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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酸素 같은 男子’라 表現한 政治人은?… 商社맨에서 ‘政治 9段’까지[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DJ가 ‘酸素 같은 男子’라 表現한 政治人은?… 商社맨에서 ‘政治 9段’까지[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5月 11日 14時 00分


코멘트

[17話]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박지원 전 원장과 부인 고(故) 이선자 여사의 신혼 시절. 사진 출처 박 전 원장의 이 여사 추모집 ‘고마워’
朴趾源 前 院長과 夫人 고(故) 이선자 女史의 新婚 時節. 寫眞 出處 朴 前 院長의 李 女史 追慕집 ‘고마워’


“放送에선 얘기를 못 하는데… 내가 돈을 많이 줘보기도 하고 받기도 해봤는데 돈 센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안 나와~(웃음)”
- 取材 메모 中 -

올 3月 私席에서 만난 朴趾源 前 國家情報院長(以下 朴智元)은 지난해 12月 한동훈 法務部 長官이 더불어民主黨 노웅래 議員의 逮捕同意案 通過를 要請하기 위한 國會 本會議 發言에 對해 이같이 말했다. 當時 한 長官은 “具體的인 請託을 주고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這番에 주셨는데 뭘 또 주냐’ ‘這番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盧 議員의 목소리, 돈 封套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錄音돼 있다”고 했는데 이를 反駁한 것이다.

朴智元 이야기를 이 發言으로 始作하는 理由는 經驗과 年輪, 政治 現象을 꿰뚫어 보는 洞察力과 分析力, 타고난 유머와 才致, 率直하지만 老獪한 政治人이라는 評價 等의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發言이기 때문이다.

그는 韓國 現代政治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證人’이다. 朴趾源은 現在까지 4選 議員과 文化관광부 長官, 大統領祕書室長, 國精院長 等을 지냈다. (아직도 그의 履歷은 ‘現在進行形’이다) 全南 珍島 出身으로 金大中 前 大統領(DJ)의 ‘마지막 祕書室長’으로 불리는 그는 81歲의 高齡임에도 如前히 健在하고 가장 影響力 있는 政治 最鼓手 中 하나로 꼽힌다.

自古로 일찍부터 그를 重用한 DJ는 그를 이같이 評價했다. 1996年 朴 前 院長이 發刊한 著書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發刊 祝辭에서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政治的 瞬發力.’ 朴趾源 代辯人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表現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政治人의 最高 德目은 身言書判(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言辯과 文筆力, 判斷力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分野에서든 斷然 頭角을 나타내는 法인데, 朴 代辯人이 그런 政治人이다…소신과 原則에도 强한 朴 代辯人이다. 그러면서도 悠然함과 해맑은 微笑를 늘 잃지 않는다. 누가 朴 代辯人을 ‘酸素 같은 男子’라고 해서 아주 適切한 表現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中 -

‘酸素 같은 男子’란 1990年代 히트를 친 俳優 이영애 氏가 나오는 아모레퍼시픽의 ‘酸素 같은 女子’ TV 廣告에서 따온 表現으로 보인다.



● 中學生 때부터 朴智元의 꿈은 ‘野黨 總務’

박지원 전 원장과 부인 고 이선자 여사의 신혼 시절. 사진 출처 박 전 원장의 이 여사 추모집 ‘고마워’
朴趾源 前 院長과 夫人 고 이선자 女史의 新婚 時節. 寫眞 出處 朴 前 院長의 李 女史 追慕집 ‘고마워’
‘震度 섬놈’ 朴趾源은 1993年 建國褒章을 追敍받은 獨立運動家 박종식 先生의 4男 1女 中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바다가 親舊이자 놀이터였고 陸地를 憧憬하는 섬 少年으로 자랐다. 肋膜炎을 앓아 健康이 좋지 않았다.

密陽 朴氏 집안 어른 中에 國會議員이 있었고 가까이서 본 그는 政治의 꿈을 키웠다. 初等學校(當時 國民學校) 時節부터 將來 希望은 國會議員이었고 中學校 때부턴 ‘野黨 總務’(現 野黨 院內代表)였다고 한다.

“高等學校 때 우리 班 親舊 中 한 놈이 나처럼 政治에 關心이 많았다. 한 番은 그 親舊가 내게 한 가지 내기를 提案했다. 누가 現職 國會議員의 이름을 더 많이 써내는지 한番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親舊는 100名 程度를 썼고, 나는 150名 程度를 써내 이긴 記憶이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中 -

朴 前 院長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工夫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木浦 문태고를 다니다 大入에서 떨어져 光州에서 再修를 했지만 當時엔 夫人 이선자 氏를 만나면서 戀愛에 빠졌다. 단국대 經營大에 入學한 뒤로는 以前과 달리 아주 熱心히 工夫했다. 卒業 後 軍隊를 다녀온 뒤 어려운 就業門을 뚫고 ‘LG그룹’ 系列社였던 當時 半島上司(現 LX인터내셔널)에 就職했다. 그는 맡은 바 任務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處理했고 誠實性을 인정받아 美國支社로 發令받았다고 한다.

美國支社에서 勤務하던 中 그는 事業을 始作했다. 親兄이 美國에서 貿易業을 하고 있었는데 兄님이 會社 生活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던 그에게 事業을 勸誘하며 事業資金을 대준 것이다. 뉴욕에 事務室을 내고 처음 가죽 輸入을 始作했지만 돈만 날렸다. 代身 失敗를 딛고 假髮 輸入을 始作했다. 새벽에 집을 나와 化粧室 갈 時間이 없어 小便을 종이컵으로 받아둘 程度로 齷齪같이 일했다.

流行에 敏感한 패션産業이었기에 有名 패션쇼나 헤어쇼, 그리고 뷰티숍을 두루 살펴보며 트렌드를 把握했다. 需要를 正確히 把握한 德分에 事業에 成功해 날로 繁昌했다. 뉴욕 맨해튼에 建物 몇 채를 가질 程度였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苦悶이 생기기 始作했다. 그의 오랜 꿈인 國會議員이었다. 美國에서 그냥 돈만 벌어 韓國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當時 僑民들은 美國에서 어려운 生活을 하고 있었고 韓人會 일을 거들어야겠다고 決心했다.

一種의 政治 練習으로 뉴욕 韓人會 活動을 熱心히 했고 會長 候補로 推薦을 받게 됐다. 15代 뉴욕 韓人會長에 出馬했지만 落馬했고 2年 뒤 歷代 最年少 會長이 됐다. 그 뒤 僑民社會에서 뉴욕 韓人會를 成功的으로 이끌었다는 評價를 받으면서 1981年 8月 美洲 韓人 總聯合會에서 98個 韓人會長의 滿場一致로 總聯合會 會長에 當選됐다.

● 全斗煥 동생 전경환과 DJ 사이… 뒤바뀐 朴趾源의 ‘운명’

1992년 6월 19일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창립 3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대표(가운데)와 그 왼쪽에 있는 박지원 전 원장. 동아일보DB
1992年 6月 19日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創立 30周年 記念 리셉션에 參席한 김대중 當時 민주당 代表(가운데)와 그 왼쪽에 있는 朴趾源 前 院長. 東亞日報DB
總聯合會長을 맡던 그는 전두환 前 大統領의 동생 전경환 氏와 가깝게 지냈다. 專 前 大統領의 美國 訪問 歡迎委員長을 맡았고 그 일로 韓國의 民主化를 위해 애쓰던 수많은 良心的인 人士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全 氏는 그의 政界 入門을 도와주려고 애썼고 與黨인 민정당의 全國區 議員 入城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전 前 大統領이 海外 同胞에겐 全國區를 줄 수 없다는 指示를 내리면서 霧散됐다. 未安했던 全 氏는 엄청난 利權이 있는 事業을 提議했지만 바로 拒絶했다. 그가 그때 민정당 議員이 됐거나 事業을 챙겼더라면 아마 只今의 朴趾源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잘못된 行動이었음은 分明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얼마 뒤 김대중 先生을 만나면서 深刻한 人間的 苦惱에 빠지기도 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中 -
朴智元의 運命이 바뀐 건 뉴욕에서 ‘獨立新聞’을 發行하던 김경재 前 議員의 紹介로 亡命 中이던 DJ를 만나면서부터다. 1983年 5月이었다. “絶對權力은 반드시 腐敗하게 돼 있다. 1980年代 後半에는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民主化가 온다”는 等 DJ의 말에 感銘을 받은 朴趾源은 무릎을 꿇고 “先生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懺悔했다. 첫 만남 以後 그는 김대중 師團의 末席에 자리 잡게 됐고 DJ가 하던 人權問題硏究所 일을 돕고 國內에서 동교동系 人士들에게 DJ의 메시지를 傳하는 ‘密使’驛 等을 맡았다.

이는 ‘一級祕密’이었다. DJ의 最側近인 권노갑 拷問조차 그의 存在를 몰랐다고 한다. 1987年 平和민주당 創黨 過程에서 朴趾源은 故鄕인 全南 珍島委員長을 맡았다. 權 顧問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굴러온 돌”로 여기고 이를 反對했다. 美國에서 맺어진 DJ와 朴智元의 關係를 모르던 權 前 議員의 立場에서 보면 옳은 進言이었다. 以後 權 顧問이 처음 美國을 訪問할 當時 美國에 있던 朴趾源을 만났다. 權 顧問은 “이番에 美國 오기 前에 동교동에 들렀더니 師母님과 總裁께서 美國 가면 꼭 朴 會長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면서 그間 朴 會長과의 關係에 對해서 仔細하게 說明을 해주셨소”라며 손을 꽉 잡고 “前에 正말 未安했다”며 몇 番이나 謝過를 했다고 한다.

“五十이 넘어야 官運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使嗾家들에게 들었던 朴趾源은 實際 3修 끝에 全國區 議員이 됐다. 大入에서 再修한 것을 합쳐 “내 人生은 汚水(五修)”라는 게 그의 말이다.

1984年엔 野黨인 신민당에서 全國區(現 比例代表) 議員職을 提議받았으나 當選圈 順番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拒絶했다. 選擧 結果는 當選圈이었다. 첫 番째 失敗였다. 美國에서 들어온 뒤 珍島委員長과 總裁 言論特報 等을 맡았지만 1988年엔 地域區가 統合되면서 出馬가 挫折됐다. 全國區로 出馬하기로 했지만 마지막에 DJ가 다른 人物에게 自身에게 주겠다던 全國區 順番을 줘 機會가 없었다. 다시 4年 뒤에 全國區 國會議員 候補 21番으로 艱辛히 當選됐다. 그의 나이 滿으로 50歲였다.

1987年과 1992年 大選에서 DJ의 至近距離에서 選擧運動을 도왔다. 特히 1992年에 그는 首席副代辯人을 맡아 4月부터 12月까지 每日 午前 6時 10分이면 동교동에 到着해서 DJ와 함께 하루終日 選擧運動을 했다. 記者들과 ‘떡’李 되도록 暴飮을 한 이틀을 빼곤 하루도 그 時間에 到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大選을 熱心히 뛰었지만 結果는 김영삼 前 大統領(YS)의 勝利로 끝났고 DJ는 다음 날 政界 隱退를 宣言했다. DJ 大統領을 만들려던 朴智元에겐 눈앞이 깜깜한 瞬間이었다.

● 몸으로 때운 ‘毒舌’ 名代辯人…“復活한 예수님, ‘記者들 왔냐’고 물을 것”


“나는 本變因이 아닌 代辯人이니 좀 봐주시오. 큰 政治 하는 분들이 그깟 代辯人의 말에 神經을 써야 되겠느냐.”
‘代辯人 朴趾源’은 間或 自身이 論評에서 批判한 當事者가 直接 電話를 해 “너무 甚한 것 아니냐”고 抗議하면 이같이 달랬다고 한다. 一部 論評에 人身攻擊性이나 嘲弄이 들어가는 等 센 論評을 낸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一角에서는 “水準 以下”라거나 “補佐官이 쓴 것을 읽기만 한다”고 非難하기도 했다. 하지만 大部分 代辯人 名義 論評은 그가 直接 썼다고 한다.

그는 1992年 大選에선 YS가 財産을 公開했을 때 “머리부터 公開하라”며 攻擊했고 TV 討論을 拒否하자 “演說 때 使用하는 原稿를 가져와도 된다”고 비꼬았다. 巷間에서 DJ에 比해 YS가 덜 총명하다는 指摘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 1994年 當時 박찬종 新政治改革黨 代表가 DJ의 政界復歸論에 對해 批判하자 “煉炭가스는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人體에 害만 주고 있는데 朴 代表도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野黨 分裂을 助長하고 있다”고 非難해 話題가 되기도 했다. 1995年 11月엔 當時 민자당이 唐名 改稱을 推進하자 “戶籍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민자당은 이름을 바꾸어도 大統領이 되기 위해 野合했던 金 大統領과 민자당 그 이름으로 歷史는 記錄하고, 國民은 記憶할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代辯人 聲明이 개떡 같더라도 記事는 찰떡같이 써 주시오”라고 記者들한테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黨의 言論 政策이 맘에 들지 않을 때는 “萬若 예수님이 復活하신다면, 가장 먼저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記者들 왔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復活한 事實이 一般人들에게 알려질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 時節부터 朴趾源을 오래 지켜본 한 人士의 말이다.

“DJ가 여러 長點을 가진 指導者지만 基準이 높아 모시기 어려운 指導者다. 성실함과 集中力을 要求하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은 곁에 안 둔다. 그 基準에 符合하는 게 朴智元이고 내가 본 사람 中에 그만큼 瞬發力이 있고 성실하고 集中力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 時節 낮밤으로 記者들과 爆彈酒를 마시면서도 每日 아침 일찍 DJ가 있던 一山과 靑瓦臺로 出勤했다.”
- 取材 메모 中 -

1996年 朴趾源은 富川 小祀에 出馬하며 再選에 挑戰했다. 相對는 신한국당 候補였던 金文洙 現 經濟社會勞動委員會 委員長.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 著書도 1996年 總選을 앞두고 發刊됐는데 이를 두고 ‘넥타이’ 工房도 있었다고 한다. 當時 勞動運動家 出身에서 與黨 신한국당의 候補로 變身한 金 委員長이 먼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語塞하다’라는 冊을 냈는데 以後 朴趾源이 이 같은 題目의 冊을 내자 金 委員長 側에서 ‘狙擊用’이라고 反撥한 것이다. 朴趾源은 前에도 “넥타이를 제법 잘 맨다는 報道가 있었다”고 反駁했지만 金 委員長은 朴趾源을 著作權法 違反으로 告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結局 苦杯를 마셨다. 當時 그를 向해 左翼이라고 攻擊하는 等 色깔論爭, 容共몰이를 한 탓도 컸다.

●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대(代)통령’이라는 말까지 膾炙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인수위 대변인 시절. 동아일보DB
1998年 2月 김대중 政府 引受위 代辯人 時節. 東亞日報DB


落選한 뒤에도 朴趾源은 政界 復歸를 宣言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創黨한 DJ의 特報 等을 맡았다. DJ는 自由民主聯合의 김종필 總裁와 DJP聯合을 성사시키며 結局 大選에 成功한다.

朴趾源은 當選者 代辯人, 大統領公報首席祕書官, 文化관광부 長官 等을 거치며 DJ를 代理해 對北特使를 다녀와 6·15 南北頂上會談 成功에 寄與했다. 大統領祕書室長으로 오르며 名實相符한 DJ의 ‘2人者’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DJ의 旣存 家臣그룹인 ‘동교동系’가 2線으로 물러나면서 그가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도 影響을 끼쳤다. 동교동系는 1997年 大選 直前에 選出職을 除外한 任命職은 맡지 않겠다는 宣言을 했고 2000年 12月 座長인 權 顧問은 鄭東泳 當時 最高委員으로부터 2線 後退를 要求받고 最高委員職을 辭退했다. 이 같은 狀況에서 DJ의 心腹이지만 동교동系와는 若干 異質的인 그가 前面에 나서게 됐고 權力이 쏠리게 된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이야기도 많았고 猜忌와 嫉妬, 미움도 많이 받았다.

김창혁 前 동아일보 記者와 權 前 顧問이 쓴 권노갑 回顧錄 ‘順命’에는 朴趾源에 對해 이 같은 祕話가 나온다.

18代 總選을 앞둔 2008年 初, 全南 無顔으로 向하는 권노갑의 乘用車 안. DJ의 次男인 金弘業 議員의 選擧를 돕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권노갑의 携帶電話가 울렸다. DJ였다.
“務安 가는 김에 木鋪道 좀 다녀오소.”
金弘業 支援 遊說를 마친 다음 木浦에 가서 朴趾源도 좀 도와주고 오라는 말이었다.
“無顔은 가겠지만 木浦는 到底히 못 가겠습니다.”
- 권노갑 回顧錄 ‘順命’ 中 -
DJ의 ‘外遊 勸誘’를 물리치자 朴趾源이 DJ의 뜻을 直接 傳한 것, 2002年 4月 ‘진승현 게이트’에 權 前 顧問이 連累됐다는 報道가 나오자 權 前 顧問은 朴趾源에게 電話를 걸어 이 같은 內容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는데 알고 있었지만 이를 傳達하지 않은 것 等 一連의 過程에서 權 前 顧問도 적지 않은 서운함을 품었던 것이다.

마지막 祕書室長을 지내면서는 ‘代身할 臺’字가 붙은 ‘大(代)通靈’이라는 別稱이 붙을 程度였다. 恒常 處身에 留意하고 몸操心을 했지만 미움을 받았다. 言論社 人事에 介入하거나 言論社 稅務調査를 그가 企劃했다는 疑懼心과 論叢을 받으면서 그의 專門 分野이자 同伴者였던 言論들도 一部 등을 돌렸다.

‘太陽에 가까우면 타죽을 수 있다’는 말처럼 權力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朴趾源도 DJ 政府가 끝난 뒤 갖은 苦楚와 受難을 겪게 된다. 이 또한 그의 運命이었다.



記者 初年兵 때인 2009年頃 어딘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巷間에 떠도는 所聞이었습니다. 朴趾源 前 院長이 文化관광부 長官 時節, 女俳優 C 氏와 艶聞說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最近 朴 前 院長에게 물었더니 “全혀 事實無根이다. C 氏는 본 적도 없다”며 웃었습니다. 根據가 없는 ‘찌라시’인지 類似한 事件이 訛傳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朴 前 院長이 現在까지 낸 冊은 딱 두 卷입니다. 2018年 10月 夫人 고 이선자 女史가 腦腫瘍으로 世上을 뜬 뒤 追慕집으로 發刊한 ‘고마워’가 가장 最新입니다. 冊까지 낼 程度로 ‘사랑꾼’인 그에게 過去 저런 所聞이 있었다는 게 神奇해서 던진 質問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卷은 1996年에 發刊된 ‘넥타이를 잘 매는 男子’였습니다. 2019年 무렵 議員室에 付託해서 複寫本으로 求해 읽었던 冊입니다. 이番 便宜 相當 部分은 그 冊에 依存했습니다. 저 亦是 記者로서 그 時節을 直接 겪지 못했고, 27年 前 씌어진 데다 絶版된 지 오래여서 讀者분들도 새롭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朴 前 院長에게 1996年 以後 自敍傳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DJ와 관계된 얘기를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每日 TV와 라디오, 유튜브 等에 每日 4番 안팎 出演해 一角에선 “DJ 장사를 그만 좀 해라”라는 말도 나오지만 基本的으로 DJ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自制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權力의 核心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자리지만 元來 미움을 많이 받는 자리입니다. 銅錢의 兩面입니다. ‘大(代)通靈’이라는 말을 들을 程度였던 그도 榮辱의 歲月을 겪었습니다. 다음 [18話]에선 그의 노무현 政府 時節 以後를 다루겠습니다. 그가 酸素 같은 男子인지 煉炭가스(一酸化炭素) 같은 男子인지는 後續을 보고 判斷하시길 바랍니다.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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