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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年 9月
)
|
배정자
(
韓國 漢字
:
裵貞子,
日本式 이름:
田山貞子(
다야마 사다코
),
1870年
2月 23日
[2]
[3]
~
1952年
2月 27日
)는
朝鮮
의
比丘尼
利子
日本 帝國
의
朝鮮
情報員, 外交官, 賣國奴이다. 生父가 閔氏 一派에게 처형당한 뒤
連坐法
에 依해 官婢가 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密陽
의 妓生으로 팔려갔으나 脫出, 1882年(高宗 19年) 女僧이 되었다.
1885年 日本으로 逃避하여 1887年
이토 히로부미
의 養女가 되었다는 說이 있다. 그 後
日本
政府로부터 密偵 敎育을 받고 1894年 歸國하여
大韓帝國
과
日帝强占期
에
日本
의 密偵으로 活動했으나 이를 立證할 史料는 없다.
1920年
日本軍의 시베리아 出兵 때는 滿洲, 시베리아를 오가며 軍事 스파이로 活躍했다. 그 後
肝도
,
상하이
等地에서 獨立運動家들의 逮捕를 위해 暗躍하다가 1927年 隱退했다. 1949年 反民族 行爲 特別 調査 委員會에 親日 反逆者로 逮捕되었다.
本貫은
金海
이며,
慶尙南道
金海郡
出身이다. 本名은
배분남
(裵紛男, 裵紛南)이다.
日帝强占期
時代 映畫인
배구자
의 고某이다. 映畫人
이철
은 그女의 딸
현송자
에게 두 番째 男便이 된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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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涯 初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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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遇한 初年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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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南道
金海
出生으로, 本名은 배분남(裵粉男)이다.
[3]
[4]
1870年
金海 고을에서 衙前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3]
아버지 배지홍은 稅務管理를 歷任했으나 閔氏 政權에 反對하다가
1873年
흥선大院君
이 失脚한 後 그 卒當(卒黨)으로 몰려
大邱
監營에 收監되었다가 死刑당하였다.
[3]
어머니는 衝擊으로 視覺障礙人이 되어 어려운 環境에서 자랐다.
[3]
[4]
以後 緣坐制에 依해 罪跡(罪籍)에 올라 賤民이 되어 어머니를 따라 各地를 流浪하였다.
以後
慶尙南道
密陽
에
妓生
으로 팔려갔으나, 逃走하여
梁山郡
通度寺로 隱身하였다.
[3]
1882年
出家하여 僧侶가 되었다. 12살 때 우담(?潭)이라는 僧名으로 女僧으로 活動하며 3年間 修道生活을 하였다. 以後 正體가 綻露나 手配되자 14살 때 도망쳐서, 아버지와 親分 關係가 있던
東萊
府使 정병화(鄭秉和)의 保護를 받았다
[4]
라는 說이 있으나 歷代 東來府使 中 정병화라는 이름은 없으며 비슷한 이로 鄭炳昰(鄭秉夏)가 있지만 그는 東來府使를 歷任한 적이 單 한 番도 없고 地方 管理職은 1888年 密陽府使가 처음이다.
官妓로 있을 때 大邱 中軍(中軍) 前導後(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의 道一路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日本으로 留學을 오면서 再會, 結婚을 하였다. 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아들 煎油花(田有和)를 두었다. 그러나 게이오 義塾(慶應義塾)에 在學 中이던 전재식이 病死하자 두 사람의 因緣은 끝이 났다.
[3]
도일과 이토 히로부미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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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密陽府使로 前任한 鄭炳昰(鄭秉夏)의 周旋으로
1885年
貿易商 마츠誤(松尾)를 따라
日本
으로 건너갔는데
[5]
, 이때 人脈을 통해
안경수
를 만나게 되었다. 當時
甲申政變
과 直接關聯이 없었던
안경수
는 오카야먀(岡山縣) 伊藤博文(伊藤博文)집 舍廊채에 食率로 머물면서 紡績(織造技術)에 關한 自費留學 生活中이던 안경수는 배정자에게 도움을 주게되었다. 배정자는 霜降(尙綱) 女學校를 다녔다.
安駉壽의 周旋으로
김옥균
을 만나 알게 되었고
[3]
이토 히로부미
와도 만나게 되었다. 以後
안경수
,
김옥균
等에게 依託하다가 美貌가 빼어났다고 傳해지는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
의 눈에 들어
1887年
그의 收養딸이 되었고, 18살 때부터 乘馬와 水泳, 射擊, 變裝術 等 間諜로서의 密封敎育을 받았다는 說이 있지만 日本 쪽 史料에서는 배정자에 對한 그 어떤 記錄도 없다.
이토 히로부미
와 배정자에 對한 關係 및 逸話는 全部 韓國 쪽에서만 나오는 얘기들이다.
日本 諜報員, 日本 官吏 活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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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諜報員 活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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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다코(貞子)로 改名하고 徹底한 情報員 敎育을 받은 뒤 배정자는
1894年
스파이 任務를 띠고 日本語 通譯 名目으로 歸國하여 身分을 숨기고
高宗
에게 接近하여, 高宗의 寵愛를 받으며 以後 政治 情報를 빼내는 等 高級 密偵으로 活動했다.
러일戰爭
直前 親러派가 高宗의 身邊安全을 위해 平壤 遷都(遷都) 或은 高宗의 블라디보스토크 薦擧(遷居) 計劃을 세웠으나 배정자가 情報를 事前에 빼내어 日本 公使館에 傳達함으로써 失敗한다.
[3]
1895年 日本 帝國 公使館의 朝鮮語 敎師였던 현영운(玄暎運)
[6]
과 再婚했다.
1895年
當時 外部(外部) 飜譯官 兼 主任官 6等이던
현영운
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年 만에 種2品 陸軍 參將으로 昇進하고, 農工上部 協辦을 지냈다.
[3]
그러나 배정자는 約 1年 後 離婚하였으며, 현영운에게서 딸
현송자
等을 얻었다. 그러고는 현영운의 後輩인 박영철(朴榮喆. 日本陸士 15期 卒業. 咸北道知事. 中樞院參議 歷任)과 5年 間 結婚生活을 維持하다 또 離婚하였다.
[3]
1905年
이토 히로부미
의 密書를 高宗에게 傳達한 密書 事件으로
絶影島
에 流配되기도 했다
[7]
. 그러나
乙巳條約
이 締結되고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漢城判尹(現 서울市長)으로, 동생은 警務監督官(現 警察廳長)으로 昇進하였다. 이토가 招待
統監府
痛感으로 赴任하자 풀려나 다시 密偵으로 復歸했다. 그는 이토의 養女가 아닌 愛妾이라는 所聞이 돌았을 程度로 寵愛를 받았기에 이 時期에 莫强한 權力者로 行世하였고, ‘黑치마’라는 別名으로 불렸다.
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 官僚 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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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年
安重根
에게 이토가 射殺된 以後로는 朝鮮 駐屯 日本軍의 憲兵隊 朝鮮人 囑託,
日本 帝國
外務部 公務員 等으로 勤務했다.
1918年
10月부터
1919年
10月 29日
까지
滿洲
하얼빈 駐在 日本總領事館 職員으로 活動했다.
1920年
에는
朝鮮總督府
가
滿洲
地域에 設立한 諜報 團體
滿洲보민회
에 加入해서 活動했고,
1920年
日本軍의 시베리아 出兵 때는 奉天(奉天)
日本 帝國
總領事館(總領事館) 職員으로 滿洲, 시베리아를 오가며 軍事 스파이로 活躍했다. 이 期間 中 馬賊團(馬賊團) 單元의 包攝에 卓越한 솜씨를 보였다 한다.
그 後
肝도
,
상하이
等地에서 獨立運動家들의 逮捕를 위해 暗躍하다가 다시 國內로 돌아와
1922年
부터 總督府 警務局의 囑託으로 勤務했다. 滿洲地域에서의 猛活躍으로 獨立鬪士 陣營에서 배정자를 處斷對象者로 指目하자 1922年 그는 身邊에 威脅을 느껴 朝鮮으로 돌아왔다.
[3]
朝鮮總督府에서는 警務局長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歸國을 기다리고 있다가 警務局 公務院으로 다시 雇用하였다.
[3]
그 뒤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마루야마 쓰루旗幟(丸山鶴吉)의 指令을 받아 滿洲,
肝도
,
상하이
, 中國 本土 等을 오가며 活動하였으며, 當代 親日派 및 日本人의 두려움의 對象이었던
박희광
(朴喜光, 1901年2月15日~ 1970年1月22日 大韓統義府 祕密暗殺團)의 暗殺 試圖로 威脅을 느끼며 지내다
1927年
隱退하였다.
나중에 그는 總督府로부터 그間의 功勞를 認定받아 6百餘 坪의 土地를 贈與받기도 했는데, 隱退한 뒤에도 總督府로부터 月給을 받으며 지냈다.
[3]
太平洋 戰爭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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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平洋戰爭이 勃發하자 그는 民間業者의 付託을 받고 日本軍 慰安婦 送出業務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代의 老軀에도 不拘하고 朝鮮人 女性 1百餘 名을 '軍人慰問袋'라는 이름으로 南洋群島까지
朝鮮
인 女性들을 데리고 가서
日本
君의 慰安婦 노릇을 할 것을 强要하였다. 이 過程에서 業者로부터 金品을 받기도 했다.
[3]
光復 以後
[
編輯
]
光復 以後 景氣도 高陽郡 숭인면의 野山에 숨어 살다가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 뒤,
反民族行爲處罰法
이 發效되고
1949年
反民特委(反民特委)가 構成되자 特委에 依해
1949年
배정자도 逮捕, 拘束되었다. 反民法에 따라 拘束된 女性은 모두 6名에 不過했는데, 배정자는 이들 中 가장 먼저 拘束된 사람이다. 그는 日本 政府와 謀議하여 韓日合邦에 積極 協力한 者를 處罰하는 反民法 第1條에 依해 最初로 拘束된 人物이기도 했다. 그러나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가 政治的 理由로 解散되면서 出獄하였다. 以後,
京畿道
高陽郡
숭인면(現在의
서울特別市
城北區
에서 餘生을 보내다가
韓國戰爭
中 城北에서 死亡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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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正式 職責이 아닌 幕後의 密偵으로 活動했기에 情事(正史)에는 記錄이 거의 없는 배정자이지만, 華麗한 男性 遍歷으로 有名했고 劇的인 삶을 살았기에 《蓼花 배정자》(1966), 《蓼花 배정자 2》(1973)로 映畫化되는 等 大衆 媒體에서는 자주 다루어졌다. 이 두 映畫에서는
김지미
와
윤정희
가 各各 主演인 배정자 役으로 出演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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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男便 :
현영운
(玄暎運)
- 딸 :
현송자
(玄松子)
- 사위 :
윤치오
(尹致旿, 1934年 離婚)
- 사위 :
이철
(1903 - 1944)
- 外孫子 : 李泳鎬
- 外孫女 : 李氏, 이름 未詳
人間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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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女는 生前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師傅(師父)이자 主君(主君)으로 섬기었으며 私邸(師姐)의 立場으로 朝鮮人 出身의
박중양
(朴重陽)을 私製(師弟)로 삼았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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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배정자를 演技한 俳優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