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政治 꿈꾸던 ‘企劃者’ 金한길… 中道實用 ‘ONE WAY’[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새로운 政治 꿈꾸던 ‘企劃者’ 金한길… 中道實用 ‘ONE WAY’[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8日 14時 00分


코멘트

[21話]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지난달 17日 龍山 大統領室에서 ‘移住民과 同行 特別委員會’ 會議가 열린 가운데 尹錫悅 大統領과 金한길 委員長 等 參席者들이 國民儀禮를 하고 있다. 大統領室寫眞記者團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以下 金한길)은 汝矣島에서 ‘戰略企劃通’으로 불린 代表的인 ‘브레인’이다. 金大中 盧武鉉 前 大統領의 選擧 企劃을 맡았고 DJ政府 靑瓦臺 政策企劃首席祕書官, 盧武鉉 前 大統領 引受委 企劃特報,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議員 時節 戰略企劃委員長, 總選企劃團長 等 그의 履歷엔 唯獨 ‘企劃(企劃)’이 많다. 2000年과 2004年 두 番이나 總選企劃團長을 맡은 것은 거의 前例가 없다. 選擧 ‘판’을 짜고 ‘킹메이커’ 役割을 잘하는, 汝矣島式 表現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6年 20年 가까이 몸담았던 민주당을 떠난 뒤 국민의당을 거쳐 尹錫悅 大統領을 도와 現在 長官級 國民統合委員長을 지내고 있다. 愛煙家였던 그는 2018年 肺癌으로 死境을 헤맸지만 新藥을 통해 奇跡的으로 完治됐고, 다시 政治의 中心에 뛰어들었다.

野黨 支持者들은 그가 脫黨했을 때마다 그를 向해 間或 ‘創黨 專門家’라거나 ‘政黨 브레이커(breaker)’라는 等의 非難을 해왔다. 민주당에 있을 때부터 中道 路線으로 ‘禹클릭’한다는 攻擊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實踐해온 政治는 ‘끝까지 抛棄하지 않고 버티면서 希望을 探索하는 職業’이요, DJ의 金言人 ‘書生적 問題意識과 商人的 現實感覺’을 조화시키는 中道實用의 政治였을 것이다. DJ가 迎入했지만 그는 朴趾源 前 國家情報院長과 같은 DJ맨도 아니었다. 盧武鉉 前 大統領이 그를 아꼈지만 親盧(親盧武鉉)系와 特히 角을 세우며 ‘系派 霸權主義’를 외친, 어쩌면 政治權의 외로운 異邦人이었다.

● 金에게 ‘諸葛孔明’級으로 評價한 김중권 前 祕書室長
1996年 6月 김대중 前 大統領 夫婦와 함께 記念 撮影을 하고 있는 김한길 崔明吉 夫婦. 東亞日報DB
베스트셀러 作家였던 김한길은 1996年 14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DJ에 依해 迎入돼 새정치국민회의 比例代表 候補로 當選되며 政治人으로 變身한다. 總選 選對委 代辯人을 거쳐 總裁特報, 1997年 大選에서 TV 討論會 等을 맡아 DJ의 勝利를 이끌었고 大統領職引受委員이자 當選者 公報팀長, 代辯人 等으로 活躍했다.

1999年 3月 大統領政策企劃首席祕書官으로 拔擢되면서 比例代表 議員職을 辭退했다. 政策企劃首席으로서 各種 政策 調律과 行事 企劃, 國政弘報 等을 맡았다. 小說家이자 放送人 經驗을 活用해 DJ의 메시지 및 弘報戰略 等을 맡았던 것이다.

2000年 總選을 앞둔 1999年 11月 總選 出馬者들이 靑瓦臺를 나가자 DJ는 “室長도 나가고, 政務首席도 그만두는데 김한길 首席만큼은 絶對로 안 된다. 金 首席은 여기 남아 繼續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金한길의 總選 出馬를 反對했다고 한다. 하지만 以後 DJ가 마음을 바꾸면서 그에게 “總選企劃團長을 맡아라”는 任務를 주며 2000年 새千年民主黨 比例代表 候補로 總選에 내보냈고 그는 다시 國會로 돌아왔다. 黨 總裁를 겸하던 DJ가 그에게 比例代表 議員職을 두 番이나 준 것이다.

DJ는 그해 9月엔 朴趾源 當時 長官의 後任으로 그를 文化관광부 長官으로 指名해 김한길은 1年間 內閣 經驗을 쌓았다. 2001年 10月 比例代表 議員職을 버리고 서울 구로乙 再選擧에 出馬했지만 落選했다.

DJ 政府의 김중권 前 大統領祕書室長은 함께 呼吸을 맞췄던 金한길에 對해 이렇게 評價했다.

“歷史家들은 中國 歷史上 뛰어난 參謀의 典型으로 諸葛孔明을 擧論하면서 그를 ‘式치(識治)의 良才(良才)’라고 評했다. 어려운 時期에 大統領을 至近 距離에서 補佐하면서 그의 眞面目을 直接 體驗한 사람의 立場에서 評하자면, 金 首席은 이 時代가 必要로 하는 ‘食値의 良才’라는 評價가 決코 過分하지 않은 사람이다.”

- ‘김한길의 希望政治’ 推薦辭에서 -
김한길은 DJ에 對해 자주 言及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같은 분”이라며 “내가 評價하기에 너무나 큰 巨人”이라고 했다.

● “金한길 아니었으면 내 當選도 없었다”고 했던 盧
2006年 6月 院內代表 時節 靑瓦臺에서 노무현 當時 大統領을 만난 김한길 委員長. 오른쪽은 고 김근태 議員. 東亞日報DB
김한길은 向後 非盧(非노무현)系의 座長, 首長으로 불렸지만 親盧, 親文(親文在寅)의 系派主義를 警戒했을 뿐 盧武鉉 前 大統領에 對한 ‘舍監’은 없었다.

2002年 9月 大選 支持率이 下落했던 盧 前 大統領은 김한길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選對委 미디어特別本部長을 맡기면서 事實上 全權을 줬다고 한다. 그는 노무현-정몽준 候補 單一化 協商에선 盧 候補 側 協商團 代表로 나서 鄭 候補 側과 單一化 協商을 妥結하기도 했다. 大選 直後에는 當選者 企劃特報를 맡았다.

盧 前 大統領은 그를 아꼈다는 逸話도 많다. 大選 勝利 뒤 少壯派 議員들과 夫婦同伴으로 63빌딩에서 自體 祝賀宴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房에 盧 前 大統領이 다른 사람들과 食事 中이었다. 盧 前 大統領은 잠깐 그 자리에 들러 金한길 夫婦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金한길 本部長 아니었으면 내 當選도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議員들의 立場에선 別로 氣分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以後 김한길은 다른 議員들로부터 慇懃한 牽制를 받았다고 한다.

2003年 열린우리당 創黨이 推進되자 그도 새천년민주당을 脫黨해 열린우리당에 合流했고 2004年 17代 總選 서울 九老乙 地域區에서 當選됐다. 3選 議員으로서 當時 國會 建設交通委員長을 지냈고 2006年엔 열린우리당 院內代表로 選出됐다. 88 臺 49의 歷代級 票 差異로 當選됐다.

하지만 2006年 6月 치러진 4回 地方選擧에서 열린우리당이 16個 廣域團體 中 全北 1곳에서만 이기고 當時 한나라당이 廣域自治團體 12곳을 차지하는 等 慘敗하고 2007年 大選 敗北 危機感이 돌자 黨內 新黨 論議에 불이 붙기 始作했다. 같은 해 11月 當時 院內代表였던 김한길은 國會 交涉團體代表演說에서 “열린우리당의 創黨은 우리 政治史에 크게 記錄될 만한 意味 있는 政治實驗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政治實驗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番 ‘다시 始作하는 아침’이 必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脫黨하기 前날 靑瓦臺에 가서 盧 前 大統領을 만났다. 그는 “當時 박상천 代表의 ‘꼬마 민주당’과 힘을 합쳐야 된다”고 主張했지만 盧 前 大統領은 “地域主義 克服을 외친 내가 어떻게 地域黨과 합치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열린우리당을 나오기 前날 만난 盧 前 大統領은 내 옆에서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내가 金 代表에게 陳 마음의 빚은 여기에 담아두고 잊지 않겠습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때문인지 盧 前 大統領이 脫黨한 다른 議員들에 對해선 實名을 擧論하며 非難했지만 나에 對해서는 끝까지 辱을 안 했다. 그 마음의 빚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 생각했다.”
- 取材 메모 中 -
結局 김한길은 열린우리당을 脫黨해 2007年 統合新黨모임을 이끌며 中道改革統合新黨을 創黨했고 열린우리당 創黨 當時 盆唐됐던 민주당과 統合 等 合從連橫 過程을 거쳐 11月 大統合民主新黨으로의 統合을 完成시키는 데 寄與했다.

하지만 2007年 12月 大選은 鄭東泳 大統合民主新黨 候補의 慘敗로 끝났다. 김한길은 “大選 慘敗 後 아무도 責任지는 사람이 없다는 指摘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부터 旣得權을 버려야겠기에 18代 總選 不出馬를 決心했다”며 不出馬를 宣言했다. 當時 서울에서 九老乙을 包含한 4곳만 民主黨 勝利가 豫想됐는데 當選될 수 있는 사람이 責任을 져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 4選 議員으로 復歸하자마자 全黨大會 出馬
2013年 5月 全黨大會에 出馬한 金한길 委員長. 東亞日報DB
4年間 野人으로 지냈지만 空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年 뒤 김한길은 選擧를 한 달餘 앞두고 서울 廣津甲에 戰略公薦을 받아 當選됐다. 韓明淑 當時 代表의 出馬 勸誘를 여러 次例 辭讓했지만 公薦 마감日이 끝난 뒤에도 出馬 要求가 거듭되자 이를 拒絶하지 못한 것이다. 大選을 8個月 앞둔 時期였다.

김한길은 總選 直後 當選者 身分이 된 2012年 4月부터 存在感을 보였다. 그는 “總選 敗北의 重要한 原因이 系派 公薦”이라며 쓴소리를 始作했고 當時 ‘李海瓚 黨 代表-朴趾源 院內代表’로 指導部를 꾸리자는 이른바 ‘李-朴 談合’ 論難을 批判하기 始作했다.

그는 곧장 周邊 議員들의 督勵를 받아 6·9 全黨大會에 黨 代表 候補로 나섰다. 이해찬 前 代表가 24.3%(6萬7658票)를 얻어 金한길(23.8%·6萬6187票)을 0.5%포인트(1471票) 差로 제치고 1位를 차지했다. 忠南과 釜山을 除外한 地域 代議員 投票에서 김한길이 앞서 있었지만 모바일 投票에서 結果가 뒤집어졌다. 모바일 選擧人團 不法 募集 疑惑이 불거졌지만 그는 僧服을 宣言했다. 몇 年 뒤 그가 했던 이야기다.

“2012年 黨 代表 競選에서는 모바일 投票에서 뒤집히면서 내가 지고 李海瓚이 當選되지 않았나. 나를 따르던 議員들은 全部 다 不服 宣言하라고 亂離를 쳤다. 그런데 그때가 大選 6個月 남았을 때다. 내가 不服하면 黨이 엉망이 되고 大選에서 이길 可能性이 없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 李海瓚 代表에게 다음 날 ‘結果를 受容하겠다. 代身 이番 地方 競選에서 나타난 黨員들 票心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고 이 代表도 ‘알겠다’고 했다.”
- 取材 메모 中 -
以後 민주당 大選 候補였던 文在寅 前 大統領과 安哲秀 候補 側이 單一化 協商을 進行하는 過程에서 安 候補 側이 黨 革新을 要求해 11月 李海瓚 當時 代表가 辭退했다. 大選에서도 敗北하면서 이듬해 치러진 5·4 全黨大會에서 김한길이 黨 代表로 選出됐다.

● 野黨 代表 時節, 政權交替 위해 안철수 新黨과 統合 決斷
2014年 3月 새정치민주연합 共同代表 時節의 金한길 委員長. 東亞日報DB

第1野黨 代表가 된 김한길은 그해 8月 國家情報院의 大選 介入 疑惑 等에 對한 大統領의 謝過 等을 要求하며 45日間 서울廣場 天幕黨舍에서 露宿 籠城을 벌이며 朴槿惠 政府와 角을 세웠다. 國會를 植物 狀態로 마비시켰다는 批判도 받았지만 野黨의 存在感을 보여줬다는 肯定的 評價도 있었다.

다음은 朴槿惠 前 大統領에 對한 그의 逸話다.

“처음 만난 게 ‘박근혜 隨筆家’였다. 내가 MBC 토크쇼 進行할 때였는데 여러 次例 出演 提議가 들어왔다. 클로징 멘트에서 ‘우리는 同甲인데 같은 歲月을 살았지만 서로가 너무 다른 歲月을 살았다. 朴槿惠 氏가 어머니를 代身해 靑瓦臺에서 안主人 노릇을 하는 동안 나는 緊急措置로 監獄에 갇힌 아버지를 面會 다니면서 歲月을 까먹은 사람이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한 時間 동안이나 사이좋게 얘기한 것은 아마 좋은 일일 겁니다’ 뭐 이런 멘트였는데 이거를 빼달라고 要求했다. 結局 나가긴 나갔더라. (中略) 大統領이 돼서도 會同하면 便하게 얘기했다. 朴 大統領도 格式을 안 따지더라. 恒常 準備 많이 해서 手帖에 빼곡히 써온다. 中間에 내가 말을 끊고 하면 다시 볼펜으로 짚어가면서 써온 것을 읽더라. 내가 열린우리당 院內代表 時節에 朴 大統領이 與黨 代表였다. 生日날 꽃을 사 들고 찾아갔더니 記者들이 많이 와 있는데 記者들에게 그가 ‘우리가 同甲인데 난 머리에 물감을 안 들였다’고 내 白髮을 가리키며 얘기해 한바탕 웃었다. 재밌는 구석이 있다.” - 取材 메모 中 -
김한길은 2014年 3月 創黨을 推進하던 안철수 議員 側과 合黨을 宣言해 새政治民主聯合을 出帆시켰다. 中道層을 吸收하고 野圈 統合을 이뤄내야 政權交替와 大選 勝利가 可能하다는 平素 所信을 發揮한 것이다.

北韓人權法을 與野 合意로 通過시켰고, 北韓의 武力挑發을 批判하는 等 튼튼한 安保를 强調하며 中道 路線을 强化했다. 그 탓에 黨內 親文 陣營 等 傳統的인 支持層으로부터 ‘禹클릭’을 한다는 批判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批判을 甘受하며 “陣營 論理와 막말과 泥田鬪狗로 國民을 不安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던 政治와 訣別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合當한 뒤 안철수 議員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 共同代表를 맡았던 그는 7·30 再·補闕選擧에서 敗北하자 다음 날 卽刻 黨 代表職에서 辭退했다. 以後 非對委 體制를 이어가던 黨은 2015年 2·8 全黨大會에서 文在寅 前 大統領이 代表로 選出되며 親文-鼻紋 陣營 間 葛藤이 極甚해졌다. 이 무렵부터 金한길度 제3지대 新黨 創黨과 ‘創造的 破壞’를 苦悶하기 始作했다. 2015年 1月 그가 했던 이야기다.

“우리 政治가 全般的으로 兩黨 中心 體制에서 敵對的 共生 關係에 安住하고 있다는 指摘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指摘을 克服하기 위한 眞摯한 摸索이 있어야 된다. 重要한 問題예요. 只今은 理念과 地域과 世代 間의 一種의 分裂을 基盤으로 旣得權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果敢하게 그 旣得權을 벗어버린다는 覺悟가 있어야 우리 政治에 새로운 場이 열리지 않겠는가. 敵對的 共生이 아닌 競爭的 相生 關係가 되어야 國民으로부터 拍手를 받고 國民이 政治에 希望을 가지지 않겠나.”
- 取材 메모 中 -
以後 김한길은 親文 陣營의 霸權政治에 絶望하다가 안철수 議員과 함께 국민의당을 創黨했다. 2016年 總選을 앞두고 當時 野圈의 壓倒的 勝利를 위해 민주당과 首都圈에서의 野圈連帶를 剛하게 主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主張이 貫徹되지 않자 責任 政治 次元에서 不出馬를 宣言했다. 當時 國民의黨은 38席을 얻어 躍進했다. 連帶를 拒否한 安 議員이 옳았다는 視角도 있지만 萬若 金한길의 主張대로 野圈連帶가 成事됐다면 (국민의당이) 더 큰 成果를 거뒀을 것이라는 指摘도 있다.

▶섣부른 不出馬 金한길… DJ 後光 못 챙긴 金弘傑…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415/77597735/1

結果的으로 朴 前 大統領이 彈劾되면서 치러진 2017年 5·9大選에서 文 前 大統領이 當選됐다. 政治權의 諸葛孔明으로 불렸던 그의 判斷도 結果的으론 어긋난 셈이다.

● 2013年 國精院 댓글 搜査팀長이던 尹과 妙한 因緣… 킹메이커 된 金
지난해 7月 國民統合委員會 出帆式 結果에 對한 브리핑을 하고 있는 김한길 委員長. 東亞日報DB
國民의黨의 大選 走者였던 안철수 議員은 大選에서 敗北했고 바른未來黨과 合當하며 結局 사라졌다. 安 議員이 다시 국민의당을 創黨했지만 그마저도 2022年 國民의힘과 統合됐다.

이 무렵 김한길은 政治舞臺에 거의 나서지 않으며 休止期를 가졌다. 肺癌 宣告를 받은 뒤 放射線 治療 等을 받고 2018年 12月 3週假量 意識을 잃을 程度로 死境을 헤맸다. 多幸히 新約이 몸에 잘 맞아 事實上 完治됐다. 자연스럽게 政界를 隱退한 것으로 보였지만 世上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尹錫悅 大統領이 有力 野圈 大選走者로 急浮上하면서 그를 찾아왔고 그는 結果的으로 킹메이커로 다시 成功한다.

어찌 보면 尹 大統領이 只今 자리에 있는 것도 김한길과 無關치 않다. 當時 김한길은 議員總會에서 2013年 國精院 댓글 搜査팀長이었던 尹 大統領에 對해 “尹錫悅 檢事와 같이 正義로운 檢事를 野黨 國會議員들이 保護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여러 次例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野黨 法司委員들이 尹 大統領을 國監 證人으로 申請했다. 이어 法査委에 나온 尹 大統領은 外壓을 暴露하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면서 國民들에게 깊은 印象을 남겼다. 이날 金한길度 法査委 會議室을 찾아 구석에서 ‘檢査 尹錫悅’을 멀리서 처음 봤다고 한다.

김한길은 尹 大統領에 對한 마음의 빚도 있었다. 場外鬪爭을 하던 김한길이 朴 前 大統領과 領袖會談에서 尹錫悅 檢査 等 댓글搜査팀의 身分 保護를 要求했는데 이듬해 1月 人事에서 左遷됐기 때문이다. 自身의 要求가 오히려 尹 大統領을 左遷되게 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김한길은 2014年 7·30 再補選 當時 大邱高檢으로 左遷됐던 尹 大統領에게 出馬 意思를 打診하기도 했다. 2019年 5月 서울中央地檢長 時節 尹 大統領이 했던 이야기다.

“김한길 前 民主黨 代表가 2014年에 누구 통해서 再補選 나오라고 하길래 ‘政治 안 합니다’고 했어. 2016年에도 민주당, 國民의黨에서도 電話가 오더라고. 근데 내 適性도 아니고 國精院 事件 裁判 進行 中인데 政治판 간다는 게 말이 안 돼서 氣分 안 나쁘게 拒絶했어. 裁判 進行 中인데 性向이 野黨 쪽이라 起訴한 거 아니냐는 말 나올 수 있으니까 黨에 負擔될 거라고 말했어.”
- 取材 메모 中 -

以後 種種 만남을 이어오던 두 사람은 檢察總長職에서 辭退한 尹 大統領이 本格的으로 大選 出馬를 決心하면서 政治的 멘토와 멘티 關係로 發展했고 김한길은 또 한 番 킹메이커로 불렸다.

● 尹과 자주 獨對하며 懸案 論議

“行政府와 立法府 關係라고 볼 때 이 與黨과 靑瓦臺 亦是 牽制와 均衡이 原則인 것이죠. 우리 政治가 크게 잘못된 거 하나가 靑瓦臺가 汝矣島를 우습게 여긴다는 거죠. 靑瓦臺와 與黨과의 關係는 宏壯히 어려운 關係거든요. 靑瓦臺가 汝矣島, 國會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요. 特히 與黨과의 關係가 與黨이 靑瓦臺의 卒이 아니잖아요. 問題가 크지요. (中略) 왜 政治의 中心이 國會與野 하냐. 어쨌든 國會議員들은 民心에 敏感하니까 이렇게 莫無可奈 할 수 없거든요.”
- 取材 메모 中 -
朴槿惠 政府 時節인 2015年 1月 김한길이 筆者에게 했던 이야기다. 程度의 差異는 있지만 尹錫悅 政府에 對해서도 適用될 수 있는 部分이 있다. 김한길은 尹 大統領과 자주 獨對하며 懸案에 對해 이야기를 나누고 助言과 쓴소리도 적지 않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尹 大統領을 돕기로 한 그였지만 모든 게 計劃된 대로 흘러간 것 같지는 않다. 김한길과 가까웠던 한 野黨 人士는 金한길로부터 “尹錫悅 大統領이 國民의힘이 아닌 第3地帶로 갈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傳했다. 敵對的 共生關係인 兩黨制를 깨고 第3黨을 꿈꿨던 것이다.

다음은 金한길의 말이다. 그를 向한 世上의 삐딱한 視線에 對한 抗辯이자 理想主義者의 面貌가 드러난다.

“지난 大選 마지막 討論會에서 尹錫悅 李在明 안철수 等 모든 候補들이 政治發展의 첫 段階로 韓國이 多黨制가 돼야 된다는 데 同意했다. 多黨制는 結局 兩黨이 아닌 第3黨이 있어야 된다. 政黨 設立은 犯罪도 아니고 憲法에 있는 基本權이다. 그런데 創黨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攻擊을 받고 創黨하려고 하면 逆賊이 된다. 내가 비록 失敗는 했지만 3黨을 만들려고 했던 努力들이 적어도 非難받을 對象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大選 끝나고 본 文句 中 마음에 와닿는 文句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世上도 수많은 理想主義者의 挫折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는 말이다.”


政治權에선 김한길 委員長의 向後 役割에 對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大統領祕書室長, 國務總理 等 現 政府에서 尹錫悅 政府의 成功을 위해 役割을 할 可能性도 있습니다. 그의 어깨가 무거운 理由입니다.

金 委員長은 尹 大統領에 對한 信賴를 갖고 있습니다. 率直하고 뚝심 있고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보기보다 훨씬 더 괜찮은 政治人이라는 것입니다. 政治 經驗이 적은 尹 大統領의 不足한 點을 그가 잘 채워주고 그가 말했던 ‘人間化의 時代’를 여는 데 寄與하기를 期待합니다.

다음 [22話]는 다시 野黨 政治人으로 넘어갈 豫定입니다. 지난 政府의 ‘킹메이커’로 불린, 好不好와 評價가 克明하게 엇갈리는 野人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