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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個 番에서 한 國家로… 日 國家主義의 强化[박훈 韓國人이 본 日本史]|東亞日報

270個 番에서 한 國家로… 日 國家主義의 强化[박훈 韓國人이 본 日本史]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0月 12日 23時 3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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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年 勃發한 中日戰爭을 起點으로 日本社會는 國家主義로 치달았다. 낮에는 反美示威에 參與하고 밤에는 이불 속에서 재즈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全般的으로 日本 國民들은 ‘國家’를 自己 이에(家)나 무라(村)와 같은 共同體로 내면화하기 始作했다. 韓國 ‘國家主義’의 頂點이었을 維新 時代에 靑少年期를 보낸 나도 國家主義라는 것과 대면했지만, 그건 어딘가 엉성한 것이었다.》

國家와 天皇과 나를 同一視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박훈 서울대 歷史學部 敎授
午後 6時였던가, 國旗下降式의 愛國歌가 울려 퍼지면 길을 걷다가도 모두들 멈춰서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내 記憶 속의 그 場面은 嚴肅하다기보다는 살짝 코믹한 것이었다. 愛國歌가 채 끝나기도 前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表情은, ‘이 勞務 거, 언제까지 해야 하나’, 뭐 그런 쪽이었다. 나는 TV 속 太極旗 앞의 謹嚴한 사람들보다, 어쩐지 이들이 더 미더웠다. 國際通貨基金(IMF) 事態 때 金 모으기에 參與했던 사람들은 大部分 이때 ‘에이 氏∼’ 하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던 그분들이었을 것이다.

國家主義를 對하는 日本人들의 態度는 이보다는 훨씬 眞摯했다. 코믹한 雰圍氣도 삐딱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眞摯함이 지나치다 보니 國家와 天皇과 나를 同一視하며, 무슨 邪敎集團처럼 가미카제(神風) 自殺特攻隊까지 만들어 버렸다. 韓國의 維新政權도, 타이완의 戒嚴政權도, 中國의 共産政權度, 甚至於는 北韓의 金氏 政權도 이르지 못한 境地다.(아마도 北韓은 戰爭 前 日本 國家主義와 가장 비슷한 體制일 것이다. 그래서 學界에는 北韓 體制를 戰爭 前 日本 天皇制의 遺産으로 보는 視角도 있다.)

朝鮮時代 ‘百姓’이 ‘國家’에 對해 갖는 感覺은 그 種類도 强度도 오늘날의 ‘國民’과는 퍽 달랐을 것이다. 近代의 發明品인 國民國家(nation state)는 ‘百姓’에게 國家라는 存在를 주입시키려는 試圖를 줄기차게 해왔고, 그 結果 ‘國民(nation)’이 形成되었음은 이제 常識에 屬하는 일이다. 그 方法은 國旗, 國家, 國慶日의 制定, 義務敎育, 徵兵制 等 비슷했지만, 그 過程은 나라마다 다양했다. 日本은 메이지維新(1868年) 直後인 1870年代에는 就學率이 25∼50%에 머물렀지만, 1890年代에는 90%를 넘어섰고, 러일戰爭 무렵인 1905年에는 男兒의 98%, 女兒의 93%가 就學했다. 어떻게 이토록 短期間 內에 國家가 人民 속에 浸透할 수 있었던 것일까.

“番은 愛國心의 師範學校”

천황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불만을 표하는 내용을 담아 몰래 미토번(水戶藩)에 보낸 무오밀칙. 이 일로 막부와 천황 사이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사진 출처 히코네성 박물관 홈페이지
天皇이 美國과 修好條約을 締結한 幕府에 不滿을 표하는 內容을 담아 몰래 미토番(水戶藩)에 보낸 戊午密勅. 이 일로 幕府와 天皇 사이 感情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寫眞 出處 히코네성 博物館 홈페이지
이에 對해 메이지 時代 有名 저널리스트 야마地 아이盞(山路愛山)은 “日本 國民은 愛國心의 師範學校로서 番(藩)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야마지 아이盞 ‘日漢文明異同論’). 도쿠가와 時代는 最大 領主인 도쿠가와 幕府와 約 270個 內外의 番(封建國家)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番들은 大部分 한 家門(다이묘·大名)李 世襲하면서 統治했고, 그 밑에는 가신단과 英敏(領民)이 있었다. 가신단의 첫 番째 忠誠 對象은 幕府가 아니라 自己 番과 다이묘였다. 그들은 自己 番을 ‘拘泥(國)’라고 불렀다. 도쿠가와 時代 後期로 갈수록 番 當局은 番組(藩祖·番을 세운 다이묘) 顯彰 事業이나 다이묘의 地域 順行을 頻繁히 施行함으로써 英敏들 사이에서 番의 存在感을 擴散시켜 갔다. 이를 學界에서는 ‘番國家化(藩國家化)’ 現象이라고 한다. 番이라는 것이 規模가 큰 것이라도 우리 京畿道만 한 面積에 人口 70萬 程度였으니, ‘番國家’의 浸透도 相對的으로 容易했을 것이다. 이런 狀況에서 朝鮮의 地方 百姓보다 日本 어느 한 番의 百姓이 ‘番國家’에 對해 느끼는 密度(密度)는 더 높았을 것이다.

1853年 페리 出現 以後 도쿠가와 體制가 크게 動搖하고 番을 뛰어넘어 ‘日本’ 全體의 防衛 必要性이 切迫해지자, ‘番國家’ 意識 亦是 岐路에 處하게 된다. 强大한 西洋 勢力과 맞서려면 番移 따로따로 行動해서는 안 되었다. 全國의 番을 强固하게 結合할 새로운 求心點이 切實해지자 天皇을 推仰하는 존王思想(尊王思想)李 擴散되었다. ‘番國家(다이묘)’에서 日本(天皇)으로 忠誠의 對象은 轉換되기 始作했다.(박훈 外 ‘近代 日本人의 國家主義’)

番에서 國家로, 擴張된 國家意識

조슈번 소속으로 존왕양이, 막부타도를 외치다 29세에 막부에 의해 처형당한 요시다 쇼인. 조선 침략 등 해외 팽창을 적극 주장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슈번 所屬으로 尊王攘夷, 幕府打倒를 외치다 29歲에 幕府에 依해 처형당한 요시다 쇼인. 朝鮮 侵略 等 海外 膨脹을 積極 主張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하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그러나 그 轉換은 그렇게 容易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相對가 天皇이라 하더라도 數百 年을 섬겨온 主君(다이묘)에 對한 忠誠을 撤回하는 것은 사무라이로서 하기 힘든 背信 行爲였다. 이 時期 ‘유신知事’들은 主君과 天皇 사이에서 自己 分裂을 겪으며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苦惱에 찬 決斷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尊王攘夷 思想의 主唱者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나는 모리가(毛利家·조슈번의 다이묘)의 神하다. 따라서 晝夜로 모리가에 奉仕하기 위해 硏磨한다”(吉田松陰全集 8卷)고 했고, 天皇이 미토番(水戶藩)에 내린 密勅(戊午密勅·戊午密勅)을 둘러싸고 다이묘의 命令을 拒否했던 다카하시 다이値로(高橋多一郞)는 스스로를 ‘罪臣(罪臣)’이라고 自稱했다. 사쓰마번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도 番 當局과 不和瑕疵 “事情(私情)으로는 累代에 걸친 臣下이니, 感情上 가만히 있기 어렵고 度外視할 수가 없다”(大久保利通文書 3卷)며 苦心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司正(私情)을 억누르고 番을 廢止하여 天皇直轄體制를 만들어 버렸다(폐번치현·廢藩置縣·1871년). 다이묘를 앞장세워 幕府를 打倒하고 메이지維新을 일으킨 지 3年 半 만이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이 발표되는 가운데 천막으로 얼굴이 가려진 천황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다이묘들을 그린 삽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71年 폐번치현(廢藩置縣)李 發表되는 가운데 天幕으로 얼굴이 가려진 天皇을 向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다이묘들을 그린 揷畵.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메이지天皇은 다이묘들을 불러모아 폐번치현을 宣言했다. 폐번치현을 主導하고 그 現場에 立會해 있던 조슈번 사무라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기뻐 날뛰는 代身 울었다. “(조슈번 다이묘께서는) 50, 60名의 다이묘들과 나란히 엎드려 듣고 계셨다. 害惡(海嶽)도 미치지 못할 높은 恩惠를 내게 주신 主君이시다. 感情이 가슴에 차올라 눈물이 줄줄 흐르는지도 몰랐다.”(木戶孝允일기 2卷)

왕정복고 후 벌어진 무신전쟁 당시 조슈번의 사무라이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王政復古 後 벌어진 무신戰爭 當時 조슈번의 사무라이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苦惱와 煩悶이 있었지만 ‘작은 國家’(번)에서 이미 익숙해 있던 國家意識을 ‘큰 國家’(日本)에서 사이즈 業(size up)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特히 ‘拘泥(國)’에 强한 一切儀式을 갖고 있던 사무라이 出身들은 새로운 國家에 對한 忠誠에 쉽게 適應해 갔다. 그리고 ‘百姓’에게 國家意識을 注入하여 ‘國民’으로 만드는 데에도 熱誠的이었다. 이렇게 보면 日本 國家主義의 뿌리는 유별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軍部도 없는 나라를 ‘軍國主義’라고 批判하는 것도 난센스겠지만, 日本의 리버럴한 側面만을 强調하는 것도 日本 理解로서는 애꾸눈이라 할 것이다.



박훈 서울대 歷史學部 敎授
#日 #國家主義 #强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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