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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지막 달동네 ‘白蛇마을’의 마지막 봄 [위클리 리포트]|東亞日報

서울 마지막 달동네 ‘白蛇마을’의 마지막 봄 [위클리 리포트]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4月 10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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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돈 잃고 떠밀려와 50年… 故鄕 같은 곳 차마 못떠나”

7일 오전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의 한 골목 어귀. 이   마을에서 53년을 살아온 주민 윤석분 씨(오른쪽)와   이웃 주민
 강길자 씨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맞은편  에 있는 빈집을 가리키며 “여기 살던 사람들도 마을  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7日 午前 서울 蘆原區 白蛇마을의 한 골목 어귀. 이 마을에서 53年을 살아온 住民 윤석분 氏(오른쪽)와 이웃 住民 강길자 氏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맞은便 에 있는 빈집을 가리키며 “여기 살던 사람들도 마을 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박영대 記者 sannae@donga.com
어느새 여기도 봄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봄이.

쨍한 햇빛에 눈이 부신 날. 하지만 그곳은 華奢한 날씨는 都統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마주 걸어오면 避해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 서로를 버텨주듯 다닥다닥 壁을 맞댄 집들이 왠지 歲月에 지쳐 보였다.

군데군데 박힌 붉은 페인트의 동그라미들과 ‘危險’ ‘接近禁止’란 큼직한 글씨들. 얼핏 大門 틈으로 보이는 찢어진 雨傘살마저 한참 등이 굽었다. 사람들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부르는 이곳. 노원구 중계本洞 불암산 자락에 있는 ‘白蛇마을’은 그렇게 봄 아지랑이조차 먼지에 흩날려 지워졌다.

白蛇마을은 곧 사라질 運命이다. 서울市는 지난달 2日 2025年까지 이 一帶에 大規模 住居團地를 造成하겠다는 再開發 計劃을 發表했다. 約 18萬7000m²의 땅에 共同住宅 1953家口와 賃貸住宅 484家口를 짓는다고 한다. 2009年 住宅再開發 整備事業區域으로 指定된 지 12年 만에 들려온 消息이다.

하지만 그동안 白蛇마을의 삶이 멈춰 있었던 건 아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 한구석에 쌓인 灰色빛 煉炭재. 어젯밤 누군가는 그 溫氣에 期待 또 하룻밤을 지냈으리라. 한때 1713家口 가까이 살았다던 이 마을엔 如前히 203家口가 남아 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떠밀리듯 왔지만 이젠 故鄕이 되어 버린’ 白蛇마을 住民들을 만나봤다.
○ 時節에 밀려 만들어진 달동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사마을은 곳곳에   벚꽃이 만개해 분홍빛을 머금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본 白蛇마을은 곳곳에 벚꽃이 滿開해 粉紅빛을 머금었다. 박영대 記者 sannae@donga.com
꽃은 어디서 피어도 꽃이다. 철커덩 門이 열리자 마주한 水仙花들. “좀 너절너절해도 사는 건 괜찮다”는 최선진 氏(88) 집 마당은 수줍은 微笑만큼 꽃들이 滿發했다.

할머니가 이곳에 定着한 건 서른 즈음이었던 1960年代. 50餘 年 동안 겪은 風波를 다 얘기하려면 몇 밤은 새워야 할 터. “하나하나 손수 심은 꽃들”이라며 바라보는 눈빛엔 自矜心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났다. “再開發이 된다, 된다 하더니만 이젠 眞짜 나가려나 봐.” 샛노란 水仙花 꽃잎이 살짝 바람에 떨리는 듯했다.

“그때 東大門 막살이집村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板子村이니 瞬息間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餘 名이 여기로 흘러들었어. 나랑 男便도 4男妹를 데리고 왔는데 天幕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

崔 氏는 여기서 齷齪같이 4男妹를 키워냈다. 마을 뒤쪽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밭에서 배를 사서는 東大門市場까지 가서 과일 褓따리 장사를 했다. 함께 이 집에 窓戶紙를 발랐던 男便은 40餘 年 前 먼저 世上을 떠났다. 그는 “그래도 함께 지은 집만큼은 그대로 남은 거지. 只今도 셋째 딸이랑 여기서 잘 살고 있네”라고 했다.

김상윤 氏(83)가 白蛇마을에 들어온 것도 崔 氏와 엇비슷한 그즈음이었다. 셈 빠른 할아버지는 “1967年 11月 3日”이라며 허리를 쫙 폈다. 龍山에서 撤去民으로 살던 그는 그해 집을 잃었고 살 곳을 찾아 여기로 왔다.

“집 잃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다 여기로 밀어 넣었어. 살고 싶어서 온 데가 아니란 말이지. 時節에 떠밀려서 온 거야. 그렇게 이 마을에서 맨 처음 터를 닦았는데 結局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이 됐네.”

할아버지의 記憶은 正確했다. 白蛇마을은 一名 ‘移住定着地’였다. 1967年 서울에 불어닥친 都心 開發. 용산과 永登浦, 청계천 等地에 몰려 살던 貧民들은 갑작스레 居處를 빼앗긴 뒤 노원구 중계本洞 山104番地에 내몰렸다. 白蛇마을은 그 番地數에서 딴 이름이었다. 엉성한 作名만큼이나 當時 그곳 事情은 劣惡했다. 開發補償金은 꿈도 못 꿨다. 한 家口當 8坪 남짓 땅과 시멘트블록 200張, 텐트 1棟이 支援받은 全部였다. 電氣는커녕 煉炭을 땔 아궁이도 없었다.

○ 그래도 삶은 繼續 된다

그렇게 하나둘씩 이뤄진 마을. 뒤늦게 들어온 이들도 저마다 事情은 애달팠다. 1983年 이곳에 터를 잡은 나춘환 氏(84)는 ‘자개欌籠’ 하나만 이고지고 白蛇마을에 왔다. 번듯한 製紙會社를 運營하다 ‘8·3 私債凍結措置’에 不渡를 맞고 모든 걸 잃은 그도 이곳만이 살길이었다.

“어떻게든 그놈의 弄 하나는 건지고 싶었어. 없는 살림에 그 큰 欌籠 들어갈 집을 찾으니 求할 수가 있나. 마을 언덕을 얼마나 올라 다녔는지 몰라. 꼭대기까지 와서야 그나마 欌籠 들어갈 집을 찾았지.”

그의 집 안房엔 如前히 그 자개欌籠이 버티고 섰다. 40年이 넘게 흘렀는데 휜 곳 하나 없다. 나 氏 亦是 그렇게 꼿꼿하게 이곳에서 妻子息을 건사했다. “애들한테 堂堂하게 말했어. ‘結婚할 相對 있으면 언제든 여기 데려와 집을 보여주라’고.” 할아버지는 至難한 삶의 무게를 숨기지도 避하지도 않았다.

“내 손때가 안 묻은 구석이 없지. 어찌 愛着이 가지 않겠어.”

나 氏와 同甲내기인 탁윤균 氏(84)에겐 白蛇마을이 또 다른 機會의 땅이었다. 慶北 星州에서 온 탁 氏는 1971年 當時 巨金 14萬 원을 주고 땅 32坪을 샀다. 그는 自己 손으로 땅을 파고 合板을 잘라 작은 부엌 하나 딸린 單칸房을 넓혀나갔다. 以後 直接 掘鑿機를 몰고 만든 地下空間에 洋襪 工場을 차렸다.

함께 내려가 본 工場 地下室. 이젠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한 그곳엔 “한때 미싱이 20代도 넘게 돌아갔다”고 한다. 저쪽 구석에 놓인 망가진 미싱 한 臺가 탁 氏의 過去를 뒷받침했다.

할아버지에게 工場은 꿈이자 자랑거리였다. 工場을 세울 때만 해도 無許可였지만 區廳은 그에게 ‘無許可 建物 確認書’를 發給해줬다. 土地 所有主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살아온 住民들에게 權利를 認定해주는 文書라고 한다. 탁 氏에게 確認書는 自身의 人生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證書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事情을 안고 모여든 白蛇마을이었지만 이웃은 서로를 보듬으며 삶을 이어갔다. 1990年代까지만 해도 시끌벅적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白蛇마을 6通 通帳을 지냈던 김상윤 氏는 “우리 桶에만 80家口가 모여 살았어. 비슷한 時期에 들어와 나이대도 엇비슷해 잘 어울렸지”라고 떠올렸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1年에 몇 番씩 洞네 사람끼리 觀光버스 빌려 여기저기 놀러 다녔어. 힘들어도 함께 즐겁게 재밌게 살았어. 아직도 남은 사람들끼린 그때 얘기를 해. 이젠 많이들 마을을 떠났거나 世上을 등졌지만.”

짹짹. 淸凉한 울음소리. 이웃이 떠난 金 氏네 집 처마엔 올해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大못 2個를 救해 둥지 아래에 나무板子를 固定시켜 뒀다. “지들도 살아야지. 무너지지 말라고 받쳐뒀어.”

○ 來年 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개발을 앞둔 이 마을에서 1977년부터 양말 공장을   했던 탁윤균 씨가 이날 자신이 운영하던 옛 공장 지하  실을 찾아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再開發을 앞둔 이 마을에서 1977年부터 洋襪 工場을 했던 탁윤균 氏가 이날 自身이 運營하던 옛 工場 地下 실을 찾아 內部를 둘러보고 있다. 박영대 記者 sannae@donga.com
밀려들어 닦았던 마지막 터전. 그곳마저 잃는 게 두렵진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남은 白蛇마을 사람들은 再開發 뒤에도 繼續 이곳에 머물 수 있다.

서울市와 蘆原區, 서울住宅都市公社(SH)는 2017年 10月부터 33番의 會議를 거쳐 ‘保存 再開發 原則’을 세웠다. 낡은 底層 住居地를 開發하되 白蛇마을의 特性과 痕跡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方式으로 開發하겠다고 한다. 原住民들이 再開發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住居權度 保障하기로 했다. 市 關係者는 “1960年代부터 自生的으로 形成된 마을의 歷史를 保全하고 原住民들에게 經濟的으로 負擔이 可能한 賃貸住宅을 供給하는 方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說明했다.

하지만 왠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음 한쪽이 쓸쓸하다. 내쫓길 걱정은 안 하지만 그들이 세우고 닦은 ‘白蛇마을’은 이게 마지막인 게 아닐까. 왠지 자꾸만 作別의 時間이 다가오는 氣分이다.

“요즘 每日 이 텅 빈 工場을 찾아와. 洞네 한 바퀴 돌아본 뒤에 事務室에 들어와서 커피 마시고 TV도 보고…. 하루도 빠짐없이 와. 괜히 아쉬워서 그런가. 再開發 끝나면, 그래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지.”(탁윤균 氏)

“나랑 마누라랑 둘 다 여든다섯이야. 再開發이 한 四五 年은 걸리겠지? 그럼 아흔 살이 되는 거네.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올해 떠나면 이젠 마지막인 거지. 그間 子息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限死코 뿌리쳤는데, 이젠 거기 가서 살아야지. 只今이라도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하루가 아쉬워서, 이렇게 남아 있네.”(나춘환 氏)

取材가 끝나고 白蛇마을을 떠날 무렵. 이 마을에서 53年 동안 살아온 윤석분 氏(83)는 작은 付託을 해왔다. 이제 곧 떠날 마을. 寫眞 좀 찍어 줄 수 있느냐고.

“4統에 살던 住民들 다 떠났어. 나랑 요기 앞집, 동생네만 남아있지. 나중에라도 여기 모습 좀 간직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다 담아줄 수 있을까.”

찰칵찰칵. 어딘가로 흩어져 보이지 않던 봄 아지랑이 냄새가 코끝을 스쳐간다. 할머니의 수줍은 옅은 微笑를 따라. 來年 봄, 제비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둥지를 틀까.

김수현 newsoo@donga.com·이소연 記者
#50年 #故鄕 #마지막 달동네 #白蛇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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