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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먼저 한 挑發을 바로잡는 건 挑發이 아니다|동아일보

[송평인 칼럼]먼저 한 挑發을 바로잡는 건 挑發이 아니다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0月 31日 23時 51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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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化 없는 獨立은 없다’는 빨치산이 徐薰되고
敍勳을 根據로 有害가 顯忠院에 安葬되고
國防部와 陸士에까지 胸像이 만들어지고
國民의 包括的 追念의 對象이 되는 歷史 挑發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論說委員
계봉우는 이동휘와 함께 볼셰비키 路線을 따르는 韓人社會黨을 創黨하고 活動하다가 蘇聯에 定着했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强制移住 當한 後에는 그곳에서 韓國語 學者와 韓國 歷史家로 行世했다. 그는 1952年 펴낸 ‘朝鮮歷史’에서 6·25戰爭을 “美 帝國主義가 일으킨 侵掠 戰爭”으로 規定하면서 “미구(美寇)가 南銑(南鮮)으로 붙어 북선(北鮮)까지 强占하기 위해 古今에 類例없는 飛行(非行)을 犯하고 있다”고 썼다.

계봉우의 有害가 文在寅 政府 때 大統領 專用機로 옮겨져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金永三 政府 때 獨立運動 經歷이 있는 共産主義者에게 大擧 建國訓長을 줄 때 그도 독립장을 받았다. 敍勳은 그저 敍勳으로 끝나지 않았다. 敍勳이 根據가 돼 顯忠園 鞍裝으로 이어졌다.

크질오르다는 洪範圖度 살다 죽은 곳이다. 洪範圖 집 近處에는 계봉우 최界립 이인섭 等 往年의 빨치산이 이웃하며 살았다. 그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勿論 蘇聯에 살다 보니 6·25戰爭을 米帝의 侵略 戰爭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辨明은 舊韓末이나 日帝强占期에 먹고살기 위해 沿海州로 건너갔다가 猝地에 共産 革命을 當해 蘇聯 治下에 살게 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다. 往年의 빨치산들은 ‘赤化(赤化) 없는 獨立’은 可能하지도 않고 必要하지도 않다고 여기고 蘇聯을 擇한 사람들이다. 最小限 그들은 그런 辨明을 늘어놓을 資格이 없다.

勿論 洪範圖는 6·25戰爭 勃發 前인 1943年 죽었다. 그러나 洪範圖는 1939年 蘇聯이 獨逸과 싸우게 되자 自身을 戰線에 보내달라며 行政機關까지 찾아가 呼訴한 사람이다. 그가 죽었을 때 高麗人 新聞 ‘레닌旗幟’는 訃告 記事에서 그를 蘇聯 共産黨의 忠直한 黨員이었다고 ‘높이’ 評價했다. 그가 살아서 6·25를 맞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런 사람의 胸像을 陸士에 設置해놓고 生徒들이 敬禮를 하고 다닌다.

獨立軍은 日本軍에 쫓겨 러시아領 이만으로 들어갔다가 一部는 間島로 다시 돌아가고 一部는 自由詩로 向했을 때부터 民族主義 系列과 共産主義 系列로 確然히 갈라졌다. 洪範圖는 1919年부터 빨치산이 됐다고 나중에 밝혔지만 共産主義者였음이 外部로 分明히 드러난 건 1921年 自由詩로 向할 때부터였다. 다만 그가 그저 韓人 共産主義者가 아니라 一部 韓人 共産主義者에게만 주어진 蘇聯 共産黨員 資格을 附與받는 等의 自由視 事變 以後 行跡은 蘇聯 崩壞 後 蘇聯 文書를 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洪範圖에게는 윤보선이 大統領이고 朴正熙가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이던 1962年 建國訓長 大統領章이 주어졌다. 自由詩로 向하기 前 돌아선 이범석조차 1971年 펴낸 回顧錄 ‘우등불’에서 “洪範圖가 이르쿠츠크파 共産黨員의 勸誘로 共産主義者가 됐지만 그 속에서 할 일도 없고 이름만 빌려준 셈이 돼 그 後 自由視 附近에서 彷徨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死亡하고 말았다”고 쓸 程度로 잘못 알고 있던 時節 주어진 勳章이다.

洪範圖는 自由視 事變 直後 間島 獨立軍을 갖다 바치는 데 앞장 선 功勞로 레닌에게 褒賞까지 받는 等 生涯 最高의 瞬間을 보냈다. 往年의 韓人 빨치산 中 相當數가 스탈린 治下에서 收監生活까지 하며 치른 敎化 過程도 洪範圖는 치르지 않았다. 民族을 死地로 내몬 强制移住에 對해 한마디 不平의 記錄도 남기지 않았다. 洪範圖는 ‘彷徨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死亡한 것’이 아니라 蘇聯 共産黨의 忠直한 黨員으로서 年金과 福祉 特惠에 劇場 水位까지 하면서 ‘넉넉히 살다가’(반병률 韓國外大 名譽敎授 表現) 當時로서는 將帥인 75歲에 死亡했다.

文在寅 政府는 2018年 陸士에 洪範圖 胸像을 設置하고 2021年 洪範圖의 遺骸를 가져오면서 그의 建國訓長度 大統領章에서 대한민국장으로 올렸다. 陸士에 胸像 따위를 設置하지 않고 勳章 等級을 그대로 뒀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주제넘게 歷史의 再造山河(再造山下)를 한다며 沈默의 均衡을 깨고 먼저 挑發을 敢行한 것은 文 大統領이다.

洪範圖의 遺骸를 가져올 때 空軍機 6臺가 護衛하고 大統領이 늦은 밤 空港에서 直接 맞는 場面을 보면서 참으로 怪異한 氣分이 들었다. 洪範圖 胸像을 設置할 當時 딸의 親舊인 陸士 女生徒로부터 傳해들은 生徒들의 ‘말 못 하는 憤怒’를 잊을 수 없다. 먼저 한 挑發을 바로잡는 건 挑發이 아니다.


송평인 論說委員 pisong@donga.com
#송평인 칼럼 #계봉우 #洪範圖 #洪範圖 胸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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