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國民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앵커에 陸英修 女史가 한 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東亞日報

“國民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앵커에 陸英修 女史가 한 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 東亞닷컴
  • 入力 2022年 11月 13日 11時 56分


코멘트

봉두완이 記憶하는 朴正熙 육영수와의 만남
“우리 밥 비벼 먹을까?” 시골農夫 같았던 ‘獨裁者’ 朴正熙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朴正熙, 봉두완은 하염없는 눈물만

朴正熙 政府 때인 1970年代 동양방송(TBC)에서 ‘安寧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라는 時事 프로그램으로 權力者에게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봉두완 氏가 最近 펴낸 自身의 回顧錄 (앵커맨의 삶과 꿈·羅南)에서 朴正熙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紹介했다. 그는 1961年 5·16革命을 일으켜 執權한 朴 大統領이 ‘시골農夫 같은 大統領’이었다고 回顧했다. 그동안 世間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朴正熙의 人間味를 느낄 수 있는 逸話가 여럿 담겨 있다. 이 가운데는 特히 ‘靑瓦臺 안에서 野黨’ 役割을 했다는 퍼스트레이디 陸 女史와 만나 對話를 나누는 場面도 눈길을 끈다. 回顧錄을 土臺로 봉두완 會長과의 追加 取材를 통해 朴 前 大統領 夫婦와의 因緣을 紹介한다.

●갑자기 靑瓦臺로 呼出한 陸英修 女史


1967년 4월 30일 공화당 인천유세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동아일보DB
1967年 4月 30日 共和黨 仁川遊說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朴正熙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 東亞日報DB

“午後 5時까지 靑瓦臺로 좀 와 달라고 女史님이 殿下십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靑瓦臺 連絡을 받고 봉두완은 靑瓦臺 小接見室에서 기다렸다. 內心 不安하기도 하고, 焦燥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왜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하실까?’ 이런 저런 생각에 時間이 흘렀다.

“아유, 바쁘실 텐데 와주셨네요. 오랜만이에요.”

陸 女史의 함박웃음을 보고 나서야 緊張이 多少 풀렸다.

“지난 番 韓美頂上會談 때 取材와 報道를 잘해 주셔서 感謝드려요. 유엔總會에서 寫眞 撮影할 때 鳳 特派員이 저를 뒤에서 끌어당기면서 大統領보다 낮은 階段에 서라고 코치를 잘 해주셔서 寫眞도 참 잘 나왔더라고요. 아침 8時 ‘뉴스展望臺’는 大統領께서 빼놓지 않고 듣는 愛聽者세요. 鳳 앵커 얘기를 大統領께서 귀담아 들으시는 거 같아요.”

陸 女史가 飛行機를 슬슬 태우기 始作하자 그는 우쭐했다. 한便으론 多幸이라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鳳 앵커가 庶民들의 고단한 삶과 希望을 傳하는 얘기나 野黨의 發展을 위해 쓴 소리도 하는 것을 보면 참 所信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記者 精神이 있으니까 放送도 잘 進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봉두완은 朴正熙 大統領과 린든 존슨 美國 大統領과의 1965年 5月 韓美頂上會談 當時 韓國日報 워싱턴特派員으로서 會談을 代表 取材하는 이른바 ‘풀 記者’로 들어가 取材하면서 朴正熙 大統領 夫婦와 因緣을 맺었다.

“난 正말 봉두완 氏를 좋아해요. 1等 팬이에요.”

陸 女史가 한참 동안이나 그를 치켜세우자 봉두완은 우쭐해졌다. 그런데 어느 瞬間 갑자기 陸 女史의 表情이 싸늘하게 바뀌기 始作하는 듯한 느낌을 直感的으로 받았다.

“그런데, ‘國民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데, 뭐가 어떻게 힘들다는 겁니까?”

“예?”

느닷없는 陸 女史의 質問에 어안이 그는 벙벙해졌다.

●‘나는 靑瓦臺 안의 野黨, 할말 다 하고 삽니다.’


1964년 서독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드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도서출판 기파랑
1964年 西獨 訪問을 마치고 歸國길에 오르면서 환송客들에게 손을 흔드는 朴正熙 大統領과 陸英修 女史. 圖書出版 기파랑


“나도 世上 돌아가는 일에 關心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우리 國民들이 좀 더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瞬間도 놓아본 적이 없어요.”

“…”

봉두완은 暫時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뭐가 그리 不滿입니까? 勿論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많이 겪지만 放送에서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씀하신다고 今方 어떻게 다 달라지나요?”

陸 女史의 목소리는 더욱 斷乎해져갔다.

“저도 靑瓦臺 안의 野黨으로서 大統領께 할 말은 다 하고 삽니다. 내 딴에는 大統領께 도움이 되고 國民 生活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내가 본 대로, 그리고 들은 대로 말하려고 애쓰는데, 밖에선 이런 事情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한밤中에 저 兩班이 곤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됐어요. 惻隱해요…”

봉두완은 陸 女史의 音聲이 높아지는 것을 숨죽여 듣고만 있어야 했다.

“TV에 나오시는 분들이 우리 大統領 때문에 社會가 不安하고 不淨腐敗가 蔓延하고 庶民生活이 窮乏해졌다는 式으로 말씀들 하시던데 只今 우리나라, 우리 社會가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 무엇이 어떻게 돼서 國民 노릇해 먹기가 그리 힘들다는 겁니까?”

봉두완이 며칠 前 政府를 批判한 것이 禍根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操心스레 입을 열었다.

“實은 그런 얘기가 아니라 一部 政治人이나 社會 一角에서 若干 衝動的으로 떠들고 하는데 問題가 없는 건 아니죠, 뭐”

●陸 女史 눈에 고인 눈물


단아한 모습의 국모(國母)로 불린 육영수 여사는 정작 청와대 안에서 박 대통령에 쓴 소리를 마다 않는 야당을 자처한 강골이었다. 동아일보DB
端雅한 모습의 國母(國母)로 불린 陸英修 女史는 정작 靑瓦臺 안에서 朴 大統領에 쓴 소리를 마다 않는 野黨을 自處한 江골이었다. 東亞日報DB

“放送에서 批判도 하고 輿論도 만들고 해서 우리가 봉두완 氏를 좋아해요. 우리 大統領께서도 아침 8時 땡 하면 始作하는 TBC라디오 ‘뉴스展望臺’를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들고 化粧室에 가서도 듣곤 해요. 근데 엊그제 밤 ‘東西南北’ TV 座談프로 時間에는 해도 너무 했어요. 野黨보다도 더 甚했어요. 너무도 一方的이더라고요. 속상했어요! 放送의 影響力이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國民들에게는 宏壯한 衝擊을 줄 수 있어요!”

“勿論 잘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떻게 時도 때도 없이 國民을 不安하게 만들면서 아무 말이나 하시는 겁니까? 엊그제 밤에 저는 한숨도 못 잤어요. 大統領께서도 TV를 함께 보셨는데, 꽤 不便하신 것 같았어요. 그리고 靑瓦臺로 온 後 많은 일을 겪으면서 고비를 넘길 때마다 苦悶하시던 그분 얼굴을 볼 때는…정말 惻隱한 마음뿐이에요.”

차분한 마음으로 平靜을 되찾은 陸 女史는 그에게 茶를 勸했다. 봉두완은 陸 女史를 똑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女史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放送을 끝내면서 찜찜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興奮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時計를 슬쩍 보니 벌써 한 時間이나 흘렀다. 恒常 謹嚴한 表情의 朴 大統領 옆에서 溫和하고 포근한 微笑를 보이며 國民들에게 慰安을 줬던 陸 女史였다. 그런 그가 放送에 언짢아한 大統領 마음을 봉두완에게 그대로 傳達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門이 열리더니 朴 大統領이 들어왔다. 滿面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녁이나 같이 하고 가지’


1973년 10월 정수직업훈련원 개원식 후 훈련원을 둘러보고 있는 박 대통령 부부. 동아일보DB
1973年 10月 精髓職業訓鍊院 開院式 後 訓鍊院을 둘러보고 있는 朴 大統領 夫婦. 東亞日報DB


“아이구, 安寧하십니까? 大統領 閣下!”

“음, 깡牌가 여기 왔구먼. 오랜만이요, 봉두완 氏!”

‘까칠한’ 記者를 깡牌로 에둘러 말한 것이다. 陸 女史는 朴 大統領에게 자리를 勸하며 그동안 나눴던 對話를 대수롭지 않은 말套로 簡略하게 傳했다. 봉두완은 陸 女史가 暫時 자리를 비운 사이 政局에 對해 몇 가지 얘기를 했다.

“저녁이나 같이 하고 가지, 봉두완 氏!”

“예?”

“우리 食口들 하고 저녁 食事나 같이 해요. 宅에다가는 여기서 저녁 한다고 電話할게요.”

陸 女史가 鄭重하게 얘기했다.

“新聞記者들이 집에다 電話는 무슨…밤낮 밖에서 술만 먹고 다니는 사람들인데…”

朴 大統領이 거들면서 얘기했다.

봉두완이 같이 한 朴 大統領과의 食事는 온 家族과 함께 한 자리였다. 大統領의 딸 근혜와 筋令은 먼저 靑瓦臺 2層 家族 食堂에 앉아 있었고, 아들 지만이 헐레벌떡 뛰어와 자리에 앉으며 대충 人事를 했다.

朴 大統領은 짜증을 냈다.

“야, 무슨 人事를 그리 하니? 손님한테…”

大統領의 호통에 지만은 다시 일어나 鄭重하게 人事했다.

저녁床은 놀라울 程度로 簡素했다고 봉두완은 記憶했다.

大統領이 좋아하는 洋酒 시바스리갈 한 甁을 땄다. 봉두완은 밥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朴 大統領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그러는 사이 陸 女史는 세 番이나 식은 국을 바꿔줬다. 얼큰해진 朴 大統領이 봉두완을 보며 한마디 했다.

●“같이 밥 비벼먹을까?”


1973년 8월 여름 휴가지에서 박 대통령 부부와 딸 근혜. 박근혜는 당시 앳된 20대였다. 동아일보DB
1973年 8月 여름 休暇地에서 朴 大統領 夫婦와 딸 근혜. 朴槿惠는 當時 앳된 20臺였다. 東亞日報DB

“봉두완 氏는 가만히 보면 愛國者 같아.”

“예? 아니, 閣下께서 무슨 말씀을…?”

봉두완이 한국일보 워싱턴特派員 때 朴 大統領은 존슨 大統領과 白堊館에서 열린 韓美頂上會談에서 韓國軍의 베트남戰爭 派兵에 關한 14個項 合意를 했다. 베트남戰 參戰은 韓國의 經濟 發展 밑거름이 됐지만 한便으로 越南 敗亡으로 北韓 김일성이 南侵 計劃을 세우는 等 韓半島에 큰 威脅이 되기도 했다.

봉두완은 6·25 參戰 16個國 巡訪 取材 TBC-TV 特輯을 通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南北戰爭을 憂慮해 우리가 非常對備 態勢가 必要하다’는 內容을 담아 朴 大統領에게 傳達하기도 했다. 봉두완이 主導한 6·25 特輯放送은 靑瓦臺 안에서 ‘아주 좋은 適時打였다’는 評價가 나왔다고 한다. 朴 大統領이 이 얘기를 술자리에서 擧論하면서 激勵한 것이다.

봉두완은 1934年 12月 黃海道 遂安에서 태어나 13살 때인 1946年 가을 自由의 품을 찾아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銃彈을 무릅쓰며 38線을 넘어온 越南民이었다. 當時 38線 北녘은 蘇聯軍과 人民軍이 함께 境界를 서고 있을 때였다.

봉두완은 그날 몹시 醉했다. 혓바닥이 굳어 發音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느낄 程度였다. 거나하게 醉했을 때 朴 大統領이 불쑥 말했다.

“우리 여기다 밥 비벼먹을까?”

‘怨 별스런 大統領 다 보겠네!’

봉두완은 속으론 질겁했지만 “아, 네, 좋습니다. 그러죠 뭐…”라고 對答했다.

그는 朴 大統領과 함께 한솥밥 먹듯이 남은 푸성귀와 나물 等을 한 그릇에 섞어 맛있게 밥을 비벼 먹었다.

봉두완은 朴正熙의 庶民다운 모습에 다시 한番 놀랐다. 밖에선 獨裁者로 辱을 먹었지만 옆에서 지켜본 朴 大統領은 여느 庶民과 다름없었다.

‘와! 이렇게 庶民다운 大統領이라니’ 봉두완은 農夫의 純粹함을 보이고 人間的으로 사람을 對하는 朴 大統領의 모습을 決코 잊을 수 없다고 回顧했다.

●다시 찾은 靑瓦臺, 홀로 있던 朴正熙


봉두완의 SBS전망대를 진행하는 모습. 그는 기자 출신 앵커맨 1호였다. 동아일보DB
봉두완의 SBS展望臺를 進行하는 모습. 그는 記者 出身 앵커맨 1號였다. 東亞日報DB

봉두완이 다시 靑瓦臺 招待를 받았을 때는 陸英修 女史가 돌아가신 後였다. 國立劇場에서 열린 8·15 慶祝記念式場에서 日本 僑胞 문세광의 銃擊으로 世上을 떠난 後였다.

朴 大統領은 大統領執務室에서 窓門 커튼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安寧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봉두완입니다? 여기가 放送局인가? 그리 앉아, 別故 없지?”

봉두완이 自身의 프로그램을 始作할 때 하는 人事말을 하자 朴 大統領이 和答한 것이다.

“봉두완 氏 放送 批判, 잘 듣고 있어. 無酌定 批判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봉두완 氏는 批判은 辛辣하지만 내 보기엔 나라 걱정이 배어 있어서 좋아. 더군다나 率直해서. 天主敎 聖堂 오래 다녔지?”

“예, 1958年에 서강대 初代 理事長 진성만 神父님한테 零細 받고, 盧基南 大主敎님으로부터 堅振聖事 받고요…”

“우리 집에도 근혜가 天主敎 高等學校(성심여고)와 大學(서강대)을 다녔지.”

이렇게 한참 世上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大統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點心이나 하고 가지”라고 갑자기 말했다. 김정렴 祕書室長은 이미 와 있었다. 하지만 안主人 없는 食卓은 허전해 보였다.

簡素한 食卓엔 붉은 葡萄酒 한盞과 국수 한 그릇, 그리고 인절미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국수는 그렇다 쳐도 인절미는 좀 疑訝했다.

“이게 웬 떡입니까?”

“응, 마침 오늘이 우리 집사람 生日이라서 임자를 불렀지. 그 사람이 生前에 좋아해서 말이야. 떡도 좀 들어…. 근혜는 行事場에서 좀 늦는가 봐. 者, 어서…”

봉두완은 가슴이 뭉클했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라도 보일까 이를 악물었다. ‘靑瓦臺 안의 野黨’을 自處하면서 “國民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내 말에 抗辯하고 呼訴하던 令夫人의 모습을 봉두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시골農夫 같았던 朴 大統領


2015년 6월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격동하는 동북아의 한미관계’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윤덕민(현 주일대사) 
김태효(현 국가안보실 1차장) 패널 사이에서 사회를 보는 봉두완 한미클럽 회장.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2015年 6月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激動하는 東北亞의 韓美關係’를 主題로 열린 討論會에서 윤덕민(現 駐日大使) 김태효(現 國家安保室 1次長) 패널 사이에서 社會를 보는 봉두완 韓美클럽 會長. 원대연 記者 yeon72@donga.com


봉두완은 朴 大統領을 在任 中에 數次例 만났다고 回顧했다. 1979年 10·26 事態로 朴 大統領은 逝去했다. 봉두완은 朴 大統領이 서울 동작동 國立墓地 陸 女史 옆에 묻힌 다음 날 새벽 4時 通行禁止가 풀리자마자 夫人과 함께 택시를 불러 銅雀洞으로 向했다. 朴 大統領 墓地 앞에서 큰 절을 하고 祈禱를 드리며 容恕를 빌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大統領 閣下! 容恕하십시오. 그동안 철없이 굴면서 時도 때도 없이 辛辣한 批判과 非難을 한 저의 속 좁은 態度를 너그럽게 받아주시고 容恕해 주십시오!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는 모든 걸 뒤로 하시고 內外분께서는 오래오래 平和의 安息을 누리소서. 不足한 저희들이 앞장서서 大統領께서 못 다한 祖國 近代化를 위해 獻身하겠나이다.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큰 절을 올리며 두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을 바라보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夫婦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墓域을 내려왔다. 平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한 朴 大統領 墓 앞에서 봉두완은 아내 김옥선(안젤라)과 함께 하염없는 눈물만 뿌렸다.

봉두완은 “朴 大統領은 만나면 만날수록 人間味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며 “獨裁者라기 보다는 시골 面長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初等學校 擔任先生님 같은 印象을 풍기는 아주 人間的인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 刻印돼 있다”고 回顧했다.

봉두완은 올해 88歲로 未遂(米壽)다. 그가 自敍傳을 쓴 것은 지나온 옛 얘기를 世上에 남기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日記 形式의 글을 펴내게 됐다고 했다. 100歲 時代, 아흔을 바라보는 그는 “이제 남은 며칠, 몇 달, 몇 年을 어떻게 잘 보낼까 窮理한다”며 “하늘나라를 궁금해 하면서 熱心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孫女가 膳物해 준 낡은 빨간 赤十字마크 帽子를 恒常 쓰고 다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取材를 하는 記者에게 “內容도 없는 두꺼운 冊을 왜 記者가 읽어? 와이프한테나 줘”라고 弄을 던지는 그는 恒常 愉快하다. 寸鐵殺人(寸鐵殺人)의 조크로 周圍를 웃음 雰圍氣로 만드는 봉두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옆에 있기만 해도 즐겁다고 한다. 日帝 時代에 태어나 分斷의 鐵柵 線을 넘어 自由 大韓民國에서 平生을 살아 온 그는 通信社 政治部 記者와 新聞社 워싱턴特派員, 그리고 TV 앵커맨 1號, 國會議員과 國會 外務委員長, 隱退 後엔 敎授 等을 지낸 外交專門家이다. 大韓民國의 近·現代史를 現場에서 取材하고 지켜본 산 證人이어서 그의 自敍傳은 작은 歷史敎科書이기도 하다.

2016년 12월 서울클럽에서 열린 ‘2016 한미클럽 친선 오찬’ 행사에서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에게 한미클럽상을 수여하는 모습.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016年 12月 서울클럽에서 열린 ‘2016 韓美클럽 親善 午餐’ 行事에서 빈센트 브룩스 韓美聯合司令官에게 韓美클럽상을 授與하는 모습. 전영한 記者 scoopjyh@donga.com




최영해 記者 yhchoi6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오늘의 推薦映像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