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民共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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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人共同會 鍾路 集會 前景.

萬民共同會 (萬民共同會) 또는 官民共同會 (官民共同會)는 朝鮮 말, 大韓帝國 의 大討論會, 市民運動이자 市民社會團體로 獨立協會 에서 처음 主管하였다가 1898年 4月 을 起點으로 獨立協會 의 影響力에서 獨自的인 民衆大會, 團體로 成長했다. 1897年 ( 光武 1年) 初 獨立協會 서재필 , 윤치호 , 이상재 等에 依해 처음 始作되었다.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 主催下에 民衆大會로 처음 開催되었으며, 漢城府 의 市民, 小商人, 一部 知識人層이 參與했다. 以後 1897年 10月 박정양 을 비롯한 政府의 改革的 官僚들과 獨立協會 가 함께 主管하면서 汎國民的인 大會, 團體로 成長했다. 政府 側의 박정양 , 이상재 , 獨立協會 側의 서재필 , 윤치호 等이 이를 指導하였다. 萬民共同會는 처음에는 社交 모임 形態였으나 演說과 講演, 雄辯, 調整에 對한 民衆의 建議事項 等을 採擇하고 公開的으로 決定하는 모임으로 擴大되고, 全國 各地에 支部를 두었다.

1898年 (光武 2) 3月 부터는 러시아 , 프랑스 等 列强의 利權 介入을 反對하는 等 帝國主義 侵奪 反對 運動을 펼쳤으며, 漸次 獨立協會 의 影響力에서 벗어나 1898年 10月 부터는 獨自的인 活動을 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匿名書 事件 以後 1898年 12月 政府의 彈壓으로 霧散되고 만다. 1899年 까지 存續하다가 廢止되었다.

背景 [ 編輯 ]

1895年 (高宗 33年) 美國 에서 돌아온 서재필 이 中心이 되어 淸나라 의 名目上 隸屬國이던 朝鮮 의 自主獨立과 腐敗政治 剔抉, 內政改革, 民衆의 參政權과 民權 運動을 위해 1896年 7月 獨立協會 를 組織하고 民衆啓蒙과 參政權 , 天賦人權 을 紹介하고, 百姓의 政治參與의 必要性을 力說하였다. 獨立協會는 會員 加入에 資格制限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많은 百姓들과 다양한 階層의 參與를 위해 1897年 獨立協會 서재필 , 윤치호 , 이상재 等의 主催 下에 漢城府 에서 萬民共同會를 開催한다. 獨立協會 와 그 밖의 團體 會員, 兩班官僚, 中인, 知識人과 平民, 商人 等 다양한 階層의 사람이 參與한 大衆集會였으며 처음에는 獨立協會와 官僚들이 主導하였다. 官僚의 參與에 義를 두어 出帆 初期 官民共同會(官民共同會)라 부르기도 했다. 萬民共同會는 國政을 改革하기 위한 많은 演說과 討論, 發表, 雄辯 等이 있었으며 發言權에는 制限이 없었다. 그뒤 1898年 3月 以後 獨立協會의 影響力을 벗어나 獨自的인 活動과 獨自的인 集會를 進行하였다.

槪要 [ 編輯 ]

出帆 初期 [ 編輯 ]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 主催下에 民衆大會로 처음 開催되었으며, 처음에는 一部 知識人과 官僚層들度 參與하였으므로 官民共同會라 이름하였다. 1897年 서재필 中心으로 서울 鍾路네거리에서 群衆 集會를 열어 러시아人 拷問과 軍部 敎鍊 史官의 解雇를 要求하여 大衆 輿論을 일으켰다. 그 後 이 大會는 繼續的으로 열려, 帝國主義 의 侵略을 糾彈하고 政府의 施策을 批判하였다.

1897年 10月 박정양 을 비롯한 政府의 改革的 官僚들과 獨立協會 가 함께 主管하면서 汎國民的인 大會, 團體로 成長했다. 政府 側의 박정양 , 이상재 , 獨立協會 側의 서재필 , 윤치호 等이 이를 指導하였다. 以後 萬人이 參與한다는 뜻의 萬民共同會로 名稱을 바꾸게 된다.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 가 自身들의 主張을 貫徹시키기 위한 壓力 手段으로 開催하는 境遇가 많았으나, 漸次 市民들이 自發的으로 開催하는 境遇가 늘어났다. 萬民共同會에 參與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主로 知識人과 小商人이었으나, 漸漸 擴大되어 學生, 敎員, 宗敎人, 下層民까지 參與하였다. 그동안 賤待받던 商人이나 白丁들度 많이 參與했다. 市民들은 漸次 身分을 超越하여 나라의 일을 論議하고 自身들의 主張을 자유로이 發表하였으며, 스스로 代表者를 뽑아 萬民共同會를 民主主義 敵으로 運營하였다.

獨立協會의 影響力 [ 編輯 ]

1897年 (建陽 1年) 以後 열린 集會는 獨立協會 의 影響에 따라 政府의 그릇된 政策 是正과 腐敗 官僚, 無能한 官僚 解任, 罷免 要求, 議會 設置 要求, 外勢 逐出과 自主獨立國 宣言 要求, 身分差別 撤廢 等이 主 內容이었다. 그러나 獨立協會 의 影響力에서 漸次 벗어나고 平民과 下層民 出身 指導者와 會長을 選出하게 되면서 外國에 依存하는 王室을 批判하고, 百姓들이 選出한 百姓 代表인 議會 를 設置하고 議會를 통해 政府를 牽制하는 議會 政治를 하자는 見解가 擡頭되었다.

1898年 (光武 1年) 3月 10日 에는 漢城府 鍾路에서 獨立協會 主催로 約 1萬 名의 漢城府 민이 參與하여 共同會가 開催되었다. 1898年 3月의 萬民共同會 大會에서는 平民인 米穀商人 현덕호 (玄德鎬)가 會長으로 推戴되었고, 白木廛 다락 위에서 여러 市民들이 李承晩 의 特種으로 觸發된 러시아 의 侵略政策人 釜山 絶影島 조차 要求, 한러銀行 開設을 糾彈하는 聲討, 集會演說을 하면서 示威가 擴散되었다. 이처럼 누구나 參與해서 自身의 意見을 發表할 수 있는 討論의 場, 萬民共同會는 朝鮮 民衆에게 아주 새로운 經驗이었다. [1]

현덕호 等의 主導로 러시아의 立券介入 反對 運動이 벌어지고 러시아 의 軍事敎官과 財政顧問의 撤收를 要求했다. 이는 大韓帝國 政府 러시아 顧問團 哲秀와 한러銀行 의 撤廢措置에 일정한 影響을 끼쳤다. 이어 프랑스 人 拷問과 日本 印 軍事 敎官의 本國 送還 措置도 要求하여 성사시켰다. 그러나 獨立協會 의 强力한 影響力으로 그 運動은 反러 水準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以後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 와 無關하게 漸漸 더 自發的으로 열리는 境遇가 잦아지게 되었다. [1]

獨自的 活動 [ 編輯 ]

1898年 (光武 1年) 4月 以後 거의 날마다 열린 萬民共同會 集會는 市民의 自發的 參與로 集會가 開催되었고, 윤치호 等이 不參한 狀態에서도 自發的으로 會議가 이루어졌다. 이때 다루어지는 案件마다 그를 擔當하는 總代委員이나 代表委員을 直接 뽑아 會議 決議事項을 執行하는 直接 代表制와 같은 民主的 運營方式으로 進行되었으며, 윤치호 , 이상재 , 박정양 , 유길준 等이 不參한 狀態에서도 獨自的으로 市民들끼리 會議를 主管하고 行事를 主管했다. 萬民共同會는 漸次 獨立協會 의 影響力을 排除하며 獨自的인 市民團體 化되었다.

1898年 7月 안경수 가 現役, 退役 軍人 들을 買收하여 皇帝 兩位를 計劃하다가 失敗하였고, 또 9月 에는 流配되어 있던 김홍륙 이 車에 毒藥을 타는 事件이 發生하는 等 高宗 을 威脅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2] 高宗 에 對한 繼續된 威脅은 高宗 으로 하여금 獨立協會 나 萬民共同會에 對한 疑心을 품게 한다.

그 무렵 萬民共同會는 猛烈하게 自由 民權 運動을 展開하고 있었다. 그러나 高宗은 褓負商과 軍隊의 힘을 빌려 이들을 鎭壓하였다. [2]

議會 設立 運動과 中樞院 設立 [ 編輯 ]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 와 함께 高宗 에게 議會 設立을 主張했고, 거듭된 尙州 끝에 高宗에게 10月 議會 設立을 許諾받았다. 1898年 (光武 1年) 11月 1日 鍾路 에는 다시 수많은 人波가 몰려들어 高宗 皇帝에게 裁可를 기다렸다. 이에 高宗은 "獻議 6條는 마땅히 實施할 것이며 그 밖에도 몇 條項을 添加해 詔勅으로 頒布할 것이니 解散하여 기다려라. [3] " 高宗은 이렇게 命을 내렸다. [3] 그러나 約束과는 달리 彈壓이 加해졌다.

11月 2日 새로운 中樞院 管制 가 發表되었다. 이는 韓國 最初의 議會 設立案이었다. 中樞院 議官 50名 中 折半은 政府가 國家에 功勞 있는 者를 薦擧하고, 折半은 獨立協會 에서 27歲 以上의 政治, 法律, 學識에 通達한 字로 投票 選擧 하게 되었다. 獨立協會 와 서울 市民들은 歡呼聲을 질렀다. [3]

獨立協會는 11月 5日 獨立館에서 選擧하기로 했다. [3] 그런데 11月 5日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巡檢들에 依해 副會長 이상재 를 비롯하여 獨立協會 幹部 17名이 逮捕되었다. 會長 尹致昊는 逮捕 直前 몸을 避했다. [3]

官民共同會에 參席했던 박정양 以下 政府 官僚들도 解任되고 代身 조병세 , 조병식 , 박제순 , 민영기 等이 그 자리에 앉았다. 守舊派가 다시 政權을 잡은 것이다. [3] 大韓帝國 中樞院 議員 選擧 前날, 守舊派는 獨立協會 立憲君主制 가 아닌 共和制 를 하려 한다며 皇帝를 몰아내고 大統領 박정양 , 副統領 윤치호 , 內部 代身 이상재 , 外務 代身 精巧 (鄭喬) 等으로 政權을 쥐려 한다는 匿名書를 거리에 내다붙였고, 匿名書에 놀란 皇帝가 獨立協會 幹部 逮捕令과 協會 解散令을 내렸던 것이다. [3]

이에 强力히 反撥한 萬民共同會 總代委員이자 [4] 急進派 李承晩 배재學堂 學生들을 이끌고 代表者들을 모두 釋放할 것을 主張하며 漢城府 鍾路와 南大門 에 警務廳과 平理院 [5] 앞에서 徹夜 籠城 示威를 展開하였고 뒤에는 數千名의 群衆들이 따르고 있었다. 날이 밝자 萬民共同會를 열어 民衆들과 함께 事件 經緯를 解明하라고 要求했다. 그들은 警務廳 앞에서 群衆大會를 열어 連坐(連坐)하며 示威를 벌렸다. [6] 거기서 그날 밤을 새웠고 또 繼續하여 며칠 밤을 籠城하였다. 온 밤을 모닥불을 지펴놓고 李承晩 은 그七祀이 없이 群衆에게 演說하면서 그들을 團結시켰다. [6] 萬一 이 群衆이 分散(分散)되면 軍士들은 손쉽게 主導者를 逮捕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7]

1898年 , 大漢門 앞에서 太極旗 를 들고 示威 를 위해 모인 群衆들.

結局 政府는 하는 수 없이 11月 10日 逮捕된 17名 全員을 釋放했다. 하지만 示威는 멈추지 않았고 독립렵회 會員들은 낡은 普信閣 인경 앞 廣場에서 改革에 對한 群衆大會를 開催하였다. [7] 群衆大會는 德壽宮 門 앞에서도 밤낮 가리지 않고 繼續되었고 [6] [7] ' 獻議 6兆 實施' [3] , 匿名書를 造作한 조병식 , 이기동 等의 處罰, 獨立協會 復活 等을 要求했다. [8]

獻議 6兆 採擇 [ 編輯 ]

萬民共同會 中에서 最大 規模로 열린 것은 1898年 10月 29日 에 10餘個의 各種 政治團體가 主催하고 群衆의 要求에 依해 10餘名의 政府 大臣들까지 參與하여 鍾路에서 열린 官民共同會였다. 漢城府 住民은 勿論 獨立協會, 國民協會, 協成會 , 一進會 그리고 政府代表로 議政府 參政大臣 박정양 , 中樞院 議長 한규설 , 法部 代身 서정순 , 農商工部 代身 金明圭 , 度支部 大臣署理 고영희 等이 參席하였다. [9] 知識人, 中인 , 鄕吏 , 成均館 四部學堂 의 學生, 新式學校 學生, 否認, 商人, 僧侶, 天主敎 도, 妓生 , 광대, 白丁 等 身分과 關係 없이 1萬餘 名의 人波가 몰렸다. 이 會議에서 開幕 演說을 한 사람은 當時 가장 賤待받던 階層인 白丁 出身 박성춘(朴成春)이었다. [10] 박성춘은 白丁 出身이었으나 속量하고 良民이 된 解放된 賤民이었다.

이 사람은 大韓에서 가장 賤하고 無知沒覺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忠君愛國 忠君愛國의 뜻은 大綱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利國便民하는 길은 官民이 合心한 然後에야 可能하다고 봅니다. 저 遮日에 比喩하건대, 한 個의 長대로 받치면 力不足이지만 많은 長대를 合해 받치면 그 힘이 매우 鞏固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官民이 合心하여 우리 大皇帝의 성덕에 報答하고 國運이 萬萬年 이어지도록 하게 합시다. [9]

白丁 出身 박성춘 演說 에 群衆들은 뜨거운 拍手를 보냈다. 이어 누구든지 自發的으로 자유롭게 自身의 政治的 所見을 發表했다. 이들의 活動은 이날 會長으로 選出된 박성춘 의 演說文의 內容 中 '우리 모두 힘을 모아 皇帝의 聖恩에 報答하자'라는 글 等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皇帝權을 否定하지는 않고, 立憲君主制 를 追求하였다. 이 날 會議에서 政府의 外勢依存的인 傾向을 攻擊하고 時局에 對한 6個條의 改革案을 決議하여 高宗에게 奏請하였다.

1898年 10月 29日 의 萬民共同會 會議에서는 獻議 6兆 (獻議六條)를 決議하여 政府에 强力히 要求했다. 이날 共同會에서 決議된 獻議 6兆 는 外國에 依存하지 말고 專制王權을 鞏固히 할 것, 利權 讓與와 外國 次官 導入, 外國軍隊의 支援, 外國과의 條約을 各部 大臣과 民衆代表人 大韓帝國 中樞院 議長이 合同으로 署名하여 施行하게 할 것, 全國 官廳의 財政은 모두 度支部 에서 一括 管轄하고 豫算과 決算과 用途는 人民에게 公布할 것, 重罪人은 公判(公開裁判)에 回附하되 自服한 後에 裁判 할 것, 勅任官 皇帝 가 一方的으로 임명하지 말고 政府의 過半數 同意를 받아 임명토록 할 것, 成文化된 章程( 法律 )을 施行할 것 等이었다. 이는 獨立協會 에서도 같은 무렵 政府에 提出한 獻議 6條와 類似하였다. 萬民共同會의 獻議 6條는 獨立協會의 獻議 6兆 主張과 類似하나, 萬民共同會는 民權 身長의 方法으로서 大韓帝國 中樞院 에 對해 下院 設置를 要求하고, 下院 議員들 直接的으로 選出하게 할 것을 要求하였다는 點에서 獨立協會 의 獻議 6條와 多少 差異를 보이고있다.

政府의 彈壓과 解體 [ 編輯 ]

萬民共同會 運動이 强力하게 展開되자, 大韓帝國 政府는 要求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한便으로는 彈壓을 했다. 共同會가 1898年 11月 에 올린 獻議 6兆 改革 안에 對해 國王 高宗 도 처음에는 正當性을 認定하고 實施를 約束했으나, 守舊派 官僚들의 反對와 謀陷 으로 實現을 보지 못했다.

結局 漸漸 거세지는 集會에 威脅을 느낀 勤王派 大臣들은 皇國協會 所屬 全國의 褓負商 2千餘名을 動員하여 漢城으로 結集시켜 이들을 武力으로 解散시켰으며 이 過程에서 많은 流血衝突이 벌어졌다.

또한 政府官僚 主軸으로 이뤄진 勤王波와 保守派 勢力은 高宗 에게 서재필 獨立協會 가 皇帝를 廢하고 박영효 를 내세워 議會開設 運動을 통해 共和政 을 樹立하려 한다고 謀陷하였다. 이를 빌미로 獨立協會 의 影響力에 머물러있던 萬民共同會에 對해서도 彈壓에 들어가며 獨立協會 幹部 함께 萬民共同會의 主要人士를 逮捕했다. 李承晩 은 이 事件으로 投獄되어 拷問을 받고 終身刑을 宣告 받는다.

以後 皇帝는 양회의 解散을 命令하고 獻議 6兆 는 廢止시켰다. 그뒤 1899年 獨立協會의 解散 後에도 萬民共同會는 얼마 동안 活躍했으나, 政府의 彈壓을 받은 後에는 繼續 이어지지 못하였다.

活動 [ 編輯 ]

日本 資本 流入 撤廢 [ 編輯 ]

1898年 3月 의 集會에는 1萬餘 名이 參加하였고 日本 의 商人 資本의 朝鮮 浸透를 批判하였다. 러시아 絶影島 조차 要求 反對, 日本의 國內 石炭庫 基地 撤收 等을 決議, 要求하고 帝國 自主獨立 强化를 決意하였다. 이를 契機로 러시아 絶影島 조차 要求가 撤回되었고, 國內의 石炭庫 基地를 되돌려주었으며, 日本 鐵道 敷設權 要求 亦是 撤廢하였다. 또한 日本 러시아 韓國 의 內政에 干涉하지 않는다는 協定의 締結을 要求하여 실현시켰다.

反外勢 主權 運動 [ 編輯 ]

1898年 2月 以後 獨立協會 大韓帝國 의 光武(光武) 政權은 自主外交와 改革의 方向을 둘러싸고 對立하였다. 光武 政權은 外國 勢力을 一部 導入해야 된다는 見解를 펼쳤지만 獨立協會는 外國의 資本과 技術을 導入하되 外國 勢力에 依存해서는 안된다고 主張하였다.

이때 러시아 가 大韓帝國의 親러政權을 통하여 石炭과 金鑛 等 地下資源 開發權과 鐵道附設權을 얻어가려 하자 日本 亦是 朝鮮 의 鐵道附設權을 獲得하려고 競爭을 벌였다. 獨立協會 는 이러한 非自主的 外交에 强力히 反對하였다. 獨立協會 의 主導 下에 1898年 3月 漢城府 鍾路 네거리에서 開催된 萬民共同會에서 이 問題를 强力하게 聲討하였다.

1898年 3月 의 共同會에서는 러시아 度支部 (度支部, 好調 의 後身) 諮問官과 軍部 러시아 敎鍊 擔當 敎官의 解雇를 要求하고, 日本 人 軍事敎官 亦是 解雇할 것을 要求했다. 以後 李承晩 , 홍정하 (洪正夏) 等의 靑年 演士들이 共同會에서 熱烈한 演說을 하여 大衆의 輿論을 일으켰다. [11] 그 結果 러시아 度支部 拷問 과 軍部 軍事敎官, 한러銀行 等이 廢止되고, 러시아의 鐵道附設權 亦是 許可取消되었다. 그 餘波로 프랑스 金鑛採掘權 도 불허되고 日本人 軍事敎官度 本國으로 召喚시켰다. 1898年 3月 以後에도 大會는 繼續 이어졌다.

獻議 6條와 下院 設置 主張 [ 編輯 ]

1898年 10月 獨立協會 는 當時의 政治·外交·社會 諸般 問題를 改革하기 위한 對策으로, 그해 10月의 萬民共同會를 積極的으로 主催하고 國政改革의 大原則을 決定하였다. 그러나 共同會에서는 獨立協會의 影響力에서 벗어나기 위해 會長 先出市 獨立協會의 幹部가 아닌 平民, 白丁, 商人 出身에게 票를 주고 支持를 하는 等의 活動을 하였기에 米穀商人 出身 현덕호나 白丁 出身 박성춘을 會長으로 選出하기도 했다.

1898年 10月의 共同會 會長職은 獨立協會 의 指導者이기도 한 윤치호 가 選出되었고, 獨立協會 1898年 10月 28日 부터 11月 2日 까지 漢城府 鍾路에서 大集會를 열었다. 이날의 萬民共同會에서는 獨立協會의 影響力을 벗어나 政府의 賣國的 行爲를 攻擊하고 時局에 對한 改革案을 提出할 것을 決意하게 된다.

10月 萬民共同會 둘째 날인 10月 29日 6個項의 改革 原則을 決意하고 이를 皇帝에게 獻議(獻議)하기로 하고, 獻議 6組(獻議六條)라 이름 하였다. 이날 決議된 獻議6條는 '日本人에게 依託하거나 附逆하지 말 것. 全權大臣 任命을 廢止, 外國과의 利權契約(利權契約)이 있을 때는 大臣이 單獨으로 하지 말 것. 政府 財政을 公正히 하고 豫算 使用 內譯을 公開的으로 發表할 것. 重大 犯人의 裁判과 刑執行은 公開 裁判 으로 하며, 言論·集會의 自由를 保障할 것. 勅任官 의 任命은 皇帝가 政府 大臣들과 中樞院 衣冠들의 中의(衆議)를 따를 것. 기타 別抗議 規則을 實踐할 것. 等이었다.

演說家, 雄辯家 排出 [ 編輯 ]

萬民共同會는 身分, 年齡, 階級에 相關없이 누구나 參與가 可能했기에 뛰어난 雄辯家들을 많이 輩出했는데 그 中 하나가 바로 李承晩 이었다. [11] [12] [13] 그는 이 萬民共同會에서 가장 人氣있는 熱辯가로 그의 街頭演說은 民衆으로부터 뜨거운 拍手喝采와 熱烈한 支持를 받았다. [6] [14]

2千萬 同胞 가운데서 모두가 다 죽어 없어진 後라도 나 하나만은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各自 마음 속 깊이 盟誓하고 다시 盟誓하고 千萬番 盟誓합시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外國의 侵略이 없는 自主獨立國家로 굳건한 盤石 위에 세웁시다. [14]

그는 어떤 때는 正東宮(貞洞宮) 앞의 마당 한 가운데에 빈통을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群衆에게 熱辯을 吐하다가 獨逸 公使館 [15] 의 얕은 담을 뛰어넘어 배재學堂 으로 몸을 避한 적도 있었다. [6] [7]

果川 郡守 길영수 가 손에다 큰 몽치를 들고 내두르며 數千 名의 負傷敗를 거느리고 印花紋 밖에 進伏해있는 萬民共同會를 鎭壓하려고 할 때, 李承晩 이 演壇에 올라 이렇게 演說하였다. [16]

우리가 여기 診腹하여 風餐露宿 하는 것이 옷들을 탐하느냐 밥을 貪하느냐 다만 한다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하고 同胞를 사랑 함이라. 只今 들은즉 못된 奸細輩가 負傷敗를 불러 우리 萬民을 치라 하여 負傷敗들이 只今 目前에 黨도 하였는지라. 우리가 죽더라도 忠愛하는 義理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臣民의 職分에 죽어도 또한 千秋에 큰 榮光이로라 [16]
길영수 너도 名色이 國祿之臣이요 너도 所謂 對한 百姓이지 네 어찌 奸細輩와 不動 하여 負傷敗를 募集하여 忠愛 하는 우리 萬民을 치나냐 [16]

以外에도 白丁 出身의 박성춘 , 政府 官僚인 박정양 , 平安南道 大同郡 에서 열린 萬民共同會 平安南道支會의 少年 年事 안창호 等의 演說家들을 輩出하였다.

高宗의 彈壓과 失敗 [ 編輯 ]

獨立協會 에서 決定한 獻議 6兆 와 別個의 6條를 決定, 決意가 朝廷에 上申되자 高宗 은 獻議6條를 修正 없이 再嫁하고 이를 實踐할 것을 約束하였다. 그러나 政府의 勤王派 政治人은 皇帝 의 人事絶對權을 否定하는 點을 걸고 넘어져 獻議 6兆 施行을 끝까지 反對했고, 市中에 流布시킨 獨立協會가 皇帝를 廢하고 議會開設 運動을 통해 共和政을 樹立하려 한다는 所聞을 根據로 獻議 6條는 그 信號彈이라 謀陷했다. 이에 高宗은 獨立協會 를 彈壓하게 되어 結局 獨立協會 會員, 幹部들을 逮捕하고 獨立協會의 解散을 命令하였다. 이에 獨立協會의 影響下에 있던 共同會가 提示한 獻議6條는 廢止되고 만다.

12月 25日 高宗 은 軍隊를 動員하여 萬民共同會를 强制解散시키고 獨立協會 를 永久히 不法化했다. [8]

意義와 限界 [ 編輯 ]

官民共同會 [17] 國家 자주 民權 을 외친 最初의 近代的 民衆運動으로, 百姓들이 政府 를 도와 官民이 모두 한마음으로 國權 을 保護하자는 運動이었다.

萬民共同會의 運動은 비록 政府의 彈壓을 받아 失敗하고 말았다. 小市民의 政治的 力量의 未熟으로 인하여 大衆的 支持 基盤을 갖추지 못했고, 少數 知識人이 主導하던 獨立協會 의 影響圈에서 벗어나려고 努力했지만 結局 共同會는 獨立協會의 影響力에서 完全히 벗어나지 못하는 限界를 보였고, 그結果 當時 農民運動과도 結合하지 못했다.

萬民共同會 運動은 市民들의 主張과 힘을 보여준 大衆 運動이었다. 平民과 白丁, 妓生, 광대도 參與하고 白丁 出身이 한때 會長으로 選出될 만큼 열린 大衆集會였지만 當時 民衆 運動의 主流였던 農民 運動과 結合하지 못한 것과 女性의 差別待遇를 認識하지 못한 點 等이 時代的인 限界點으로 指摘되기도 한다.

影響力 [ 編輯 ]

萬民共同會는 後日 大韓民國 社會의 國政, 國會, 言論에 國民의 參與와 意見 傳達 活動 等의 모델이 되었다. 2012年 에는 12月 第18代 大統領 選擧 直前, 한겨레 新聞 主催下에 '大選政策提案 萬民共同會'가 열려 18歲 以上 市民 누구나 參與하게 하여 政策 提案, 社會問題 解決 等을 要求하기도 했다. 2012年 11月 6日 午後 2時에는 서울特別市 國會 汝矣島 國會議員東山 에서 '2012 政策 컨벤션 萬民共同會'가 開催되었다.

2013年 2月 5日 에는 서울地域大學生聯合(略稱 서울大련)의 主催下에 東國大 , 慶熙大 , 서울여대 等 6個 大學 總學生會와 서울地域 10餘個 大學 學生 50餘名 및 一般 市民이 參與하여 '大學生 萬民共同會'를 開催하였다. [18] 두 時間假量 進行된 共同運動은 參加者들이 直接 만들어 온 피켓에 對한 發言을 듣는 形式으로 進行되었고, 國家 奬學金 支給額數 問題와 大學 學費 支援을 要請했다. [18] 이날의 大學生 萬民共同會 聲明書에서는 聲明을 통해 '國家奬學金은 私立大學의 財政運營과 過度한 積立金, 登錄金 引上을 막을 수 있는 根據가 없어 明白한 限界가 있다'며 '國家奬學金 現實的 金額 反映과 높은 成跡基準이 改善돼야 할 것'을 要求하였다. [18]

2012年 11月 21日 ~ 11月 22日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釜山廣域市靑 主催 釜山 海雲臺區 동백섬 누리마루 아펙(APEC, 아시아·太平洋經濟協力體) 하우스에서 열린 '第8回 한겨레-釜山 國際심포지엄'李 開催되었다. [19] 이때 한 主題는 2013年과 釜山 市民의 삶의 質 問題에 對한 萬民共同會이다. [19]

評價 [ 編輯 ]

性理學 과 衛正斥邪思想에 젖어 있던 知識人들 一部를 近代的 자주 民權 思想과 自强 思想을 가진 人物로 전환시킨 點이 肯定的으로 評價되고 있다. [20] 또한 身分을 가리지 않고 參與하고 會長에 選出되었으며, 自由로운 演說, 案件 發議가 이루어져 事實上의 身分 解放의 現場으로서 大衆性을 高揚시킬 수 있었고, 身分과 財産, 階層을 가리지 않은 汎國民的 政治運動이었다는 點, 西歐 列强의 帝國主義 經濟침탈로 인해 直接 被害를 입고 있었던 都市小商人, 小手工業者, 貧民과 一部 知識人層이 自發的으로 參與하여 反帝國主義와 政府의 腐敗行爲 監視 等을 試圖한 點이 肯定的으로 評價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서희경, 《大韓民國 憲法의 誕生- 韓國 憲政史 萬民共同會에서 制憲까지》 (創批, 2012)
  • 윤치호 , 《尹致昊 日記 1916~1943》 (김상태 便역, 人物과 思想史, 2001)
  • 유영렬 , 《開化期의 윤치호 硏究》 (한길사, 1986)
  • 尹孝貞 , 《大韓帝國아 亡해라》 (박광희 驛, 茶山草堂, 2010)
  • 김영희 , 《佐翁 윤치호 先生 藥典:윤치호選集 2》 (佐翁윤치호文化事業委員會, 1999)
  • 康俊晩 , 《韓國 近代史 散策 3》 (人物과사상사, 2007)
  • 강만길 , 《고쳐 쓴 韓國近代史》 (창작과비평사, 2006)
  • 김남수 , 윤종배 外, 《100年 前의 韓國史》 (휴머니스트, 2010)
  • 신동준, 《開化派 列傳》 (圖書出版 푸른역사, 2009)
  • 이근호 , 박찬구 外, 《韓國史를 움직인 100代 事件》 (청아출판사, 2011)
  • 康俊晩 , 《韓國 大衆媒體史》 (人物과사상사, 2007)
  • 이광린 , 《韓國文化史:近代便》 (圖書出版 일지사, 2001)
  • 이황직, 《獨立協會 討論共和國을 꿈꾸다》 (圖書出版 프로네시스, 2007)
  • 윤성렬, 《道袍입고 ABC 갓 쓰고 맨손體操:新文化의 發祥地 배재學堂 이야기》 (학민사, 2004)
  • 이종각, 《刺客 고영근의 명성황후 復水器》 (동아일보사, 2009)
  • 이정식 , 《李承晩의 舊韓末 改革運動》 (배재대學校出版部, 2005)
  • 歷史學硏究所, 《바로 보는 우리 歷史》(서해문집, 2004)
  • 박현모 , 《正祖 事後 63年》 (創批, 2011)
  • 김이하, 《濟衆院 白丁 醫師 박서양》 (라이프플러스인서울, 2010)
  • 崔起榮 , 《徐載弼이 꿈꾼 나라》 (푸른역사, 2010)
  • 구인환 , 《지지 않는 靑年의 燈불 이상재》 (푸른思想, 2005)
  • 신용하 , 《獨立協會와 開化運動:敎養國史叢書 2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 강재언, 《新編 韓國 近代史 硏究》 (圖書出版 한울, 1995)
  • 강재언, 《韓國近代史硏究:한울叢書 1》 (圖書出版 한울, 1992)

各州 [ 編輯 ]

  1.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70페이지
  2. 朴榮圭, 《한 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圖書出版 들녘, 1996) 438페이지
  3.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69페이지
  4. 獨立新聞 (1898年 5月 5日). “光武 이년 四月 三十日 萬民 共同會 總代委員 최정식 정항모 李承晩 諸氏가”.  
  5. 現 高等法院
  6. 許政. 《雩南 李承晩》 1970板. 太極出版社. p. 62-74쪽.  
  7.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板. 新太陽社. p. 64-66쪽.  
  8.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70페이지
  9.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67페이지
  10. “萬民共同會” . 2013年 4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3月 7日에 確認함 .  
  11. 獨立新聞 (1898年 3月 12日). “三月 十日 午後 두時에 죵로에서 萬民 共同會가”.  
  12. 獨立新聞 (1899年 1月 13日). “傾聽 所聞”.  
  13. 每日新聞 (1899年 1月 24日). “法部에서 高等 裁判所에 訓令하기를”.  
  14.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板. 新太陽社. p. 62쪽.  
  15. 現 서울 地方法院
  16. 獨立新聞 (1898年 11月 28日). “富者 忠愛”.  
  17. 萬民共同會는 草創期 뜻이 있는 調整 의 大臣들, 各部 官僚들도 大擧 參席했기에 官民共同會라 불리우기도 했다.
  18. 서울地域 大學生들 서울驛서 萬民共同會…“朴 應答하라” Go발뉴스 2013.02.05
  19. 20日 釜山서 萬民共同會 討論會 열린다 한겨레 2012.11.19
  20. 知識人層 사이에 平民과 下層民의 人權과 權利, 百姓의 政治 參與 主張이 擴散되었다.

參考 資料 [ 編輯 ]

  • 신용하, 〈萬民共同會의 自主民權自强運動〉, 韓國史硏究會, 《韓國史硏究 11》(韓國史硏究會, 1975)
  • 박영신, 〈獨立協會 指導勢力의 象徵的 意識構造〉, 慶熙大學校 私學回, 《東方學地 20》 (경희대학교 私學回, 1978)
  • 신용하, 〈獨立協會의 議會民主思想과 議會建立運動〉, 서울大學校社會科學硏究所, 《韓國社會의 變動과 發展》 (범문사, 1985)
  • 신용하, 〈19世紀 韓國의 近代國家形成問題와 立憲共和國 樹立運動〉, 韓國史學會, 《한국사회학회論文集1》 (韓國史學會, 1986)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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