迎賓 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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迎賓 李氏
暎嬪 李氏
朝鮮 英祖의 後宮
이름
別號 宣禧宮(宣禧宮)
시호 所有(昭裕)
身上情報
出生日 1696年 8月 5日 ( 1696-08-05 ) (陽曆)
死亡日 1764年 8月 12日 ( 1764-08-12 ) (68歲) (陽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慶熙宮 陽德當
家門 全의 李氏
父親 理由番
母親 漢陽 金氏
配偶者 英祖
子女 1男 6女
思悼世子 · 和平翁主 · 華頰翁主 · 화완옹주
漕卒 翁主 3名
陵墓 수경원 (綏慶園)
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西五陵로 334-32

迎賓 李氏 (暎嬪 李氏, 1696年 8月 5日 ( 陰曆 7月 18日 ) ~ 1764年 8月 12日 ( 陰曆 7月 26日 ))는 朝鮮 英祖 의 後宮이며, 思悼世子 (長調)의 어머니이자 正祖 의 할머니이다. 英祖와의 사이에서 思悼世子와 和平翁主 , 華頰翁主 , 화완옹주 를 낳았다.

生涯 [ 編輯 ]

51歲때의 모습을 그린 英祖 의 御眞

誕生과 後宮 冊封 [ 編輯 ]

本貫은 全義 (全義)이며, 1696年 (肅宗 22年) 7月 18日, 아버지 理由番(李楡蕃)과 어머니 漢陽 金氏(김우종의 딸)의 딸로 태어났다.

1701年 (肅宗 27年), 6歲의 나이로 大闕에 들어와 宮女가 되었으며 [1] , 1726年 (英祖 2年) 11月 16日, 當時로는 늦은 나이인 31歲에 英祖의 承恩을 입어 內命婦 種2品 熟議 (淑儀)에 冊封되었다. [2]

後宮 時節 [ 編輯 ]

1727年 (英祖 3年) 4月, 和平翁主 를 낳았는데, 和平翁主에 對한 英祖의 사랑은 대단히 각별하였다.

1728年 (英祖 4年) 8月, 둘째 翁主를 낳고 그해 10月에 鐘1品 貴人 (貴人)으로 進封되었다. [3]

1729年 (英祖 5年) 12月, 셋째 翁主를 낳았으며 다음해인 1730年 (英祖 6年) 內命婦 情1品 迎賓 (映嬪)에 冊封되었는데, 當時 驍將世子 의 3年喪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은 時點이었고, 警鐘 선의왕후 의 國喪中에 吉禮를 치러 朝廷과 民間에서 歎息하였다. [4]

1732年 (英祖 8年) 1月에 넷째 翁主를 낳았고, 다음해에 다섯째 翁主人 華頰翁主 를 낳았는데, 迎賓 李氏가 다섯 翁主를 연이어 낳자, 驍將世子 事後 後嗣를 바라던 영조는 크게 근심하였다. [5] 和平翁主와 華頰翁主 사이에 태어난 세名의 翁主는 모두 다섯살을 넘기지 못하고 夭折하였다.

1735年 (英祖 11年), 아들 思悼世子 를 出産하였다. [6] 영조는 기뻐하며 다음해에 世子로 冊封하였다. [7]

 
迎賓 李氏가 集福軒 (集福軒)에서 原子를 낳았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抵死(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中略)
여러 臣下들이 번갈아 賀禮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三鐘(三宗, 孝宗 · 顯宗 · 肅宗 )의 血脈이 張差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只今 多幸히 돌아가서 列聖朝(列聖祖)를 뵐 面目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至極하니, 그 感懷 또한 깊다." 하였다.

? 《 英祖實錄 》 40卷,
英祖 11年(1735年 靑 雍正(雍正) 13年) 1月 21日 (壬辰)

思悼世子 를 낳았으나, 思悼世子 또한 여느 後宮 所生의 王子들이 正室 王妃를 어머니로 모셔야 했던것처럼 整備 정성왕후 의 養子로 入籍되었으며 生後 100日만에 迎賓과 떨어져 선의왕후 處所의 宮人들에게 養育되었다.

1738年 (英祖 14年) 여섯째 딸인 화완옹주 를 낳았다. 迎賓 李氏는 1男 6女를 낳았는데, 火완翁株를 除外한 나머지 子女 모두 迎賓 李氏 보다 먼저 世上을 떠났다.

壬午花邊 [ 編輯 ]

民間에 傳해져 내려오는 思悼世子 의 巫俗化 (作者未詳)

英祖 思悼世子 의 葛藤이 深化되고, 英祖의 偏執症的인 性格과 思悼世子의 鬱火病 및 精神病이 심해지는 가운데 1762年 (英祖 38年), 나경언 이 世子의 飛行을 영조에게 高下字 영조는 思悼世子에게 自決할 것을 命하였다. 이때 迎賓 또한 思悼世子의 飛行을 영조에게 告하였고, 思悼世子는 뒤주에 갇혀 死亡하였다. [8]

世子가 內官, 內인, 下人을 죽인 것이 거의 百餘名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刑罰을 加하는 等
차마 볼수 없는 일을 行한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刑具는 모두 內需司 等에 있는 것으로 限度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長番內官을 내쫒고 다만 어린 內官 別監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財貨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妓生, 比丘尼와 晝夜로 淫亂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下人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近日은 잘못이 더욱 甚하여 한番 아뢰고자 하나
母子의 恩情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近日 宮闕 後援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敢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下人에게 머리를 풀게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두고 不測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番 제가 昌德宮 에 갔을 때 몇番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火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敢히 이 事實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 迎賓 李氏의 告變
 
賃金이 昌德宮 에 나아가 世子( 思悼世子 )를 廢하여 西人(庶人)으로 삼고,
안에다 嚴히 가두었다.
처음에 驍將世子 (孝章世子)가 훙(薨)하여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後嗣(後嗣)가 없다가
世子가 誕生하기에 이르렀는데, 타고난 資質이 卓越하여 賃金이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10餘歲 以後에는 漸次 學問에 태만하게 되었고,
代理(代理)한 後부터 疾病이 생겨 天性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臣民(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丁丑年(1757年)과 無人年(1758年) 以後부터 病의 症勢가 더욱 심해져서
病이 發作할 때에는 宮妃(宮婢)와 幻視(宦侍)를 죽이고, 죽인 後에는 문득 後悔하곤 하였다.
賃金이 매양 嚴한 下校로 切實하게 責望하니, 世子가 疑懼心으로 인하여 病이 甚하게 되었다.
賃金이 慶熙宮 으로 이어하자 두 宮(宮) 사이에 漸漸 疑心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또 宦官, 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놀면서 하루 세 次例의 問安 人事를 모두 廢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後嗣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每番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

임금이 世子에게 命하여 땅에 엎드려 棺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傳敎를 내려 自決할 것을 재촉하니,
世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中略)
世孫( 正祖 )이 들어와 管(冠)과 脯(袍)를 벗고 世子의 뒤에 엎드리니,
賃金이 안아다가 侍講院으로 보내고 김성응 (金聖應) 富者(父子)에게 水位(守衛)하여
歲손이 또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命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傳敎를 내려 東宮의 自決을 재촉하니,
世子가 自決하고자 하였는데 春坊(春坊, 世子宮 )의 여러 臣下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廢하여 西人을 삼는다는 命을 내렸다.
(中略)
世子가 哭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哀乞하며 改過遷善하기를 請하였다.
임금의 傳敎는 더욱 嚴해지고 迎賓이 告한 바를 大略 陳述하였는데,
迎賓은 바로 世子의 誕生모(誕生母) 李氏(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者였다.
都承旨 이이장 (李彛章)李 말하기를,
"殿下께서 깊은 宮闕에 있는 한 女子의 말로 인해서 國本(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賃金이 震怒하여 빨리 方形(邦刑)을 바루라고 命하였다가 곧 그 命을 中止하였다.
드디어 世子를 깊이 가두라고 命하였는데, 世孫( 正祖 )이 遑急히 들어왔다.
賃金이 貧窮( 혜경궁 洪氏 )과 世孫 및 여러 王孫을 左議政 홍봉한 의 집으로 보내라고 命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半이 지났었다.
? 《 英祖實錄 》 99卷,
英祖 38年(1762年 靑 乾隆(乾隆) 27年) 尹5月 13日 (乙亥)

以後 英祖의 名으로 世孫( 正祖 )이 思悼世子가 아닌 驍將世子 의 僧統을 이을것을 命하자 衝擊을 받고 슬퍼하였다.

死亡 [ 編輯 ]

1764年 (英祖 40年) 7月 26日, 慶熙宮 의 陽德黨에서 死亡하였다. [9]

英祖 는 매우 슬퍼하며 直接 迎賓의 墓誌銘을 지었는데, 國王이 後宮의 指紋을 지은 것은 前例가 없는 일이었다. [10] 迎賓 李氏의 靑華白瓷 墓誌銘은 英祖가 直接 글을 짓고 사위인 和平翁主 의 男便인 金星位 박명원 이 글씨를 썼다. 또한 영조는 思悼世子 와 迎賓의 일을 記錄한 《表意錄(表義錄)》을 直接 作成하였다.

아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구나.
39年間 偕老하였는데 只今 하나의 꿈이 되고 말았으니
내 슬픔이 너무나 깊다.
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七旬이 되었을 것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다.
 
《어제영빈이씨墓地 (御製暎嬪李氏墓誌)


迎賓 李氏의 墓所는 義烈墓(義烈墓)로 洋酒 延禧宮 대야동 언덕에 묻혔는데 오늘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一帶이다. 義烈墓는 高宗 臺에 思悼世子가 莊祖 (莊祖)로 追尊되면서 수경원(綏慶園)으로 格上되었으며, 延世大學校 一帶에 있었으나 京畿道 高陽市 西五陵 으로 移轉되었다.

1788年 (正祖 12年), 正祖는 迎賓의 妙인 義烈墓를 宣禧宮 (宣禧宮)으로 稱하였으며 [11] , 後에 宣禧宮은 임금을 낳은 後宮들을 配享하는 七宮 (七宮)을 構成하는 祠堂 中 하나가 되었다. 以後 高宗代에 所有(昭裕)의 諡號가 追贈되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朝鮮의 後宮        迎賓 李氏 暎嬪 李氏    出生 死亡
1696年 8月 15日 ( 陰曆 7月 18日 )
조선 朝鮮 漢城府
1764年 8月 23日 ( 陰曆 7月 26日 ) (68歲)
조선 朝鮮 漢城府 慶熙宮 陽德當

父母 [ 編輯 ]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部   理由番 李楡蕃 全義 未詳 이영임 李英任
未詳
   漢陽 金氏 漢陽 金氏   漢陽 김우종 金佑宗
全州 李氏 全州 李氏

夫君 [ 編輯 ]

   朝鮮 第21代 國王   
英祖
英祖
出生 1694年 10月 31日 ( 陰曆 9月 13日 )
조선 朝鮮 漢城府 昌德宮 보경당
死亡 1776年 4月 22日 ( 陰曆 3月 5日 ) (81歲)
조선 朝鮮 漢城府 慶熙宮 집경당


子女 [ 編輯 ]

爵號 이름 生沒年 配偶者 備考
長女 和平翁主 和平翁主 1727年 - 1748年 金星位 錦城尉 박명원 朴明源
次女 翁主 [12]  1728年 - 1731年 [13] 이翁主(二翁主)로 記錄
3女 翁主 [14]  1729年 - 1731年 [15] 三翁主(三翁主)로 記錄
4女 翁主 [16]  1732年 - 1736年 [17] 社翁主(四翁主)로 記錄
5女 華頰翁主 和協翁主 1733年 - 1752年 靈性位 永城尉 신광수 申光綏
長男 思悼世子 思悼世子
莊祖 醫皇帝 莊祖 懿皇帝
장종대王 莊宗大王
선 煊 1735年 - 1762年 혜경궁 洪氏 惠慶宮 洪氏
헌경醫皇后 獻敬懿皇后
朝鮮의 推尊 國王
大韓帝國의 推尊 皇帝
6女 화완옹주 和緩翁主 龍완 蓉婉 1738年 - 1808年 一聲位 日城尉 정치달 鄭致達 正祖 卽位年(1776年) 廢庶人


關聯 文化財 [ 編輯 ]


迎賓 李氏가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어제영빈이씨墓地 (御製暎嬪李氏墓誌)》
  2. 承政院日記 》 627冊 (脫抄本 34冊) 英祖 2年(1726年 靑 雍正(雍正) 4年) 11月 16日 (甲辰)
    傳曰, 李氏爲淑儀。
    李氏(李氏)를 熟議(淑儀)로 삼으라고 傳敎하였다.
  3. 承政院日記 》 672冊 (脫抄本 37冊) 英祖 4年(1728年 靑 雍正(雍正) 6年) 10月 8日 (乙酉)
    傳曰, 淑儀李氏爲貴人。
    熟議 李氏를 貴人(貴人)으로 삼으라고 傳敎하였다.
  4. 英祖實錄 》 28卷, 英祖 6年(1730年 靑 雍正(雍正) 8年) 11月 27日 (壬辰)
    貴人 李氏를 봉하여 迎賓으로 삼다
  5. 英祖實錄 》 33卷, 英祖 9年(1733年 靑 雍正(雍正) 11年) 3月 8日 (己丑)
    映像·偶像 等이 迎賓 李氏가 男兒를 出産하도록 祈禱하는 일을 仰奏하다
    藥房(藥房)과 映像(領相)·偶像(右相)李 請對하여 入試(入侍)하였다.

    이때 迎賓 李氏(暎嬪 李氏)가 연달아 네 名의 翁主를 出産했고 또 妊娠했으므로 男兒(男兒)를 出産하는 傾斜가 있기를 上下가 己丑(企祝)하였으나, 어제 또 翁主( 華頰翁主 )를 出産하였다.

    大臣들이 임금께서 失望하여 지나치게 念慮할까 두려워하여 各其 慰勞와 勉勵의 말을 進達하였다.

    송인명(宋寅明)李 고매(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神의 이름 )에게 빌고 名山(名山)에 祈禱하는 等의 일을 앙주(仰奏)하니,

    賃金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 일 때문에 浸蝕(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地境에 이르겠는가? 다만 三種(三宗, 孝宗 · 顯宗 · 肅宗 )의 血脈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平常時와 같지 못한 것뿐이다."

    하였다.

  6. 英祖實錄 》 40卷, 英祖 11年(1735年 靑 雍正(雍正) 13年) 1月 21日 (壬辰)
    迎賓 李氏가 原子를 集福軒에서 誕生하다
  7. 英祖實錄 》 41卷, 英祖 12年(1736年 靑 乾隆(乾隆) 1年) 3月 15日 (己酉)
    原子를 冊封하여 王世子로 삼다.
  8. 英祖實錄 》 99卷, 英祖 38年(1762年 靑 乾隆(乾隆) 27年) 尹5月 13日 (乙亥)
    世子를 廢하여 西人으로 삼고, 안에다 嚴히 가두다
  9. 英祖實錄 》 104卷, 英祖 40年(1764年 靑 乾隆(乾隆) 29年) 7月 26日 (病者)
    迎賓 李氏가 連署하다
    迎賓(暎嬪) 李氏(李氏)가 燕西(捐逝)하였다.

    賃金이 臨哭(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後宮 一等의 例로 葬事를 치르라고 命하였다.

    慧貧窮 (惠嬪宮)李 《儀禮(儀禮)》 經典에

    ‘庶子(庶子)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者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緦麻服(?麻服)을 입는다.’는 글에 依據하여 緦麻服을 입었다.

    迎賓은 思悼世子 를 낳았는데, 後宮에 40餘 年間 있으면서 謹愼하고 沈默을 지켜 不幸한 때에 處하여 保護한 功勞가 있었다.

  10. 어제영빈이씨墓地 (御製暎嬪李氏墓誌)》
    아아 내 나이 일흔 한살에 빈의 墓地를 直接 짓고, 빈의 墓表 앞뒤와 壙中의 銘旌을 모두 썼다.

    그리고 神主의 앞뒷面 또한 모두 임금의 筆跡이다. 이는 참으로 一般的인 規例에서 벗어난 뜻밖의 일인 것이다.

  11. 正祖實錄 》 26卷, 正祖 12年 12月 26日(1788年 靑 乾隆(乾隆) 53年) (癸丑)
    金星位 박명원이 義烈 英貧窮의 廟號에 關해 上疏하자 이를 論議·廓正하다
  12. 泰封登錄 (胎峯謄錄)》
    戊申八月十五日 ····· 今戊申年八月初三日申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무신年(1728年) 8月 15日, 8月 初三日 新詩에 태어난 翁主 아기씨의 胎를 묻다
  13. 承政院日記 》 718冊 (脫抄本 39冊) 英祖 7年(1731年 靑 雍正(雍正) 9年) 2月 18日 신해
    이翁主(二翁主)가 卒逝하였으니 通話門을 나간 뒤 下弱하고 西小門度 나간 뒤에 닫도록 兵曹에 分付하라는 全校
  14. 泰封登錄 (胎峯謄錄)》
    庚戌正月初八日 ······ 己酉年十二月十二日酉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庚戌年(1730年) 正月 初八日에, 氣幼年(1729年) 12月 12日 流矢에 태어난 翁主 아기씨의 胎를 묻다
  15. 承政院日記 》 719冊 (脫抄本 39冊) 英祖 7年(1731年 靑 雍正(雍正) 9年 3月 21日 甲申
    三翁主(三翁主) 卒逝後 承政院 等에서 大田 等에게 安否를 물음
  16. 泰封登錄 (胎峯謄錄)》
    壬子二月十三日 ······ 今壬子正月初一日寅時生翁主阿只氏藏胎 ··· ···
    임자年(1732年) 2月 13日, 正月 初하루 寅時에 태어난 翁主 아기씨의 胎를 묻다
  17. 英祖實錄 》 41卷, 英祖 12年(1736年 靑 乾隆(乾隆) 1年) 4月 12日 病者
    넷째 翁主가 紅疫을 앓다가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