세硏을 名譽毁損 嫌疑로 告訴했지만 無嫌疑 處分이 내려졌다. 이에 가세硏 側은 다시 이 前 代表를 誣告 嫌疑로 告訴했고 警察이 起訴 意見으로 事件을 넘기면서 現在 서울中央地檢에서 搜査가 進行 中이다. ● 2024年 總選에선 無所屬 出馬도 불사이 前 代表는 追加 懲戒까지 받으면서 總 1年 6個月 黨員權이 停止됐다. 그 뒤 한동안 地域을 돌아다니며 潛水를 탔다. 2024年 總選 直前인 1月에서야 黨員權이 回復된다.지난달 치러진 國民의힘 全黨大會에서 ‘天鵝龍仁’(천하람 허은아 金鎔泰 이기인 候補의 略稱)을 志願했지만 當選者를 만들지 못했다. 誣告 嫌疑에 對한 檢察 搜査가 끝날 때까지 當分間 이 前 代表의 休紙祈禱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代身 지난달 10日 ‘李俊錫의 拒否할 수 없는 未來’를 出刊하면서 言論 인터뷰 等을 통해 기지개를 펴며 支持勢를 다시 모으는 雰圍氣다.윤석열 大統領 支持率이 30%까지 墜落하는 等 벌써부터 金起炫 代表를 看板으로 總選을 치를 수는 없을 것이라는 觀測이 黨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李 前 代表 側近은 “一旦 黨을 改革하는 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0선’ 꼬리票가 붙어 있는 이 前 代表에게 來年 總選 出馬는 上手다. 그가 2016年부터 2018年 再·補選, 2020年 總選까지 3番 出馬해 落馬했던 서울 노원丙 地域區 出馬가 基本이다. 比例代表 議員은 안 한다는 생각을 過去에도 여러 番 밝혔다.하지만 다른 險地 出馬를 要求받을 可能性도 없지 않다. 萬若 親尹 指導部가 이 前 代表에게 公薦을 주지 않더라도 그는 無所屬 出馬도 强行할 雰圍氣다. 지난달 8日 CBS 라디오에 出演해 “(親尹 陣營이) 괴롭혀서 萬若 出馬 못 하게 하면 洪準杓 市長은 懲戒받으면서도 大選도 나갔다”고 말한 바 있다.● ‘할배’ 김종인의 마지막 大選 프로젝트는 李俊錫과 ○○○?그는 가장 尊敬하는 政治人으로 김종인 前 非常對策委員長을 꼽는다. 그는 2011年 한나라黨 非對委員 時節 當時 禁忌처럼 여겨졌던 朴槿惠 前 大統領의 淨水場學會 問題에 對해 CBS 라디오에 出演해 “國民들이 아직 解消가 안 됐다고 생각한다”는 趣旨로 날을 세웠다. 그러자 그 뒤 金 前 委員長이 “勇氣 있네”라며 밥도 사주고 했다고 한다. 그 後 이 前 代表는 金 前 委員長을 10年 넘게 멘토로 삼았다. 지난달 이 前 代表가 私席에서 한 이야기다. “ 推薦辭를 받기 위해 金 前 委員長을 찾아갔다. 할배(그는 金 前 委員長을 私席에서 ‘할배’라고 부른다)가 말하길 ‘李 代表, 이제 이렇게 된 以上 大選 準備해. 내가 도와줄게. 살아 있으면….’ 眞짜 이제 할배가 (킹 메이커에) 恨을 품었구나 싶었다.” - 取材 메모 中 -마지막 “살아 있으면…”이라는 말이 이 前 代表에게 餘韻을 남겼다고 한다. 1940年生인 金 前 委員長은 올해 83歲고 1985年生 李 前 代表는 38歲다. 나이를 花鬪 게임의 一種인 ‘섰다’로 따지면 둘 다 最高 敗因 ‘38광땡’이다. 4年 뒤에도 運이 繼續 따를 것인가.또 그가 “그럼 大選 準備를 위해 누구를 만날까요”라고 했더니 金 前 委員長은 “○○○을 만나보라”고 했다고 한다.이 前 代表 MBTI는 ‘冒險을 즐기는 事業家’型인 ESTP다. 이 類型은 ‘내기를 좋아한다’ ‘삶을 즐기며 산다’ ‘스릴을 좋아한다’는 等 評價가 있다. 李 前 代表 側은 “冒險을 즐길 줄 안다. 全黨大會에서 1等을 달리고 있는데도 ‘富者 몸操心’을 안 하고 대단히 攻擊的으로 베팅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 亦是 勝負師的 氣質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오세훈 市長이 無償給食 住民投票를 推進한 것도 누군가는 政治的 野心이 컸기 때문에 다음 行步를 노리고 나섰다고 하지만, 市議會를 多數를 차지한 黨에 빼앗긴 狀態에서 施政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狀況이라면 勝負手를 던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이 輕率하다고 批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政治를 하면서 그런 큰 것을 大汎하게 걸 줄 아는 勝負師的 氣質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 著書 中 -하지만 吳 市長은 住民投票로 10年 가까이 政治的 暗黑期를 거쳤고 賭博이 그렇듯이 베팅을 잘못했다간 집안이 거덜날 수도 있다. 多幸히 未婚인 그에게 아직 扶養家族은 없다.● 오바마에게서 배워야 할 包容과 寬容이 前 代表는 韓國의 오바마를 꿈꾼다. 47歲 나이로 ‘黑人 最初의 美國 大統領’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버락 오바마 前 大統領은 統合과 改革의 象徵的인 人物이다. 李 前 代表가 그를 벤치마킹하기 위해선 오바마 前 大統領에게서 배워야 할 德目이 있어 보인다. 李 前 代表가 2021年 3月 國民의힘 大邱 合同演說會에서 했던 말이다.“2004년 제가 工夫하고 있던 보스턴에서 美國 民主黨 全黨大會에 出馬한 존 케리 大選 候補의 選出을 위해 모인 사람 中 바람잡이 演說者로 黑人 上院 議員이 나섰습니다. (中略) 그는 ‘이라크戰에 贊成하는 사람도 愛國者요, 이라크戰爭에 反對하는 사람도 愛國者다. 白人의 美國, 黑人의 美國, 라틴系의 美國, 아시아系의 美國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이 말에 美國은 戰慄했습니다. (中略) 오바마가 외친 統合의 始發點은 바로 寬大함입니다. 그리고 統合의 마지막 完成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自信感입니다. (中略) 여러분은 다른 생각과 共存할 自信感이 있으십니까.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善한 意圖를 가지고 있다고 認定하고 그 사람도 愛國者라는 것을 입 밖으로 내어 認定할 수 있어야 합니다.”국가 以前에 黨 內部에서부터 ‘다른 생각과 共存할 自信感’ ‘統合’ ‘善한 意圖를 가지고 있다고 認定’하는 姿勢 等을 實踐할 必要가 있다. ‘철不知’네 뭐네 卑下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는 思想 첫 30代 與黨 代表 神話를 만든 類例없는 人物이다. 그의 未來가 곧 靑年政治의 未來라고 하면 過言일까? 지난 가 나가자 하버드대 經濟學科 複數專攻에 對한 李俊錫 前 代表의 虛僞學歷 疑惑을 提起하는 讀者들이 如前히 많았습니다. 이에 對해 이 前 代表는 “이미 無嫌疑로 끝난 事案”이라고 說明했습니다. 正確하게는 하버드大에선 ‘joint concentration’이라는 用語를 쓰는데 韓國式으로 複數專攻에 가까워 보입니다. 다만 學位를 各各 附與하는 게 아닌 統合專攻에 가까워서 이 差異 때문에 誤解가 빚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性 接待 疑惑에 對한 質問은 왜 하지 않았느냐고 저를 採根하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勿論 했습니다. 최태원 SK 會長이 自身의 事業을 도와줄 수 있을 것으로 期待하고 金聖鎭 아이카이스트 前 代表가 崔 會長의 赦免을 自身에게 建議하기 위해 接待를 했다는 內容에 對해서 論理的으로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自身이 갔던 遊興業所에 前職 長官과 有力 人士 等도 갔었는데 그러면 다 接待를 받은 것이냐고 警察 調査에서 되물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팩트’는 神의 領域이고 이제 檢警 搜査는 無故 件만 남아 司法的 判斷은 마무리 段階입니다. 政治的 判斷과 評價는 國民들이 할 것입니다. 공교롭게 20日 公開될 <法廷冒瀆 15話>의 다음 主人公은 앞서 김종인 前 委員長이 이 前 代表에게 만나보라고 했다는 人物입니다. 그의 助言에도 아직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봐도 결이 다르고, 스타일 差異가 있는 분들입니다. 다음 主人公은 法廷冒瀆에는 처음 登場하는 ‘無所屬’ 政治人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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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汝矣島 ‘옴擺脫’ 李俊錫… ‘3個月 臨時職’에서 與黨 代表까지[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代表님, 그 ○○랑 일해 본 적 있습니까?” 李俊錫 全 國民의힘 代表가 지난해 A 氏를 黨協委員長을 시킨 뒤 總選에 出馬시키는 게 어떠냐고 묻자 尹錫悅 大統領은 이같이 答했다고 한다. 李 前 代表는 “왜요. A 氏만큼 스펙 좋고 멀쩡한 사람 없다고 했더니 尹 大統領은 ‘뭐~ 그 이 새끼는 일도 못 하고…’”라고 尹 大統領의 聲帶模寫를 했다. 尹 大統領이 A 氏를 자주 데리고 다녀서 아끼는 줄 알고 意思를 떠본 것이라고 했다. 李 前 代表는 “尹 大統領의 特徵 中의 하나가 周邊 사람들 辱을 宏壯히 많이 한다”고 말했다. 尹 大統領이 써본 사람만 믿고 쓰다 보니 周邊에 檢察 出身과 ‘尹核關’만 남아 있다는 趣旨로 들렸다. 머리가 明晳하고 言語 感覺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聲帶模寫를 잘한다. 李 前 代表의 聲帶模寫는 相當히 印象的이었다. 끊임없이 正確한 單語를 驅使하며 쉼 없이 이야기를 했다. 지난달 2日 이 前 代表와의 첫 만남에서 느낀 印象은 “IQ가 높다”였다.● 大統領과 角을 세우는 ‘0線 重鎭’ 이날 저녁食事 자리에서 이 前 代表는 이문열 作家의 冊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을 들고 約束된 時間보다 10餘 分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書店에 冊을 사러 갔다가 時間이 좀 걸렸다고 했다. 다음 날 國會 疏通館에서 記者會見을 여는 데 會見文을 위해 다시 한 番 읽어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會見文은 머릿속에 어느 程度 整理돼 있기 때문에 술자리가 끝난 뒤 집에 가서 쓸 거라고 했다. ‘일그러진 英雄’이 누구냐고 묻자 말을 아꼈다. 그는 다음 날인 지난달 3日 記者會見에서 “1987年 이문열 作家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을 통해 그려냈던 시골 學級의 모습은 最近 國民의힘의 모습과 닿아 있다”며 “分明히 잘못한 것은 엄석臺인데 아이들은 한병태가 ‘內部 銃질’을 했다며 찍어서 괴롭힌다”고 했다. 이어 “國民의힘에서 엄석隊는 누구일까요? 嚴石臺 側 核心 關係者는 어떤 사람들일까요?”라며 “한 가지 明確한 것은 擔任 先生님은 바로 國民이라는 것이다. 黨員 여러분의 投票로 이 小說의 結末을 바꿀 수 있다”고 强調했다. 全黨大會에서 이른바 親尹界 候補를 支援하는 尹 大統領과 ‘尹核關’을 批判하며 國民의힘 全黨大會에 出馬한 이준석界 ‘天鵝龍仁’(천하람 허은아 金鎔泰 이기인 候補의 略稱) 候補 支持를 呼訴한 것이다.‘친윤(친윤석열)’계가 支援했던 金起炫 代表에 對해 이 前 代表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김기현 代表가 마치 尹 大統領과 信賴가 깊어서 黨 代表 候補로 落點된 걸로 아는데, 全혀 아니다. 弱點이 많기 때문이다. 弱點이 많아 龍山(大統領室)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落點된 것이다.” ―取材 메모 中―● 하버드 卒業生, 政治에 뛰어들다그는 서울과학고를 2年 만에 早期 卒業한 뒤 하버드大 컴퓨터科學科와 經濟學을 專攻한 ‘엄친아’였다. 하버드는 지우개 有名 메이커로나 봤던 이름이었다. 내가 만난 하버드大生은 40餘 年 生涯 처음이었다. 2011年 12月 當時 한나라당(現 國民의힘) 非對委員長이었던 박근혜 前 大統領이 그를 拔擢하면서 滿 26歲의 나이에 當時 與黨 指導部를 經驗했다. 汝矣島 政治權의 나이로 따지면 그야말로 아이돌이었다. 그는 하버드對 在學 時節 放學 때면 歸國해 無料로 課外 奉仕를 했고 卒業 後 低所得層 子女들을 위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奉仕團體를 만들었다. 敎育 프로그램을 製作하는 벤처企業 클라세스튜디오도 세웠다.그는 2011年 12月 한나라黨 非對委가 出帆하기 사흘 前 非對委員 提案을 받았다. 約 5年 前 奉仕團體를 찾아온 적이 있는 朴 前 大統領과 한 番 만난 게 全部였다. 當時 非對委에는 ‘經濟民主化’의 象徵인 김종인 前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 이상돈 중앙대 名譽敎授(前 議員) 等이 參與했고, 非對委는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黨名을 바꾸고, 政權 實勢 및 前職 黨 代表 勇退論 목소리가 나오는 等 刷新이 進行됐다. 이 過程에서 이 前 代表는 個性을 發揮하며 靑年 政治人으로 成長했다. 性 醜聞과 論文 剽竊 疑惑을 받은 19代 總選 當選人에 對해 黜黨을 要求하는 等 입바른 소리를 했고 中央選擧管理委員會 홈페이지 디도스(DDoS·分散서비스 拒否) 攻擊 事件에 對한 ‘디도스 檢察搜査 國民檢證委’ 委員長을 맡아 注目을 받았다. 2014年 4月 發刊한 著書 에 따르면 19代 總選 公薦 過程에선 當時 민주당에서 김근태 前 代表의 夫人인 인재근 女史의 도봉甲 出馬가 有力하다는 所聞을 듣고 無公薦을 提案했다. “김근태 前 복지부 長官이 돌아가시기 前까지 民政黨 獨裁 政權下에서 加해진 顧問에 對해 黨 次元에서 眞情性을 가지고 遺憾을 表明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럽다. 이番에 새누리黨은 조금 더 果敢한 公薦을 통해 眞情性을 보여야 했다.” ― 中―또 女性의 政治參與를 活性化하기 위해 比例代表 中 女性을 5 對 5街 아닌 8 對 2로 公薦하자는 主張도 폈다. 40代가 되기 前에 美國에선 흔한 私立 科學高等學校를 세워 理事長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썼다. 自身이 받았던 平凡하지 않았던 ‘敎育의 機會’의 門을 넓혀 家庭 等 環境 때문에 機會를 받지 못한 學生들에게 되돌려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實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政治人으로 變身하면서 只今 그 꿈은 實現하기 어려운 狀況이 됐다. 9年 前 冊 內容과 李 前 代表의 現在 모습엔 距離가 있어 보이지만 根本은 같다. 3個月 臨時職 非對委員으로 印象을 남긴 이 前 代表는 放送패널 等으로 活動했고 2014年 6月 ‘새누리黨을 바꾸는 革新委員長’을 맡은 뒤 줄곧 政治人으로 살았다.● 能熟한 메시지 傳達 能力과 톡톡 튀는 選擧戰略으로 急浮上이 前 代表는 메시지 傳達과 意思疏通에 能하다는 評價를 받는다. 政治 入門 初期부터 이미 트위터와 페이스북 等 SNS에 自己 목소리를 내며 論爭에 뛰어들었다. 2019年 바른未來黨 最高委員 때 카카오 카풀 서비스 導入에 택시業界가 反撥해 葛藤이 빚어지자 葛藤의 解法을 찾겠다며 택시 技士 資格證을 따고 法人 택시를 몰기도 했다. 李 前 代表와 가까운 人事는 “一旦 대단히 明晳하고 選擧에 對한 理解도 높다. 吳世勳 서울市長 補闕選擧와 2021年 全黨大會, 2022年 大選 等을 보면 選擧에서 攻掠해야 할 타깃 地點이 어디인지를 正確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合理的 保守를 標榜하고 있다. 그間 民主化 勢力과 産業化 勢力으로 兩分된 進步-保守 陣營의 區分이 無意味해진 만큼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陣營의 區分이 再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릴 적 싱가포르와 美國에서 大學 生活을 하면서 多少 西歐化된 思考를 가지고 있다. 그는 “責任政治를 具現시키기 위해 旣得權 政治를 打破해야 한다. 우리의 境遇 (國會議員 任期) 4年은 너무 길다. 2年으로 短縮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統一에 對해선 “統一의 方法이 體制 優位를 통한 吸收統一 外에 어떤 方法이 있을까 싶다. 統一 敎育도 必要 없다. 統一 敎育은 北韓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야 한다”고 率直하게 말한다. 2021年 4·7 서울市長 補闕選擧에선 國民의힘 오세훈 候補 캠프 미디어本部長을 맡았다. 2030世代 靑年들을 自身의 SNS에서 希望者를 募集해 候補 遊說車에서 直接 發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希望者들은 번갈아 가면서 普通 3~5分假量 發言을 했고 한 番에 40~50名씩 와서 政策 提案을 했다. 그 結果 再補選의 20代 支持率이 75%에 達했다고 한다. 特히 黨 代表로 選出된 2021年 國民의힘 全黨大會 合同演說會에서 그의 長點이 國民들에게 刻印되기 始作했다. 그는 地域마다 맞춤型 메시지를 내며 黨員들의 마음을 샀다. 그는 그해 5月 30日 光州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湖南 合同演說會에서 5·18民主化運動에 對해 “大韓民國 民主化 歷史 속에서 (5·18은) 가장 象徵的이고 悽絶했던 市民들의 抵抗”이라며 “저는 80年 光州에 對한 個人的인, 時代的인 罪責感을 뒤로하고 光州民主化運動의 精神을 자유롭게 體得한 첫 世代”라고 强調했다. 이어 “全黨大會를 앞두고 湖南 黨員이 우리 黨員의 0.8%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이터가 公開됐다. 努力해야 한다”며 “(湖南 黨員은) 그동안 왜 排斥받았나. 黨內 큰 選擧를 앞두고 一部 强勁 保守層이 목소리가 크다는 理由로 두려워하며 그들이 主張하는 陰謀論과 地域 卑下와 差別을 濾過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積極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며칠 뒤 大邱 合同演說會에선 “朴 前 大統領이 저를 迎入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도 “저는 제 손으로 만드는 데 一助한 朴 前 大統領이 狐假虎威하는 사람들을 排斥하지 못해 國政 壟斷에 이르는 事態가 發生하게 된 것을 批判하고, 統治不能의 事態에 빠졌기 때문에 彈劾은 正當했다고 생각한다”고 所信 發言을 했다. 韓國 政黨史上 最初 30代 黨 代表라는 記錄을 남긴 이 前 代表는 全黨大會에서 當選된 뒤 2022年 地方選擧에서 公薦 資格試驗을 導入했고 討論배틀로 黨 代辯人과 常勤副代辯人을 2名씩 選出하는 等 新鮮한 아이디어를 政治權에 椄木했다. 李 前 代表는 또 戰略家이기도 하다. 2030世代, 特히 2030 男性層과 國民의힘의 傳統的 支持層인 60代 以上 老年層을 묶어 더불어民主黨의 主要 支持基盤인 40, 50代 중長年層을 包圍해 支持勢를 壓倒하겠다는 ‘世代包圍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는 2021年 서울市長 選擧와 全黨大會에서 成功한 戰略으로 評價를 받았다. 그는 이미 ‘內閣 30% 女性割當制’ 廢止, 軍加算點制 復活 等을 主張하며 안티 페미니스트로 자리잡으며 ‘이대남(20代 男性)’의 全幅的인 支持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世代包圍論은 尹 大統領이 國民의힘 大選 候補로 選出된 뒤 反文在寅 勢力을 結集해 政權交替를 이뤄내겠다는 尹錫悅 캠프의 選擧戰略과 衝突했다. 李 前 代表와 親尹 間 葛藤의 出發點이었다.매력적이지만 致命的이어서 멀리하고 싶은 ‘옴擺脫’ 같다. 적이 많은 ‘트러블 메이커’라는 評價도 받는다.그가 닮고 싶어하는 버락 오바마 前 美國 大統領보다는 아직은 도널드 트럼프 前 大統領의 모습에 가까운지도 모른다.법정모독 14化에선 李俊錫 前 代表의 向後 政治的 行步와 政治人으로서 아쉬운 點에 對해 좀 더 다뤄볼 豫定입니다. 李 前 代表는 늘 論難의 中心에 서 왔습니다. 論理井然하고 討論배틀에선 잘 지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걸면 되로 받아치는 ‘쌈닭’입니다. 한동훈 法務部 長官과 李 前 代表가 反對便에서 討論배틀을 한다면 相當히 名場面이 될 것 같습니다. 그間 疏通을 게을리 한 側面이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시거나 e메일을 주시면 이 前 代表에 對해 궁금한 點 等을 다음 化에 다뤄보겠습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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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檢察總長’ 이원석이 보이스피싱을? …‘똑部’는 괴로워[황형준의 法廷冒瀆]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지난달 7日 午後 7時頃. 退勤을 앞둔 大檢察廳 企劃調整部와 刑事政策擔當官室 等 刑事法制 關聯 部署가 발칵 뒤집혔다. 午後 4時 38分頃에 온라인에 뜬 記事 때문이었다. 檢察이 請求한 押收搜索令狀을 法院이 發付하기 前에 被疑者와 檢査 等을 審問할 수 있도록 한 刑事訴訟規則 改正案을 大法院 法院行政處가 立法豫告했다는 內容이었다. 檢察로선 이 改正案이 通過되면 搜査의 밀行星이 保障되기 어렵다는 等 副作用이 憂慮되는 狀況. 問題는 두 時間 넘게 온라인에 올라온 이 記事를 大檢 幹部와 實務陣 누구도 체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萬 檢察’의 首長이 이 記事를 가장 먼저 본 것. 그 主人公인 이원석 檢察總長은 옛날 上司들처럼 불같이 火를 내거나 感情的으로 對應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平素에도 後輩들에게 敬語體와 尊待말을 使用하고 거의 말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아랫사람들로선 感情을 드러내지 않고 叱責하는 꾸짖음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內容을 아무도 모르고… 技士도 체크 안 할 수가 있습니까.”유관부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날 밤늦게까지 刑事訴訟規則 改正案이 미칠 影響과 對應 方案에 對한 報告書 等을 썼다는 슬픈 이야기. 以後 大檢 各 科에선 言論 모니터링 擔當者를 指定해 一種의 ‘當番’을 서게 하는 內部 制度 改善(?)李 이뤄졌다.● 典型的인 ‘똑部’… “혼자만 幸福” 內部 不滿도 지난해 5月 尹錫悅 大統領은 한동훈 法務部 長官을 指名한 다음 날 濟州地檢長이었던 이 總長을 大檢 次長檢事로 임명했다. 大選이 끝난 뒤 더불어民主黨이 一名 ‘檢搜完剝’(檢察 搜査權 完全 剝奪) 立法을 밀어붙이면서 內部 反撥이 거세진 狀況에서 金오洙 唐詩 總長이 任期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時期였다. 그때부터 大檢 幹部들이 일이 너무 많아져 다음 人事만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의 스타일上 뭔가 생각나면 잊기 前에 그때그때 連絡해 指示를 내리다 보니 幹部들이 늦은 밤이나 週末에도 指示를 받는 境遇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上士는 ‘똑게(똑똑하고 게으른)’형이다. 이 總長의 短點도 ‘똑部(똑똑하고 부지런한)’형 上司의 短點과 類似하다. 本人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指示할 게 많고 後輩 檢事들이 못 미더워 보일 수밖에 없다.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狀況. 이 總長은 就任 以後 私的인 자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몸가짐을 操心한다. 그 代身 點心엔 各界各層의 名士들을 大檢으로 招請해 講演會를 열거나 午餐을 함께 한다. 世上 돌아가는 이야기와 檢察에 對한 視角 等을 傾聽하기 爲해서다. 最近 박한철 前 憲法裁判所 所長과 최재천 梨花女大 夕座敎授 等을 招請해 講義를 들었고, 이달 15日엔 金薰 小說家를 招請해 非公開 午餐을 함께 했다. 外部 人士 招請 뒤엔 檢察 內部網에 寫眞과 함께 總長 同情이 올라온다. 最近 만난 한 檢察 幹部는 “동정 寫眞에서 總長님의 웃는 모습을 보며 職員들이 ‘總長님 혼자 幸福한 것 같다’는 말을 우스개로 하곤 한다”고 傳했다. 總長의 바쁜 日程 때문에 一部 職員들이 苦生을 하고 있다는 뼈 있는 말이다. 또 職員들이 몰라도 될 日程까지 굳이 공유된다는 指摘도 있다. 다른 總長 때는 없었던 일이다.총장이 모든 記事를 다 볼 程度로 꼼꼼하게 읽고 言論에 敏感해 職員들이 前任 總長 때에 비해 일이 많아졌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每日 30分씩 職員들과 ‘稱讚 疏通’… ‘부드러운 카리스마’그럼에도 大檢 內部에선 이 總長에 對한 ‘龍飛御天歌’가 大部分이다. 한 大檢 幹部의 말이다. “總長을 보면 正말 존경스럽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典型的인 똑父兄 상사라 같이 일하기가 너무 힘들지만 배울 게 많다. 率先垂範하는 데다 맞는 方向으로 맞는 말만 하니 따르지 않을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이 總長이 業務 指示와 채찍질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稱讚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의 意味를 잘 理解하고 있다. 그는 每日 30分 程度 割愛해 一線 檢察廳에 電話를 하거나 團體 메시지房을 열어 激勵와 慰勞의 메시지를 보낸다. 檢査뿐만 아니라 搜査官, 실無關 等 모든 職員에게 該當된다. 優秀 職員으로 뽑힌 職員에게는 稱讚을 아끼지 않고, 健康이 좋지 않거나 調査 等 힘든 일을 겪은 構成員에게는 따뜻한 말을 건넨다. 總長과 直接 疏通할 機會가 없는 平檢事나 搜査官들이 처음에 連絡을 받고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고 한다. 實際 그는 宏壯히 仔詳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어린 時節부터 大學生을 거쳐 檢事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깍듯하게 禮儀를 갖춘 모습에 깊은 印象을 받았다고 한다. 아랫사람에게도 尊待말을 쓰고 조곤조곤하며 부드러운 말套를 使用한다. 多情多感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特히 公權力을 使用하고 斷罪하는 檢察人 만큼 늘 謙遜과 傾聽, 疏通 等을 强調한다. 그가 總長으로 就任하며 强調했던 말이다. “일하는 데 있어 最小限 法(法)에 맞게, 다음으로 世上의 理致(理致), 常識에 맞게, 마지막으로 사람 사는 認定(人情)까지도 헤아리는 謙虛한 檢察人이 되도록 努力합시다.” ―지난해 9月 16日 大檢察廳에서 열린 第45代 總長 就任式에서 ● 民主化 抗爭·法服 보고 자란 ‘아인슈타인’ 1969年 光州에서 태어난 이 總長은 洞네 秀才였다. 光州 지산동에 位置한 동산초를 다니는 동안 全校 1等을 놓치지 않았다. 初校 同窓인 더불어民主黨 所屬 金裕貞 前 議員은 “우리 어머니 記憶에 IQ는 이 總長이 全校 1等이었고 내가 2等이었다고 하더라”며 “學生 때 皮膚가 하얗고 귀여운 外貌여서 女學生들에게도 人氣가 많았고 班長도 도맡아 하며 총명했다”고 傳했다. (外貌 얘기가 나온 김에… 그는 自身의 적은 머리숱을 ‘셀프 디스’하며 유머 素材로 삼는다. 이 總長은 大學生 때 ‘개구리 王눈이’ ‘미키마우스’ 等 귀여운 別名을 갖고 있었다. 요즘 누리꾼들 사이에선 ‘미니언즈’라는 別稱도 붙었다고 한다.) 동산초는 光州地法과 光州地檢 等이 있는 法曹타운 바로 앞에 位置해 있었다. 어린 時節부터 檢事와 判事의 法服을 보고 자란 게 그가 公職者 中에서 法曹人을 選擇하게 된 背景 中 하나라는 게 知人들 傳言이다. 동산초, 동성중을 卒業한 뒤 光州 洞申告를 다니던 그는 高2 때 上京해 서울 중동고를 다녔다. ‘全羅道 村놈’李 서울 江南의 名門高에 들어온 것인데, 그는 轉學하자마자 班에서 1等을 해 놀라움을 샀다고 한다. 當時 別名은 ‘아인슈타인’. 物理學者 알베르트 아인슈타인(Einstein)의 이름이 하나의 돌(one stone)이라는 뜻이어서 ‘원석’과 같다는 것이다. 光州 5·18民主化運動을 모르는 서울 親舊들에게 피 흘리던 大學生을 숨겨준 逸話 等에 對해 이야기해줄 程度로 政治的으로 早熟했다. 여느 湖南 出身처럼 金大中 前 大統領을 尊敬했다. 學生 時節부터 그는 이미 論語, 孟子, 長子, 韓非子 等을 읽었다. 中國 歷史와 漢學(漢學)과 書藝에 造詣가 깊었다. 正確한 表現을 찾기 위해 國語辭典, 類似語辭典 等을 늘 꼼꼼히 읽었고 單語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썼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칸트 等 獨逸 哲學과 文學에도 關心이 많았다고 한다. 獨逸語를 잘했고 이런 影響으로 그는 平檢事 時節 硏修 機會가 주어지자 獨逸에서 硏修를 했다. 그가 大學校 1學年이 된 1987年은 6月 民主抗爭이 있던 해였다. 중동고와 서울대 政治學과 87學番 同期로 單짝이었던 김동규 氏의 이야기다. “(원석이가) 大學 다닐 땐 運動圈은 아니지만 PD(民衆民主) 그룹 先後輩들과 交流가 많았다. 1987年 때도 明洞에서 熱心히 돌도 던지고(웃음) 學內에서 集會가 있으면 꼬박꼬박 參席해서 討論하고 그랬다. 基本的으로 그 親舊는 民主化에 關心이 많았고 나보다는 훨씬 民主主義에 對한 熱情이 强했다. 2學年까지는 거의 每日 政治 狀況과 資本主義와 社會主義, 南北統一, 國家와 政治의 存在 理由 等 政治·社會 分野에 對해 밥 먹으며 燒酒盞 기울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討論을 했다. 그러다 2學年을 마쳐가는 1988年 12月 원석이가 ‘이제 民主主義가 틀이 잡혀가는 것 같다. 나도 職業을 찾아봐야겠다. 司法試驗 봐서 法曹人이 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慶北 尙州에 있는 절에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라고 했고 그래서 喪主에 있는 절에 가서 두 달을 같이 지내며 考試 工夫를 始作했다.” 이 總長은 試驗에 빨리 붙은 것도, 그렇다고 늦은 것도 아니었다. 中間에 軍 服務를 하며 一名 ‘방위’로 上兵 除隊했고 軍 服務 後 考試 工夫에 集中해 1995年 司法試驗에 合格했다. 司法硏修院 27期로 入所한 이 總長은 1996年 入所 後 學番은 5個, 나이는 네 살 어린 한동훈 法務部 長官과 6班 A組에서 2年間 同苦同樂했다. 少年 及第한 한 長官이 17~20名이 있는 A組에서 막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을 가르쳤던 한 硏修院 敎授는 “그 時節부터 둘 다 총명하고 눈에 띄었다. 單 1度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回想했다. 指導敎授였던 조대현 前 憲法裁判所 裁判官은 이 總長에게 判事 任官을 勸誘했지만 그는 檢事가 됐다. 다음은 이 總長과 韓 長官에 對해 다룬 筆者의 最近 칼럼.[光化門에서/황형준]‘족집게’ 이원석과 ‘毒種’ 한동훈● “왼손은 거들 뿐… 거들면 眞實은 드러나게 마련”1998年 任官한 그는 서울地檢 東部支廳(現 서울東部地檢)에서 檢査 生活을 始作해 釜山地檢, 서울中央地檢, 水原地檢, 法務部 等에서 勤務했다. 그가 頭角을 나타낸 것은 서울中央地檢 金融調査部에서 2005年 三星에버랜드 轉換社債 事件을 맡으면서다. 한 檢事長 出身 辯護士는 “이 事件 公訴維持를 맡았는데도 혼자서 꼼꼼하게 追加 搜査를 着着 進行해놨더라. 윗분들에게 높은 評價를 받았다”고 말했다. 以後 그는 三星 祕資金 特別搜査팀, 大檢 硏究官, 大檢 搜査指揮課長, 서울중앙지검 特別搜査1部長 等 要職을 거쳤다. 特需1部長 時節에는 2016年 法曹 非理 疑惑으로 번진 정운호 게이트를 搜査했다. 當時 홍만표 前 檢事長 等 전관 辯護士들이 搜査線上에 오르자 檢察 高位層에선 ‘가장 공정하게 搜査할 수 있는 이원석에게 맡겨라’라고 했다고 한다. 2016年 10月 法曹 非理 疑惑 搜査를 마친 뒤 한 달假量 懸案 事件이 없을 무렵이었다. 當時 國政壟斷 事件이 불거지면서 刑事7部에서 하고 있었다. 輿論이 좋지 않았다. “왜 特殊部에서 搜査를 하지 않느냐”고. 不安한 豫感은 恒常 들어맞는다고 하지 않든가. 結局 李永烈 當時 서울중앙지검長이 그를 불러 搜査를 나눠 맡겼다. 그가 後輩 檢事들을 불러 놓고 했다는 말이다. “過去 朝鮮時代 等 옛날이면 이런 搜査를 잘못하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只今은 아니다. 閑職으로 밀려나도 檢査를 繼續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리는 거들기만 하면 된다. 슬램덩크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우리는 籠球에서 왼손이다. 거들기만 하면 된다. 眞實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眞實의 힘이 무섭기 때문이다.” - 取材 메모 中 - 結局 이 總長은 2017年 3月 朴 前 大統領을 直接 調査한 뒤 拘束했다. 以後 그는 驪州支廳長과 大檢 海外不法財産還收 合同調査團腸을 지낸 뒤 尹 大統領이 總長 時節 企劃調整部長으로 尹 大統領과 呼吸을 맞췄다. 尹 大統領이 文在寅 政府와 角을 세운 뒤에는 水原高檢 次長檢事와 濟州地檢長 等 檢査場 자리 中 優先順位가 떨어지는 곳으로 左遷됐다. 하지만 政權 交替 뒤 大檢 次長檢査를 거쳐 前任 總長보다 7期數 아래 總長으로 拔擢됐다.● 비(非)法學 專攻 첫 總長… 목계至德의 固守民主化 以後 21代 이종남 檢察總長부터 45代 이 總長에 이르기까지 그는 唯一한 非法大 出身 總長이라는 特徵도 있다. 25名 中 서울대 法學科 出身이 18名, 高麗大 法學科 出身이 6名, 그리고 唯一하게 서울對 政治學科 出身인 이 總長이 있다. 民主化 以前엔 서울大 法大의 前身인 京城帝國對 法學科, 고려대 法大의 前身인 보성전문 法學科, 日本 大學 等의 出身이 많았다.이 總長은 政治學 專攻者라는 理由로 檢事가 되고 나선 先輩 檢事들에게 “나중에 政治를 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와 關聯해 재미있는 逸話가 있다. 서울대 總長과 國務總理를 지낸 이수성 前 總理는 이 總長과 京畿道 ‘光州 李氏’로 같은 宗親 할어버지뻘 되는 분이라고 한다. 李 前 總理가 大選 候補로 擧論되던 2007年頃 서울 瑞草區 ‘예술의전당’ 마당에서 偶然히 이 前 總理 夫婦를 만나 人事를 하고 德談을 들을 機會가 있었다. 李 前 總理가 “자네는 政治學 專攻인데 왜 政治를 하지 않고 檢査를 하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總長은 이 前 總理에게 웃으며 “總理님은 法學 專攻하셨는데 只今 政治를 하시지 않느냐”고 했다. 이 總長의 才致 있는 答辯에 李 前 總理 夫婦는 활짝 웃었다고 한다. 이 總長은 典型的인 선비 스타일로 讀書와 散策, 登山 等이 趣味다. 每日 多讀(多讀)한 뒤 걸으며 多像量(多商量)하는 스타일이다. 單벌 紳士에 外貌에는 關心이 없고 儉素한 生活을 信念으로 여긴다. 實際 總長 聽聞會를 準備하면서 이 總長 집에 가본 職員들이 다들 엄청 놀랐다고 한다. 집에 冊이 많고 不必要해 보이는 物件이 하나도 없는 정갈함 그 自體였다고 한다. “朝鮮時代 선비 집이 이랬을 것 같다. 미니멀리즘을 實現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薔薇같이 華麗하면서도 洗練된 ‘엄친아’ 이미지의 한동훈 長官과는 對照的으로 이 總長은 隱隱한 香氣를 내는 蘭草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當初 實勢 韓 長官에게 휘둘려 組織 掌握이 어려울 것이라거나 “總長의 空間이 없을 것”이라는 憂慮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檢搜完剝’ 等 危機에 몰렸던 檢察 組織이 이 總長을 中心으로 安定化됐다는 評價가 나온다. 한 檢察 幹部는 “이 總長은 莊子에 나오는 ‘목계地德(木鷄之德)’처럼 나무로 만든 닭처럼 작은 일에 흔들림이 없고 교만함, 早急함 없이 完全히 自身의 感情을 制御할 줄 아는 能力이 뛰어나다”며 “목계至德의 最高手 같다”고 評價했다.이 總長 스타일上 檢察總長까지 한 사람이 ‘初選’ 議員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觀測이 많다. 다만 한 長官이 來年 總選에서 出馬를 위해 法務部 長官에서 辭退하거나 或은 그 以後에라도 이 總長이 法務部 長官으로 拔擢되거나 監査院長 等 다른 公職으로 進出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勿論 그가 檢察總長 任期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그 길을 左右하게 될 것이다. 이원석 總長이 2017年 8月 서울중앙지검 特殊1部長에서 驪州支廳長으로 發令이 난 뒤 어느 날, 當時 法曹팀長이었던 先輩와 함께 驪州로 가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驪州에 있는 한 食堂에서 晩餐을 한 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우리를 버스터미널에 車로 데려다줬습니다. 여기까지는 通常的인 배웅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돌아가는 버스터미널에 들어와 버스에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스가 視野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極盡한 禮儀를 차렸습니다. 車窓 안에서 바라봤던 그의 모습이 오래 記憶에 남았습니다. ‘1度’도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謙遜하고 신중하고 中庸의 美德을 갖춘 그는 檢察 內部는 勿論이고 外部에서도 信望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聽聞會에서도 野黨이 缺點을 찾기 어려워 補佐官들이 “實話냐”고 했다는 後聞입니다. 민주당 李在明 代表 等 野圈을 向한 繼續된 檢察 搜査로 野黨 彈壓 아니냐는 視角이 적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檢察의 公正性과 中立性이 흔들리고 있다는 指摘도 나옵니다. 그나마 이 總長이 있기에 ‘아니겠지…. 나오는 대로 搜査하는 것이겠지’라며 이런 疑懼心을 덜 했던 形局입니다. 結果的으론 任期 1年 半 남은 이 總長이 더 神經 써야 할 部分입니다. 檢察이 20日 國民의힘 하영제 議員에 對한 拘束令狀을 請求하면서 政府 出帆 1年 만에 野圈만 搜査한다는 批判을 多少 덜 수 있게 됐습니다. 그가 자주 引用하는 韓非子의 文句 ‘法불아귀(法不阿貴·法은 身分이 貴한 者에게 阿附하지 않는다) 勝불拗哭(繩不撓曲·먹줄은 굽은 것을 따라 휘지 않는다)’처럼 흔들리지 않는 檢察이 되길 바랍니다. 앞서 豫告 없이 法定冒瀆 <11話―番外篇>을 쓰면서 ‘公正選擧 지킴이’였던 尹錫悅 大統領의 語塞한(?) 全黨大會 介入 論難에 對해 썼습니다. <13話>는 ‘0線 重鎭’이라는 別名을 갖고 있는 與圈 人士에 對해 다루겠습니다. 톡톡 튀는 스타일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政治人입니다.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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