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191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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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朴東鎭
基本 情報
出生 1916年 7月 12日 ( 1916-07-12 )
日帝强占期 忠淸南道 公州郡
死亡 2003年 7月 8日 ( 2003-07-08 ) (86歲)
大韓民國 忠淸南道 公州市
性別 男性
職業 판소리 國樂人
唱劇俳優
판소리 作詞家
판소리 作曲家
판소리 編曲家
人間文化財
隨筆家
장르 韓國 傳統 音樂
活動 時期 1933年 ~ 2003年
配偶者 변녹수(再婚) [1]
家族 子女는 膝下 4男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韓國基督敎長老會 ) [2]

박동진 ( 韓國 漢字 : 朴東鎭, 1916年 陰曆 7月 12日 [3] 2003年 7月 8日 )은 日帝强占期 의 唱劇俳優이며 大韓民國 판소리 名唱이다.

忠淸南道 公州 에서 出生하였으며 판소리 完唱의 代價로도 손꼽힌 그는 1990年代 까지 大韓民國 판소리 分野의 代表的 人士로 活躍하였다.

그는 2003年 7月 8日 에 老患으로 別世하였다.

生涯 [ 編輯 ]

박동진은 忠淸南道 公州郡 長鬐面 무릉리(現 忠淸南道 公州市 무릉동 )에서 出生하였으며 판소리 名唱으로 活動하였고 그의 雅號(雅號) 는 人當(忍堂)이다. 그의 仔細한 家計는 알 수 없으나 證言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땅재주를 넘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재주로 高宗 (高宗, 1852年 9月 8日 ~ 1919年 1月 21日 )에게 參奉(參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4] 그러나 父親은 國樂과 一切 關聯을 두지 않은 農事꾼이었다고 한다.

16歲 때 公州 에 들어 온 協律社 (協律社)의 公演을 본 以後로 판소리에 빠지기 始作하여 18歲 때에는 忠淸南道 靑陽 에 居住하였던 孫炳斗 門下에 들어가 처음 판소리를 익혔다. 헌데 孫炳斗는 本來 名唱으로 活動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동진은 孫炳斗의 祖父라 알려진 손필모의 周旋을 받아 김창진(金昌鎭) 門下로 옮겨 《 沈淸歌 》를 배웠다. [5] 19歲에는 정정렬 (丁貞烈, 1876年 5月 21日 ~ 1938年 3月 21日 )에게 《 春香歌 》를 배웠으나 當時 丁貞烈의 다른 弟子들이 많아 다 배우지 못했고, 20歲 되던 해에 유성준에게 《 水宮歌 》를, 21歲 때 조학진 門下에서 《 赤壁歌 》, 22歲 때 박지홍 門下에서 《 흥보가 》를 배웠다. 그리고 다시 上京하여 丁貞烈에게 《春香歌》를 배웠다. 또한 송만갑에게도 指導를 받았다고 하는데 正確히 어떤 바탕을 배운 것은 아니고 全般的인 整理 性向을 띈 指導만 받았던 듯 하다. [6]

25歲를 전후하여 無節制한 生活로 목이 傷하여 소리꾼으로서는 그렇게 行世하지 못하였고, 行世하는 境遇에도 中央 舞臺에는 서지 못했다. 1944年 에서 1952年 까지 8年 間은 朝鮮音樂團, 김연수 唱劇團, 操向 唱劇團 等 唱劇團 生活을 轉轉하며 唱劇 舞臺에 서기도 하였고, 固守(鼓手)로 行世하기도 하였다. 한便으로는 다시 목을 되찾기 위해 100日 毒公度 마다하지 않는 等 소리 修鍊을 繼續하였는데 生活을 위해 햇님國劇團에서 編曲과 舞臺監督을 擔當하기도 하였으나 如前히 소리꾼으로 全面的인 活動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1958年 에서 1959年 까지 韓國獨立黨 文化藝術行政特報委員 職位를 暫時 지냈고 그 後 1962年 國立國樂院 國樂士洑가 되었고, 1968年 , 當時 國立國樂院 院長 성경린 (成慶麟, 1911年 9月 18日 ~ 2008年 3月 5日 )의 周旋과 當時 各種 唱劇團에서 樂士로 活動하던 한일섭 (韓一燮, 1929年 ~ 1973年 )의 共助로 판소리 《興甫歌》의 5時間 完唱 發表를 가졌다. 이 發表會는 UN君 司令部 放送 VUNC를 통해 放送되어 큰 反響을 일으켰다. 이것을 起點으로 1969年 《春香歌》 8時間, 1970年 《沈淸歌》 6時間, 1971年 《赤壁歌》 7時間,《水宮歌》 4時間의 完唱 發表를 連달아 進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年 《변강쇠타령》, 1972年 《裵裨將타령》, 《숙영낭자전》, 《壅固執타령》等을 復元, 完唱 發表를 가졌고,《성웅 李舜臣》, 《聖書 판소리》等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等 소리꾼으로서 全面的인 活動에 나섰다. 特히 《赤壁歌》의 完唱 能力을 認定받아 1973年 重要無形文化財 第5號 판소리 《赤壁歌》의 藝能保有者로 指定되었다. 또한 같은 해 國立唱劇團 團長에 就任하는 等 판소리系 重鎭 人士로 活躍하기 始作하여 1990年代 까지 年 1回 以上의 年悵懷를 가졌다.

本來 특정한 宗敎가 없었던 그는 1969年 長老敎 牧師 조향록과 劇作家 주태익의 要請으로 創作 판소리 《예수傳》을 公演한 것이 契機가 되어 改新敎 에 歸依하였고, 以後에도 《聖書 판소리》, 《毛細展》 等의 創作 판소리를 發表하며 改新敎 宣敎 活動에도 積極 參與하였다.

1980年 銀冠文化勳章을 받았고, 1981年 에 美國 一周 公演에 參加하였으며, 1982年 에는 《聖書 판소리》를 美國에서 發表하였다. 1985年 國立國樂院 판소리 元老事犯에 任命되었고, 1987年 國立國樂院 指導委員이 되었다. 이 時期에 相當히 많은 賞을 受賞하였고, 名實相符한 판소리系 最高 元老이며 大名唱으로 待接을 받았다.

1990年代 後半부터 後進 養成에 힘쓰기 위해 公主로 내려와 專修館을 開館하는 한便, 如前히 公演 活動을 活潑히 펼쳤고, 八旬이 넘은 나이에도 完唱과 長時間 연窓을 敢行하는 等 精力的으로 活動하였다.

2003年 7月 8日 公州市 무릉동 에서 老患으로 別世하였고 別世 다음날 2003年 7月 9日 에는 生前 그間의 功勞를 認定받아 金冠文化勳章이 追敍되었다.

國樂 藝術 世界 [ 編輯 ]

이미 1910年代에 이르면 中央舞臺에서 판소리가 脚光 받게 되고 많은 名唱들이 活躍하게 되면서 東便制니 西便制니 하는 區分이 소용없게 되었고, 特히 金昌煥을 筆頭로 하는 近代 5名唱들이 서울에서 朝鮮聲樂硏究會를 結成해 後進 養成에 힘쓰면서 많은 소리꾼들이 이들 5名唱을 번갈아 스승으로 모셨다. 따라서 서로 다른 系統의 소리를 배워 自己 것으로 만드는 現象이 蔓延하였는데, 박동진은 그 中에서도 特히 다양하고 複雜한 寺僧關係를 가지는데, 그가 直接的으로 다섯 바탕을 傳受 받았다고 證言하는 이들의 面面은 다음과 같다.

  • 김창진 : 中高制 金正根 系統
  • 정정렬 : 西便 新制
  • 박지홍 : 西便 高弟 金昌煥 系統
  • 유성준 : 東便制 松板 系統
  • 조학진 : 東便制 박기홍 系統 [7]

現在 死滅된 中高制는 勿論 西便制의 告祭와 新制, 東便制의 松板 系統과 박기홍 系統에 이르기까지 그 系統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 全般的인 矯正을 해주었다는 宋萬甲의 影響을 생각하면 東便制 新제인 송만갑 系統의 소리 또한 박동진에게 影響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박동진은 가장 넓은 範圍의 流派들을 兼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동진은 이들의 소리를 받은 그대로 연窓하기 보다는 스스로 毒公에 依하여 소리를 새로 짠 境遇가 많은데 때문에 판소리 社說의 擴張이 많고, 擴張된 만큼 이야기로서 판소리의 敍事性을 많이 살렸다. 또한 過去의 縮約的 社說이 가지는 一種의 裏面(裏面)的 乖離를 社說의 擴張을 통하여 多少間 補完하기도 하였다.

박동진의 판소리 藝術은 大衆性을 志向한 것으로 有名한데, 現在 남아있는 公演 實況 資料를 參考해 보면 辱과 才談을 自由自在로 驅使하며, 現場에 따라서 相當히 卽興的인 社說을 驅使하여 가장 大衆的인 興味를 많이 일으키는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아니리를 重視하여 "판소리의 半이 아니리."라고 主張하기도 하였다. 固守와의 關係에 있어서도 一方的인 伴奏者와 聯창자의 關係이기 보다는 固守와 自由롭게 才談과 對話를 주고 받으면서 高手까지도 舞臺 위의 한 主役으로 끌어 올렸는데, 이것은 音樂的 嚴格함을 重視하는 김명환 等의 高法 理論, 판소리 理論과는 多少 相衝되는 面이 있으나 그 만큼 現場性이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박동진의 聲音은 若干 쉰듯한 수리聲인데 칼칼한 느낌이 난다. 또한 독공 期間이 길었던 만큼 그 聲量이 매우 커서 誘葬하고 莊嚴한 場面의 描寫에 能했고,《적벽가》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戰鬪 場面을 描寫하는 것에서도 뛰어났다. 一角에서는 박동진의 판소리가 才談에 지나치게 置重하여 音樂的인 性格이 많이 缺如되었다고 하는데, 7~90年代의 公演 實況을 보면 高音과 中音, 低音이 하나 같이 두터운 소리로 나오며, 붙임새의 使用 또한 狀況에 맞게 自由自制로 使用하고 있고 무엇보다 김희조 가 始作한 '窓과 管絃樂'이라는 장르에서 巨文島 뱃노래와 같은 民謠까지 直接 부르고 있는 것, 햇님國劇團 活動을 하면서 各 曲의 編曲을 擔當했던 일을 볼 때 이러한 批判은 妥當하지 않다. 또 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相當히 重視하였는데 그가 노랑목을 쓰지 않으면서도 시김새를 適切히 驅使하는 것은 이러한 소리 美學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동진은 이러한 모든 諸般 藝術 行爲를 일컬어 광대 놀음이라 하였고, 그 自身을 광대라고 指稱하였는데, 이로 因해 최동현은 "귀名唱이 사라진 時代의 名唱"이라 말하기도 했다. 박동진은 自身의 이러한 美學을 申在孝가 지은 短歌 《廣大歌》에 根據한 것으로 보았으며, 때문에 失傳된 單價의 曲調를 自身이 創作하여 다시 부르기도 하였다.

1960~1970年代에 가장 많이 活躍한 高手는 김명환인데 박동진은 김명환보다는 이정업,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와 많은 呼吸을 맞추었고, 김득수와 김동준의 북을 가장 選好하였다. 김명환은 장판개에게 高法을 배웠고, 소리도 배웠으나 소리꾼으로 行勢하기 위해 배웠다기 보다는 오로지 북을 치기 위해 배웠고, 소리는 北에 對한 理解도를 높이기 위해 附隨的으로 배운 이에 屬하였으나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 等은 모두 판소리 창자로 始作하여 孤樹로 轉向한 人物들이었고 이정업의 境遇에도 本來 줄광대로 始作하였다가 亦是 孤樹로 轉向하였던 人物이다. 卽 박동진은 直接 소리꾼으로 活動하여 그 美學을 直接 體感하고 있는 이들의 北 장단을 選好하였다. 1970年代 以後로는 全州의 주봉신을 修行高手로 하여 자주 活動하였다.

1974年, 김동준의 北 伴奏로 《赤壁歌》 全판을 錄音하였고, 같은 해에 박후성의 北 伴奏로 《聖雄 李舜臣》의 4時間 唱本을 錄音하였다. 1988年부터 1990年代 初盤에 이르기까지 주봉신의 北으로 《興甫歌》全판, 《水宮歌》全판, 《沈淸歌》, 《赤壁歌》, 《春香歌》의 一部, 《변강쇠타령》全판 2種, 《裵裨將타령》全판, 《예수傳》 等을 錄音하여 各各 音盤으로 出班하였다. 이 外에도 동아방송의 企劃으로 김득수와 함께 《숙영낭자전》을 錄音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音源으로 確認되지 않고 다만 DBS의 데이터 目錄에서만 確認된다. 여러 판소리를 發表하였지만 出班된 錄音은 事實上 極少數에 屬하는데, 그나마 1968年~1972年까지의 完唱 公演 릴테이프가 國立國樂院에 保管되어 있고, 1970年代 以後 國立劇場에서 가졌던 各種 연窓會와 完唱 發表會, 鑑賞會 當時의 實況이 國立劇場 資料室 에 保管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藝術의 全貌를 알 수 있다.

各州 [ 編輯 ]

  1. 변녹수(邊祿樹)의 兒名(兒名) 은 便器(邊基)이다.
  2. 박동진 長老(國樂人, 初動敎會) , 순복음家族新聞
  3. 링크
  4. 박동진 證言. (김기형,「元老藝術人들에게 듣는다. - 박동진의 소리 世界」,『月刊 文化藝術』2001年 5月號, 韓國文化藝術委員會, 2001, P.89~90.)
  5. 김창진은 名唱 김창룡 의 동생으로 中高制 名唱이었다고 한다. 本來 兄 金昌龍의 孤樹로 活動하였는데, 그 待接의 差異에 火가나 毒公하여 名唱 班列에 올랐다. 그러나 阿片에 中毒되어 兄과는 거의 義絶하였으며 서울에서 活動하지 못하였다. 박동진은 金昌龍의 소리가 中高制이면서도 東便制 소리와 類似하다고 하였고, 김창진의 소리는 中高制이면서도 西便制 소리와 類似하다고 하였다.
  6. 박동진 證言.
  7. 조학진의 赤壁歌는 정춘풍에서 박기홍으로 이어지는 소리인데 初期 硏究에서는 이 소리를 東便制로 보았으나 近來에는 中高制로 보는 見解가 剛하다. 그런 만큼 정춘풍의 소리 系統을 어디로 보느냐에 對해서는 異見이 있다. 다만, 정춘풍을 中高制로 본다고 할지라도 정춘풍의 弟子인 박기홍은 本來 東便制 名唱 박만순의 弟子이며 傳導性과 함께 東便 告祭를 固守하며 宋萬甲의 新제소리를 强力하게 批判한 것으로 有名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박기홍은 정춘풍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기 보다 自身이 固守한 東便制의 原則에 맞추어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弟子인 조학진은 東便制 소리꾼으로 보는 것이 妥當할 것이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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