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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由 있는 反抗兒’ 琴泰燮을 키운 건 八割이 懲戒…總長·代表에게 ‘警告’ 新記錄[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理由 있는 反抗兒’ 琴泰燮을 키운 건 八割이 懲戒…總長·代表에게 ‘警告’ 新記錄[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4月 20日 14時 00分


코멘트

[15話]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먹고 노는 大學生’이라는 말이 있던 韓國 經濟의 高度成長期 時節, 大學에서 學事警告(학고)를 받은 兄弟姊妹가 8寸 一家親戚 內에 꼭 한 名씩은 있었다. 그는 大學에서 아슬아슬하게 艱辛히 학고는 免한 模範生(?)이었다.

思春期가 늦게 온 것인지 10, 20代가 아닌 30, 40代에 들어 反抗이 始作됐다. 한 番 받기도 힘든 ‘별’을 各各 두 個나 달았다. 한 番은 檢察總長에게 社會的 物議를 일으켰다는 理由로, 한 番은 所屬된 政黨 代表에게서 黨論을 違背했다는 理由로 ‘警告’ 懲戒를 받은 것이다. 이 두 가지 懲戒를 잇달아 받은 大韓民國 國民은 처음일 것이다. 학고까지 받았다면 ‘트리플 크라운’으로 기네스북감日 텐데 아쉬울 뿐이다.

집에도 놀러 갈 程度로 親했던 4個 學番 先輩이자 博士學位 指導敎授였던 曺國 前 法務部 長官에겐 “言行 不一致”라며 正面 批判을 했다. 巷間에는 博士學位만 줬다면 그렇게 척支持 않았을 것이라는 根據없는 所聞까지 돌았다. 이 程度면 逼迫받는 先驅者인지 惡童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所信이나 개똥哲學 없인 不可能한 일이었다. 제임스 딘의 ‘理由 없는 反抗’과 달리 理由 있는 反抗이었다.

12年間 檢査 生活을 했지만 檢察 出身 티가 나지 않는다. 辯護士나 政治人 이미지가 더 剛하다. 一刀兩斷으로 有無罪를 가리는 二分法的 視角으로 世上을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울퀴어文化祝祭에 參席해 손등에 찍었던 ‘무지개 圖章’의 强烈한 印象 때문인지도 모른다.

身言書判(身言書判)이 뛰어난 ‘서울깍쟁이’ ‘車道남’(차가운 都市 男子)이다. 白眉는 해맑은 微笑다. 눈가의 주름이 無色할 만큼 少年처럼 純粹하게 웃는 게 트레이드마크다. 琴泰燮 前 國會議員(以下 琴泰燮)의 이야기다.
2018년 7월 더불어민주당 현직 국회의원이었을 당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금태섭 전 의원. 페이스북 제공
2018年 7月 더불어民主黨 現職 國會議員이었을 當時 서울퀴어文化祝祭에 參席한 琴泰燮 前 議員. 페이스북 提供


● 어릴 적 꿈은 ‘探偵’…平檢事 時節 特需-企劃 分野에서 頭角
1967年生인 琴泰燮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父親은 判事 出身의 금병훈 辯護士였다. 경기고와 서울대 法大를 卒業한 琴 辯護士는 朴正熙 政府의 維新時代에 判事를 하며 緊急措置 違反 事件으로 起訴된 大學生들에게 無罪를 宣告하거나 時局事犯들에게 가벼운 刑量을 내리면서 미움을 사 法院의 再任用 節次에서 탈락해 法服을 벗었다. 1973年 비슷한 理由로 數十 名의 判事들이 再任用에서 탈락한 이른바 ‘司法波動’ 때다. (餘談이지만 이때 國民의힘 유승민 議員의 아버지 유수호 前 議員도 判事를 하다가 같은 理由로 法服을 벗었다고 한다. )

琴 辯護士는 第11代 總選에서 京畿 龍仁-伊川-驪州에 出馬했지만 落選했고 그 뒤 다시 出馬하지 않았다고 한다. 琴泰燮이 法曹人과 政治人의 길을 걷게 된 것은 勿論 正義에 對한 原則이 있는 것도 家風을 이어받은 德分이라는 게 周邊人들의 分析이다.

辯護士 아버지를 둔 德에 琴泰燮은 裕福하게 자랐다. 1986年 汝矣島高를 卒業하고 서울대 法學科에 入學했다. 大學 時節에도 그는 똑똑하고 매너 좋은 模範生이었다. 유머感覺이 있었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推理小說을 좋아했던 그의 어렸을 적 꿈은 探偵이었다. 하지만 그가 大學生이 되던 때만 해도 1987年 民主化 되기 前이어서 檢査에 對한 否定的인 視角이 많았다. 그래서 1992年 司法試驗에 合格한 뒤에도 아버지를 따라 判事가 되려고 했다. 그러던 中 學生運動을 하던 親舊가 1年 먼저 檢事가 된 걸 보고 檢察을 志望했고 아버지도 反對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司法硏修院 24基를 修了한 뒤 1995年 檢事로 任官했다.

서울地檢 東部支廳(現 서울東部地檢)과 昌原地檢 統營支廳, 蔚山地檢, 仁川地檢을 거치는 동안 特殊部 搜査를 많이 했다. 初任 檢事 때부터 國家代表 볼링 選手들의 痲藥 事件과 可樂市場 멸치 都賣人 價格 談合 事件 等 搜査에서 頭角을 드러냈다.

2002年 大檢察廳 中搜部로 5個月間 派遣을 나갔다. 特定 事件 搜査를 뭉갰던 신승남 前 檢察總長에 對한 職權濫用 疑惑 搜査팀의 막내로 勤務했다. 琴泰燮을 除外하곤 申 前 總長과 함께 勤務했던 因緣이 있어서 쉬운 搜査는 아니었지만 結局 그를 起訴했다. 文在寅 政府 以後 잦아진 職權濫用 搜査 以前에 職權濫用 嫌疑로 有罪 判決을 確定받은 事例는 거의 없지만 有罪를 이끈 成功한 搜査였다.

搜査 能力뿐만 아니라 平素 論理的이고 明晳한 頭腦를 가졌다는 評價를 받은 그는 2003年 1月부터 3年間 大檢 企劃調整部 檢察硏究官으로 拔擢됐다. 大檢 中搜部와 基調副를 합쳐 總 3年 半假量 大檢 硏究官으로 勤務하며 ‘特殊통’과 ‘企劃通’으로 認定받은 것이다.

特히 그가 남긴 足跡은 檢察 CI다. 5個의 대나무 模樣에 正義의 女神이 들고 있는 저울 形象과 칼이 대나무 5個의 위쪽 라인과 가운데 대나무 칼 模樣으로 形象化돼 있다. 勿論 그가 디자인한 것은 아니지만 實務者로서 業體를 골라 몇 個의 試案을 받은 뒤 總長에게 報告하는 等 CI를 貫徹시켰다. 또 檢察 在職 中 美國 코넬대 로스쿨에서 碩士學位를 딴 그는 英語가 流暢해 國際檢事協會 서울總會 開催 準備를 맡아 無事히 任務를 마쳤다.


● 被疑者 위해 ‘搜査 제대로 받는 法’을 連載하려다 挫折
組織 內에서 乘勝長驅했던 그가 有名稅를 탄 건 서울중앙지검 刑事4部 檢事 時節인 2006年 9月 한겨레신문에 ‘現職 檢事가 말하는 搜査 제대로 받는 法’ 連載를 始作하면서다. 連載를 위해 그는 新聞에 寄稿하기 위한 提案書를 直接 作成했다고 한다.

“弱者인 被疑者가 반드시 지켜야 할 行動 指針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辯護人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이다. (中略) 아무것도 모르는 狀態에서 섣불리 行動하면 傷處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狀況을 把握하는 것이 賢明한 態度다. 더구나 搜査機關에는 被疑者에게 유리한 事實까지 찾아내야 하는 義務가 있다. 어떤 檢査도 無辜한 被疑者를 起訴했다가 無罪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陷穽에 빠지는 것만은 避하라. 狀況을 把握한 以後에도 搜査에 對應할 充分한 時間과 機會가 있다.”
- 한겨레신문의 ‘現職 檢事가 말하는 搜査 제대로 받는 法’ 中 -
題目은 ‘섹시’하고 破格的이지만 只今 觀點으로 보면 現職 檢査라도 못 할 이야기는 아니다. 搜査를 避해 가는 妙手를 밝히는 것도, 搜査 技法을 公開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過去의 잘못된 慣行에서 벗어나야 檢察이 살 것이라는 趣旨에서 始作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波長은 컸다. 琴泰燮은 檢察 指揮部로부터 叱責을 받았고 當初 10回 分量으로 始作한 連載는 1回로 끝났다. 그는 다음 달 “檢察의 搜査 現實을 歪曲하고, 檢察의 公益的 義務에 符合하지 않는 私見을 任意로 寄稿해 國民에게 混亂을 惹起하는 等 社會的 物議를 일으킨 것은 職務上 義務 違反과 品位 損傷에 該當된다”며 總長 警告를 받았다.

當時 檢察 內部에서는 “뜨고 싶어서 사고 친 것” “혼자 잘난 척한다”는 等의 批判도 나왔다. 搜査를 하는 平檢事들의 士氣를 떨어뜨리는 結果도 낳았다고 한다.

“檢察에서 繼續 熱心히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政治的 欲心이 있는 것 같았다. 本人이 檢察에 繼續 있는 것보다는 政治的으로 成長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읽혀졌다. 公報指針을 違反하면서까지 하는 건 政治的 動機에서 出發한 것이라고 봤다. 性急하게 가야 되는 狀況이구나라고 생각했다. (琴泰燮은) 되게 똑똑하고 工夫도 잘하고 基調部 硏究官을 맡을 程度로 글도 잘 쓰고 將來가 屬望되는 檢査였는데… 本人은 時間이 없다고 느꼈는지 빨리 政界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 當時 大檢 課長級으로 勤務했던 A 辯護士와의 通貨 -
反面 檢事 琴泰燮을 잘 아는 또 다른 전관 辯護士는 相反된 評價를 내놓았다.

“나는 그가 大槪 純粹하다고 봤다. 刑事司法 節次에 關心이 많았고 實力이 있고 自己 基準과 所信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 글을 쓴 理由는 市民의 權利를 檢事가 親切하게 가르쳐주는 게 檢察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理解했다. 그걸 若干 재밌게 쓰고 싶었던 欲心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글이 나왔을 때 참 좋은 글이고 檢察 이미지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錯覺이었다. 大怒한 先輩들도 있었다. 그만큼 當時 先輩들이 너무 偏狹했다. 나는 琴泰燮이 이를 발板 삼아 그때부터 政治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以後에 政治人이 된 건 結果論的인 것이다. ”
- 當時 大檢 硏究官으로 平檢事였던 B 辯護士와의 通貨 -
琴泰燮의 說明은 또 다르다.

“나는 檢事가 規定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當時엔 慣行的으로야 그랬는지 모르지만 (言論 寄稿에) 上部의 承認을 받으라는 規定은 없었다. 그래서 公式 懲戒가 아닌 總長 口頭 警告를 받았다. 나 때문에 公報指針이 생겼다. (中略) 當時 노무현 大統領이 ‘檢事와의 對話’로 檢事들이 辱을 많이 먹었다. 그때 檢事들의 抗辯이 ‘밤새워 일하는데 國民들이 몰라준다’였다. 나는 밤새워 일한다고 國民들의 信賴가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글을 썼다. 나는 여러 經歷을 犧牲할 覺悟를 하고 獻身的으로 한 것이지만 혼자 變化를 하려고 하면 結局 失敗한다는 걸 깨달았다. ”
구로사와 아키라 監督의 ‘라쇼몽’에 登場하는 人物마다 저마다 다른 얘기를 하듯 各自 다른 이야기다. 琴泰燮은 2008年 發刊한 著書 ‘디케의 눈’에서 라쇼몽과 親舊들의 에피소드를 言及하며 “第三者로서는 서로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果然 眞實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 境遇에, 果然 客觀的인 眞實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檢査 琴泰燮’에 對한 評價는 讀者들의 몫이다.

● 11年 만에 ‘第3地帶’ 助演에서 主演으로
금태섭 전 의원과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다른 미래를 위한 성찰과 모색 포럼’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琴泰燮 前 議員과 김종인 前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 李尙玟 더불어民主黨 議員이 18日 午後 國會 議員會館에서 열린 ‘다른 未來를 위한 省察과 摸索 포럼’에 앞서 對話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組織에서 懲戒를 받은 經驗에서 ‘혼자 變化를 꾀하려 하면 失敗한다’는 敎訓을 얻은 그는 그 무렵 政治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萬若 政治를 하게 되더라도 當場 할 생각은 없었다. ‘搜査 제대로 받는 法’ 寄稿로 워낙 큰 波紋을 일으킨 데다 批判하는 사람들은 ‘琴泰燮이 政治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政治權에 기웃거리면 ‘싸구려’로 보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4, 5年 以上은 政治權은 쳐다도 안 보려했다.

이듬해인 2007年 1月 그는 人事를 앞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며 辭表를 냈다. 辯護士로 變身한 그는 放送과 라디오 프로그램 進行者 等으로 活動하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實際 그의 뜻대로 5年 지난 뒤인 2012年 봄에서야 그는 本格的인 政治 活動을 始作했다. 安哲秀 當時 서울대 融合科學技術大學院腸(現 國民의힘 議員)이 ‘安哲秀 現象’의 主人公으로 急浮上하면서 캠프 狀況室長 提案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無所屬으로 始作한 政治人 琴泰燮은 安 議員과 함께 新黨 創黨을 準備하다 더불어民主黨과 合黨했다. 國民의黨이 생길 때 合流하지 않고 민주당 所屬으로 서울 강서갑에서 20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21代 總選 競選에서 떨어진 뒤 脫黨해 다시 無所屬으로 돌아왔다. 2021年 서울市長 候補로 나섰다가 2022年 大選에선 尹錫悅 캠프에 合流했다.

하지만 國民의힘엔 入黨하지 않고 ‘第3地帶’에 머물렀다. 이달 18日 그는 “새로운 勢力이 出現해서 平凡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나아지게 할 수 있는 政治를 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新黨 創黨 可能性을 열어뒀다.

11年 만에 助演에서 主役으로 成長한 그의 反抗이 다시 始作된 것이다. 어느덧 그도 56歲다. 안철수 議員이 結局 抛棄한 第3黨 實驗을 다시 試圖하는 게 얄궂은 運命처럼 보인다. 琴泰燮이 든 旗발이 果然 成功할 수 있을까.



2014年 當時 ‘안철수의 입’ 役割을 하던 琴泰燮 前 議員을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安 議員의 側近’으로 表現된 記事에 對해 “내가 왜 누구의 側近이냐”며 그렇게 쓰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自尊感이 높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私席에선 率直했습니다. 安 議員과 함께 政治를 始作했지만 安 議員에게는 勿論 記者들에게도 本人의 생각과 感情을 多少 加減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2, 3年 程度 지난 뒤 서로 어느 程度 親해졌다고 느낄 때쯤 술자리에서 “앞으로 兄님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왜 黃 記者 兄이냐”는 答이 돌아왔습니다. 말門이 막혔습니다. 呼兄呼弟를 거절당한 건 生前 처음이었습니다. 까칠하다기보단 깍쟁이, 車道남 같았습니다.
윗線의 눈치를 보지 않는 言行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思考를 가진 人物입니다. ‘檢察 全盛時代’라지만 檢察 出身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습니다. 유머 코드가 ‘王子兵’이지만 아무리 자랑질을 해도 밉지는 않습니다.
<16話>에는 政治人 琴泰燮과 그의 未來에 對해 좀더 다뤄보겠습니다. 法廷冒瀆이 回를 거듭해갈수록 ‘짠맛’이 없고 ‘단맛’만 있다는 指摘을 받고 있습니다. 筆者로선 苦悶이 깊습니다.
그런데 權力이 없는 ‘未來 權力 呼訴人(?)’들에겐 회초리가 別로 所用은 없습니다. 弱者에게 强하고 强者에게 弱한 것보다는 낫지 않냐라고 抗辯해 봅니다.

황형준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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