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敗戰 아픔도 暫時, ‘맥아더 改革’ 熱狂한 日 民衆[박훈 韓國人이 본 20世紀 日本史]|東亞日報

敗戰 아픔도 暫時, ‘맥아더 改革’ 熱狂한 日 民衆[박훈 韓國人이 본 20世紀 日本史]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月 6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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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해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총사령부 총사령관(오른쪽 사진 왼쪽)을 만나 포즈를 취한 히로히토 천황. 편안한 자세의 
맥아더와 긴장한 듯한 천황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동아일보DB
1945年 9月 2日 日本 外務大臣 시게미쓰 마모루가 도쿄만에 碇泊한 미주리함에서 降伏文書에 署名하고 있다(왼쪽 寫眞). 같은 해 9月 27日 더글러스 맥아더 聯合軍總司令部 總司令官(오른쪽 寫眞 왼쪽)을 만나 포즈를 取한 히로히토 天皇. 便安한 姿勢의 맥아더와 緊張한 듯한 天皇의 모습이 對比를 이룬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동아일보DB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1945年 8月 15日 正午, 史上 처음으로 日本 天皇의 라디오 放送이 始作되었다. ‘玉구슬 같은 목소리(玉音放送)’는 아니었다. 聯合國이 提示한 無條件 降伏(포츠담 宣言)을 받아들인다는 內容이다. 히로히토 天皇은 敵軍이 “새롭게 殘虐한 爆彈을 使用하여 자꾸 無辜한 百姓을 殺傷하고 있으니, 慘禍가 어디에 미칠지 實로 알 수 없는 地境에 이르렀다”고 悲壯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前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原子爆彈으로 數十萬 名이 卽死했으니 ‘殘虐한 爆彈’인 것은 맞지만 히로히토,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歷史上 最初 外國軍 日 本土 占領

히로히토는 “앞으로 帝國이 맞게 될 苦難은 分明 深刻할 것”이라며 “激情에 사로잡혀 함부로 일을 일으키거나 同胞끼리 排斥하고 時局을 어지럽혀 大道를 그르치고 世界에 對하여 信義를 잃을 것”을 警告했다(유인선 外 ‘史料로 보는 아시아社’ 中 日本近現代 便). 내가 ‘決斷’을 내려 戰爭을 끝냈으니 앞으로도 내 말을 잘 따르라는 말套다.

그러나 그런 虛勢와는 달리 히로히토와 天皇制의 運命은 風前燈火와 같았다. 히틀러도 무솔리니度 이미 이승에 없었으니, 히로히토度 그리 되지 말라는 保障이 없었다. 1500年 繼續돼 온 天皇制 自體가 廢止되든가, 天皇制는 維持하되 히로히토를 處罰 或은 處刑하든가, 아니면 最小限 히로히토 退位가 豫想되는 狀況이었다. 그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占領軍 司令官 맥아더였다.

日本은 남들은 다 받는 외침을 거의 받지 않은 稀罕한 歷史를 가진 나라다. 맥아더 軍隊가 들어오기 前까지 日本 땅에 발을 들여놓은 外國軍은 13世紀 몽골軍이 唯一했다(해적 侵入이나 작은 變更紛爭 除外). 高麗·宋나라 兵士와 함께였다. 周知하다시피 이들은 규슈 北部에서 가마쿠라(鎌倉) 幕府 軍隊와 熾烈한 戰鬪를 벌이다 颱風을 만나 敗退했다. 日本人들이 좋아하는 가미카제(新風·神風)다. 侵略은 받았지만 短期間이었고 그나마 邊境 地域에 局限되었다. 이때 戰爭을 이끌었던 幕府 싯켄(執權) 好調 도키無네(北條時宗)는 19世紀 中盤 以後 페리가 開港을 要求해 危機感이 高調되는 가운데, 救國의 英雄으로 자주 召喚되었다.

歷史上 두 番째, 그리고 700年 만에 經驗하는 外國軍이 맥아더 軍隊였으니 日本人들의 衝擊을 斟酌할 만하다. 外國軍에 점령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戰爭은 끝난 狀態였지만 이番에는 變更이 아니라 首都, 卽 天皇이 있는 곳에 外國軍이 進駐했고, 天皇과 日本의 運命이 그들 손에 있었다.

日本은 無條件 납작 엎드리는 길을 選擇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竹槍 들고 “美國 놈들 때려죽이자”던 國民들은 맥아더를 稱頌하는 數十萬 通의 便紙를 全國 各地에서 보냈다. 한 시골 老人은 “옛날에는 天皇 寫眞을 놓고 아침마다 敬拜했지만 只今은 將軍님 寫眞을 놓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趣旨의 便紙를 보내, 맥아더를 흐뭇하게 했다. 끊이지 않던 ‘知事(志士)’들의 테러도 온데간데없이 사려졌고, 그 ‘勇猛’하다던 ‘皇軍(皇軍)’은 占領軍에게 銃 한 발 쏘지 않았다. 日本 政府와 議會는 維持되었지만, 事實上의 ‘日本 總督’ 맥아더가 그 後 6年間 日本을 左之右之했다. 그것은 韓國痛感 이토 히로부미보다 훨씬 긴 時間이다.

맥아더-天皇, 사뭇 다른 撮影 姿勢


美國은 獨逸을 直接 統治한 데 비해 日本에는 間接 統治를 擇했다. 日本 政府와 議會를 解體시키지 않고, 그들을 통해 占領 政策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美國의 豫想보다 日本이 훨씬 빨리 降伏해서 占領 準備를 미처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5年 9月 27日 히로히토 天皇은 週日 美國大使館으로 맥아더를 豫防했다. 히로히토의 不動姿勢와 맥아더의 건방진(?) 포즈가 對照的이다. 이에 唐慌한 當時 內務大臣 야마자키 이와오는 言論社에 揭載 禁止를 命令했지만, 그 따위 命令이 통하던 時代는 지나갔다. 寫眞에 나타난 天皇의 초라한 모습은 많은 國民들에게 衝擊을 주었다. 이 寫眞이 보여주는 것처럼 둘 사이의 權力 關係는 明白했다.

그러나 맥아더와 美軍政은 決코 건방지지 않았고, 오히려 대단히 신중했다. ‘竹槍 들고 本土決戰!’을 외치던 日本軍은 美軍이 日本에 들어올 때 順한 羊이 되어 있었고, 海外 各地에 흩어져 있던 300萬 名의 軍隊도 抵抗 없이 短期間 內에 스스로 武裝 解除했다. 모두가 天皇의 武裝 解除 命令에 찍소리 안 하고 順應한 것이다. 이 ‘놀라운 힘’을 目睹한 맥아더는 天皇의 活用 可能性을 알아채기 始作했다. 當時 美國 갤럽 輿論調査에서 美 國民 70% 以上이 어떤 式으로든 天皇의 處刑·處罰을 願했고, 中國·필리핀 等 아시아 國民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맥아더는 天皇을 通해 日本을 다스리는 便한 길을 擇했다. 結局 天皇-政府-議會는 그대로 維持되었고, 그 안의 사람들만 軍部 獨裁에 反對하던 이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筆者는 美國의 日本 占領이 日本 支配層에서 軍部만 도려낸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的인 性格이 多分히 있다고 생각한다. 日本이, 그리고 旣存의 日本 支配層이 前後 그토록 迅速하게 回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日 進步 熱望 改革 이룬 美軍政

1946년 일본 이치카와에서 열린 극동연합군 군사재판소 대법정 피고인석에 출석한 일본인 전범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1946年 日本 理致카와에서 열린 極東聯合軍 軍事裁判所 大法廷 被告人席에 出席한 日本人 戰犯들. 寫眞 出處 위키미디어
美軍政의 政策은 그야말로 그동안 日本의 進步勢力이 熱望하던 것들이었다. 아무리 鬪爭하고 외쳐대도 旣成勢力의 壁 앞에서 어림도 없었던 政策들이 ‘開明的 外勢’에 依해 하루아침에 實現되고 있었다. 맥아더는 日本에 들어오자마자 軍需生産 全面 中止, 陸海軍 解體, 戰犯 逮捕를 斷行했다. 이어서 ‘民主化에 關한 5大 改革指令’을 發表했다. 이로써 勞動 3卷이 歷史上 最初로 保障되었고, 女性도 參政權을 갖게 되었고, 財閥은 解體되었으며, 天皇에 對한 批判도 許容되었다. 이때 財閥이 解體되지 않았다면 소니, 혼다 같은 革新 企業이 登場할 舞臺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重要한 것은 農地 改革이었다. 그 結果, 1941年 無慮 46%에 達하던 小作地는 1950年 9.9%로 激減했다. 이로써 살 만하게 된 農民들은 10餘 年 後 洗濯機·冷藏庫·텔레비전 等의 强力한 消費者가 되어 高度 經濟 成長을 可能하게 했다(나카무라 마사노리 ‘日本戰後社 1945∼2005’). 日本의 事例는 土着 支配 勢力이 아니라 民衆(國民)의 觀點에서 보게 되면 ‘자주’와 ‘外勢’의 問題가 생각만큼 簡單치 않다는 것을 雄辯한다. 흥미롭지만, 아슬아슬한 얘기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日本 民衆 #맥아더 改革 #熱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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