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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放浪이여…베스트셀러 作家였던 ‘이방인’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안녕 放浪이여…베스트셀러 作家였던 ‘이방인’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1日 14時 00分


코멘트

[20話]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동아일보DB
作家로 活動하던 時節의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 東亞日報DB


“내가 생각하는 政治는 이런 거야. 우리社會 構成員들 저마다의 꿈과 自由의 한部分씩을 抵當 잡아 생긴 큰 힘으로 뭔가를 해내서, 그래서 結果的으로는, 사람들에게 抵當 잡았던 것보다 더 큰 꿈과 自由를 되돌려주는 일이야.“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以下 金한길)李 1981年에 쓴 短篇小說 ‘세네카의 죽음’에는 男子 主人公이 이같이 말하는 內容이 나온다. 作家로서 이름을 날리던 김한길이 政治에 뛰어들게 된 理由가 담겨 있다.

김한길은 學窓 時節 模範生도 아니었고 旣成 政治人의 視角에서도 ‘異端兒’였다. ‘모든 試驗問題에는 模範答案만 있을 뿐 正答은 없다’고 생각하고, ‘弄談이나 하면서 實속 없이 살자’고 생각했던 閑良이고 ‘아무것도 覺悟하지 않고 딱 一 年만 살아보고 싶다’던 靑年이었다. 삶을 사랑하고 離別할 줄 알며, 아파할 줄 알고, 成長痛을 겪으며 靑春을 보냈다.

그는 한때 젊은이의 偶像이었고 女性 팬이 많았다. 本人 스스로 어느 女性雜誌에서 當時 大統領이었던 김영삼 前 大統領(YS)을 제치고 ‘인기남 1順位’였다고 傳한 적이 있다. 實際 그는 當代 最高 女俳優였던 탤런트 崔鳴吉 氏와 1995年 結婚해 한길이 명길이 ‘길길이’ 夫婦가 됐다.

作家로서 이름을 날렸고, 放送人으로도 活動하다 政治權에 進出했다. 民主黨에서 4選 議員과 민주당 代表를, 김대중 政府에서 文化部 長官과 大統領政策企劃首席祕書官을 지냈다. 中途改革 性向으로 脫黨과 中道政黨 創黨을 反復했던 그는 尹錫悅 大統領의 멘토 役割을 하며 長官級인 國民統合委員長을 맡고 있다.

● 政治인 아들로 日本에서 태어난 金… 永遠한 異邦人
동아일보DB
東亞日報DB

김한길은 김철 全 社會민주당 委員長의 3男 中 2男으로 1953年 日本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留學 中 그가 태어난 것이었고 일곱 살 때까지 日本에서 컸다. 그 時節부터 그는 異邦人이었다.

“우리는 勿論 間或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나를 어김없이 ‘조센징’이라고 놀렸다. 日本 사람들의 어느 名節날, 때때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를 끈으로 묶어 앉혀놓고 自己들이 지어낸 노래를 불렀다. 兆五世엔징…兆五世엔징…그러면서 한 녀석씩 내게 다가와서 나를 쥐어박았다. 조센징에게는 그러는 것이 너무나 當然하다는 듯이. 그 얼마 뒤부터 나는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우리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조센징들의 나라에서 初等學校에 다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다시 始作해보려고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주 착한 아이인 체하였다. 새로 사귄 親舊들이 나를 ‘쪽발이’라고 놀려대기 前까지는. (中略) 나는 나를 조센징이라고 놀려대던, 只今은 四十 代가 돼 있을 어린 날의 옛 親舊들을 진작부터 容恕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그 옛 親舊들을 容恕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내가 더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잊자 한들 잊혀질 일은 決코 아니었다.”
- 1995年 8月 16日 者 東亞日報 칼럼 ‘김한길의 世上읽기 <日本의 옛 親舊에게>’ 中에 -

韓國의 代表的인 社會民主主義 系列 政治人이었던 아버지는 家庭에 疏忽했다. 外國을 오갔고 1971年엔 社會黨 候補로 大選에 出馬하기도 했고, 朴正熙 政府에서 彈壓을 받았다. 1975年 緊急措置 違反으로 懲役 2年의 實刑을 宣告받고 服役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進步政黨 履歷으로 因해 公安當局의 監視를 받은 적도 있었고 大學生일 때 쓴 글이 問題가 돼서 機關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時代의 反抗兒로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누군가를 미워했던 양으로 친다면, 가장 많이 미워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늘 民主化와 統一과 民族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當身이 거느린 食率들에게는 限없이 無力했던 分. 世上에서는 壅固執, 反骨로 불리면서도 정작 當身 둘째 아들의 反抗에는 束手無策이었던 분. 統一이고 民主化고 개뿔이고 間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神經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가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
- 1994年 7月 5日 者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寄稿文 -
20代의 김한길은 “무슨 꿈 같은 것도, 希望 같은 것도, 野望도 欲心도 없었다. 그런 알량한 낱말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조차 許諾되지 않는 狀況이었다. 何如間 그랬다”고 썼다. 合格한 大學을 때려치우고 구두닦이를 하기도 했다.

건국대 國文科에 入學했다가 除隊한 뒤 政治外交學科로 轉科해 卒業한 뒤 서울 中央女高에서 暫時 敎鞭을 잡기도 했다. 1978年 김한길이 軍에 入隊하고 나서 처음 넉 달 동안에 쓴 ‘兵丁日記’는 月刊 ‘문학사상’에 실려 話題가 됐지만 中央情報部와 保安司는 이 글이 완간되는 것을 許諾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한길이 美國行을 擇한 것도 그런 理由였다. 獨裁政權下의 故國은 憂鬱했고 未來는 보이지 않아 不安하게 했다.

“내가 쓴 어떤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理由로 내가 某 機關의 地下室에 끌려가서 惹端을 맞고 나온 뒤로는, 周圍 사람들이 더욱 積極的으로 내게 勸했다. 一旦은 海外에 나가서 觀望해보는 게 좋을 거라고.”
- 金한길 隨筆集 ‘눈뜨면 없어라’ 中 -


● 美國 건너간 뒤 注油所, 햄버거 가게 等에서 일하다 5年 만에 言論社 支社長

1981年 6月 美國 로스앤젤레스(LA)에 到着한 그는 木手 補助, 注油所 計算員, 햄버거 가게 料理師補助 等으로 일하기도 했다. 黑人들이 많이 살아 ‘흑석동’으로 불린, 紅燈街에 있는 注油所에서 防彈琉璃 안쪽에서 카운터를 맡았다. 밥벌이를 하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지만 勞動과 生活의 무게는 그를 짓눌렀다. 睡眠 不足과 지나친 吸煙으로 인한 頭痛에 시달렸다.

“나는 注油所 主人인 崔 氏를 미워한다. 崔 氏는 每日 아침 交代 時間보다 三四十 分씩 늦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單 한 番도 未安하다고 말하지 않는 그를 나는 眞짜로 미워한다. 나를 三四十 分씩 덤으로 더 부려 먹는 것이 自身의 純利益이라고 생각하는 崔 氏의 그 낯간지러운 꾀를 미워한다. 또 崔 氏는 내게 單 한 番도 補修를 제날짜에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를 더 미워한다. 며칠을 참다가 내가 마지못해 말을 꺼내면 그제야 잔뜩 목에 힘을 주며 돈을 던져주는 崔 氏를 나는 속으로 미워한다. 일한 만큼의 正當한 報酬를 받는 나를 괜스레 초라해지게 만드는 崔 氏를 나는 無知無知 미워한다. - 金한길 隨筆集 ‘눈뜨면 없어라’ 中 -


“完全히 美國 사람이 되지는 말라는 너희들의 忠告는 엉터리다. 생각해보렴. 내가 어디 女湯에 뛰어든다고 갑자기 女子가 되겠니, 이 바보들아. 우리는 어떤 ‘人種’이나 한 ‘世代’에 對해서가 아니라 ‘사람’ 그 自體에 對한 理解를 키워가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길만이 世上에 對한 우리의 숱한 疑問과 混沌을 조금씩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거야.”
- 金한길 隨筆集 ‘눈뜨면 없어라’ 中 弟子들에게 보낸 便紙 -

이듬해 3月 以後 그는 美洲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支社에 記者로 就職했고 中央日報 美洲支社長까지 지냈다. 美國에 온 지 5年 만에 이룬 成功이었다. 그는 美洲한국일보 記者로 일하면서부터 억척으로 일했고 남에게 지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충성스럽게 일하고 뛰며, 己巳며 칼럼을 써제꼈다.

1987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강원용 牧師가 組織委員會 文化藝術行事推進委員長을 맡으면서 業務를 도와달라고 해 韓國으로 돌아와 委員會에서 일을 始作했다. 이듬해 姜 牧師가 放送委員長을 맡으면서 放送위 企劃局長으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고 글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1981年에 小說 ‘바람과 剝製’가 문학사상에서 小說 部門 新人賞을 受賞했고 ‘兵營日記’, ‘美國日氣’ 等 에세이와 ‘女子의 男子’, ‘駱駝는 따로 울지 않는다’ 等 小說을 써 베스트셀러 作家가 됐다.
1992年 3卷짜리 長篇小說 ‘女子의 男子’는 400萬 部가 넘게 팔렸고 1993年 MBC에서 같은 이름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放送局에서 構成 作家로 일하고 있는 男子 主人公과 大統領의 외동딸인 女子 主人公의 러브스토리로 드라마에선 정보석 김혜수 氏가 主演을 맡았다.


김한길은 1988年 發表된 歌手 조영남의 ‘화개場터’를 作詞했다. 2015年 1月 그가 直接 했던 이야기다.

“내가 화개場터가 있다는 걸 조그마한 記事를 보고, 嶺湖南 사람이 어울리는…그래서 作詞하자고 했는데 조영남 氏가 健全歌謠라 팔리지도 않는다며 反對했다. 그런데 조 氏가 레코드 만드는 데 노래가 몇 個 없어서 화개場터도 넣은 거야. 그게 曺 氏 노래 中 톱10에 들어간 唯一한 노래가 된 거야. 그게 26年 前인데 著作權法이 없었다고 조 氏가 얘기하더라고. 어쨌든 그때 美國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嶺湖南 問題가 오래갈 거 같은데 講演하고 冊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래서 가요 만들자고 한 것이다…국민들 마음속에 嶺湖南이 和合해서 같이 살면 좋겠다…그런 마음을 담아서 우리나라 全體가 하나의 화개場터가 됐으면 좋겠다고 作詞를 했다.”
- 取材 메모 中 -


● 作家·放送人 等으로 全國的 人氣 누린 金
방송 진행 당시 김한길 위원장. 동아일보DB
放送 進行 當時 金한길 委員長. 東亞日報DB
小說 外에도 위트와 諷刺, 寸鐵殺人 等이 담긴 칼럼을 썼고 라디오와 TV 放送에서 토크쇼를 進行했다. 이 過程에서 배우자 崔鳴吉 氏를 만났다. 두 番째 結婚이었다.

MBC 라디오의 進行者로 平素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1994年 MBC 放送大賞 라디오 部門 受賞者로 나란히 選定돼 各種 行事에 參席하면서 자주 만난 것이 서로에 對한 好感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契機가 됐다고 한다. 대뜸 1995年 1月 그가 “나에게 시집오면 어떻겠느냐”고 電話로 請婚을 했고 崔 氏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무렵부터 本格的인 政治活動을 하고 있었다. 自身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마지막에 和解한 것도 影響을 미친 것 같다.

“나는 이 땅에서는 可望이 없다는 周圍 사람들의 말을 좇아 美國으로 도망갔는데 아우의 便紙가 나를 못살게 굴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내가 當身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아. 偉人傳을 읽을 때처럼 距離感이 느껴지는 거야. 너무나 성실하게 自己 갈 길을 가는 한 巨人을, 決코 挫折할 줄 모르는 한 英雄을 아버지에게서 보는 거야.’ 文民政府가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셨다. 나는 이제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의 열 倍쯤 내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 1994年 7月 5日 者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寄稿文 -

1996年 15代 總選을 앞두고 김영삼 前 大統領과 김대중 前 大統領 等 與野 兩쪽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韓國 社會의 地域主義와 地域 葛藤이 第一 큰 걸림돌이라고 봤던 그는 文化的으로 차별당하는 쪽에 힘을 보태는 게 맞다는 생각에 野黨을 擇했다. 새정치국민회의에 入黨해 比例代表 議員으로서 本格的인 政治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자주 言及했던 單語 中 하나는 希望이었다. 그가 政治를 하게 된 理由는 여기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政治는) 차라리 散文 쪽에 가깝다. 우리들 自身과, 우리가 모여 사는 社會의 크고 작은 實體와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일이 政治의 始作이니까 그렇다. 우리의 現實을 고스란히 담은 거울 속의 風景은 種種 荒凉하고 을씨년스럽다. ‘動物의 王國’에서처럼 野卑하고 殘忍하고 冷酷하다. 그 속에서나마 끝까지 抛棄하지 않고 버티면서 希望을 探索하는 職業이 政治가 아닐까 싶다.”
- 著書 ‘김한길의 希望日記’ -



어느 날 9살 된 아들이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慶尙道와 全羅道를 가로지르는 / 蟾津江 줄기 따라 화개 場터엔 / 아랫마을 河東 사람 윗마을 求禮 사람 / 닷새마다 어우러져 場을 펼치네~” 그래서 저도 따라 부르다가 “아빠가 잘 아는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作詞했단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조영남 氏의 ‘화개場터’를 어린이가 아는 것도 神奇했습니다. 그 무렵 김한길 國民統合委員長의 이야기를 한 番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國民統合委員長 자리를 맡았을 때 참 적합한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異邦人 經驗이 많았고 地域主義와 系派主義의 問題를 直視했고 늘 統合과 葛藤 解消, 希望을 이야기했습니다. (勿論 그의 對蹠點에 있던 政治人들은 ‘政黨 브레이커’라거나 葛藤을 만드는 人物이라고 批判했습니다.)

“人間化時代라는 것은 窮極的으로 追求해야 하는 時代的 價値이자 時代精神입니다. 所謂 우리가 겪은 産業化 民主化 時代 다음에 어떤 時代를 우리가 志向해야 하는가. 産業化 時代가 最小限의 物質을 追求하고 民主化 時代가 民主的 制度를 갖춰가는 時期였다면 이제 物質과 制度가 사람을 위해서 쓰이는 時代가 되어야 된다는 것. 그런 意識은 相當 期間 夙成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國民이 그런 認識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希望을 살려 나가는 게 우리 政治를 살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의 글에선 휴머니즘이 묻어납니다. 短文을 驅使하며 위트와 유머가 담겼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피츠제럴드의 ‘偉大한 개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番 20禍에서 冊에 나오는 그의 아픈 個人事는 일부러 擧論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金 委員長이 繼續 作品 活動을 했다면? ‘政治人 金한길’로 살았을 때보다 우리 社會에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 <21話>에선 그의 政治活動을 中心으로 다뤄보겠습니다.

황형준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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