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施愛의 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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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施愛의 亂 (李施愛ㅡ亂)은 1467年 ( 世祖 13年) 5月 부터 8月 까지 咸鏡道 吉州의 豪族 이시애 等이 世祖의 執權 政策에 反對해 일으킨 叛亂이다. 當時 이시애 는 吉州 出身의 豪族 土班으로, 1458年 慶興眞兵馬節制使, 1461年 行知中樞府事를 歷任하고, 1463年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喪을 當해 官職에서 물러나 있었다.

咸吉道는 李成桂 의 故鄕으로 朝鮮王朝의 主要 緣故地 中의 하나였으며, 地理的으로 北方 異民族과 接해 있는 特殊 事情을 考慮해 地方官은 人望 있는 豪族 中에서 任命해 代代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咸鏡道 仁에 對한 地域差別과 外地에서 赴任한 官吏들에 對한 反撥로 咸鏡道 留鄕所 勢力을 糾合, 1467年 5月 이시애 等은 咸鏡道 仁에 對한 地域差別과 斷種 廢位 等을 反逆으로 規定하여 擧兵하였으나, 擧兵 3個月만에 內部 分裂로 이시애 의 妻조카 허유례(許惟禮)가 官軍과 內通함으로써 鎭壓되었다.

開設 [ 編輯 ]

世祖는 中央集權을 强化하기 위해 地方에도 中央의 官吏를 많이 派遣했다. 그리고 南方의 百姓을 이주시켜 餘震勢力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咸吉道(咸吉道) 에도 守令이 中央에서 派遣되어 本島인(本道人)의 反撥이 있었는데, 때마침 朝廷에서 號牌法을 實施하여 農民들의 自由로운 移住가 不可能해졌다.

世祖 13年(1467) 5月 회령부史 李施愛는 그의 本據地 吉州(吉州)에서 軍士를 일으켜 咸吉道의 守令을 咸吉道仁으로 삼을 것을 要求했다. 咸興 以北의 主君(州郡)李 이에 呼應하였으며, 各地 留鄕所(留鄕所)가 指導 勢力을 이루었다. 그러나 叛軍은 政府軍에게 대패(大敗)하고 李施愛는 餘震으로 逃亡하려다. 逮捕·斬首되었다.

背景 [ 編輯 ]

世祖는 卽位하면서 中央集權의 强化를 위해 북도 出身 守令의 任命을 制限하고 景觀(京官)으로 代替하였으며, 守令들에게 地方有志들의 自治機構인 留鄕所(留鄕所)의 監督을 强化하게 하여, 타지 出身인 守令들과 留鄕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내다가 賞(喪)을 當하여 官職을 辭退한 李施愛는 留鄕所의 不滿·不平과 百姓의 地域感情에 便乘해서 아우 移施합(李施合), 妹夫 이명효(李明孝) 等과 함께 調整의 咸鏡道 人 地域差別에 反撥하고 斷種 廢位 等을 反逆으로 規定하여 擧事를 謀議, 1467年 (世祖 13) 5月 會寧 에서 擧兵, 叛亂을 일으켰다.

經過 [ 編輯 ]

叛亂 初期 [ 編輯 ]

李施愛는 吉州로부터 端川, 北靑, 洪원으로 南下하면서 中央에서 派遣된 그곳 地方官들을 모두 죽이고 自己 스스로 王命을 받은 節度使 라 稱하여 擧兵하였다. 이시애 는 '咸吉道의 節度使(節度使)가 眞藏(鎭將)들과 함께 反逆을 陰謀하고 있다'고 煽動하여 節度使 강효문 (康孝文), 咸鏡道 觀察使 新面 , 吉州牧使(吉州牧使) 설징신 (薛澄新) 等을 죽이고 體察使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이어 '方今 南道의 軍隊가 바다와 陸地로 쳐올라와서 咸吉道 郡民(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煽動하자 興奮한 咸吉道의 軍人과 民間人들이 留鄕所 를 中心으로 일어나 他 地域 出身인 이 곳 守令들을 殺害하는 等 咸吉道는 大混亂에 휩싸이게 되었다. [1]

朝廷에서는 어유소 , 龜城君 (구성군), 남이 等에게 少數의 討伐隊를 이끌고 出征하게 했다. 그러나 叛軍의 氣勢가 거세자 龜城郡 준 의 官軍은 鐵原 까지 退却했고 더 以上 進擊하지 못하였다. 叛亂軍은 咸吉道 뿐만 아니라 平安道 까지 影響을 넓혀가고 있었다. 世祖 는 다시 都摠管 康純 을 眞北大將(鎭北大將)으로 삼아 平安道兵力 3千名의 指揮權을 주어 永興 으로 나아가게 하고, 兵曹 參判 박중선 (朴仲善)을 平爐將軍(平虜將軍)으로 임명하여 黃海道 兵士 1千名을 이끌고 文川郡 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將軍 어유소 에게는 漢城府 所屬 勁兵(京兵) 1千名을 보내 구성군 을 돕게 하였다.

이시애 는 中央에도 連絡通을 띄워 '兵馬節度使 康孝文 等이 漢城府 한명회 (韓明澮), 신숙주 (申叔舟) 等과 結託하여 咸吉道 軍隊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謀反하려 하여 民心이 洶洶하니 咸吉道 사람을 고을의 守令으로 삼기 바란다'는 等 謀略戰術을 폈다. 世祖는 이에 속아 한명회 , 신숙주 等을 한때 投獄하였다가, 新面 , 강효문 等이 處刑된 消息을 接하고는 곧 龜城郡 준 (龜城君 浚)을 病魔道총사(兵馬都摠使)로 삼아 討伐軍을 출동시켰다.

交戰 [ 編輯 ]

1467年 5月 15日 龜城君 은 겨우 江原道 北部에 있던 이시애君을 敗退시키고 淮陽(淮陽)으로 나아갔다. 世祖 5月 부터 各種 曉諭文(曉諭文)을 내려 보내고 只今이라도 降伏하면 處罰하지 않겠다는 條件을 내세웠으나, 通知文을 들고 간 獅子는 죽임당했다. 同時에 叛軍 指揮者들을 逮捕하는 者들에게는 懸賞金을 條件으로 걸었다. 6月 1日 抑留되었던 體察使 윤자운 이 兵士 한 사람과 옷을 갈아입고 劇的으로 이시애 의 陣營에서 脫出해오자 龜城君 은 윤자운을 護送한 뒤 鐵嶺 을 넘어 安邊 에 陣을 쳤고, 許從은 永興 으로 들어가 叛軍과 交戰하였다.

그 동안에도 李施愛는 때로 2百~5百餘名의 軍卒을 이끌고 麻谷驛 (麻谷驛)에 나오기도 하고, 移施합 洪原郡 下彈動에서 龜城君 의 部長 次韻革 (車云革)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 속임數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當時 叛軍은 咸興, 官軍은 永興에서 서로 對峙하고 있었다. 世祖 는 曉諭文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던 政策을 거두고, 闕內에 禁錮했던 신숙주 等의 中신을 풀어주는 同時에, 親庭(親征)을 計劃하는 等 强勁策을 講究하였다.

이시애 는 이같은 世祖 의 强勁政策에 唐慌해 北靑을 거쳐 理性(利城, 只今의 利原郡 ) 多寶東으로 本部를 옮겼다가 다시 北靑郡 으로 根據地를 옮겼다. 이시애 의 後退로 구성군 의 官軍은 6月 19日 咸興 을 占領하고 弘遠 으로 나아가 西쪽인 함관령 (咸關嶺) 아래 身元(新原)에 새 幕舍를 짓고 根據地로 하여 全軍을 指揮하였다. 구성군 康純 을 北靑 攻掠의 先鋒으로 삼고 종개(鐘介), 山개(山介)의 두 山에 陣地를 構築하게 하였다. 龜城君의 軍事는 安邊에서 平安道 地域의 이시애君을 擊退하는 한便 康純은 박중선 , 許從 , 어유소 等과 더불어 종개令을 넘어 北靑 앞의 平鉋(平浦)에서 이시애君을 潰滅시키고 陣을 쳤다.

交戰 狀況 [ 編輯 ]

6月 19日 이시애軍은 北靑을 떠나 退却하고, 移施합은 2萬餘 名의 軍卒을 北靑 近處인 驪州乙縣(汝注乙峴)에 駐屯시키는 한便, 自身은 端川 以北의 여러 進軍(鎭軍)과 女眞族 500餘 名을 합쳐 異性 고사리抛(高沙里浦)에서 北靑 御所(於所)로 나아가 官軍을 挾攻하려 했다. 이를 모르는 官軍은 北靑 城으로 進擊해 들어갔다가 이시애軍은 없었고, 周邊에 있던 移施합군에 依해 包圍되었다. 康純 은 마침내 김교(金嶠)의 建議에 따라 木柵(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鹿角(鹿角 : 사슴뿔과 같이 대나무로 짜서 만든 敵을 막는 物件)을 늘어놓는 한便, 性 밖에는 坑道를 파고 그 위를 平地처럼 하여 敵軍의 侵略에 對備하였다.

6月 24日 밤 4高(四鼓 [2] )에 이시애君의 奇襲 攻擊을 받았으나, 康純 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同時에 城門을 굳게 닫아걸어 攻擊을 無視하고 應戰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북도 사람을 시켜 代의(大義)로써 이시애君을 曉諭하니 그들이 動搖하기 始作하였고, 李施愛는 10餘 回나 싸움을 걸었으나 官軍의 北靑 守備陣을 뚫지 못하고 敗退하였다.

官軍은 이시애에게 大闕에 나아가 自首(自首)할 것을 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北靑에서 敗退한 이시애軍은 다시 軍勢를 整備하였다.

7月 14日 李施愛는 自身의 사위인 이명효(李明孝)로 하여금 弘遠·北靑·甲山·삼수의 百姓들을 모아 탕救靈(湯口嶺)을 넘어 弘遠 西쪽인 新익평(申翌坪)에 駐屯해 官軍의 咸興과 北靑 通路와 補給路를 遮斷하였다. 移施합은 異性 以北의 百姓을 이끌고 마圄囹(磨於嶺)을 넘어 2陣을 形成하게 하는 同時에, 이시애 自身은 會寧 以北의 百姓을 이끌고 大門令(大門嶺)을 넘어 熱餘문평에 陣을 쳐서 長期戰을 펴고 官軍의 自滅을 기다렸다.

한便, 官軍은 北靑에 있는 軍士를 弘遠으로 후퇴시키려 하여 1·2·3陣으로 나누어 이시애君을 뚫고 나가 長期戰에 對備하였다. 李施愛는 이 틈을 타서 北靑을 占領하였다. 그 동안에도 官軍은 이시애 等에게 曉諭에 나섰으나 李施愛가 듣지 않자 結局 長期戰으로 나가게 되었다.

鎭壓 [ 編輯 ]

7月 25日 官軍은 한밤中에 祕密裏에 行動을 開始해 眞北將軍 康純 의 軍士를 1陣으로 삼아 散開令을 넘게 하고, 2陣 大將 어유소 의 軍士는 종개令을 넘게 해 北靑 으로 進入, 兩面攻擊을 하게 하는 同時에 龜城君 의 軍士는 坪砲로 進擊하였다.

康純 어유소 의 軍士는 挾攻을 하여 山개·종개令의 이시애 軍을 擊破하고 北靑 으로 殺到해 들어가 李施愛가 任命한 假짜 不節度使 유득地 (劉得之)의 君을 擊退시키고 그 兵力을 吸收하여 當時 官軍의 數는 約 5萬 名으로 늘어났다. 李施愛는 北靑 敗退의 消息을 듣고 1萬餘 名의 軍兵을 이끌고 北靑 東쪽 68里에 있는 天險의 萬令(蔓嶺)으로 갔다.

萬令은 南으로는 바다, 北으로는 泰山을 등지고 있어 官軍과의 戰鬪에는 比較的 유리하였다. 官軍은 다시 萬令 攻擊에 나섰다. 康純 의 1陣이 먼저 萬令 밑에 到着하고 어유소 의 2陣을 기다렸다가 7月 末 康純群, 어유소群, 龜城君軍이 集結하면서 一齊히 攻擊을 開始하였다. 먼저 龜城君과 康純 , 박중선 等이 이끄는 軍士는 큰길로 나아가고, 許從 等은 큰길 南쪽 重峯(中峰)으로 가갔다. 또한 우공(禹貢)은 큰길 重峯, 그리고 어유소 는 바닷가와 동령(東嶺)으로, 김교 等은 북산(北山) 밑으로 나아가 各各 萬令을 向해 4面에서 包圍, 挾攻하는 戰術을 써서 進擊하여 이시애君의 선봉진人 萬令 主峯(主峯)을 占領하는 데 成功하고 이시애 가 있는 中峯으로 攻擊해 갔다.

7月 末 戰勢가 相當히 不利해지자, 밀리던 이시애 女眞族 過度 內通, 女眞族을 끌어들여 對抗하였으나 女眞族에 派遣했던 獅子가 當到하기도 前에 신숙주 , 許從 (許琮), 康純 , 어유소 (魚有沼), 남이 (南怡) 等이 이끄는 3萬 軍隊가 咸鏡南道 弘遠(洪原), 北靑(北靑)에 駐屯하던 이시애君을 擊破하고 利原郡 의 萬令(蔓嶺)에서 叛亂軍 主力部隊를 粉碎하였다.

7月 31日 李施愛는 中峯을 據點으로 2千 名의 兵力으로 3重 砲열을 한 뒤 決死的으로 버텼다. 그날 幼時(酉時 [3] )에 이르러 萬令 同封에서 어유소 軍이 이시애軍이 中峯으로 간 것을 接하고, 이시애君의 左側 虛를 찔러 防禦線의 一角을 通過함으로써 防禦線을 무너트렸다. 이어 官軍은 肉彈戰으로 이시애君을 敗退시켰다. 結局 이시애 는 夜陰을 틈타 異性 쪽으로 逃亡쳤다.

結果 [ 編輯 ]

8月 1日 官軍은 이시애君을 追擊해 異性 까지 쫓아갔으나 이시애軍은 이성군의 客舍, 倉庫 等을 불사르고 다시 北으로 敗走하였다. 8月 8日 理性을 出發한 龜城君 等의 官軍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李施愛는 端川에 陣을 쳐서 南大川(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抵抗을 試圖하였으나 다시 敗走하여 吉州로 달아났다.

8月 12日 官軍 聯合軍은 이시애君을 追擊하여 端川 에서 交戰하여 敗退시키고 奪還, 다시 摩天嶺 (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까지 이시애君을 밀고 나갔다. 이 때 李施愛는 許從 麾下의 허유례(許惟禮)의 計巧에 빠져 移施합과 함께 逮捕되었다.

李施愛는 吉州를 거쳐 京城(鏡城)으로 退却하여 餘震 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그러나 李施愛의 妻조카인 司饔院別坐(司饔院別坐) 허유례는 自己 아버지가 억지로 李施愛의 一派에게 끌려갔다는 消息을 듣고 李施愛의 部下인 移住(李珠), 黃生(黃生) 等을 包攝한다. 허유례는 自身의 아버지가 李施愛의 手下에서 吉州權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降伏하는 척 하고는 京城 運委員(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李施愛의 受荷人 移住(李珠)·이운로(李雲露)·黃生(晃生) 等을 說得해 이시애와 移施합 等을 逮捕게 했다. 이들을 說得하여 自然스럽게 이시애 兄弟에게 接近하여 이시애 兄弟를 묶어 남이 等 討伐軍에게 引繼하였다.

事後 [ 編輯 ]

8月 이시애 軍은 남이 等의 討伐隊에 依해 潰滅당하고, 이시애 等 生捕된 者들은 8月 12日 討伐軍의 陣地 앞에서 龜城郡 尊에 依해 斬首刑되고 梟首되었다. 이로써 3個月에 걸쳐 咸鏡道를 휩쓴 李施愛의 亂은 平定되었다. 龜城郡 이준과 남이 , 조석문 , 어유소 , 許從 , 허유례 , 이숙기 等은 怔忡敵愾功臣 (精忠敵愾功臣)으로 錄勳되고 金瑞亨 等 많은 敵愾原從功臣 (敵愾原從功臣)들이 책록되었다.

亂의 餘波로 이듬해인 1468年 에 길注目은 길성현 (吉城縣)으로 降等되고 東쪽 地域을 떼어내 明川縣 이 分離되었고, 咸吉道는 咸鏡道 로 改稱되고 남·北 2度로 分離되었으며, 咸鏡道의 留鄕所 는 廢止되었다.

參考 文獻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朝鮮 王朝의 經濟·社會的 構造"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以後 咸吉道를 任地로 꺼리는 現象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2. 밤 4景, 午前 2時~4時
  3. 午後 5時∼7時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