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칼린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박칼린
Kolleen Park
基本 情報
本名 Kolleen Park
出生 1967年 5月 1日 ( 1967-05-01 ) (57歲)
美國 캘리포니아 州 로스앤젤레스 [1]
性別 女性
職業 뮤지컬 演出家 , 大學 敎授
活動 時期 1989年 ~ 現在
樂器 첼로 , 피아노 , 代金 , 伽倻琴
家族 박근실(아버지)
아이린 朴(어머니)
킴 朴(언니)
켈리 朴(언니)
關聯 活動 킥 뮤지컬 아카데미 音樂監督

박칼린 (Kolleen Park, 1967年 5月 1日 ~ )은 大韓民國 에서 活動하고 있는 美國 市民權者 身分의 [2] 藝術 監督 뮤지컬 演出家이다. 뮤지컬俳優 , 演劇俳優 , 보컬 트레이닝 專門家, 音大 敎授, 音樂 專門 監督, 뮤지컬 演出 等 公演系에서 많은 職業을 거쳐왔다.

履歷 [ 編輯 ]

그女는 美國 에서 留學 中이던 아버지 '박근실'과 리투아니아 系 美國人 어머니 '아이린' 사이에서 태어나 [3] 내내 大韓民國 부산직할시 (現在 釜山廣域市 )에서 살면서 韓國 傳統 文化를 習得했고 韓國 舞踊 피아노 로 音樂 藝術을 始作했으나 9살에 다시 美國 으로가 첼로를 배우다가 다시 韓國 으로 돌아와 경남여고 2年을 다니느라 釜山 에서 生活했다. 다시 美國 캘리포니아 칼아츠 에 進學해 첼로 를 專攻했으나 1991年 突然 國樂 을 배우려 入國. 서울大學校 國樂 大學院에 入學하여 名唱 박동진 에게 拔擢되어 판소리 를 師事했다. 以後 釜山 市立劇團에서 演劇俳優로 活動하다가 1995年 創作 뮤지컬 《 명성황후 》로 大韓民國 音樂監督 1號가 되었다. 2002年 《 오페라의 幽靈 》, 2004年 《 노트르담의 곱추 》, 2006年 《아이다》, 2009年~2010年 《시카고》 等等 70篇이 넘는 作品을 선보이고 2010年에는 KBS 男子의 資格 》 <하모니>篇에 出演하여 큰 話題를 불러일으키면서 大衆的인 認知度를 높였다. 現在 킥 뮤지컬 아카데미 代表이다.

生涯 [ 編輯 ]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 [ 編輯 ]

아버지는 1950年代에 美國 으로 留學을 다녀올 程度로 인텔리였다. 大統領 이던 李承晩 크리스마스 美國 留學生들에게 親筆로 카드를 보낼정도였다. [4] 어머니는 5살 때 리투아니아 에서 美國 으로 移民을 갔다. [5] 1944年 故鄕 리투아니아 가 區 蘇聯 에 吸收되었기 때문에 이를 避하기 위해서었다. [6] 아버지가 大學 2學年이던 時節 어머니가 新入生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聲樂 工夫를 한적이 있었고 各 나라의 傳統 노래를 배웠는데 그中에 아리랑이 끼어있었다. 1950年代였던 當時에도 180cm가 넘을정도로 키가 컸던 아버지는 東洋 學生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7] 어머니는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배워온 아리랑 을 불렀고 以後 둘의 戀愛가 結婚으로까지 이어졌다. [8] 둘다 戰爭을 겪었던 아픔과, 비슷한 크기에 멀리있던 曺國이 共感帶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박칼린은 그리하여 세 딸 中 막내로 태어났다. 박칼린은 어머니에 對해 "生命力이 降下시고 삶과 人間을 사랑하고 사람과의 對話를 重視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모든 狀況을 默默히 지켜보면서 必要할때만 말을 건네는 性格이다. 國際 結婚이 흔치 않던 時節 아버지는 父母님한테 許諾을 받지 않고 結婚을 해 세 名의 딸을 낳은 狀態였고 家族寫眞을 四寸兄님한테 보내 "父母님한테 잘 말해달라"고 一方的으로 通報해버렸다. 어머니는 當時 釜山 水營國際空港을 통해 세 딸을 끌어안고 먼저 韓國에 와 媤父母님한테 먼저 人事를 드렸다. 이를 본 親할머니는 두 달을 드러눕고 말았다. 일이 남아있던 아버지는 2~3달 뒤에나 韓國에 왔다. [8]

어린 時節 [ 編輯 ]

美國 에서 태어나 어릴적 韓國 에 온 後 釜山 에서 7年을 살아온 박칼린은 처음으로 釜山 사투리를 배웠다. [9] 게다가 親戚들中엔 全羅道 出身이 많아 全羅道 말과, 慶尙道 말, 日本 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쓰던 日本말 까지 다양한 言語를 쓰면서 자라왔다. 그러나 演劇을 한 以後로 標準語를 쓰게 됐다. [10]

釜山 에서 지낸 어린 박칼린은 內省的으로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西歐式 外貌에 對한 컴플렉스를 가지진 않았다. 8살때부터 華僑 學校도 다닌 박칼린은 그곳에서 中國語 (韓語)도 쓰려고 努力하면서 言語와 國籍의 障壁은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앞집 언니 親舊들이 學校 宿題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야 된다며 놀이터에 가서 모래를 주워담고 있는데 갑자기 中學生이 오더니 "너는 너희 나라로 가라"며 魂을 냈고 그때 正體性의 混亂을 처음으로 겪었다. [11] 박칼린은 韓國舞踊을 배웠던 큰언니 킴벌리, 개나리合唱團員이었던 작은언니 캘리, 聲樂을 專攻했던 어머니 아이린 밑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박칼린은 釜山 에서 잘 適應했으나 9살이 될 때 家族 모두가 美國 으로 떠나게 됐다. [10] 英語 英文學을 專攻한 어머니는 10歲 以前에 言語를 배우면 抑揚, 사투리, 發音 等 習得 速度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언니들이 11살이 되기 前에 美國 留學을 決定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英語를 잊어버린 박칼린은 適應하는데 時間이 必要했다. 美國 에 1年 먼저 간 언니들을 따라 1976年 美國에 간 박칼린은 언니들의 얼굴이 記憶이 나지 않을 程度였고 空港에서 自身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겨우 언니들을 알아봤다. 外貌가 西洋쪽에 가까워 美國 에서 適應이 쉬울 걸로 豫想했으나 이미 韓國 文化에 適應해버린 박칼린은 韓國 特有의 文化와 美國 文化間의 距離感을 느끼기도 했다. [10] 그렇게 美國 에서 지내다가 다시 釜山 으로 와서 高等學校 生活을 하게 됐다. 여름放學때 할머니를 보러 韓國에 놀러왔다가 언니 둘은 다시 美國 으로 돌아갔으나 박칼린은 韓國 에서 그냥 있겠다고 하여 高等學校 2學年을 韓國 에서 보냈다. 進學한 慶南女子高等學校 는 名門에 屬해있었으나 漆板을 가득 매운 授業內容 等 美國 學校와 確然히 다른 敎育方式에 또 다시 適應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特히 英語先生님은 美國 에서 生活하다 온 박칼린의 눈치를 보며 授業을 하는 웃지못할 狀況도 벌어졌다. [12] 工夫는 別로 興味가 없었지만 藝術方面에는 關心이 많았다. 演劇班 等 特別活動을 하는 재미로 學校를 다녔고 처음으로 舞臺에도 섰다. 이때 音樂을 맡았던 《大王은 죽지 않는다》란 作品으로 高校競演大會서 大統領賞을 受賞했고, [13] 代金과 伽倻琴도 배웠다.

大學 時節 [ 編輯 ]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美國 캘리포니아 藝術大學(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에서 첼로를 專攻하였는데 大學 在學 中에는 1989年 大韓民國 MBC 大學歌謠祭 에서 《沙漠의 非》라는 曲으로 參加하여 本選 進出 入賞을 한 바 있다. 그 後 大學을 卒業하고 大韓民國 으로 다시 歸國하여 1991年 서울大學校 國樂과 大學院에 入學했다. [14] 7~8살때 釜山에서 韓國舞踊을 배우면서 音樂에 對한 親密感이 있었고 國樂의 멜로디에 이끌려 國樂科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 無形文化財 로 指定되어 판소리를 하던 名唱 박동진 에게 選擇되어 師事했다. 大學院에서 國樂科를 다니고 있을 때 하와이 에서 열린 名唱·名人들의 公演이 있었을 때 박칼린은 舞踊先生님의 助手로 따라갔다. 當時 박동진 을 모시지도 않았었고 같이 몇番 食事한 程度로 서로에 對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나 마지막날 食事자리에서 박동진 이 박칼린에게 "넌 소리를 해야겠다"고 하며 授業料도 받지 않고 박칼린을 가르쳐줬다. 박동진 은 박칼린을 人間文化財 後繼者인 傳授者로 삼고 싶어해 直接 文化財廳 에 가서 問議했더니 "韓國의 文化財를 登錄해 每年 支援金도 나오는데 外國人에게 해줄 수는 없다"는 答辯을 듣고 霧散되기도 했다. [15]

뮤지컬과의 因緣 [ 編輯 ]

박칼린은 美國 에서 어렸을때부터 뮤지컬을 接했다. 中學校와 高等學校 다닐 때 演奏者와 俳優로 뮤지컬에 參與한 經驗이 있었다. 1990年代 初盤 韓國 엔 뮤지컬이 別로 없던 時節이었다. 박칼린이 釜山 에서 演劇을 始作해 그게 因緣이 되어 서울 로 進出해 靜劇에서 活動하려던 刹那에 뮤지컬 《 명성황후 》팀에서 音樂監督 提議가 들어왔다. 1990年代 初盤부터 始作해 1995年에 觀客에게 선보인 《 명성황후 》는 俳優도, 施設도 準備되어 있지 않던 荒蕪地였다. [16] 박칼린은 1995年부터 1997年 美國 뉴욕 公演까지 《 명성황후 》에 參與했다. 一部 製作陣들은 外國 出身이던 박칼린에게 不信感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中 어느 事件으로 인해 박칼린이 인정받는 契機가 왔다. 《 명성황후 》臺本과 基本作曲은 되어 있었는데 編曲은 全혀 되어있지 않았던 狀態였다. 20代 初盤이었던 박칼린은 濠洲로 달려가 피아니스트 둘이 피아노 앞에서 錄音器 하나 켜놓고 白紙 狀態였던 모든 音響效果와 背景音樂 등을 말로 表現하면서 밤새 만들어갔다. 모든 編曲이 完成되고 CD가 完成되어 이를 들고 韓國 에 오자마자 演習室로 달려가 音盤을 들려줬다. 俳優와 製作陣 30~40名이 모두 앉아 박칼린이 만들어온 것에 注目했다. 主要 場面들의 背景과 照明, 音樂들을 목소리로 描寫하고 모든 配役의 노래를 다 부르면서 2時間 넘게 公演을 혼자 再演하자 製作陣들의 起立拍手가 이어졌다. [10] 이렇게 만들어진 뮤지컬 《 명성황후 》는 1997年 韓國 創作뮤지컬 最初로 美國 브로드웨이 에 進出했고 2011年까지 1000回 以上의 公演을 記錄했다. [17]

男子의 資格 出演 [ 編輯 ]

男子의 資格 》 하모니篇에 出演해 人氣를 얻었고, 칼린이 直接 企劃한 컴필레이션 앨범 Kolleen Selects 는 發賣 3週만에 2萬張의 販賣量을 記錄해 더블 플래티넘 認證을 받았다. [18] 이를 契機로 하루에 200~300通의 電話가 올정도로 많은 涉外要請이 있었다. [19]

에피소드 [ 編輯 ]

1996年 뮤지컬 《겨울나그네》 公演中 립싱크 事件이 있었다. 뉴욕 劇場街 브로드웨이나 런던 劇場街 웨스트엔드에서는 립싱크를 하는 境遇가 없다. 當時 한 配役을 3名이 延期했는데 갑자기 이 세名이 모두 公演을 못나온다고 通報해버린 것이었다. 自己가 안나가도 서로가 나가면 되겠지 생각하여 스케줄을 잡아버린 탓이었다. 그 配役은 魅力的임과 同時에 어려웠던 캐릭터였다. 어쩔 수없이 다른 俳優를 3~4日間 벼락치기로 練習을 시키고 作曲家 김형석이 指揮를 하고 박칼린은 演奏者 空間인 舞臺 아래에 숨어서 俳優들의 노래를 다 부르며 립싱크를 시켰다. [20]

2010年 시카고 公演에서 女裝男子가 登場하는 部分이 있는데 公演의 처음부터 끝까지 治粧하고 나와야 했다. 노래도 女子처럼 소프라노 목소리를 내야 했는데 그 목소리를 할 수 있는 俳優가 거의 없었다. 感氣가 流行이던 時節 製作陣에게 빨리 오라는 連絡을 받고 달려간 박칼린은 該當 俳優의 목소리가 完全히 쓸 수 없는 地境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고서는 몇年 前에 延期했던 俳優도 搜所聞했으나 찾지 못했고 할 수 없이 박칼린이 指揮와 노래를 하면서 俳優가 립싱크를 했다. [20]

哲學 [ 編輯 ]

박칼린은 뮤지컬과 < 男子의 資格 > 放送에서 많은 人氣를 얻으면서 박칼린 리더쉽에 對한 이야기도 자주 나오고 있다. 박칼린은 리더쉽에 對해 "아래위 垂直이 아닌 水平이다"라고 말한다. [21] 서로 똑같은 重要性을 지니고 眞實되게 서로에게 長短點을 말해줄 수 있어야 發展이 있다고 생각하고 變化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 리더라고 생각한다. [10]

學歷 [ 編輯 ]

略歷 [ 編輯 ]

  • 2015年 킥 뮤지컬 아카데미 代表
  • 2014年 仁川 障礙人아시아競技大會 開閉會式 總監督
  • 2012年 KAC한국예술원 뮤지컬學部 學部長
  • 2011年 全州世界소리祝祭 共同執行委員長
  • 2010年 平昌冬季올림픽 弘報大使
  • 2010年 호원대學校 放送演藝學部 뮤지컬專攻 主任敎授
  • 2005年 東亞방송藝術大學 公演藝術界熱 뮤지컬專攻 專任敎授
  • 1994年 ~ 1996年 에이콤 뮤지컬 아카데미 講師

主要 演出 作品 [ 編輯 ]

뮤지컬 [ 編輯 ]

主要 出演作 [ 編輯 ]

放送 [ 編輯 ]

TV 드라마 [ 編輯 ]

CF [ 編輯 ]

受賞 內譯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박칼린은… 國·洋樂 ‘涉獵’… 28歲에 ‘明成皇后’로 監督 데뷔 , 文化日報, 2012年 8月 29日
  2. 이주형 (2008年 11月 29日). “뮤지컬界 八方美人 '박칼린'을 만나다.” . SBS . 2010年 11月 29日에 確認함 .  
  3. 황인혜 (2010年 7月 12日). ' 남格' 이경규 쥐락펴락한 '魔女' 박칼린은 누구?” . TV 리포트. 2011年 8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7月 22日에 確認함 .  
  4.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072138 박칼린 "50年 前 美 留學길 오른 아버지, 富者냐구요?") TV리포트 2011年 4月
  5.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525345 '무릎팍道士' 박칼린 "죽을만큼 사랑한 적, 딱 한番 있다) 아시아經濟 2011年 4月
  6.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311&aid=0000046142 박칼린, 國際結婚 成功 父母님 寫眞 公開) 엑스포츠뉴스 2011年 4月
  7.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81&aid=0002149995 박칼린 "父母님, '아리랑'-戰爭의 아픔으로 맺어진 사이) 서울新聞 2011年 4月
  8.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525343 무릎팍道士' 박칼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因緣은 '아리랑' 때문) 아시아經濟 2011年 4月
  9. 무릎팍道士' 박칼린, 유세윤에 "'多異다이' 아세요?" 釜山 사투리 實力 公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리뷰스타 2011年 4月
  10. 《黃金漁場》 <무릎팍道士> 2011年 4月
  11. 박칼린 “너네 나라 가란 말에 正體性 混亂 겪어” TV리포트 2011年 4月
  12. 박칼린 “韓國의 學校시스템, 와닿지 않았다” 告白 TV리포트 2011年 4月
  13. 박칼린이 告白하는 幼年 時節과 특별한 家族 이야기 레이디경향 2011年 4月
  14. 무릎팍 道士' 박칼린 "外國 國籍 때문에 故 박동진 名唱 傳受者 못 돼" 마이스타뉴스 2011年 4月
  15. 박칼린, "故 박동진 先生의 認定만으로도 幸福했다" OSEN 2011年 4月
  16. 박칼린 "音樂監督 데뷔 後 '나댄다' 先入見에 미움받아" TV리포트 2011年 4月
  17. 뮤지컬 '明成皇后' 14年 1000回 大記錄 뉴시스 2009年 11月
  18. 이현우 (2011年 2月 17日). “音盤界 박칼린 效果 "3週만에 2萬張 " . 스타투데이 . 2011年 2月 18日에 確認함 .  
  19. 박칼린, 무릎팍 出演 理由? "거짓없는 姜鎬童과 깊은 對話 TV리포트 2011年 4月
  20. 박칼린 "뮤지컬서 립싱크 한 적 있다" 韓國經濟 2011年 4月
  21. 박칼린, "垂直이 아닌 水平 關係가 내가 생각하는 러더쉽 OSEN 2011年 4月

外部 링크 [ 編輯 ]

深層 記事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