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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會長님! 잘 해 보십시오!” 활짝 웃은 전두환 大統領 한마디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東亞日報

“李 會長님! 잘 해 보십시오!” 활짝 웃은 전두환 大統領 한마디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9月 11日 09時 00分


코멘트

新韓銀行 創業主 이희건 스토리③
“해보시오, 젊은 사람이 뭘 못 하겠소?”
“어느 한 사람도 疏忽히 對하지 마시오.”


2022年 7月 7日 新韓銀行이 創立 40周年을 맞았다. 1982年 日本 全域의 在日僑胞 株主 341名으로부터 돈을 모아 만들어진 新韓銀行의 誕生은 이희건 創業主의 努力 없이는 처음부터 不可能한 일이었다. 15歲의 어린 나이에 玄海灘을 건너 社會의 밑바닥 使喚에서 始作한 이희건의 삶을 들여다 본 ‘여러분 德澤입니다. 新韓銀行 創業主 이희건 回顧錄’(羅南)李 最近 發刊됐다. 2011年 作故한 朝鮮 靑年 이희건의 不屈의 삶을 追跡, 8月 28日에 이어 세 番째로 紹介한다.


1985년 11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 성동구 구의동 강변로에서 거행된 올림픽대교 기공식에 참석해 공사계획을 보고받고 있다. 왼쪽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겸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사진 동아일보DB
1985年 11月 20日 전두환 大統領이 서울 성동구 구의동 江邊路에서 擧行된 올림픽大橋 起工式에 參席해 工事計劃을 報告받고 있다. 왼쪽은 노태우 민정당 代表委員 兼 서울올림픽組織委員長. 寫眞 東亞日報DB
“韓國 政府의 自律化 政策, 믿을만한가요? 김재익 經濟首席은 매우 合理的인 이코노미스트라고 하는데, 僑民銀行 設立에 對해선 어떤 생각을 가질 것 같소?”

1981年 3月 3日 전두환 大統領이 就任하면서 韓國 社會에선 强壓的인 雰圍氣가 造成됐다. 正義社會 具現을 目標로 社會秩序를 바로 잡는다는 名分 아래 暴力輩와 破廉恥犯을 잡아들여 ‘삼청교육대’라는 軍事 施設에 受容했다. 當時 經濟 政策의 操舵手는 김재익 大統領經濟首席祕書官으로 전두환 大統領의 ‘經濟 家庭敎師’로 불렸다. 前 大統領이 김재익 首席에게 “經濟는 當身이 大統領이야!”라고 말했을 程度로 그에 對한 信任은 각별했다. 이희건은 知人들에게 在日僑胞 銀行 設立을 打診하며 操心스레 물었다. 知人들은 한결같이 金 首席의 言行이 一致한다고 答했다.

● ‘只今이 마지막 機會다’

1981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 현안을 보고하며 결재를 받는 모습. 사진 동아일보 DB
1981年 靑瓦臺 大統領 執務室에서 김재익 大統領經濟首席祕書官이 전두환 大統領에게 經濟 懸案을 報告하며 決裁를 받는 모습. 寫眞 東亞日報 DB
喜건은 때가 왔음을 動物的 本能으로 直感했다.

‘只今이야말로 在日僑胞가 母國에서 銀行을 設立할 마지막 機會다!’

1980年 10月 政府는 外國系 銀行 設立을 檢討한다는 方針을 밝힌 터였다. 韓國 經濟의 對外 信認度를 높이고 外國 資本의 調達 經路를 多樣化하고 韓國에 先進金融 技法을 導入한다는 名分이었다. 하지만 喜建議 僑胞銀行 設立이 그동안 番番이 挫折된 것은 旣存 銀行들의 카르텔 體制가 워낙 鞏固했기 때문이었다. 銀行 設立은 엄청난 利權이어서 新粒子를 徹底히 排除하는 雰圍氣였다.

喜건은 韓國과 日本을 오가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同胞 投資家들을 모아 ‘在日韓國人銀行設立推進委員會’를 만들었다. ‘서울의 봄’인 1980年 4月, 그러니까 約 1年 前에 銀行設立 請願書를 李承潤 재무부 長官 앞으로 提出했지만 어수선한 政局에서 이 書類를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불인가 方針만 通報 받았을 뿐이었다.

1981년 4월 이승윤 재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가칭 교민은행 설립에 관한 청원서’ 사진 나남
1981年 4月 李承潤 재무부 長官 앞으로 보낸 ‘假稱 僑民銀行 設立에 關한 請願書’ 寫眞 羅南
喜건은 1981年 4月 24日 在日僑胞 維持段의 共同 名義로 作成한 ‘假稱 僑民銀行 設立에 關한 請願書’를 李承潤 재무부 長官 앞으로 提出했다. 더불어 關係 要路를 통해 전두환 大統領과의 面談을 周旋해 줄 것을 要請했다. 最高 統治權者의 裁可 없이는 銀行 設立이 成事될 수 없는 狀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當時 在日僑胞는 日本에서 1萬 餘個 業體를 所有하거나 運營하고 있었고, 年間 賣出額 10兆 엔, 總 保有 資産은 70兆 엔에 達했다.

● 전두환 大統領과의 面談
얼마 後 靑瓦臺에서 連絡이 왔다.

전두환 大統領과의 面談이 成事됐다는 傳喝이었다.

前 大統領은 喜件을 歡待하는 表情이었다. 一旦 安堵했다. 李承潤 재무부 長官과 김재익 經濟首席이 陪席한 자리였다. 大統領의 家庭敎師 김재익은 깡마른 體軀였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前 大統領에게 報告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린 김재익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그는 1983년 10월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아웅산 테러 당시 안타깝게도 순직했다. 사진 동아일보DB
전두환 大統領의 ‘經濟 家庭敎師’로 불린 김재익 前 大統領經濟首席祕書官. 그는 1983年 10月 버마(現 미얀마)를 訪問한 전두환 大統領을 겨냥한 北韓의 아웅산 테러 當時 안타깝게도 殉職했다. 寫眞 東亞日報DB
“韓國이 先進國으로 跳躍하려면 東北아시아 金融 中心地가 돼야 합니다. 이런 基礎 作業으로 先進國의 金融 資本을 誘致할 때입니다. 在日僑胞들이 自發的으로 出資해서 銀行을 設立하겠다니 마다할 理由가 없습니다.”

金 首席의 報告에 前 大統領은 고개를 끄덕였다.

李承潤 長官도 在日僑胞 銀行 設立을 支持하는 말을 했다. 喜건은 때를 놓치지 않고 單刀直入的으로 呼訴했다.

“大統領 閣下! 우리 在日僑胞들이 祖國의 發展에 寄與할 수 있도록 機會를 주십시오. 在日僑胞들이 數十 年 동안 애타게 所望하고 있습니다.”

前 大統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李 會長님! 잘해 보십시오!”

大統領 화통한 한마디에 喜건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韓國에서 在日僑胞 資金으로 銀行을 만들 수 있게 된 瞬間이었다.

大統領 面談 直後 일은 一瀉千里로 進行됐다. 財務部에선 “일이 잘 進行되고 있으니 銀行 設立 準備를 하라”는 連絡이 왔다. 軍事政府 時節 銀行 設立은 大統領의 決斷 없이는 想像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前 大統領은 經濟라면 김재익 經濟首席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專門家에게 全權을 주는 이 같은 大統領의 委任 統治로 韓國 經濟는 跳躍하는 契機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萬若 軍人 出身인 前 大統領이 一一이 經濟 問題에 干與했다면 經濟 政策이 成功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朴正熙 大統領과 전두환 大統領은 經濟는 뛰어난 官僚 出身 中心의 專門家들에게 一任했기 때문에 在任 時節 뛰어난 經濟成長을 謳歌할 수 있었다.

● 뜻 깊은 도쿄에서의 發起人大會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 1월 청와대에서 김준성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전두환 大統領이 1982年 1月 靑瓦臺에서 김준성 副總理 兼 經濟企劃院 長官으로부터 새해 業務報告를 받고 있다. 寫眞 東亞日報DB
1981年 8月 20日 在日僑胞 商工人들은 도쿄에서 發起人大會를 열고 新設할 僑民銀行의 事業 目的을 ‘母國에 進出한 在日僑胞 企業의 金融周旋과 必要 業務’로 設定했다. 發起人은 이희건을 비롯해 辛格浩 강병준 等 모두 19名이었다.

喜件이 어렵게 銀行 設立 內諾을 받았지만 豫想대로 株主를 끌어 모을 수 있을지, 走禽(株金)을 제대로 納入할지 걱정이 몰려왔다. 一部 在日僑胞 財力家는 韓國의 政治 經濟 狀況이 不安하다며 投資를 꺼리는 모습도 捕捉됐다.

在日僑胞의 끈질긴 請願과 韓國의 經濟 狀況이 맞물리면서 數十 年 동안 철통같던 銀行 市場의 門戶가 드디어 열리게 됐다. 在日僑胞 母國投資家들이 共同 出資한 신한은행과 美國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國內 企業體의 合作銀行인 한미은행이었다.

發起人大會에 이어 銀行設立委員會가 꾸려졌다. 喜件을 비롯해 40名의 委員들이 委囑됐다. 在日僑胞 社會를 이끌어가는 企業人들로 日本 全域에서 參與했다. 이들이 各各 5億~10億 원씩 내기로 한 出資金이 銀行 設立의 種子돈이 됐다.

도쿄를 비롯해 오사카 요코하마 고베 市價 히로시마 야마구치 후쿠오카 센다이 교토 等에서 活動하는 在日僑胞 企業人들이 參與했다.

● 1982年 韓國 社會相의 變化

1982년 1월 4일자 동아일보 호외(號外)에는 통금 해제와 교복 자율화, 개각 등의 뉴스가 쏟아져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정초 나들이길 서울시민들이 거리에 뿌려진 동아일보 호외를 보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1982年 1月 4日子 東亞日報 號外(號外)에는 通禁 解除와 校服 自律化, 改閣 等의 뉴스가 쏟아져 市民들을 놀라게 했다. 正初 나들이길 서울市民들이 距離에 뿌려진 東亞日報 號外를 보고 있다. 寫眞 東亞日報DB
新韓銀行이 誕生한 1982年은 새해 劈頭부터 社會的인 變化가 많았다.

每日 밤 0時부터 새벽 4時까지 通行을 禁止한 夜間通行禁止가 撤廢됐다. 늦은 밤에 밤거리를 徘徊하다간 警察에 붙들려가 卽決 審判을 받던 때였다. 職場人들이 會食을 해도 밤 11時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向했다.

中高生들의 頭髮과 校服 自律化가 發表됐다. 男學生은 削髮, 女學生은 斷髮이던 것을 自律에 맡기고 中高生들은 校服 代身 私服을 입을 수 있게 됐다. 自律的인 社會 雰圍氣를 만든다는 전두환 大統領의 抱負의 一環이었다.

1982年 1月 4日 改閣에서 經濟企劃院 長官 兼 副總理에 김준성 韓國銀行 總裁가 任命됐다. 喜건은 切親하게 지내던 金 副總理가 重用된 것을 祝賀하면서도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對面 機會가 줄어들 것을 憂慮했다.

1982년 1월 6일 통금이 해제된 늦은 밤 서울 거리에서 청년들이 활보하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1982年 1月 6日 通禁이 解除된 늦은 밤 서울 거리에서 靑年들이 闊步하고 있다. 寫眞 東亞日報DB
1967年 9月 招待 大邱銀行長으로 就任한 김준성 副總理는 喜件을 自然스레 자주 만나게 됐다. 日本 간사이 地域 商工人 가운데 大邱 慶北 出身者들은 故國에 오면 으레 大邱商工會議所와 대구은행을 訪問하곤 했다. 喜건은 韓國에 올 때마다 김준성 行長을 만나 韓國 經濟 狀況을 물어보곤 했다.

그때 마다 김준성 行長은 快刀亂麻로 說明을 해줬다. 喜件이 在日僑胞 銀行을 設立하려던 것도 金 行長과의 對話가 큰 몫을 했다. 高速 成長을 하는 韓國 經濟는 앞으로도 크게 發展하겠지만 實物 部門의 成長 速度에 金融이 따라가지 못하는 現實을 慨歎했다. 喜건은 그 때 무릎을 쳤다.

고교생 두발 자율화에 이어 1983년부터 중고생들의 교복 착용도 ‘개성 신장’을 이유로 폐지됐다. 사진은 교복 폐지 이전의 학생들이 하교하는 모습. 사진 동아일보DB
高校生 두發 自律化에 이어 1983年부터 中高生들의 校服 着用도 ‘個性 신장’을 理由로 廢止됐다. 寫眞은 校服 廢止 以前의 學生들이 下校하는 모습. 寫眞 東亞日報DB
“그래! 韓國에 꼭 進出하자!”

1920年生인 김준성은 喜件보다 세살 아래로 大邱高普(現 경북고)와 경성고上(現 서울大 經營大)을 나와 大邱에서 七福洋襪 工場을 차렸다. 뒤엔 農業銀行에 들어가 金融人으로 變身한 뒤 大邱銀行 設立에 參與해 招待 大邱銀行長으로 就任했다. 김준성 行長의 當時 祕書室長이 라응찬으로 新韓銀行의 産婆役에다 新韓銀行長을 맡게 된다. 김준성이 農業銀行 支店長 時節 라응찬은 農業銀行 職員으로 김준성의 눈에 들었던 것이었다.

1982년 11월 국회 예결위에 참석한 김준성 부총리(오른쪽)와 노태우 내무장관. 사진 동아일보DB
1982年 11月 國會 豫決위에 參席한 김준성 副總理(오른쪽)와 노태우 內務長官. 寫眞 東亞日報DB




● 눈물과 빗물이 뒤섞인 開業式 날
1982年 7月 7日 마침내 新韓銀行이 門을 열었다.

341名의 在日僑胞 株主들이 資本金 250億원을 모아 만든 銀行이었다. 金融報國(金融報國), 새로운 韓國을 만든다는 一念으로 韓國 最初의 純粹 民間資本 銀行이 誕生한 것이다. 營業店 3個로 出發한 미니銀行이었다.

開店 當日 서울 明洞 코스모스百貨店 앞에서 在日僑胞 株主 200餘 名은 주룩주룩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면서 感激에 겨워했다. 玄海灘을 건너가 異國에서 주린 배를 달래며 指紋이 닳도록 궂은일도 도맡아 하면서 번 돈으로 母國에 銀行을 세운 것이다. 朴正熙 大統領 때 推進하던 事業이 政權이 바뀌어서야 成事될 수 있었다.

喜건은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훔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의 얼굴엔 빗물과 눈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다른 株主들도 마찬가지였다. 數十 年 만에 故國 땅 서울에서 銀行을 세우다니 感激의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1982년 7월 7일 신한은행 창립기념식. 서울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앞이다. 사진 나남
1982年 7月 7日 신한은행 創立記念式. 서울 明洞 코스모스百貨店 앞이다. 寫眞 羅南
“신한은행은 수많은 在日僑胞 企業人들이 主導해 이룩한 피와 땀의 結晶體입니다. 寤寐不忘 祖國에 對한 愛國忠情을 昇華한 産物입니다. 祖國의 經濟 開發에 對한 在日僑胞 參與 意志의 結集體입니다. 이제부터 신한은행을 大韓民國의 繁榮과 더불어 성장시켜 나가겠습니다!”

創立記念式에 마이크를 잡은 이희건 會長은 感激의 눈물과 함께 祖國의 繁榮에 寄與하는 新韓銀行의 成功을 다짐했다.

開店 첫날 鳴動 本店 營業部엔 立錐의 餘地가 없었다. 하루 訪問 顧客 數가 1萬7520名, 普通預金 178億원, 當座預金 76億원, 貯蓄預金 6億원, 創立記念 定期預金 95億원 等 5017個 計座에 357億 4800萬원이 몰렸다. 銀行 設立資本金의 1.5倍를 誘致한 史上 初有의 實績이었다.

● 鳴動 로얄호텔에서 파노라마에 잠기다
創立記念 祝賀宴을 끝내고 宿所인 鳴動 로얄호텔로 돌아온 喜건은 혼자 麥酒를 마시며 想念에 잠겼다. 房에 配達된 新聞에 新韓銀行 廣告가 실려 있었다.

이희건 회장은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평생 강조했다. 사진 나남
이희건 회장은 “勇氣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平生 强調했다. 寫眞 羅南
‘새싹의 꿈 키우는 新韓銀行’

‘저희 신한은행은 建國 後 最初의 純粹 民間資本으로 發足되는 全國 規模의 6番째 市中銀行입니다’

曺國에 銀行을 세우려고 東奔西走한 지난날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喜建議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갖고 있던 日本의 파친코 店鋪 3곳 中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을 賣却했다. 이 돈으로 銀行 認許可, 株主募集 說明會, 事務室 賃借料 等 諸般 費用을 댔다. 남에게 밥값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그의 性味는 銀行 準備 段階에서 如實히 드러났다. 雜多한 일로 出張을 다니면서 돈도 쓰고 발품度 팔아야 했다. 周邊에서 너무 일에 沒入하는 喜件을 挽留하기도 했지만 “戰爭에서 勝利하려면 長壽(將帥)가 最先鋒에서 銃대를 메고 두려움 없이 前進해야 한다”는 持論을 굽히지 않은 그였다.

막상 銀行 設立 認可를 받고 資本金을 내야 할 때가 되자 株主가 되겠다던 사람들의 相當數가 躊躇하기도 했다. 오사카와 도쿄 以外 地域에선 신한은행에 出資하겠다는 同胞들이 極히 드물었다고 한다. 半信半疑하는 雰圍氣도 澎湃했고, 設令 銀行이 設立되더라도 언제 亡할지 모른다는 疑懼心이 있었다. 모두 이희건 理事長을 믿고 巨額을 낸 것이었다. 喜건은 ‘株主들을 爲해서 粉骨碎身 하겠다’고 다짐했다.

● ‘勇氣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財物을 잃은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사람을 잃는 건 많이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勇氣를 잃는 것은 모든 걸 잃는 겁니다.”

“해보시오. 젊은 사람이 뭘 못하겠소? 責任은 내가 질 테니까 熱心히 해보시오”

“어느 한 사람도 疏忽히 對하지 마시오.”

“企業의 成長과 存亡은 千名(天命)에 달려 있고, 千名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企業에서 人心이란 從業員과 顧客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企業의 存亡은 從業員과 顧客에게 달려 있음을 銘心해야 합니다.”

이희건 會長이 生前 늘 强調한 말이다.

이 말에 그의 事業 理念이 잘 녹아 있다. 2001年 이 會長은 신한은행 會長에서 물러났다. 그가 日本에서 設立한 幹事이흥은이 破産 宣告를 받아 會長 자리에 머무는 것이 適切하지 않다고 判斷한 것이다. 신한은행에서 特別慰勞金으로 5億원을 주겠다고 했다. 限死코 辭讓했지만 通帳으로 入金됐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 돈을 대구사범 入試 때 만난 朴正熙 大統領의 記念事業會에 寄附했다.

이희건 회장은 재일교포들이 차별 받지 않고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1980년 일본 나라현에 KOMA컨트리클럽을 만들었다. 고려와 북녘 말 호마(胡馬)의 의미를 모두 담아 만든 이름이다. 골프장에서 ‘공수래공수거’라는 이 회장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사진 나남
이희건 會長은 在日僑胞들이 差別 받지 않고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1980年 日本 나라현에 KOMA컨트리클럽을 만들었다. 高麗와 北녘 말 胡馬(胡馬)의 意味를 모두 담아 만든 이름이다. 골프場에서 ‘空手來空手去’라는 李 會長의 人生哲學을 엿볼 수 있다. 寫眞 羅南
空手來空手去(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人生, 이희건은 子息들에게 財産을 넘겨주는 것은 自立 意志를 꺾을 뿐이라는 信念을 갖고 그대로 實踐했다.

● ‘子息은 大學 工夫 父母 돈으로 한 것으로 滿足해야’
“너희는 大學 工夫를 父母 돈으로 한 것으로 滿足해야 한다.”

喜건은 子息들에게 生前 이 말을 되뇌었다. 오래 前부터 遺産을 相續하지 않을 것이니 欲心 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고, 子息들은 不滿 없이 받아들였다.

2008年 10月 子息들을 包含한 많은 사람들의 支持로 ‘財團法人 이희건 韓日交流財團’이 出帆했다. 新韓銀行 保有 株式과 預金을 어디에 쓸까 苦悶하다가 自身을 낳아준 韓國과 길러준 日本에서 살았던 在日僑胞로서 두 나라가 더불어 돕고 서로 理解하기를 所望하는 바람에서 財團을 세웠다.

‘韓日關係의 밝은 未來’ ‘世界 公營에 이바지할 수 있는 디딤돌’

財團法人 이희건 韓日交流財團의 캐치프레이즈다.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은 2011년 3월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11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 오피니언면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재일교포 사회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명복을 기리며 추모했다. 캐리커쳐 최남진·동아일보DB
이희건 新韓銀行 名譽會長은 2011年 3月 94歲를 一期로 永眠했다. 2011年 3月 24日子 東亞日報 오피니언面의 <스포트라이트>에서 在日僑胞 社會의 求心點이었던 그의 冥福을 기리며 追慕했다. 캐리커쳐 최남진·동아일보DB
慶北 經産의 貧農에서 태어나 15歲 때 日本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한 無許可 市場에서 自轉車 타이어 장사를 始作한 喜件. 1955年 오사카 地域 在日僑胞 商工人들과 함께 오사카興은(大阪興銀)이라는 信用協同組合을 세웠고, 1974年엔 在日韓國人本國投資協會를 만들어 신한은행을 創立한 그는 平生을 ‘永遠한 革新家(permanent innovator)’로 活動했다.

88서울올림픽 때 在日僑胞로부터 100億 엔을 모아 韓國에 寄附했고, IMF 外換危機 때 달러가 不足하자 日本에서 ‘國內 送金하기 運動’을 主導했다.

2011年 3月 21日 그는 94歲 一期로 오사카에서 別世했다. 新韓銀行 株總이 끝나기 前에 自身의 訃告를 알리지 말라고 한 그는 只今 교토府 미나미야마시로村에 永眠해 있다.

그러나 故鄕 經産을 向한 그의 首丘初心(首丘初心)은 韓國과 日本에 오늘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1960년대 초반 이희건의 고향 마을 경산을 전경으로 찍은 사진을 토대로 그린 유화.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한일 교류와 모국 발전에 평생 동안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묘지는 일본 교토에 있지만 그는 항상 고향 경산을 바라보는 수구초심을 잊지 않았다. 사진 나남
1960年代 初盤 이희건의 故鄕 마을 經産을 全景으로 찍은 寫眞을 土臺로 그린 油畫. 그는 日本과 韓國을 오가며 韓日 交流와 母國 發展에 平生 동안 先驅者的 役割을 해왔다. 墓地는 日本 교토에 있지만 그는 恒常 故鄕 經産을 바라보는 首丘初心을 잊지 않았다. 寫眞 羅南



최영해 記者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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