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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 1950年 9月 30日
大韓民國
全羅南道
광산군
臨哭면
신룡리 天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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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
| 1980年 5月 27日
(
1980-05-27
)
(29歲)
大韓民國 全羅南道 光州市 東區 광산동
全南道廳
民願室 2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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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因
| 戒嚴軍의 銃에 銃殺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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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別
| 男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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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 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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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
| 勞動運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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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尹祥源,
1950年
9月 30日
-
1980年
5月 27日
)은
大韓民國
의 勞動運動家로
5·18 光州 民主化 運動
當時 市民軍으로서 活躍했다. 어렸을 적 이름은 윤개원이었다.
1950年
9月 30日
全羅南道
광산군
에서 태어나
臨哭國民學校
,
光州북성중學校
,
살레시오高等學校
,
1978年
전남대학교
政治外交學科를 卒業했고,
1979年
에
들불夜學
1期에 一般 社會를 가르치며 參與했다.
1980年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이 發生하자, 처음에는 綠豆書店을 根據地로 火焰甁을 製作하여 供給할 뿐 表面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김칭길의 學生收拾委員會가 武器를 返納하고 평화롭게 狀況을 收拾하려고 하자, 윤상원은 박남선等을 불러 金창길을 排除하고 學生收拾委員會를 改編, '民主鬪爭委員會’의 代辯人과 光州市民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鬪士會報〉의 發行人으로 活動하였다. 26日 午後 6時, 武器를 返納하자는 穩健的인 意見이 다시 나오자, 윤상원과 박남선은 拳銃을 뽑아들고 恐怖를 發射하며 '武器 返納하는 놈이나 投降하는 놈은 죽여버리겠다'고 威脅하였다. 武器 返納을 主張하던 穩健派는 結局 밤 9時頃 모두 道廳을 빠져 나온다. 尹上院 等은,
5月 27日
全南道廳 本館
2層 民願室에서 戒嚴軍의 銃에 맞아 死亡했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刺傷', '畫像', '總狀'이라는 엇갈린 見解가 있었지만, 目擊者들의 證言을 土臺로 銃傷으로 밝혀졌다. 抗爭指導部 企劃室長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힌 뒤 催淚彈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눕혀져 있던 윤상원에게 떨어지면서 윤상원의 屍身에 火傷 痕跡이 남게 됐다.
[1]
1978年
12月 26日
에 死亡한 勞動運動家
박기순
과 靈魂結婚式을 치렀고, 이를 모티브로 한
백기완
의 詩 〈묏비나리〉가 노래 〈
임을 爲한 行進曲
〉으로 만들어졌다.
윤상원을 演技한 俳優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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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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