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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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𗴂

紀元前 9世紀 ~ 紀元前 206年
 

통일 이전
統一 以前
통일 이후
統一 以後
수도 咸陽
政治
政治體制 專制君主制
伯爵
紀元前 900年 ~ 紀元前 858年
紀元前 337年 ~ 紀元前 324年

紀元前 324年 ~ 紀元前 311年
紀元前 247年 ~ 紀元前 221年
皇帝
紀元前 221年 ~ 紀元前 210年
紀元前 210年 ~ 紀元前 207年

紀元前 207年 ~ 紀元前 206年

비자 (初代)
慧門群

혜문왕
影幀

始皇帝
二世皇帝

項王 (말대)
국성 靈性
歷史
 ? 建國 紀元前 9世紀
 ? 稱王 紀元前 324年
 ? 全國 統一 및 稱帝 紀元前 221年
 ? 滅亡 紀元前 206年
人文
公用語 古代 中國語
데모님 眞人
經濟
通話 半兩錢
기타
現在 國家

(秦, 紀元前 900年 警 ~ 紀元前 206年 )은 中國 最初의 統一 王朝로, 東아시아 最初의 國家元首 皇帝 로 指稱한 帝國 이다. 국성은 靈性 조氏(?姓趙氏) 또는 靈性 晉氏(?姓秦氏)다. 本來 春秋전국時代의 國家 中 하나였던 秦나라는 紀元前 4世紀쯤 戰國 時代 商鞅 이 行한 法家 에 따른 改革에 依해 急速度로 强盛해졌고, 紀元前 221年 진 始皇帝 에 依해 戰國 時代 를 統一하면서 中國 歷史上 最初의 統一 國家가 되었다. 秦나라의 支配期間 동안, 中國에서는 貿易이 增加하였고 農業이 發展되었으며 治安이 强化되었다. 또한 土地 地主制를 廢止하여 中央政府가 國民들을 直接 統治할 수 있었다. 秦始皇 (秦始皇)은 萬里長城 , 阿房宮 , 진시황릉 , 병마용갱 과 같은 大規模의 土木工事들을 벌였으며, 貨幣, 度量衡 等을 統一하며 中國을 單一한 文化圈으로 묶는데 큰 寄與를 하였다. 軍事力 亦是 發展하여, 戰術이나 武器, 運送體系 等이 發展하게 되었다. 다만 皇帝의 입맛에 맞지 않는 學問들을 彈壓하였으며, 政府에 反抗하는 學者들을 壓殺하며 焚書坑儒 와 같은 學問的 彈壓도 벌였다.

秦나라는 强盛했지만, 統一 以後 오래가지 못했다. 紀元前 210年, 秦始皇이 死亡한 뒤 그의 아들 호해 가 皇帝의 자리에 올랐고, 宦官 祖考 와 같은 貪官汚吏들은 好害를 利用해 權力을 휘두르려 했다. 이들은 不淨腐敗를 저지르며 國政을 어지럽혔으며, 全國 곳곳에서는 이들에 不滿을 품고 叛亂이 일어났다. 結局 진나라는 마지막 皇帝인 自營 이 楚霸王 項羽 에게 降伏하며 滅亡하였으며, 秦나라의 뒤는 乳房 이 세운 한나라 가 이었다. 진나라는 中國을 15年이라는 極히 짧은 期間 동안 統治하였으나, 統一 王朝의 基盤을 놓고 皇帝 體制를 確立하였다는 點에서 中國 歷史 全般에 크나큰 影響을 미쳤다.

歷史 [ 編輯 ]

周나라 時代 [ 編輯 ]

紀元前 900年 즈음에 효왕 (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 (非子)가 말의 生産을 實施해, 功績을 올렸으므로의 영(?)이라는 姓을 받고 大夫가 되어, 陳(秦) 땅에 領地를 받았다고 한다.

津이 最初로 興한 場所는 現在의 간쑤省 리 現 附近이며, 現在 이 땅에서 眞意 先祖의 陵墓라고 推定되는 것이 發見되어 注目을 받고 있다. 紀元前 770年 에 周나라가 犬戎 (犬戎)에 쫓겨 都城을 東쪽으로 薦度하는 過程에서 陽孔 (襄公)은 週 평왕 (周平王)을 護衛한 공으로 注意 九地인 氣(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以後 晉은 諸侯의 班列에 오른다.

春秋, 戰國時代 [ 編輯 ]

晉은 春秋時代에 들어가는 同時에 諸侯가 되었지만, 風俗的으로는 中院 帝國(諸國)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라고 업신여김을 받았다. 歷代 診候(秦侯)는 主로 西戎(西戎)과 抗爭하면서 領土를 擴張했고, 法律 整備 等을 實施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紀元前 677年 에는 首都를 甕城 (雍城, 現在의 산시省 바오지視 펑샹 現 )에 두었다.

9代 木工 (穆公)은 백리해(百里奚) 等 他國 出身者를 積極的으로 登用, 西戎을 크게 討伐해 西戎의 敗者가 되었고, 周邊의 小菊을 合倂하고 領土를 넓혀 이웃 (晋)에 匹敵할 程度가 되었다. 때마침 陳(晋)李 麗姬(驪姬)의 亂을 겪으면서 惠空(惠公)을 擁立하지만, 惠空은 背信을 일삼았다. 木工은 惠空의 軍隊를 한원에서 擊破했다. 또한 惠空 死後에는 惠空의 兄 중이(重耳)를 眞空(晋公)으로 卽位시켰다. 中耳가 陳(晋)의 名君 문공 (文公)李 되었고, 晉문공을 통하여 陳(晋)은 다시 强國의 風貌를 되찾는다. 그러나 문공 事後, 陳(秦)은 다시 陳(晋)을 擊破하고, 領土를 强奪했다. 이러한 實績에 根據, 木工은 春秋 五霸 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木工이 죽었을 때, 177名의 家臣들은 殉葬의 風習을 따라 함께 죽었고, 明軍과 人材를 한 番에 잃은 秦나라는 氣勢를 잃어 領土는 縮小되었다. 나라를 維持할만한 힘은 아직 維持하고 있었지만, 春秋時代 中期 以後 主役은 北쪽의 陳(晋)과 南쪽의 (楚)였고, 晉은 이에 비하여 한 발 밀려나 있던 狀況이었다.

戰國時代에 晉은 戰國七雄 (戰國七雄)의 하나로 불린다. 이웃나라 (晋)은 內部에서의 權力 싸움의 끝에 (韓)· (魏)· (趙)의 三國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갈라진 三國을 三振(三晋)이라 부른다. 三振 中 魏나라가 全國 初期, 名君 問候 (文侯)에 依해 剛하게 成長하였고, 晉은 위에게 壓迫을 받고 領土를 빼앗긴다.

이 狀況에 憤慨한 25代 君主 효공 (孝公)은 넓게 人材를 救해 大勢를 挽回할 수 있는 方策을 찾았다. 이에 應한 者가 그 有名한 商鞅 (商?)이다. 商鞅은 行政 制度의 改革·十五第(什伍制)의 採用 等을 實施해, 陣을 强力한 中央集權 體制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商鞅의 變法 運動에 依해 晉은 徹底한 法治主義 國家로 變貌하였고, 國內의 生産力, 軍事力을 높여 徐徐히 다른 여섯 나라를 壓倒하였다. 효공은 紀元前 350年 , 都城을 涵養으로 옮기고 本格的인 天下 經營을 摸索하기 始作한다.

그 後 효공의 아들이 强해진 國力을 基盤으로 紀元前 324年 에 王을 稱하니, 이가 혜문왕 (惠文王)이다. 紀元前 316年 에 혜문왕은 파촉(巴蜀)을 占領하고 이 땅의 開發을 實施하여 한層 더 生産力을 올려 長江(長江) 上流를 차지하게 되었고, 長杠을 따라 進擊할 수 있게 되어 秒를 壓迫할 수 있었고, 秒와의 싸움에서 壓倒的으로 유리한 立場에 섰다. 혜문왕은 謀略가인 醬의 (張儀)를 登用하고, 秒를 질질 끌어 돌려 戰爭으로 擊破해, 初回王(楚懷王)을 사로잡는데 成功한다. 혜문왕은 胃와 韓의 王들을 各各 馬夫와 拜承으로 삼을 程度로 굴복시켰다. 하지만, 혜문왕의 아들 武王(武王) 時期에 그가 長衣를 내쳐버리자 掌醫는 위에 亡命, 이로 인한 恨과의 激戰 끝에 많은 軍士를 잃었고, 혜문왕은 事故死하여, 後繼者 싸움이 일어나 電力이 後退해 버린다.

이 時期 東쪽에서는 第(齊)나라가 伸張하고 있어, 殷나라의 後裔인 송(宋)나라를 倂合하는 等 周邊 帝國을 壓迫하고 있었다. 紀元前 288年 當時에는 祭를 洞祭, 陣을 庶弟라고 稱했다. 齊나라가 곧바로 題號를 取消했으므로, 珍島 取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時期는 西쪽의 秦나라, 東쪽의 齊나라 2强國 時代를 만들고 있었다.그러나 齊나라는 年(燕)나라의 惡의 (樂毅)가 指揮하는 5個國 聯合軍에 依해 首都 任置 (臨淄)가 陷落되어 亡國 直前까지 몰리는 危機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나라는 强國의 位置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혜문왕의 아들이자 武王의 異腹同生인 소양왕 (昭襄王)의 時代에 宰相 胃炎(魏?)과 白旗 (白起) 將軍의 活躍으로 晉은 몇 番이나 勝利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卽位시킨 宰相 胃炎의 權力이 너무 커진 것을 憂慮한 소양왕은 宰相 胃炎을 肅淸하고, 代身 범저(范雎)를 登用한다. 汎低價 進言한 것은 有名한 遠交近攻(遠交近攻) 策略이다.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勝利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먼 땅이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에 對해서 먼 제나라나 燕나라와 同盟海 가까운 한·魏·祖를 攻擊하면 가까운 땅이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眞意 領土로 집어 넣는 것이 容易해진다." 이것이 遠交近攻冊이다. 感動한 소양왕은 이 進言을 採擇하고, 汎저를 宰相으로 삼았다. 紀元前 260年 에는 百기가 曹나라로 進擊, 장평 戰鬪 를 통하여 조君을 擊破, 弔意 砲로 40萬 名을 生埋葬하여 조나라의 豫期를 꺾어버린다. 紀元前 255年 에 周나라를 滅해 그 領地를 接受하여 秦의 威勢는 한層 더 높아졌다.

天下 統一 [ 編輯 ]

戰國時代가 漸漸 무르익음에 따라 七國 戰爭의 樣相은 漸次 總力戰에 가까워졌다. 이것은 國家 間의 戰爭이 決코 軍事力뿐만이 아닌 政治力, 外交力, 經濟力까지 밑바탕이 돼야만이 相對方을 찍어 누를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時代的 變化를 맞이하여 陳(秦)나라의 政治, 軍事 政策도 變化를 맞이하게 된다.

當時 진나라의 領土는 天下의 3分의 1, 人口는 天下의 10分의 3, 부는 天下의 10分의 6을 차지했다. 하지만 秦나라는 그럼에도 改革을 거듭하여 秦始皇의 卽位 以後 內政敵으로 秦나라는 六國 百姓들을 積極的으로 받아들여 六國의 人民을 빼앗는 政策을 펼치고 從來의 需給制를 修正하여 無分別한 殺戮을 막고 그 捕虜들을 秦나라의 勞動 資源으로 活用한다. 그리고 大規模 土木事業을 일으켜 秦나라의 國力을 富强하게 만든다. 그中 政局거라는 水路는 西쪽의 경수(涇水)를 끌어들여 東쪽의 落下(洛河)의 물을 댈 수 있는 灌漑水路로 政局거를 建設함으로 인하여 觀衆地方에는 2億 2千萬 坪의 農耕地가 새로 생겨나고 그로인해 4千萬 섬의 穀食이 生産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秦始皇 統一戰爭 期間 秦나라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數十萬의 大軍을 動員할 수 있는 原動力이 되었다.

한便 秦나라는 蔚料 , 理事 , 요가 等의 重臣들을 重用하고 外交的으로는 六國의 大臣들을 買收해 王과 好神들을 離間질하며 各種 諜報戰을 펼쳐서 六國의 合從을 막고 六國 朝廷 內部의 分裂을 助長했다.

조나라 侵攻 [ 編輯 ]

1次 侵攻 [ 編輯 ]

紀元前 236年, 秦나라는 조나라 (趙)를 本格的으로 攻掠하기 前에 移徙의 計略을 써, 間諜으로 하여금 조나라와 燕나라 의 關係를 離間질하여 兩國이 戰爭을 일으키게 했다. 이 計策이 먹혀들어 조나라는 燕나라와 戰爭을 일으켰고 秦나라가 侵攻할 當時 趙나라의 主力軍은 燕나라를 攻擊하고 있었다.

조나라가 燕나라와 戰爭을 일으키자 燕나라를 돕는다는 口實로 진나라는 大軍을 일으켜 南과 北 兩路의 길을 빌려 曹나라로 進擊시켰다. 番傲氣(樊於期)와 量短靴의 南路軍은 安養과 業으로 進擊하고, 王錢 의 北路軍은 療養과 言旅路 進擊하여 占領하였다. 秦나라의 軍隊는 主力軍이 빠진 趙나라의 軍隊를 擊破하며 9個의 城邑을 占領하고 趙나라의 領內를 破竹之勢로 掌握해 가며 南路軍과 北路軍으로 하여금 南北에서 한段 을 挾攻해 一擧에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豫想치 못한 秦나라의 侵攻으로 國內 形勢가 매우 危急해진 조나라는 雪上加霜으로 兆 度양왕 이 病死하고 그의 아들 竈王 千((遷))李 뒤를 이었다. 竈王 千(遷)은 燕나라 征伐에 나가있던 趙나라의 主力軍에 歸還을 命令하고 한單性 北쪽 태행산의 險함과 한單性 南쪽 長壽(?水)와 그 沿岸을 따라 築造된 長城에 依支하여 굳게 지킴으로써 진나라의 軍士들과 對峙狀態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秦나라에서 몇 가지 問題가 發生한다. 하나는 呂不韋 에 關한 問題로 盧애 의 叛亂事件과 連累되어 勝常直을 박탈당하고 河南의 封紙에 들어가 지내던 呂不韋에게 關東의 여러 諸侯들이 사람을 頻繁히 보내 往來를 한다는 것을 秦始皇은 알게 되었고 이는 呂不韋에 對한 警覺心을 높이게 하는 原因이 되어 結局 呂不韋 一家를 귀양보내듯 泗川으로 移住 命令을 내린다. 다음 해 呂不韋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른 한 가지는 조나라를 수월하게 攻掠하기 위해 조나라를 攻擊하기 前 秦나라와 위나라 가 友好 條約을 締結하였는데, 위나라는 秦나라의 힘을 빌려 楚나라의 領土를 빼앗으려고 祈禱했다. 또한 秦나라에도 魏나라와 協力하여 楚나라 를 攻擊해야 한다는 輿論이 强해져 結局 진나라는 攻擊目標를 조나라에서 楚나라로 轉換하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 1次 조나라 征伐이 흐지부지 끝나고 두 나라는 1年間의 休戰期間을 갖게 되었다.

2, 3次 侵攻 [ 編輯 ]

辰王 情(政) 13年, 紀元前 234年 (竈王 千(遷) 2年) 秦나라의 首腦部는 조나라와의 戰爭이 채 끝나지 않은 狀態에서 魏나라와 함께 楚나라를 攻掠하는 것에 對해 否定的인 생각을 갖게 되고 다시 조나라를 侵攻하는 것으로 決定을 내려 番傲氣 를 大將으爐하여 10萬의 進軍을 動員하여 조나라 南部로부터의 攻擊을 開始했다. 番傲氣가 이끄는 秦나라軍은 조나라君의 防禦網을 被害 裝荷(?河)의 下流를 迂廻하여 한段의 南東쪽 平壤(平?), 茂盛(武城)을 攻擊한다. 조나라에서는 大將 好妾이 大軍을 이끌고 두 性을 救援하러 간다. 6月 番傲氣가 이끄는 進軍은 大將 好妾이 이끄는 조나라軍과 回轉을 벌여 조나라君을 大破해 10萬 조나라君의 목을 베고 號妾을 慘殺한다. 平壤과 茂盛은 秦나라軍에 점령당한다.

辰王 情 14年, 紀元前 233年 (竈王 千(遷) 3年) 日前에 大勝利를 거둔 番傲氣는 다시금 出擊한다. 相當에서 出發하여 태행산을 넘은 秦나라軍은 조나라 中部로부터의 進軍을 開始했다. 番傲氣는 조君의 主力을 擊破하고 積慮(赤麗)와 議案(宜安)을 攻擊하여 占領한 다음 한段의 背後로 進擊한다. 趙나라의 主力軍이 殲滅되고 邯鄲을 向해오는 進軍에 危機感을 느낀 竈王 천은 匈奴君을 防禦하고 있는 耳目을 大將軍으로 任命하고 北方의 軍事를 이끌고 進軍을 永隔하도록 命했다. 耳目은 竈王의 命令을 받아 大軍의 5萬 淨甁 가운데 1萬을 남겨두고 나머지 兵士들을 데리고 迅速하게 南下를 했다.

한段의 조나라 軍隊와 合勢한 耳目 의 軍隊는 只今의 河北省 고성현 西南쪽에 있는 議案(宜安)과 隣近의 卑下(肥下)에 到着하여 堡壘를 높게 쌓고 잇단 勝利로 사기가 充滿한 進軍을 막아내며 싸움에 應해주지 않는다. 耳目이 議案의 城門을 걸어잠그고 每日 소를 잡아 兵士들을 배불리 먹이고 활쏘기 練習이나 시키자 軍士들이 오히려 秦나라와 싸우게 해달라고 要請하였으나 耳目은 듣지 않았다. 番傲氣는 議案(宜安)까지 내려온 조君이 싸움에 應해주지 않자 조바심을 냈다. 秦나라軍은 먼길을 돌아서 온 마당에 持久戰을 펼칠 餘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秦나라軍은 어떻게 해서든 據點안의 조나라君을 밖으로 끌어내 短期決戰을 誘導해야만 했고, 이에 番傲氣는 主力部隊를 이끌고 卑下 땅을 맹공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나라君의 救援軍이 나오도록 한 뒤 조나라君의 映彩를 急襲하려고 했지만 番傲氣의 속셈을 꿰뚫고있던 耳目은 僞位救助 (圍魏救趙)의 戰略을써 조나라君을 3輅路 나누어 秦나라의 陣地를 奇襲攻擊하여 占領하였다. 秦나라君의 主力部隊가 나가있어 守備軍이 적어진 데다가 조나라軍이 굳게 守備만 한 까닭에 갑작스런 攻擊을 豫想치 못했던 진나라軍은 防備가 疏忽했고, 그로因해 조나라軍에 쉽게 本채를 함락당하게 된다.

卑下(肥下)를 攻掠 中이던 番傲氣는 本채가 함락당했다는 消息을 듣고 크게 놀란다. 耳目에 依해 普及이 끊겨버린 것이다. 選擇의 餘地가 없었던 番傲氣는 多急하게 軍士들을 되돌려왔다. 하지만 이것은 耳目이 기다리던 바였고 이를 미리 豫想하여 埋伏하여 陣을 친 後, 遑急히 되돌아오는 秦나라君을 正面에서 막게하고 主力部隊로 하여금 兩쪽에서 치게하여 數次例의 接戰 끝에 秦나라君을 大敗시키고 秦나라群 10萬 名을 殲滅하였다. 耳目이 番傲氣의 秦나라君을 全滅시키자 本國의 處罰이 두려웠던 番傲氣는 燕나라 로 逃走하게 된다.

4次 侵攻 [ 編輯 ]

辰王 情 15年, 紀元前 232年 (竈王 千(遷) 4年) 秦나라는 다시금 大軍을 일으켜 軍士를 양대로 나누어 南路軍은 業性(?城)에 집결시키고, 北路軍은 太原(太原)에 집결시켜 南北에서 邯鄲을 挾攻해 一擧에 멸망시키고자 했다. 太原에서 出發한 北路軍은 只今의 山西省 糧穀縣 (陽曲縣) 附近인 낭猛(狼孟)을 占領한 다음 胎缸山을 넘어 繼續 進擊하여 只今의 河北省 평산縣 (平山縣) 南쪽의 飜悟(番吾)를 攻擊했다. 秦나라가 侵攻하자 竈王 千(遷)은 耳目을 불러들여 大將으로 삼는다. 竈王 千(遷)은 걱정거리가 있었다. 曹나라에는 그해 가뭄이 와 農地는 많은 被害를 입고 一部 地域에서는 農作物이 아예 죽어버려 穀物을 收穫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秦나라의 잦은 侵攻으로 國內는 混亂스러웠다. 飢饉이 덮친 데다 戰爭으로 인해 混亂이 繼續된다면 趙나라의 統治體系에도 龜裂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竈王 千(遷)은 耳目에게 첫番째 戰鬪에서 되도록 빠른 決戰을 내 勝利하여 戰爭을 오래 끌지 않도록 要請했다.

耳目은 남수北共의 計劃을 세우고 北路君을 集中的으로 攻擊하여 勝利한 後에 南路君을 攻擊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私馬商에게 業을 지켜 南路君을 막게하고 耳目은 主力軍을 이끌고 北쪽으로 내달아 秦나라君을 攻擊했다. 잇다른 回戰에서 北路君을 飜悟(番吾)에서 擊退하고 秦나라軍이 後退하게 한 다음 곧바로 軍事를 이끌고 南下하여 南路軍과 遭遇하였다. 北路軍이 耳目이 이끄는 조나라軍에 依해 敗退했다는 消息을 듣고 勝算이 없다 判斷한 南路軍도 잇달아 退却하게 되어 秦나라의 4次 조나라 侵攻前이 끝나게 된다. 耳目이 戰鬪에서 勝利했지만 趙나라의 損失도 莫大했으며 人力, 物資의 不足으로 인해 追擊戰을 펼칠 수 없어 秦나라君을 殲滅하지는 못했다.

거의 每해 數十萬 大軍을 이끌고 侵攻해온 秦나라로 因해 物的, 人的 資源의 消耗가 莫甚하여 조나라는 到底히 홀로 秦나라의 侵攻을 沮止할 수 없다고 判斷했다. 初, 위나라는 弱化되고, 燕나라와 조나라는 不便한 關係였기에, 齊나라 의 人的 物的 支援을 뒷받침해야만 비로소 秦나라에 맞설 수 있었다. 조나라는 使臣을 派遣하여 제나라와의 同盟을 圖謀하였지만 이런 趙나라의 로비行爲를 알아챈 秦나라는 이를 瓦解시키기 위해 卽時 사람을 보내 제나라 調整에 數萬에 達하는 黃金을 뿌렸고, 成事될 뻔한 齊나라와 조나라의 同盟을 霧散시켜 조나라를 고립시켰다.

漢나라 滅亡 [ 編輯 ]

조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數十만을 動員한 數次例의 遠征이 趙나라의 抵抗에 막혀버리자 秦始皇은 큰 苦悶에 빠졌다. 이때 蔚料는 大型軍事作戰을 통하여 六國을 直接 打擊하는 方式을 바꾸어 六國의 虎神(豪臣)들을 買收해 六國을 內部로부터 붕괴시키는 方法으로 對應하자고 秦始皇에 建議했다.

"晉(秦)은 剛하고 諸侯(諸侯)는 比喩하자면 郡縣(郡縣)의 君主와 같으나, 神(臣)은 다만 諸侯(諸侯)의 合從(合從)李 두렵고, 한꺼번에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곧 지백(智伯)ㆍ부차(夫差)ㆍ민왕(?王)李 亡한 理由입니다. 願컨대 大王(大王)께서 財物을 아끼지 마시고 그 虎神(豪臣)에게 賂物을 주며 그 智謀를 어지럽힌다면, 不過 30萬 金(金)을 잃고 諸侯(諸侯)를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 蔚料

30萬 金은 秦나라 國庫의 거의 全部에 達하는 것이었지만, 蔚料의 計略이 30萬 金보다 훨씬 큰 利益을 가져올 것임을 안 秦始皇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國庫를 蔚料에게 넘겨주어 마음껏 쓰게하고 어디에 쓰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蔚料는 本格的으로 사람을 보내 六國의 官吏들을 買收하기 始作했다.

蔚料의 첫 番째 目標는 한(韓)나라 였다. 한(韓)나라는 삼가粉塵(三家分晉) 以後 相當軍과 三泉郡을 占據해 剛한 國力으로 威勢를 떨쳤지만 蘇後의 짧은 繁榮이 끝나고 곧바로 衰落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漢나라는 六國中에서 가장 弱한 나라였다. 오랜 期間 秦나라의 동진을 막아내며 奮戰하였지만 漢나라는 크게 衰退하여 大部分의 領土를 빼앗기고 남은 領土는 首都인 新正과 옛 都城이었던 量的뿐이었다. 量的이 位置한 地域을 漢나라 사람들은 南陽라고 불렀다. 當時 한나라 南陽의 歌手(假守·臨時 郡守)였던 等(騰)은 出身이 不分明했다. 이름은 있지만 性이 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名門 巨族出身도 世襲 貴族도 아니어서 忠誠度가 낮았고 買收 可能性이 높았다. 蔚料가 買售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辰王 情 16年, 紀元前 231年 한(韓)나라 의 南陽태수 等이 南陽땅을 통째로 들어다 秦나라에 投降하는 일이 發生한다. 秦나라는 한나라의 南陽땅이 통째로 投降해오자 本來의 조나라를 滅하려던 計劃을 바꿔 한나라를 먼저 滅하기로 決定한다. 秦나라는 南陽을 接受한 뒤 等을 太守로 命하고 實際로는 이곳을 前進 基地로 삼아 언제든 漢나라를 攻擊해 滅할 萬般의 準備를 마치도록 했다. 辰王 情 17年, 紀元前 230年 內査(?史)로 任命된 等이 秦始皇의 命을 받아 10萬의 進軍을 이끌고 조나라를 攻擊하는척 하다 奇襲的으로 南下해 黃河를 건너 한나라의 新正을 攻擊했다. 갑작스러운 攻擊이었고 設使 알았다고 해도 進軍의 攻擊을 沮止할 武力조차 없었던 漢나라는 束手無策으로 當할 수밖에 없었다. 秦나라軍은 빠르게 한나라의 首都인 新正에 다달았다.

漢나라의 朝野는 驚愕했다. 等은 오랫동안 한나라의 管理로 있었고 한나라의 內部事情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나라 征伐의 司令官으로 온 以上 한나라가 살아남을 可能性은 낮았다. 또한 內査(?史)라는 官職은 觀衆의 全體 防禦業務를 管掌하는 진나라의 高位層이었다. 投降者人 等이 秦나라에서 받는 待遇를 보고 한나라의 大臣들과 漢王 안(韓王安)은 自身들도 投降을 망설이게 된다. 이때, 蔚料는 漢王 안(韓王安)에게 書信을 보내 降伏을 勸誘했고 侯爵地位의 保全을 約束한다. 秦나라의 徹底한 準備下에 計劃된 侵攻이었다. 漢나라는 强力한 秦나라軍에 依해 막다른 곳에 몰렸고, 他國의 支援은 遙遠해보였다. 抵抗이 無意味해 滅亡이 但只 時間問題임이 분명했다. 朝廷에서의 짧은 談論이 있은 後, 漢王 안(韓王安)은 秦나라에 降伏하고 漢나라는 滅亡하게 된다.

漢나라 滅亡 後 漢王 안(韓王安)은 南軍 影島(?都)의 黃酸(荒山)에 流配됐고, 秦나라는 새로운 管理를 大擧 派遣해 新正을 接受했다. 大多數의 한나라軍은 晉나라 軍隊로 編入되고 한나라 官吏와 貴族들은 쫓겨났으며 英地圖 大部分 몰수당한다. 秦나라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한나라의 郡民을 얻었지만 朝野에서 徹底히 排除된 한나라 貴族들의 不滿은 高調되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勢力도 穩全했다. 後에 新訂에서 漢나라의 舊 貴族들은 集團으로 叛亂을 일으키나 鎭壓당한다.

조나라 滅亡 [ 編輯 ]

4次 侵攻 以後 진나라 軍隊는 3年의 休息期間을 가졌다. 그동안 秦나라는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奇襲的으로 漢나라를 攻擊하여 降伏을 받아 멸망시킴으로써 近 10萬에 達하는 兵力을 고스란히 얻었고, 잦은 戰爭으로 줄어든 兵力을 回復하고 戶籍制度를 整備해 國家 統制力을 强化함으로써 動員力을 높여 다시금 征伐前을 企劃하고 있었다. 漢나라 滅亡 後 다음 目標는 距離로 보나 國力으로 보나 魏나라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한便 조나라는 몇 年 동안 天災地變에 시달렸다. 紀元前 231年에는 大軍에 大地震이 일어나 落書(洛西) 西쪽부터 北쪽으로는 平音(平陰)까지 大部分의 建物이 무너져 큰 被害를 입었고, 이듬해 나라 全體에 가뭄이 들어 飢饉으로 苦痛받았다. 連續된 災害로 인해 百姓들은 塗炭에 빠지고 軍事力은 弱化된다. 마치 趙나라의 滅亡을 暗示하는 듯했다. 마침 한나라를 征伐하던 해 秦나라 觀衆 地方에도 飢饉이 들어 苦痛받는 百姓들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秦始皇은 조나라 征伐을 미루려고 했다. 그러나 조나라 征伐을 主張하는 이들이 있었다. 蔚料, 理事를 爲始한 强勁派는 조나라를 六國 兼倂의 가장 큰 敵이라 보았다. 그들은 趙나라의 軍事力을 警戒했다 그리고 장평 大戰 에서 衰落했어도 三振(朝,位,한)中 가장 剛한 나라가 조나라였다. 일찍이 亡命한 簾波가 楚나라의 將帥로 지낼 때, 簾波는 楚나라의 軍士가 趙나라의 軍事만 못하다고 歎息했다. 趙나라의 軍隊는 質的으로 强했다. 조나라가 秦나라에 頑强히 버티는 것은 조나라 兵士의 個個人의 質的인 剛함이 根本的인 原因이었다. 秦나라 朝廷의 强勁派는 只今이 아니면 조나라를 征伐할 수 없다고 主張하며 나라에 飢饉이 들었음에도 不拘하고 秦始皇에게 조나라 征伐을 强力히 建議한다. 辰王은 그것을 妥當하다 여겼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조나라가 弱化된 틈을 타서 大大的으로 軍士를 일으켜 進擊한다.

辰王 情 18年, 紀元前 229年 (竈王 千(遷) 7年) 秦始皇의 命令下에 秦나라는 30萬에 이르는 大軍을 召集해 3로 方向으로 邯鄲을 向해 進軍시킨다. 3로 中 하나는 王戰이 이끄는 主力軍으로 20萬에 達했다. 태행산에서 出發해 定型을 占領하고 趙나라의 中部를 攻擊해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洋緞化와 강외가 이끄는 軍으로 河內의 秦나라群 8萬을 이끌고 臨場(臨?)을 지나 조나라의 首都 邯鄲을 向해 北上하여 包圍한다. 강외는 한段의 周邊部를 攻略한다. 다른 하나는 이신이 이끄는 軍으로 태행산에서 出發해 운중을 건너 大軍을 攻略한다.

秦나라의 軍隊는 飢饉을 無視하고 낸 軍隊이다. 必是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돌아갈 理 萬無하다. 이番 戰爭에서 國力을 總動員한 進俎 兩國의 總 兵力은 45萬 理想이었고 兵力의 數는 秦나라가 조나라를 上廻했다. 秦나라의 戰略的 目標는 王戰이 이끄는 主力軍이 趙나라의 中部를 攻略하여 조나라를 南北으로 갈라놓아 조나라 北部로부터 邯鄲으로 가는 支援을 遮斷하면서 邯鄲을 向해 南下하고 量短靴의 南路軍은 王全義 秦나라軍이 趙나라의 中部를 蹂躪하며 邯鄲乙向해 南進하는 사이 北上하여 兵力이 劣勢에 놓인 조나라 南部의 防禦線을 突破하고 邯鄲을 攻擊하는 것이다. 秦나라의 攻擊에 對備해 趙나라의 여러 城들은 城門을 걸어잠그고 籠城을 準備한다. 趙나라의 大將 耳目 은 私馬上으로 하여금 業을 지키게하여 量短靴의 南路君을 막게하고 自身은 10萬이 넘는 조나라 主力軍을 이끌고 北上했다. 王戰의 20萬 秦나라軍이 邯鄲을 向해 進軍했지만 耳目은 數十 里에 걸쳐 楷字와 堡壘를 쌓아놨고, 秦나라軍은 數次例의 攻勢를 펼쳤지만 耳目에게 격퇴당하며 兩軍은 膠着狀態로 들어가게 된다.

태행산을 넘어 河北 平原으로 進入한 王戰이 이끄는 軍士는 近 20萬에 達했다. 耳目에 依해 발이 묶였지만, 王錢은 優勢한 兵力을 바탕으로 軍을 나누어 趙나라의 要衝地를 攻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耳目이 바라는 바일 수 있다. 耳目은 王戰의 放心을 誘導하며 機會를 엿보고 있다.

趙나라의 醫안에서 番傲氣가 耳目이 守備만하는 것에 放心하고 耳目의 大軍을 앞에 두고 軍士를 나누었다가 갑작스럽게 反擊하는 耳目에 敗退當해 全君이 몰살당했다. 耳目은 오랫동안 北方의 大軍을 經營했고 오랜 골칫거리인 匈奴의 騎馬隊軍마저 전멸시킨 前歷이 있다. 大軍의 兵士들은 오랜期間 匈奴와 싸워와 勇猛하며 機動戰에 能했고 耳目이 이끌고온 大軍의 軍事中엔 騎兵이 많았다. 王戰이 番傲氣보다 좋은 條件으로 軍士를 이끌고 왔다고하나 河北平原의 넓은 戰場은 變數가 많다. 王戰이 軍을 나눈다면 各個擊破 될 危險性이 存在한다. 또한 補給路가 露出되고 强力한 北方 騎兵을 가진 耳目이 늘어진 補給路를 가만히 놔둘 理 없다. 王錢은 老鍊한 장수였고 性急하게 行動하지 않았다. 王戰과 이目의 對決에서 모든 條件이 王戰에게 유리했다. 이 事實을 잘 알고 있는 王戰에게 있어서 王戰이 할 수 있는 最善의 選擇은 耳目에게 機會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耳目이라는 强力한 壁을 무너뜨릴 다른 方法을 알고 있었다. 王錢은 大軍을 이끌고 이目의 조나라軍과 對峙狀態에 들어간 後 將兵들에게 굳건히 지키라는 命令을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晉나라 調整에 이目의 除去를 要請하는 擺撥을 보낼 뿐이었다.

沙工魔가 말했다.

「그렇다면 大王의 國歌는 百을 들어도 陳(秦)에 미치지 않으니 大王의 國家는 亡할 것입니다.」

竈王이 말했다.

「卿은 兆(趙)와 멀지 않으며 國史를 모두 가르쳐주셨으니, 부디 計略을 따르겠소.」

沙工魔가 말했다.

「大王께서 兆(趙)의 半을 찢어서 陳(秦)에 膳物한다면 陳(秦)은 칼날을 맞대지 않고도 兆(趙)의 班을 얻으니, 陳(秦)은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안으로는 兆(趙)의 守備가 싫고 밖으로는 諸侯의 救援이 두렵기에 陳(秦)은 반드시 이를 받을 것입니다. 陳(秦)李 땅을 받고 兵士가 退却하면 組(趙)는 折半의 國家를 지키며 스스로 保存하면 됩니다. 陳(秦)李 膳物을 받고 스스로 剛해지면 산동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인데, 兆(趙)가 亡하면 스스로 危險하기에 諸侯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두려움에 서로 救援하며 곧 合從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神이 請하건대 大王께서는 合從을 맺으시지요. 合從의 일을 이룬다면 이는 大王께서 名目으로는 兆(趙)의 半을 잃어도 實際로는 山洞을 얻고 陳(秦)에 對敵하는 것이기에 陳(秦)은 亡할 것입니다.」

竈王이 말했다.

「前날에 陳(秦)李 兵士를 보내서 兆(趙)를 攻擊하자 組(趙)는 何間에 12個의 絃을 膳物해서 땅이 깎이고 兵士는 弱해졌는데도 끝내 陳(秦)의 근심을 면하지 못했소. 只今 다시 兆(趙)의 半을 나누고 强한 陳(秦)에 준다면 힘써도 능히 스스로 保存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亡할 것이오. 부디 卿은 計略을 고쳐주시오.」

沙工魔가 말했다.

「神은 어릴 적에 陳(秦)의 刀筆(刀筆)李 되었으며 館長(官長)의 도움으로 작은 벼슬을 얻었기에 일찍이 兵士의 首長이 되어보지 못했는데, 大王을 위해 組(趙)의 모든 兵士를 얻기를 要請합니다.」

竈王이 將帥로 삼지 않았다.

沙工魔가 말했다.

「神이 어리석은 計略을 바쳐도 大王께서 쓰지 않으니, 神은 大王을 섬길 수 없기에 스스로 떠나기를 願합니다.」

沙工마가 兆(趙)를 떠나서 平原(平原)을 건넜다.

平原振鈴(平原津令) 곽유(郭遺)가 慰勞하며 물었다.

「晉(秦)의 兵士가 兆(趙)를 攻擊한다던데 上客께서 兆(趙)에서 오셨으니, 兆(趙)의 일은 어떻습니까?」

沙工마는 그의 竈王을 위한 計略을 쓰지 않았던 것과 兆(趙)가 반드시 亡한다는 것을 말했다. 平原令(平原令)李 말했다.

「上客의 생각으로는 兆(趙)가 어떤 때에 亡하겠습니까?」

沙工魔가 말했다.

「朝(趙)의 장수가 務安郡이면 1年 만에 亡할 것인데, 萬若 務安郡을 죽이면 半年도 지날 수 없소. 竈王의 臣下에 한창(韓倉)이 있는데 阿諂으로 竈王과 投合하여 그 交分이 매우 親하며, 그 사람됨이 賢明함을 미워하고 功臣을 猜忌하고 있소. 只今 國家가 위태롭고 亡하는데 王이 반드시 그 말을 쓸 것이기에 務安郡은 반드시 죽을 것이오.」

이미 3次 侵攻부터 진나라의 攻擊은 耳目 個人의 能力으로 멈춰낼 수 있는 性格의 것이 아니었다. 卑下와 飜悟에서 진나라君을 擊退했다고 하지만 秦나라에게있어 그것은 一種에 消耗戰에 가까웠다. 戰略的으로 보더라도 秦나라가 4次例의 侵攻 中에 2番의 敗北를 했지만 거의 每해 되풀이된 大規模 戰爭에 조나라는 數十萬의 壯丁을 잃으면서 瀕死狀態에 빠져버렸고, 한나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秦나라는 後方을 걱정할 必要가 없었다. 耳目이 또다시 수많은 秦나라君을 죽여 없앤다고 해도 商鞅의 改革으로 誕生한 兵營國家人 秦나라는 그것으로 인해 무너지는 性格의 國家가 아니다. 限時的으로 秦나라君을 擊退한다 해도, 秦나라軍은 다음番에 더 强한 兵士들과 더 巧妙한 方法으로 조나라를 侵攻해 올 것이었다. 秦나라는 莫强한 國力과 國家權力을 가지고 있었고 相對的으로 弱한 國力과 國家 權力을 가지고 있는 조나라는 秦나라의 繼續되는 侵攻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秦나라와 조나라의 主力軍이 長期間의 對峙狀態에 들어가고 羊短靴의 南路軍마저 私馬上 이 이끄는 조나라君의 守備를 뚫지 못해 戰況은 遲遲不進했다. 趙나라의 民心은 洶洶했다. 거듭된 戰爭과 災害로 民間에는 조나라가 亡한다는 妖言이 公公然하게 떠돌고 있었다. 조나라 朝廷 內部의 狀況도 바깥의 民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조나라 朝廷의 代身中에도 自身의 安危를 걱정하는 者들이 생겨난다. 이런 狀況해서 秦나라는 反間計를 劃策한다. 目標는 趙나라의 大將 耳目과 私馬賞이다. 秦나라는 反間計를 펼치기에 앞서 趙나라의 宰相 곽개를 買受하기로 한다. 宰相이었던 商人 出身의 곽개는 阿諂에 能해 竈王 천이 太子時節부터 寵愛해오던 代身이다. 小人輩에 탐욕스럽고 怏宿이었던 簾波마저 謀陷하여 亡命시킨 바 있는 곽개는 秦나라의 훌륭한 內通者가 될 수 있다. 조나라 朝廷에는 秦나라의 諜者가 많았다. 秦나라는 곽個 周邊에 있는 諜者들을 통해 日만에 達하는 黃金을 곽개에게 바치고 甘言利說로 相國 곽개를 秦나라로 끌어들인다.

곽개가 宰相이라 하나 고작 곽個 하나로 耳目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진나라에는 믿음직한 助力者가 한 名 더 있었다. 바로 趙나라의 太後이다. 度양왕이 살아있을 때, 當時 後宮이었던 妓女出身의 太后는 計略을 세워 太子인 가와 그의 母后인 王后를 頻繁히 謀陷했다. 度양왕은 이 妓女 出身의 女子를 寵愛했고 結局 가를 廢하여 천을 太子로 세우고 妓女를 王后로 세운다. 이때 度양왕이 太子 가를 廢하고 천을 太子로 세우는 것에 對해 耳目에게 意見을 물었고, 耳目은 千의 어머니를 娼妓라 稱하며 反對 해 侮辱을 준 적이 있다. 娼妓 出身의 太后는 사치스러웠고 큰 돈과 美男에 弱했다. 그리고 耳目을 憎惡했다. 이런 力學關係를 利用한 秦나라의 公爵은 成功했고, 곽個, 太后를 비롯한 조나라 調停案의 反逆者들은 繼續해서 耳目을 謀陷하기 始作했다.

곽개는 이目의 筆體를 따 書信을 造作한다. 書信은 아마 진나라 사람이 造作한 것이다. 곽개는 竈王 千과의 자리에서 耳目이 涵養의 사람들과 內通하고 反逆을 謀議함을 主張했다. 竈王 千에게는 충직함과 奸邪함을 區別할 수 있는 能力이 없었다. 이를 본 竈王 천은 크게 憤怒하여 일의 是非를 따짐없이 耳目을 罷免하고 兵馬之權의 回收를 命令한 다음 王族인 鳥銃에게 統率을 代身하게 했다. 하지만 耳目은 戰場의 장수는 王의 命令조차 拒否할 수 있다는 理由를 들어 兵權을 返納하지 않는다. 이에 竈王 천은 隱密히 計略을 세웠고, 祕密裏에 사람을 보내 耳目을 慘殺한다. 將軍 社마상은 唐慌하여 急히 立朝해 竈王에게 諫言을 올리지만, 私馬上의 感情이 激動하여 過激한 言行을 함에 따라 私馬像마저 파면당하게 된다.

趙나라의 國軍들은 모두 11回에 達하는 쿠데타에 露出되어왔다. 趙나라의 君主들은 軍隊를 統率하는 將軍들에게 늘 警戒心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重要한 狀況에서 將兵들은 王보다 將軍의 命令을 받드는 傾向이 있었다. 兆 武寧王 胡服騎士 로 始作해서 여러 軍 改革을 試圖했으나, 沙丘에서의 內部政變으로 悲慘하게 굶어죽음에 따라 改革은 坐礁되었다. 이로 因해 조나라는 軍隊를 統率하는 將軍을 效率的으로 監視 統制하는 制度가 全無했다. 조나라를 數次例 滅亡의 危機에서 救해낸 耳目은 趙나라의 戰爭英雄이었다. 하지만 警戒의 對象이기도 했다. 秦나라의 反間計로 인한 것이긴 하나, 趙나라의 君主에게 있어서 쿠데타의 疑惑이 있고 統制할 수 없는 將軍에 對하여 極端的인 選擇 外에 다른 方道가 없었다. 이것은 조나라 體制의 根本的인 問題이기도 했다.

社마상은 이目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社마상은 趙나라의 奸臣들이 自身마저 죽이지 않을까 근심했다. 하여 社마상은 一家를 추스려 조나라를 떠나 渤海灣으로 逃走한다. 趙나라의 많은 將兵들은 그들이 尊敬하던 陸軍 元首의 悲慘한 죽음을 哀痛해했다. 이目의 죽음으로 인하여 조나라君의 士氣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耳目과 私馬賞을 代身해 鳥銃과 安取가 새로운 大將으로 赴任했으나, 본디 鳥銃과 安取는 庸劣한 者들이었다. 그들은 大軍을 指揮할 能力이 없었다. 辰王 情 19年, 紀元前 228年 (竈王 千(遷) 8年) 봄, 王戰의 指揮下에 秦나라軍은 大大的인 攻勢를 펼쳐 조나라君을 大破한다. 조나라軍은 大파當해 大將 鳥銃은 慘殺되었고 將軍 安取는 敗殘兵을 이끌고 한단성으로 달아나 서둘러 防禦에 나섰지만 晉나라 軍隊는 빠르게 조나라 領土를 占領하고 進軍하여 한丹誠에 到着했다.

竈王 천은 조나라軍이 大破되고 鳥銃이 죽었음을 알고 驚愕하며 急히 大臣들을 불러모아 對應策을 論議한다. 곽개는 강대한 秦나라軍에 더以上 맞서도 所用이 없음을 主張하고 竈王에게 降伏을 勸誘한다. 結局 竈王천은 降伏을 決定하고 조나라는 滅亡하게 된다. 竈王 천은 常用(上庸)의 房陵(房陵)에 流配된다. 이때 孔子 가는 竈王의 使臣이 秦나라에 降伏을 淸艦에 따라 大勢가 기움을 알고 將軍 安取와 氏族 數百 家口를 이끌어 北쪽의 대군(代郡)으로 도망친다. 北쪽으로 도망쳐 잔病을 收拾하고 상곡群(上谷郡)과 大君(代郡)을 占據한 弔歌는 王으로 擁立되어 竈王을 稱하여 抵抗하나 辰王 情 25年, 紀元前 222年 요동을 征伐하고 돌아온 王分의 進軍에 依해 滅亡한다.

燕나라 滅亡 [ 編輯 ]

太子段은 昨今의 形勢를 보고 대단히 憂慮하여 스승인 國務(鞠武)에게 意見을 물었다.

國務(鞠武)가 말했다.

"晉나라 땅은 天下에 두루 퍼져서 한나라ㆍ위나라ㆍ조나라를 威脅하며, 北쪽으로 감천산(甘泉山)ㆍ曲球(谷口) 같은 要塞가 있고 南쪽으로 경수(涇水)ㆍ衛戍(渭水)의 기름진 땅이 있으며, 파(巴) 땅ㆍ韓中(漢中) 땅의 풍요로움을 차지하고 오른쪽으로 農書(?西) 땅ㆍ燭(蜀) 땅의 山地에 왼쪽으로 同官(潼關)ㆍ효산(?山)의 險難함이 있으며, 百姓은 많고 兵士는 사나우며 兵器도 남아돕니다. 出兵할 뜻만 있다면 將星(長城)의 南쪽과 歷數(易水)의 北쪽은 安定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업신여겨졌다는 怨恨으로 逆鱗(逆鱗)을 건드리고자 하십니까!"

太子 段 이 물었다.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소?"

國務(鞠武)가 答했다.

"請하건대 제가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刑家가 太子段에게 말했다.

"太子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神이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只今 떠나봐야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秦나라에 가까이할 수가 없습니다. 저 番將軍은 辰王이 1千 根의 黃金과 1萬 好意 食邑을 내걸고 찾고 있습니다. 萬若 番將軍의 머리와 燕나라 獨航(督亢) 땅의 地圖를 얻어 辰王에게 받들어 바친다면 辰王은 반드시 기뻐하며 神을 만날 것이니, 神은 비로소 恩惠를 갚을 수 있습니다."

太子段이 말했다.

"番將軍은 困窮에 處해 나에게 와서 몸을 맡겼는데 내 사사로운 欲心으로 德望 있는 者의 뜻을 해치는 건 차마 할 수 없으니, 부디 그대는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荊軻 는 太子가 차마 할 수 없을 것을 알고 마침내 사사로이 番傲氣를 만나 말했다.

"秦나라가 將軍을 待遇하는 것이 甚하여 父母와 種族은 모두 도륙당했다고 들었습니다. 只今 듣기에 將軍의 머리에 1千 根의 金과 1萬 好意 食邑을 내걸고 求한다는데, 將軍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番傲氣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歎息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恒常 骨髓에 사무치도록 괴로운데 어찌할 것인가, 그 計略을 모르겠습니다!"

荊軻 가 말했다.

"只今 單 한마디로 燕나라의 걱정을 解決하고 將軍의 怨恨을 갚을 方法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番傲氣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어찌해야 합니까?"

刑家가 말했다. "부디 將軍의 머리를 얻어 辰王에게 바치면 辰王은 分明 기뻐해 神을 만날 테니, 神이 왼손으로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찌르면 將軍의 怨讐를 갚고 燕나라의 恥辱도 씻길 겁니다. 將軍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番傲氣는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팔을 움켜잡고 나아가 말했다.

"이는 神이 밤낮으로 이를 갈고 마음을 썩히던 일이니, 只今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렀다. 太子가 이를 듣고 달려와서 屍體에 엎드려 痛哭하며 매우 슬퍼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마침내 番傲氣의 머리를 箱子에 담고 봉했다.

邯鄲이 陷落되고 孔子 가가 大軍으로 쫓겨들어온 後에 얼마 지나지 않아 秦나라軍은 歷數(易水)에 이르른다. 漢나라와 조나라를 멸망시킨 秦나라軍隊의 威容에 年王姬(燕王喜)와 群臣들은 놀라 戰戰兢兢하며 秦나라의 大軍이 머지 않아 燕나라로 닥쳐올 것임을, 막을 수 없을 것임을 直感한다. 太子段의 太傅(太傅)職責에 있었던 國務(鞠武)는 太子段에게 西쪽으로는 大, 南쪽으로는 制와 聯合하고, 楚나라와 同盟을 맺은 다음 北쪽으로는 匈奴와 友好關係를 形成해 秦나라의 野慾에 共同으로 抵抗할 것을 建議한다. 하지만 太子段은 關東 諸侯의 많은 官吏들이 秦나라에 服從함을 알고 있다. 再次 合從君을 結成하는 것은 不可能했다. 하여 辰王 情(政) 20年(年王姬(燕王喜) 28年), 紀元前 227年 兄가자辰王(荊軻刺秦王)의 謀略을 꾀하나 失敗하고 만다.

刑家에 依한 辰王 暗殺未遂 事件 以後, 憤怒한 辰王 鄭은 卽時 大軍을 일으켜 王錢(王?)과 辛勝(辛勝)에게 燕나라를 攻擊케한다. 燕나라는 大王 가가 이끄는 趙나라의 殘餘 勢力과 聯合하여 진나라軍에 抵抗하지만 秦나라軍은 歷數(易水)의 西쪽에서 이를 물리친다. 辰王 情(政) 21年(年王姬(燕王喜) 29年), 紀元前 226年 辰王 鄭은 王戰의 軍에 수많은 兵士를 增員하였고, 이에 王錢은 燕나라君을 大破하여 首都인 계성(?城)을 占領한다. 연왕喜와 太子段은 東君의 主導인 楊平(襄平)으로 逃走한다. 연왕喜가 東쪽으로 도망쳤고, 王戰의 本隊는 兆價의 後方攻擊을 念慮하여 연왕희를 無理해서 追擊하지 않았지만, 眞藏 이신(李信)의 別動隊는 數千의 病魔를 이끌며 後方에서 攻擊을 멈추지 않고 연왕희를 繼續해서 追擊해 硏修(衍水)에서 太子段을 다시금 擊破하여 燕나라 主力軍을 소멸시켰다. 太子段은 楊平에 到着한 後 附近의 硏修(衍水)에 숨어있었다.

秦나라 將帥 이신이 연왕을 急히 追擊하자 大王(代王) 條가(趙嘉)는 연왕 演戱에게 글을 傳했다. "秦나라가 燕나라를 多急하게 追擊하는 理由는 太子 단 때문입니다. 只今 王께서 眞實로 段을 죽여 辰王에게 바친다면 辰王은 반드시 마음을 풀고 多幸히도 社稷에 祭祀를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 上疏文

이때 大王가는 大軍에 돌아가있었다. 本來 大王가는 2年 동안의 準備로 능히 秦나라軍과 一戰을 치룰 能力이 있었으나, 同盟을 맺은 燕나라軍이 秦나라의 猛烈한 攻勢에 너무나 脈없이 무너짐은 그도 豫想하지 못한 바였다. 燕나라는 秦나라軍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同盟國인 燕나라 의 滅亡은 어떻게든 막고 後日을 圖謀해야만 했다. 大王가는 연왕喜에게 書信을 보내 戰爭勃發의 原因이자 兄가자辰王(荊軻刺秦王)의 背後인 太子 段 을 죽여 秦나라에 바치도록 慫慂한다. 그 外에 時間을 벌 수 있는 方法은 없었다. 연왕喜는 臺王家의 말을 따라, 太子段이 몸을 숨긴 곳으로 사람을 보내 太子段을 죽이고 그 목을 秦나라에 바친다. 연왕喜가 太子段의 목을 바침으로써 平和를 求乞하여 진나라의 攻勢는 멈추었지만, 秦나라는 위秒 두 나라에 兵力을 集中하였기에 年祚 兩國의 殘存勢力에 對한 攻擊을 暫時 멈춘 것에 不過했다. 辰王 情(政) 25年(年王姬(燕王喜) 33年), 紀元前 222年 滅初, 滅位 後에 辰王 鄭은 王分(王賁)에게 命하여 軍을 이끌고 요동을 攻擊하게 한다. 연왕喜는 捕虜로 잡히고 燕나라는 滅亡하게 된다.

위나라 滅亡 [ 編輯 ]

辰王 情 21年, 紀元前 226年 秦나라軍은 燕나라의 首都 界(?)를 占領하고 北方에 決定的인 勝利를 取함과 同時에 住公을 南쪽으로 튼다. 秦나라 名匠 王戰의 아들 王分은 10萬의 軍士를 이끌고 楚나라의 北部地域을 攻略하여 열個의 城을 占領해 樵軍을 威脅하며 戰線을 形成한다. 갑작스럽게 不意의 打擊을 받은 楚나라는 秦나라君의 威勢에 壓倒되어 敢히 君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醋,위에 對한 兩面戰線을 形成하며 위나라 에 對한 楚나라의 支援을 遮斷한다. 辰王 情 22年, 紀元前 225年 왕분이 이끄는 10萬 秦나라軍은 北上하여 위나라를 奇襲的으로 攻擊해 魏나라의 境內로 들어서 빠르게 魏나라의 首都 大量(大梁)에 다달은 다음 城을 包圍한다.

갑작스럽게 秦나라의 侵攻을 받아 首都가 包圍되었지만, 위왕가(魏王假)와 大量의 郡民들은 要塞化된 都市의 防禦力에 依支하여 決死抗戰을 擇한다. 大量性이 王분에 依해 이미 孤立無援의 處地가 됐지만, 이 城은 悠久한 抗戰의 歷史를 가지고 있다. 慰撫後時期에 建設되어 位 혜왕 (魏惠王) 때 首都가 된 大量性은 周到綿密하게 計劃되어 完成된 都市이다. 大量性은 크기 自體도 巨大한 데다 城壁도 높다. 周圍에 縱橫으로 그물 같은 水雲網마저 가지고 있어 物資供給이 원활한 데다 敵의 攻勢를 沮止하는 데도 有用하다. 이와 같이 都市 全體가 有機的으로 돌아가는 防禦體系의 大量性은 侵略軍에게는 골칫거리이다. 진나라의 軍士가 勇猛하다하나 大量性의 堅固한 防禦施設은 아무리 秦나라群이라해도 어찌할 道理가 없다. 왕분이 이끄는 秦나라軍은 여러날에 걸쳐 大量性에 數次例의 猛攻을 加했지만 要塞化된 性을 陷落시키는 것이 不可能해 死傷者만 늘어날 뿐 아무런 所用이 없었다. 大量性의 軍士는 10萬에 達했고, 城內의 軍糧과 洋초는 充分했다. 이대로라면 아마 몇 年이 걸려도 陷落시키지 못할 것이다.

數次例의 攻勢가 大量性에 아무런 影響을 주지 못했다. 戰況이 長期戰으爐가면 不利해지는 것은 秦나라이다. 秦나라軍이 着實히 關東諸侯들의 領土를 蠶食할수록 그에 相應하여 戰線이 늘어나 神經쓸 것이 많아졌다. 北方에서는 조나라와 燕나라의 殘餘勢力이 버티고 있고, 언제 터질지 모를 占領地의 叛亂을 對備해야했다. 한 해 前에는 漢나라의 貴族들이 新訂에서 集團으로 叛亂을 일으키기도 했다. 遠交近攻 政策과 秦나라의 內部工作에 힘입어 그동안 齊나라는 秦나라의 充實한 友邦國을 自處하며 他國의 滅亡을 傍觀해왔지만, 六國의 滅亡이 實際的 威脅으로 다가온 以上 언제까지 傍觀하리라고 壯談할 수 없다. 萬若 秦나라의 大軍이 繼續해 위나라에 묶인 채로 있는다면 分明히 새로운 威脅이 秦나라의 野慾을 좌절시킬 것이다.

"무릇 한(韓)李 亡한 뒤에 出兵하는 날이면 위(魏)가 아니면 攻擊할 相對가 없습니다. 陳(秦)은 본디 回(懷)ㆍ某(茅)ㆍ經句(邢丘)를 所有했는데, 櫃眞(?津)에 城을 쌓고 河內(河內)에 臨한다면 河內(河內)의 공(共)ㆍ級(汲)은 반드시 위태롭게 되며, 鄭(鄭) 地域을 所有하고 元翁(垣雍)을 얻어서 兄擇(熒澤)의 물을 使用해 大量(大梁)에 붓는다면 大量(大梁)은 반드시 亡합니다."

일찍이 信陵君이 恨을 救援하자며 위왕에게 有稅할 때 手工의 危險性을 警告한 바 있다. 大量性이 세워진 곳은 先天的으로 地形地物이 不足했다. 大量은 오늘날의 허난省 開封으로 黃河의 거센 물줄기가 隣接한 곳이다. 不過 몇리 떨어진 곳에서 黃河의 물줄기가 천둥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또한 大量性은 그 地勢가 낮아 高度가 黃河를 밑돌았다. 正攻法으로 大量性을 陷落시키기 힘들다 判斷한 王分은 方法을 바꾸어 大量을 水沒시키기로 한다. 大量의 地勢를 把握한 王分은 軍士들로 하여금 大量性 周圍의 水雲路를 掌握하여 改造하게하고 大量性을 둘러싸는 堤防과 大量性 西北쪽에 물길을 틀게해 黃河의 물을 끌어들여 그 下流를 막는 堤防을 쌓도록했다. 때는 初봄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秦나라軍이 堤防을 쌓자 10日에 걸쳐 쉬지 않고 비가 내려 둑에서 振動하는 물살이 巨大했다. 充分한 물이 쌓이자, 王分의 命令下에 둑은 破壞되고 大量性은 물에 잠긴다.

大量性이 물에 잠기고 時間이 지날수록 많은 死傷者가 생겨났다. 救援軍은 오지 않았고 한番 大量性을 덮친 물은 빠질 幾微를 보이지 않았다. 城內가 물에 잠기자 물에 닿은 穀食은 썩어들어갔다. 오랫동안 물에 잠긴 郡民들의 皮膚마저 썩어들어가기 始作했다. 우물마저 汚染되어 汚染된 물을 먹고 죽는 者가 續出했다. 大量性이 물에 잠긴 지 3달이 되어 물에 잠긴 城壁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漸次 大量性의 城壁이 무너지기 始作해 性의 곳곳이 뚫리게 된다. 大量性의 城壁이 무너지자 王分은 大量性에 總攻勢를 命한다. 數次例의 攻防戰 後, 위王家는 더以上의 抵抗이 無意味하다 判斷해 城門을 열고 秦나라에 降伏한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滅亡했다. 位王室은 머지 않아 살해당한다.

楚나라 滅亡 [ 編輯 ]

辰王 情 21年, 紀元前 226年 辰王 鄭은 新訂에서 일어난 叛亂을 無慈悲하게 鎭壓하고 榮進(?陳)에 있던 한王案을 師事한다. 豫想치 못하게 한나라의 新訂에서 叛亂이 일어난 것은 辰王 情이 占領地의 郡民들에 對한 警覺心을 갖게했다. 비록 當場은 秦나라의 勢力이 剛해 占領地의 郡民들을 힘으로 누르고 있어 敢히 反旗를 들지 못하지만, 萬一 秦나라의 形勢에 龜裂이 일어난다면, 地下의 逆徒들은 叛亂을 일으킬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秦始皇은 楚나라의 孔子 昌平君을 楚나라의 옛 都邑지었던 榮進(?陳)으로 보내어 楚나라 郡民들을 慰撫하게 한다.

다음은 楚나라를 占領할 次例인데 天下統一 할 때 걸리적 거리는게 楚나라였다 제나 鳶은 이미 衰落하여 쉽게 合倂시킬 수 있지만 初는 비록 衰落해져있어도 如前히 南方의 大國이라 愼重을 期할 수 밖에 없었다.

秦나라 長壽 이신(李信)은 젊고 勇敢해 일찍이 兵士 數千 名을 이끌고 燕나라 太子 演壇(燕丹)을 硏修(衍水)까지 뒤쫓아 敵軍을 무찌르고 演壇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는데, 秦始皇帝는 그를 賢明하고 勇敢하다고 여겼다. "내가 楚나라를 攻擊해 빼앗으려고 하는데, 將軍이 생각하기에 兵士가 어느 程度면 되겠소?" 이신이 答했다. "20萬이면 充分합니다." 辰王 鄭은 거듭하여 王戰에게 물었다. 王戰이 答했다. "반드시 60萬이 아니면 안 됩니다." 辰王 鄭은 말했다. "王 將軍도 늙었구려, 무엇을 그리 怯을 내시오! 李 將軍이 果然 氣勢가 勇猛하다더니, 그 말이 옳소." 드디어 이신과 몽염(蒙恬)을 將帥로 삼아 兵士 20萬 名을 이끌고 南쪽으로 楚나라를 征伐하게 했다. 王錢은 自身의 말이 쓰이지 않자 病을 핑계 대며 牝羊 땅으로 돌아가 老年을 보냈다.

辰王 情 22年, 紀元前 225年 왕분이 이끄는 10萬 進軍이 위나라를 攻擊하는 동안, 辰王 鄭은 楚나라에 對한 總攻擊을 命令한다. 그 勇猛함과 果斷性을 證明한 바 있는 이신을 大將에 任命하고 몽무를 部長으로 삼아 20萬 大軍으로 楚나라를 大大的으로 攻擊하게 한다. 秦나라軍은 楚나라軍이 有利할 늪지와 물을 避해 秦나라의 起兵이 活動하기 便한 平原地形을 主로하여 攻擊路를 잡는다. 이신은 軍士를 둘로 나누어 自身은 坪餘(平?)를 攻擊하고 部長 몽염은 寢具(?丘)를 攻擊하게 해 陷落시켜 楚나라君을 大破한다. 이신은 再次 言英(??)을 깨뜨리고 性部(城父)에서 몽무와 會合하기로 한다. 이신과 몽염이 指揮하는 진나라軍은 榮進部와 東南部에서 楚나라君을 大破했다. 楚나라 征伐은 順調롭게 進行되었고, 이신은 君을 合勢하여 楚나라의 首都인 壽春으로 南下해 一擧에 楚나라를 멸망시킬 計劃이었다.

楚나라는 몇 代에 걸쳐 庸劣한 君主의 支配下에 있어와 國力은 脆弱해지고 國內에는 쓸 만한 將帥가 項軟뿐이었다. 楚나라는 秦나라軍에 連이어 敗北하였고, 多急해진 楚나라 調整은 繼續해서 秦나라에 땅을 떼어줄 것을 約束하며 强化할 것을 要請했다. 戰況은 楚나라가 不利해 秦나라의 秒前 氣勢를 막지 못했지만, 楚나라의 最精銳軍團은 保存된 狀態였다. 港煙軍이 隣近에 到着했을 때 마침 昌平軍이 擧兵하여 榮進 一帶를 掌握하고 이신의 退路와 普及을 끊는다.

秦나라가 占領한 많은 地域에서 叛亂을 謀議한다. 楚나라의 옛 首都인 榮進도 그와 다르지 않다. 辰王 鄭은 楚나라를 征伐하기에 앞서, 昌平軍이 楚나라의 公子라는 특수한 身分으로 말미암아 楚나라의 郡民들을 慰撫하여 榮進의 時局을 安定시키길 願했다. 秦나라의 天下統一이 可視化되면서 楚나라 征伐은 避할 수 없는 일이 된다. 秦나라의 宰相을 지냈으나 楚나라의 王族이기도 했던 昌平群 雄鷄는 楚나라의 滅亡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昌平軍은 楚나라의 公子라는 특수한 身分으로 半眞勢力을 結集하여 秦나라君의 後方에서 叛亂을 일으킨다. 本來 楚나라의 땅이었던 榮進一帶의 楚나라 人民들과 가까운 한나라 人民들도 그에 呼應하여 叛亂勢力은 瞬息間에 榮進을 掌握하고 秦나라의 後方普及을 遮斷하며 秦나라君의 退却路를 掌握하여 이신軍에 對한 包圍殲滅을 圖謀하게 된다.

楚나라 征伐을 進行하던 이申君은 豫想치 못한 昌平君의 叛亂으로 包圍殲滅될 危機에 處한다. 一旦 叛亂을 鎭壓하기 위해 聲部에서 물러나 一旦 後方의 威脅이 되는 昌平君을 鎭壓하기로 했고 退却하여 叛亂軍과 戰鬪를 벌인다. 結果的으로 본다면 20萬의 秦나라軍은 楚나라를 征伐하기에 不足한 數字였다. 秦나라軍에 龜裂이 생기자 곧바로 楚나라가 反擊할 餘地를 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20萬 大軍을 이끈 楚나라의 總司令官 項軟은 聖父에서 南下할 이申君을 對備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秦나라軍이 사라졌고 이에 項軟은 秦나라軍에 某種의 龜裂이 일어난 것을 斟酌하여 진나라君을 追擊하기 始作했다. 項軟은 秦나라君을 3日 밤낮 동안 追擊한 後 叛亂을 鎭壓하기 위해 退却했던 진나라君을 後方에서 奇襲한다. 이신은 이에 沈着하게 指揮하여 楚나라君을 막아냈으나 秦나라의 狀況은 좋지 않았다. 時間을 끌면 끌수록 敵國의 包圍網은 完成되어 本軍은 全滅을 避하지 못할 것이었다. 얼마의 犧牲을 甘受하더라도 빠르게 退却하는 것만이 最善의 選擇이었다. 項軟은 繼續되는 追擊戰 끝에 項軟은 秦나라君을 무찔러 일곱名의 道胃와 無數한 軍士를 죽인다. 이신은 敗走해 敗殘兵을 이끌고 退却한다. 項軟은 조나라 國境까지 追擊해왔으나 堡壘에 막혀 할 수 없이 旋回해 南軍을 攻略한다. 項軟은 楚나라의 옛 失地를 되찾고 繼續해 西進하여 漢나라의 境內로 들어선다.

秦始皇帝가 이를 듣고 크게 怒하여 스스로 牝羊 땅으로 달려가서 王戰을 만나 謝罪하며 말했다.

"寡人이 將軍의 計略을 쓰지 않아 이신이 果然 晉나라 軍隊를 욕보였소. 只今 들으니 楚나라 兵士가 날마다 西쪽으로 進擊하고 있다고 하니, 將軍께서 비록 病中이라고 해도 過人을 버리지 말아 주시오!"

王戰이 辭讓하며 말했다.

"魯迅은 지치고 병들어 精神이 昏迷하니, 大王께서는 부디 賢明한 장수를 擇해주십시오."

秦始皇帝가 謝罪하며 말했다.

"그만둬주시오, 將軍께서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王戰이 말했다.

"大王께서 어쩔 수 없이 神을 쓰고자 하신다면, 60萬 名의 兵士가 아니면 안 됩니다."

秦始皇帝가 말했다.

"將軍의 計略을 따르도록 하겠소."

이에 王戰이 將帥가 되어 兵士 60萬 名을 이끄니, 秦始皇帝가 몸소 파수(?水)까지 나와 王戰을 餞送했다.

王戰이 가면서 훌륭한 논밭과 邸宅, 庭園과 蓮못을 달라고 甚할 程度로 거듭 要請했다.

秦始皇帝가 말했다.

"張君은 가면서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오?" 王戰이 말했다.

"大王의 將帥가 되어 功을 이루었음에도 끝내 後에 封해지지 못했으니, 大王의 關心이 神에게 쏠려 있을 때를 利用하여 庭園과 蓮못을 請해 子孫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입니다."

秦始皇帝는 크게 웃었다. 王戰이 棺에 이르러 5番이나 使臣을 보내어 좋은 논밭을 要請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將軍께서 代價를 求乞하는 게 너무 지나치십니다."

王戰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무릇 辰王은 교만하며 사람을 믿지 않는 性格일세. 그런데 只今 秦나라가 텅 빌 程度로 나라의 兵士를 모두 나에게 맡기고 있으니, 내가 子孫에게 물려주기 위해 논밭과 邸宅을 要請해 다른 뜻이 없음을 알리지 않으면 眞王께서는 가만히 앉아 생각하며 나를 疑心하지 않겠는가?"

辰王 鄭은 楚나라 가 비록 衰弱해졌으나, 땅이 넓고 人口가 豐富해 如前히 剛한 國力을 가지고 있어 쉽게 멸망시킬 수 없음을 알게 된다. 辰王 鄭은 親히 王戰의 집이 있는 牝羊으로 가 王戰에게 60萬 大軍을 指揮해줄 것을 懇請하여 王戰이 60萬 大軍을 이끌고 楚나라로 出征하기로 한다. 老將軍이 60萬 大軍을 指揮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능히 君主의 新任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60萬의 軍士는 秦나라의 모든 兵力을 動員한 것이다. 萬若 王戰이 이番 戰爭에서 敗北하여 楚나라軍이 北上한다면 삼진의 貴族들이 呼應하여 진나라君을 몰아낼 것이다. 辰王 情 23年, 紀元前 224年 王戰과 몽무는 60萬大軍을 이끌고 楚나라를 再次 攻擊하여 坪餘로 進出한다. 이에 초왕 부추는 全國의 兵力을 動員하였고 項軟에게 秦나라君을 물리칠 것을 命令한다. 楚나라의 大將 項軟은 本來 이끄는 20萬의 軍士와 초왕 부추에게서 增員받은 20萬을 합친 40萬大軍을 이끌고 坪餘에서 進軍과 對峙한다. 一戰을 決心한 楚나라群 앞에서, 王錢은 10餘 里에 걸친 津을 펼치고 堅壁擧手(見?擧守)하며 지킬 뿐 戰鬪를 하지 않는다. 楚나라 朝廷에서는 秦나라軍의 이러한 行動에 對해 그 意中을 把握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진나라軍은 나라 全體의 將兵을 이끌고 왔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秦나라軍이 堅固한 要塞를 쌓고 굳게 지키자 港鳶島 그에 맞춰 代置한다. 以後 楚나라軍이 秦나라君을 挑發하며 戰鬪를 誘導했지만 秦나라軍은 對應하지 않는다. 秦나라軍은 60萬에 達하여 그 數量이 楚나라君을 上廻하였지만, 大軍의 戰鬪는 한 番의 決戰에 그 運命이 갈리는 것이다. 決戰에 앞서, 秦나라君의 數量은 많았지만 身柄이 많아 그 力量이 不足해 勝利를 壯談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王戰이 楚나라 征伐에 對하여 辰王 鄭에게 諫言한 것은 國家 全體의 力量으로 楚나라를 征伐하자는 것이다. 辰初 兩國 軍隊만의 對決이 아닌 兩國 政治力의 對決마저도 不辭하자는 것이었다. 辰初 兩國이 軍事를 總動員하여 對峙한 채로 繼續해 時間이 흐르면 먼저 分裂하여 틈을 보여주는 것은 分明히 楚나라日 것이다. 秦나라는 그 틈을 파집고 楚나라를 무너뜨리면 된다. 坪餘에서 100萬에 達하는 軍士가 對峙狀態에 들어갔다. 三振을 멸망시킨 秦나라는 後方의 걱정 없이 大量의 物資를 支援하며 長期戰을 벌인다. 王錢은 每日 量과 소를 잡아 兵士들과 食事를 하고 兵士들을 훈련시켜 漸次 兵士틀의 鬪志와 士氣가 높아진다. 兵士들은 士氣衝天하여 當場이라도 戰場에나가 싸우길 바라는 地境에 이른다. 辰初 兩國의 軍士가 總動員되어 한 해를 넘겨 楚나라는 農業收穫에 蹉跌이 생기고 政治的으로도 龜裂이 생기기 始作한다. 楚나라는 政治的으로도 軍事的으로도 落後돼있다. 軍勢를 秦나라만큼 安定的으로 維持할 수 없다. 장평에서 조나라가 조급히 軍士를 움직여 敗함은 大軍이 여러 해를 代置함으로 나라 全體가 疲弊해져 더以上 견딜 수 없는 狀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對峙가 1年을 넘기고 項軟은 楚나라軍에 東쪽으로 撤軍하라는 命令을 내린다. 조용히 機會를 봐왔던 王錢은 卽時 出兵해 暗暗裏에 楚나라君을 追擊하여 勇猛한 勇士들을 先鋒으로 앞세워서 楚나라君을 强打했다. 楚나라軍은 豫期치 못한 攻擊에 多急히 應戰했지만 예봉이 꺾인 楚나라軍은 士氣衝天한 秦나라君을 當해낼 수 없어 結局 大敗하고 만다. 狡猾한 王錢은 港連이 이신을 무찌른 計策과 똑같은 것으로 項軟을 무찌른 것이다. 楚나라軍은 基(?)의 南쪽에서 大파되었고, 王錢은 이를 追擊하여 連달아 樵軍을 擊破해 結局 大將 項軟마저 죽인다. 王錢은 壽春을 攻擊하여 초왕 부추를 捕虜로 잡는다.

초왕이 사로잡힌 以後 昌平軍은 康男으로 敗退하여 淮南에서 초왕으로 옹립된다. 五月을 占據하고 長江의 地勢를 境界로 삼아 秦나라에 抵抗하나, 辰王 情 24年, 紀元前 223年 王錢은 淮南을 攻擊해 擊破하여 昌平君을 죽이고 끝내 楚나라를 멸망시킨다.

齊나라 滅亡 [ 編輯 ]

帝王 건 (建)李 陳(秦)에 入朝하고자 했는데 옹문私馬(雍門司馬)가 앞에서 말했다.

「王을 세우는 것은 司直을 위한 것입니까? 王을 위해 王을 세우는 것입니까?」

王이 말했다.

「司直을 위해서다.」

私馬가 말했다.

「司直을 위해 王을 세우면 王께서는 어째서 社稷을 떠나서 陳(秦)에 들어갑니까?」

帝王이 수레를 돌려서 돌아갔다.

卽묵代父(?墨大夫)가 옹문私馬(雍門司馬)의 諫言을 듣고 謀策을 세울 만하다고 여기고 곧 入宮하여 帝王을 만나 말했다.

「第(齊)의 땅은 四方 몇千 里이며 帶甲(帶甲)李 몇 百萬입니다. 무릇 三振(三晉)의 代父(大夫)는 모두 陳(秦)을 不便하게 여기며 아(阿)ㆍ견(?)의 사이에 몇 百 名이 있는데, 王께서 거두신다면 百萬의 무리와 함께 三鎭(三晉)의 옛 땅을 거두고 곧 임진관(臨晉關)에 들어갈 수 있으며, 言(?)ㆍ英(?)의 代父(大夫)도 陳(秦)을 위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城南(城南) 아래에 몇百 名이 있는데, 王께서 거두신다면 百萬의 兵士와 함께 初(楚)의 옛 땅을 거두고 곧 無關(武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齊)는 威嚴을 세울 수 있고 진국(秦國)은 亡하게 됩니다. 무릇 南쪽을 向하여 天子를 稱하는 것을 버리고 西쪽을 向하여 陳(秦)을 섬기는 것은 大王을 위해 取할 것이 아닙니다.」

帝王은 듣지 않았다. 陳(秦)李 진치(陳馳)를 시켜서 帝王을 國內로 誘引하며 5百 里의 땅을 주기로 約束했다. 帝王은 즉묵대부의 말을 듣지 않고 眞値의 말을 들어 마침내 陳(秦)에 들어갔다. 공(共)의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살게 하며 굶겨 죽였다. 일찍이 제(齊)에 노래가 있었다.

「소나무냐! 잣나무냐! 건(建)을 공(共)에 살게 한 것이 손님이냐!」

制書紙錢(齊西之戰)以後 齊나라 는 急激히 衰退해 全盛期 때의 疆埸을 回復하지 못했다. 이는 齊나라의 國策方向이 滅亡의 危機 以後, 徹底한 保身主義로 나아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帝王 件이 卽位한 以後 齊나라는 40年 동안 出兵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東方 國家와 秦나라가 縱橫으로 展開하는 政治 軍事的 鬪爭에 힘을 싣지 못하고 만다. 齊나라 사람들은 帝王 件이 六國의 合從에 參與하지 않음을 不平했다. 帝王 건 16年, 後承이 宰相이 된 後, 秦나라는 後承이 財物을 탐내는 것을 알고 迅速하게 內應하는 活動을 展開하여 大量의 黃金과 玉肌를 後承에게 膳物한다. 그 後 後承의 賓客들마저 秦나라에 자주 賂物을 받는다. 그들은 帝王 件에게 晉나라를 섬기고 다른 國家를 돕기 위해 出兵하지 말것을 强力하게 促求했다. 齊나라는 눈앞의 利益에 눈이 멀어 秦나라에 좋은 政策을 펴고 秦나라의 攻擊을 받는 諸侯國을 支援하지 않았고 이로써 秦나라는 다른 國家들을 이길 수 있었다.

齊나라 丞相 後承恩 秦나라에 수많은 黃金을 받아 買收된다. 後承恩 齊나라로 하여금 秦나라와 聯盟하며, 合從에 參與하지 않고, 戰時 對備를 하지도 않게 한다. 帝王 件은 全的으로 後承의 主張에 依存하여 國政을 運營해왔다. 秦나라가 다섯 나라를 집어삼킨 뒤 第王建은 秦나라에 威脅을 느끼고 多急하게 西部에 軍士를 집결시켜 秦나라의 攻勢를 막아낼 準備를 했다. 辰王 鄭은 降伏을 勸誘하는 使臣을 보냈으나 帝王 件은 이를 拒否하고 秦나라에 抵抗할 것을 決定한다.

辰王 情(政) 26年, 紀元前 221年(帝王 건 44年) 辰王 鄭은 齊나라가 秦나라의 使臣을 拒否한 緣由로 大軍을 動員하고 몽염 을 司令官으로 하여 제나라를 攻擊한다. 몽염은 齊나라 西部의 祭需(?水)를 攻擊해 들어간다. 몽염의 秦나라軍이 여러 次例 突破를 試圖하였지만 齊나라의 防禦線은 堅固하여 戰況은 膠着狀態에 빠진다. 當時 齊나라의 西部는 祭需(?水)를 境界로 삼고 將星이 西部와 南部를 둘러싸 그 길이가 350km에 達했다. 하지만 北部에는 이렇다할 障礙物이 없었다. 이를 利用해 秦나라는 虛를 찌르는 方式으로 側익을 攻擊하는 戰法을 驅使하여 辰王 鄭은 燕나라에 駐屯 中이던 王分으로 하여금 軍을 이끌고 제나라 北部로 南下하게한다. 제나라 主力軍이 西部에 묶인 사이, 王分科 部長 이신은 燕나라의 南部에서 出征하여 齊나라의 北部를 無人之境으로 進軍하며 齊나라의 首都인 任置까지 進軍한다. 곳곳에 齊나라軍이 駐屯해 있었지만 數十 年間 평화롭게 지내던 齊나라軍은 秦나라軍에 敢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지레 怯을 먹고 도망가기 바빴다.

갑작스럽게 北部에서 나타난 秦나라軍의 迅速한 南下로 因해 齊나라軍은 無力했고, 秦나라軍은 瞬息間에 임치성에 다달아 包圍한다. 任置가 包圍되자 齊나라의 指揮統制는 痲痹되어 事實上 齊나라는 秦나라에 各個擊破될 일만 남아있었다. 任置의 軍勢가 數萬에 達하고 數年間 버틸 軍糧이 있었지만 이미 六國이 모조리 滅亡하여 齊나라만이 홀로 남은 狀態였고, 버틴다 한들 滅亡의 時期만 늦출 뿐이었다.

王分은 任置를 包圍하고 섣불리 攻擊하지 않는다. 王分의 軍勢로 任置를 陷落시키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王分은 秦나라軍이 任置를 包圍한 것만으로도 齊나라가 內部的으로 崩壞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때 王分은 任置에 使臣을 보내 帝王 件에 降伏할 것을 提案한다. 秦나라는 帝王 件에게 降伏을 勸誘하여 五百里의 封土를 줄 것을 約束한 것이다. 帝王 件에게 있어, 이미 大勢는 기울어졌고 秦나라가 約束한 五百里의 封土는 믿을만한게 못되었으나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나았다. 宰相 後承마저 帝王 件에게 降伏을 勸한다. 그리하여 帝王 件은 降伏하고 齊나라는 滅亡한다.

진 始皇帝

降伏 後, 帝王 件은 押送되었고 더 以上 利用價値가 없어진 後承恩 處刑된다. 조나라를 멸망시키며 當場 곽개를 죽이지 않고 後大寒 것은 아직 秦나라가 六國을 統一하지 못했기에 남은 六國의 反逆者들을 더 利用하기 위해서이다. 齊나라를 멸망시킨 時點에서는 더 以上 그럴 必要가 없어진 것이다. 帝王 件에게도 處分이 내려진다. 帝王 件은 500里의 封紙 代身 孔性(共城)의 松柏나무 숲에 軟禁되어 飮食을 거의 받지 못해 結局 굶어죽게 된다.

진 始皇帝의 統治 [ 編輯 ]

紀元前 214年 頃, 진 始皇帝는 10萬 餘 名의 大軍을 보내 내 北쪽의 國境을 지키게 하고 匈奴를 막게 하였다. 또한 50萬에 達하는 軍隊를 보내어 南쪽 쓰촨省 一帶 大部分을 攻擊하였다. 이 南部 征伐 事業 때, 南쪽의 정글 地形에 익숙하지 않은 晉나라 軍隊는 原住民들의 게릴라 攻擊에 連戰連敗하였다. 이에 激怒한 始皇帝는 運河를 波高 莫大한 量의 物資를 보내어 더 큰 規模의 2次 征伐을 準備하였고, 結局 勝利하였다. 秦나라는 이 征伐로 인하여 광저우 隣近의 海岸가까지 모두 掌握하였고, 푸저우 구이린 地方까지 새롭게 中國의 領土로 包含시켰다. 秦나라 軍隊는 이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 하노이 隣近까지 進軍하였으며 南部 國境을 안정시켰다. 征伐 事業이 끝나자 始皇帝는 10萬 餘名에 達하는 한족人들을 이 地方으로 强制로 보냈으며, 定着하고 隣近을 漢族化시키도록 하였다. 이같이 徹底한 動畫事業으로 인하여 始皇帝는 南部 國境을 안정시키는 데에서는 엄청난 成功을 거두었다.

秦나라가 이처럼 南部 國境에서는 成功的인 業績을 세운 것과는 달리, 北쪽의 匈奴 에게는 쩔쩔맸다. 秦나라는 自國民들이 이들과 貿易을 하는 것을 徹底히 禁止하였고, 匈奴는 貿易길이 막히자 掠奪을 하여 物資를 供給받으려 하였다. 흉노족이 北部 地方을 掠奪하자 始皇帝는 몽염 (蒙恬) 將軍을 보내어 紀元前 215年 頃에는 匈奴를 征服하였고 오르도스 地方에 農業을 傳播하였다. 다만 이 地域의 農業化와 漢族化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匈奴는 끊임없이 이 地域을 侵略해 들어오게 되었다. 以後 진나라를 이은 漢나라도 過密한 人口 탓에 이 오르도스 地方을 完全한 中國 文化圈으로 편입시키려 하였으나 物資 不足으로 제대로 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秦나라의 北部 國境은 티베트 , 滿洲 , 內몽골 地方 바깥에 있었으며, 軍事的 影響力이 미치는 곳의 文化들도 秦나라의 文化와는 매우 다른 境遇가 非一非再하였다. 始皇帝는 以後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北部 國境에 萬里長城 을 세웠으며, 匈奴가 主力인 騎兵과 말들을 이끌고 쉽게 國境地帶를 넘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野史에 依하면 始皇帝가 豫言家에게 '秦나라를 亡할 者는 號(胡)이다(亡秦者胡)'라는 말을 듣고, 이 號가 匈奴를 뜻한다고 생각하여 萬里長城을 세웠다고 傳한다. 다만 事實은 이 '湖'가 匈奴가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皇位에 오른 2世 皇帝 호해라는 것이다.

始皇帝는 優先的으로 郡縣制 를 實施하였는데, 以前에 株 王朝 가 中國 大陸을 統治했을 때 使用한 封建 制度와는 그 根本이 달랐다. 旣存에 實施되던 封建制度는 國家의 首長인 왕이 中央을 統治하되, 그 外의 部分은 쪼개어서 王族이나 貢臣들을 諸侯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形式으로써 中央 權力에 비해 地方 政權이 더욱 肥大해 질 수 있는 構造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始皇帝는 이러한 封建 制度를 廢止하고, 나라를 郡과 縣의 行政 地域으로 나누어 쪼갠 後에 中央 政府 所屬의 官吏들을 派遣하여 다스리는 郡縣制를 實施함으로써 中央 集權 體制를 더욱 鞏固히 하였다. 郡縣制의 實施는 周나라가 封建 制度로 나라를 다스리던 中에 지나치게 成長한 諸侯國에 依해 滅亡당한 것을 先例로 삼았을 可能性이 크다. 이 郡縣制는 晉나라 滅亡과 初寒戰爭을 거치며 사라졌지만 傳한 한 高弟 時期에 郡國制 로 半쯤 復活하고. 한 武帝 時期에 마침내 다시 正式으로 復活한다. 하지만 以後에는 좀 더 細分化할 必要性이 있다고 느꼈는지 週-郡-現 3團體系로 改編되고 元나라 대 前인 南宋 時期까지 約 1300年 가까이 中國의 行政制度가 된다.

始皇帝는 이러한 中央 集權 體制 强化를 위해서 秦나라의 統治 理念이 되었던 法家 思想을 中國 全域의 統治 理念으로 내세우는 等 思想 改革도 試圖하였다. 이때에 書籍에 對한 彈壓을 實施하여 晉나라 歷史冊과 法令集 外에 農事, 天文, 占術, 醫學 等 實用 知識에 關聯된 書籍을 除外한 大部分의 經書들을 없앨 것을 命하였다. 이 過程에서 儒學者들과의 衝突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焚書坑儒 와 같은 慘酷한 事件이 發生하기도 하였다.게다가, 이러한 思想 改革은 副作用이 컸다. 더욱이 法家의 지나치게 業膈한 法律이 中國 全國의 統治에 쓰이게 되자 嚴格한 데다 地域的으로도 맞지 않은 法律과 刑罰에 익숙하지 못했던 6國의 百姓들은 엄청난 苦痛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秦始皇은 온 나라가 들썩일 程度의 大規模 土木 工事를 數次例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規模를 자랑하는 阿房宮 진시황릉 을 建設하여 皇帝의 權威를 强化하는 한便, 運河를 파서 水路를 통한 交易과 物品의 運送을 圓滑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特히 언제나 中國에 威脅이 되어온 北方 民族들의 侵略을 防禦하고자 旣存 7國의 城壁들을 保守해서 길다란 城壁을 建設했고, 晉나라 滅亡 以後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城壁을 保守, 增築, 新築하여 萬里長城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中國 統一이 이루어진 以後에도 各地의 나라마다 貨幣와 書體가 달라 서로 間에 交流하는 데 效率性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中國 全域의 貨幣와 書體를 하나로 統一시키는 統一 政策을 實施하였다. 以後로 物件의 치數나 길이를 재는 度量衡 等도 하나로 統一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統一된 넓은 中國 全國의 統治를 圓滑히 하고 그 效率性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特히 書體의 統一은 單純 交流의 目的이 아니라 文書基盤의 中央集權的 行政體系의 核心이었다. 모든 報告를 오직 文書로만 하도록 하고 皇帝의 命令이 官僚制의 피라미드를 따라 全國에 傳達되도록 하는데 公文書의 書體 統一은 必須的이었다.

始皇帝는 이처럼 많은 業績들을 남겼으나, 末年에 들어 漸次 無理한 土木 工事를 벌이고 百姓들을 彈壓하는 等 漸次 秦나라의 기틀을 뒤흔들기 始作하였다. 特히 죽음을 두려워한 秦始皇은 徐福 等을 보내어 不老草 를 찾게 하였고, 輸銀 과 같은 金屬들을 몸에 좋다고 믿어 過多 攝取하며 스스로 健康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過度한 公使와 稅率은 百姓들에게 큰 不滿을 일으켰으며, 지나친 法治에 立脚한 秦나라의 法은 많은 者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渦中에 始皇帝는 末年으로 갈수록 暗殺에 對한 두려움이 剛해졌고, 漸次 宦官 祖考 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를 謁見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祖考 等의 貪官汚吏들의 權力이 매우 剛해졌으며, 民生은 漸次 塗炭에 빠지기 始作하였다.

始皇帝의 事後와 滅亡 [ 編輯 ]

始皇帝는 總 3番에 達하는 暗殺 未遂를 겪었고, 이같은 經驗은 始皇帝를 거의 偏執症에 가까울 程度로 不老不死에 對한 執着에 몰아넣었다. 始皇帝는 죽는 날까지 不死의 靈藥을 찾아 나섰으나, 結局 東部로 順行을 하던 中 死亡하고 만다. 皇帝가 死亡하자 총애받던 宦官 祖考(趙高)와 丞相 理事 는 그의 죽음을 숨겼고, 올곧은 性格의 太子 扶疏 (扶蘇) 代身 그들이 操縱하기 쉽고 어리석은 好害를 2世 皇帝로 擁立하려 들었다. 司馬遷 詐欺 에 依하면 이들은 皇帝의 遺書를 造作하였고, 皇帝가 太子 扶疏에게 自決을 命한 것처럼 꾸몄다. 結局 太子 扶疏와 그를 輔弼하던 名匠 몽염은 목숨을 잃었고, 秦나라는 漸次 混亂 속에 빠져들기 始作하였다. 始皇帝의 뒤를 이어 皇位에 오른 호해는 軍事力을 增强하였으며, 온갖 奢侈를 부렸고 女色을 탐하는 等 暴政을 펼쳤다. 그는 수많은 官吏들을 肅淸하였으며, 稅率을 急激히 引上하여 自身의 私利私慾을 채웠다. 게다가 首都 涵養의 城壁을 釉藥을 바른 甓돌로 짓는 等 쓸데없는 大規模 事業을 벌이며 國庫를 蕩盡하였다.

이 時期 宦官 祖考와 丞相 理事는 最高 權力者 자리를 두고 싸우기 始作하였다. 結局 丞相 理事가 싸움에서 敗北했고, 祖考는 名實相符한 晉나라 最高 權力者가 되었다. 始皇帝 事後 다음 해에는 陳勝 (陳勝), 오광 (吳廣)의 叛亂이 勃發, 全國으로 퍼져나갔고, 全國은 騷亂 狀態로 빠져들었다. 狀況이 이에 이르자 진 二世皇帝 와 祖考는 壯한 (章邯)을 將軍으로 삼아 討伐軍을 보낸다. 壯漢은 軍事的 能力을 發揮해서 眞僧軍을 擊破하고, 그 다음으로는 楚나라 의 抗量軍도 擊破했다. 그러나 壯漢은 抗量 (項梁)의 조카 項羽 (項羽)와의 決戰에 敗北하여 捕虜로 잡혔고, 秦나라는 項羽에 맞서 싸울 그 어떠한 有能한 人物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한便 項羽는 咸陽 으로 向하는 途中에 反逆의 氣色을 보인 晉나라 兵士 20萬을 죽여 버렸고, 民心을 잃기 始作하였다.

한便 祖考는 2世 皇帝 호해의 度가 지나친 無能함 때문에 그를 죽여버렸으며, 그의 자리에 사람들의 信望을 받던 皇族 自營 을 세워 民意의 安定을 圖謀하려 들었다. 허나 自營은 皇帝가 된 直後 操觚를 暗殺하였고, 무너지는 秦나라를 다잡으려 試圖하였다. 秦나라 곳곳에서 有力者들이 王을 僭稱하며 叛亂을 일으키자, 自營은 王座를 保全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皇帝에서 格을 낮추어 王으로 불렀으며,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秦나라의 滅亡은 막을 수 없는 旣定事實이었으며, 自營의 힘으로는 到底히 이를 막을 수 없었다. 結局 紀元前 206年 劉邦이 진나라의 首都 咸陽에 入城하였고, 辰王 自營의 목숨을 지켜줄 것을 約束하였다. 허나 劉邦의 뒤를 이어 咸陽에 入城한 項羽는 이만한 雅量이 없었고, 涵養을 掠奪하고 불태운 다음 辰王 自營을 죽여버렸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15年 만에 完全히 滅亡하여 歷史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陳(秦)나라의 行政區域 [ 編輯 ]

秦始皇은 6國을 征服하여 戰國時代를 종식시키고 初期에 36郡을 設置하였으며 地方官을 派遣하였다. 周邊征服에 따라 軍이 追加되었다 여기서는 56個郡(郡)으로 紹介(42軍설, 46軍說과 48軍泄道)한다.

歷代 君主 [ 編輯 ]

統一 以前 [ 編輯 ]

臺數 시호 이름 在位 期間 陵墓 世界 關係
推尊 - 비자 (非子) 紀元前 900年頃 ~ 紀元前 858年 오래 (惡來)의 5世孫
診候 (秦侯) 未詳 紀元前 857年 ~ 紀元前 848年 비자의 아들
空白 (公伯) 未詳 紀元前 847年 ~ 紀元前 845年 未詳 진후의 아들
陣中 (秦仲) 未詳 紀元前 844年 ~ 紀元前 822年 空白의 아들
張公 (莊公) 基(其) 紀元前 821年 ~ 紀元前 778年 陣中의 長男
01 陽孔 (襄公) 未詳 紀元前 777年 ~ 紀元前 766年 長空의 次男
02 문공 (文公) 未詳 紀元前 765年 ~ 紀元前 716年 良工의 아들
推尊 精工 (?公, 靖公) 未詳 卽位하지 않음, 推尊 문공의 아들
03 獻供 (憲公)
領空(寧公)
未詳 紀元前 716年 ~ 紀元前 704年 精工의 아들
04 出資 (出子) 萬(曼) 紀元前 703年 ~ 紀元前 698年 獻供의 막내아들
05 무공 (武公) 未詳 紀元前 697年 ~ 紀元前 678年 獻供의 長男
06 덕공 (德公) 未詳 紀元前 677年 ~ 紀元前 676年 獻供의 아들
무공의 동생
07 先攻 (宣公) 未詳 紀元前 675年 ~ 紀元前 664年 덕공의 長男
08 成功 (成公) 未詳 紀元前 663年 ~ 紀元前 660年 덕공의 아들
先攻의 동생
09 木工 (穆公, 繆公) 임호(任好) 紀元前 659年 ~ 紀元前 621年 덕공의 아들
成功의 동생
10 强攻 (康公) 앵(?) 紀元前 620年 ~ 紀元前 609年 木工의 아들
11 公共 (共公) 禍(和)
가(?)
도(稻)
紀元前 608年 ~ 紀元前 604年 强攻의 아들
12 桓公 (桓公) 영(榮) 紀元前 603年 ~ 紀元前 577年 公共의 아들
13 경공 (景公)
희共(僖公)
席(石) 紀元前 576年 ~ 紀元前 537年 桓公의 아들
후백거(后伯車)라는 이름은 잘못 傳해진 것
14 애공 (哀公) 未詳 紀元前 536年 ~ 紀元前 501年 경공의 아들
推尊 理工 (夷公)
-
애공의 아들
15 惠空 (惠公) 未詳 紀元前 500年 ~ 紀元前 491年 이공의 아들
16 道公 (悼公) 未詳 紀元前 490年 ~ 紀元前 477年 惠空의 아들
17 餘公共 (?共公) 未詳 紀元前 477年 ~ 紀元前 443年 陶工의 아들
18 朝貢 (躁公) 未詳 紀元前 443年 ~ 紀元前 429年 餘公共의 아들
19 회공 (懷公) 未詳 紀元前 428年 ~ 紀元前 425年 餘公共의 아들
20 領空 (靈公) 未詳 紀元前 424年 ~ 紀元前 415年 회공의 孫子, 진소자(秦昭子)의 아들
21 肝共 (簡公) 道字(悼子) 紀元前 414年 ~ 紀元前 400年 진소자의 동생
領空의 叔父
22 惠空 (惠公) 未詳 紀元前 399年 ~ 紀元前 387年 陵語(陵?) 肝共의 아들
23 出攻 (出公) 未詳 紀元前 386年 ~ 紀元前 385年 惠空의 아들
24 獻供 (獻公) 士習(師?)
年(連)
紀元前 385年 ~ 紀元前 362年 孝어(??) 領空의 아들
25 효공 (孝公) 거량(渠梁) 紀元前 361年 ~ 紀元前 338年 制御(弟?) 獻供의 아들
26 혜문왕 (惠文王) 社(駟) 紀元前 337年 ~ 紀元前 311年 孔陵(公陵) 효공의 아들
紀元前 324年 , 다시 開院 後 稱王
27 度武王 (悼武王)
武王(武王)
武烈王(武烈王)
탕(蕩) 紀元前 311年 ~ 紀元前 307年 영릉(永陵) 혜문왕의 아들
28 소양왕 (昭襄王)
소왕(昭王)
職(稷)
칙(則)
紀元前 306年 ~ 紀元前 251年 지릉(芷陵) 혜문왕의 아들
度武王의 異腹同生
29 효문王 (孝文王) 週(柱) 紀元前 250年 ~ 紀元前 250年 首陵(壽陵) 소양왕의 아들
30 장양왕 (莊襄王)
莊王(莊王)
異人(異人)
自招(子楚)
紀元前 249年 ~ 紀元前 247年 止揚(芷陽) 소양왕의 아들
31 始皇帝 (始皇帝) 情(政) 紀元前 246年 ~ 紀元前 210年 진시황릉
(秦始皇陵)
장양왕의 아들
全國 統一 後 稱帝
32 二世皇帝 (二世皇帝) 호해(胡亥) 紀元前 209年 ~ 紀元前 207年 眞二世皇陵
(秦二世皇陵)
始皇帝의 아들
33 - 自營 (子?) 紀元前 207年 二世皇帝의 조카
皇帝의 稱號를 抛棄

統一 以後 [ 編輯 ]

秦나라 皇帝 熱票
臺數 시호 聲明 在位期間 生沒
- 太上皇
(太上皇)
(晉 始皇帝 追崇)
營者初 (?子楚) 兆自招(趙子楚) - 紀元前 281年 ~ 紀元前 247年
第1代 진 始皇帝
(秦始皇帝)
影幀 (?政) 調整(趙政) 紀元前 221年 ~ 紀元前 210年 紀元前 259年 ~ 紀元前 210年
第2代 진 二世皇帝
(秦二世皇帝)
永好해 (?胡亥) 助護해(趙胡亥) 紀元前 209年 ~ 紀元前 207年 紀元前 229年 ~ 紀元前 207年
第3代 辰王
(秦王)
營者英 (?子?) 조자영(趙子?) 紀元前 206年 ? ~ 紀元前 206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