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뭘 말해도 될지 共産黨이 定한다” 시진핑 ‘마오쩌둥式’ 思想統制|週刊東亞

週刊東亞 1312

..

“뭘 말해도 될지 共産黨이 定한다” 시진핑 ‘마오쩌둥式’ 思想統制

[조경란의 21世紀 中國] “改革·開放 以前 中國 社會主義가 悲劇이라면 그 뒤는 喜劇”

  • 조경란 연세대 國學硏究院 硏究敎授

    入力 2021-11-02 10: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뉴시스]

    시진핑 中國 國家主席. [AP=뉴시스]

    中國 시진핑(習近平) 政府의 思想統制가 갈수록 深化하고 있다. 中國 內 學者들이 冊을 出刊하거나 雜誌에 글을 싣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있다. 學術會議가 갑자기 取消되는 일도 적잖다. 시진핑 國家主席 執權 後 中國 知識人의 現實을 보면 過去 마오쩌둥(毛澤東) 時代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美國의 中國 硏究者 로드릭 맥파커 하버드대 敎授는 “시진핑 政府는 엄청난 速度로 過去를 向해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指摘한 바 있다. 마오 時代의 制度와 價値가 오늘날 中國에서 復元되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速度로 過去 回歸”

    2013年 中國共産黨은 政府 機關과 大學에 自國民이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일곱 가지(七不講)’와 ‘말해도 되는 것 열두 가지(十二語)’를 規定해 下達했다. △普遍的 價値 △報道의 自由 △市民社會 △市民의 權利 △共産黨의 歷史的 過誤 △特權 貴族의 資産階級 △司法 獨立이 7불江(不講)이다. 芙江, 民主, 文明, 和解, 自由, 平等, 公正, 法治, 愛國, 경업(敬業), 성신(誠信), 鮮于(友善)는 12어(語)에 該當한다. 앞선 일곱 가지 槪念은 中國 共産主義 價値觀과 配置되기에 統制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思想統制가 强化되는 것은 共産黨의 危機意識이 얼마나 剛한지 傍證하는 것이기도 하다. 最近 中國 動向을 보면 脈파커 敎授의 말이 漸漸 現實化하는 것 같다.

    이처럼 思想의 自由가 威脅받는 時期, 中華人民共和國 成立 後 中國 知識人은 어떤 方式으로 存在했는지 궁금해진다. 궁금症을 풀려면 20世紀 100年 동안 中國 知識人의 起源과 存在 樣態를 通時的으로 眺望할 必要가 있다. 오늘날 中國 知識人의 前身이라고 할 死因(士人) 階層이 形成된 것은 春秋전국時代다. 氏族社會가 무너지는 激變期에 身分 아닌 實力으로 立身하려는 사인이 하나의 階層으로 자리 잡았다. 春秋時代 孔子는 知識人의 標準으로 君子(君子)를 提示했다. 死因 階層은 陳·한나라 때 權力과 本格的으로 連繫됐고, 唐나라 때 科擧制度가 施行되면서 制度的으로 存在를 保障받았다. 權力과 私人의 蜜月은 近代에 접어들면서 깨지기 始作했다. 淸나라 末期 科擧制度가 廢止되자 死因 階層의 身分이 不安해진 것. 마오쩌둥은 國家와 知識人의 關係를 가죽과 털의 關係에 比喩했다. 國家가 施行하던 過去制度(가죽)가 사라지자 털(知識人)李 붙어 있을 곳을 喪失했다는 것이다. 마오의 指摘은 1905年 科擧制가 廢止된 後 ‘流動하는 知識人(遊魂)’의 地位를 잘 說明한다.

    20世紀 中國은 激變을 거듭했다. 1895年 淸日戰爭 敗北, 1911年 辛亥革命, 1916年 新文化運動(廣義의 5·4運動)이 있었고 1949年 中華人民共和國 誕生 後에도 1978年 始作된 改革·開放, 1989年 톈안문 事態 等 굵직한 事件이 이어졌다. 그사이 中國 知識人의 運命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格으로 흔들렸다. 淸日戰爭 敗戰 後 中華帝國 解體는 死因 階層에 前例 없는 衝擊이었다. 出世 關門인 科擧制 廢止로 中央·地方權力 構造에 進入하는 길이 事實上 막혀버린 것이다. 知識人들은 이제 出世를 위해선 海外 留學을 떠나야 했다. 過去 工夫의 必須 科目이던 八股文(八股文) 代身 近代 學問의 洗禮를 받아야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 1900年代 한때 日本 內 中國人 留學生 數가 1萬 名에 肉薄할 程度였다.

    새로운 知識인 수가 많다 보니 이들의 要求를 어떻게 處理하느냐가 當時 中國 政治의 關鍵이었다. 1912~1917年 550萬 名假量이 新式 學堂에 다니거나 卒業했다. 5·4運動(1919)李 일어났을 때 新式 敎育을 받은 사람은 1000萬 名에 達했다. 新敎育을 받은 知識人 集團은 傳統 社會의 形態가 持續되는 限 權力 中心으로 進入할 수 없었다. 이런 狀況에서 新知識人 集團이 儒家倫理를 批判하고자 新文化運動을 일으킨 것은 不可避한 選擇이었을 것이다. 勿論 新文化運動을 一部 留學派 知識人의 出世慾으로만 置簿해선 안 된다. 共和制를 내건 辛亥革命으로 王政은 廢止됐으나 傳統社會 新券(紳權: 벼슬아치(紳)로서 知識人의 權威)意識의 基礎인 儒家倫理는 그대로였다. 그런 點에서 新文化運動은 王政 廢止라는 世界史 패러다임에서 出現한 하나의 文化 現象으로 볼 必要가 있다. 그 過程에서 大衆의 出現과 社會 變化를 둘러싼 思想 論爭은 中國 死因 階層을 近代的 知識人으로 變化시킨 重要한 契機였다.



    2015년 보도의 자유 등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일곱 가지(七不講)’를 규정한 중국공산당 ‘9호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언론인 가오위(高瑜). [동아DB]

    2015年 報道의 自由 等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일곱 가지(七不講)’를 規定한 中國共産黨 ‘9號 文件’을 流出한 嫌疑로 懲役刑을 宣告받은 言論인 街五衛(高瑜). [東亞DB]

    짧은 ‘自由主義 黃金期’

    留學派 知識人들은 自身의 經驗을 中國 社會에 傳播하고자 努力했다. 日本 侵略에 對應하려고 만든 雜誌 ‘獨立評論’은 1930年代 中國에서 相當한 影響力을 行使했다. 寄稿者 25名 中 美國(22名), 프랑스(1名), 英國(1名) 留學派가 多數였고 베이징大 出身이 1名 있었다. 1940年代를 風靡한 週刊誌 ‘觀察’의 寄稿者 79名을 살펴봐도 그中 56名이 口味權에 留學을 다녀왔다. 先進 資本主義 社會의 자유스러운 雰圍氣를 經驗한 知識人들이 言論의 主軸이었던 것이다. 흔히 1945年 第2次 世界大戰 終戰 後 1949年 人民共和國이 誕生하기까지 짧은 時期를 中國 自由主義의 ‘最後의 絶唱(絶唱)’이라고 한다. 中國에 自由主義가 流入된 以來 知識人이 自己 목소리를 가장 確實히 낼 수 있었던 時期다. 짧지만 ‘自由主義 黃金期’였던 것이다. 勿論 中國 自由主義 主流는 社會民主主義的 傾向을 띠고 있었다. 英國 勞動黨 이데올로그 해럴드 래스키의 影響을 받은 知識人이 적잖았다.

    科擧制 廢止 後에도 知識人 腦裏에는 옛 私人의 態度가 남아 있었다. ‘官職에 오르는 것이 讀書의 目的’이라는 공자식 政治觀이 刻印된 탓에 意識이 存在 變化를 따라가지 못하는 形局이었다. 그 때문에 西洋 留學을 다녀온 知識人조차 純粹한 ‘學術社會’를 만드는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1930年代부터 留學派를 中心으로 知識인 位相을 새롭게 確立하려는 試圖가 있었다. 그럼에도 知識人의 숨은 目標는 如前히 政治權力 上層部로 통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如前히 心理 底邊에 學問 自體보다 出世가 더 重要한 動因으로 作用했다. 新知識을 吸收한 이조차 傳統的 士大夫 階層의 曖昧한 役割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勿論 知識人의 社會 參與에는 順機能도 있었다. 19世紀 末부터 20世紀 中盤까지 中國 知識人은 파워엘리트와 함께 國家 運營과 未來 構想에 積極 介入했다. 歷史 先頭에서 中國의 變化를 이끈 主役이 바로 士人에서 近代的 知識人으로 轉換하던 識者層이었다. 日本의 侵略으로 內憂外患을 겪은 1930年代 中國 知識人은 8·1宣言 等 集團行動으로 國民黨을 抗日運動에 參與케 하기도 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우파(右派)’로 지목돼 조리돌림을 당하는 칭화대 교수. [동아DB]

    中國 文化大革命 當時 ‘右派(右派)’로 指目돼 조리돌림을 當하는 칭화대 敎授. [東亞DB]

    “悲劇 이은 喜劇”

    그렇다면 1949年 中華人民共和國 誕生 後 知識人의 運命은 어땠을까. 1930~1940年代 知識人들은 未來 中國이 美國式 政治와 蘇聯式 經濟모델을 採擇해야 한다고 봤다. 人民共和國 成立 後 마오쩌둥이 構築한 社會主義體制와는 全혀 다른 모델이었다. 1940年 中國共産黨이 提示한 ‘新民主主義論’ ‘聯合政府論’에는 共産黨이 知識人과 協力해 國家를 運營한다는 一見 魅力的인 內容이 있었다. 當代 知識人들이 共産黨이 統治하는 未來에 적잖은 期待를 했던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中華人民共和國 成立은 結果的으로 科擧制 廢止만큼 知識人들에게 衝擊的 事件이 됐다. 社會主義體制가 導入되고 30年 동안 中國 知識人은 共産黨과 大衆 사이에서 完全히 排除됐다. 마오쩌둥은 人民과 直接 만나고자 했다. 爲政者와 一般 大衆 사이에서 求心點 役割을 하던 傳統的 知識人의 役割이 사라진 것이다. 中國 士大夫는 옛 王朝가 끝나고 새 王朝가 들어설 때 國家 設計 段階부터 參與하는 主體였다. 中國 歷史에서 知識人이 이토록 박대받은 것은 秦나라 焚書坑儒 以後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中國 小說가 위化(余華)는 小說 ‘兄弟’(2005) 序文에서 “改革·開放 以前 中國 社會主義가 悲劇이라면 그 뒤는 喜劇”이라고 表現한 적이 있다. 悲劇이 喜劇을 낳았다는 意味다. 過去 政治權力이 모든 것을 左右했다면 이제 資本權力까지 加勢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金權 威力까지 더해져 中國共産黨의 知識人 統制가 갈수록 수월해지는 것 아닌지 憂慮된다.

    조경란은… 연세대 國學硏究院 硏究敎授, 國務總理室 傘下 經濟人文社會硏究會 人文政策特別委員會 委員. 中國現代思想 · 東아시아 思想 專攻. 홍콩中文臺 房文學者 · 베이징大 人文社會科學硏究院 招聘敎授 歷任. 著書로는 ‘現代 中國 知識人 指導 : 新左派·自由主義 · 新儒家’ ‘20世紀 中國 知識의 誕生 : 傳統 · 近代 · 革命으로 본 라이벌 思想家’ ‘國家, 遊學, 知識人 : 現代 中國의 保守主義와 民族主義’ 等이 있다.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