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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訴 嗅覺 남달랐던 辯護士 李, 싸움의 감 뛰어났던 檢事 尹|週刊東亞

週刊東亞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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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訴 嗅覺 남달랐던 辯護士 李, 싸움의 감 뛰어났던 檢事 尹

[李在明-尹錫悅 미셀러니] 辯護士 李在明 vs 檢事 尹錫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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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정 記者

    friend@donga.com

    入力 2021-12-1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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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셀러니’는 主要 大選候補의 모든 것을 다루는 코너입니다.

    12월 9일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21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오른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 [동아DB]

    12月 9日 김대중 大統領 노벨平和賞 受賞 21周年 記念式에서 만난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오른쪽)와 國民의힘 尹錫悅 大選候補. [東亞DB]

    “二十 몇 年 前 城南 法廷에서 이렇게 자주 뵈던 분이에요.”(국민의힘 尹錫悅 大選候補)

    “보기는 봤을 텐데 저는 記憶이 없더라고요. 왜냐하면 刑事事件은 거의 안 했기 때문에….”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

    “아니, 그래도 이따금씩 (法廷에) 들어오셨어.”(윤 候補)

    11月 10日 한 포럼에서 大選候補 確定 後 처음 마주한 李在明, 尹錫悅 사이에 妙한 緊張感이 감돌았다. 周邊 웃음소리에 덮였지만, 같은 時節을 두고 “자주 봤다” “記憶이 없다”며 서로 다른 얘기가 交叉했다. “그 時節 檢事가 辯護士를 一一이 記憶하겠나. 尹錫悅이 그냥 빈말한 것” “人權辯護士라던 李在明이 刑事事件을 거의 안 했다는 것이 異常하다”는 評도 있다.



    李在明과 尹錫悅. 두 사람은 各各 司法硏修院 18·23期 出身 辯護士와 檢事로 오랫동안 活動했다. 李在明은 1989年 京畿 성남시에 辯護士 事務室을 열었고, 1990年代 後半 성남시민모임 共同執行委員長 等 市民運動에 參與했다. 尹錫悅은 30代 때 첫 林地인 大邱地方檢察廳(1994~1995)을 거쳐 春川地檢 江陵支廳(1996), 水原地檢 城南支廳(1997~1998)에서 勤務했다. 現在까지 城南 時節 두 사람의 接點은 明確히 確認되지 않는다. 궁금症은 自然스레 辯護士 李在明과 檢査 尹錫悅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로 흐른다.

    尹錫悅, 노루목에 딱 서 있었다

    1991년 사법시험 33회에 합격한 
윤석열 대선후보.[윤석열 후보 인스타그램]

    1991年 司法試驗 33回에 合格한 尹錫悅 大選候補.[尹錫悅 候補 인스타그램]

    “檢査 尹錫悅의 搜査 方式은 어땠느냐”는 質問에 尹錫悅을 잘 아는 이들은 “싸움의 감(感)과 想像力이 좋다”고 입을 모았다. 特殊部 檢事의 搜査 方式은 底引網式으로 흐르기 쉽다. 事案이 複雜하니 一旦 全方位的으로 壓迫해 搜査해보는 것이다.

    檢事 尹錫悅의 搜査 스타일은 노루목에 딱 서서 캐치하는 핀 포인트 式이었다고 한다. 平檢事 時節부터 特有의 搜査 感覺으로 注目받았다고도 한다. 한 檢察 幹部 出身 法曹人은 “누가 尹錫悅을 앉혀놓고 가르쳐 攄得하게 한 것 같지는 않다. 平檢事 때부터 感이 좋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檢事 出身 辯護士는 尹錫悅의 搜査 스타일에 對해 “被告人의 몇 가지 陳述만 듣고도 犯罪 얼개를 빠르게 알아챈다. 特히 돈 흐름을 正確히 把握한다”고 評했다.

    尹錫悅의 감과 想像力이 推測이 아닌 正確한 記憶力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高校·大學 時節 同窓生 사이에선 只今까지 尹錫悅의 記憶力이 膾炙된다. 말술(大學生 때 後輩들과 ‘술내기’에서 麥酒 3萬cc를 마셔 이겼다고 한다)이라 親舊들과 곧잘 술을 마시면서도 다음 날 누가 언제쯤 술자리에 오고 갔는지 또렷이 記憶했다는 式의 武勇談이다. 檢事 時節 尹錫悅과 함께 일한 法曹人은 “數年 동안 司法試驗을 工夫해 檢察에 들어오고 山더미 같은 搜査 資料를 檢討하는 이가 檢事 아닌가. 尹錫悅은 그中에서도 特出난 데가 있었다. 資料를 쓱 훑어보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그걸 다 記憶해 촘촘한 根據를 마련한다”고 回想했다.

    風采에서 오는 카리스마를 尹錫悅標 搜査 方式으로 꼽는 이도 있다. 搜査 對象과 氣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큰 風采(最近 한 放送社 藝能프로그램에서 “신장 178㎝, 體重 90㎏”이라고 밝힘)를 適切히 活用한다는 것. 그런데 카리스마는 搜査뿐 아니라 때로는 가까운 騎手의 같은 學校 出身 檢察 先輩들에게도 發揮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檢察에서 서울大 出身들의 關係는 課長을 보태면 콩가루다. 서울大 出身보다 數는 적지만 同門끼리 똘똘 뭉치는 高麗大·成均館大와 달리 凝集力이 弱한 便이다. 勿論 檢事는 硏修院 기수에 따라 序列이 整理되므로 大學 先後輩 關係는 어느 程度 형해화되게 마련이다. 先後輩를 봐도 데면데면한 서울大 出身 檢事 사이에서 尹錫悅은 異色的 存在였다고 한다. 尹錫悅의 平檢事 時節을 잘 아는 人士의 傳言이다.

    “尹錫悅이 平檢事 時節 술자리에 갔는데 서울大 後輩인 床石(選任) 檢事가 지나치게 거들먹거리며 ‘폼’을 잡았대요. 尹錫悅이 그를 ‘작살’내서 다음부터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웃음). 그렇다고 尹錫悅이 權威的인 사람은 아니에요. 大學 時節 動機(79學番) 못지않게 各別히 지낸 것도 83學番 後輩들이었어요.”

    機敏한 勝負師, 李在明

    1989년 사법연수원  18기 수료식에 참석한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이재명 후보 페이스북]

    1989年 司法硏修院 18期 修了式에 參席한 李在明 大選候補(왼쪽).[李在明 候補 페이스북]

    辯護士 李在明은 질 싸움은 안 하는 機敏한 勝負師였다. 推進力에 더해 選擇과 集中 戰略이 주된 武器. 批判者들은 ‘무대뽀’(莫無可奈)라고 貶毁하기도 하나 李在明의 싸움은 徹底한 準備로 始作된다. 城南地域에서 市民團體를 運營한 한 人士는 “우리 便은 勿論, 相對便이 무엇을 願하는지 正確히 把握해 競技에 臨하는 勝負師 氣質이 있었다”고 評價했다. 勝利할 事件을 빠르게 判斷하는 嗅覺度 남달랐다. 李在明의 中央大 動機로 辯護士 事務室 事務長 等을 맡았던 이영진 경기문화재단 經營本部長은 冊 ‘人間 李在明’에서 그의 辯論 스타일에 對해 이렇게 말했다.

    “質 事件은 안 하는 거죠. 질 게 분명한 걸 가지고 訴訟하려고 하면 하지 마라, 해도 진다, 時間과 돈만 날린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도 우리(李在明 勞動相談所) 말 안 듣고 氣分 나빠하며 다른 事務室 찾아가서 訴訟한 사람들, 어떻게 됐겠어요? 지고 나서야 後悔하며 우리한테 와서 그때 辯護士님 말 들을 걸 그랬다고 했죠.”

    李在明은 遲延·學緣에 比較的 招演했다. 只今도 地域 市民社會에선 그가 問題 提起한 城南地域 非理 事件을 두고 “判檢事도 줄줄이 連累됐는데 李在明이 硏修院 期數 따지며 눈치를 안 본 德에 끈질기게 追跡할 수 있었다”는 評價가 나온다. 그의 行跡에선 남과 다른 길을 가는 ‘아웃사이더’ 氣質이 엿보인다.

    1986年 第28回 司法試驗에 合格한 李在明은 司法硏修院 18基를 修了하고 1989年 城南市廳 隣近에 辯護士 事務室을 열었다. 開業에 必要한 費用 中 一部는 그가 恩師(檢定考試 工夫 無料 支援)로 꼽는 김창구 성일學院 院長이 志願했다고 한다. 當時 李在明의 硏修院 修了 成跡은 上位圈으로 判檢事 任用이 可能한 水準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司法試驗 合格(10月 23日) 直後인 1986年 10月 23日 ‘경인일보’에 실린 ‘“地域서 抑鬱한 사람 도울 터” 不遇克服 司法考試 合格한 李在明氏’ 題下 記事에서 李在明은 “앞으로 城南에서 辯護士 事務室을 열어 抑鬱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고 밝혔다.

    1990년대 시위에 참석한 이재명 대선후보(오른쪽). [이재명 후보 페이스북]

    1990年代 示威에 參席한 李在明 大選候補(오른쪽). [李在明 候補 페이스북]

    開業 初期 李在明이 主로 맡은 일은 勞動 및 學院 事件. 城南工團 勞動者와 경원대(現 嘉泉大, 京畿 성남시 所在), 韓國외대 龍仁캠퍼스(現 글로벌캠퍼스), 경희대 水原캠퍼스(現 國際캠퍼스, 京畿 용인시 素材) 運動圈 學生들이 그의 事務室 門을 두드렸다. 隣近 地域 勞動者들이 勞動 相談을 請하자 京畿 이천시에 光州·驪州·利川勞動相談所를 開設해 所長을 맡았다. 城南 辯護士 事務室을 市廳 앞에서 法院(수원지방법원 城南支院) 앞으로 옮긴 뒤 附設 勞動相談所度 새로 차렸다.

    1989年 컴퓨터 部品 組立業體 에프코아코리아 僞裝 廢業 等이 ‘勞動人權辯護士’ 李在明이 맡은 主要 事件이다. 분당新都市 建設 反對 運動에 參與한 이호승 全國撤去民協議會中央會 常任代表는 “1989年 集示法(集會 및 示威에 關한 法律) 違反 等으로 拘束돼 곤혹스럽던 내게 李在明 辯護士가 無料 辯論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그 點은 只今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政府, 그리고 아파트

    경기 성남시 백궁·정자 지구에 조성된 고층 아파트 단지. [동아DB]

    京畿 성남시 백궁·亭子 地區에 造成된 高層 아파트 團地. [東亞DB]

    人權辯護士를 自處하는 李在明에게 물음標도 따라붙는다. 交際 殺人犯이나 城南地域 組織暴力輩 國際마피아派 組織員을 辯護한 履歷이 입방아에 오른다. 陳重權 前 東洋代 敎授는 李在明의 過去事를 言及하면서 “自身의 바이오그래피(電氣·傳記)를 虛構 스토리로 誇張 或은 歪曲했던 것 같다”고 批判했다. 人權辯護士라는 表現을 두고도 “그 名稱은 都大體 누가 붙여준 건가. 이래서 제대로 된 才名學이 必要한 것”이라고 비꼬았다.

    李在明, 尹錫悅 共히 김대중(DJ) 政府와 妙한 因緣이 있다. 두 사람은 김대중 前 大統領에 對해 各各 “平生 彈壓받으면서도 民主主義, 人權을 위해 一生을 바쳤다”(이재명), “어떤 政治 報復도 않고 國民 統合을 이룩했다”(윤석열)며 “尊敬한다”고 입을 모은 바 있다(12월 9日 金 前 大統領 ‘노벨平和賞 受賞 21周年 記念式 및 學術會議’ 石像 發言).

    法曹人으로 두 사람은 DJ 政府의 恥部를 겨눈 事件을 契機로 注目받았다. 平檢事 時節 尹錫悅은 DJ 政府 警察 核心 人士의 受賂 事件을 맡았다. 李在明은 市民運動家로서 동교동系 人士들이 連累된 特惠 分讓 事件을 告發했다. 공교롭게도 두 事件 모두 ‘아파트’와 關聯됐다.

    평검사 시절 윤석열 대선후보의 수사로 박희원 당시 경찰청 정보국장(치안감)이 뇌물 수수 혐의를 자백했다. [MBC 캡처]

    平檢事 時節 尹錫悅 大選候補의 搜査로 朴希願 當時 警察廳 情報局長(治安監)李 賂物 收受 嫌疑를 自白했다. [MBC 캡처]

    檢査 生活 5年 次인 1999年 尹錫悅은 서울地檢(現 서울中央地檢) 特需2部로 赴任했다. 같은 해 5月 19日 尹錫悅은 박희원 當時 警察廳 情報局長(治安監)을 賂物 收受 嫌疑로 拘束起訴했다. 朴 前 治安監은 警察 搜査를 받던 한 아파트 管理業體로부터 搜査 撫摩 請託과 함께 2200萬 원을 받고 管轄 警察署長에게 外壓을 行使했다. 朴 前 治安監 事件은 여러모로 敏感했다. 湖南 出身인 朴 前 治安監은 김대중 政府 들어 乘勝長驅해 警察 情報를 總括하는 要職에 있었다. 當時 警察이 搜査權 獨立을 强하게 要求하고 나선 터라 섣부른 搜査는 자칫 檢察의 ‘警察 때리기’로 비칠 수 있었다.

    이렇듯 敏感한 事件에서 尹錫悅은 被告人으로부터 事實上 白旗 投降을 받아냈다. 檢察에 召喚된 1999年 5月 18日 朴 前 治安監은 嫌疑를 强力히 否認했으나 이튿날 午後 自白하고 令狀實質審査度 抛棄했다. 拘束 두 달 後인 7月 23日 서울地方法院은 朴 前 治安監에게 懲役 2年 6月과 追徵金 2200萬 원을 宣告했다. 搜査權 獨立 主張에 對한 標的 搜査라고 反撥하던 警察도 “아파트 管理費 一齊 搜査 對象에서 大型業體만 빠진 點이 殊常해 調査에 나섰다가 朴 前 治安監 嫌疑를 偶然히 確認한 것”이라는 檢察 側 主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李在明은 2000年 ‘백궁·亭子地區 用途 變更 特惠 疑惑’, 2002年 ‘분당 파크뷰 아파트 特惠 分讓 疑惑’을 提起하며 注目받았다. 1995年 3月 發足한 성남시민모임 創立 멤버로 實務責任者를 맡았을 때다. 當時 두 疑惑의 줄기는 하나였다. 小規模 建設業體를 運營하던 洪某 氏가 분당線 백궁役(現 精子役) 隣近 商業用紙 13萬2231㎡(4萬 坪)를 住商複合地로 用途 變更하고(백궁·정자지구 用途 變更 特惠 疑惑) 該當 敷地에 建設한 아파트를 高位 公職者에게 特惠 分讓(분당 파크뷰 아파트 特惠 分讓 疑惑)했다는 것. 金大中 前 大統領 祕書 出身으로 동교동系 實勢인 K 前 議員을 비롯해 檢察 高位 關係者, 城南市長 및 市議會 議員들이 特惠 用途 變更 및 分讓에 連累됐다. 自敍傳 ‘李在明은 합니다’에서 李在明은 “나는 이 事業(파크뷰 開發 및 分讓)이야말로 事業者에게 特惠를 준 事件이라고 判斷했다”고 밝혔다.

    이때 李在明과 성남시민모임 側 批判은 김병량 當時 城南市長(새천년민주당 所屬, 2015年 別世)에 集中됐다. “特惠 分讓은 곁가지일 뿐이며 疑惑의 몸통은 파크뷰 아파트가 들어설 백궁·亭子地區 用途 變更 特惠 疑惑”이라며 認許可權을 쥔 金 前 市場을 겨눈 것. 2007年 金 前 市長은 大法院에서 第3者 賂物收受 嫌疑로 懲役 1年, 執行猶豫 2年이 確定됐다. K 前 議員의 疑惑은 當時 檢察이 搜査 本流가 아니라고 規定해 흐지부지됐다.

    두 사람의 거침없는 行步는 論難을 일으키기도 했다.

    尹錫悅은 自他公人 特殊通 檢事다. 2004年 安熙正 前 忠南道知事, 강금원 前 창신纖維 會長(2012年 別世)의 政治資金法 違反 嫌疑 搜査(大檢察廳 中央搜査部 硏究官), 2006年 現代自動車 祕資金 事件 搜査(議政府地檢 高陽支廳 副部長檢事) 等을 맡으며 檢察 內 特殊通으로 成長했다.

    “特殊통 中心으로 檢察 私兵化”

    2013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서울고등검찰청 국정감사에 출석한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 [동아DB]

    2013年 國會 法制司法委員會 서울高等檢察廳 國政監査에 出席한 尹錫悅 當時 驪州支廳長. [東亞DB]

    尹錫悅은 2007年 大檢 檢察硏究官 時節 이른바 ‘BBK 株價造作 事件’ 特檢(한나라당 大統領候補 李明博의 株價造作 等 犯罪嫌疑의 眞相糾明을 위한 特別檢事)팀에 派遣됐다. 當時 鄭鎬瑛 特別檢事(서울高等法院長 歷任)가 이끄는 特檢팀은 李明博 前 大統領의 兄 이상호 氏가 代表로 있던 自動車 部品業體 다스에서 120億 원이 流出되는 等 祕資金 造成 疑惑이 있음에도 이를 20代 經理職員의 個人 非理로 規定해 不實搜査 疑惑을 낳았다. 2018年 鄭 前 特檢은 犯罪 嫌疑를 發見하고도 默認한 嫌疑(‘特定犯罪 加重處罰 等에 關한 法律’(特定犯罪加重處罰法)上 特需職務遺棄)로 檢察 搜査를 받았고 無嫌疑 處分이 났다. 지난해 大法院은 特定犯罪加重處罰法上 賂物 等 嫌疑로 起訴된 이 前 大統領에 對해 懲役 17年·罰金 130億 원·追徵金 57億8000萬 원을 宣告했다. 事實上 이 前 大統領을 다스 實所有主로 認定한 것이다.

    尹錫悅은 當時 特檢팀에 派遣된 現職 檢事 10名 中 選任級(硏修院 氣受賞 세 番째)이었다. 서초동 한 辯護士는 “特別檢事, 特別檢事補 等이 있으나 派遣된 現職 檢事들 能力이 特檢팀 實際 搜査 結果에 影響을 크게 미친다. 當時 BBK 株價造作 事件 特檢이 不實搜査였다고 斷定할 수 없지만 아쉬운 點은 分明히 있었다”고 指摘했다.

    尹錫悅 人生의 터닝 포인트가 된 朴槿惠 政府 國政壟斷 事件 搜査도 뒷말을 남겼다. ‘示範 케이스’로 걸린 企業에 搜査를 集中했다는 見解가 있다. 尹錫悅은 2017年 朴槿惠 政府의 최순실 等 民間人에 依한 國政壟斷 疑惑 事件 糾明을 위한 特別檢事팀 搜査팀長으로서 李在鎔 三星電子 副會長을 賂物供與 嫌疑 等으로 拘束起訴했다. 法院이 拘束令狀을 棄却하자 令狀을 다시 請求할 만큼 剛한 搜査 意志를 보였다. 國政壟斷에 連累된 다른 大企業에 비해 三星 搜査에 唯獨 集中하는 模樣새였다.

    尹錫悅의 서울中央地檢長·檢察總長 在任 時節 檢察 搜査 方向과 組織 運營에 對한 批判도 있다. “以前 政權에 對한 이른바 積弊搜査 過程에서 職權濫用罪·權利行使妨害罪 嫌疑를 無理하게 適用했다” “人事 및 組織 運營에서 特殊通에 지나친 힘을 附與했다”는 것이 뼈대다. 한 法曹人은 “檢察總長 尹錫悅의 人士는 自身과 가까운 特殊通 中心으로 檢察을 私兵化하는 것이었다. 現 政府가 露骨的으로 檢察 搜査에 介入하는 것이 더 큰 問題였기에 잘 浮刻되지 않았을 뿐, 特殊通 中心 人事도 深刻한 病弊”라고 짚었다. 檢察 高位職을 지낸 한 人士는 “職權濫用罪·權利行使妨害罪는 事實上 死文化된 條項이었다. 그런데 文在寅 政府 들어 尹錫悅號(號) 檢察이 앞장서 以前 政權 高位 人士를 起訴하는 데 ‘轉嫁의 報道’처럼 積極 活用했다. 이런 式이면 公職者가 政權交替 後 報復이 두려워 正常的으로 勤務할 수 있겠나. 잘못된 先例를 남긴 셈”이라고 指摘했다.

    “手段, 方法 가리지 않는다”

    1990년대 변호사로 일한 이재명 대선후보. [이재명 후보 페이스북]

    1990年代 辯護士로 일한 李在明 大選候補. [李在明 候補 페이스북]

    李在明이 자랑하는 ‘推進力’ 裏面에는 手段, 方法을 가리지 않는다는 批判이 따라붙는다. 自身이 생각하는 正義를 위한다는 理由로 不法도 서슴지 않았다. 파크뷰 아파트 特惠 分讓 疑惑을 取材하던 한 放送社 PD가 김병량 前 市長과 通話하면서 現職 檢事를 詐稱하고 該當 對話 內容을 放送에서 내보냈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李在明도 錄取 파일을 받아 記者會見場에서 公開했다. 2003年 法院은 公務員資格 詐稱 等 嫌疑로 起訴된 李在明과 PD에게 各各 罰金 150萬 원과 500萬 원을 宣告했다. 李在明은 抗訴하지 않아 罰金刑이 確定됐고 PD는 抗訴 結果 宣告猶豫를 받았다. 이에 對한 言及이 ‘人間 李在明’에 나온다.

    “몇 年間 李在明과 성남시민모임이 土建業者와 政官界, 法曹界, 言論界가 網羅된 土建 마피아들과 싸운 臺가 앞에서 李在明은 또 한 番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다. 파크뷰 特惠 分讓 事件의 몸통을 끝까지 파고들지 않았다면 李在明은 懷柔와 脅迫을 當하지 않았을 것이다. 陰害와 攻擊을 當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前科者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前科者가 되지 않았으면 土建 마피아의 實體는 永遠히 水面 위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名分을 앞세워 脾胃를 正當化한다는 批判도 있다. 代表的인 것이 飮酒運轉 解明이다. 2004年 李在明은 집에서 隣近 公園 앞까지 免許取消 水準인 血中알코올濃度 0.158% 漫醉 狀態로 車를 몰다 摘發돼 罰金 150萬 원을 宣告받았다. 飮酒運轉에 對해 “뉘우친다”면서도 “2005年 이대엽 前 城南市長의 農協 不正貸出 事件을 報道했다 告訴當한 言論社 記者를 無料 辯論하던 中 벌어진 일”이라고 解明했다. 現在까지 辯論과 飮酒運轉이 어떤 關係인지 明確히 밝힌 바는 없다.

    前科者가 되면서까지 都市開發 疑惑을 追跡했다는 李在明. 그런 그가 大庄洞 開發 疑惑에 휘말린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호승 常任代表는 “백궁·亭子地區 用途 變更 特惠 疑惑 眞相을 糾明한 李在明이 大庄洞 開發에 連累된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李在明은 ‘抑强扶弱(抑?扶弱)’을 이야기했으면서도 大庄洞 開發 過程에서 賃貸아파트 比重을 줄이는 等 住居 脆弱階層을 챙기지 않았다. 이番 大庄洞 게이트로 수많은 無住宅者와 撤去民은 큰 傷處를 입었다. 백궁·亭子地區 開發을 둘러싼 疑惑을 파헤쳤던 그다. 大庄洞 開發 問題를 누구보다 잘 把握하지 않았겠나. 李在明이 더 眞實性 있게 謝過해야 한다.”



    김우정 기자

    김우정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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