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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泰燮의 ‘잘못된 만남’…사람 보는 眼目은 ‘正義의 女神’級[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琴泰燮의 ‘잘못된 만남’…사람 보는 眼目은 ‘正義의 女神’級[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4月 27日 14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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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話]

琴泰燮 前 國會議員(以下 琴泰燮)에게는 3人의 有名한 스승이 있었다. 한 名은 學問的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요, 나머지 두 名은 政治的 스승이렷다. 그中 누가 映畫 ‘죽은 詩人의 社會’ 키팅 先生과 같은 偉大한 스승인지, 아니면 反面敎師해야 할 對象인지, 政治人 琴泰燮의 行步를 보고 讀者가 判斷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잘못된 만남’이다. 琴泰燮 周邊에선 “어떻게 10年 동안 안 되는 길만 골라 가나 싶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琴泰燮은 ‘개구리 王子’처럼 눈이 크지만 사람 보는 眼目은 裝飾品 水準이요, 눈을 가린 ‘正義의 女神’級이다.

正義의 女神은 形象이 조금씩 다르다. 서울 瑞草區 大法院에 있는 ‘正義의 女神’은 눈을 뜨고 저울과 法典을 든 形象인데 공교롭게 琴泰燮이 著書 ‘디케의 눈’ 冊 表紙에 引用한 寫眞은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든 形象이다.

금태섭 저서 ‘디케의 눈’에 나온 정의의 여신상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오른쪽 아래). 동아일보 DB
琴泰燮 著書 ‘디케의 눈’에 나온 正義의 女神像과 大法院에 있는 正義의 女神像(오른쪽 아래). 東亞日報 DB


● 政治權 入門 契機 된 안철수와의 訣別
2021년 2월 금태섭 전 국회의원(왼쪽)과 안철수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세부 사항을 논의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21年 2月 琴泰燮 前 國會議員(왼쪽)과 안철수 議員이 서울市長 候補 單一化 細部 事項을 論議한 뒤 記念 撮影을 하고 있다. 東亞日報 DB

첫 出發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琴泰燮은 2007年 檢察을 나온 뒤 5年 만에 2012年 안철수 캠프에 合流했다. 안철수 議員(現 國民의힘)李 大選 出馬 宣言을 하기 前 ‘시골 醫師’ 박경철 氏로부터 提案을 받았고 2012年 봄에서야 非公式 캠프인 ‘汝矣島 오피스텔’에 合流한 것이다. 琴泰燮은 안철수 캠프에 合流하게 된 背景에 對해 이같이 밝혔다.

“2012年 大選을 앞둔 우리 앞에 選擇의 길은 그렇게 平面的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文在寅, 朴元淳, 安哲秀 等을 놓고 長點과 短點을 比較해가며 한 名을 고를 수 있는 處地가 아니었다. 그때 나도 많은 사람들이 願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政權을 交替해서 판을 갈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契機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安哲秀 院長뿐이었다. (中略) 나는 그 努力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한 것이지 여러 政治人 中에서 한 名을 選擇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狀況이 아니었다.”
- 2015年 8月 發刊한 ‘이기는 野黨을 갖고 싶다’ 中 -
한마디로 얘기하면 政治는 始作해야겠고 딱히 安 議員을 ‘主君’으로 삼을 만큼 끌리진 않았지만 마침 提案이 들어왔으니 合流했다고 多少 率直히 밝힌 것이다. (勿論 이 冊은 琴泰燮이 安 議員과 事實上 訣別한 뒤 쓰여졌다.)

그 뒤 그는 안 議員에 對한 言論과 野黨 等의 檢證作業이 本格的으로 進行되면서 ‘네거티브’ 對應을 맡았다. 박근혜 캠프의 정준길 辯護士가 琴泰燮에게 電話를 걸어 이른바 ‘安哲秀 大選 不出馬 慫慂’ 論難이 일었고 이 일로 어쨌든 有名해졌다.

그해 11月 23日 當時 민주당과 單一化 協商을 進行하던 中 安 議員이 結局 候補 辭退를 決心하면서 眞心캠프度 解散됐다. 安 議員은 18代 大選 當日 美國 샌프란시스코로 떠났고 朴槿惠 前 大統領이 文在寅 前 大統領을 꺾으면서 當時 與黨의 勝利로 끝이 났다.

琴泰燮은 2013年 秒 安 議員을 만나러 美國 샌프란시스코를 찾아갔다. 이와 關聯된 두 時間 동안 琴泰燮이 진흙 길을 걷고 있는 데도 안 議員이 몰랐다는 에피소드는 法定冒瀆 [8話]에서 다룬 적이 있다.

‘國民 金쪽이’ 安哲秀의 時間은 거꾸로 간다[황형준의 法廷冒瀆]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222/118030167/1

이 內容이 言論에 注目을 받자 2015年 8月 安 議員 側 人士는 이같이 말했다.

“금 辯護士가 當時 美國에 온 게 結局 4月 再·補選 때 노원丙에서 自身이 나가려고 한 것인데, 거기에 對한 說明은 쏙 뺐다.”
- 取材 메모 中 -
當時 琴泰燮은 2013年 4月 24日 치러지는 서울 노원丙 補闕選擧에서 大選에서 敗北한 지 몇 달 안 된 安 議員이 出馬하는 것을 反對했다고 한다. 代身 自身이 出馬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安 議員은 歸國해 補闕選擧에 直接 出馬했고 琴泰燮은 怒怨丙 選擧에 直接 關與하지 않았다. 安 議員은 無所屬으로 當選이 됐다.

그 뒤 安 議員은 新黨 創黨 方針을 밝혔고 琴泰燮도 新黨 創黨機構의 代辯人을 맡으며 活動했다. 그러던 中 그해 3月 2日 安 議員이 민주당 김한길 代表와 電擊 合黨을 發表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誕生했다. 祕密裏에 推進되던 合當 計劃이 發表되고서야 알게 된 琴泰燮은 2012年 候補 辭退에 이어 또 한 番 적지 않은 背信感을 느꼈다.

合黨 뒤 第1野黨인 새정치민주연합 代辯人으로 活動하던 琴泰燮은 7·30 再·補選에서 서울 銅雀乙 出馬를 宣言했지만 出馬는 挫折됐다. 當時 金한길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指導部는 그를 水原丙에 戰略公薦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동작乙에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다른 地域으로 出馬할 수 없다며 所信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結局 代辯人職에서 물러났고 安 議員과 訣別했다.

그 뒤 安 議員이 새정치민주당을 脫黨해 2016年 국민의당을 創黨할 때도 함께하자는 提案을 받았지만 琴泰燮은 민주당에 그대로 남았다. 그해 1月 末 琴泰燮이 했던 이야기다.

“지지난주에 안철수 議員을 만났다. 自己가 2015年에 왜 脫黨했는지 말한 다음에 ‘금 辯護士는 心地가 곧은 사람이고 오래 생각해서 한番 決定하면 안 바꾸는 사람이니까 내가 얘기해도 所用없겠지만 우리 黨에 왔으면 좋겠다. 公薦받고 出馬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가 ‘眞心으로 잘하시길 바라지만, 이番에는 黨에 있는 게 맞겠다’고 했고 安 議員은 ‘언제든 생각 바뀌면 이야기해라’고 했다.”
- 取材 메모 中 -


● 20代 國會 入城…屬望받는 初選으로 ‘신들린 발演技’까지 消化
2019년 국회의원들에게 수여하는 가장 권위 있는 상 중의 하나인 백봉신사상 대상을 받을 당시 금태섭 전 의원의 모습.
2019年 國會議員들에게 授與하는 가장 權威 있는 床 中의 하나인 백봉신史上 大賞을 받을 當時 琴泰燮 前 議員의 모습.

結局 琴泰燮은 민주당 候補로 서울 講書甲에 出馬해 20代 國會議員이 됐다. ‘김종인 非對委’ 體制에서 代辯人에 拔擢됐고, 秋美愛 代表 時節엔 戰略企劃委員長을 맡는 等 初選 議員으로 黨 要職을 맡았다.

大選 直前엔 文在寅 캠프의 政策弘報 사이트인 ‘文在寅 1番街’를 弘報하기 위해 俳優 정우성 장쯔이가 登場했던 ‘2% 不足할 때’ 飮料의 過去 廣告를 패러디해 秋美愛 當時 代表와 呼吸을 맞추기도 했다. (나무위키에는 ‘신들린 발演技’였다고 表現돼 있다.)



院內에선 法曹人의 專門性을 살려 法制司法委員會에서 活動하며 注目을 받았다. ‘그 일’李 있기 前까지는 屬望받는 初選 中 한 名이었다. 初選으로선 異例的으로 2019年 백봉신史上 大賞을 받았다.

● ‘指導敎授’ 曺國 前 長官 正面 批判… ‘조금迫害’로 불려
2017년 11월  공수처 설치법 제정 관련 더불어민주당 당정청 회의에서 당시 민주당 금태섭 의원과 그 옆에 있는 조국 민정수석 등이 손을 잡고 있다. 동아일보 DB
2017年 11月 公搜處 設置法 制定 關聯 더불어民主黨 黨政靑 會議에서 當時 민주당 琴泰燮 議員과 그 옆에 있는 祖國 民政首席 等이 손을 잡고 있다. 東亞日報 DB

琴泰燮과 曺國 前 法務部 長官은 各各 서울對 法大 86學番과 82學番이다. 네 學番 差異지만 조 前 長官이 學校를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는 두 살 差異다. 琴泰燮은 學校 다닐 때는 조 前 長官을 몰랐지만 大檢察廳 硏究官으로 勤務하면서 그를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檢事 時節 琴泰燮은 1年間 美國 硏修를 통해 碩士 學位를 땄지만 論文을 안 쓴 狀態였다. 敎授들이 論文 없는 碩士를 탐탁지 않게 여겨서 博士 過程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當時 顔面이 있는 조 前 長官에게 付託했고 그가 琴泰燮을 弟子로 받아들이면서 親하게 지냈다. 結局 琴泰燮은 論文을 쓸 餘裕가 없었고 博士 學位는 받지 못했다.

本格的으로 政治를 始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琴泰燮은 2011年 서울市長 補闕選擧를 앞두고 새로운 人物이 必要하다는 생각에 조 前 長官에게 서울市長 出馬를 勸誘한 적도 있다.

“나는 조국 敎授가 그때부터 政治를 始作하더라도 18代 大選에서 野圈의 候補로 나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候補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野圈에 유리하게 造成된 서울市長 選擧에 나간다면 勝算이 充分하다고 봤다. 그러면 野圈은 泄瀉 大權에서 敗北하더라도 젊고 有力한 政治人을 서울市長으로 保有하게 되는데 여기엔 작지 않은 意味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支持者들에게 未來에 對한 希望을 줄 수 있었다.” - ‘이기는 野黨을 갖고 싶다’ 中에서 -
그러나 조 前 長官은 選擧에 出馬할 생각이 없었고 代身 박원순 辯護士를 돕는 것이 自身의 役割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文在寅 政府 出帆 뒤 조 前 長官은 初代 大統領民政首席祕書官이 됐다. 이어 2019年 8月 文在寅 大統領이 朴相基 前 長官의 後任으로 조 前 長官을 指名했고 子女 入試非理 等에 對한 疑惑이 提起되면서 論難이 거세졌다.

여기서 ‘그 일’李 벌어졌다. 法査委 所屬이었던 琴泰燮은 조 前 長官이 記者懇談會에서 ‘金수저는 進步를 志向하면 안 되냐’고 反駁한 點을 言及하며 “사람이 이걸 묻는데 저걸 答辯하면 火가 난다. 言行不一致 東問西答式 答辯으로 傷處를 깊게 한 것에 對해 眞心으로 謝過할 생각이 없냐”고 조 前 長官을 몰아세웠다. 이어 “進步的 삶을 살아왔다는 理由로 批判받는 게 아니다. 言行不一致 때문이다”라고 指摘했다. 이런 理由로 親文(親文在寅) 陣營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조 前 長官과의 關係도 事實上 끝났다.

또 琴泰燮은 當時 政府가 推進하던 檢察改革 法案에 對해 公開的으로 反對 목소리를 냈다. 搜査와 起訴의 分離를 主張했고 檢察의 直接 搜査는 줄이는 方向의 檢警 搜査權 調整에 懷疑的이었다. 高位公職者犯罪搜査處 新設에 對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結局 2019年 12月 公搜處法 修正案을 민주당이 밀어붙이며 本會議에서 表決할 때 棄權票를 던졌다.

琴泰燮은 쓴소리를 하던 黨內 ‘非主流’ 趙應天 朴用鎭 金海泳 當時 議員과 함께 ‘조금迫害’로 몰리며 한 묶음으로 ‘빨간 점퍼’라는 批判을 받았다. 겉은 民主黨 所屬이지만 속은 國民의힘이라는 비아냥이었다.

結局 그는 21代 總選 競選에서 탈락했다. 그 過程도 結果도 물밑에서 이뤄졌지만 그는 競選 結果 發表날 筆者에게 “다 제가 不足해서 그렇다. 面目이 없다”고 敗北를 認定했다. 甚至於 그해 5月 末 黨 倫理審判員은 公搜處法 票決에서 棄權을 했다는 理由로 琴泰燮에 對해 ‘警告 處分’을 내렸다. 다음은 當時 민주당 懲戒에 對한 不當함을 指摘한 筆者의 칼럼이다.

民主黨은 懲戒 黨規부터 고쳐라[여의도 25時/황형준]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630/101742414/1

結局 琴泰燮은 같은 해 10月 “民主黨은 예전의 悠然함과 謙遜함, 疏通의 文化를 찾아볼 수 없을 程度로 變했다”며 “마지막 抗議의 뜻으로 忠情과 眞心을 담아 脫黨屆를 낸다”고 밝혔다.

‘내로남不’을 批判하며 所信 있고 合理的인 政治人으로 琴泰燮이 國民들에게 刻印되는 場面이었다. 메시지에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波長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黨內 勢力이 없는 孑孑單身 非主流 初選 議員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듬해 4月 서울市長 補闕選擧에 出馬하며 人爲的으로 體級을 올렸지만 評價는 冷靜했다. 안철수 議員과의 ‘第3地帶 候補’ 單一化에서 敗北했고 安 議員도 오세훈 候補와 單一化를 했다. 琴泰燮으로선 서울市長 出馬로 認知度를 올렸을지 모르지만 別로 얻은 게 없는 選擧였다.

● 琴泰燮의 ‘멘토’ 김종인의 빛과 그늘
그 뒤 琴泰燮은 政治評論家로서 言論 寄稿와 放送 出演, 放送進行者 等으로 活動했다. 그러던 中 이달 18日 國會에서 연 ‘다른 未來를 위한 省察과 摸索’ 모임 討論會 發題文을 통해 兩極化, 便 가르기식 政治, 兩黨制의 問題 等을 韓國 政治의 問題點으로 꼽았다. 그는 “새롭게 出現할 勢力은 旣存 韓國 政治의 問題들을 一掃하는 合理性과 客觀性을 갖추어야 하고 自己便에게 有利한 議題가 아닌 우리 社會에 眞짜 重要한 問題를 찾아서 提起하는 能力이 있어야 한다”며 “單純히 旣存 政黨들의 行態를 反對하고 批判하는 ‘反射體’가 되는 데서 存在 理由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自己 비전을 提示하는 ‘發光體’가 되어야 한다. 兩 陣營으로 나누어져 있는 現在의 政治 地形을 3分 하는 것이 아니라 旣存의 勢力을 갈아치우겠다는 意志와 힘이 있어야 새로운 勢力으로서 意味가 있다”고 强調했다. 東亞日報와의 인터뷰에선 “올해 9月 秋夕 前에 제3지대 旗발을 들어 올리겠다”고 했다.

琴泰燮이 新黨 創黨에 對한 意志를 드러낸 것은 이番이 처음이 아니다. 2年 前 서울市長 補闕選擧 때도 靑年들이 主軸이 된 新黨을 만들겠다고 여러 次例 强調했다. 하지만 이番 討論會에선 김종인 前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이 座長을 맡았고 新黨 創黨에 對해 “금 前 議員이 勇氣를 갖고 그런 試圖를 하니까 도우려 한다”고 했다. 與野를 두루 經驗하고 ‘킹 메이커’이자 影響力 있는 ‘스피커’ 元老인 金 前 委員長은 琴泰燮에겐 든든한 後援者다. 하지만 靑年 新黨 方針을 밝히는 자리에 老獪한 政治人이 登場해 背後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指摘도 있다.

琴泰燮은 2016年 當時 민주당 非對委 代表였던 金 前 委員長으로부터 公薦狀을 받은 因緣이 있다. 그前에도 그 以後에도 特別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祖國 事態와 公搜處法 反對 等 過程에서 琴泰燮이 所信 發言을 할 때마다 金 前 委員長으로부터 激勵를 받았고 公薦에 탈락했을 때 가장 먼저 電話를 건 것도 金 前 委員長이었다고 한다.

琴泰燮도 金 前 委員長에 對해 “兩黨을 다 經驗했고 또 오래 政治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슨 個人的인 欲心이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적어도 제가 겪어본 바로는 私心이 없는 분”이라며 “當身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나보고 이런저런 걸 해보라고 助言하는 關係”라고 했다.

金 前 委員長은 ‘經濟民主化’ 條項을 憲法에 反映시켰고 朴槿惠 文在寅 政府 誕生에 寄與한 元老다. 하지만 大選에 直接 ‘플레이어’로 나섰다가 一週日 만에 撤收한 적도 있다. 2017年에 민주당을 脫黨하며 大選 出馬를 宣言했다가 注目을 받지 못하자 出馬를 접고 안철수 議員을 支持했다. 李俊錫 全 國民의힘 代表와도 가까운 그는 琴泰燮과 李俊錫 같은 人物을 통해 韓國 政治의 變化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琴泰燮은 政治人 10餘 年 동안 左衝右突 ‘잘못된 만남’을 이어왔다. 그리고 訣別을 거듭했다. 이제 그가 主導하는 第3地帶 新黨 創黨에 關心이 쏠리고 있다. 金 前 委員長이 참스승으로 그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까. ‘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琴泰燮이 3人의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 成功 與否에 따라 政治人 琴泰燮의 未來도 달렸다.



琴泰燮 前 議員에겐 팬덤이 아직 없습니다. 政治 10年이면 팬클럽이라도 생길 만한데 없습니다. 임팩트가 弱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는 “組織이 안 되어서 그러지 길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根據 없는 自信感과 밉지 않은 王子兵입니다.

新黨 創黨 方針을 두고도 그 周邊에서조차 憂慮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너무 性急한 거 아닌가”, “大選 走者도 아닌데 함께 出馬할 人物도, 組織도, 아직까진 콘텐츠도 뭔지 모르겠다”는 等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는 自身이 中心이 되는 ‘琴泰燮 新黨’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兩黨으로는 안 된다는 問題意識下에 論議하는 過程이기 때문에 ‘낡은 잣대’로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過去 個人을 中心으로 한 創黨은 모두 失敗했다. 勢力化보다는 國民들이 共感할 수 있는 答을 찾기 위해 論議하고 또 工夫도 하고 專門家들 얘기도 듣고 하는 過程”이라고 說明했습니다.

더 以上 묻기가 어려워 혼자 그의 未來를 想像해 봅니다. 그래도 그의 ‘近者감’과 充滿한 ‘똘끼’라면 좀더 國民들에게 剛한 印象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期待해 봅니다.

다음 [17話]는 2週 뒤인 5月 11日까지 차분히 써볼 豫定입니다. 大韓民國에서 가장 바쁜 野圈의 ‘셀럽’이어서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친숙하지만 眞面目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周邊에선 彼我를 떠나 다들 “대단한 사람”이라고 感歎하는 人物입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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