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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手足’ 넘어 ‘切親’된 요시다… 戰後 日本 회생시켜[박훈 韓國人이 본 20世紀 日本史]|東亞日報

맥아더 ‘手足’ 넘어 ‘切親’된 요시다… 戰後 日本 회생시켜[박훈 韓國人이 본 20世紀 日本史]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2月 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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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애호가였던 요시다 시게루(왼쪽)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市價 愛好家였던 요시다 시게루(왼쪽)의 모습.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1951年 샌프란시스코에서 日本은 美國과 安全保障條約을 맺었다. 現在 猛威를 떨치고 있는 美日同盟, 바로 그 條約이다. 不過 6年 前까지 死生決斷으로 太平洋 全域에서 싸웠던 두 나라, 勝戰國이 敗戰國을 占領하여 支配下에 둔 關係였던 두 나라가 갑자기 軍事同盟이 된 것이다. 蘇聯이 膨脹하고 中國이 共産化되고, 무엇보다 美國이 日本을 占領한 동안에 勃發한 韓國戰爭으로 日本의 戰略的 價値가 急激히 上昇했기 때문이었다. 》

經濟 開發 올인… ‘요시다 독트린’

얼마 前 日本 政府는 防衛豫算을 國內總生産(GDP)의 2%로 늘리고, 相對方의 攻擊을 斷念시키는 ‘反擊 能力 確保’를 宣言해 日本 右派의 오랜 宿願이었던 自衛隊 ‘國軍火’에 코앞까지 다가섰다. 이렇게 하는 구실 中 하나가 北韓의 安保 威脅이니, 그때나 只今이나 北韓은 日本 右派에는 天佑神助(天佑神助) 같은 存在다.

美軍政의 日本 側 파트너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였다. 美軍 占領下에서 日本 內閣의 總理를 5番이나 歷任했는데, 이는 只今까지도 깨지지 않은 記錄이다. 이 期間 동안 그는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는 國家 路線을 確立하여 戰後 日本을 회생시켰다. 外交는 徹底히 親西方 路線을 取하고, 國防은 美國에 맡겨 軍事力을 갖지 않으며, 日本은 오로지 經濟發展에만 邁進하는 方針이었다. 國際情勢의 變化로 오히려 美國이 日本 再武裝을 主張했으나, 요시다는 이에 抵抗하여 ‘非武裝-經濟開發’ 路線을 貫徹했다.

요시다는 메이지 政府에 激烈하게 抵抗했던 自由民權運動의 메카, 道士(土佐) 出身의 家門에서 태어났다. 中國 펑톈 總領事, 이탈리아와 英國 大使 等을 歷任해 國際 情勢에 아주 밝았고, 軍部의 三國同盟론(獨逸, 이탈리아와 同盟을 맺어 美國, 英國에 對抗하자는 路線)에 批判的이었다. 軍部의 存在感이 커져갈수록 그의 立地가 좁아진 것은 當然한 일이었다. 度祖 히데키(東條英機)의 軍部政權下에서 그는 ‘在野 人士’였다. 敗戰 直前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의 上奏文 事件에 加擔한 嫌疑로 憲兵에 逮捕됐지만, 40餘 日 後 釋放되었다. 아무리 軍事獨裁 政權이라 하더라도 前職 大使에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메이지維新을 일으킨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로 內大臣 지냄)의 사위인 그를 더 以上 彈壓하기는 어려웠던 模樣이다. 憲兵에 逮捕된 事實은 一種의 ‘별을 단’ 셈이 되어, 美軍政下에서 政治的 訓長이 되었다.

5回 歷任, 歷代 最多 執權 總理


1946年 5月 요시다는 內閣總理大臣, 卽 總理가 되었다. 아직 새로운 憲法이 만들어지기 前이었기에, 大日本帝國 憲法에 따라 天皇이 彫刻의 ‘대명(大命)’을 그에게 내렸다. 말하자면 그는 舊 憲法에 따른 最後의 總理였다. 外交官 經歷만 있고 國會議員을 한 적도 없는 그에게 總理 자리는 ‘굴러들어 온 福’이었다. 元來 總理는 그의 오랜 親舊이자 當時 日本自由黨 總裁였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가 豫約해 놓은 자리였다. 1946年 敗戰 後 最初의 總選擧에서 自由黨이 第1黨이 되었다. 4月 30日, 前例에 따라 當時 總理 시데하라 基主로(幣原喜重?)는 天皇을 만나 하토야마를 後繼 總理로 奏請했다. 그런데 며칠 뒤인 5月 4日 占領軍 總司令部는 軍國主義에 協力했다며 그를 公職에서 쫓아내 버렸다.

요시다 시게루에게 총리 자리를 내줬던 하토야마 이치로 당시 일본자유당 총재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2015년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일제 만행에 대해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요시다 시게루에게 總理 자리를 내줬던 하토야마 이치로 當時 日本自由黨 總裁의 孫子, 하토야마 유키오 前 總理가 2015年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日帝 蠻行에 對해 무릎 꿇고 謝過하는 모습. 東亞日報DB
右往左往하던 自由黨 指導者들은 結局 政治的으로 無色無臭하며 權力 欲心이 없어 보이는 요시다에게 總理職 受諾을 壓迫했다. 한동안 버티던(버티는 척하던?) 그는 結局 세 가지 條件을 하토야마에게 내걸고 마지 못한 듯 받아들였다. 첫째, 政治資金 造成은 못 한다. 둘째, 閣僚 人選은 干涉하지 말라. 셋째가 可觀인데, 그만두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그만두겠다였다. 그만두기는커녕 하토야마가 그만두라고 壓迫해도 그는 그 後로 8年 동안 5次例나 總理職을 탐냈고, 政界 隱退할 때까지 未練을 버리지 못했다. 旣視感이 있지 않은가. ‘이민우 波動’말이다. 1980年代 政治規制로 公式的인 政治活動을 벌일 수 없었던 김영삼은 오랜 政治的 同志 李珉雨에게 신한민주당의 總裁職을 맡겼다. 自己 代身 當分間 해달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重厚한 性品으로 김영삼에게 충성스러웠던 그도 結局 內閣制 改憲 受容을 示唆하는 듯한 이른바 ‘이민우 構想’으로 김영삼과 갈라섰다. 權力의 맛은 正말 强烈한 模樣이다. 參考로 요시다에게 뒤통수 맞은 하토야마는 切齒腐心 끝에 1954年 벌써 되었어야 할 總理에 就任하여 2年間 在任했다. 最近 西大門刑務所 歷史觀에서 무릎 꿇고 “謝過는 被害者가 容恕할 때까지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는 發言으로 韓國 言論의 注目을 받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前 總理가 그의 孫子다.

도와주며 實利 챙긴 ‘맥아더 切親’


미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왼쪽)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전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 요시다는 일각에서 ‘미국의 푸들’이라 
불린 아베 신조 전 총리보다도 더 미국에 협조적이었으며 ‘훌륭한 패자’가 될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美 占領軍 司令官인 맥아더 將軍(왼쪽)과 多情하게 팔짱을 낀 前 日本 總理 요시다 시게루. 요시다는 一角에서 ‘美國의 푸들’이라 불린 아베 新潮 前 總理보다도 더 美國에 協調的이었으며 ‘훌륭한 敗者’가 될 것을 躊躇하지 않았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요시다 시게루는 占領軍 司令官 맥아더에게 徹頭徹尾 協調的이었다. 맥아더가 國內의 軍國主義 勢力을 뿌리 뽑고 左派 勢力을 牽制할 때 기꺼이 그의 手足이 되어 주었다. 얼마 前 作故한 아베 신조 總理가 美國에 順從的이라고 하여 ‘美國의 푸들’이라는 批判을 들었지만, 요시다야말로 最初의 푸들이라고 할 수 있을 程度였다. 하지만 그는 “戰爭엔 졌지만 外交엔 이긴다”며 ‘훌륭한 敗者’가 될 것을 躊躇하지 않았다. 맥아더와는 ‘切親’이 되었다. 한番은 요시다가 餓死者 發生을 憂慮하며 맥아더에게 450萬 t의 食糧 支援을 要請했다. 結局 70萬 t만 들어왔지만, 餓死者는 없었다. 이에 맥아더가 70萬 t으로도 거뜬하지 않았냐, 日本 政府 統計는 엉성하다고 놀리자, 요시다는 “當然하죠. 萬一 日本의 統計가 正確했다면 그런 뚱딴지같은 戰爭은 하지 않았겠죠. 統計대로였다면 日本이 이겼어요”라고 되받아 맥아더의 爆笑를 자아냈다고 한다.

요시다와 흔히 比較되는 人物이 李承晩이다. 둘 다 아시아의 共産化를 憂慮한 反共 政治家였고, 美國을 最優先으로 하는 外交 路線을 醉했다. 그러나 李承晩이 占領軍 司令官 하지는 勿論이고 美國 政府까지 심심치 않게 들이받은 데 비하면, 요시다는 始終 溫和한 態度로 美國을 對했다. 아무래도 李承晩에게 ‘푸들’의 이미지는 없다. 2年의 時差를 두고 美日同盟, 韓美同盟이 締結되었는데, 美日同盟이 요시다와 맥아더, 나아가 美國 政府 間에 形成된 信賴感으로 成事되었다면, 韓美同盟은 李承晩의 北進統一 脅迫 等 훨씬 險한 過程을 통해 이뤄졌다. 韓國戰爭이라는 阿修羅場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李承晩에 比하면, 요시다는 그가 좋아하는 詩가(cigar)를 즐길 餘裕가 훨씬 많았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요시다 시게루 #歷代 最多 執權 總理 #맥아더 切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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