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섭 (196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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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金完燮
作家 情報
出生 1963年(60–61歲)
大韓民國 光州廣域市
言語 韓國語 , 英語 , 日本語
職業 社會運動家, 小說家, 記者 , 作家 , 評論家 , 飜譯家, 言論人, 放送人
活動期間 1989年 ~
장르 言論, 小說, 文學評論, 時事評論
配偶者 無(1993年 離婚)

김완섭 (金完燮, 1963年 ~ )은 大韓民國 인터넷 論客이다. 光州廣域市 에서 태어났다.

한때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에서 居住하기도 한 그는 1993年 大韓民國에 歸國을 하였고 1980年代 後半 以後 PC通信과 1995年 大韓民國 에 인터넷이 普及된 以後 칼럼니스트로도 活動했다.

半(反) 페미니즘 發言과 半 民族解放 (反 NL) 視角을 堅持하여 論難의 對象이 되었으며, 쇼비니즘 等을 批判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1990年代 以後에는 一部 韓國 · 日本 言論에서의 親日派 擁護 發言과 金九 , 安重根 , 柳寬順 , 김좌진 獨立運動家 들에 對한 批判이 問題가 되기도 했다. 또한 명성황후 를 批判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著述, 講演, 放送 出演 等을 하였으며 日本, 中國 等 外國의 學者들과 討論을 하기도 했다. 獨立運動家에 對한 冒瀆으로 社會的 指彈을 받고 法的 制裁를 받기도 하였으나 日本의 右翼은 그를 良心勢力으로 肯定的으로 評價한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初期 活動 [ 編輯 ]

김완섭은 1963年 全南 光州 에서 태어났다. 어린 누이 동생 두 名이 있다. 光州 살레시오 高等學校 를 卒業했고 서울 로 上京하여 1982年 3月 서울大學校 文理科 大學 理科 系列에 入學하여 天文學 을 專攻하다 1987年 9月, 서울大學校 를 中退했다.

光州 民主化 運動 參加 [ 編輯 ]

1980年 5月 光州 民主化 運動 當時 市民軍으로 民主化 運動에 參加했다. 當時 政府 戒嚴軍은 김완섭이 나이가 어리고 戒嚴軍에게 積極的으로 對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銃擊을 加하지는 않았다. [1]

서울대 在學 및 中退 以後 [ 編輯 ]

1982年 살레시오高等學校 를 卒業한 그는 1982年 3月 서울大學校 理學系列 82學番으로 入學하였다. [1] 理學系列은 뒤에 物理學 課와 天文學 過勞 나뉘었다. 專攻인 物理學 天文學 外에 그는 서울大 에서 歷史學 政治經濟學 도 工夫하였다. [2]

그는 PC通信 서울大 同好會 에서 左派 民族 解放 系列 大學生 들의 偏向된 視角에 反하는 글을 主로 썼다. 우루과이라운드를 막을 게 아니라 차라리 빨리 導入해서 國內 産業을 글로벌化해야 한다는 開放論을 主張했다. [1] 右派 新自由主義 者가 아닌 그가 開放을 主張하는 글을 올리자, 一部 악플러들로부터 竹槍으로 찔러 죽이겠다는 脅迫을 當하기도 했다. [1] 또한 그의 집으로는 脅迫 電話가 걸려 왔다.

1985年 防衛兵 으로 에 入隊, 14個月을 服務하였다. 1987年 滿期 全域하였고, 서울대학교를 中退했다. 서울大 中退 後 김완섭은 컴퓨터 關聯 잡지 社 3곳에서 記者生活을 했다. [1] 1987年 서울 구로區廳 籠城事件으로 收監 [2] 措處되었다가 結局 풀려났다. [2]

言論, 文學 活動 [ 編輯 ]

言論 活動 [ 編輯 ]

1989年 부터 컴퓨터 分野의 專門 記者 로 入門하여 《하이테크 情報》 記者, 《소프트 월드》 記者 等 雜誌, 言論社 記者 等을 歷任하다가 뒤에 小說家 兼 作家· 文學 評論 가· 인터넷 칼럼니스트 等으로도 活動했다.

그는 韓國 社會 內部의 全體主義 敵, 파시즘 的 要素를 批判하는 冊을 出刊하였다가 送辭와 批判을 받았다. 그는 곧 記者生活을 그만두고 1980年 代 後半부터 PC通信에서 論客으로 活動했다. 이는 1995年 大韓民國 인터넷 이 普及된 以後 인터넷 論客 으로 자리잡았다.

社會運動과 인터넷 論客 [ 編輯 ]

PC通信 論客으로 活動할 때부터 女性主義 者 論客, 民族解放 파 論客들과 論爭을 벌였으며, 學生運動家 出身이면서도 反(反) 女性主義 的인 視角과 主體思想派 , 民族解放派 에 對한 批判으로 論難이 되기도 하였다.

케텔이나 엠팔 , 하이텔 PC通信 에서 主로 컴퓨터 와 關聯한 情報를 올리면서 네티즌들과 사귀게 되었다. 1980年代 後半 當時 某 PC通信 同好會가 하이테크 商品에 對한 리뷰나 共同購買 等의 形式을 통해 컴퓨터 業界에 莫强한 權力을 行使하고 있었다. 李 某 PC通信 同好會는 執行部 選擧 때 온갖 不正으로 말이 많았는데 이를 暴露하자 同好會人들로부터 脅迫, 사이버 暴力을 當하였다. [1] 김완섭에 依하면 當時 '온라인 權力과 싸움을 벌이면서 오프라인에서는 한 사람이 數十名과 싸울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는 數萬名과 對敵할 수 있다는 點을 깨달았다.'고 回顧하였다. [1]

1995年 인터넷 피氏 通信에서 發表한 《 娼女論 》이 話題가 되며 作家가 되었다. 《娼女論》은 保守主義 言論과 社會의 批判을 받았으며, 男性優越主義 視角 論難으로 一部 페미니스트 들로부터도 批判을 받았고, 話題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의 持續的인 攻擊에 對해 그는 이렇게 解明하였다.

男女 性器를 우리말로 쓰는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난 女性 들이 섹스를 武器로 男子를 잡아 自身과 새끼들의 목숨을 扶持한다고 믿는다. 그게 人間의 本性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 생각을 담은 娼女論은 人類를 理解하는 宏壯한 業績이라고 생각한다. 女性 解放의 根本 原因을 明快하게 解釋했지만 아직 學問的으로 評價는 받지 못하는 實情이다. 우리 社會는 숫놈의 暴力性과 攻擊性이 抑制되고 癌年의 性質이 드러나야만 發展할 수 있다. 내 冊을 제대로 읽은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다. 다들 皮相的(間接的)으로 接하고 나를 攻擊하는데 제발 冊 좀 제대로 읽은 뒤 攻擊해달라. [1]

그러나 以後 김완섭은 隨時로 脅迫電話와 投書에 시달림을 當했고, 그의 家族들에게도 脅迫 電話가 걸려오기도 했다.

作家 活動 [ 編輯 ]

1990年 에 結婚하였으나 結婚 3年만인 1993年 에 別居하다, 1996年 에 公式 離婚했다. [1] 前妻와의 사이에서 子女는 없다. [1] 以後 PC通信에서 本格的으로 論客으로 活動하며 페미니즘 쇼비니즘 을 攻擊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1994年 컴퓨터 運營體制로 윈도우 가 普及되고 인터넷 이 普遍化되면서 그는 카페, 小規模 모임에서 인터넷 論客으로 活動舞臺를 擴張했다.

그는 韓國 社會의 愛國主義, 쇼비니즘 을 꾸준히 批判해왔고, 인터넷에서는 그의 主張에 同調하는 層과 非難하는 層으로 나뉘게 되어 論難의 對象이 되었다. 話題 人物로 登場한 以後에는 日本 , 美國 等 外國 言論의 訪問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992年 以後에 그는 프리랜서로 飜譯 著述 等의 일을 했다. [2] 그러나 繼續된 脅迫電話와 投書에 시달리기도 했다. 1996年 出國, 오스트레일리아 로 移住했다가 1998年 韓國 으로 돌아왔다. 歸國 後 코스닥新聞社 의 創刊에 參與하였으며, 코스닥新聞社 編輯主幹이 되었다. [2]

2001年 ‘日本을 尊敬하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開設해 日本의 植民統治를 正當化하는 칼럼을 寄稿했으나 [3] , 곧 閉鎖되었다.

2000年代 以後의 論難들 [ 編輯 ]

2002年 가을 부터 2003年 여름 까지 日本 의 隔週刊誌 ‘사피오’에 總 20回 連載글을 쓰기도 했다. [1] 2002年 “韓日 强點”에 對해서 肯定的인 視角으로 쓴 《 親日派를 위한 辨明 》과 《새 親日派를 위한 辨明》을 썼다. 이 冊은 大韓民國에서는 歷史的 事實 歪曲 等을 理由로 2002年 4月 8日 靑少年有害媒體物(刊行物)로 決定되었지만, [4] 日本에서는 4個月 동안에 35萬 部가 팔렸다.

한便 日本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日帝强占期 를 無條件 否定的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視角을 드러내면서 一部 民族解放 파 및 인터넷 네티즌들로부터 다시 攻擊과 惡플에 시달려야 했다. 2002年 初 김완섭은 '親日派를 위한 辨明 1'을 내고 목숨이 위태롭다고 생각해 女同生들을 濠洲 로 移民을 보냈다. [1] 光州에 있는 그의 老父母는 그냥 그곳에 살고 있었다.

2003年 日本의 自由植民史觀主義者 스기모토 미키오 의 日帝 植民 統治를 美化한 著作物인 《 植民地 朝鮮의 硏究 》를 自身이 세운 出版社인 춘추사를 통해 發刊하였으나 인터넷 團體인 "우리 皇室 사랑會"( http://www.sihk.org )에 依해 刊行物 倫理委員會에 申告되어 2006年 靑少年 有害 媒體物(刊行物)로 決定 및 告示되었다. 當時 有害媒體라는 批判과 表現의 自由 尊重이라는 贊反 兩論이 갈렸으나 韓國 法院은 皇室 사랑會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4年 10月 에는 박기서 [5] 市民運動家를 偶然히 만났다가 獨立運動家에 對한 批判을 理由로 毆打당하여, 負傷當하기도 했다.

2006年 한 인터뷰에서 그는 主體思想派 를 批判했다. '當時 主思派들이 北韓과 直接 連結돼 있었다. 우리 親舊들이 平壤에도 몇番씩 다녀온 걸로 알고 있다. 實際로 數千名의 大學生 間諜들이 武器庫 털어 冠岳山 빨치산하겠다고도 했다. 이젠 오히려 政府機關에서 이런 事實을 暴露해도 아무도 안믿는 世態다. [1] '라는 것이다. 그는 또 '只今 大韓民國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指令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政權을 쥐고 있다.'며 노무현 政府 를 批判하기도 했다. [1]

國民日報 와의 2006年 인터뷰에서는 安重根 醫師를 民族의 元首라고 하는 理由에 對해, 朝鮮을 改革한 이토 히로부미 를 暗殺한 安重根은 卽 醫師가 아닌 暴徒이며, 이토는 平和主義者인데다 朝鮮의 倂合을 바라지 않았는데 이토가 죽어서 日本 政府에 軍部 得勢를 가져왔고 이는 結局 朝鮮에 對한 逼迫으로 이어졌으니 安重根은 民族의 怨讐라는 主張을 하였다. 또한 自身은 韓國人들이 잘못 알고 있는 眞實을 알려주고 싶을 뿐인데 韓國人들은 水準이 낮아 내 主張이 담긴 冊도 읽지 않고 辱부터 한다고도 答辯하였다. [1] 이에 安重根 義士 記念館 側에서는 名譽毁損 은 直系後孫만 可能하여 美國에 있는 안웅호의 輦路 等 韓國에 歸國할 수 없는 狀況이라 告訴는 不可能 狀況이라고 한다. [6]

2008年 3月 28日, 서울高等法院은 《새 親日派를 위한 辨明》의 內容 中 "柳寬順은 女子 깡牌", "金九는 朝鮮의 忠犬"이라는 表現을 하여 獨立 運動家들의 名譽를 毁損한 嫌疑로 罰金 750萬 원을 宣告 받았다. [7] 2003年에도 死者 名譽 毁損 嫌疑로 告訴를 받아 結局 2006年 罰金刑과 賠償 宣告를 받은 적이 있다. [8]

論難 [ 編輯 ]

1992年 論客 活動을 始作한 以來 安重根 을 테러리스트로 批判하였고, 柳寬順 을 깡牌로 批判하여 物議가 되기도 했다. 김좌진 을 깡牌로 批判하였다가 孫女인 金乙東 에게 被訴당하기도 했고, 金九 를 테러리스트로 批判했다가 論難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그밖에 그의 집과 周邊 人物, 家族 等에게도 隨時로 匿名의 脅迫 電話와 脅迫 便紙가 傳達되어 問題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獨立運動家 批判과 親日派 에 對한 擁護를 놓고 處罰해야 한다는 主張이 剛해지고 있고 몇몇 發言에 對해서는 實定法 違反으로 起訴되어 有罪判決을 받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批判 關聯 論難 [ 編輯 ]

1988年 무렵부터 명성황후 에 對한 再評價 輿論이 造成되었다. 그러자 그는 2001年 7月 그는 명성황후 를 殉敎者로 美化하는 學界, 言論의 視角을 批判했다.

미친 불여우 閔妃를 韓國人들은 무슨 自主獨立의 殉敎者라도 되는 줄 錯覺하고 있다.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日本의 處事는 우리 立場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9]

그러나 이 過程에서 辱說이 問題視됐다. 批判 過程에서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日本의 處事는 우리 立場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9] '라는 內容이 問題가 되어 2002年 8月 까지 1年 以上 論難의 對象이 되었다.

明成皇后의 後孫인 閔氏 宗親會는 2002年 初 그를 檢察 에 告訴했다. [9] 8月 14日 서울地檢 刑事9部(신남규·辛南奎 部長檢事)는 지난달 인터넷 사이트에 日本에 依한 明成皇后 弑害를 擁護하고 明成皇后를 誹謗한 嫌疑(死者에 對한 名譽毁損)로 그를 不拘束 起訴했다. [9] 2003年 2月 명성황후(明成皇后)의 名譽를 毁損한 嫌疑로 罰金 700萬원을 宣告 [10] 받았다.

以後 事件은 擴大되어 그가 2002年에 펴낸 冊 ‘親日派를 위한 辨明’과 인터넷 컬럼 等에서 日本의 植民統治를 歪曲 著述해 名譽를 毁損당했다”며 高宗皇帝 의 孫子 李錫 , 日本軍 從軍慰安婦 박두리(82)外 6名, 徵用者 遺族 5名, 義兵隊長 閔宗植의 孫子, 명성황후 의 種曾孫뻘 되는 민병호, 忠情公 민영환 의 孫子 민병덕 等에게 被訴되었다. [11] [12] 그러나 著書 《親日派를 위한 辨明》과 關聯된 訴訟에는 被訴 後, 한番도 法廷에 出席하지 않았다.

2005年 9月 서울중앙지법 民事81單獨 김창보 判事는 1日 “冊 ‘親日派를 위한 辨明’과 인터넷 컬럼 等에서 日本의 植民統治를 歪曲 著述해 名譽를 毁損당했다”며 李錫 等이 그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 請求訴訟에서 原告勝訴 判決했다. [11] [12] 金 判事는 “2003年 訴訟이 提起된 後 被告는 裁判에 한 番도 나오지 않았다”며 “當事者가 辯論期日에 出席하지 않을 때 相對方이 主張하는 事實을 自白한 것으로 본다는 民事訴訟法에 따라 原告 勝訴 判決했다”고 밝혔다. [11] [12]

김창보 判事는 “박두리 等 日本軍 慰安婦 被害者 6名에게 各 600萬원, 徵用者 遺族 5名과 義兵隊長 閔宗植의 孫子에게 各 500萬원, 이昔氏와 명성황후 遺族 민병호氏, 忠情公 閔泳煥의 孫子 민병덕氏에게 各 1,000萬원씩 모두 9,600萬원을 賠償하라”고 宣告했다. [11] [12] 訴訟 以後 그의 著書 ‘親日派를 위한 辨明’ 日本語版을 發行해 日本에서 40餘萬部가 팔렸다. 이 辯護士는 “損害賠償을 받아내기 위해 日本 出版社로부터 金氏가 받고 있는 印稅를 押留하는 것을 檢討 中”이라고 밝혔다. [11] [12]

김완섭과 名譽毁損罪 告訴 論難 [ 編輯 ]

2005年 3月 初 김완섭은 인터넷 揭示板과 카페에 김완섭에게 辱說 및 非難하는 글을 쓴 被告訴人들을, 김완섭이 名譽毁損罪로 告訴한 事件이 있었다.

3·1運動은 基督敎의 宗敎 暴動이라고 했다가 非難글이 빗발쳤다. [13] 김완섭은 2005年 3月 16日 報道한 ‘親日派 김완섭 “獨島 日本에 돌려줘라” 妄言’이라는 記事에 달린 ‘惡플’(惡意的 댓글)까지 蒐集, 告訴하기로 했다. 自身의 글에 惡플을 단 네티즌들을 告訴하기로 하고, 最近 該當 네티즌들에게 메일 通知文을 發送했다. [14] 論客 陳重權 은 그를 批判하였으며, 辯護士 出身인 한나라黨 元喜龍 은 김완섭에게 告訴當한 4000名의 辯護人 을 自處하고 나섰다. 元喜龍 은 自身이 네티즌의 벙커가 되어 지키겠다 [15] 고 宣言했고, 以後 元喜龍 한나라黨 議員을 비롯한 한나라당 辯護人團은 김완섭에 맞서 被告訴人들을 辯護하였다. [16] 訴訟 期間 中 元喜龍 等은 告訴당한 네티즌들의 無料 辯護를 自請하였다.

그를 批判하며 反對便에 섰던 國會議員 元喜龍은 서울大學校 同門이자 같은 學番이라 話題가 되기도 했다.

김좌진 批判 論難 [ 編輯 ]

또한 2006年 2月 김완섭은 獨立運動家 김좌진 을 山賊떼 頭目이라고 侮辱한 嫌疑로 國會議員 金乙東 으로부터 名譽 毁損으로 不拘束 起訴되었고, 아울러 金乙東은 父親, 祖父의 死者 名譽 毁損 部分 關聯해서도 追加 告訴할 것을 밝혔다. [17] [18] [19] 본 告訴에 對해 檢察은 "社會 常規에 違背되지 않는 行爲는 處罰하지 않는다’는 刑法 20兆 政黨 行爲 規定에 따라 違法性이 彫刻된다"며 不起訴 處分을 내렸다. [20]

이것에 對하여 法院은 金佐鎭을 散炙 떼 頭目으로 認定한다는 것이 아니라, 被告人의 表現이 個人的 意見表現의 性格이 剛하며, 當時 金佐鎭을 中心으로 한 光復團이 資金을 마련하는 過程에서 强制力을 行使한 事實이 國史編纂위에 依하여 認定되므로 完全한 虛僞 事實 摘示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件에 한하여 一部 無罪 判決했다고 解明하였다. [21] 이는 個人的인 意見表明은 名譽毁損이 아니라 侮辱罪의 構成要件에 該當하기 때문이며 山賊떼 頭目이란 表現은 充分히 侮辱罪의 構成要件에 該當할만한 言辭이지만, 大韓民國 刑法上 死者 名譽毁損罪는 있으나 獅子 侮辱罪는 없기 때문에 無罪判決이 내려지게 되었다.

愛國心 批判 論難 [ 編輯 ]

그는 韓國 社會에 澎湃한 盲目的인 愛國心을 批判하였다. 그 中 2002年 8月 韓日合邦 當時 自殺한 兩班과 知識人層을 批判하여 論難이 되었다.

韓日合倂을 反對해 自決하거나 日帝에 抵抗하다 죽어간 사람들은 지킬 價値가 없는 것들을 지키려다 개죽음을 當한 것 [9] 이다.

또한 '獨立義兵은 兩班들이 돈으로 募集한 깡牌와 도둑'이라는 發言이 結局 問題가 되기도 했다. [19] 그에 依하면 求한 말 의 義兵과 日帝强占期 의 獨立軍이 獨立軍 資金을 募金한다는 理由로 富者는 勿論 一般 民間人의 家屋까지 侵入, 財物을 掠奪한 것을 批判한 것이었다.

金九 批判 論難 [ 編輯 ]

2003年 11月 말 김완섭은 서울 汝矣島 國會議事堂 을 訪問, 國會 過去事眞相糾明特委 公聽會에서 “金九 先生은 ‘閔妃’의 怨讐를 갚기 위해 無辜한 日本人을 殺害한 뒤 中國으로 逃避한 朝鮮 王朝의 忠犬(忠犬)”이라는 內容의 文件을 配布 [10] 하였다. 또한 그는 " 金九 가 無辜한 日本人을 殺害했다" [22] 는 內容의 印刷物도 配付하였다. 文件을 받아 본 一部 國會議員과 市民들은 卽席에서 그에게 非難을 퍼부었고, 一部는 이를 根據로 檢察에 들고가 그를 告訴했다.

金九는 自身의 著書 白凡逸志 에서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日本 軍人 이라고 記述하였으나 [23] , 繼續 民間人이라는 疑惑이 提起되어 왔다.

2004年 7月 檢察은 公訴狀에서 “金九 先生이 1896年 10月 黃海道 安岳郡 致賀浦項에서 殺害한 ‘쓰치다’는 當時 朝鮮人으로 僞裝한 日本軍이라는 事實이 밝혀졌고 金九 先生이 쓰치다를 處斷한 뒤 逮捕돼 死刑 宣告까지 받았다가 1919年 中國으로 亡命했는데도 逃走한 것처럼 虛僞 事實을 摘示했다”고 밝혔다. [10] 이어 그는 서울高檢으로부터 不拘束 起訴 處分을 받았다. 서울高檢 정현태(鄭現太) 檢査는 7月 27日 그를 白凡 金九(金九) 先生의 名譽를 毁損한 嫌疑(死者名譽毁損)로 小說 ‘親日派를 위한 辨明’의 作家 김완섭氏를 不拘束 起訴했다고 言論에 밝혔다. [10] 또한 서울高檢은 "金九가 無辜한 日本人을 殺害했다"고 主張한 文件을 配布한 親日作家 김완섭氏를 虛僞事實로 인한 名譽毁損으로 職權 起訴한 바 있다. 서울高檢의 檢事 정현태는 김완섭에 對한 起訴는 國史編纂委員會 報勳處 資料를 綿密히 檢討하고 나서 내린 決定이었다 [22] 고 밝혔다.

그러나 김완섭의 主張은 이미 事實로 確認된 것이었다. 1987年 창원대학교 敎授 도진순 이 찾아낸 日本 外務省 資料에 依하면 쓰치다 兆스케는 계림장業團(鷄林奬業團) 所屬 上인 [24] 으로 밝혀졌다.

오마이뉴스의 김완섭 關聯 報道 論難 [ 編輯 ]

2008年 부터는 그가 뉴라이트 會員이라는 루머가 인터넷 에 流布됐다. 2009年 오마이뉴스 가 "金九가 無辜한 日本 商人을 죽였다"는 뉴라이트의 主張을 反駁하기 위해, 김완섭이 "金九가 無辜한 日本人을 殺害했다"고 主張한 文件을 配布해 發生한 名譽毁損 事件에서 裁判 中 日本軍 中尉를 殺害 한 것이 맞다고 드러났다는 事例를 提示했다. [22] 이를 根據로 "김완섭은 뉴라이트"라는 說이 流布되고, 各種 촛불團體에서도 뉴라이트 親日派 라고 批判하면서 김완섭을 뉴라이트 團體 會員으로 明示 [ 出處 必要 ] 하였으나, 김완섭은 뉴라이트와 全혀 關係가 없는 人物로 밝혀졌다.

또한 김완섭이 光州 民主化 運動 에서 市民軍으로 參與하였고, 5.18 當時 戒嚴軍에 맞서 盜聽 을 사수한 字로 正式登錄된 5.18 光州民主有功者 로 障害等級 判定까지 받은 事實이 報道되고 [1] 조선일보 出身 조갑제 等과는 敵對的인 關係라는 것이 밝혀졌다.

反映南 地域感情 論難 [ 編輯 ]

地域感情 을 强하게 가지고 있으며 慶尙道 를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 推定된다. 김완섭은 自身의 著書《娼女論》에서 "韓國 社會의 모든 病弊의 根源이 慶尙道 男性들에게서 비롯된다"는 發言을 했다. 端的으로 新種플루 때는 '하느님 慶尙道 놈들을 한 5百萬만 죽게 해주세요'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고라 글 - 死亡者가 全部다 慶尙道네廉 이러한 側面은 그의 親日 行跡과 더불어 進步勢力에게서조차 外面받게 되는 理由가 되었다.

日本의 戰爭 犯罪 擁護 論難 [ 編輯 ]

그의 著書 親日派를 위한 辨明에서 난징 大虐殺 , 從軍慰安婦 , 强制 徵用 第2次 世界大戰 當時 日本의 戰爭 犯罪 를 擁護하였다. 그 主要 論理는 먼저 當時 戰爭 그리고 未開한 軍國主義 時節에 依한 不可避性이 있었다는 點을 들면서 한便으로는 中國軍 티베트 侵略과 民間人 虐殺 , 韓國軍 베트남戰 光州 民主化 運動 에서 民間人 虐殺이 있었기 때문에 中國과 韓國은 日本에 辱할 資格이 없다는 피장파장의 論理였다. 덧붙여 아무 根據資料 提示없이 " 韓國軍 베트남戰 參戰 期間 동안 虐殺한 베트남 住民의 數는 30餘萬名 넘는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이런 文章을 記載하였는데 이 文章 하나가 베트남語 위키百科 內에서 韓國軍이 30餘萬名 넘는 베트남 良民 虐殺 推定의 根據資料로 使用되고 있는 實情이다.

思想과 信念 [ 編輯 ]

學生運動家이면서도 半 페미니즘 , 半 主體思想 , 國家 嫌惡的 視角을 堅持하고 있다. 이 때문에 非主流로 겉돌거나 惡플, 批判에 시달렸으며 論難의 餘地가 存在하고 있다.

日本의 一方的 侵略설 批判 [ 編輯 ]

그는 1990年 臺 中盤, 日帝 植民地 當時 日本으로부터 一方的인 侵略만을 當했는가 하는 批判을 提起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2003年 1月 에는 日本 쇼쿤과의 인터뷰 內容이 國內에 報道되어 論難이 되었다.

나는 "일한 歷史認識의 共有가 可能한가"라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對答한다. 왜냐하면 韓日 間의 歷史認識은 적어도 所謂 " 韓日合倂 "機에는 이미 共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太平洋 戰爭 時 우리 韓國 인들(조선인들)은 '日本人'으로서 함께 싸우지 않았는가?

(《쇼쿤》 2003年 1月 과의 인터뷰 中 [25]

反日感情 助長과 歷史歪曲· 强制 徵用 批判 [ 編輯 ]

김완섭은 徵用을 否定하는 發言을 하여 한때 論難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그는 2000年 臺 中盤, 日帝 植民地 當時 日本으로부터 一方的인 侵略만을 當했는가 하는 批判을 提起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2003年 1月 에는 日本 쇼쿤과의 인터뷰 內容이 國內에 報道되어 論難이 되었다. 김완섭은 韓日間의 葛藤을 韓國 側에서 意圖的으로 助長한다는 批判을 내놓았다. 그의 主張은 다음과 같다.

韓國人들에게 있는 反日感情은 韓國 政府의 意圖的인 歷史歪曲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歷史를 歪曲하고 있는 것이 日本이 아니라 韓國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國際社會의 一般的 見解이기도 하다. [26]

그는 또한 日帝强占期 當時 一方的인 强制 徵用만 있었는가 하는 主張을 學界에 提起하여 韓國 國史學界로부터 批判이 빗발치기도 했다. 2003年 1月 日本 雜誌 《쇼군》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같은 主張을 펼쳤다.

韓日合邦 時代에 日本軍에서의 朝鮮 出身 志願兵의 應募狀況에 對한 資料를 봅시다. (以下 省略) 실로 30萬 名 以上의 朝鮮人들이 殺到한 것입니다. '日本 軍人' 한 사람을 뽑는 데, '朝鮮人' 50名 이 支援한 것입니다. [25] 이러한 높은 競爭率은 當時 司法試驗이나 現在의 有名大學의 競爭率에 비하여도 相當히 높은 것입니다.

(《쇼큔》 2003年 1月 과의 인터뷰 中 [25]

日本 言論과의 인터뷰 途中 日帝强占期 當時 一部 韓國人들이 自發的으로 徵用에 支援했다는 김완섭의 發言이 大韓民國 國內에 알려지면서 한때 論難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명성황후 批判 [ 編輯 ]

그는 명성황후 를 愛國者로 美化하는 것을 批判하였다. 2001年 7月 그는 "韓國人들은 閔妃를 무슨 自主獨立의 殉敎者라도 되는 줄 錯覺하고 있다." [9] 라고 主張했다. 김완섭은 그에 對한 根據 資料를 提示했지만 韓國 國內에서는 그에 對한 人身攻擊性 批判이 亂舞하였다.

金九의 良民 暗殺설 [ 編輯 ]

2004年 그는 金九 가 無辜한 民間人을 殺害했다고 主張하여 論難이 되었다.

2003年 11月 그는 市民들에게 配布한 文件을 통해 "金九가 無辜한 日本人을 殺害했다 [22] "고 主張했다. [27] 以後 그는 獨立運動家 金九를 冒瀆했다는 네티즌들의 批判을 받았으나, 1987年 창원대학교 敎授 도진순 이 찾아낸 日本 外務省 資料를 引用해 金九가 치하포 에서 他殺한 쓰치다 兆스케는 계림장業團 所屬 上인 [24] 이라고 밝혀졌던 內容이었다.

著書와 曆書 [ 編輯 ]

著書 [ 編輯 ]

  • 《娼女論》, 김완섭, 1995年, 춘추사 ISBN   89-952802-1-2 (改正 增補版)
  • 《윈도우 3》
  • 《親日派를 위한 辨明》, 김완섭, 2002年 2月 20日, 춘추사
  • 《새 親日派를 위한 辨明》, 김완섭, 2003-06-10, 춘추사, ISBN   978-89-952802-2-5 .
  • 《親日派를 위한 辨明 2 - 英雄의 虛像》, 김완섭, 2004, 후쇼사

飜譯書 [ 編輯 ]

  • 《物理學의 進化》(아인슈타인 曆書) <보디랭귀지>

共著 [ 編輯 ]

기타 [ 編輯 ]

2002年 펴낸 그의 著書 《親日派를 위한 辨明》은 日本語 판을 發行, 日本 에서 40餘 萬部가 팔렸다. [11] [12] 그가 이 《親日派를 위한 辨明》으로 訴訟을 當하면서 日本 內에서는 話題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人物과 思想史 編輯部, 《人物과 思想 2001年 11月號》 (人物과사상사, 2001)
  • 盧 다니엘, 《右傾化하는 神의 나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김완섭, 《娼女論》 (춘추사, 1995)

各州 [ 編輯 ]

  1. [김완섭을 만나다 2] "나를 아는자,나를 辱하라!" 國民日報 2006年 2月 24日子
  2. '김완섭 妄言' 波紋, "果然 韓國人인가" - <김완섭-이시하라 對談 專門> "韓日軍事同盟 만들자" 프레시안 2003-02-05
  3. '日帝 美化'作家 김완섭氏, 高宗皇帝 孫子 等에 賠償 判決 朝鮮日報 2005年 9月 2日子
  4.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審議決定目錄 國內 靑少年 有害刊行物 '親日派를 위한 辨明'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02年 3月 23日 決定
  5. 市內버스 運轉技士 出身의 市民運動家로서 1996年 10月 23日 白凡 金九의 暗殺犯人 안두희를 擊殺한 人物. 以後 3年刑을 宣告받고 收監되었다가 이듬해 假釋放되었고, 現在까지 白凡 記念事業會 關聯 活動을 하고 있다.
  6. 安重根 烈士를 辱하는 內容이 있으면 法的 處罰 不可能? Archived 2016年 3月 5日 - 웨이백 머신 安重根義士 記念館 質應答 2006年 8月 16日
  7. [法曹투데이]‘親日派 辨明‘김완섭氏 速行 公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머니투데이 2008年 1月 18日
  8. “‘親日作家’ 김완섭氏 歷史歪曲 賠償”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亞日報 2006年 10月 10日
  9. 明成皇后 誹謗 作家 名譽毁損 起訴 東亞日報 2002年 8月 14日
  10. ‘金九先生 名譽毁損’ 作家 김완섭氏 起訴 東亞日報 2004年 7月 27日子
  11. ‘日帝 美化‘作家 김완섭氏, 高宗皇帝 孫子 等에 賠償 判決 朝鮮日報 2005年 9月 2日
  12. 日帝 植民統治 美化 親日作家 김완섭氏 高宗皇帝 孫子 等에 賠償 判決 Archived 2011年 11月 23日 - 웨이백 머신 韓國日報 2005年 9月 2日
  13. 그러나 3·1運動은 基督敎 指導者들 以外에도 天道敎, 佛敎 等의 宗敎指導者들이 參與, 擧事한 運動이었다.
  14. 高뉴스 2006.02.08日子
  15. 無料辯論 원희룡 議員 “네티즌 지켜내는 ‘벙커’될 것” Archived 2016年 3月 4日 - 웨이백 머신 브레이크뉴스 2006年 3月 3日
  16. 元喜龍―김완섭 3·1節 ‘맞짱’ 舌戰…金氏 “3·1運動은 宗敎暴動” 國民日報 쿠키뉴스 2006年 3月 1日
  17. “林秀卿은 돼도 김완섭은 안돼”…검찰,독도망언 惡플 告訴事件 搜査 着手 國民日報 쿠키뉴스 2006年 2月 26日
  18. 김완섭 虛僞 事實 反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 金乙東 미니홈피 認容
  19. 서울經濟 : [寄稿] '3·1精神' 부활시키자 Archived 2011年 11月 23日 - 웨이백 머신 서울경제신문 2006年 2月 29日
  20. [1] 親日 글 反撥 惡플 네티즌 1000餘 名 檢察 "罪 안된다".
  21. [高뉴스] ‘親日作家’ 김완섭 無罪 Archived 2011年 11月 23日 - 웨이백 머신 데일리포커스 2008年 4月 11日
  22. 뉴라이트와 現 政府에 嘲弄당하는 金九 各州 오마이뉴스 2009年 1月 17日
  23. 金九 (初版 1997-7-25, 改訂版 2002-8-1). 《白凡逸志》. 京畿道 坡州: 돌베개. 90~101쪽쪽. ISBN   89-7199-148-8 .  
  24. 京鄕新聞 1997年 8月 13日子, 19面
  25. 盧 다니엘, 《右傾化하는 神의 나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191쪽
  26. 盧 다니엘, 《右傾化하는 神의 나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190쪽
  27. 그러나 金九가 殺害한 쓰치다 兆스케의 身分에 對해서는 疑惑이 提起되어 왔다.
  28. 2003年 日本 새역모의 前 會長 歷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